본문 바로가기
4복음서 연구

눅 11:1-4 누가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

by 은총가득 2020. 11. 17.

눅 11:1-4

 

지난 시간에 이어 누가복음 11장 1절에서 4절의 말씀을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주기도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를 마쳤을 때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 말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지체 없이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라고 말씀하신 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기도문의 내용을 알려주었습니다. 익숙하고 짧은 본문이지만 오늘 우리는 크게 세 가지 질문을 여기서 던질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왜 제자 중 하나는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 말하였는가입니다.

둘째는 왜 누가복음이 소개하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이 소개하는 주기도문과 다른가 입니다.

셋째는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 중 가장 먼저 첫번째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왜 제자는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 말하였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문맥을 파악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세 그룹과 함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열 두 제자와 병 고침을 받은 여인들 그리고 소유로 예수님을 섬긴 여자들 입니다. 누가복음 9장은 여행 중 열 두 제자의 보냄을 소개합니다. 보냄을 받은 열 두 제자는 처음엔 성공적인 사역을 하지만 후에는 실패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실패는 누가복음 10장에 소개될 칠 십명의 제자가 보냄 받는 모습으로 연결됩니다. 보냄 받은 칠 십명의 제자는 열 두 제자와 같은 사역을 하고 성공적으로 사역을 진행하였습니다. 계속되는 보냄과 떠남의 흐름은 한 곳으로 흘러갑니다. 그곳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서 예수님은 승천하실 기약이 차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승리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고난과 박해를 넘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홀로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과 소통하며 예루살렘으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때 이 모습을 본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말을 걸었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여기서 말하는 요한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미 여러번 살핀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선지자로 떠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주목했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그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그는 그들을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된 자들은 세례자 요한과 삶을 공유했습니다. 함께 생활하며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금식하며 절제하며 누구보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의 정체성과 방향성은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기도에 잘 나타납니다. 병든 자가 병 낫기를 기도하고, 수험생이 합격을 기도하며,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되길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의 내용이 곧 자신을 설명하며 목표하는 바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 말했다는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나아갈 방향을 알려달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교회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말해달라 요구한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 말했다는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나아갈 방향을 알려달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앞으로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물은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 뒤에는 예수님을 향한 커다란 기대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워지며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보여준 능력과 권능을 통해 로마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는 나라가 생길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대를 뛰어 넘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말씀하시며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2)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양식을 공급하고 죄 지은 사람이 용서되며 자신의 죄도 용서 받고, 시험에 들지 않는 나라가 임하길 기도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래 것을 구하는 기도를 기대하였으나 예수님은 위의 것을 구하는 기도를 알려 주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이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또한 자신과 함께하는 제자들도 아래 것인 이 세상이 아니라 위의 것인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길 원한 것입니다.

이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이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또한 자신과 함께하는 제자들도 아래 것인 이 세상이 아니라 위의 것인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길 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는 흔히 우리가 주기도문이라 말하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이 소개하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이 소개하는 주기도문과 다릅니다. 분명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기록되었는데 왜 두 기도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그 의미를 살피기 전 먼저 두 주기도문의 차이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9-13절에 기록된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수식하는 표현과 함께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아버지여” 라고 짧고 간결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며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기도가 하나님께 하는 것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기 전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의 문제를 지적하였습니다. 때문에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보다 정확하게 그 대상을 밝히려는 시도를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기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후 두 주기도문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길 청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온 세상에 드러나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에스겔 36장을 보면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흩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거하던 땅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렵혀진 이름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을 되찾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구원이 일어나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자가 구원 받을 때 세상 누구와도 다른 하나님의 거룩함에 세상 가운데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두 주기도문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였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마태복음이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구했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은 나라가 임하길 기도한 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하였습니다. 이미 여러번 나눈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통치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때문에 마태복음이 말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 두 이번에도 동일하게 두 주기도문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였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마태는 오늘날을 말하였고, 누가는 날마다를 말하였습니다. ‘오늘날’과 ‘날마다’는 모두 일용할 양식과 연결됩니다. 오늘날 임한 일용할 양식과 날마다 내릴 일용할 양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모두 말씀드릴 수 없으나 마태복음의 일용할 양식은 좀 더 신학적 의미를 띄고 누가복음의 일용할 양식은 현실적인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두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출애굽할 때 광야에 내린 ‘만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의 양식이며, 날마다의 양식이고, 안식일을 앞두고는 다가올 날의 양식이 되는 만나는 주기도문에서 구하는 일용할 양식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6장은 만나를 그림자에 불과하다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양식과 날마다의 양식 그리고 다가올 날의 양식을 뛰어넘는 영원한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는 이 세상의 양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신 자만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한 후 두 주기도문은 모두 죄 지은 자의 용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약간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은 이미 죄를 용서한 상태로 죄의 용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누가복음은 죄를 용서할 것이니 죄를 용서해달라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핀 예수님의 가르침은 죄 사함에 있어 조건이 없었습니다. 은혜로 죄를 용서 받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죄를 용서 받는 이유로 죄 용서를 들고 있습니다. 모순된 내용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는 일만 달란트의 비유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는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빚을 갚으라 말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일만 달란트를 탕감한 주인은 그를 옥졸들에게 넘긴 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교회는 일만 달란트보다 더 큰 죄를 용서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를 깨달은 자는 반드시 다른 이를 용서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이 없는 자는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 합니다. 멱살 부터 잡고 저주와 비난의 말을 쏟아 놓습니다. 이러한 자는 하늘 아버지로부터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첫단추인 은혜를 깨닫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죄 용서에 대한 청원 후 두 주기도문은 모두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역시 이번에도 마태복음은 누가복음보다 더 자세한 설명을 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말을 더하고 있습니다. 시험이 없는 상태가 악에서 구해진 상태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시험은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시험에서 실패이고, 그것을 먹지 않으면 시험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담은 시험에서 실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이 계속해서 시험에서 실패했습니다. 누구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모든 삶이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고비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끊어진 다리가 연결되었습니다. 넘볼 수 없는 하나님 나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누리게 된 하나님 나라에는 요한계시록 22장 1-2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명나무는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없습니다. 시험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늘 시험 앞에 악으로 드러나는 우리를 구하였습니다.

기도가 마지막으로 접어들며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라는 내용이 마태복음에만 나타납니다. 기도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말은 기도의 내용을 완성하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한 것을 이루실 것이라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아멘을 통해 방점을 찍습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멘은 “그러할지어다” 혹은 “그렇게 될 것이다” 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인정하고 소망하며 이루어질 것을 아멘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같지만 다른 두 주기도문을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누가복음은 간결한 표현으로 주기도문을 소개하였고 마태복음은 구체적인 표현으로 주기도문을 소개하였습니다. 비평학자들은 이러한 차이를 예식과 예배에서 찾으려 합니다. 누가복음은 본래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문에 가깝고, 마태복음은 예배를 위해 예식화된 형태의 기도문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두 주기도문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관점 속에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를 소개했을 뿐입니다.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주기도문’를 주문처럼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기도를 빼버리면 주문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기도문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소개하는 주기도문이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다르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가 화석처럼 굳어 주문처럼 암송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외우고 있는 주기도문처럼만 기도해야 한다면 누가복음의 주기도문도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같은 내용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방향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 제대로 된 기도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번째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며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이미 전한 말을 떠올리게 하였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9-11절을 통해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고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전하라 말하였습니다. 또한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부활하신 후에도 잘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장 1-3절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나누었습니다. 이 땅에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십자가를 지기 싫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 이 잔을 옮겨 달라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마지막은 자신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싫은 예수님의 마음이 바뀌었고, 예수님을 십자가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 결과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가 아닙니다. 반대로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무당은 자신이 섬기는 신의 마음을 바꿔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자입니다. 결코 사람의 뜻을 굽히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의 뜻을 굽히기 위해 돈과 정성 그리고 열심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크면 클 수록 손쉽게 신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가르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당과 같은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나오는 정성과 특별집회에 참석하는 열심 그리고 일천번제와 같은 헌금을 하면 자신의 기도가 잘 응답될 것이라 착각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생각으로 자신의 수고 앞에 하나님이 감동하여 금도끼, 은도끼를 허락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결코 이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응답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는 응답이 아닙니다. 뱀과 같이 땅에 갇힌 자로 만드는 마귀의 응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였습니까?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기도하며 살았습니까?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달리말하면 자신의 뜻만 추구하며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와 기도하지 않은 만큼 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합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매 순간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라는 책을 섰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 매 순간 기도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도한 만큼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만큼 뚜렷해 짐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는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의 삶이 되길 바라며 오늘 말씀 맺겠습니다. 작성자 J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