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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누가복음 10장 70인 파송

by 은총가득 2020. 11. 16.

눅 10:1-3

 

(누가복음 10장 / 개역한글)

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 3.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엘리야와 예수님 엘리야와 예수님 사이에는 매우 긴 시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동시대를 살지 않았기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9장은 엘리야와 예수님 사이에 연결고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8절과 19절에 의하면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로 생각했다 말합니다. 말라기 4장 5절에 약속된 엘리야가 예수님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을 소개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30절은 보다 직접적으로 예수님과 엘리야를 연결합니다. 엘리야가 직접 나타나 모세와 함께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엘리야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누가복음 9장 54절도 엘리야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열왕기하 1장의 엘리야는 사마리아의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에게 불을 내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을 거절한 사마리아에 예수님이 엘리야와 같이 불을 내려달라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사실들은 예수님과 엘리야의 간격을 허물고 두 사람을 묶어 생각할 여지를 마련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엘리야를 묶어 소개하려는 이유는 엘리야의 사역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사역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갈멜산에서 행한 이방신과의 대결한 일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따르자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자웅을 겨루었습니다. 엘리야 혼자 이방신을 섬기는 팔백 오십명을 상대한 것입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선지자들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바알에게 불을 내려달라 말하였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런 소리도 없고 응답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방신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뒤로하고 엘리야가 등판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응답할 것을 요구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침묵했던 바알과 달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부름을 듣고 응답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신이라는 것이 만방에 증거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본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찾으려 했습니다. 로마의 수 많은 신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섣부른 기대였습니다. 엘리야의 삶은 승리로만 가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승리로 인해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엘리야는 실망하였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 하나님께 요구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러한 엘리야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 천사를 보내주었고 떡과 물을 준비하였습니다. 홀로 남겨진 것을 슬퍼할 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기다린다 말해주었습니다. 혼자 싸우다 지켜 쓰려졌지만 하나님이 준비하고 예비한 칠천 명이 있다는 소리에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희망은 엘리사와의 만남으로 현실이 됩니다.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 명의 사람 중 첫번째 사람인 엘리사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를 만난 엘리야는 그의 겉옷을 발을 갈던 엘리사 위에 던졌습니다. 당시 겉옷은 사회적 계급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때문에 옷을 엘리사 위에 던졌다는 것은 그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말합니다. 엘리사도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모에게 입을 맞춘 후 엘리야를 따르겠다 말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밭을 갈던 자리로 돌아가라 말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거절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 엘리야의 의중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돌아가지 않고 밭을 갈던 한 겨리소를 삶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지난 시간 살핀 것처럼 혈연 중심의 가족관계만 생각하던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며 가족의 범위를 더 확장한 것입니다.

엘리야를 따르게 된 엘리사의 모습은 누가복음 9장의 마지막 사건인 61-62절의 배경이 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쫓겠다며 찾아와 엘리사가 했던 것처럼 부모에게 먼저 작별할 시간을 달라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말했던 것처럼 이를 거절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갑작스럽게 등장한 하나님 나라는 혈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이루어 집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누가복음 8장 21절에서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말씀하였습니다. 기존에 사람들이 생각하던 가족의 범위를 확장한 것입니다. 이는 누가복음 18장 29-30절을 통해 베드로에게 답을 한 내용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 말씀하였습니다. 가족의 범위를 넓혀 더 많은 가족을 얻게 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처럼 누가복음 9장은 계속해서 예수님과 엘리야 사이의 간격을 허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아니라 하나님의 그리스도임에도 굳이 예수님과 엘리야를 묶으려 합니다. 예수님과 엘리야가 하나로 묶여야만 엘리사의 역할이 보냄을 받은 칠 십명의 제자에게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 하였고 그 시간이 지난 뒤 엘리사를 선택했습니다. 3년 6개월의 사역 뒤 자신의 권한과 역할을 엘리사에게 위임하였습니다. 엘리야의 권한과 역할을 위임 받은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가 갑절이나 자신에게 있기를 구하였습니다. 엘리사의 간구는 어려운 것이지만 그의 사역 안에 차근 차근 성취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했던 일을 그대로 행하였고 더 많은 능력과 표징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도 3년 6개월의 시간입니다. 3년 6개월의 사역을 마친 예수님은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처럼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가 동일한 모습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엘리사와 칠십 명 누가복음 10장 1절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견고히 합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 천명의 사람처럼 칠십 명의 사람이 각 동네로 둘씩 보냄을 받습니다. 수학적으로 백 배의 차이가 나지만 문학적으로 맥을 같이하며 보냄을 받은 칠 십명의 사람이 엘리사의 역할은 물론이고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 명과 같은 의미로 드러납니다. 엘리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이들이 엘리야의 권한과 역할을 부여 받은 것처럼 예수님의 권한과 역할을 부여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엘리사가 갑절의 성령의 역사를 원하고 행한 것처럼 더 큰 성령의 역사를 행할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예수님도 말씀하고 있는 바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 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자는 예수님이 하는 일을 하고 그 보다 큰 일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은 기적이나 이적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은 아버지의 뜻이자 예수님이 허락한 새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였습니다. 그 사랑으로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는 교회 안에서 더 많은 이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곧 서로 사랑의 삶을 시작하고 더 큰 일 곧 교회가 되어 더 많은 이들과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는 우리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한 일을 하고, 그 보다 큰 일도 할 수 있다 말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를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말씀하였습니다.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일을 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 예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로써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신 예수님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에 대한 누가의 소개는 매우 특별합니다. 마가의 것과 다르고 마태와도 다르며 요한과도 다릅니다. 누가복음 8장 1-3절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여행하는 자들을 세 그룹으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열 두 제자이고 둘째는 능력을 경험한 여자들이며 셋째는 재정적으로 여행을 도운 여자들입니다. 9장 1절은 그 범위를 갑자기 좁힙니다. 열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했고 이들이 각 마을로 보냄을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10장 1절은 열 두 명에서 다시 범위를 넓혀 칠 십명의 사람이 예수님의 보냄을 받았다 말합니다. 물론 사본상의 차이로 일부에서 칠십 이명이 보냄을 받았다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메츠거가 지적한 것처럼 유대 문학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12지파에 6을 곱한 72를 70과 혼용해서 사용했습니다. 값을 매기는 계산보다 숫자가 가진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숫자 칠십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단 어원적으로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숫자 칠십은 히브리어로 ‘쉬브임’ 이라 합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쉐바’에서 파행했습니다. 히브리어 ‘쉐바’는 맹세하다의 ‘샤바’와 충만하다의 ‘사바’와 어원이 동일합니다. 때문에 숫자 7은 맹세와 충만의 숫자로 이해됩니다. 명세와 충만을 의미하는 숫자 7은 숫자 10을 만나 70이 됩니다. 숫자 10은 여러번 십일조를 나누며 말씀드린 것처럼 손가락이 열개 이듯 전부를 의미합니다. 명세와 충만의 숫자가 가득찬 것을 의미하는 숫자를 만난 것입니다.

7과 10의 만남으로 성사된 70의 의미는 온 세상을 설명하는 숫자로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0장은 홍수 이후 온 땅에 흩어진 자손들을 나열합니다. 이때 셈의 자손은 26족속이고, 야벳의 자손은 14족속이며, 함의 자손은 30족속이었습니다. 모두 합치면 70족속이 됩니다. 온 세상을 설명하며 칠십이란 숫자를 사용한 것입니다.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가족들도 칠십 명으로 소개됩니다. 칠십으로 시작된 야곱의 가족들은 이스라엘의 출발이 되어 출애굽을 할 때는 장정만 육십만이 됩니다. 그 외에도 칠십이란 숫자는 가족의 구성을 소개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기드온의 아들들이 칠 십명이고 아합의 아들도 칠 십명이었습니다. 명세와 충만의 가득함을 가진 가정을 숫자 70의 의미를 더해 소개를 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보냄을 받은 칠 십명의 사람들은 일일히 머리를 세어 계산하기보단 그들이 가진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드러납니다.

 

첫째는 칠 십명의 보냄을 받은 자들이 가족 개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칠 십이란 숫자는 노아의 자손,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식구들, 기드온의 아들들, 아합의 자녀들로 나타납니다. 이상적인 가족의 숫자로 칠 십이 사용되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보낸 칠 십명의 제자들도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가족 개념을 가집니다. 이미 나눈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자신의 가족이라 말씀하였기에 보냄을 받은 칠 십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칠 십명의 보냄을 받은 자들이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같이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열 두 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들이 칠 십명이 되어 애굽에 들어갔습니다. 애굽에 들어간 후에는 폭발적으로 숫자가 늘어 장정만 육십만 삼천 명 오백 오십명이 되어 애굽을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야곱의 아들들과 같이 열 두 명의 사람을 제자로 선택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오늘 본문이 보여주듯 칠 십명의 제자들이 보냄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이 내려온 후에는 하루에 삼천 명이 교회가 되었고 날마다 그 숫자가 늘어나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열 둘에서 시작해 칠 십을 거쳐 많은 수의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교회도 열 둘에서 시작해 칠십을 거쳐 많은 수가 교회가 되었습니다.

 

셋째는 칠 십명의 보냄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칠이 가진 충만하고 맹세적인 면에 십이 가진 가득참의 의미가 더해져 완전하고 가득 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 보냄을 받은 칠 십명은 수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신학적이며 문학적인 개념입니다. 이 같은 개념으로 보냄을 받은 칠 십명을 바라볼 때 그 안에 들어간 우리의 위치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족으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며 살아감으로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 아래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시작한 하나님 나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부름 받고, 보냄을 받아, 하나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부름 받고, 보냄을 받아, 하나님 나라로 살게 되었지만 그 나라를 누리지 못한다면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가 되지 못 했다면 부르심의 은혜를 점검하고 보냄 받은 사명을 살펴봐야 합니다.

화살은 활 시위를 당긴 만큼 비례하여 날아 갑니다. 적게 당기면 적게 날라가고 깊게 당기면 그 만큼 멀리 날아 갑니다.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는 관계도 똑같습니다. 부름 받은 은혜를 깨달은 만큼 보냄 받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부름 받은 은혜가 적은 자는 보냄 받은 사명도 적어 하나님 나라를 적게 증거합니다. 부름 받은 은혜가 큰 자는 보냄 받은 사명도 커서 하나님 나라도 많이 증거합니다. 바울은 부름 받은 은혜를 크게 깨달은 자였습니다. 그의 깨달음은 예수님을 믿기 전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악했습니다.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부르심의 은혜를 크게 깨달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님을 알게 되자 그는 예수님을 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큰 깨달음 만큼 복음을 증거하며 하나님 나라로 달려갔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며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열 두 제자에게만 그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칠 십명을 따로 세워 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사람의 숫자는 칠 십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가 복음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사도도 하나님 나라를 전했고 집사도 하나님 나라를 전했으며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도 하나님 나라를 전했습니다. 사람이라면 공기로 숨을 쉬듯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 나라를 전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로 살지 못하는 자는 두 가지를 살펴야 합니다. 부름 받은 은혜를 깨달았는가와 보냄 받은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입니다. 당연히 보냄 받은 사명은 부름 받은 은혜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지 않고, 복음의 소식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 자는 부름 받은 은혜에 머무르지 않는 자입니다. 들어온 것이 없기에 나갈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선 자리에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최근에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증거한 때가 언제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전하고 증거하지 못 했다면 부름 받은 은혜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해야 합니다. 보냄을 받은 칠 십 명의 사람 중 하나가 나라는 깨달음으로 가는 곳마다 부름 받은 은혜를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묻겠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있습니까?

 

 

눅 10:1-3 (2)

(누가복음 10장 / 개역한글)

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 3.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처럼 모든 것의 시작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영화에 있어 ‘5분의 법칙’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헐리우드에는 극장의 불이 꺼지고 5분 안에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다 말합니다. 그래서 예산이 많이 들어간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보면 영화의 시작과 함께 엄청난 스케일의 영상미를 보여주거나 관객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내용을 전개시킵니다. 건물이 폭발하고,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추격을 당합니다.

 

9장에서 보냄을 받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이제 칠 십명이 되었습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칠 십명의 제자는 여러가지의 의미를 지닙니다. 어원적으로 충만하고 가득차게 될 성장의 모습을 담고 있고 신학적으론 야곱의 열 두 아들이 칠 십명이 되어 애굽에 들어간 것처럼 출애굽을 앞둔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또한 문학적으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에 의해 엘리야의 역할을 엘리사가 하게 된 것처럼 예수님의 역할을 칠 십명의 제자들이 하게 됩니다. 어원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칠 십명의 제자들은 비장한 사명을 가지고 출발선 앞에 섰습니다.

칠 십명의 제자들이 경기를 알리는 총성을 기다릴 때 예수님은 입을 열어 그들에게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당부와 걱정 그리고 여러가지 행동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모두 한번에 살펴보면 좋겠지만 시간과 지면상의 이유로 오늘은 예수님의 첫마디만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첫마디는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이든의 연설이 보여준 것처럼 예수님의 첫마디는 앞으로 일어날 구원 사역의 나침반이 됩니다. 제자들이 처한 상황과 해야 할 일 그리고 일어날 것들의 방향과 의미를 예수님의 첫마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추수의 때

예수님은 칠 십명의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예수님은 칠 십명의 제자들을 모아 놓고 현재의 상황이 추수의 때라 말하였습니다. 추수는 곡식의 결실을 거두는 행위로 농사의 마지막입니다. 농부는 추수를 위해 농사를 집니다. 추수할 것이 적거나 없으면 농부의 행위는 실패로 간주됩니다. 그와 반대로 추수할 것이 많으면 농부의 행위는 성공으로 여겨집니다. 추수가 농사의 목적이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농사의 목적이자 결과인 추수는 구약 성경에서 종말의 모습으로 자주 소개되었습니다. 미가서 4장 12절은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괴롭히는 이방인들을 곡신 단을 타작 마당에 모음 같이 한 곳에 모아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긴다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27장 12-13절은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날에 농부가 과실을 나무에서 떼어 모으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하나하나 모을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구약의 구절들이 추수의 행위를 종말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추수를 종말의 때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물론 학자들 중에는 이를 반대하는 자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네츠(Venetz)는 이러한 해석이 풍유적 곧 알레고리를 사용한 해석이라 말을 하며 주인을 하나님으로, 추수를 종말로 이해하면 안된다 말을 합니다. 여기서 잠깐 풍유적 해석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흔히 알레고리로 불리는 풍유적 해석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보다 더 많은 의미를 끌어내는 해석 방법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성경의 영적 의미를 끌어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색다르고 신비로우며 은밀하여 일부 교단이나 목회자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의미를 깨달은 기쁨과 우월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다보니 풍유적 해석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누구도 대놓고 이 방법을 지지한다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처음부터 끝까지 풍유적 해석을 하면서 풍유적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것처럼 풍유적 해석을 하면서 풍유적 해석을 한다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풍유적 해석이 가지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입니다. 풍유적 해석을 하면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것이란 생각이 보편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 고펠트는 그의 책 ‘모형론’에서 모든 풍요적 해석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니라 말을 합니다. 풍유적 해석 가운데 저자의 의도가 분명하고 실체가 있는 것을 모형론이라 부르며 이는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야 한다 말하였습니다. 이는 칼빈의 주석과 설교에도 잘 나타납니다. 그는 무분별한 풍유적 해석은 거부했지만 모형론은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습니다. 성경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다는 생각 속에 그리스도 중심적 모형론을 사용하였습니다. 게할더스 보스도 성경의 통일성을 이야기하며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연결고리를 가진다 말하였습니다. 루이스 벌코프도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 말을 하였습니다. 문자적 의미 넘어에 모형으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말을 한 것입니다.

최근 비평학에서 주목하는 ‘상호텍스트성’은 성경이 가진 풍유적 해석 방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용어는 간단히 정의되지 않습니다. 굉장히 철학적이고 학문적이라 쉽게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다만 개념적인 측면으로 접근하면 상호텍스트성은 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를 말합니다. 텍스트의 범위는 광범위합니다. 단어가 될 수도 있고 문장이 될 수도 있으며 하나의 작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전까지 이러한 텍스트는 홀로 존재하는 듯 했습니다. 독립적이고 개별적 작품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많은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텍스트는 텍스트로 존재하기 위해 다른 텍스트의 영향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텍스트와 함께 공존한다 말합니다.

그랜드 캐니언이 지질학의 보고인 것처럼 성경은 상호텍스트성의 보고 입니다. 성경은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모두 연결되어 하나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39권의 책이 구약으로 묶이고, 27권의 책이 신약으로 묶이며 구약과 신약도 성경이란 이름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66권이 하나의 책이 됩니다. 각 권의 책이 서로 연결되어 해석의 틀이 되어 줍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아브라함의 두 아들 곧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4절에서 이들은 ‘비유’ 라 말하였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율법과 은혜,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칠십 명의 제자를 보내며 추수의 때를 종말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약의 세계관이 지배했던 시대에 구약이 소개하는 추수의 개념을 외면하면 문제가 됩니다. 추수의 개념을 종말의 때로 이해하는 것이 휠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추수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종말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종말’은 계속되던 일이나 현상의 마지막을 말합니다. 세상이 끝나는 지점을 종말이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칠 십명의 제자들을 보낼 때는 종말과 관계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20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상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개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종말이 이미 임하였고 또한 임할 것이라 말을 합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을 보면 하나님은 구약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으나 ‘이 모든 날 마지막’ 곧 종말의 때에는 아들을 통해 교회에게 말씀하신다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온 때가 종말의 때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히브리서 9장 26절에서도 확인되어 집니다. 예수님이 단번에 제물로 드려져 죄를 없이 하려고 세상 끝에 나타났다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종말이 시작되지 않았으나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종말이 시작되었다 말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종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6절, 마가복음 13장 5-6절, 누가복음 21장 8절에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를 설명하며 “아직 끝이 아니라” 말하였습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다 말한 것입니다. 종말의 완성은 이미 여러번 살핀 것처럼 예수님의 다시 오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내려올 때 종말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디모데후서 3장 1-5절의 모습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이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아갈 우리의 모습입니다. 미래에만 있을 일이 아니라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러하며, 내일도 그러할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3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말세에 재물을 쌓았습니다”

창세기의 홍수사건을 살피며 나눈 것처럼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홍수 이후 무지개를 보여주며 다시는 이와같은 방법 곧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 말하였습니다. 물이 줄어들면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심판 앞에 세우지 않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남은 심판은 불심판 밖에 없습니다. 기회가 다시 주어지지 않는 심판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종말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말세의 현상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말세의 일을 행하는 자신을 살펴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3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에 멸망이 갑자기 쏟아질 것입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임할 것입니다. 늘 이를 경계하며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심판 속에 구원에 이르는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가 됩시다.

2. 추수의 때

추수의 때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한 가지 문제가 보였습니다. 이 문제는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 될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추수라는 것이 구원 받는 자를 뜻할 때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굉장히 이례적입니다. 예수님은 넓은 문과 좁은 문의 비유를 통해 멸망으로 걸어가는 사람은 많지만, 영생으로 걸어가는 자는 적다 말하였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2장 14절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도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3-24절에선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라는 질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한 후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하는 자가 많으리라” 말하였습니다. 항상 예수님은 구원 받는 자가 많지 않다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추수할 것이 많다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을 자가 많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비교의 대상 때문입니다. 많고 적음을 논하는 비교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 입니다. 두 개를 가진 사람은 한 개를 가진 사람보다 많지만 세 개를 가진 사람보단 적습니다. 비교의 대상에 따라 많다고 말할 수도 있고 적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기존에 예수님이 자주 말씀하신 적다는 표현은 구원 받는 사람이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보다 적다는 말입니다. 비교의 대상이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교의 대상은 일꾼입니다. 일꾼의 수가 구원 받는 사람보다 적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추수할 것 곧 구원 받을 자가 많다 말한 것입니다.

9장에서 열 두 명의 제자들을 파송한 예수님은 이번에는 칠 십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였습니다. 무려 58명의 제자가 증가했습니다. 거의 6배가 늘어났습니다.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칠 십명의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잠잘 곳도 찾기도 힘들고,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우며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 잘 날 없는 것처럼 갈등도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차이로 싸운 것만 봐도 칠 십명이 함께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적용해 숫자를 줄이는 것이 더 능률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칠 십명의 사람도 적어 보였습니다. 열 두 명에서 칠 십명이 되었지만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할 교회를 바라보며 더 많은 사람이 복음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복음증거자가 된다는 말은 칠십 명의 제자가 갖는 권위와 역할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예수님은 열 두 제자가 가지는 권위와 역할이 독점될 수 없다 말씀하였습니다. 누가복음 9장 46-47절에서 제자들이 “누가 크냐”를 놓고 싸우자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라”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 열 두 제자가 가지는 권위와 역할은 칠 십명의 보냄을 받는 제자들과 나누게 됩니다. 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보냄 같이 칠 십명의 제자를 보냅니다. 열 두 제자의 역할을 칠 십명의 제자도 하였습니다. 열 두 제자의 권위와 역할이 칠 십명의 보냄을 받은 자에게 확장되었습니다. 이 처럼 예수님은 칠 십 명의 보냄을 받는 자들의 권위와 역할도 확장되야 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칠 십명만 특별하고, 칠 십명만 권위를 가진 자가 아니라 더 많은 이가 특별함과 권위를 가지고 복음 증거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권력구조는 점선으로 그려진 카스트 제도와 같습니다. 말로는 모두가 평등하다 말하지만 실상은 그 어느 조직보다 선명하게 서열화 되어 있습니다. 소작농, 어민, 노동자 계급의 수드라 위에 자작농, 상인, 수공업자, 하급 관리 계급의 바이샤가 위치하고 무사, 관료, 군인, 경찰관 계급의 크샤트리아가 위치하며, 성직자, 학자, 승려 계급의 브라만이 자리한 것처럼 교회도 일반 성도 위에 집사, 집사 위의 권사, 권사 위에 장로, 장로 위에 목사가 위치하였습니다. 제자들도 결론내지 못한 “누가 크냐”의 갈등을 교회는 해결하여 수직으로 높낮이를 결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 말을 하지만 교회의 머리는 목사가 되었고, 예수님의 교회라 말을 하지만 교회의 주인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머리를 세어 권리금을 받아 교회를 사고 팔고, 자식에게 교회를 넘겨주며, 퇴직시 퇴직금과 별도로 수 십 억씩 목사에게 안겨주는 생소했던 전별금이 이제는 익숙한 교회의 제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실 교회 내 권력 구조보다 심각한 것은 교회 밖 사람들을 파리아( Paraiyar) 곧 불가촉천민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불가촉천민은 카스트 제도 아래 위치한 계층입니다. 이들은 악마 혹은 악귀 등으로 불리며 사회악으로 여겨집니다. 누구도 그들에게 말을 걸거나 손을 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무시하고 경멸하는 계층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일은 모두 이들의 차지가 됩니다. 실수로 다른 카스트 계층과 접촉할 경우 큰 죄로 간주되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죽는 날까지 평생 격리시설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게 됩니다.

 

어느 덧 선민의식에 가득 찬 교회는 교회 밖 사람들을 이 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의식에 갇혀 이방인들을 배척하고 거부한 것처럼 교회도 역시 선민의식에 갇혀 교회 밖 사람들을 배척하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죄인이 오는 곳이 아니라 죄가 없는 사람이 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회가 풍기는 경건의 모양 뒤에 숨어 교회 밖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 합니다. 높은 울타리를 세우고 교회 밖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합니다. 물이 나올 줄 알고 깊게 판 우물이 감옥이 되었으나 이를 모르고 스스로 갇힌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교회의 조직구조는 매우 간단합니다. 수직적 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구조입니다. 목사를 정점에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정점에 둡니다. 가운데 예수님을 두고 모두가 어깨동무를 합니다. 예수님 옆에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높낮이와 구분 없이 모두가 하나로 어울어집니다. 역할은 다르지만 하나의 건물과 하나의 몸처럼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써 우리보다 휠씬 더 높은 곳에 있어야 하지만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내려와 우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내려놓고 낮아짐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스스로 브라만이 되기 위해 다른 이를 파리아로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문제의 해결

칠십 명의 제자들을 떠나보내며 추수할 것보다 일꾼이 적다는 문제를 지적한 예수님은 그 해결 방법도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문제를 지적하고 그 문제에 대한 답도 제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공하는 답은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경제적이며 효율적인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경제적이며 효율적인 해결 방법은 기존의 일꾼들에게 더 열심히 일할 것을 독려하는 것입니다. 야근과 추가근무를 요구해 주어진 성과를 이루게 하는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추수할 일꾼들에게 더 많은 짐을 짊어지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았습니다. 추수하는 문제를 주인이 해결할 것이라 말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8장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씨를 세상에 뿌렸다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농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땅에 떨어진 씨는 좋은 땅에서 결실을 맺습니다. 좋은 땅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열매를 내어 놓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탐스럽게 열린 결실을 추수하는 일입니다. 열매를 거두어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농사는 끝이 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농사가 끝나는 시점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필요하다 말합니다. 일꾼이 밭에 나가 결실을 거두지만 그 모든 일을 조율하고 운영하는 분은 밭의 주인이자 밭의 씨를 뿌린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농사에 있어 주인의 결정이 중요하다는 것은 마태복음 20장 1-16절에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이야기를 포도원 품군을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간 포도원 주인은 하루에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약속하고 품군을 포도원에 들여 보냈습니다. 삼시에도 품군을 들여보냈고, 육시와 구시 그리고 십시에도 품군을 포도원에 보냈습니다. 일이 끝난 후 품값을 지불할 때 주인은 모든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라 말하였습니다. 일찍 와서 일한 사람이나 늦게 와서 일한 사람이나 같은 값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먼저 온 자들이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디며 더 많은 일을 했으니 더 많은 품값을 달라 요구했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 말을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고 그것을 약속대로 주는 것이 주인의 뜻이라 말하였습니다. 품군의 입장에서 불합리해 보이지만 주인은 약속한 것을 약속대로 이행했습니다. 자신의 뜻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농사를 시작하고 하나님이 농사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이 시작하고 하나님이 마무리 합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였다 말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겨 대신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의 값이 치뤄졌습니다.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한 대속을 믿는 것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우리가 은혜에 의하면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 말합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합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므로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시작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구원의 마지막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홀로 이루신 구원 앞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감사와 찬양’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의 첫번째 질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 입니다. 이러한 대답의 배경은 이사야 43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3장 7절에서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말하였습니다. 또한 이사야 43장 21절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찬송하는 일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에 대한 반응입니다. 뼈저리게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한량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자연스럽게 감사와 찬양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감사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마무리

예수님은 칠 십명을 떠나보내며 추수의 때에 문제와 해결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떠나는 칠 십명의 제자들에게 지금의 때가 마지막 때이며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고 이 문제는 하나님만 해결할 수 있다 말해주었습니다. 이는 벼랑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이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잊고 나태하게 살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날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며 곡간을 걸어 잠그고 썩어질지언정 나누지는 않습니다. 또한 더 많은 일꾼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일꾼들의 우두머리가 되려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이 하나님의 주권이라 생각하지 않고 전하는 방법과 기술에 있다 생각합니다. 많은 훈련과 자본을 투자하면 언제든지 쉽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마지막 추수의 때가 이르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일꾼이 되어야 하며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에 이를 요청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가까운 가족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그리고 함께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오가며 만난 여러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처음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으나 굳어버린 관계와 흐릿해진 열정 그리고 거절의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전하지 못한 일이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추수할 일꾼을 보내 추수할 것들을 추수해달라 요청합니다. 도저히 돌이키지 않을 것 같은 나라는 존재를 믿음으로 인도한 하나님의 주권이 그들을 변화시켜 추수될 열매가 되길 소망합니다. 시편은 눈물로 씨를 뿌린 자는 기쁨으로 단을 얻는다 말하였습니다. 눈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씨를 뿌린 하나님의 수고가 교회라는 단을 기쁨으로 수확하는 날이 완성되길 계속해서 기도합시다.

​] 눅 10:1-3 (3)

 

(누가복음 10장 / 개역한글)

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 3.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코로나 19로 인해 모임을 오랫동안 쉬었습니다. 물론 원고로 계속 말씀을 나누었지만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설교를 짧고 굵게 나누고 본문을 살피겠습니다. 지난 설교들은 커다란 구조 안에 진행되었습니다. 이 구조는 예수님의 동반자의 변화로 구분됩니다. 8장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세 그룹을 소개한 후 예수님이 중심이 된 사역을 소개하였습니다. 9장은 세 그룹 중 하나인 열 두 제자를 파송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하게 하였고 10장은 칠 십명의 제자를 파송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하게 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이 사역의 본을 보였고,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이 허락한 능력과 권위를 행하였으며 그것이 실패하였을 때 칠십 명의 제자가 보냄을 받았습니다. 선택 받은 칠 십명의 제자는 예수님의 뒤를 잇는 후계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를 위해 9장은 계속해서 예수님과 엘리야를 연결시켰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자를 엘리사와 연결시켰습니다. 엘리야에게 바울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칠 십명이 있다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칠 십 명을 보내며 그 때를 “추수”의 때라 말하였습니다. 추수의 때는 유대인들에게 마지막이자 결과로 이해됩니다. 구원을 배경으로 할 땐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 받고 그 밖의 사람들이 심판 받는 날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칠 십명의 제자를 보내며 추수의 때라 말한 것은 구원의 마지막이자 결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의 마지막이자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을 준비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지적한 예수님은 그에 대한 해답도 제시하였습니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 말씀하였습니다. 문제에 대한 해결을 주인에게 맡기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보냄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제자들에게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수고하고 땀 흘려 일하지만 문제의 해결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농경문화의 추수를 배경으로 때와 문제 그리고 해결 방법을 알려주신 예수님은 이번에는 목축업을 배경으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칠 십명의 제자들을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 말하였습니다. 사실 구약에서 목축업과 농업은 대립되었습니다. 특히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까지 이런 특징은 두드러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유목민이고 이방인은 농사를 짓는 자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유목민의 신이라면, 바알과 아세라는 농사 짓는 자의 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땅에 거하지만 땅에 속하지 않은 유목민을 지키고 인도할 때 바알과 아세라가 땅을 벗하여 농사 짓는 자의 풍요와 번영을 약속한다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대립은 가나안에 정착하고 포로가 된 후에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땅을 잃은 민족은 농사도 목축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후반부로 갈 수록 두 가지 모습이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흐릿하게 섞여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농경 문화에 이어 목축업을 배경으로 예수님의 심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라”는 명령과 함께 떠나보내는 칠 십명의 제자가 ‘어린 양’이고 제자들이 만나게 될 자들이 ‘이리’ 라 말씀하였습니다. 어린 양과 이리의 관계는 불보듯 뻔합니다. 자웅을 가려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니라 이리가 항상 어린 양을 먹는 관계입니다. 계약 관계로 따지면 언제나 이리가 ‘갑’이고 언제나 어린 양이 ‘을’ 입니다. 이리가 강자이고 어린 양이 약자입니다. 둘 사이에 싸움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백번을 싸우면 백번을 이리가 이깁니다. 어린 양은 언제나 잡아 먹힐 뿐입니다. 따라서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지로 몰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꽃길로 가마 태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가시밭 길을 맨발로 걷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극심한 박해에 시달렸습니다. 일곱 집사중 하나였던 스데반은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다 예수님을 믿게 된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 의하면 수고를 넘치도록 하였고 옥에 갇히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 하였으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고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하며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번 자지 못 하며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은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역시 교회의 규모가 수 천명을 넘겼으나 호의호식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다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313년에 밀라노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교회를 향한 박해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박해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교회는 더욱 커져 갔습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흩어진 자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증거해 교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장과 박해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했습니다. 교회가 가는 곳마다 박해가 있었고 박해가 있는 곳마다 교회가 있었습니다. 또한 박해가 심할 수록 교회는 많아졌고, 교회가 많아질 수록 박해도 심해졌습니다.

 

교회의 역사 가운데 박해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보니 많은 이들이 어린 양을 보낸 이리의 무리를 교회를 박해하는 자로 이해합니다. 교회를 괴롭히고, 훼방하며, 시기하는 자를 이리의 무리라 말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이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였고, 성경이 담고 있으며, 교회가 이해한 이리의 모습은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크고 넓은 범위로 이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우리 앞에 두 개의 길이 있고 그 길 끝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말씀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의 넓은 문이고, 다른 하나는 좁은 문입니다. 잘 알고 계신 것처럼 넓은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찾는 자가 많으나 멸망에 이릅니다. 반대로 좁은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으나 생명에 이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이기 때문입니다. 노략질하는 이리에게 속아 넓은 길을 걸어 넓은 문에 이른 자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자신의 직분과 사역 그리고 열심을 앞세워 천국에 들여보내 달라 말을 합니다. 살면서 행한 자신의 공로로 천국의 문을 열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의 문은 누구도 열 수 없습니다. 문을 지키는 자가 죄인은 통과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선하고 바르고 착한 일을 많이 했더라도 죄를 지었고 죄 가운데 있다면 문을 지키는 자는 그를 향해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루도는 불검으로 그를 공격합니다. 우리의 법도 천국 문의 평가와 같습니다. 기부를 많이 하고 봉사를 즐겼으며 부자로서 높은 지위에 올랐더라도 살인을 하거나 음주운전을 하면 감옥에 갑니다. 선한 일이 악한 일을 상쇄하지 못 합니다. 넓은 마음으로 선한 일이 악한 일을 상쇄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사람은 선한 일보다 악한 일을 더 많이 합니다.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두드려도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시편 24편은 천국의 문은 오직 하나님만 열 수 있다 말합니다. 어느날 굳게 닫힌 문에게 영광의 왕을 위해 문을 열라는 명령이 들렸고 문은 영광이 왕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이때 영광의 왕은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 답했습니다. 다시 한번 굳게 닫힌 문에게 영광의 왕을 위해 문을 열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문은 이번에도 영광의 왕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라 답하였습니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 만군의 여호와는 누구도 열 수 없는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고, 죄 가운데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의하면 하나님에게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완벽하게 선이며, 무흠하고 무결하여 자기 집 현관처럼 천국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우리 중 하나가 되어 누구도 열지 못한 천국의 문을 열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죄인은 열 수 없는 천국의 문을 열기 위해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겨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삼십 삼년의 기간 동안 마귀의 유혹은 계속되었으나 예수님은 그때마다 말씀을 굳게 붙들고 기도하여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패배가 익숙하고 죄와 친밀하며 심판으로 밀려난 사람의 역사 가운데 유일하게 승리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아무도 열 수 없는 천국의 문을 여는 최초의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거짓선지자로 양의 옷을 입은 이리는 이러한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온 예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못함으로 의지할 것은 자신 밖에 없다 말합니다. 때문에 양의 옷을 입은 이리를 따라가는 자는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기에 이 땅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항상 짊어져야 합니다. 구약을 통해 계속되는 실패가 선명하게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르려 합니다. 종교적으로 순종을 강조하고,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목표로 삼습니다. 때문에 이리를 따라가는 자는 경건해 보이고 선하며 바른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과 평가는 오히려 올무로 작용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제하는 모습을 보도록 나팔을 붑니다.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런 자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 말합니다. 하나님께 결코 인정 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리’는 자신을 의지하도록 미혹하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자들에게 보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가 자신을 의지하도록 만드는 이에게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의지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기초부터 다른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이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입니다. 사는 곳이 다르고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감으로 둘의 사이는 좋을리 없습니다. 견원지간처럼 갈등은 불가피합니다. 둘의 싸움은 다수가 유리합니다. 넓은 길을 걸어 넓은 문으로 향하는 자들은 모래 위의 집을 지은 자로 이들의 수는 좁은 길을 걸어 좁은 문으로 향하는 반석 위의 집을 지은 자보다 많습니다. 규모의 차이가 분명하다보니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가 힘으로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는 어린 양, 자신을 의지하는 자는 이리로 설명하였습니다.

 

경험의 유무와 상관 없이 어린 양과 이리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 안됩니다. 이리는 언제나 어린 양을 잡아 먹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과 이리는 다른 공간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울타리를 만들고 우리를 만들어 어린 양과 이리가 만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울타리나 우리가 없을 때엔 교대로 보초를 서 이리로부터 어린 양을 보호했습니다. 어린 양과 이리를 분리하기 위해 촘촘하고 튼튼한 울타리를 만들고 쉬는 시간 없이 양을 지키는 것이 목자의 본분이자 역할입니다. 이를 잘 해내야 선한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칠 십명의 제자들을 이끌며 어린 양을 이리에게 보낸다 말하고 있습니다. 목자의 본분과 역할을 제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 10장 11절은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소개합니다. 어린 양과 이리를 분리하지 않고 한 공간에 두었음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 말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은 양을 노리는 이리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 말하였습니다. 양을 노리는 이리를 절도며 강도라 말하였습니다. 절도와 강도는 요한복음 10장 8절에 의하면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 입니다. 절도와 강도의 구체적인 모습은 가룟인 유다와 바라바를 통해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은 가룟인 유다를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라” 말하였는데 이때 도둑이 절도와 같은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18장 40절에는 바라바를 “강도” 라 소개하는데 이도 역시 10장에서 말하는 강도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보다 먼저와 양을 노리는 자의 모습이 가룟인 유다와 바라바로 나타납니다. 이들의 특징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습니다. 역시 자신을 의지하는 율법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려 했습니다.

 

값을 받고 일하는 일반적인 목자는 절도와 강도 그리고 이리가 양을 노릴 때 힘으로 그들과 싸워 양을 지켜 냅니다. 힘과 힘의 대결을 펼쳐 양을 보호합니다. 하지만 양을 노리는 자가 자신의 힘보다 강하면 그는 양을 버리고 도망을 갑니다. 자신의 생명을 양의 생명보다 귀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무엇보다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선택의 중심에 자신의 유익이 있습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결정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법으로 양을 지켜 냅니다. 힘과 힘의 대결로 절도와 강도 그리고 이리를 쫓아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 보다 양의 목숨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여 절도와 강도 그리고 이리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어린 양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이 절도와 강도 그리고 이리의 먹이감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은 절도와 강도 그리고 이리는 배가 불러 더 이상 다른 양을 노리지 않습니다. 차고 넘치는 생명력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짐으로 다른 이의 생명을 뺏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11장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 말을 한 후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였습니다. 이때 6절은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을 것이라 말을 하였습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자들이 서로를 공격하지 않고 하나가 된다 말한 것입니다. 이사야 65장 25절도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고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는다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어린 양과 이리의 관계는 분리가 아니라 공생입니다. 예수님이 분리가 아닌 공생을 원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살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분리하는 방법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리가 다가올 때마다 이리를 공격하여 물리치는 방법은 일회적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리는 더 치밀한 계획으로 접근합니다. 목자가 졸기를 기다리고 울타리가 무너지길 바라며 호시탐탐 어린 양의 목숨을 앗아가려 합니다. 또한 목자의 힘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힘으로 그를 제압하려 합니다. 때문에 분리하는 방법은 한계가 있는 방법입니다. 영원한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항상 긴장 속에 평안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는 우리가 바로 예수님을 먹어 버린 이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는 율법 아래 갇혀 예수님이 아닌 자신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공로를 앞세웠습니다. 우리의 직업과 재산 그리고 명예와 영광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일이나 양보하는 것을 어리석게 여겼습니다. 적당히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이리의 모습은 물론이고 가룟인 유다의 절도의 모습과 바라바의 강도의 모습이 우리 안에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이리와 더불어 사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우리의 삶을 배부른 이리가 되게 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과 함께 사는 삶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 말한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의 먹이가 될 것을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9장 51절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겠다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자기 양을 목숨을 던져 끝까지 지켜냅니다.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는 이리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십니다.

 

절벽에 매달린 사람이 구조 요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절벽 아래에서 두 팔을 벌리고 용기를 내어 뛰어 내리라 말하였습니다. 만약 뛰어내리면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하겠다 약속해 주었습니다. 절벽에 매달린 사람은 아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점 처럼 작게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이 미더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생각한 후에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혹시 저를 구해줄 다른 사람 없나요”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정확히 몇 개인지 헤아릴수도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과응보, 지성이면 감천의 구조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신을 섬기는 사람이 신에게 순종하고 헌신한 만큼 그에 대한 보상으로 복이나 소원성취 그리고 구원에 이른다 말합니다. 신의 절대적이고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와 같지 않습니다. 총과 칼을 가지지 않고 자기 백성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적을 배불리 먹여 함께 살자 말하는 방법도 기독교에서만 발견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기독교의 고유성 아래 교회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이리들은 이러한 교회의 고유성을 해치려 합니다. 우리도 그들과 한 목소리를 내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구원을 위해 은혜가 아닌 사람의 공로가 필요하다 말합니다. 이리들의 외침과 공격이 거세질 때 우리는 절벽에서 뛰어 내리라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점처럼 작게 보이지만 반드시 약속을 지켜 구원하는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몸을 던져야 합니다. 수 십번 말하고 수 백번 강조하였던 것처럼 천하 만민 중에 우리를 구원할 이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이리의 무리 사이로 담대히 걸어가는 어린양의 삶이 되길 바라며 말씀 맺겠습니다. .

눅 10:21-24

 

 

누가복음 62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10장 21절에서 24절의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1절부터 24절입니다.

예수님이 보낸 칠십명의 제자들은 기뻐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귀신들이 항복했단 결과를 보고 했습니다. 귀신들의 항복은 사탄이 번개같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칠 십명의 제자들은 위임 받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였습니다. 도착한 마을에서 귀신을 내쫓고 병든 것을 고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희죽희죽 웃음이 새어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기뻐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이 모습이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이는 예수님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보여지는 현상보다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구원을 기뻐하라 말씀하였습니다. 기표로 만족하지 말고 기의를 추구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구선수는 홈런을 쳤을 때 기뻐합니다. 축구 선수는 골을 넣었을 때 기뻐합니다. 취준생은 직장을 구했을 때 기뻐합니다. 입시생은 대학합격을 기뻐합니다. 각자 기뻐하는 때가 다릅니다. 이는 각자 원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기쁨의 때가 달라집니다.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항복한 것을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너희 이름이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말씀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원하는 바를 분명히 하길 원했습니다. 귀신들의 항복이 아닌 구원을 향해 달려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것에 기쁨을 느낄까요? 예수님이 원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가를 살펴 예수님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였다 말합니다. 기쁨의 영향을 사람이 아닌 성령에서 받았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과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행위에서 기쁨을 찾는 우리와 달리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기쁨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쁨을 누린 이유는 하나님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는 누구이고, 어린아이는 누구이며 숨겨지고 나타난 것은 무엇일까오?

먼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지혜롭고’라는 표현은 마태복음 23:34에도 사용됩니다. 이때 이 단어는 선지자들, 서기관들과 직렬로 묶여 있습니다. 선지자들, 서기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을 하나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혜롭고’ 로 설명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슬기 있는 자’는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뚜렷하게 특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도행전 13:7에 의하면 지식층을 말하는 단어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 있고 슬기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가르치는 지식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누가복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미 살펴본 누가복음 9장 48절은 가장 작은 자를 어린 아이로 소개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5절은 어린아이가 자격 없다 생각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제지하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는 보호가 필요한 약자이거나 성장이 필요한 미숙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하나님을 말씀을 가르치는 지식층은 문맥을 고려할 때 종교지도자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백성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지혜 있고 그 뜻대로 살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 반대편에 선 어린아이들은 문맥을 고려할 때 보냄을 받은 칠 십명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어린아이들에 빗대어 말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졌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난 ‘이것’은 무엇일까요? 종교지도자들은 알지 못 했고, 칠 십명의 제자들은 알게 된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1장 26-27절은 오늘 본문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비밀이 있었고 그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입니다. 누구도 그 비밀을 알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비밀은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3:3-4절도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계시로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이라 말을 합니다.

이러한 이해 속에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는 쉽게 예수님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비밀을 숨기고, 어린아이와 같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비밀을 나타내어 감사하다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알게 된 것이 기쁨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칠 십명의 제자들은 거리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예수님을 본 사람들입니다. 두 그룹 모두 두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두 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섰고, 칠 십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옆에 섰습니다.

 

이들의 차이는 각 그룹에 속한 사람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두 그룹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입니다. 먼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거룩하다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죄인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 18:11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한 바리새인이 기도를 하였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며 이레에 두번 금식하고 또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 기도하였습니다. 완벽한 삶을 살았다 말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8-21절의 어떤 관리도 어려서부터 율법이 정한 모든 것을 다지켜 행하였다 말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소유를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로 그의 사랑 없음을 폭로시켰습니다. 다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근본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죄인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는 확실한 죄인이었습니다.

 

 

칠 십명의 제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구원보다 귀신들의 항복을 더 기뻐하는 자였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8장 34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종교지도자들처럼 감추어진 말씀을 깨닫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9를 통해 교회로 부름 받은 자가 부름 받지 못한 자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 말합니다. 모두가 다 죄 아래 있다 선언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그룹의 차이를 “아버지의 뜻” 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두 그룹을 나누었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는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택함이 없는 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말씀하신 예수님은 원래 이 비밀을 하나님만 알고 있었다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0:22에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라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만 아는 비밀이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비밀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린아이같은 제자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은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비밀을 공유하게 된 자는 놀라운 결과로 흘러갑니다. 예수님은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님을 알게 된 자가 계시로 인해 예수님만 알고 있던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만 알고 있던 예수님을 알게 됨으로 예수님만 알고 있던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밀에 있어 하나님과 같은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밀에 있어 예수님과 같은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누구도 알지 못한 가장 고상한 지식에 접근한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누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조용히 제자들을 돌아보며 조용히 “너희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말씀하였습니다. 어린아이가 제자들이고 비밀이 예수님이며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 복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17절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곧장 그를 향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것을 복이라 말씀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건강이나 취업 그리고 돈과 물질을 복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것들은 잠깐 곁에 머무는 것들입니다. 결코 영원하지 못 합니다. 이것들을 복으로 여기는 자는 손에 쥔 것으로 인해 예수님의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참된 복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은 제자들이 누리는 복의 가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칠 십명의 제자들에게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하였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도 보지 못 했고, 많은 선지자와 임금도 보지 못한 것을 제자들이 지금 보고 있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면 안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듣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진정한 복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완성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것을 볼 것이기에 복이 있다 말씀하였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이라는 사람을 보았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을 누리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십자가로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걸어가지 않으면 결코 제자들이 말씀을 성취하는 예수님을 볼 수 없기에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복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예수님은 나의 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어린 아이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다른 이들과 나을 것 하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로 걸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과 다른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감추인 밭의 보화를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추인 밭에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말합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감추인 밭의 보화를 발견한 이가 우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감추인 밭의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나라는 사람을 밭 가운데서 보화로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비록 고난과 고통을 겪을 지라도 나라는 보화를 얻는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던졌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아 구원에 이르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본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6:6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말씀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합니다. 예수님만 알고 있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만 알던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17:3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릴때부터 많이 불렀던 찬양 중에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해야할 일이 분명해 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가 예수님을 알아갈 때 예수님은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십자가를 참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웃게 합니까? 아니면 울게 합니까?

예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을 덮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보화만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성경을 통해 배움으로 예수님을 웃게 하는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의 삶이 되길 바라며 오늘 말씀 맺겠습니다..작성자 J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