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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눅 7:17-35 흔들리는 갈대 세례자 요한

by 은총가득 2020. 11. 16.

눅 7:17-35 흔들리는 갈대 세례자 요한

 

누가복음 서른 여덞번째 시간입니다. 누가복음 7장 17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을 두 주에 걸쳐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은 '흔들리는 갈대 - 세례자 요한' 에 대해 나누어 보겠습니다.

 

복음서는 전기와 구분되는 하나의 독창적인 장르입니다. 전기는 한 사람의 일생을 소개하고 평가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보여 줍니다. 하지만 복음서는 예수님의 일생을 모두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물론이고 어린시절과 형제, 가족, 학력, 직업, 취미 등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소개하여 생명을 얻는 일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그 시작을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명하는 일에 많은 분량을 할애 합니다. 족보와 지명 그리고 사역과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이 구약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로 오신 것을 증명하는데 주력합니다. 그 후에는 사람들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고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와 이를 거부하고 외면하며 박해하는 자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마지막은 십자가와 부활로 마무리 됩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이 십자가로 예수님을 내몰았고 예수님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사흘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여 교회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이 처럼 복음서는 예수님의 자기증명 - 사람들의 반응 - 십자가와 부활로 구성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자기증명과 사람들의 반응을 함께 소개하는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을 치유하심으로 자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명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이 과정에서 예수님께 믿음으로 반응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인성으로 들어가며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닌 ‘큰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은 예수님을 옳게 이해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옳게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중에서는 백부장 같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눅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하지만 이때 큰 의문이 듭니다. 정말 이스라엘 중에는 백부장 같은 믿음이 없었을까요? 누가는 살아있을 때나 혹은 죽은 후에도 그 영향력이 예수님과 어깨를 견줄 수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꺼냄으로 예수님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인기가 대단해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그리스도인지 혹은 선지자인지를 묻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1장을 보면 세례자 요한을 선지자로 생각하는 여론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이 그의 권위를 폄하하지 못하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세례자 요한이 죽은 후에도 그의 세례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가 있다는 것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여러 정황을 근거로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이 배출한 가장 이상적인 종교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름 없는 이방인 백부장보다 더 나은 믿음을 가졌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그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7장 17절부터 35절까지 입니다. 일반적으로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가 끝나는 17절과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는 18절을 구분합니다. 하지만 18절은 앞선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만 아니라 예수님의 지난 사역들을 모두 담고 있기에 그 연속성을 고려하여 17절부터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35절까지 본문을 정한 것은 36절부터 배경이 바뀌고 등장인물도 새롭게 나타나며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17절부터 35절의 이야기는 평소 나누는 본문의 분량보다 조금 더 긴 듯합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에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 두 번에 걸쳐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7-35절의 말씀은 크게 세 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17-21절로 여기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보낸 제자들의 질문이 나타납니다. 둘째는 22-30절로 여기에는 예수님이 요한의 질문과 그를 평가하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31-35절까지는 무리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나타납니다. 물론 더 작게 본문을 나눌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주제를 따라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7-21절, 오늘 본문 17절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다고 말합니다. 지금처럼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체계적인 의료시스템이 없던 시기에 병을 고치는 능력은 물론이고 죽은 사람 마저 살려내는 예수님의 능력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능력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지는 모든 자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백부장과 같은 이방인의 요구도 들어주었고, 나인성 과부와 같이 요구하지 않은 자의 필요도 채워주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이름이 전해졌고, 사람이 모이는 장소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가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도 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6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례 베푸는 것이 자신의 스승보다 많아 지는 것에 우려를 표했습니다. “요 3: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자신의 스승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예수님에 대한 불안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승승장구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의 스승인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헤롯의 결혼이 잘못되었다는 바른말을 하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스승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세례자 요한의 마음도 복잡해 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파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7절을 보면 그는 세례 받으러 나오는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말을 했고 9절에서는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날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 심판할 날이 가까이 왔으니 죄인들은 반드시 심판 받을 것이라 말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선포할 수 있던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할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고 또한 그 사실을 전하였으며 또한 자신이 전한 내용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빠른 시일에 세상을 심판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통해 듣게 된 예수님의 사역은 세례자 요한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습니다. 죄인을 심판할 것이라 생각했던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자신의 능력을 나누어 줬습니다. 찾아오는 자를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이 기다리던 분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에게 보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두 명의 증언은 확실하고 정확한 사실을 보증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 두 명은 예수님에게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믿지 못하는 세례자 요한의 의구심이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예수님에게 전달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하는 말을 다 들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은 많은 능력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었기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지금 보고 들은 것들을 그대로 전하라 말해주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들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됨을 말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친 후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말로 ‘실족’ 이란 발을 헛딛어 미끄러짐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실족이란 말을 죄를 짓게 되는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네 오른쪽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면 빼어 버리라” 말하였습니다. 또한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말씀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의심을 죄를 짓게 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의심이 그를 넘어지게 한 것이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일이 그의 죄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예수님은 곁에 있는 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무엇을 보기 위해 광야에 나간 것인가”를 물은 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굳은 믿음과는 정반대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관용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세례자 요한이 믿음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례자 요한을 포함한 이스라엘 중에서 이방인이었던 백부장보다 더 나은 믿음을 가진 자가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나쁘게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지자이며 동시에 선지자보다 훌륭한 자라 말하였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의 마지막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곧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하는 날이 이르기 전 선지자 엘리야를 먼저 보내겠다 말씀하였습니다. “말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선지자의 선포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며 그리스도 이전에 엘리야가 이 땅에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이라 말하였습니다. 이미 여러번 살펴본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낙타 털옷과 가죽띠를 띠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열왕기하 1:8에서 말하고 있는 디셉 사람 엘리야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엘리야는 털이 많은 사람으로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구약이 끝나는 시점에 하나님이 약속한 엘리야로 이 땅에 태어났고 엘리야의 사역을 하는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자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지자의 역할은 그리스도가 하는 일과 분명하게 구분되고 구별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는 선지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며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전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심판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딱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세상의 심판을 주도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오직 그리스도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 말씀하였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지칭하는 말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세례자 요한까지가 구약의 시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는 없다 말씀하시며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 보다 크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백부장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서 구약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백부장은 결코 세례자 요한보다 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부정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새 생명을 얻어 살게 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백부장이 세례자 요한보다 큰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철저한 순종과 헌신 그리고 많은 봉사와 희생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을지라도 그것은 평가의 기준이 되지 못 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의지하는 자는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슬퍼하며 이를 갈게 됩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인 믿음을 가진 자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며 그곳에서 큰 자로 살게 됩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실족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장 31-34절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세례를 베푸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누구든지 성령이 머리 위에 머물면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중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로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게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망하고 예수님은 흥해야 한다 전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신이 망하고 예수님이 흥하는 때가 오자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세례자 요한의 두려움이 의심을 불러왔다 말을 합니다. 정황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평소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자신을 찾았을 때 그는 독설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물론이고 군인들이 찾아와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아첨하거나 뜻을 굽히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죽음을 두려워 했다면 애초에 감옥에 갇힐 일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말을 바꿔 헤롯을 인정하고 칭찬하여 감옥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즉, 세례자 요한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의심한 것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냈을 때 사람들의 다양한 질병과 악귀 들린 자를 고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의심하는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귀 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고 말하였습니다. ‘예’ 혹은 ‘아니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는 일로 대답을 대신 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곧 질문의 대답이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곧 대답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구약이 약속한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가 하게 될 일들을 다양하게 소개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이고 시체들이 일어날 것이라 말을 하였습니다. “사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맹인의 눈이 보게 된다 말하였습니다. “사 29:18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맹인이 눈을 뜨는 것만 아니라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고 저는 자는 사슴처럼 뛰며 말 못하는 사람의 혀도 노래하게 될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사 35: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 곧 복음이 전해질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연법칙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구약의 모든 화살표가 예수님을 향했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더 신기할 정도로 예수님 안에서 구약의 말씀이 완성되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삶은 질문의 답이 됩니다. 예수님의 삶이 ‘오실 그 이’ 곧 그리스도임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을 모두 들었으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 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향한 의심이 깊어졌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사람들의 죄를 폭로시킨 후 은혜로 그 죄를 덮어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 했습니다. 오직 죄가 폭로된 자를 심판하는 그리스도만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그에게는 죄를 돌이키는 것이 중요하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했습니다. 남들보다 거룩한 삶을 살아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 삶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정결을 추구하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좋은 옷도 입지 않으며 누구보다 종교적이며 윤리적으로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렇게 살때 그리스도가 세상을 심판할 때 구원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눈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일 수 없었습니다. 멀리해야 할 죄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 중 하나의 삶을 사는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생각한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의심하는 흔들리는 갈대가 된 것입니다.

몇 해 전 큰 인기를 누렸던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 사회에 분배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며, 생명의 가치가 금액으로 환산되는 세상 속에 과연 올바른 분배는 무엇이며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졌습니다. 고도의 문명으로 거듭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은 효율성과 합리성이 성의가 되었습니다. 낭비되는 것과 초과되는 것은 악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거품예찬’을 쓴 최재천 교수는 자연은 스스로 낭비를 선택했다 말합니다. 종족 보존과 개체수를 늘리기 위해 자연계의 동물과 식물은 많은 숫자의 알과 씨앗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99%의 알과 씨앗이 버려지고 단 1%의 알과 씨앗이 생명을 얻는 비효율과 비합리성 속에 자연이 유지되고 성장합니다. 그렇게 가득 차고 넘쳐야 세상이 흘러 갑니다. 우리 눈에는 그것이 어리석이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을 운영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생각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지극히 효율적이고 합리적입니다. 악한 자를 심판하고 선한 자에게 복을 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이라면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효율과 합리적인 계산을 따르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낭비를 선택하였습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값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값을 위해 세상에 보내주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만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우리의 사랑과 관계 없이 자기 생명을 던져 우리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등가교환의 원리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이해가 기준이 아니라 성경이 기준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들만큼 사랑하고 남들만큼 봉사하며 남들만큼 헌신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랑하고, 예수님이 봉사하며, 예수님이 헌신하신 것처럼 사는 삶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집에 파랑새를 두고도 먼 길을 떠난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어리석임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그리스도를 배웁시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아닌 예수님을 기준으로 살아갑시다. 비록 넘어지고 실패하고 쓰러질 것이 분명하지만 예수님만 보며 살아간 자는 그 길의 끝에서 기다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께 닿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평가

 

 동일한 본문으로 '지혜는 그의 모든 자녀로 옳다함을 얻는다' 란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예수님을 향한 반응 중 유대인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세례자 요한의 반응을 살펴 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전했지만 정작 자신은 실족하여 예수님을 의심하였습니다. 평소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오면 죄인들을 심판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죄인들의 심판하지 않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이 말한 수 많은 증거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고 성취되었음에도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성경이 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리웠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흔들리는 갈대라 말씀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건한 삶에도 불구하고 믿음 없는 세례자 요한의 실체를 폭로하였습니다. 보여지는 것만 평가하는 이 땅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가장 큰 자일지 모르나 믿음만 평가하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가 가장 작은 자라 말씀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평가를 끝낸 예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평가를 시작합니다. 29절에서 예수님은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 두 그룹이 있다 말씀하였습니다. 이들 중 하나는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이고, 다른 하나는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의롭게 하였다 말하였고,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을 대상으로 비유의 말씀을 이어 갔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유대인들의 선생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아이들에 빗대었습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모습과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이 같다고 말씀하였습니다. “7: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피리를 부는 것과 곡을 하는 것은 소리를 통해 행동을 불러 옵니다. 피리 소리가 들리면 춤을 추고, 곡 소리가 들리면 울어야 합니다. 만일 피리를 부는데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하는데 울지 않으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고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들리는 소리에 적절하게 행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종교지도자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와 함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떠난 자들에게 율법의 가치를 가르쳤고 다시 율법 앞에 바른 삶을 살라고 말하였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 말하였습니다. 세리에게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말하였고, 군인에게는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은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말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유대교만 아니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도 공감할 수 있는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30절에 의하면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돌이켜 구원을 얻으라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한 후 평지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을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가르쳤습니다. 이 뺨을 치는 자에게는 저 뺨도 돌려대며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말하였습니다. 율법이 말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넘어선 가르침을 전해주었습니다. 사랑의 대상과 폭의 한계를 제거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이 죄인으로 규정한 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전한 가르침을 따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죄인들을 밀어내지 않고 사랑으로 그들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율법의 테두리에만 머물며 율법의 완성인 사랑에는 접근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 먼 발치에서 예수님을 주시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인 율법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돌이켜 구원을 얻으라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외면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예수님이 제시하는 사랑 앞에 있는 그대로 나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변화를 요구하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거부한 자들이 변화를 요구하지 않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7: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세례자 요한은 경건할 삶을 산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고 또한 그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는 좋은 집에 머물지 않았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떡이나 포도주도 먹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값지다 말하는 것들로 자신을 채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를 “귀신이 들렸다” 말하였습니다. 흉내조차 내기 힘든 세례자 요한의 경건한 삶에도 그들은 눈과 귀를 막았습니다. 춤도 추지 않고 울지도 않았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떡도 먹고 포도주도 마셨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잘 먹고 마셨는지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 말하였습니다. 먹보요 술보라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러한 평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좋은 것을 먹고 마시기 위해 돈이 많은 세리와 누구도 상대하지 않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다 생각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 중 하나가 되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결국적으로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통해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말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등장한 모든 백성과 세리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 그리고 피리와 곡,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모두 실체가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지혜는 관념적이고 개념적 입니다. 손에 잡히거나 눈으로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러한 지혜의 옳다함도 역시 실체가 파악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 속으로 이해와 납득을 요구하는 것들입니다. 때문에 지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다양한 해석을 낳았습니다. 각자의 이해로 예수님의 말씀에 접근했습니다.

여러가지 접근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는 결코 문맥을 떠나 본문을 해석해선 안됩니다. 문맥 안에서 35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누가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대조적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1장부터 계속되는 패턴입니다. 이러한 패턴 후에 누가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와 그의 세례를 받지 않은 자를 대조적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이때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을 장터의 아이들로 빗대었습니다. 어떤 음성에도 요지부동하며 무반응으로 일관한 그들의 행태를 꼬집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지혜가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그런데 지혜는 그녀의 모든 자녀들로부터 밝혀졌다” 가 됩니다. “자기의 모든 자녀로부터” 로 번역된 헬라어가 원래는 “그녀의 모든 자녀로부터” 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녀의 정체는 여성명사인 지혜로 이해됩니다. 또한 옳다함을 얻는다는 말은 3인칭 단수 수동태 직설법으로 ‘그것은 밝혀졌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35절을 해석하면 “지혜가 지혜의 모든 자녀들로부터 밝혀지거나 드러난다’ 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지혜를 알아보는 지혜의 자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문맥을 고려하면 29절의 ‘모든 백성과 세리들’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그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의롭다 하였습니다. 피리에 춤을 추었고, 곡에 울음을 보였습니다. 종종 의인화 되어 나타나는 부름 받은 지혜의 자녀로 지혜를 밝히고 드러내는 일을 한 것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다소 길었던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난 주 살핀 것처럼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의심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라고 말하며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를 비교하며 받지 않은 자는 죄인과 구별된 삶을 살았던 세례자 요한도 거절하고 죄인의 친구가 된 예수님도 거절했다고 말을 한 후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가 진리를 옳게 한다 말을 하였습니다.여기서 우리는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긍정의 평가는 긍정으로 흐르고 부정의 평가는 부정으로 흘러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평가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데 그의 세례를 받은 자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는 긍정적인 평가를 들어야 했으나 부정적인 평가를 들었습니다. 부정적 평가가 긍정적 평가로 흘렀고 부정적 평가를 피한 자가 부정적 평가로 흘러갔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구원이 이루어지는 과정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란 존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살 수 있도록 구원을 단계적으로 진행하십니다. 신학적으로 이 과정은 구원의 서정이라 불립니다.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양자-성화-성도의 견인-영화의 9단계로 구원을 세분화 합니다. 이를 단순화하여 칭의-성화-영화로 나누기도 하고 그 순서를 바꿔 성화-칭의-영화로 이해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미 여러번 말씀 드렸지만 저는 확실하게 칭의-성화-영화를 지지하고 또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신학적인 관점을 떠나 성경이 소개하는 구원의 과정은 더 단순합니다. 굵직하게 율법과 은혜로 설명되어 집니다. 율법과 은혜라는 것은 이미 여러번 말씀 드린 것과 같이 구약과 신약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맡겨진 구원이 구약 안에서 실패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구원하겠다는 신약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이때 새 언약으로 구원에 이르는 자는 반드시 옛 언약 앞에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합니다.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이 분명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새 언약으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할 수 있습니다.

구약 안에서 열심으로 구원을 향해 달려가던 바울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후에 그는 율법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죄를 알지 못 했을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역할이 율법이고 그 율법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은 것입니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바울은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가던 길에서 멈추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막다른 길에서 바울에게 새로운 길이 찾아왔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길이 바울을 인도했습니다. 율법 앞에 자신의 한계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자는 반드시 자신이 죄인이며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원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뢰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은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깨달은 자들 입니다. 누가복음 3장 3절과 사도행전 13장 24절 그리고 사도행전 19장 4절이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 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회개의 세례 앞에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흘러가는 구원의 과정 중 첫단추를 제대로 끼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이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나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피리 소리에 춤을 추고 곡 소리에 맞춰 울음을 보였으므로 그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결론은 자연스럽게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왜 부정적인 평가를 들어야 했는가를 설명합니다. 이들은 율법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은혜로 덮어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구원을 위해 첫단추를 끼우지도 않았고 만지지도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가 되어 백성들을 가르치는 지혜로운 사람인 척했지만 실상은 무엇하나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부정적인 평가를 들었던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예수님께 부정적인 평가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지혜의 자녀인 척 했지만 지혜와는 관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한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의 과정과 방법을 이해하고 깨달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스스로 죄인 임을 깨닫고 그러한 죄인을 찾아와 덮어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와 같은 죄인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멍한 눈으로 피리 소리에 춤도 추지 않고 곡 소리에도 울지 않는 자가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처럼 경건한 모습으로 매주 교회에 나오지만 정착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죄에 무감각해지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쁨이 되지 못한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졸리면 하품을 하고 바늘에 찔리면 소리를 지르듯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울고 웃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무런 공로 없이 생명을 건졌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자신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어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