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배경 연구
예수님은 주전 4,5년경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예수님이 주전 곧 주님 나시기 전 4,5년경에 탄생하셨다니 이상하게 들린다. 말이 모순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주후 525년에 로마의 수도원장이었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하는 서력(西曆)을 만들 때, 예수님의 탄생 연대를 잘못 계산해서 4,5년 정도의 착오가 발생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주전(Before Christ)' 4,5년경에 탄생하셨다는 이상한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는 허공에 오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속에 오셨다는 것이다. 곧 그 당시 지중해 연안을 다스리고 있던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유대 땅에서 탄생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자라시고 활동하시던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예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 자라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을까? 이것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 당시의 정치, 경제, 종교적인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I. 정치적인 상황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유대 땅은 헤롯 대왕(주전 73년-주전 4년)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이두매 출신이었지만, 안토니우스의 총애를 받아 로마 원로원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받았다(주전 40년). 그는 통치 기간 중 가이사랴 항구 건설, 사마리아 건설, 헤롯 궁전 건축과 예루살렘 성전 증축과 같은 공공사업을 많이 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말년은 가족간의 불화로 인하여 비참한 생애를 보내었다.
주전 4년에 헤롯이 죽자 그의 세 아들 사이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이들은 로마로 달려가 자기가 적법한 왕위 계승자임을 주장하면서 왕위를 요구하였다. 이들의 주장을 다 들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은 팔레스틴 지역을 세 부분으로 분할하기로 결정하였다. 먼저 아르켈라우스(Archelaus)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를 다스리는 '민족왕(ethnarch)'으로, 안티파스(Antipas)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tetrarch)'으로, 빌립(Philip)은 트란스요르단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tetrarch)'으로 삼았다. 그러나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인들과의 잦은 충돌과 불화로 인하여 오래 통치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의 고소로 주후 6년에 파면되었다. 그 후 유대 지역은 로마 황제의 직할 통치 지역으로 변경되었다. 그리하여 유대 지역은 로마 황제가 임명한 '총독'들이 와서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할당받은 안티파스는 비교적 온건하게 통치하여 오랜 기간 재임하였다. 그러나 안티파스는 그의 이복동생 빌립(분봉왕 빌립과 다른 사람임)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인하여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였으며, 후에는 헤로디아의 지나친 권력욕이 화근이 되어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주후 39년). 한편 트란스요르단 지역을 할당받은 빌립은 무난하게 죽을 때까지 통치하였다(주후 34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헤롯 대왕이 죽기 직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주전 4,5년경). 헤롯의 진노를 피하여 잠시 애굽 땅에 가서 지내시다가, 다시 귀국하여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리 지역인 나사렛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셨다. 나이 서른쯤 되어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는 주로 갈릴리 호수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셨다. 가끔 유대 지역으로 가시기도 했는데, 거기에는 유대의 총독 빌라도가 다스리고 있었다(주후 26-36년). 그러나 총독은 스스로 유대 지역을 다 다스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세금 징수를 비롯한 상당한 부분을 유대의 자치기구인 산헤드린(공회)에 의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 총독이 가지고 있는 병력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총독은 매사에 유대 지도자들과 군중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하에서 예수님은 유대의 지도자들의 모함과 기회주의적인 로마 총독에 의해 처형되었다(주후 30년경).
2. 경제적인 상황
주후 1세기 전반의 팔레스틴은 로마 제국의 평화로 인하여 자유로운 통행과 무역이 보장되었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는데, 특히 갈릴리 지역에서 농업과 어업이 발달하였다. 갈릴리 주변의 비옥한 땅으로 인하여 산출은 많았으나 빈부의 차가 심하여 일반 주민들의 생활은 대체로 어려웠다. 자영농 외에 대토지 소유주와 소작인들, 그리고 종들이 있었다. 소작인들은 소작료로 산출의 3분의 1 내지 2분의 1을 주인에게 바쳤다. 그 외에도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세금을 내어야 했다. 세금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오늘날의 직접세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토지세'와 '인두세'가 있었는데, '토지세'는 주전 63년 이래로 로마에 납부해 왔다. '인두세'는 소득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부과되는 것이었는데 많은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의 간접세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용세'가 있었는데, 이에는 수입세와 수출세, 도로, 항구, 시장 사용에 대한 세금과 물품세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세금을 징수하는 방법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달랐다. 유대 지역에서는 '토지세'와 '인두세'는 총독의 관할하에 있었다. 그러나 총독이 그 업무를 다 수행할 수는 없었으므로 산헤드린이 징수 책임을 맡았다. '사용세'와 '통과세'도 총독의 관할하에 있었는데, 그 징수 권한을 '세금청부업자들(tax-farmers)'에게 하청 주었다. 갈릴리는 자치 지역이었기 때문에 분봉왕 안티파스의 관할하에 있었는데, 그 징수 업무는 지방 공회에 맡겼다. '사용세'는 세금청부업자들에게 하청 주었다. 세금청부업자는 자기 밑에 직원들을 두어 징수업무를 감당하게 하였다. 복음서에 자주 나타나는 '세리'는 대개 세금청부업자 밑에 고용되어 일하는 직원으로 생각된다. 세리 마태가 이에 해당된다. 한편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세금청부업자로 생각되는데, 그는 어마어마한 부자였을 것이다(눅 19:1-10). 그러나 이런 청부업자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세리들의 월급은 형편없이 작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부패가 만연하였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죄인시하며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3. 종교적 상황 ([교회와 교육] 97년 6월호 pp.20-27)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는 여러 종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있었다. 그리고 서기관들도 자주 증장하며 열심당원인 셀롯인도 등장한다.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가 된 사람도 있고, 예수님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하며 어울린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예수님을 대적하고 방해하는 무리들로 나타나며 때로는 심하게 충돌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서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들 종파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들 종파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들은 왜 예수님과 충돌하고 배척하게 되었을까? 이런 것들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사두개인들
'사두개인'이란 이름은 대개 다윗 시대의 제사장 '사독'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파의 중심 세력은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인데, 세습 귀족들과 신흥 부자들이 합세하였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서기관들 및 장로들과 함께 산헤드린 공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는 의장을 포함하여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았다. 예수님 당시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제사장은 안나스였다. 그는 주후 6년부터 15년까지 공적인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퇴임 후에도 사위 가야바를 대제사장에 앉혀 놓고서, 35년에 죽을 때까지 계속 배후에서 산헤드린을 조종하고 있었다. 복음서에 보면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그는 산헤드린에서 제일 먼저 의견을 발표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군병들과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잡아 제일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는데(요 18:13), 이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은 로마의 권력과 밀착되어 있었다.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기 위해서는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쪽에서도 사두개파 사람들을 이용하였다. 산헤드린은 유대의 내부 행정기관으로서 율법 문제에 있어서 자치권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로마 총독이 다스리고 있는 유대 지역에서는 직접세에 관한 한 산헤드린이 그 징수 책임을 맡아 그 업무를 수행하였다. 따라서 로마 총독 편에서도 이 산헤드린의 요구를 쉽사리 무시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의 총독은 수리아 사절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병력을 소유하고 있지도 못했다(약 3,000명 정도: 가이사랴에 2,500명, 예루살렘에 500명 정도). 이러한 권력 관계는 복음서에서 빌라도의 유약한 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자신은 원치 않았지만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의 압력에 밀려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말았다(눅 23:13-25).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대제사장들이 로마 군병들을 꾀어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도적질하여 갔다"고 말하라고 시키면서, "혹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거든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고 한 것은(마 28:13-14), 그들이 얼마나 로마의 권력과 밀착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사두개인들의 사상은 한 마디로 '정의(正義)'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전통'의 권위를 부인하고 오직 문서화된 '율법'만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된 일은 재판하고 율법의 규정을 따라 엄격히 시행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부차적인 전승(傳承)이나 인간의 가르침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사두개인들은 또한 사후의 영의 존속이나 부활을 믿지 않았다(행 23:8 참조). 그래서 그들은 사람은 자신의 과오에 대해 이 지상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현세에서의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잡혀서 죽으신 것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결국 이들 사두개인들의 권력에 도전했기 때문이었다(마 27:18). 곧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막대한 이권(利權)을 누리고 있던 대제사장들 세력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할 뿐만 아니라(마 21:12-17),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사두개파 사람들의 지위가 위태롭게 되었기 때문이다(요 11:47-53).
2)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한다. '바리새인'이란 원래 '분리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온 것으로서 '분리된 자'를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리주의자'란 뜻은 아니고, 이방인들의 부정하고 가증스러운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구별하고 정결하게 살고자 하는 무리라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은 일종의 '청교도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바리새인들은 주전 167년에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의 헬레니즘화 정책에 반대하여 일어난 마카비 일가의 저항운동을 따르는 '하시딤'(경건한 자들)에게서 기원하였다.
이들의 사상의 핵심은 한 마디로 '정결(淨潔)'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과 규례들을 철저히 지킴으로 정결 이념을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기본적인 법규범으로 보고 이를 해석하고 연구하였다. 이러한 해석 전승은 '조상들의 유전'을 형성하게 되었는데(마 15:2, 막 7:5), 이에는 율법의 법규들을 해석한 전승인 '할라카(Halakah)'와 성경과 관련한 민담들 또는 교훈적인 예화 전승인 '학가다(Haggadah)'가 있다.
이들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하였다. 특히 정결 의식들을 엄격히 준수하였다. 그들은 왼쪽 팔 소매에 기도문 조각들을 매고 다녔으며 옷단의 사방 구석에 성구 넣는 갑을 만들어 매달고 다녔다(마 23:5). 그들은 십일조를 철저히 하였으며(마 23:23),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였다. 또한 특별한 안식일 식사를 하였고(눅 14:1), 자선 베푸는 것과 가문의 경조사에 참여하는 것 등을 열심히 하였다. 이들은 또한 영혼 불멸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을 믿었다(행 23:8).
그리하여 바리새인들은 백성들 사이에 존경을 받았으며, 서민들 가운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예수님 당시에 실제로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지배한 그룹은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종종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심하게 꾸짖으셨다. 왜냐하면 시작 당시의 율법을 위한 순수한 열정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차츰 쇠퇴하고 타락하여, 예수님 당시에는 주로 외적인 모습만 남아서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면 부지런히 손을 씻는 것이라든가, 정확하게 십일조를 떼는 것, 그리고 기도와 금식을 많이 한다는 표를 내는 것 등 외적이고 형식적인 일들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구제할 때 길거리에서 나팔을 불었으며(마 6:2-4), 기도할 때에도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마 6: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고 하셨고(마 23:25),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라고 책망하셨다(마 23:28).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참 종교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겉만 꾸미는 바리새 종교는 도무지 어울릴 수 없었으며, 따라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곳곳에서 심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바리새 종파의 큰 잘못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점점 성경에서 멀어지고 그 성경을 해석한 인간의 가르침을 더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장로들의 유전'을 더 따르고 있었다. 그 일례로 '고르반'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제5계명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서는 밭에서 나오는 식물 중 얼마를 떼어 부모님께 드려야 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가르치기를, 만일 그 밭이 하나님께 드린 바 되었으면(즉 고르반) 그 밭에서 나는 것으로 부모를 섬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밭을 '고르반'이라고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 드린다는 기한 표시가 없다는 것이 이 제도의 묘미였다. 그래서 실제로는 그 밭에서 나는 것을 자기가 다 차지하면서 종교적으로 거룩한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하였다(막 7:13). 그들은 그들의 교묘한 인간의 가르침을 통해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제5계명을 폐하고 말았던 것이다.
3) 서기관들
바리새인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나는 사람들로서 서기관들이 있다.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 출신이지만, 이 둘 사이에는 약간의 구별이 있다. 바리새인은 바리새파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반 대중들을 뜻하지만, 서기관은 오랜 기간 동안 엄격한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이며 종교 지도자를 뜻한다. 즉 바리새인들이 평신도라면 서기관은 교역자이다. 서기관은 율법을 해석하고 그것을 생활 가운데 적용하고 가르치며, 또한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함께 산헤드린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서기관의 기원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 겸 학사인 에스라(에 7:11)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관이 되는 데에는 출생이나 혈통과는 무관하였으며, 엄격한 공부를 통해 일정 조건을 갖추면 누구나 서기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공부와 훈련은 대단히 힘든 과정이었다.
저명한 서기관들 주위에는 학생들이 몰려들었는데, 학생들은 수업료를 내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율법 공부와 함께 엄격한 생활 훈련을 받았다. 서기관식 교육에 의하면, 선생은 앉아서 가르치고 학생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공부했다.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자기의 학창 생활을 회고하며 말할 때 "가말리엘의 발 아래에서" 배웠다고 했다(행 22:3). 공부가 다 끝나면 장엄한 임직식을 통해 서기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서기관은 보통 '랍비'라고 불리우며 백성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랍비'라는 말은 원래 '나의 큰 자'란 뜻인데, 나중에 서기관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가 되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이것을 단순히 '선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요 1:38).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자체를 따르기보다 인간의 해석과 유전을 더 따랐으며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을 좋아했으며, 모든 것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함께 묶어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책망하셨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으며(눅 16:14), 서기관들도 마찬가지로 예물과 금을 중요시 여겼다(마 23:16-2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백성들을 가르치고 지도했으니 그 당시 유대의 종교적 상황이 어떠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소경된 인도자'라고 불렀던 것이다(마 23:16).
4) 에센인들
에센인들은 신약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한 종파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집단이다. '에센인'이란 말은 원래 '거룩한 자들'이라는 아람어에서 왔는데,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이 이끈 공동체라고 한다. 이들은 오니아스 3세 이후의 대제사장인 야손(주전 174-171년)과 그 후계자들을 부당한 찬탈자로 간주하고, 예루살렘을 떠나 팔레스틴의 마을들과 도시에 따로 모여 살면서, 수도원과 비슷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 '제의적(祭儀的) 거룩성'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사해 부근에서 생활했던 쿰란 공동체이다. 1947년에 사해 부근 광야의 동굴에서 여러 항아리들을 발견하였는데, 그 속에는 구약 성경과 그리고 그 공동체의 규칙과 사상을 적은 두루마리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오늘날 학자들이 이 문서들을 연구함으로써 그 당시 쿰란 공동체의 생활과 사상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공동체에 가입하는 사람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헌납하였으며 재산은 공동소유로 하였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을 부정(不淨)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가입 지원자는 1년간의 시험 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이 기간을 무사히 통과하면 '결례'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여기서 '결례'란 매일 정오쯤 공동 식사 전에 함께 목욕하는 의식을 뜻한다. 그 후 다시 2년이 경과해야만 완전한 회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그제야 비로소 '공동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공동 식사에의 참여를 허락하기 전에 엄숙한 맹세를 하였는데, 이 중의 하나는 불의한 자를 미워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공동체 생활은 엄격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재정을 허위 보고하면 1년간의 추방과 식사량 4분의 1 감축의 벌이 내려졌다. 회집 중에 졸면 30일간 벌을 받았으며 큰 소리로 웃어도 30일간 벌을 받았다. 안식일을 엄수했으며 안식일에는 헛소리를 금하고 1,000 규빗 (약 500 m) 이상의 통행을 금지하였으며, 긴급 처방도 금지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결혼하지 아니하고 독신으로 지낸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혹시 이 에센파 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과 에센인들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쿰란 공동체의 '결례'는 매일 점심 식사 전에 하는 반복적인 목욕이었던 반면에, 요한이 베푼 '세례'는 단 한 번만 베푸는 단회적인 회개의 세례였다. 또한 에센인들은 "불의한 자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5:44). 뿐만 아니라 안식일 문제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은 하실 수 있다고 하셨다(눅 6:19).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집단을 이루어 따로 살 것을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 한 가운데 두셔서 '세상의 빛'으로서 이 세상을 비추게 하셨다.
5) 셀롯인들
셀롯인은 다르게는 '열심당원'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원래는 바리새인들이었다. 주후 6년에 아르켈라우스가 물러난 후 로마가 유다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을 때 로마 정부는 효과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등록하게 하였다. 그러자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일부가 떨어져 나가 로마 정부에 항거하였다. 그들은 로마 황제를 '주(Kyrios)'로 부르기를 거부하며, 무력으로 로마 정부에 저항하였다.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리기보다도 스스로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려고 하였다. 갈릴리 유다가 그 중 한 지도자였다(행 5:37). 이들 중에는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도 있는데, 곧 셀롯인 시몬이다(눅 6:15).
그러나 셀롯인들은 계속되는 로마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소멸되지 않았다. 주후 66년에 유대와 이두매와 갈릴리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때 셀롯인들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주도해 나갔다. 결국 주후 70년에 티투스(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2년여 동안의 예루살렘 포위 기간 동안에 죽은 자가 약 120만 명이며, 반란군의 지도자 요한과 시몬은 포로로 잡혀서 로마로 끌려가 로마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롯인들은 계속적인 저항을 벌여 제2차, 제3차 유대인의 전쟁을 일으켰으나(115-117년, 132-135년) 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서 열 두 영(營)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게 하여 그를 잡으러 온 무리들을 물리칠 수도 있었지만, 그런 무력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만일 그렇게 하셨더라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다. 수욕과 멸시와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속(贖)하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참 생명을 얻었다. 오늘날도 이 세상은 무력과 권력으로 인간의 뜻을 이루려 하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4)고 하신 말씀을 따라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기도로 나아가는 영적 군사들인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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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야거스마, [신약 배경사], 솔로몬, 1993, pp.259-265.
M. Smallwood, The Jews under Roman Rule, Leiden: E. J. Brill, 1981, pp.144-200, 256-330.
<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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