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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

by 은총가득 2020. 11. 16.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 선포의 현재성과 그 도래

 

신약적 의미에서의 성결

 


제 1 장 허물이 없다고 완전해진 것은 아니다.

스펄존은 "신자가 불신자 보다 도덕적으로 볼 때에 높은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이 신자의 자리보다는 더 높은 은혜스러운 자리가 있다"고 말하였다. 즉 그는 신자에게는 성결된 생활이 있다고말하고 있다. '성결'이란 말은 종교적인 생활과 그 발달하는 단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전부를 여기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의롭다는 것과는 떠나서 특수한 체험으로 나타내는 한정된 의미로 쓰이는 일도 있다. 이런 의미로 성결은 우리의 영혼에서부터 죄의 요소를 물리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또 성결이란 원죄에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카-라일은 '성결'이란 독어로 하이리그(Heilig)인데 이 말은 건전하다는 뜻이고, 영어로 홀(Whole)과 같은 뜻으로 이 '거룩'이란 건전한 것 즉 건강하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성결은 하나님이 우리를 적극적으로 사랑하신 은혜에 쌓이고 성령의 충만하심이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경험이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했을때 구체적으로 그의 요구를 들어주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거룩한 생활을 하다가 휩쓸리기 쉬운 잘못을 낱낱이 들어서 주께 간구한다면 한결 성결이 무엇인지 속히 깨닫게 될줄 안다. 도덕적인 죄는 완전히 씻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완전케 되려면 하나님의 손에 흙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다시빚으실때 가능한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실때까지 진노할 바가 없도록 우리를 지키는 도리 밖에는 없는 것이다.
제 2의 아담인 주님의 율법을 우리에게 내리심은 죄로 인하여 완전한 율법을 지킬수 없기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땅에서 이룩할 수 있는 완전이란다만 사랑으로서 우리의 동기와 마음자리를 그리스도께 완전히 두는 것을 말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의 결과를 보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보신다. 온전한 사랑이란 언제나 그 성공하는 결과를 가르킴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온갖 행동에 지성을 다하여 바치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인 것이다.

 

제 2 장 성결과 유혹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에 왕으로 오신 다음부터는 싸움이 멈춰지고 육에 붙은 정욕과 원죄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썩게하는 것들과는 싸움이 끝나게 된다. 우리가 유혹을 받는다고해서 성결 해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을 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시험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히4:15)분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유혹은 언제받는가 그것은 때때로 은혜를 충만하게 받기 전과 다음에 오는 예가 많다.
왜 주님은 유다가 도적인줄 알았지만 돈 주머니를 맡기셨는가?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각기 돈궤를 맡기고 계신것이다. 돈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성심을 다루어 보시는데는 가장 좋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혹이 심한 가운데 유혹을 이기고 충성심을 보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혹을 묵인하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약한 곳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은 유혹뿐이며 그 유혹을 이겨내면 약한 곳이 강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결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 마음 속에 악을 품지 않았으므로 악념이란 없을 것이나 밖에서 들어오는 사상과 악한 귓소리는 틈틈히 들어오므로 그 때마다 이를 물리치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것은 유혹을 만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유혹에 빠진 결과가 죄라는 사실이다.

 

제 3 장 죄는 없어도 산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는 유일한 비결은 늘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완전한 길을 얻기 위한 우리에게 요구되는 댓가인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죄와의 싸움의 끝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시기 뿐이다. 성결한 자는 죄를 못짓는 것이 아니라, 안짓는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리는 크리스챤은 죄를 범하지 않는자라고 한다. 그러나 범죄하지는 않아도 범죄할 가능성마저 없는자라고는 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고 그 죄에 대해 하나님께고하면 하나님은 긍휼히 보시고 다시 더럽히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죄를 깨끗케 하신다. 신약에서의 죄란 그것이 죄인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짓는 죄를 말한다. 바꿔말하면 무의식 중에 지은죄에 대해서는 죄에 대한 댓가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을 행한다고해서 율법이 필요치 않는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를 용납하고 시시 때때로 주님의 죽으심의 공로를 받아드리고 또한 지금까지 주님이 날 위하여 죽으신 그 은총 아래서만 살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과실이나, 연약함으로 불가피하게 죄를 짓게 된다. 그러나 거듭난 자에는 그리스도께서 도우시는 힘으로 죄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방법은 죄에 대하여 피하거나, 숨을 곳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악에 대하여 이길힘을 주심이다. 우리는 약하다 그러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것을 할수 있느니라(빌 4:13)는 말씀과 같이 우리에게 힘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것을 할 수 있는것이다.

 

제 4 장 죄 사함과 정결함

범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고의로 범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심령이 부패했다는 말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으므로 그것이 자손에게 유전하여 대대로 마음의 발판을 이루었으므로 이를 가리켜 선천적인 죄(원죄)라고 말한다. 곧 죄의 구조는 원죄인 부패로 말미암아 죄를 낳게 되는것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음으로 짓는것과 행위로 짓는죄가 있듯이 구원의 방향도 두 갈래가 있다. 범죄는 구속으로, 부패는 정결함으로 구원의 행위를 이루어 놓으신다. 이때 범죄는 용서하실 수 있으되 부패함은 반드시 정결하게 함으로만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구원에 대해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이유는 그가 첫 구원의 감격을 맛보았을때 자신의 추한고 더럽고 썩은 모습을 바라본다면 그는 믿음이 자라기도 전에 그의 믿음이 끊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러서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것이다.

 

제 5 장 신생과 완전한 성화

누구든지 새로운 성격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생이란 성결의 시작이다. 이것은 완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신생은 더러움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한 상태이다. 즉 신생에서는 죄가 억제되고 정복 당하는 것이지 그 죄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완전한 성결은 최고의 완성이며, 신생된 자에게 남아있는 성결의 적을 영혼밖으로 몰아 낸 다음 오는 상태이다. 불로서 금을 연단하듯 성결은 악독한 뿌리며 죄악의 싹들을 전부 없이 하여 버리는 작용이다. 이때가 되면 하나님을 반항하는 것은 하나 없이 마음에 화평의 왕으로 모시는 온전한 혁신이 있게 된다.
롬6:6에는 "멸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비평적 연구결과 '소멸한다' '망한다' '폐한다'의 뜻으로서 적극적 번역을 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구약에서도 죄에 대하여 몰아 내도록 권고한 말씀은 없고 도리어 '버리라' '제하라'라고 나와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말한 거룩(살전5:13)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성별된 것을 말하며 또 하나는 맑고 깨끗하게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이다. 바울은 이 거룩을 '온전히 '(가장 힘있는 표현)라는 단어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제 6 장 순결함과 그 열매

모든 것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성결에는 그 정도의 차이조차 없다. 영어의 깨끗함이란 말은 그 뜻에 있어서 잡것과 완전히 떠난 후 혼합물이 없는 상태라고 웹스터 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즉 순수한 상태를 말한다.
'결실'이란 말은 깨끗함은 물론 그 보다 더욱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성결에서는 마음의 깨끗함과, 그리스도인의 덕으로서 이룬 결실을 구별하고 있다. 마음의 깨끗함은 유일회적 섭리이며 그리스도인의 덕으로 이룬 결실은 교육과 훈련으로 기른 다음의 상태인 것이다. 고후7:1의 말씀에서 '깨끗하여 지자'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깨끗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넘치는 은혜를 허락하심 같이 성결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결국 깨끗함에는 그 결실이 없다. 그러나 깨끗함이 바탕이 되어야 사랑의 열매와 다른 영적인 결실을 맺을수 있는 것이다. 즉 깨끗하여 진다는 것은 죄를 몰아내는 것이며 그 때부터 결실을 거둘 수 있는 밭과 같은 것이다.

 

제 7 장 성결은 현재에

성결이란 죄에서의 구원을 말함으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일어났다. 첫째. 타고난 더러움은 거듭난 후에도 남아있는가? 둘째. 만약에 더러움이 남아있다면 영원에서 부터 몰아낼 수 있을까? 셋째. 몰아 낼 수 있다면 그 때는 언제일까? 하는 것이다. 크리스챤들은 먼저 두 가지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말들을 하지만 세번 째에 와서는 의견이 나누어 진다. 어떤이는 죽은후 구원함을 받는다고 하고, 어떤이는 오랫동안 영적으로 성장한후에는 죄가 소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즉시로 죄에서 구속함을 받는 경험을 믿는다. 성경에는 성결을 받는 시기와 방법과 장소는 가르쳐 준바가 있지만 반드시 먼저 죽어야 구원이 온다고 가르친 곳은 없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기전에 우리를 온갖 죄에서 구원하신다. 즉 온전한 성결은 이세상애서 가능하다는 말이다. 성결은 진행과정을 의미한다. "찬송할지어다 깨끗함이여" 에서 이말은 현재 진행형으로 쓰여있다. 즉 "깨끗해 간다" 이다. 이말을 하바갈 여사는 "계속하는 현재 즉 끊임없는 현재이며, 지금 현재가 다음 순간에는 과거가 됨이 아니다. 깨끗하기 위하여 우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우물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훈련을 가져야 하며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은 물론이요 우리의 헌신도 확대해야 하는 것이다.

 

제 8 장 하나님께 사로잡힌 영혼

성결은 마음에 있는 모든 죄를 물리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방향은 소극적 면과 적극적 면이 있다. 회개할때의 소극적인 부문은 속죄이고, 적극적 부문은 거듭남 즉 새생명을 얻는 것이다. 소극적 부문은 육에 붙은 정욕을 씻는 단번에 되어진 상태이며, 적극적인 은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하게 채우는 일이다. 즉 의롭게 됨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감이요 거룩하게 됨은 그리스도가 우리안에 들어오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음을 주님께 맡길때 거룩은 가능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안에 계시고 영원히 떠나시지 않으신다.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3)고 하셨다. 이와 같은 말씀은 구약에서는 듣지도 못하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천할지라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받들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안에 거하신다. 이제 우리는 겨우 죄에서만 벗어난 것이 아니라 평안과 기쁨과 승리의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는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을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내 뜻이 마지막으로 주께 항복할 때에야 비로소 생명의 부활이 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일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 하리니 나는 나의 전부를 영원히 주께 바치고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곳마다 따르기로 했다"고 결심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는 우리를 주관하시는 것이다.

 

제 9 장 완전한 사랑

신약에서 쓰이는 사랑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피로스이며, 이것은 자연적인 인정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하나는 아가페로 이것은 성령을 통해서 영혼으로 내려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자연적인 사랑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나라안에 살기 전에는 얻지 못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내리셔서 그 사랑이 우리의 것이 되면 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하신 기도의 내용인 것이다. 이제는 "내가 저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그때 우리는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잃어버린 양을 돕는 주의 일을 하게되며, 이러한 동포에게 행한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증명되는 것이다. 또한 이때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무서워서가 아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럴때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바로 이 사랑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다.

 

제 10 장 복음적인 완전

완전을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 가노라"(빌3:14;5)라고 하였다.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온전히 성결된 형제의 내적 영혼이나 기질이 주 안에서 사는 도덕적 기백을 말한다. 즉 완전이란 마음 구석구석까지 주님이 들어 오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완전은 절대적 완전이란 뜻이 아니고 그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함 같이 하늘에서의 완전은 획득하기 보다 [승리의 면류관을 받고 비로소 그가 달리는 길은 끝난다]라느 말씀을 우리는 주의하여 보아야 하겠다. 누구든 크리스챤의 완전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것은 잡힐듯 하면서도 사실은 우리 보다 언제나 앞에 있는 목표점이며 일생을 두고 부질없이 달려가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명령을 받은 자이며 이를 얻도록 지시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이 경험은 현재의 것이어야 한다.
복음적 완전은 다음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우리 각자의 능력에 비하여 내리신 사랑의 완전 둘째, 우리의 형편과 재능과 힘이 더하여 감에 따라서 동행하는 사랑의 발전 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원하시며 또 그 완전한 사랑을 실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약속이라 생각된다.

 

제 11 장 성령의 충만

성령의 세례는 죄에서 깨끗케 하셨음을 알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충만하심은 곧 성화됨과 같은 뜻이다. 이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오는 것이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령의 세례는 오순절 때와같이 승리의 생애를 시작하는 출발하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에 밝히 나타남과 같이 모든 신자는 다 같이 성령과 사귄다는 것이다. 이 성령은 마음에 오시면 사랑의 불이 되어 그 능력에 불붙이는 기름병이 되시는 것이다. 오순절에 내린 성령은 그 다음에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내리실 것이라는 보증금과 같은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난 다음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는 특권이 되는 것이다. 주시려는 그 은혜에 우리가 순종하고 받아들인다면 연약한 자에게라도 무한한 선물로서 주어질 것이다. 성령의 오시는 모습은 때로는 이슬과 같이 내리며 때로는 조용한 봄비와 같이 내리며 혹은 사나운 소낙비와 같이 쳐들어오기도 한다. 받는 자에게도 혹은 성령이 임재하실 때 넘어지도록 무섭게 오시기도 하며 혹은 기쁨과 확신 속에 오시기도 한다.

 

제 12 장 산제물

구약시대에 드린 희생의 제물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속죄를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표로서 드리는 제사이다. 신약시대에 속죄제는 갈보리에서 어린양의 보혈로 온전히 이루어 놓으셨으나 헌신하는 제사는 아직도 교회에서 계속한다. 산제사는 과거 율법아래 묻혔던 희생의 제물과 좋은 대조가 되는 말이며, 이것은 불에 사르는 희생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몸바쳐서 일생봉사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제사는 속죄를 위한 것과 또 하나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표로서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밝히 보여주시는 뜻에 따라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산제물이 되어야 한다. 즉 주님께 우리의 영육을 바쳐 그의 절대적 명령에 순종하고 먹으나 굶으나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표준에서 비추어 볼 때는 비천하고 나약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안에 계시고 우리 행동을 주관 하시면 이 타락한 세상에서도 주님의 역군이 되기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주님께 헌신한 것에서 얻어지는 그 이들은 세상의 어느것과 비교할 수 없으며 생명에 이르는 문인 것이다. 물론 그 길은 멀고 험난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길로 부르시고 순종하도록 마음을 녹이는 것은 곧 자비하심인 것이다.

 

제 13 장 하나님과의 동행

성결이라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고 길이다. 또한 길만이 아니고 속죄함 받은 자가 걸어갈 큰 길이다. 우리가 이길을 걸을 때에는 항상 그리스도와 행동할 수가 있다. 하나님과의 함께 걷는 길은 길동무, 사귐, 진보 이 세가지가 있다.

1) 길동무
이 사귐은 어느 물질로도 막을 수는 없고, 또 시간,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사귐이다. 이야말로 참된 마음의 벗이며, 참 사랑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이와 같은 것이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신다. 이것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인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것이며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긴요한 비결인 것이다.

2) 사귐
크리스챤이 사귐이라 할때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내가 영적으로 결합한 것을 의미한다. 서로 말하는 동안 상대자와는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이때는 서로의 고통을 나눌 수 있고 해결 책을 주기도 한다. 신약에서는 주님과 신자간의 사귐을 개인적으로 알고 친구로서 사귀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사귐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말하며 듣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들어야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서 말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주께서 달리시는 십자가도 친구로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그 은혜를 내리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섭리하시는 바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주님과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너무도 번잡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3) 진보
하나님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걸으면 우리도 후퇴 할 까닭이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보를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 감사하고 주께서 나에게 계시는 동안 그리스도의 형상을 서서히 완전해 가는 것이다. 진보는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길에 따라가는데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의심없이 믿고 거역함 없이 순종하는 그 믿음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가리킴을 받고 나아가는 자이다.

 

제 14 장 비율라의 언덕
존 번연의 책 천로역정에는 순례자가 죽음의 강을 건너기 전에 비율라의 세상을 지나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그는 약속의 땅을 생각한다. 바울은 그곳을 가리쳐 하늘 곳 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존 번연은 이를 가리켜 비율라의 땅이라고 기록한다. 이 하늘 곳은 하늘 나라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죄와 슬픔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마음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가 계신 곳은 비록 이 세상이라도 하늘 나라이다. 하늘 나라는 장소보다 영적 분위기를 이룬 곳을 말한다. 하늘 나라는 어느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영적 분위기를 이룬 곳을 말한다. 하늘나라는 장소 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어느 저자는 이 비율라를 천국 가는 길가의 작은 천국이라고도 하였다. 사람들은 천국은 죽은후에 갈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믿는 우리들에게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만약 믿음만이 비율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라면 우리는 믿음을 얻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제 15 장 영혼의 안식처

우리가 의식하는 안식이야말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자에게 무엇보다도 뚜렷한 증거의 하나이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바를 말하면 이 안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수고를 쉬게하는 안식 둘째, 번뇌와 공포에서 벗어나는 안식 셋째, 속 싸움을 그치고 쉬는 안식 즉 마음속의 뿌리 밖은 죄에서 구원하는 안식을 말한다.

1. 이 안식은 우리의 수고를 끝맺는 안식이다.
많은 신자들이 잘못되는 원인은 곧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일생을 보내려고 하는데 보다 자기의 결심으로 생애를 잘 보내려는데 있다. 복음의 방법은 우리의 의지를 강철같이 굳게 단결해서 반드시 이기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혼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바치는데 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의 잘못된 점은 자신의 일생을 자기의 결심으로 보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며 우리는 눈을 들어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자신의 맹세에 의거하여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실패 하는 것을 보게 된다.

2. 이 안식은 장래의 불행과 재난의 심령에서 떠나는 안식이다.
모든 염려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마음이 깔려있다. 안정성의 비결은 의뢰함이다. 우리를 위하여 세워두신 하나님의 계획은 그 어느것 하나도 하나님의 뜻인 이상 염려할 것은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실수를 염려할 필요가 있는가? 완전한 의뢰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분만을 의지하여야 한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뜻은 곧 완전한 의뢰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완전한 만족이 온다는 것이다.

3. 속마음의 안식
안식이란 싸움을 끝내는 것이다. 곧 안식을 얻는 자는 육과의 싸움을 그치는 자이다. 이제는 더이상 싸움을 하지 않고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을 밖아 버린다는 것이다.

 

제 16 장 교회에 남긴 그리스도의 유산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그 유물들을 아래와 같이 분배 하였다. 그 영혼은 천부께, 몸은 아리마대 요셉에게, 옷은 군병들에게, 어머니는 요한에게 그러나 주를 위해 모든것을 버리고 따라 다니던 제자들에게는 은이나 금을 주신것이 아니라 평안이다. 그러나 이 평안은 하나님께로 부터오는 평안이며 하늘로부터 믿는 자의 영혼 위에 내리는 평안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과 화목한 자라고 하겠으나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평안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이 평안은 사람들이 작 중심으로 살 때에 일어나는 불안과 염려와는 반대로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함에서 얻어진 평안 곧 주 예수께서 [나의 평안]이라 부르신 평안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정과 형편이 평안할 때 안정하기란 쉬운 일이지만 고난과 걱정의 물결이 닥칠 땐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안은 이러한 폭풍속에서도 조금의 동요도 없는 것이다. 이 평안은 오로지 주님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은사를 구하지만 말고 먼저 주를 찾아야 한 것과도 같다. 그리스도의 평안은 세상 끝날 까지 영원히 안전한 대양에 이르기 까지 가득찬 축복으로 점점 더 깊어만 가고 넓어져 가는 강과 같다.

 

제 17 장 성령의 기쁨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유혹을 이기려면 저들보다 나은 음악과 기악이 있어 야한다. 세상의 기쁨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기쁨을 체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맛보게 되면 세상의 것에 대하여 눈을 돌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따라서 성령의 기쁨을 맛본자는 언제나 초연한 모습과 기쁜 낯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기쁨에 차 있는 성도의 얼굴을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까닭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마음으로 부터 노래하지 않고는 못견디는 지경이면 이는 확실히 성령이 임하신 증거이다.
챨스 웨슬레의 찬송가에 나타난 기쁨과 승리가 오늘날의 신자에게서 사라져버린 이유는 그리스도의 참된 구원을 각자가 실지로 맛보지 못한데서 왔다고 본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충만과 술마시는 것을 항상 동시에 취급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심을 받았을 때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제 18 장 봉사의 힘

영적으로 일하는 자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영적인 힘이다. 물론 다른 능력도 헛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에게 의존하지 않고 그 재주와 기능에만 의지한다면 위태롭다. 사람들이 거듭남도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그를 움직여 그 능력으로 구원해 내는 것이다. 성령은 한분이지만 받는 사람의 성격과 소질과 영적인 역량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진다.
오늘날도 성령을 받은 자는 그의 주변 여건과 자질과는 상관없이 그가 일하는 곳에서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성령은 사람이 공상하는대로 우리에게 그 성격을 빌리시는게 아니고 반드시 자신이 우리의 마음 안으로 임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내리시는 은사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능력으로 일년을 일하면 자기 힘으로 백년을 일 한 것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제 19 장 귀하게 쓰이는 그릇

크리스챤에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남을 해롭게도 않고 선한 사업을 힘쓰며 대체로 악과 멀리하며 하나님의 예배에 참석한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그들은 세상과 싸우려는 열심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분투하는 노력도 희미하다. 둘째는 악과는 물론 멀리할 뿐만 아니라 모두 착한일에 적극적이다. 저들은 모든 예배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성품대로 살아가려고 분투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야말로 귀하게 쓰일 그릇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안에서 귀한 인물이다.

1. 거룩해진 것
즉 하나님께 바치려는 짐승을 무리에서 구별한 첫 짐승을 일컫기도 하였다. 즉 보통 사용하는 것과 구별하여 신성하게 하기 위하여 쓰이는 말이었다. 이처럼 성화의 근본적인 사상은 떼어둔다는 것이다. 악한 것으로부터 멀리하여 그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토록 만들어 바칠때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이 거룩하기 위한 것은 헌신의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헌신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정결케 하신다. 우리가 헌신하자마자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행하신다.
그리스도인의 헌신을 주 예수의 날까지 온전히 이루어진 흠잡을 곳이 없이 보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주께 쓰이는 그릇
쓰임은 주인에게 알맞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사회인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는 파이프이다. 그러나 못쓰게 녹슨부분은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만 누구에게든 하나님의 은혜를 풍족히 나눠줄 수가 있을 것이다. 거룩한 교역자는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는 예리한 무기와도 같다. 성결과 쓰임은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이다. 아무리 그릇이 좋아도 그 그릇이 좋은 주인에게 쓰이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쓰여져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참된 믿음으로 돌아간 자라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대로 정결하게 씻기운 그릇이 되어야 한다.

3. 모든 선한일에 예비되는 것.
이말은 모든 봉사에 응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준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연한 일이라도 꼭 핌요하다면 크리소스톰의 말과 같이 죽기까지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음성을 들었을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한것같이 우리에게도 죄를 씻는 날 하나님의 부르심에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갈것이다.

 

제 20 장 헌신

크리스챤이 영적으로 거듭난 체험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두가지의 주장이 있다. 하나는 거듭나려면 사람의 의지에 중점을 두고 인간이 절대 복종해야만 한다고 주장이고, 다른하나는 은혜를 받으려면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완전히 주께 의지하려면 완전한 복종이 있어야 하며, 또 믿지 않으면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 두주장이 모두 옳다고 하겠다.
완전한 주님께 대한 의지는 완전한 복종과 또 그 믿음이 중요하다. 온전한 순종은 곧 헌신하는데서 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바에 따라 살고 그 뜻대로 고생까지 견디어 가는 자이다. 우리는 전부를 바쳐서 그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며 신실한 종으로 살려는 결심이 서야 한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자로 여겨야 한다.

 

제 21 장 거룩한 믿음

헌신과 온전한 거룩과는 서로 다르다. 즉 헌신이란 각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빌어 자기가 이룩할 일이며 거룩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오셔서 이루시는 바를 말한다. 온전한 헌신이 없이 성결함을 바랄수는 없다. 온전히 헌신한 다음에는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믿음으로 이루어주실 것이다. 속죄함을 얻으려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시키는데 어렵다고 느끼는 점은 곧 믿음이다. 거룩함도 자기의 수고를 끝내고 그리스도에게로 있는 바 전부를 의탁할 때에 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믿음을 [보는 것] [만지는 것] [얻는 것] 으로 나타난다. 즉 믿음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받는 손이다. 믿음에는 먼저 아는 것이다. 믿음은 약속이상이며 약속하신 분을 보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시므로 우리가 받는다] 는 말씀없이는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감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야 할 것이며 우리의 감정에서 출발하여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먼저믿고 다음에 아는 것이다. 감정없이 의지하는 바가 위험할 것 같으나 그러나 이것이 올바른 방법인 것이다. 그 다음은 그 약속의 말씀안에 있는 성령의 은사이다. 기다림이란 우리
의 온전한 믿음이며 모든 감정과는 떠나서 직각적으로 받아지는 선물이다. 우리가 받을 줄 믿는 시간에 하나님은 주신다.

 

제 22 장 구하는 자에게 권고하는 말

온전한 성결을 체험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이같은 교리는 아니라도 온전한 성결의 방향을 안다면 성결함도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정말 우리들은 위에서 나열한 것처럼 성령의 모든 것을 현재라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겠는가? 무슨 일이던 그 일에 성공을 확신하는 마음이야 말로 가장 큰 밑받침이 된다. 이와 마찬 가지로 이 거룩함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약속되어 있다.(겔 36:25) 많은 말씀가운데 가장 고마운 말씀은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신다]이다.
더 이상 일에 대하여 주저하지 말고 각오하고 나서야 한다. 우리가 만일 이 때를 잡지 못하고 놓친다면 우리의 노력은 약해지고 열렬한 소원도 식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결하라"하시는 말씀을 듣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겠노라고 단단히 결심하여 보라. 굳게 서서 물러나지 말고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만 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실것이다.
어떤 자는 자기도 유명인이 되려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성결의 은혜에서 오는 기쁨은 목표삼지 않는다. 저들의 소원은 안락한 생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의 어느 무엇에 비할 수 없는 매력에 끌려서이지 결코 하나님의 은사만을 보려는 것은 아니다.

 

제 23 장 은혜를 간직하는 길

은혜를 간직하려면 우리가 힘써 지켜가야 할 것이다. 한편에서 보면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진실하거니와 성령과 그 은사는 우리가 어떤 조건 아래서만 받은 만큼 우리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그 길에서는 절대로 돌아서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우리를 간직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은총이 어떤 경우에도 진실된 것과 같이 성결의 상태에서도 그렇다.

1.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
우리에게 빛이 비추이는 범위가 넓을 수록 헌신하는 도량도 커가야만 된다. 헌신하는 데도 초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되풀이 할 것은 없다. 다만 하루하루 이를 반성하고 확증함이 필요하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은 순종하면서 가지 않고 회피할 때에 하나님과의 사귐이 끝나는 것이다. 성경은 시종 여일하게 타협하지 않는 순종을 오래도록 요구하고 계신다.

2. 단순한 믿음으로 따라가자.
우리가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주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 안에 사는 것이다. 이때 성령은 거룩한 신자의 영혼에게 머물러 계셔서 저들에게는 혹 감각이 희미해질 때일찌라도 임재하신다. 유혹이 오고 의심이 일어나며, 믿음이 몽롱해질 때도 우리의 입장이 바로 서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시련이 지날 때까지 하나님은 참되신다고 주장하며 단순한 믿음으로 이 자리를 막아내야 한다.
우리는 의심의 구름이 엄습해 올때마다 하나님이 진실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지리라고 확신함으로써 우리의 신앙도 변화하지 말아야 한다.

3.하나님의 말씀을 깊히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라
우리가 만일 [하늘 곳]에 살려면 성경을 주요한 책으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때는 요나단이 꿀을 먹고난 다음 같이 눈이 맑아지는 법이다. 이 세상에 붙은 정신은 성경을 덮어 버릴찌라도 성경은 내 마음에 불로서 성경의 온갖 진리와 영광을 타오르게 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을 깊이 하고 죄의 자각과 강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힘을 얻으려면 항상 기도하고 끊임없이 성경을 배우는 것 밖에 더 중요한 것은 없다.

4. 기독교 사업에 열심으로나서야 한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또한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에게 줄 것마저 없어지고 만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방법으로 자기의 사생활을 모범적으로 행하는 일이 결코 직접적으로 불신자에게 주는 영향보다 값어치에 있어서 떨어지는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는 우리에게 붙여진 날개이다. 날지 않으면 그 날개가 필요없고 불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 의무는 짐이 될 수 도 있다. 하지만 날때는 그 날개에 대해 감사하게 될 것이다.

5. 결코 현재 서 있는 자리만을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깨끗함은 지식과 사랑과 성결된 생활로 들어가는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만일 은혜안에 자라려면 언제나 우리 보다 앞에 있는 것을 목표 삼아야 한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결정 지은 것도 없고, 최후의 단안을 내린 것도 없이 다만 성경을 간직하려면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끊임없는 힘을 쓰며 나아가야 한다.

 

제 24 장 심령의 주관자

선한 양심을 따라 하루하루 사는 일이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필수적 요건이다. 양심은 우리가 빛으로 따라가기를 요구할 뿐더러 모든 빛을 순종하고 힘써 빛 가운데서 일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양심이란 선한 방향만 제시하므로 지식과 건전한 판단력이 결여되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주장할지라도 결과적으로 큰 해를 끼칠수 있다. 만약 빛을 받지 못했다면 그런양심은 무서운 독재자를 낳을 것이다. 또한 불행중에도 교양은 쌓았으나 잔 걱정과 공포심에 쌓여있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평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안을 말하며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신 평안은 주님을 평안의 하나님이며 마음의 임금으로 모시게 될때 받아지는 정신적인 깊은 평안을 말한다. 평안히 우리에게 임재하면 우리는 자연히 영혼을 교란시킬 것은 피하고 잠시라도 주님의 얼굴을 가리우게 할 일에서 피하게 된다. 참으로 하나님의 평안을 마음의 주장자로 모시는 자는 복이 있다.

 

제 25 장 증거

웨슬레 전도의 동기에는 마음이 순결해졌음을 고백하는데 신중하게 권하다시피 하였으나 그의 교리와 체험이 널리 알려진 다음부터는 교역자나 신자에게까지 오히려 신앙간증하는 것을 의무로 삼도록 권장한다. 오늘날 가장 긴요한 것은 증거하는 교회, 산증거의 척도이어야 한다. 주님을 들어내는 것은 곧 우리에게 어떠한 분이심을 들어내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일을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셨는지 나타내면 이로 말미암아 믿음이 약한 영혼에게 힘주고 우리와 같이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열심을 품게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본 저서를 읽는동안 필자는 계속적인 도전과 함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인간에 대한 소망 즉 체험을 통한 성결의 모습에 대한 약속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그리스도인들이 행할수 있는 범위에서의 완전이라는 범위설정에서 그렇다. 만약 우리가 절대적인 성결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포기하고 말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걸러진 인간으로 행할수 있는 성결의 모습이기에 더욱이 희망이 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인간은 죄를 지을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본 저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피할길과 함께 그리스도로 더불어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상황

 


1.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쳤나? 미래에 오는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선포했나를 볼 때에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장래에, 미래에 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점을 우리가 어디에서 쉽게 볼 수 있느냐 하면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볼 수 있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중요한 요청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 하는 것이다. 아직 임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기도로 기도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기도제목으로 삼으라는 그말이다. 이 악과 고난의 세상을 종결시키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그 세상 세대를 빨리 가져오소서 하는 기도이다.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것으로써 미래에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써 dejure 법적으로 원칙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defacto누가 이세상을 통치하느냐면 사탄이 통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법적으로 이미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데 이 통치가 실제로도 defacto로도 세사에서 확립이 되어서 그러니까 하늘에서 하나님이 법적으로 뿐 아니라 실제로도 하나님이 통치하는 바와 같이 땅에서도 실제로도 defacto로도 하나님의 토치가 확립이 되어서 사탄을 완전히 결멸하고 타락한 세상과 인간들을 구원하시옵소서 하는 기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이가 있느냐면 예수께서 유대 묵시사상 곧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오는 새로운 세대를 말한다. 그런데 그 때는 미래에 오는 것이다라는 묵시문학의 사상을 예수가 이어받은 것을 여기서 우리는 확실히 알 수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과 묵시사상과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미래에 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며 모든 죄악이 일어나며 이 온 우주가 갱신된다는 새롭게 된다는 사상(마19:28)과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는 사상들을 가르치는데 이러한 것들은 다 예수가 묵시문학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마19:28을 읽어보라 거기에 세상을 새롭게 하며 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을 세상이 새롭게 창조되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타락한 이 세상이 새롭게 되고 새롭게 창조되는 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묵시문학과 비슷한 사상들을 가르쳤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다음 구절들을 집에가서 찾아보기 바란다. 막13:32/마24:42,50/눅12:46/마25:13/10:23/24:44/눅18:8/21:36 이러한 곳에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오는 실재로서 미래에 오는 실재에 대해서 유대의 묵시문학과 비슷하게 가르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제 이것도 묵시문학과 비슷한데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그러면 언제 온다고 보아쓴냐? 아주 가까운 장래에 온다고 보았다. 금방 온다고 보았다. 그래서 소위 imminent expectation 금방 온다는 사상이 예수에게 강하다. 마10:7/눅10:9/눅19:11/막9:1/눅21:31/막1:15. 이러한 데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미래의 실제인데 그것이 금방 도래한다고 그렇게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황(conditions)

 

이것을 우리말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느냐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유대교와 커다란 차이를 나타낸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별로 가르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체적으로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유대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또는 오는 세상을 아주 이 세상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에게는 이런 것이 별로 안나타난다. 또 이 구약성경과 유대교와 우리 신약의 전통을 상당히 많이 이어 받은 이스랆교에서는 종말에가는 파라다이스, 이 천국을 아주 물질적으로 그리고 있다. 유대교보다 더 물질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성전을, 이스람교를 위해서 전쟁을 하다가 순교를 하면 파라다이스의 제일 높은데로 가는데 그 가는 길목마다 아주 아름다운 천사들이 있는데 이 천사들과 가기 마음대로 결혼할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아주 육신적이고 물질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그렸다. 먹는 것이 풍부하고 육신적인 향락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식으로. 우리 기독교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환타지를 많이 그려놓았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금으로 깔려 있고 다이아몬드가 어떻고 하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구체적으로 하나도 없다. 좀 목마를 정도로 하나도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라칠 때에 다만 한가지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 일반적인 구원론적인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지 그 상태가 어떠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하나도 그린 것이 없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는 어떠 어떠하다고 비유를 많이 하였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쳤다. 하나님 나라는 어떠어떠 하다고... 그러면 그럴 때에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그려주었으면 우리가 상상할 때에 쉬울텐데 그렇지 않다.
제일 구체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 가르침이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믿음의 백성과 먹고 마시는 그 그림만 그렸다.
그리고 이제 여러가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가르치기는 가르쳤는데 그것들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하나님 나라는 종말에 구원을 의미한다(눅19:9ff)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가 그 자녀들로 귀환되는 것을 의미한다(눅15:11ff). 거기에 아버지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기쁨이 있다는 등의 이런 것만 알지 아버지의 집이 금으로 지어지고 방이 얼마나 큰지 구체적으로 아무것도 모른다. 또 하나님 나라는 모든 가치의 전도. 이것을 독일말로 하면 Umwertung aller werte의미가 있다. 모든 가치가 뒤집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막강하고 부자고 이 세상에서 즐긴 사람들은 어떻게 돼요?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윙나을 받아 버렸으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위안을 못받는다. 그러면 누가 위안을 받는가?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약하고 슬퍼하는 자들, 그래서 이른바 산상수훈에서 누가 복이 있는가?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또 우는 자들이 복이 있다. 또 누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어요? 그 대신 누가 지옥에 떨어져서 죽을거라고 해요? 부자가. 이렇게 완전한 가치의 전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가치가 완전히 도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 또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막2:7). 하나님 나라에는 종말에 기쁨이 있는 곳이다(막2:19).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즐긴다. 오는 세상의 생명을 즐긴다(눅20:34ff). 그러므로 거기에는 더이상 죽음이 없고 거기에는 더 이상 자녀들을 낳을 필요가 없고 그래서 더 이상 결혼도 없다. 이렇게 무엇무엇이 없다는 것. 거기에는 더이상 배고픔이 없고 목마름이 없고 더 이상 고난이 없고 울음도 없다. 평화와 의가 가득차며 그러기 때문에 독일말로 Heilwerdem 우리 모두가 온통 아주 만족한 상태에 이르는 그것을 shalom이라고 한다. 우리의 온 실존이 부족함이 없고 아픔이 없고 무엇무엇에 대한 간절한 바램이 없고 만족한 상태들을 예수가 여러비유들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축복들이 다 어떻게 오느냐?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절단된 교제의 회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의 절단된 관게의 회복이다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보다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그리지 않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게 우리에게 구원의 축복을 가져오기 위한 실제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초월적인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실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실제 그것은 내재적인 실제는 항상 제한성,한계성과 임시성 등을 특징지워져 가지고 그것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만족을 줄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세상의 한계성과 임시성, 사라져 가는 이런 상태속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소원인데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의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무조건 정의상 초월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 초월적인 실제는 곧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것으로 그릴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들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제한되어, 한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초월적인 실제는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느냐? 기껏해야 비유로 밖에 가르치지 못한다. 이 세상적인 것으로 초월적인 실제를 잠간 견주어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도 비유의 도가 중요하다. 비유가 어떤 진리를 나타낼 수는 있지만 또 그것이 비유이기 때문에 초월의 진리를 왜곡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왜곡한시키는 비유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 하나님 나라의 상황을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 비유를 들지 않았다. 아까 이야깋나대로 좀 더 추상적인 기쁨이라든지 하나님의 집에 우리가 다시 회복된다든지 등의 비유지지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가 거기서 밥을 많이 먹게 되는지, 밥안먹어도 배부르게 살게 되는지 등의 인간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비유에는 없다. 가장 물질적인 비유가 있다면 그것은 잔치비유이다. 잔치는 무엇을 말하는가? 잔치는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베푸는 하나님이 얼마나 풍요로우신가? 풍요로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로 우리에게 큰 상을 베푼다는 것이다.
우선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우리 제한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무한한 자원에 참여함을 나타낸다. 그러기 때문에 그곳에는 뭐가 없는가? 베고품이 없다. 이것도 비유이다. 목마름이 없다. 풍요로움이 있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잔치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기쁨을 가져다 준다. 풍요와 기쁨,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단절된 타락한 피조물의 단절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하는 것을 예수는 가장 즐겨 어떤 비유로 말했느냐면 잔치라는 비유로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유대교나 이스람교 같이 아주 세상적인 가치들로 그리지 않은 것이 아주 의미심장하며 아주 천만다행이다. 거기에 예수의 가르침의 진리됨이 있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의 됨같이 그려놨다면 생각해 보라.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무슨 구원의 능력이 있겠는가? 이 세상을 조금 잘 만들면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어 버릴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만들겠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해방신학자라는 그러한 사람들이 그렇다. 해방신학자들 뿐 아니라 우리 복음주의 하는 사람들도 가만히 보면 말에 그 쓰는 용어가 그런 식이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확장해야 한다는 말이 의미가 있는 content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특별한 context에서 쓰이지 아니하면 무슨 인상을 주는가 하며 우리가 노력을 해서 아까 랍비들이나 열혈당원들 같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해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 같이 그래서 이 땅에 무슨 하나님 나라의 reality가 될 수 있는 것 같이 오해하게 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가 오는 세계에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가르치고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이라고 가르쳐주기는 주어야 하지만 초월성을 보호하여야 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의 상황을 자세하게 세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그리기를 거부하고 다만 그것이 종말에 구원을 의미한다는 구원론적인 천명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포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해서는 책이 참으로 많다. 나이를 많이 먹은 H. 리더보스 책도 있고 그 책이 나이를 많이 먹었다. 그 책이 나왔을 때 그렇게 original한 책은 아니었다. 미국의 reformed한 사람들이 많이 사용해서 우리 한국에도 많이 읽히었는데 좌우간 좋은 책이지만 나이가 많이 먹은 책이다.
좀더 새로운 책들을 볼려면 가장 최근의 책이 G.Beasley Murray 영국 침례교 신학자인데 참 좋은 신학자이다. 좋은 책을 많이 썼다. 특히 이 사람이 전공한 것이 종말론이 전공이어서 마가복음 13장에 대한 책도 썼고 요한계시록의 주석책도 하나 좋은 것을 섰고 그런 사람인데 1985년에 출판한 책이 'Jesus and the kingdom of God'인데 한번 구해서 읽도록 하고 1960,1970년대에 나온 책은 래드의 책이 있다. 래드의 책도 좋고 또 예레미야스의 신약신학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 그것도 좋고 고펠트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도 좋고 물론 래드의 신약신학에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충분히 토의가 되어 있다. 래드에 대해서는 래드가 원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을 전공한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서론으로써 이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주신 메시지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특별히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에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하나님 나라'라기보다는 '하늘 나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유대의 전통 즉 랍비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한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의미가 다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서 통일해서 보통 부르는데 이 때의 이 개념이 히브리어에 해당되는 개념으로서 전에는 히브리어의 이 개념에서 의미를 도출하기 보다는 헬라어로는 장소의 개념으로 많이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옛날 유대의 세계관에 의하여 삼층 세계관 즉 하늘, 땅, 지하의 3층 세계관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즉 하늘 나라를 저 하늘에 있는 장소로 우리가 종말에 가거나 보통 죽으면 간다는 그런 장소적인 개념으로 많이 생각을 하였는데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 구약의 히브리어로 쓰여진 곳을 보면 대개가 dynamic sense 역동적 의미로
① 다스림, 통치 혹은 통치권의 개념이다. 소위 영어로는 reign, rele의 의미 소위 dynamic sense가 강하다. 그래가지고 최근에는 1950년대 60년대에는 하나님 나라가 신학의 중심이 되었을 때 주로 이렇게 dynamic sense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런데 사실 구약에 있어서의 동적인 개념이 아주 주개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여러 가르침에 보면 항상 이런 동적인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② 장소적인 개념이 쓰였다. 조금 있다가 보겠지만 이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과 동시에 쓰이는 동사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문이 있다. 그래서 무슨 문으로 들어가야 하나요? 하나님 나라의 문에도 열쇠가 있다.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에 장소적인 개념,sphere이 개념을 우리가 다 떨굴 수가 없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 개념에는 이렇게 동적인 개념이 많이 있고 심지어 그것이 주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대는 장소개념이 강력하게 나오고 주 개념이 들어올 때가 있다.
③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이 강할 때가 있다. 대개의 경우 신학자들이 어느 하나만 가지고 이것 뿐이라고 그러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이 전체가 변형인데 그 하나님 나라가 나오는 구절구절마다 어느 개념이 더 앞장서 나오느냐의 문제이지 어느 하나만 이라고 할 수가 없다. 하여간 위의 세 가지의 뉘앙스를 가진 개념이다. 구약과 유대교의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 나라'가 이렇게 정해져서 나오는 예가 아주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 나라와 대칭되는 사상들은 상당히 흔하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의 왕되심,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시고 그래서 우주 온 세상의 왕이시다 하는 개념이 강하고 또 특별한 의미로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라는 사상이 아주 구억에 강하다. 그래서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왕되심, 이 즉 신약의 '하나님 나라'에 대칭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묵시문학에 있어서 오는 세상, 묵시문학의 큰 특징의 하나가 역사를 둘로 나누는 것이다. 이 세상 즉 satan이 통치하는 악과 고난의 세상과 오는 세상, 하나님이 통치하는 오는 세상 즉 메시야가 와서 이 세상을 종결짓고 새시대, 새세대를 가져온다(연다)는 것이 묵시문학의 큰 특징중의 하나가 아닌가? 이렇게 묵시문학의 오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와 대응되는 그런 것들이다. 개념이다.
하나님이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왕권을 종결시키고 스스로 통치하심으로 구원의 시대가 열린다는 사상, 그래서 고후 4:4에도 사탄을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느냐면 '이 세대의 왕이라' '이 세대의 신이라' 고 한다. 이렇게 이 세대, 이세상을 사탄이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나 오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다스릴 텐데 오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신이고 하난미이 왕이라는 것이다.
이 사상이 벌써 묵시문학의 원조중의 하나인 다니엘서에 나타난다. 그래서 단2:44/7:14ff에 보면 종말에 하나님이 통치한다는 사상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이 다니엘서 2장과 7장은 내용이 아주 비슷하다.
7장에 보면 나타나는 것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환상과 더불어 나타난다. '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으로부터 나라를 받는데 단 7:18이하에 보면 거기에 무슨 의미를 갖느냐면 종말에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 거기서도 이렇게 '하나님 나라'라고 개념화 되어서 나오지 않고 그냥 나라를 받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나라를 받는다고 나온다.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라는 고정된 개념은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아주 드물게 거의 안 나타나는 개념이나 그와 대칭되는 개념들, 가령 오는 세상 또는 하나님의 왕되심 이런 것들로는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들이 있어야 한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칠 때에도 물론 다음과 같은 전제들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다.
ⓐ 이 세상이, 온 우주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온 세상의 정당한 주가 정당한 왕이 하나님이라는 것.
ⓑ 그런데 어덯게 된 셈인지 사탄이 하나님의 왕권을 찬탈해서 지금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고 있다는 것.
ⓒ 이 사탄이 하나님의 권한을 찬탈해서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이 세대가 종결되어지고 오는 세대 즉 이 세상이 이제 종결되어지고 새 세상이 도래한다는 묵시문학적인 종말론 또는 역사관 이것이 세번째로 전제되어 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하나님 나라라는 고정된 개념은 잘 안나타나지만 그에 대칭되는 개념들이 사상들이 또는 생각들이 구약과 유대교의 여러곳에서 나타난다고 그랬는데 예수님 당시나 또는 직전 직후에 유대교의 여러 분류에서 어떻게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나를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그래야 예수의 가르침이 얼마나 그들과 가깝고 또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를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잠간 살펴보면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선지자들의 주의날 The day of the Lord 사상을 이어받아가지고 이 '주의날'을 오는 세상으로 보고 이 오는 세상은 묵시적인 사건으로서 그날의 종말론적인 심판이 일어나며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과 질서를 완전히 한꺼번에 종결지으시고 전혀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고 온 우주가 완전히 쇄신된다고 보았다. 그때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하나님과 더불어 온 세상을 통차하게 되며 모든 이방민족들이 완전히 굴복하게 된다. 그때는 의가 승리해서 이 세상이 더 이상 악과 고난의 세상이 아니라 의로운 세상이 된다. 이런 것들이 묵시가들이 바랐던 오는  상이었다.
랍비들도 이 오는 세상이라는 개념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오는 세상의 상황을 묵시문학가들보다 더 형세적으로 생각하였다. 물질적으로 생각하였다. 다만 오는 세상이 이 세상과 다른 것은 양적으로 더 풍부하고 더 좋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는 세상의 모든 상황이 이 세상의 연속이다. 그래서 랍비들의 부활에 대해서도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하는데 그 때에는 어떤 상태냐의 논쟁이 있다. 그때에 어떤 결론이 나느냐면 우리가 병고에 시달리는 그러한 약한 몸이 아니라 더욱 강한, 아름다운, 좋은 몸을 가지나 지금의 몸과는 같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한 상타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남편과 아내가 친구와 친구가 서로 알아보는 그런 상태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세상의 연소으로 이렇게 보는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악과 고난이 없고 모든 것이 더욱 좋고 아름답다는 그것 뿐이지 다른 것은 없다. 단절보다는 연속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들의 오는 세상에서의 상황은 아주 earthly하게 이 땅적인, 물질주의적인 것으로 이 사람들이 생각하였다. 이사람들에 있어서 한가지 중요한 강조점은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이 세상이 언제오느냐? 메시야가 언제 와서 어떤 세상을 가져오느냐? 그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온다고 한다. 그래서 '오는 세상'이 오는 것을 이스라엘의 회개가 있을 때라는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그때는 그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열혈(심)당원들은 좀더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도 랍비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이세상적이게 하나님 나라를 상상을 하였다. 그런데 이들에 있어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오는 세상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무엇과 동일시 하였느냐면 이스라엘이 온 세계를 정복을 해서 통치하는 것과 동일시하였다. 하나님의 통치가 곧 이스라엘의 통치와 동일시되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은 무엇이었느냐하면 '자유'라는 개념이었다. 이방의 식민지주의적인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과 자유, 이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이방에게 더 이상 압제받고 고난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이방을 통치하는 것을 상상하였다. 또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사회정의'가 중요하였다. 그래서 오는 세상에서는 '평등'이 이루어지고 '정의'가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다 종으로 만드는 것이 유대인의 이상이나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자기들 사이에는 주도 없도 종도 없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열혈당원들의 AD 66,70년대의 소위 유대정쟁을 일으켰을 때에 로마 사람들과 전쟁을 했을 때에 이들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에 제일먼저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노예방부와 빚채권,채무장부를 다 불태워 버린 것이었다. 옛날 우리 한국에서도 노예난이 나면 대개 그렇게 하였지요? 이렇게 그들이 사회정의를 상당히 강조하였다. 이들은 오는 세상, 그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 고 보았느냐면 자기들의 가만히 기다렸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또 이스라엘이 회개만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투재을 하샤 얻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소위 聖戰 이스라엘 초기 이데올로기인 성전 holy war를 치룸으로 당시의 로마의 압제자들과 성공적으로 투쟁해서 이겨서 이스라엘의 통치권이 확립이 될 때에 이러한 '오는 세상'이 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 오는 세상, 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느냐? 인간들이 투쟁으로 온다고 이렇게 보았다. 그 투쟁이 무엇이냐 하면 이 거룩한 전쟁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의 초기 이스라엘의 특히 출애굽이후의 聖戰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이들이 자기들의 모델로 삼은 것은 마카비형제들로 보고 聖戰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려고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유대교에서는 오는 세상, 하나님 나라를 공통적으로 어떻게 보아쓴냐 하면 ① 묵시적인 사건으로써 이 세사이 끝나고 하나님이 직점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의 새 세상, 새 세대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있고 ② 이것이 더이에서 이루어지느냐면 땅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의 오는 세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황 자체에 대한 생각들이 아주 이 세상적이었고 물질적이었다. 유대교에 있어서 오는 세상,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있어서 또 하나의 특징은 ③ 민족주의가 아주 강하였다. 즉 하나님 나라와 이스라엘의 통치와 직결되었다. 이스라엘의 구원만 직결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와 직결되었다. 아주 강한 민족주의... 또 하나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느냐면 ④ Synergism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으로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대로 랍비들의 인간들이 회개로, 의를 실천함으로, 열혈당원들은 자기들의 직접적 투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하나님의 협동으로 보았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죽음

 


예수는 하나님 나라와 그 구원을 가져오신 분인데 궁극적으로 자기의 새속의 새 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가져왔다. 즉 자기의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가져온다. 그래서 여기서 분석해보려고 하는 것은 최후의 만찬의 말씀 마가복음 14:17-25까지 읽어보세요. 한마디 한마디 주의해서 읽어보세요. 최후의 만찬의 말씀은 두가지의 판이 있다. 최후의 만찬은 우리가 4가지로 전수되어 있다. 세공관복음에도 나타나고 고전 11장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그 4가지 전승이 크게 2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마가, 마태판이고 하나는 누가, 바울판이다. 그래서 이 마가, 마태판은 아주 비슷하다. 거의 똑같다. 누가와 바울판은 또 상당히 비슷하다. 그러면서 또 누가와 바울판은 마가와 마태판과 다르다. 이처럼 최후의 만찬의 전승이 4가지로 전승이 되는데 크게는 이렇게 두개의 전승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나이를 먹었느냐 이것이 나이를 많이 먹었느냐를 가지고 이제까지 학자들의 연구가 많짐나 해결이 나지 않는다. 어떤 교수는 이것이(막-마) 나이를 더 많이 먹었다고 하고 어떤 교수는 눅-바울이 더 나이를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결하기가 아주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데 하여간 우리는 이 마가판을 지금 보자 이말이다. 자 여기의 21절이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의 말씀을 여는 말이다. 거기에 인자는 '그 사람의 아들은 그에게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다. 자 기록된 대로, 성경에 예언된 대로 가거니와....그런데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아주 어렵다. 어순이 번역하기가 정확히 어렵다. 영어는 헬라어와 어순이 비슷해서 번역하면 좋은데 우리만은 그렇다. 우리 말로 거기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영어로 써 보자. woe to that man through who the son of man is delivered 여기에 소위 word play라는 것이 있다. word play가 무엇이냐? 영어로 pun이라고 한다. 비슷한 말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면서 웃기는 것이다. 그런 것을 word play라고 한다. 또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 잘 사용한다.
지금 여기 that man은 누구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가? 유다를 지칭한다. '그를 통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 이제 넘겨줌을 받는데 그 사람에게 저주가 있을 지어다'인데 the son of man이란 말도 숙어적으로 하면 '그 사람'이라는 that man의 뜻이다. 이 문장에서 그 사람....그 사람..이것이 word play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의 만찬을 여는 이 말씀이 뭐라고 시작되느냐면 '그 사람이 간다'고 시작되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의 특징중의 하나가 알쏭달쏭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수수께끼라는 말이다. 그래서 비유도 그 중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간다'느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예수가 간다고 하는 이 말이.... 그것은 자기의 죽음을 두고 한 소리이다. 자기가 그 사람의 아들로써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언된 대로 죽는다는 말이다. 그것을 좀 더 알쏭달쏭하게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 제자들은 그 말을 알아 들었다. 왜? 하도 같이 오래 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가느냐? 한 사람이 그를 배신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봐야할 때 예수는 자기의 죽음을 여러 곳에서 예고하는데 예고할 때마다 꼭 그 사람의 아들이 죽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기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마다 예수는 자기의 칭호인 '그 사람의 아들'을 사용하여 '내가 죽는다거나 간다'고 하지 아니하고 인자가.. 그렇게 한다. 아까 막10:33에도 마찬가지이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줌을 받아서..' 45절도 마찬가지이다. '인자가 온 것은 뭐하러? 자기 몸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는 죽음을 이야기할 때 항상 '그 사람의 아들'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 왜 그러느지는 다음시간에 볼 것이다.
그러면 우선 그것만 염두에 두고 그러면 '그 사람의 아들'이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 그러면 죽음이 이제 내일 다가온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보았을 때 내일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제 그 제자들에게 미리 설명해 준다. 설명을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면 우선 연극을 한다.
연극을 한다. 이 떡을 떼는 그 제스쳐, 그 행위, 그리고 빨간 포도잔을 붓는 제스쳐를 한다. 그런데 이 연극이 두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떡을 떼는 일 그리고 부수는 일, 하나는 잔을 붓는 일, 포도주를 붓는 일, 이렇게 연극의 제스쳐에 무어가 붙었느냐면 설명어가 붙어 있다. 이것은 무엇이라?(떡) 너희를 위해서 부서지는 나의 몸이라. 이것은 무엇이라(포도주) 이것의 붓는 설명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이것에 대해 우리가 집주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24절, 이것은 무엇이라고요?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24절)' 마가판은 이렇게 되어 있다.
누가, 바울판은 이것이 좀 다르다. '너희들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로 인한 새언약이라'이렇게 되어 있ㄷ. 누가, 바울판에는...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피로 인한 새 언약이라. 이것이 잔이므로 새언약의 상징이라. 거기에 비해서 마가, 마태 판은 ' 이잔이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이고 누가,바울판은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로 되어 있다.
어순이 다르므로 이렇게 조금씩 다른데 그러나 의미는 똑같다. 어떤 것이 더 나이를 많이 먹었고 어떤 것이 더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냐?를 따지는데 내가 보기에는 마가,마태 판이 더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다. 하여간 이것이 잔의 말씀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것을 소위 잔의 말씀이라고 한다. 왜? 잔을 붓는 일의 설명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이 연극의 제스쳐나 설명어나 모두 다 같이 무엇을 설명하느냐면 그 사람의 아들로써 가는 것을 설명한다. 자기의 내일 다가오는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연극으로 표현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잔의 말씀만 분석하면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어약의 피'이다. 그러며 이게 무슨 말이냐? '많은 사람을 위하여서 흘리는'이 말은 이사야 53:1-12절에서 왔다. 거기에 보면 고난받는 종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 마태복음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영혼을 흘린다는 말을 사용하였다. 내어 쏟는다. 내어 쏟아 흘려서 그들을 하여금 의롭게 함을 입게 한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즉 주의 고난 받는 종이 곧 대속의 죽음, 곧 속죄의 제사로 자기를 내어주어서 자기 영혼을 내어 쏟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속죄하고 의롭게 함을 입게 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사야 53:10-12까지를 인용을 해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바로 그 이사야서에 있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 '언약의 피라'는 어디에서 왔느냐? 이것은 아주 풍부한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첫째로 우리가 무엇을 상기하게 하느냐면 출 24장에 보면 19장,14장,34장에 보면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우는데 언약의 제사를 드리고 그 피를 모아져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 에 뿌리면서 무어라고 부르짖는가? '언약의 피라' 그렇게 부르짖는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가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모세가 세운 그 옛언약에 상응하는 그 옛 언약의 후형, typology에 상응하는 새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죽음이 모세가 sinai에서 제물을 바쳐서 세운 옛언약에 상응하는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본 것이다.
또 아까 누가,바울 판에는 이것이 무엇이라고 쓰여져 있다고요? '나의 피로 세운 또는 피로 인한 피가운데 세우는 새언약이라' 여기에 '새'자가 들어간다. 이것은 벌써 이속(마가판)에 들어 있는 말이 조금 더 분명히 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나는 마가판이 더 오래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 분명히 새언약이라고 하였다. 왜? 모세가 세운 언약에 대응해서 상응하는 언약이기 때문에 새언약이다. 그래서 이것이 렘31:33절에 나오는 위대한 새언약에 대해서 나오는데 예리미야서에서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고 종말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새언약을 종말에 세운다고 하였다. 그 예레미야서의 새언약에 대한 예언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 부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사야서 42:6/49:8에도 근거하고 있다.
이사야서 42:6절과 49:8절에 보면 주의 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언약으로 주어진다는 예언이 있다. 이사야 42:6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이사야 49:8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도대체 이 언약을 세우는데 짐승의 피로 세우지 않고 인간의 제물로 세운다는 사상은 여기의 최후의 만찬에 밖에는 안나온다. 예수의 이 가르침 밖에는 없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제일 가까운 구약적인 배경이 이사야서의 주의 고난받는 종에 대한 것이다. 주의 고난받는 종이 속죄의 제사만을 위해 시험만을 위해 보내어진 것이 아니고 새 언을 세우는 제사로 보내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언약의 피'라는 말이... 요약하면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가 체포되어 처형받고 십자가에 달려 있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최후의 만찬에서 지금까지 자기가 해왔던 모든 것의, 잔치의 종합,완성, 종결의 잔치를 하면서 거기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두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데 자기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란 의미란 소리는 히브리어의 숙어이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이란 뜻이다. 히브리말에는 추상명사가 없어서 이런 말로 그런 추상명사를 삼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란 소리는 '모든 사람들' 이란 소리이다. 모든 사람,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며 새언약을 세우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즉 자기가 내일 당할 죽음이 대속의 제사이며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라고 설명을 한 것이다.
자 그러면 대속을 하면 무슨 결과가 나타나요? 제사와 덕을 입는 사람들의 죄가 용서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해가 일어난다. 언약을 세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요. 언약을 세우면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된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언약의 형식이 아닌가? 그래서 언약을 세워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되었듯이 예수가 새언약을 세움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핵이 누구냐하면 거기의 만찬석에 둘러앉은 12제자들인 것이다.
옛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 상응하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에 상응하는 12제자인 것이다. 그래서 유대가 빠졌지만 이 12이라는 말이 전문어어가 되어가지고 심지어 바울도 12라고 칭하고 있다. 실제로는 11밖에는 없는데....
그래서 예수의 자기 죽음이 무엇이냐 하면 속죄의 제사이며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인데 이 죽음을 통해서 어떤 결과들이 오는가 하면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화해한 새로운 백성,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의 죽음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와 결부해서 생각해볼 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의도를 성취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죽음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셨고(막1:15),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그의 약속을 성취하셔서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면 부활은 무엇인가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십자가를 통한 속죄제사와 새 언약의 성취를 인치는 것이 부활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켰다. 부활한 예수의 나타남을 본 그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옳다고 인정하고 높이신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부활했다(고전15:3-5,롬4:25,고후5:21)는 것이 초대교회 때부터 신앙고백과 케뤼그마가 되었다. 구원이나 영생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명에 참예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神的인 삶이 바로 永生이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은 매우 긴장의 관계에 있다. 현재(부활과 재림사이)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각축장이다. 사단은 우리에게 자기주장하고 이웃을 착취하라고 하고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존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바울의 표현대로하면 사단은 육신대로 살도록 하고 하나님은 성령의 지시대로 살라고 한다.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지금 임시적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도 사단의 나라가 사단의 통치가 완전히 극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좇아 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 ? 아닌가 ? 성령을 따라 살 것인가 ? 육신을 따라 살 것인가 ? 매 순간 직면한다. 그 때마다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의 市民權은 하늘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이땅위에 살지만 사단의 나라에서 이미 벗어난 자들이다.
골 1:1.3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
우리를 사단의 암흑과 죄악과 죽음의 나라에서 건져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하나님 나라로 옮겼다. 우리의 신분이 거기에 있다. 교회는 바로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이다. 그러므로 본국의 법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할 때에 성령의 열매 샬롬이 확대된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사단의 나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우리가 매순간마다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다. 전적인 헌신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생명 가운데 동시에 산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지만 우리는 손해를 본다. 그래서 구원과 고난이 함께 있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과 구원이 함께 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롬 12 :1,2과 빌 1:27에 의하면 교회는 식민지로서 본부의 지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갈 5: 22, 23에는 성령의 열매가 묘사되어 있다. 매 순간마다 육신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 고난 속에서 살아간다. 고난은 구원을 가져오고,죽음은 생명을 가져온다. 우리들이 인간사회에 살려면 자신이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구원과 고난이 함께 공존한다. 인간의 내재의 삶속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겠는가 ? 우리의 구원은 초월해서 와야 한다. 그것은 사랑의 힘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런 병든 사회를 사랑 외에는 치유할 힘이 없다. 구원은 바로 사랑의 힘으로 나타나야 한다. 긍극적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퍼부어주는 은혜로 우리가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하나님 나라는 그만큼 확대된다. 자기 주장을 하지 않으면 거기에 샬롬이 이루어지고 그만큼 나도 덕을 보게 된다. 결국 하나님 나라가 구원이 확장되면 우리도 덕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남에게 덕을 입히지만 나는 손해를 볼 수 있다. 그것이 예수가 말하는 복음을 위한 고난이다. 생활속에서 죽는 것이 복음을 위해 고난 받으며 사는 것이다. 복음을 위한 고난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마16:24). 종말론적 긴장의 관계이기에 재림 때까지 이러한 긴장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와서 구원이 여기 있는데 왜 고난이 있는가 ? 바로 구조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로 살게하면 우리의 고난도 적어진다. 다함께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면 내가 손해를 보니까 ? 전도를 더 열심히 해야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지 완전한 구원이 없으나 구원이 더 확장되면 복음선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더 확장되면 샬롬이 커진다. 종말에 가면서 고난이 더 커진다고 예수님은 말하고 있다. 종말에 가면서 구원도 증진되고 고난도 더 증진되는 역설이 있다. 우리가 믿는 바가 얼마나 훌륭한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얼마나 위대한 구원의 소망을 갖는가? 우리가 기도로 날마다 구원을 체험한다. 아빠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종말에 완성될 구원이 우리 삶에 부분적으로나마 임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의도, 예수의 의도,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 무엇을 할려고 하였나? 무엇을 이룰려고 하였나? 하는 그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이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밑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자이다. 청첩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의도이다.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통치권 밑에서 떠나서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권 밑으로 들어오라는 청첩이며 부름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그 통치가 의와 사랑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구신들을 쫓아내고 병고를 치유하는 그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과 같이 하나님의 통치는 의와 사랑이며 고난의 종식이며 건강의 회복이며 축복이다. 한마디로 구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말로 선포하면서 또 이적으로 귀신 쫓아내는 것을 보여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축복 밑으로 들어오라고 부르는 것이다. 청첩장을 발부하는 것이다. 초대장을 발부하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이었다. 즉 예수가 무엇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는가?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기 위해서 사탄의 통치권 영역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통치권 밑으로 오는 백성을 모으기 위해서 그게 무엇인가? 하나님 백성이다. 종말의 하나님 백성을 모으기 위해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래서 이것을 굉장히 강조해야 하는 것인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하면 종말에 하나님 나라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데 있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데....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또 다른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과 행동이 전적으로 일치한다. 지난번에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예수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서 예수의 무슨 자기 이해가 나타났다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출 4:22-23절에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제는 예수가 새로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모은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예수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으며 자기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아빠라고 하는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부름에서 나타나는 자기 이해가 두가지라고 하였다.
하나는 자기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해와 둘째로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 사람?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는 자라는 이해이었다. 어떻게?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됨을 중재주므로써...
그러니까 예수의 이 아빠라는 독특한 기도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이것도 독특하다고 하였다.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그 선포와 그의도에 있어서 똑같다.
예수가 무엇을 하는 분인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분이다. 가져와서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을 수있는 즉 하나님 나라가 가져온 동사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받는다'는 동사이었다고 하였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상속받는다'는 말이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어떤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없다고 하였는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받는다'는 것과 '상속받는다'는 것이 항상 같이 간다. 여기에서 상속받는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하나님의 부요,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그게 누구의 것이니까? 내 아버지의 것이니까 아들은 아버지의 무엇인가? 상속자가 아닌가? 이러한 모든 것이 다 그림언어이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우리 제한성의 한게성의 고난 받는 피조물들이 무한하신 하나니의 자원을 상속받는 것이다. 내것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한다  말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인간의 근본문제가 무엇인가? 피조물성이다. 한계성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무한함, 창조주의 무한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받음으로... 사탄의 통치권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으로 넘어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므로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서 우리 아빠 것을 내것으로 할 수가 있어서 내 지난번에 그 소리도 한 것 같은데?
그래서 왜 우리가 기도할 때 아빠라고 하다고 그래요? 벌써 우리가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의 부요함을 끌어쓰기 위한 행위가 기도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빠라고 기도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의 ' 그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와도 똑같다. 이것은 나중에 좀 살펴보도록 하겠다. 눅19:28절 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사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
이것이 누가 복음에 보면 눅22:29에 대응절이 있는에 이 대응절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대개 학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여기에서는 누가가 옳다. 눅22:29절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가 12제자들에게 지금 약속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났을 대에 그 때에 12제자들이 종말에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핵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의 핵을 이르고 이 패역한 이스라엘, 옛언약의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자리에 설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막 13:27 " 또 그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종말에 어쩐다구요? 하나님의 백성을 모은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는 종말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에 있었다.
마 8:11-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어쩐다구요? 세상의 사방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이 모여져서 하나님 나라에서 커다란 잔치를 베푸는데 그때에 이 에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그를 통한 이 청첩장을 제일 먼저 받은 자가 누구인가? 유대인들이다. 이스라엘, 옛 언약의 백성들이다. 그런데 이 청첩장을 무시하고 거절한 그들은 어덯게 된다고 하였는가? 내어 쫓긴다고 하였다. 그 잔치상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여러곳에서 예수는 자기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가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사방에서 모아져서 하나님의 잔치상에 참여해서 역대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등 모든 선지자들과 같이 커다란 잔치를 베풀 것이라는 그말이다.
지난번에 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즐겨 잔치로 비유하였다고 하였나? 왜 잔치로 비유하였는가? 그게 무엇을 상징하기 위해서인가?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부요함, 하나님의 자원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잔치는 거기에는 항상 무엇이 있는가? 기쁨이 있다. 거기에는 사귐이 있다.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회복이 있다. 사귐이 있다. fellowship이 일어난다. 그래서거기에는 잔치에의 기쁨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상징하기 위해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할 때 가장 즐겨쓰는 그림이 잔치이었다.
그래서 지금 읽안 마8:11 등에서본바와 같이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세상에서 사방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 종말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서 역대의 하나님의백성의 조상들과 역대의 하나님의 언약을 지킨 선지자와 더불어 커다란 잔치를 베푼다고 그렇게 말하였다.
그런데 지금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해서 그 청첩장에 응해서 회개하고 제자에게 따르는 자들과 백성에게 무엇을 베풀죠?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의 행적의 특징중의 하나이다. 예수의 회개한 죄인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 하도 그것을 많이 해서 예수의 별명이 뭐라고요? 탐식자요 술주정뱅이라고 한다고 그랬다.
예수의 이것이, 예수가 지금 하나님 나라 선포의 그 청첩장에 응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이것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이것은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에 대한 sign이다. 그림이다. 약속이다. 그것을 미리 연극으로 표시해서 깨닫게 해준 것이다.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월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이 적은 무리여. 여기에서 '무리'라는 말은 양무리라는 소리이다. 따라서 '적은 양무리여'이렇게 번역해야 한다. 여기에서 '양무리'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을 '양무리'라고 한다. 하나님이 '양무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칭호인 '양무리'를 이제는 누구에게 적용하고 있는가? 자기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자기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한 자기 제자들에게 적용하는것이다. 그들에게 무엇이 주어진다고요?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다고 하였다. 곧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삼으신다는 말이다.
옛 이스라엘 백성, 옛 언약의 백성이 이 하나님의 청첩에 응하지 않으므로 이 적은 무리들 이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아들이라. 이와 같이 여러곳에서 예수는 자기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가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즉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 그래서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의 궁극적인 의도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은 예수가 그 당시의 활활 불타오르던 유대의 민족주의를 완전히 배격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아까 마 8:11절에 어떻다구요? 누가 하나님 나라에 와서 잔치에 참여하는가? 동서에서... 누까 좇겨나는가? 그 잔치에서?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지금 방금 읽은 눅12:32에서도 누구에게 '양무리'란 하나님의 백성이란 칭호가 주어지는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아니라 누구에게?그중에서 몇 사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사람들.. 여기에서 하나니 나라를 선포하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라고 초대장을 발부하니까 유대인들이 다 어떻게 하였는가?이 핑계, 저핑계로 다 피하였다. 결혼해서 못간다느니, 무슨 소를 사서 못간다는니....그래서 하나님이 화가 나서 어쨌다구요? 종들을 보내서 골목골목 가서 앉은뱅이, 무슨 병든자 다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예수의 이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유대의 민족주의를 완전히 배격하고 이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종말의 새로운 백성을 유대민족에서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세계 만민중에서 모은다는 것이다는 사상이 강력히 나타나며 도리어 이 예수의 청첩장에 응하지 않은 유대인들에게는 심판과 버림이 있다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 중에 아주 강력히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때가 메시야 시대의 때가 임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높임을 받고 이방인들을 심판해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을 섬기는 종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예수는 그것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었다. 유대인들이라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그 몇 사람과 또 어느 민족에게서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자들이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대체로 예수의 청첩장에 응하지 않음으로 그들이 도리어 심판을 받고 던져버림을 받을 것을 예수가 경고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유대민족주의와 아주 반대되는 가르침을 하였다.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 선포를 올바로 하면 민족주의를 내세울 수가 없다. 어느 민족이나..그런데 지금까지의 교회사를 보면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각 민족 민족주의와 아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아주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마치 한국사람이 새로운 이스라엘인양 주장하고 지금도 많이 그렇게 선포하고 다닌다. 여러분의 겨단이 원래 합동과 본류 아닙니까? 거기에서 늘 하던 게 무슨 아시아의 장자교단, 그런말 어디 있어요? 그런 엉터리가 어디가 있겠어요? 옛날 일정때에 하던 버릇이 지금까지 계속이 된다. 옛날 일정때에 일본 사람에게 억눌리던 우리 백성들이 성경을 어떻게 읽었느냐면 구약의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에게 거기의 '이스라엘'을 빼고 '한국'을 넣어서 읽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국백성을 출애굽시킨 것으로..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후예로 이렇게 늘 성경을 읽어왔다. 지금도 그렇게 한다.
옛날에 내가 외국 학생들을 데리고 한국의 기도원이 어떻게 생겼나 가보라고 해서 저기 동두천에 갔더니 거기에 완전히 출애굽의 상황을 놨었다. 무슨 '구국기도'라 해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한 것 같이 오늘날 새로운 모세가 한국을 출애굽시켜야 되고 구원시켜야 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고 해서 잔득 써 붙였더라고.
그런데 그것은 한국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국 사람들도 한 동안 자기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후예로 보았다. 독일 사람들도 그렇다. 미국에 이주간 사람들도 처음에는 다 그랬다. 자기들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민족주의를 늘 이렇게 연결시켜서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이렇게 배태적으로 사용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아긋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하면 벌써 보편주의, 사해동포주의, 세계만민을 포함하는 인종과 피부색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온 우주를 창조하고 온 인류를 창조해서 이룩한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것이 어덯게 해서 여기 한 민족, 여기 영국 사람, 여기 독일사람, 여기 미국인으로 생각을 하겠는가? 그래서 민족주의라는 것은 도대체 맞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개념과는...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신앙고백한 베드로에게 약속을 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줄 것이며 그 위에 자기교회를 세우겠다. 그래서 이 교회가 히브리어의 을 번역한 것으로써 이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인 사태를 두고 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가르침에서도 마16:18에서도 옛 이스라엘은 이제 제쳐놓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모임을 세울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그들이 사탄의 주권을 버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모인 종말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데 그들이 아무리 완성을 기다리는 이 세생에서 죄악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고 그들이 또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그 통치와 더불어 오는 하나님의 받고 있다는 의미에 있어서 이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의 지상에서의 표현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다.
그러면 교회,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ethos는 무엇이냐? 삶의 원칙은 무엇이냐 하면 제자도와 섬김이다.
막10:32-45절을 보세요.
거기는 우리가잘 아는 장이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이제 자기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어떻게 자기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인가를 설명하니까 이 유대의 하나님 나라 사상에 찌들은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요한과 야고보가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가 오면 국무총리가 되고 내무부 장관이 되겠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거기에 질세라 다른 제자들이 분해서 화가 나가지고 네가 공로를 더 세웠느냐? 내가 더 세웠지. 그러니까 내가 국무총리감이지 하고 다투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42절부터 보면 제자들을 불러가지고 이르기를 이방인들, 세상의 통치자들, 세상의 큰 자들, 세상의 힘있는 자들은 남들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억누른다. 그런데 너희들 중에서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들이 지금 누구인가?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고 모으는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공동체의 핵인 제자들, 그러니까 그들이 무엇인가?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그 공동체에서는 그런 ethos가 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새로은 상황의 공동체의 ethos는 무엇이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되어야 하고? 작어져야 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도, 세상의 ethos와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여 모으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ethos가 180도 다르다. 세상의 ethos는 자기 주장하는 것이 그 원칙이다. 자기를 남위에 주장을 해서 남을 자기의 종으로 삼는 것이 세상에서의 삶이요 방법이다. 이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주장 성공적으로 했다는 이야기다. 이 세상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 총칼 가진 놈을 많이 지휘하는 놈이 대통령이 된다. 이 세상에서 누가 부자가 되는가? 남을 잘 속이고 착취를 많이 하는 자가 부자가 된다. 이렇게 자기 주장을 한다. 따라서 세상의 ethos는 무엇이냐 하면 남위에 군림하는 남에게 자기를 주장해서 나위에 군림하는 것이 세상의 ethos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높다고 하고 귀하다고 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귀하신 몸이 이 세상에서는 어떤 몸이신가? 남을 막 짓밟는 몸이 귀하신 몸이라고.. 남에게 막 짓밟힌 몸은 귀하신 몸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놈이 누누구인가? 부라는 것이 옛날 한국사람들이 추구하던 부귀,장수 이러한 것이 다 무엇인가? 이것이 다 세상의 ethos이다. 그것은 자기 주장하는 의지를 성공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이 세상에서는 성공했다고 하고 귀함을 얻고 존경
을 얻고 부를 얻고 그렇다. 즉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이방인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세상의 백성의 삶의 도이며 삶의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고 새로운 백성의 공동체에서의 ethos는 무엇인가? 자기를 내어주는 섬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섬김이 무엇이냐? 여기에 대해서 45절에 자기를 예로 들어서 섬김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다. self-giving. 세상의 eths는 무엇이었는가? 영어로 self-assertion이었다. 자기 주장이었다. 남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의 공동체에서는 그 ethos가 무엇이냐 하면 섬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섬김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다.
인자가 무엇하기 위해서 왔는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이제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 백성의 종말의 백성의 공동체의 삶의 방법이고 etho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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