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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눅 2:8-20 표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by 은총가득 2020. 11. 16.

눅 2:8-20 표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지난 시간 점층병행법으로 소개되는 요한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요한과 예수님이 비교되었습니다. 이때 항상 더 나은 모습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출생의 모습은 요한이 더 나은 듯 했습니다. 요한은 이웃과 친척에게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으나 예수님은 아무도 없는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곁에 이웃과 친척은 없었습니다. 다만 천사와 성령의 인도함으로 목자들과 시므온과 안나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이웃과 친척이 되었습니다. 가까이 살지 않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죄인을 이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자를 가족으로 여기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목자들과 시므온과 안나가 예수님의 이웃과 친척이 된 것입니다.

1. 베들레헴의 목자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을 배경으로 합니다. 나사렛에 살던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마리아는 기한이 되어 예수님을 출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자 천사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베들레헴의 목자들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천사의 선택은 다윗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목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된 후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을 하나 해주었습니다. 때가 되면 다윗의 후손 중 하나를 세워 나라와 왕위를 영원히 견고히 하게 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삼하 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사람들은 이 약속을 다윗언약으로 불렀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자가 오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을 찾아간 천사는 다윗 언약의 성취가 예수님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중 베들레헴의 목자들을 선택하여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다윗 언약을 가장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자들을 찾아가 예수님으로 그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2. 밤과 밖

천사가 베들레헴의 목자들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밤이라는 시간에 밖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밤과 밖은 목자들의 삶을 잘 보여 줍니다. 낮에만 일하는 자들과 달리 목자들은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합니다. 또한 양들을 돌보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 머뭅니다. 목자들은 이러한 고된 노동을 최소화 하기 위해 순번을 정해 양을 지켰습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양을 지켰고 위협이 생길 땐 다른 목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목자들이 일했던 '밤과 밖'을 기호적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단순히 시간과 장소를 말해주기 위해 '밤과 밖'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목자들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밤과 밖'의 이미지를 활용한 것입니다.

밤은 이미 여러번 살펴본 것처럼 어둠으로 깨닫지 못한 인간의 무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4:22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자신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말씀하신 후 예레미야 4:23에서 그 모습이 창세기 1:2이라 말씀하였습니다. "예레미야 4: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 예레미야 4: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는 흑암의 상태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창조 이전의 상태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모습임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빛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된 바울은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 말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예수님을 알기 전 자신은 창세기 1:2과 같은 어둠의 상태였으나 이제는 예수님이라는 밝은 빛을 통해 낮이 되었다 말한 것입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밤에 거하던 목자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밤에 속해 밤의 일을 하며 밤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의 천사는 이런 목자들을 찾아가 밝은 빛을 비춰주었습니다. "누가복음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태어난 것을 전해준 것입니다.

성경은 크게 사람을 세 분류로 나눕니다. 첫째는 유대인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받았다는 이유로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이방인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자로 인식되었습니다. 셋째는 성도입니다. 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립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교회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세 부류 중에 첫번째인 유대인은 결코 세 번째인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받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생각하는 자는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교회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정한 자로 인식 되었던 두번째 이방인은 세번째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정함을 알고 있으므로 은혜로 구원하는 예수님께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부정하다 말한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여 그들과 하나로 지어지는 교회가 되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이방인으로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자들에게 화평하게 하는 예수님을 소개함으로 외인이 아닌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 말해주었습니다. "엡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목자들은 유대인이었지만 천사들이 방문할 때 밖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의 천사가 예수님을 증거한 후 그들은 베들레헴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이 머무는 집에 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외인이었던 자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3. 천사가 전한 소식

천사는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목자들을 찾았습니다. 기쁨의 소식은 상대적입니다. 대학을 앞둔 수험생에게는 합격이 기쁜 소식입니다. 직장을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취업이 기쁜 소식입니다. 결혼을 앞둔 청년에게는 결혼이 기쁜 소식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환경 때문에 기쁜의 소식이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목자들에게 기쁜의 소식은 자신의 양들이 많은 새끼를 낳거나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일입니다. 눈 앞에 놓여진 문제가 해결되거나 손에 잡을 수 있는 이익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기쁜 소식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전하는 기쁨의 소식은 절대적입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은뱅이가 구걸을 하기 위해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40여세의 나이로 날 때부터 걷지 못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들어가다 앉은뱅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이나 먹을 것을 원했으나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자신에게 없지만 자신에게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주겠다 말을 한 후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그의 다리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걷게 된 앉은뱅이는 뛰기도하고 걷기도 하며 이전에 들어갈 수 없던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돈이나 먹을 것은 하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영원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앉은뱅이의 요구대로 베드로와 요한이 돈이나 먹을 것을 주었다면 그는 다음 날도 성전 미문에 앉아 하루의 배를 채우기 위해 구걸을 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몰아내고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얻어야만 사람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쫓겨난 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예수님만 전합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겉으로 보기에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는 사람의 열심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 말한다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면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는 사람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우리의 구원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자들을 찾아온 천사는 이번에도 큰 기쁨의 소식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그리스도가 태어났다 말하였습니다.

4. 하나님의 표적

천사는 예수님의 태어남을 전한 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목자들의 표적이라 말하였습니다. 표적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후 그것들로 징조가 되게 하라 말씀하였습니다. 이것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는 표적이 된 것입니다. 홍수 이후에는 무지개를 보여주며 이것이 언약의 증거라 말씀하였습니다. 무지개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는 표적이 된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에게는 할례를 명령하며 이것이 언약의 표징이라 말씀하였습니다. 할례가 언약의 자손을 낳게 할 하나님이 하실 일의 표적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표적이라 말한 천사는 목자들이 하나님이 하실 일을 예수님을 통해 보게 될 것이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자 많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어겼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박해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안식일에도 일하심으로 자신도 안식일에 일한다 대답하였습니다. 안식 중에 아담을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주었던 하나님처럼 예수님도 안식일에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한다 말한 것입니다. "요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사람들은 안식일을 일을 함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의 친아버지이며,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되다 말한 것을 옳게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표적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표적은 환영했습니다. 맹인이 앞을 보게 되고, 못 걷는 자가 걷게 되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얻고, 오병이어로 오 천명을 먹이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표적이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은 이적과 기적으로 이 땅에 온 하나님을 나타냈지만 사람들은 이적과 기적만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증거되는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적과 기적만 원하는 자는 끝까지 이적과 기적만 원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행하는 능력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표적이신 예수님을 찾아가 표적을 보여달라 말했습니다. "마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말씀하신 후 자신이 보여줄 표적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 말씀하였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물 밖으로 나와 생명을 건졌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러한 요나의 모습을 보여주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교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마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눈 앞에 표적은 깨닫지 못한다 말씀하신 후 다시 한번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 말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은 많은 이적과 기적을 표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행하는 예수님의 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능력을 행하는 예수님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요나의 표적만 보여주겠다는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내어놓지 않는 예수님을 자신의 삶에서 밀어냈습니다. 표적을 주지 않는다고 표적을 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완성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후 사흘만에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세상에 드러낸 것입니다.

5. 목자들과 복음과 찬송

예수님의 태어남을 알린 후 천사가 떠나자 목자들은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다윗 언약을 성취할 그리스도가 왕궁이나 궁궐 같은 집이 아니라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웠다는 사실은 믿기 힘든 말이지만 천사의 등장과 천군천사의 찬송을 두 눈으로 보았기에 믿음을 가지고 이루어진 일을 보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은 큰 마을이 아니었기에 그날 태어난 아이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이 머무는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았습니다. 천사가 전한 그대로 예수님이 구유에 누워 있었습니다. 목자들은 벅찬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전한 말을 전달한 후 천사가 하나님을 찬송한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천사들이 전한 큰 기쁨의 소식이 목자들이 전하는 큰 기쁨의 소식이 되었고 천군천사의 찬송이 목자들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목자들이 하나님을 찬송한 시점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를 만났을 때 찬송하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그리스도가 태어날 것이라 말한 때도 찬송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수 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찬송하는 것을 들었지만 이때도 찬송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했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을 찬송한 것입니다. 아직 구원에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자신의 삶에 어떠한 유익이나 이익이 없음에도 말씀대로 구유에 누운 하나님의 표적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한 것처럼 구약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보내주겠다 약속해주었습니다. 그 약속은 신약의 말씀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다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 보고 듣고 깨달은 우리는 이때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말씀하신 바를 다 이루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반드시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눅 2:21-40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므온과 안나

 

 

1. 율법 안에 살아가는 예수님

예수님의 유년기는 철저히 율법을 준수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따라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율법을 따라 정결 예식의 날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를 행하였습니다. 이는 율법 아래 살아가는 유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유대인은 아들을 낳으면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고 정결 예식의 날이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 제사를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사람의 아들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행하였습니다. 우리 중 하나가 되어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서입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입니다. 학연이나 지연에 흔들리는 우리와 달리 모든 것을 철저히 따져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죄의 값을 짐승의 피로 대신 받지 않습니다. 짐승의 피는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지 죄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 3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하나님은 기울어진 저울을 사용하지 않기에 사람의 죄값을 사람의 피로만 받습니다. 사람에 대한 값이 정당하게 치뤄질 때만 만족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값을 지불하기 위해 우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종일토록 땀 흘리는 삶으로 예수님이 내려왔습니다.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특혜도 없었습니다. 육신의 옷을 입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었지만 사람이기에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과 두려움을 예수님도 느꼈습니다. 또한 우리가 겪는 주림과 아픔을 예수님도 겪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와 같은 길을 걸어 우리의 대속물이 되었습니다.

2. 시므온과 안나

정결예식을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님은 시므온과 안나를 만났습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목자들과 더불어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님의 이웃과 친척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의 역할은 그의 직업과 사는 곳을 통해 구체화 되었습니다. 다윗과 같은 지역에 살았고 다윗과 같은 일을 함으로 다윗 언약의 성취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목자들과 달리 이름이 나타난 시므온과 안나의 역할은 그들의 이름을 통해 구체화 됩니다. 시므온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두 번째 아들이었던 시므온을 배경으로 합니다. 안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깊이 연결되었습니다.

1) 시므온

야곱의 아들 시므온은 그의 동생 레위와 함께 '디나'의 일로 세겜 지방에 사는 히위 족속을 살인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야곱은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때문에 죽음을 앞에 둔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향해 절망적인 미래를 예언합니다. 이들이 저주를 받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질 것이라 말했습니다. "창 49: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야곱의 말대로 레위는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열 두 지파 중 레위를 제사장 지파로 삼아 각 지파의 처소로 그들을 흩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 역시 야곱의 말대로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민수기의 첫번째 인구조사에서 59,300명이었던 시므온 지파는 두 번째 인구조사 때 22,200명이 되었습니다. 무려 37,100명의 사람이 줄어들었습니다. 1차 조사에서 유다 지파와 단 지파에 뒤를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의 지파였으나 2차 조사 후 시므온 지파는 모든 지파 중 가장 작은 지파가 되었습니다. 바위가 깨져 조약돌이 되고 조약돌이 부서져 모래가 되는 것처럼 시므온 지파는 깨지고 부서져 모래처럼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시므온 지파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사라져 갈 때 유다 지파가 시므온 지파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가나안 정복을 위해 앞장 설 지파로 선택 받은 유다지파는 자신의 땅을 얻기 위해 시므온 지파와 함께 싸울 것을 제안했습니다. 시므온 지파가 유다지파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시므온 지파의 땅을 얻기 위한 싸움을 유다지파가 함께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땅을 차지할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삿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 3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연합하여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두 지파가 함께 전쟁터에 나왔지만 싸움은 유다 지파만 하였습니다. "삿 1: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 7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 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 // 9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고 //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 시므온 지파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다 지파가 앞서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시므온 지파의 이름은 자신의 성읍이 된 스밧 호르마를 유다 지파와 함께 점령할 때만 나타납니다. "삿 1:17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그 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의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사실 유다지파는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 남자의 수가 가장 많은 지파였기에 시므온 지파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했다면 시므온보다 많은 수의 단 지파나 잇사갈 지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더 합리적 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는 작고 사라져가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싸우겠다 말을 한 후 모든 전쟁을 앞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땅을 얻을 수 없는 시므온 지파가 땅을 얻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유다 지파가 저주로 나누며 흩어져 사라져갈 시므온 지파를 보호하고 구원한 것입니다. 이는 시므온 지파가 얻은 땅의 모습을 보면 더 확실히 집니다. 유다 지파가 임신한 여자처럼 시므온 지파를 품고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시므온에게 가장 필요한 분은 유다 지파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저주로 나누며 흩어질 자를 회복시켜 땅을 얻게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베드로의 본명은 헬라어로 '시몬' 입니다. 이를 히브리어로 하면 '시므온' 이 됩니다. 예수님이 체포 던 날 베드로의 모습은 정확히 '시므온'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흩어졌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저주 받아 나누며 흩어져 사라질 시므온의 모습이 베드로를 통해 선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가 그의 '시므온' 됨을 폭로시키고 굳건한 반석 위에 서는 베드로가 되게 하였습니다. "요 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죄로 인해 나누며 흩어져 죽어가는 우리 역시 시므온처럼 유다 지파로 오신 예수님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처럼 우리가 얻을 땅을 위해 대신 싸워 주십니다. 우리의 무능함으로 손과 발이 찔리고 옆구리에 창이 들어와도 우리를 위해 이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끝까지 싸워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허락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성령을 통해 알게 된 시므온은 유다 지파의 성읍이었던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죄로 인해 저주 받은 자신의 삶을 구원할 자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2) 안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난 안나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한나 입니다. 주변에 한나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이 많아 매우 익숙히 들리지만 성경에서 '한나'는 엘가나의 아내 한 명 밖에 없습니다. 엘가나는 에브라임 사람으로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엘가나를 통해 많은 자녀를 낳은 브닌나이고, 다른 한 명은 자녀가 없던 한나였습니다. 엘가나는 많은 자녀를 낳은 브닌나보다 자녀가 없던 한나를 더 좋아했습니다. 브닌나는 이런 엘가나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나를 크게 괴롭혔습니다. 한나는 이러한 자신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을 돌보시고 기억하여 아들을 달라 기도했습니다. "삼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했습니다.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사무엘로 그는 자라며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많이 받았습니다. "삼상 2: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사무엘은 훗날 사사시대를 끝내고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을 옹립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안나는 한나와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어 팔십 사세가 되었습니다. 팔십 사 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수 12가 7번 반복된 숫자입니다. 84라는 숫자를 통해 그녀가 매우 오랫동안 남편 없는 삶을 살았다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자녀의 빈자리를 느끼며 살았던 것처럼 안나도 남편의 빈자리를 느끼며 살았습니다. 이때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기도한 것처럼 안나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빈자리가 채워지길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듣고 그녀의 빈자리를 사무엘로 채워줬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안나의 기도를 듣고그녀의 빈자리를 예수님으로 채워 줬습니다. 안나가 만난 예수님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낳은 사무엘처럼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졌습니다. "눅 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뿐만 아니라 사무엘이 새로운 시대를 연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옛 언약에서 새 언약의 시대가 열렸고 율법에서 은혜로 구원 받는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의 공허함은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누구나 좋아하고 반기는 돈과 명예로 하나님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잠시 잠깐 가족의 사랑과 친구와의 우정이 하나님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병들고 숨을 거두는 사람은 결코 사람의 빈자리를 메울 수 없습니다. 오직 크고 광대하며 영원하신 하나님만 우리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남편을 잃고 오랜 빈자리를 가진 안나가 예수님 만나게 하였습니다. 브닌나에게 괴롭힘을 당한 한나처럼 빈자리로 괴로움 가운데 있던 안나에게 차고 넘치는 예수님을 허락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많은 사람들 중 시므온과 안나를 택해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습니다. 아무도 반기지 않았던 예수님의 태어남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자로 이들을 불렀습니다. 이들의 부름받음은 그들의 거룩한 삶 때문처럼 여겨집니다. 오늘 본문은 시므온을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 소개하고 있고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자라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들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거룩한 삶을 살았기에 선택 받은 것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시므온의 배경은 저주로 나누며 흩어질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안나는 남편 없는 빈자리를 뼈저리게 느끼며 사는 자였습니다. 사무엘과 같이 결핍을 채워줄 자가 간절히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완벽해 보이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결국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므온과 안나를 택해 예수님 앞에 서는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었기에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필요한 자였기에 예수님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을 섬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이들은 다른 제자들보다 한걸음 더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회당장의 딸을 다시 살릴 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그 집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로 하여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가까운 곳에서 직접 보게 하신 것입니다. "눅 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엘리야와 모세를 만났던 변화산에 오를 때도 예수님은 따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불러 이 광경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막 9: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또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했습니다. "막 14: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따로 챙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다른 제자들보다 탁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보고는 예수님의 제자 중 예수님께 가장 많이 책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 믿음이 없어 물에 빠졌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던 예수님과 달리 잠을 이기지 못해 조는 모습을 보였으며 십자가로 가는 예수님의 길을 막아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는 책망마저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는 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하다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것은 물론이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원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마리아인의 마을에 불을 내려 달라 말함으로 꾸짖음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보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가까이 둔 것은 그들이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더 필요로한 부족하고 문제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상황에 맞는 사람을 만나 자신의 병을 고치라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경제를 공부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을 만나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의사를 만나 몸의 상태를 보여주고 그에 따른 처방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 사람은 뛰어난 선생님을 만나 자신에게 맡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데 의사를 만나거나 몸이 아픈데 뛰어난 선생님을 만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데 경제를 공부한 사업가를 만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만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삶을 사는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말을 한 후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은 자리에 은혜가 더욱 넘쳐났다 말합니다. 예수님의 필요를 깨달은 순간 은혜의 덮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롬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따라서 우리 역시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달아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저주로 나누며 흩어질 시므온과 같은 자이며 남편 없는 빈자리를 품고 살아가는 안나임을 깨달아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릴 때 시므온과 안나에게 예수님을 보내준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리라.

 

 

눅 2:25-40 시므온과 안나의 고백

 

 

눅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 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1. 죽기 위한 기다림

길을 찾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먼저 확인하고 자신이 가야할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크고 정확한 지도가 있어도 원하는 목적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여정도 우리의 위치를 아는 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정확한 목적지를 알고 있어도 우리의 위치를 모른다면 결코 그곳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천지와 만물을 창조했습니다. 아담은 천지와 만물 가운데 에덴동산에 살았습니다. 에덴동산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안식 가운데 운영되는 곳이었습니다. 아담은 그곳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의 아내와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뜻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가죽 옷을 만드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담에게 가죽옷이 주어진 날 아담은 에덴 동산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공간에 하나님의 뜻을 어긴 아담은 머물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아담은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원하는 것들을 원하는대로 먹을 수 있던 아담은 에덴동산 밖에서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영생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던 아담은 에덴동산 밖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먹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죽음 없는 삶을 살던 아담은 에덴동산 밖에서 흙으로 지음 받은 것처럼 흙으로 돌아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 밖에서 자신의 생명을 위해 수고하고 땀 흘려 살아가지만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모든 일을 연구한 후 우리의 삶은 괴로운 것이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서 주사 수고하는 삶이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전 1: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 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 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 15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결국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우리의 위치는 쫓겨난 땅에서 수고하는 삶입니다. 하루의 생명을 위해 수고하고 땀흘려 노력하지만 결국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해 모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외면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죽지 않은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은 죽음과 상관 없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백화점의 화려함에 속아 그 속에 있는 자신도 화려하다 생각하는 착각처럼 살아있는 것만 눈 앞에 두는 세상에서 자신도 영원히 살 것이라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지도보다 정교하고 정밀한 하나님의 말씀을 두 손에 들고 있어도 자신이 선 곳을 몰라 영원히 길을 헤매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에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딤후 3: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성령은 시므온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죽지 않을 것이라 말해주었습니다. 죽고 싶어도 그리스도로를 만나야만 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시므온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역할과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 더 풍요롭고 나은 삶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선 땅은 영원한 곳이 아니며 그리스도를 통해 나가야 할 곳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죽고 죽는 세상에서 종일토록 수고하는 삶을 끝내기 위해 그리스도를 만나길 고대했습니다.

"누가복음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은 기뻐했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신대로 자신을 평안히 놓았준다 고백했습니다. 나가고 싶어도 스스로 나갈 수 없는 이 땅에서 자신을 꺼내줄 구원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영화 [디스커버리]는 종교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사후 세계를 과학으로 입증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버 박사는 죽은 아내를 추적하기 위해 사후세계를 연구했습니다 40년의 연구 끝에 그는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발표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무려 400만명이 자살을 했습니다. 오늘의 괴로움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괴로움을 피하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버 박사가 밝혀낸 사후세계는 이루지 못한 현실의 대체품으로 또 다른 미완의 세계였습니다. 불교의 윤회나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완벽한 세상입니다.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몸이 되고 우리가 또 다른 누군가의 몸이 되어 서로 하나 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허다한 죄가 덮어지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한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자들로 가득 찬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자 죽음도 유익이라 생각했습니다. 괴로움과 수고하는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상에 머물 것을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증거의 사명 때문에 이 땅에 머물겠다 말했습니다.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좋은 하나님 나라를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쫓겨난 땅에 좀 더 머물겠다 말한 것입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24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우리에게도 더 나은 세상은 쫓겨나 수고하고 땀흘리며 괴로워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입 니다. 하나님은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우리를 선택했고 은혜를 베풀었으며 예수님을 믿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 이 곳에 머무는 것은 바울과 같이 이 땅에서 더 나은 것을 발견한 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전히 이 땅에 갇혀 아래 것만 추구하는 자들에게 위의 것을 추구하며 위의 것으로 사는 자의 삶을 증거하기 위해 오늘 우리를 이곳에 머물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므온의 기다림처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바울과 같이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 복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칼에 마음을 찔리는 교회

마리아는 수 많은 사람 중에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여자의 후손을 낳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사람의 노력으로 여자의 후손을 낳지 못 했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임신한 하와만 여자의 후손을 낳았습니다. 때문에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향해 '은혜를 받은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도 마리아의 임신을 알고 마리아를 향해 '여자 중에 복이 있는 자'라 말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은혜를 받은 자이며 복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마리아가 칼이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겪을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마리아의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마음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저의 친구는 회사에서 사고로 온 몸이 검게 탄 사람의 사망 사고를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 끔찍해 제대로 바라보지 못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고 현장에 도착한 어머니는 이내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고 울며 큰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의 소리는 사람의 소리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생 살며 들어 본 적 없는 소리로 어머니가 통곡했다 말했습니다. 글을 쓰는 저 역시 자녀의 죽음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입니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모두 저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두 눈으로 봐야 했습니다. 마리아의 은혜와 복이 그녀의 삶을 그곳으로 인도 했습니다.

"2: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은 마리아의 아픔은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들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는 마리아와 같이 은혜로 구원에 이르며 그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교회도 마리아와 같이 은혜와 복을 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걷는 길은 은혜와 복 받은 자의 길로 곧 교회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 때문에 욕을 듣고 박해를 겪으며 악한 말을 들을 때 복이 있다 말씀하였습니다. 마리아와 같이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삶은 꽃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큰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른 길을 걷고 있고 좁은 문에 가까워 졌기 때문입니다.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3. 속량을 기다리는 자

이미 살펴본 것처럼 안나는 나이가 많은 과부였습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일곱 해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홀로 긴 세월을 보내다 팔십 사 세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빈 자리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처럼 가슴 깊이 새겨졌습니다. 이때 안나는 자신의 빈자리를 헛된 것으로 채우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빈자리가 예루살렘을 속량하는 그리스도로 채워지길 바랬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바램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안나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성전의 속량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위해 많은 제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비둘기와 양과 염소 등 다양한 동물이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았던 안나는 이 모습을 해마다 지켜보았습니다. 수 없이 많은 동물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죄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나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한 속전의 제사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속량의 제사를 위해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속전의 제사는 죄를 덮고 가리는 제사로 사람을 온전하게 하지 못합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께 나와 다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속량의 제사는 한번의 제사로 사람을 온전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삶으로 우리에 대한 죄의 값을 차고 넘치게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오랫동안 성전에 머물렀던 한나는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한나와 같이 율법의 제사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나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던 자들에게 하나님이 준비한 제물이 세상에 왔음을 알린 것입니다.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성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량보다 속전을 원했습니다. 해마다 드리는 제사를 통해 자신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짐승을 끌고 들어갈 땐 죄인이었으나 짐승을 죽인 후엔 의인이라 생각했습니다. 버튼만 누르면 불이 켜지는 전등처럼 손쉽게 의롭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들 사이에 안나와 같이 속전의 제사를 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짐승의 제사로 죄를 없애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준비한 제물을 기다렸습니다. 한번의 제사로 사람을 온전하게 할 그리스도의 제사를 원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대부분은 일주일에 한번 교회를 나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쁜 한 주를 보낸 후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이 같은 신앙생활은 마치 속전의 제사와 같습니다. 주일에 참석한 한 번의 예배가 일주일의 모든 죄를 가려주고 없애준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속량의 제사와 같아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오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 은혜를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전에 있었지만 속전을 원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 했습니다. 속량을 원하는 자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교회에서도 속전을 원하는 자들은 항상 예배에 참석하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속량을 원하는 자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작성자 J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