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목(누가복음 17:1-10)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천국의 제자 된 삶은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의 핵심에는 회개와 끊임없는 용서가 있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섬김, 그리고 감사가 있습니다.
질문 1 ;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형제가 범죄했을 때 어떤 책임을 다해야 하는가?(3-4절)
회개와 용서의 삶(1-4) 천국의 제자 된 삶은 공동체 속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책임은 형제가 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형제를 잘못된 가르침으로 타락하게 하는 일은 엄중한 심판이 따릅니다(2). 두 번째 책임은 형제가 죄를 지었다면 개인적으로 회개를 권면해서 회개하고, 잘못을 인정하면 언제든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같은 잘못을 반복해도 용서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비판적인 감시자가 아니라, 서로의 연약함과 짐을 짊어지는 것이 천국 공동체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 안의 형제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지나치게 비판적이지 않습니까? 형제의 신앙과 덕을 세우고 현학함과 짐을 나누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까?
질문 2 ;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그 밑바탕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6,10,16절)
믿음과 섬김의 삶(5-10) 먼저, 천국의 제자 된 공동체의 기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어떻게 커지는가를 묻지만, 예수님은 믿음이 겨자씨만큼이라도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작은 믿음도 큰 역사를 이룰수 있습니다. 그 다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섬김입니다. 어떤 수고와 섬김을 감당해도,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 여겨야 합니다. 더 많이 섬겼다고 목소리가 더 커져서는 안 됩니다. 섬김을 이익의 재료가 아닌, 아름다운 의무로 여기는 것이 천국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섬김을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아름다운 의무로 여깁니까? 섬기려는 태도보다, 섬김을 통해 인정받으려는 태도 속에 나의 '믿음 없음'이 보이지 않습니까?
믿음과 감사의 삶(11-19)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열 명의 나환자들을 만납니다. 긍휼을 구하는 그들에게 주님은 즉시 응답하셔서 모두를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동일한 은혜를 받더라도 모두가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고도 쉽게 망각합니다. 구원 받는 믿음은 감사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감사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것을 받더라도 그 삶에는 천국의 기쁨이 없습니다.
많은 것을 받고서도 감사가 없기에 기쁨이 메말라 있지 않습니까? 상황과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모든 좋은 것들을 선물로 주시는 그분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 성경본문 개요 ]
17:1-4 ; 피난처를 구하여 구세주께로 돌아온 자들이 실족하지 않게 죄를 범했을 때는 경계하고 회개했을 때는 용서하여 영접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17:1-10의 내용은 제자도와 관련한 내용으로서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문맥상 이 문단은 위에서 나타난 바리새인들의 자세와 대조시키는 가운데 주어진 교훈들임을 알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교만한 자들이었다. 또한 자신들은 교만과 탐욕의 심각한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회개하는 세리와 죄인들을 용서하기는커녕 정죄하기에만 골몰하였으며, 엄격한 율법의 굴레를 씌워 수많은 백성들을 실족게 만드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의 제자들은
(1) 작은 자 하나라도 결코 실족하게 해서는 안되며,
(2) 회개하는 형제를 진정으로 용서해야 하며,
(3) 외식하는 자가 아니라 진실한 믿음을 간직한 자들이 되어야 하며,
(4) 무익한 종으로서의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계신 것이다.
이상에서 제자도(Discipleship)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의 자세와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통해 비쳐진 자신들의 모습을 냉정하게 살펴볼 때, 바로 우리가 많은 면에서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특히 교회 시대의 영적 지도자들은 성경의 바리새인들을 본받아서는 안될 반면 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만 의롭게 여기고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며, 가장 거룩한 일에 종사하면서도 속으로는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차 있던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가장 극심하게 배척하고 죽인 자들이 바로 종교 지도 계층을 형성한 그들이었던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가장 거룩한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하고 위험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진정한 제자의 도를 실천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교회 차원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그들을 잃어버린 자들, 동시에 다시 찾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영접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는가?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어느덧 상류층과 중산층만을 위한 교회가 되어 버렸다. 웅장한 교회 건물,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 세련되고 지적인 계층들을 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들 등은 많은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교회 문안으로 들어올 용기를 잃게 한다.
바리새인들의 공동체처럼, 오늘날 교회는 적당한 지식과 교양과 재물을 가지고 있는 자들만이 환영받고 있는 곳으로 전락해 버리지는 않았는가?
복음서는 예수께서 기꺼이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을 가까이하셨고 그들 또한 예수께 주저함 없이 나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일 뿐 아니라 소외된 자(the Outcast)를 위한 복음서이다.
교회는 진정 성경으로 돌아가 세리와 죄인같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이 기꺼이 몰려들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교회에서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때, 교회는 진정으로 예수께서 지향하신 그런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출처 ; 옥스포드 주석. pp. 596-597.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죄짓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죄짓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실족케 하는 것이’라고 번역된 ‘스칸달라’의 본래 의미는
/ ‘덫(trap)’이나 ‘장애물’로서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올무’(계 2:14)와 ‘부딪히는 돌’(롬 9:33), ‘거리끼는 것’(고전 1:23)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 이러한 경우로 살펴보아 본문에서도 형제를 시험에 빠뜨리거나 거짓 교리 또는 가르침 등으로 잘못된 믿음으로 이끄는 것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에 죄를 짓게 만드는 요소가 늘 산재해 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신다.
/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온 ‘아넨넥톤’은 ‘가능하다’, ‘허락하다’란 뜻이 있는 ‘엔데코마이’ 동사에 부정 접두사 ‘아’가 결합된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불가능하다’, ‘절대 허락될 수 없다’라는 뜻이다.
/ 이 단어가 다시 부정 불변사인 ‘메’와 연결되어 범죄하도록 이끄는 행동이 가능할 수밖에 없다라는 강한 긍정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이는 결국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세상에는 늘 죄를 짓도록 하는 요소가 존재해 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형제들을 실족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어디에서 찾고 계시는 것일까?
/ 예수께서는 오히려 세상에 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시면서 그러한 시험이 반드시 그리스도인에게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공동체에서 더욱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하심을 교훈하고 계신다.
/ 이처럼 사실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현실 극복에 대한 강인한 지향점이 있어야 됨을 예수께서는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매우 강조적 어법으로 제자들에게 촉구하신 것이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죄짓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다른 제자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한다고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사도들이 주께 말하기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겨자씨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씨 가운데 하나이다.
팔레스타인의 뽕나무(오디나무)는 최대 600년까지도 사는 나무로서, 방대한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려 양분을 빨아들인다.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 거대한 오디나무를 뿌리 채 뽑아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하신 것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믿음의 유무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는 엄청나고 위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분을 신뢰하는 작은 믿음만 있어도 충분하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본절의 전체적 문장 형식은 ‘에이’ 조건절이 이끄는 조건문이다. 예수께서는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하여 믿음을 더하여 주신다거나 주시지 않는다는 직접적 대답을 주시지 않으시고, 자신들의 믿음을 점검할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하여 믿음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 이 가르침은 마 17:20과 유사하나 다른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믿음에 대한 교훈을 여러 번 주셨음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하고 가정을 드시며 앞에서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양적 믿음의 개념을 수정하여 주신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겨자씨 한 알’을 예로 드시면서 믿음을 설명하시는 것일까? ‘겨자씨’ 즉 ‘시나페오스’는 매우 미세한 것이기는 하나 거대한 결과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바로 예수께서는 이 점을 주목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록 매우 작은 겨자씨이지만 그것 안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성장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나중에 자랐을 때에는 그 씨가 그렇게 작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크게 성장한다는 점이다. 믿음의 원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아주 적은 믿음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 생명력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있다면 그 믿음을 통해 이루지 못한 불가능한 일은 없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 믿음이 생명력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뽕나무를 뽑아 바다에 심을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여기서 ‘뽕나무’로 번역된 ‘쉬카미노’는 ‘백뽕나무’를 의미하는 ‘쉬코모레안(눅19:4)과 다른 ‘혹뽕나무(sycamine-tree)’로서 이집트와 팔레스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다. 이 나무는 번식력이 매우 강하고 뿌리를 넓고 깊게 내린다. 그래서 이 나무는 웬만한 폭풍이 불어닥쳐도 견고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 쉽게 뽑을 수 없는 이 혹뽕나무란 참으로 적절한 소재를 사용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의 힘을 설명해 주셨다. 생명력 있고 하나님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있는 믿음은 그것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도저히 뽑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혹뽕나무도 뽑아 물 속에 심을 정도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유사한 내용이 나오는 마 17:20과 막 11:23에는 ‘뽕나무’ 대신 ‘산’이란 단어가 나오나 그 의미는 둘 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기적으로만 가능한 일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본문의 전반적 의미에 대하여는 그곳의 설명을 참조하라.(출처 ; 옥스포드주석)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명령받은 것이란?
/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의 성도들의 마땅한 의무를 암시한다.
/ 이런 각도에서 보면, 7절의 밭을 갈거나, 양을 돌보고, 가사(家事)를 돌보는 행위는 사도들의 목회적 과제를 암시한다(요 21:16 ; 행 20:28 ; 고전 9:7).
/ 좁은 의미에서 ‘명령받은 것’이란 예수께서 숭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세 가지 임무, 즉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을 말한다(마 28:19,20).
/ 넓은 의미로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의무를 가리킨다.
/ 또한 전후 문맥상으로는 형제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이나 죄지은 형제를 용서하는 일, 실아 있는 믿음을 소유하는 일 등을 가리킨다.
/ 사실 예수께서 명하신 이러한 의무들은 인간이 행하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행하였을 때라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 복있는사람, 2018년, 3,4월호 ]
용서할 것과 종된 자의 위치를 가르치심 ( 17:1-10 )
(1) 실족케 하는 것은 큰 죄이다(1,2절).
우리는 실족케 하는 것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1절).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게 된다. 즉 그의 죄과가 무거워지게 된다(2절). 그러한 사람들은 연자맷돌보다 더 무거운 죄의 짐 아래서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형벌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있게 될 화를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첫째, 그리스도의 작은 자 중 지극히 적은 자에게라도 해를 입힌 핍박자들,
둘째,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럽힘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근심케 한 유혹자들,
셋째, 비방함으로써 봉사를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자들이다.
(2)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큰 의무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3절). 이것은 앞에 있는 말에 대한 언급이거나 아니면 뒤에 나오는 말에 대한 언급이다. 즉 너희는 이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이거나 너희 형제가 너희에게 범죄했을 때 너희는 성내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이다.
1) 만일 우리가 그를 꾸짖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분노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을 억제하여야 한다. 그에게 그의 잘못을 고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간혹 우리가 아무 허물도 없는 사람을 잘못 생각함으로 오해한 것을 깨달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그를 오해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2) 우리는 회개한 사람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또한 해 받은 것은 잊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다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혹 그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 해도 그에 대해서 악한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하며 앙갚음을 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어떤 사람이 되풀이해서 죄를 범하더라도 항상 용서해 주어야 한다(4절).
"만일 어떤 사람이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그 때마다 자기 잘못에 대해 뉘우치곤 한다면 그를 계속해서 용서하라."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한다. 또한 기꺼이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대하여야 한다. 아울러서 그들은 해 받은 것에 대해 분개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해 받은 것을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3)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은혜가 자라감에 따라 다른 모든 은혜들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1) 제자들이 자기들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드린 말씀(5절):
사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믿음이 아직도 연약하고 부족함을 알았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주께 '우리의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씀드렸다. 우리의 믿음을 더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진심으로 바래야 한다. 그들은 해 받은 것에 대해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당시에 그리스도께 이와 같은 간청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의 간청은 곧 이러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여, '우리의 믿음을 더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와 같이 어려운 의무를 시행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하심 가운데서 주어진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형제를 용서하는 일에 있어 대단히 어려운 것들을 이기게 해 줄 것이다.
2) 참된 믿음의 놀랄만한 능력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증거(6절):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즉 겨자씨처럼 작으나 또한 겨자씨처럼 강하게 다른 모든 은혜들을 자극시키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너희가 하기 어려운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심지어 나무의 뿌리를 땅에서 바다에 심기우는 것까지 가능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다.
(4) 우리는 무엇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든지 매우 겸손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행한 사도들조차 그것들로 인해 그를 자신들의 채무자처럼 생각해서는 안되었다.
1)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 시간과 전 힘을 그를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시간을 의무를 행하는 데 보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봉사의 끝남을 또 다른 봉사의 시작으로 여겨야 한다. 종은 들에서 밭을 갈거나 가축을 먹이다가 밤중에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즉 식사 시중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7,8절).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로 하였으면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께 시중들 수 있어야 한다.
3) 여기서 우리의 주된 관심은 반드시 우리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는 데 있다. 우리의 위안은 주인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어떤 종도 자기 주인이 자기에게 '곧 와 앉아서 먹으라'고 말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행할 것을 다 행한 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렇게 할 때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다 마치기까지 힘쓰도록 하자. 그러면 멀지 않아 보상이 있게 될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8절).
5)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리스도를 섬기게 될 때 '띠를 띠어야' 한다. 즉 모든 방해되는 것과 얽어 매는 것에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이 우리는 그에게 시중들기 위해서 우리 자신들을 띠 띠어야 한다. 이것은 종들에게 있어야 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강요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그의 제자들 가운데 섬기는 자로 계셨다. 또한 그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이를 증거한다.
6)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봉사를 하든 그의 감사를 받지 못한다. 종에게 사례하겠느냐(9절) 우리의 어떠한 선행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아무런 공로도 되지 못한다.
7)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든 그것은 우리의 행해야 할 의무보다 더 큰 것이 되지 못한다. 비록 우리가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일지라도 우리는 이 일의 많은 부족함으로 인해서 "슬프도다!"라고 탄식하게 된다. 이는 그것이 단지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크고 첫째되는 계명에 의해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8) 그리스도의 가장 훌륭한 종들일지라도 겸손하게 자신들이 무익한 종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섬김에 의해서 이득 보시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봉사들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채무자가 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봉사를 무익한 봉사로, 우리 자신들을 무익한 종들로 부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눅-16,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까지의 사역(누가복음 17:11-19:27)
17:11에서 시작하여 19:27까지는 넓게는 9:51-19:27의 유대 및 베레아 사역에 관한 기사의 연속 부분으로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까지의 최후 순회 전도 사역을 보도하고 있다.
먼저 누가는 누차 반복하여 언급한 대로(9:51 ; 13:22) 여기서도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17:11). 이로써 누가는 예수께서 유대 및 베레아 사역을 수행 하시면서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한 구속 사역을 완성할 장소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늘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 누가는 현 시점에서의 예수께서 계신 위치와 관련하여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the Border between Samaria and Galilee)’로 지나 시고 있는 중임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란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the Valley of Jezreel)를 가리킨다. 이를 통해 볼 때, 예수께서는 유대 및 베레아 사역 기간 중에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셨다가,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난 길인 이스르엘 골짜기를 통해 동남쪽으로 향하여 요단강 동편의 베레아(Perea)를 지나고, 여리고(Jericho)를 통과하여 예루살렘(Jerusalem)으로 입성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 최후 순회 전도 기간에 관한 기록 부분은 각 문단별로 독립적인 사건 및 교훈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각 문단의 내용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각 문단과 문단 사이에는 작은 주제들이 서로 공통된 요소로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그 작은 주제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의 성격을 여러 각도에서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17:11-19의 첫 문단은 이스르옐 골짜기를 여행하시던 예수께서 열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치유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아홉 명의 유대 출신 문둥병자들은 모두 제 길로 가고 오직 사마리아 출신의 한 문둥병자만이 예수께로 돌아와 감사와 경배를 드린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며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는데, 이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매우 상징성이 강한 사건이다. 즉 이 사건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과 계시를 먼저 받은 유대인이 육적 선민(選民)이라는 지위에 연연하여 그 구약의 성취로 오사 새로이 신약의 복음(福音)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거나 순종하지 않은 반면, 오히려 이방인은 주께 감사하며 경배함으로 결국 최종적인 구원을 먼저 얻게 될 것을 예표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일단 모두 복음의 은혜에 접하게 될 것이지만 그 중의 대다수가 육적 차원에서만 복음을 받아들여 복음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최종 구원의 가치를 깨닫지 못함으로 주님께 나아오지 않을 것과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주님의 복음의 참된 가치를 깨달아 주께 나아옴으로 영원한 천국 구원을 얻게 될 것을 보여 준다.
이어 17:20-37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20절)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선언하신다. 이 선언이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임을 고려할 때, 문맥상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내재성(內在性)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위격 속에서(in the Person of Jesus Christ)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영성(靈性) 및 현재성(現在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 자체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직접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으로 이미 이 땅에 임하였다는 것을 선언하심으로써 가시적이고도 정치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오류를 시정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이 문단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인자의 날’을 보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시며, 그 날을 대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자세에 관해 교훈하신다. 여기서 인자의 날이란 예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때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완성될 때인 그 날을 가리킨다.
이어 18:1-8과 18:9-14의 두 문단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및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는 공통적으로 기도에 관해 교훈하는 비유로서, 각각 낙망치 않는 기도의 자세 및 겸손한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18:1-8은 기도에 관한 교훈이지만 이는 8절의 ‘인자가 올 때'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인자의 날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와 관련하여 교훈을 주고 있는 앞 문단 17:20-37과 밀접한 연관하에서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음 18:15-17의 문단은 겸손(Humility)을 고리로 하여 앞 문단 18:9-14과 이어지고 있다. 즉 기도에 있어서 겸손한 자세의 중요성을 가르친 앞 문단에 이어, 본 문단에서는 어린아이와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 제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또 18:18-30의 문단은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를 고리로 하여 앞 문단 18:15-17과 연결되고 있다. 앞 문단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어린아이와의 상관 관계를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본 문단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부자와의 상관 관계를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들에게는 열려진(open) 반면, 재물에 집착하는 부자들에게는 결코 들어갈 수 없도록 닫혀진(closed)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대비 시키며 교훈하시는 것이다.
이어 18:31-34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수난을 제3차로 예고하신 내용을, 그리고 18:35-43절 에서는 여리고에서 한 거지 소경을 치유하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이 두 문단은 별개의 사건 이지만 문맥적으로는 ‘소경됨(blindness)’이라는 주제로 서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의 거듭된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34절), 그들이 영적으로는 소경 상태로 있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그토록 무지하였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그만큼 무지하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여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예수께서 장차 영적 소경된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임을 예표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 19:1-10은 예수께서 여리고의 키 작은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하신 사건이다. 이는 누가복음의 주제를 매우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는 사건이면서, 초림(初臨)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가장 잘 함축적으로 제시해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즉 인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삭개오와 같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10절).
마지막으로 19:11-27은 열 종과 열 므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계실 때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이 비유가 베풀어지는 주 대상은 삭개오의 집에 동행하였던 제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 비유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의 오해를 풀어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즉,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면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질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본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未來性)을 강조하고 아울러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 마지막 날 곧 당신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맡겨 주신 사명 특히 복음 전파의 사명을 성실히 감당할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상황과 대상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기도 하시고(17:20,21), 미래성을 강조하기도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않았으므로 예수의 오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already) 임하였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야 되신다는 사실은 믿었으나 예수께서 건설하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단지 정치 적인 것으로 오해했다. 즉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는 하였지만 ‘아직(not yet)’ 완성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것임을 가르쳐 주신다. 즉 예수님의 초림(初臨)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하였으나, 그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再臨)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미’와 ‘아직'사이에 긴장(tension)의 관계가 형성 되어 있으며, 이 긴장 속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교훈하시는 데 주안점을 두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이상의 문맥들을 통해 볼 때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 및 제자들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방인들도 포함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리와 같은 죄인들도 회개하면 들어올 수 있는 나라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들에게는 개방되어 있으나 재물에 집착하는 부자들에게는 폐쇄되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인 왕국이 아니라 영적인 왕국이다. 그 나라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나라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으로 누리고 맛보면서 동시에 그 나라의 완성을 갈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제자들은 늘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변함없는 믿음과 충성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pp. 23-26.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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