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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제자가 되는길(누가복음 14:1-14)

by 은총가득 2020. 11. 18.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은?(누가복음 14:1-14)

[ 성경묵상 ]

14:1-24의 세 문단의 내용은 한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 식탁(食卓)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먼저 14:1-6에서 예수께서는 한 고창병 환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통해 인본주의적 전통과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들의 그릇된 안식일관을 시정하여 주신다.

14:7-14은 식사에 참석한 자들 및 초대한 주인을 향하여 겸손과 자비의 실천을 교훈하시는 내용이다. 식사에 초대받은 자들이 서로 자기를 높이려고 상좌(上座)를 택하여 앉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오히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가 높아지리라는 교훈을 들려주신다. 또한 식사에 손님을 청한 주인을 향하여서는 다시 갚을 수 있는 형제 친척이나 부한 이웃들보다는, 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자와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는 것이 하늘의 상급이 있는 선한 행위임을 깨우쳐 주신다.

이어 14:15-24은 큰 잔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어떤 자들이 참석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비유에서 잔치를 배설한 주인은 이미 초청을 받은 자들이 이런 저런 핑계로 잔치에 불참하자, 그들 대신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과 멀리 있는 자들을 청하여 잔치에 참석하게 한다.

이상의 문맥의 흐름들을 관찰할 때 전체적으로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Those who enter the Kingdom of God)’라고 하는 한 가지 분명한 주제를 연속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의 자격에 관한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라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인식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

먼저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시고 많은 사람이 들어가고자 하여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13:22).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혈통적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는 선민(選民) 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결코 범상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이 쫓겨나고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게 된다는 것(13:29)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리라고 여기고 있던 바리새인들(14:15)을 향해, 이전에 초청되었던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지 못하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이 참석할 것을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실로 역설적인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여겼던 다수 유대인들과, 스스로 경건한 자로서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자라고 여겼던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를 배척하고 죽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고 느꼈던 많은 이방인들과 절뚝발이, 소경, 불구자, 가난한 자들이 그 나라에 초청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멀고,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다. (옥스포드 주석)

14장 요약 ;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은 한 마디의 반문(5절)으로 적대자들의 공박을 무력화시키셨다. 잔치 비유는 신자가 갖춰야 할 겸손과 참된 자신의 원리를 교훈하며, '큰 잔치 비유'는 복음(천국)의 초청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불신앙과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자들(이방인)에 대한 축복을 대조시킨다.

14:7-14 ; 청함을 받은 자에 대한 비유로서, 겸손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여기서의 겸손은 은혜를 받는 자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14:12-14 ;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인간 모두가 이해 관계를 떠나 서로 존경하며 물질적으로 부요한 사람들은 서로 나누며 도우라고 하신다. 인간은 '공동 운명체'인 까닭에 서로가 타인의 아픔을 돌아보아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밀한 보상을 받게 된다.(아가페 큰글성경)

[ 질문 1 ]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묻는 주님 질문에 바리새인이 머뭇거린 이유는 무엇일까?(-5절)

[ 질문 2 ]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9-10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첫째, 긍휼히 여기는 자(1-6절)로 살아가야 한다.

둘째, 자기를 낮추는 자(7-11절)로 살아가야 한다.

셋째, 값없이 베푸는 자(12-14절)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어떤 사람일까요? 메마른 계명보다 사람을 더 긍휼히 여기는 사람, 자신을 높이기보다 낮추는 사람, 나보다 약한 자를 값없이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러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그들은 예수를 지켜 보고 있었다.

본절부터 6절까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고창 병자를 고친 일을 계기로 발생한 안식일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복음서에는 안식일 논쟁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만 보더라도 본장의 기사 이전에 예수께서는 이미 세 번에 걸친 안식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6:1-5,6-11 ; 13:10-17). 즉 본단락의 안식일 논쟁은 네번째 발생한 안식일 논쟁인 것이다. 이처럼 복음서 기자들이 안식일 논쟁을 부각시키는 것은 물론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와의 마찰이 안식일 준수 문제를 쟁점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논쟁이 예수 사역의 성격을 선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발췌하여 이를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고 거기에 인간적 전통까지 가미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은 자연적으로 변질되어 율법주의적이며 형식주의적인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반면 예수께서는 구약 전체를 신본주의적 관점에서 받아들이시며 더 나아가 율법의 내면적 의미인 사랑의 정신을 밝히 드러내고 이를 바로 실천하셨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차이점을 안식일 규례가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은 안식일과 관련된 사건을 집중 보도하여 형식적 유대 종교와 확연히 구분되는 생명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2.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그런데 예수 앞에 수종병 환자가 한 사람 있었다.

‘고창병’이란 ‘물’을 가리키는 ‘휘도르’에서 유래한 의학 용어로서 신약 성경에서 오직 본절에서만 사용되었다. 이 병은 신체의 여러 부위에 물이 고여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으로서 당시에는 불치병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병이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겼다. 또한 이 병은 만성적 질병으로 취급되었는데, 바리새인들의 유전에 따르면 당장 위급한 병이 아닌 이러한 만성질병을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수종병 ; 복부에 물이 차서 심장, 신장, 간장 등을 압박하고 몸이 붓는 병. 헬라어로 ‘휘드로피코스’인데, ‘물’을 뜻하는 ‘휘드로’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는 질병이라기보다 하나의 증상으로, 신체의 세포조직에 체액이 비정상적으로 유출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이후 수종병으로 불린 증상으로는 신체의 각 부위에 따라 ‘복부수종’(ascites), ‘늑막공동’(hydrothorax), ‘심장수종’(hydropericardium), ‘발과 다리 수종’(edema) 등이 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예수께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4.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그들은 잠잠하였다. 예수께서 그 병자를 붙잡고 고쳐 주시고, 돌려보내신 다음에,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에라도 당장 끌어내지 않겠느냐?"

6.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그들은 이 말씀에 대답할 수 없었다.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예수께서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기를 쓰고 윗자리를 골라 잡는지를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들어 말씀하셨다.

7-14절의 본단락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고창병 든 사람을 치료하시고 책망하심으로써(5절)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 간의 안식일 논쟁을 마치신 후에 이어 전개된 상황이다. 특히 7-11절은 본격적인 식사를 위하여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려고 나아갈 때에 있었던 일로서 상석을 차지하려는 바리새인들에게 겸손을 교훈하시는 내용이다.

여기서 ‘상좌’를 가리키는 ‘프로토클리시아’는 문자적으로는 ‘첫번째 좌석’이라는 뜻으로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들 중에 제일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앉는 자리를 가리킨다. 당시 연회장에 마련된 식탁은 상하 구별이 있어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앉게 되는 식탁과 일반 사람들이 앉는 식탁이 따로 구별되어 놓여져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바리새인들로 보이는 그 청함을 받은 자들은 저마다 상석에 앉으려 했던 것이다.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네가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들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너와 그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 때에 너는 부끄러워하면서, 맨 끝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네가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여보게, 윗자리로 올라앉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예수께서는 자기를 초대한 사람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네가 그러한 사람들을 초대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 장애자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그러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원어 성경에서는 본문이 본절의 마지막에 위치하여 의인이 부활하는 시기가 직접적으로는 ‘갚음을 받을’ 시기를 가리키며, 또한 원문에서 본절의 맨 처음에 언급된 ‘복이 될’ 시기를 또한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시간적으로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부활 시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비록 본 비유는 잔치를 베푼 자에게 주는 비유이지만 본문의 말씀은 성도의 모든 삶에 있어서 그 초점이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보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답을 받는 자가 될 것을 교훈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세에서 아무것도 보답할 수 없는 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마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과 같은 것임을 말하고 있다(마 6:20 ; 19:21).

한편, 본문에서 ‘의인들’이란 ‘악인들’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에 참예하게 될 자들을 가리킨다. 일부 전천년주의자들은 본절의 ‘의인들의 부활’을 ‘악인들의 부활’과 따로 떼어 ‘악인들의 부활’에(계 20:11-15) 앞선 ‘의인들만의 부활’로(살전 4:16,17)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종말의 날에 있을 모든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전제하는 가운데 본절의 내용은 이 축복에 참여하게 될 의인들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 복있는사람, 2018년 1,2월호 ]

Ⅰ. 고창병 들린 사람을 고치심 14:1-6

(1) 인자는 먹고 마시러 오셨다.

즉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친하게 사귀러 오셨다. 본문에서 그는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셨다(1절). 그 자신의 날에도 연약한 육체를 고쳐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시간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는 여기서 그와 같은 자를 오용하지 않기 위해 매우 주의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안식일에 꼭 필요한 만큼의 음식을 드시기 위해 떡 잡수시러 가셨다. 우리의 안식을 식사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과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2) 그는 선을 행하시러 들어가셨다.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2절).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선하신 축복으로 고창병 든 사람의 소망을 앞지르셨다. 즉, 그가 부르기도 전에 그에게 응답하셨던 것이다. 주의 앞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이 사람은 추측컨데 상당히 심하게 고창병을 앓고 있었던 것같다.

(3) 그는 자신을 대적하는 죄인들의 배척을 참으셨다.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1절). 그리스도를 초대한 바리새인은 그에게서 어떤 구실을 찾기 위해 그를 초대한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냐'하고 그들의 의견을 물으셨을 때 그들은 그것이 옳다고도 또는 그르다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도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비난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고 말하지 않았으며 또한 수치스러워 그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선한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박해자들까지도 합당하고 선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을 행함으로 오히려 박해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수 많은 선행을 베푸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은 그와 그의 이름에 돌을 던졌다.

(4) 죄인들이 아무리 반대와 방해를 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선을 행하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4절).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4절). 그 사람을 데려다가 즉, 그에게 안수하시어 그를 치려하셨다. 또는 그를 안고서 치료하셨을지도 모른다. 다루기 힘든 정도로 몸이 부어 있었지만(고창병에 걸린 사람들은 보통 그 몸이 붓는다) 그를 껴안으시고 온전하게 고쳐 주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리 심한 그와 같은 병일지라도 고치셨따. 그것도 한 순간에 완전히 고치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를 보내셨다. 이는 치료받은 그 사실로 인해서 바리새인들이 그를 공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아무리 불합리해도 자기들이 의도한 자에 대해 정죄하는 자들이 아닌가?

(5) 우리 주 예수께서는 다만 자신은 정당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다(5,6절).

그는 여전히 그들의 생각을 간파하시고, 그들 자신의 관습에 호소함으로 전에는 음흉하게 침묵을 지키던 자들을 이제는 수치로 인해 침묵할 수 밖에 없도록 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릴 자가 있겠느냐? 그러면 그것이 죽지 않겠느냐?" 그들의 자신들의 가축에 대해 이와 같이 하는 것은 그 불쌍한 가축에 대한 연민이 그처럼 많아서가 아니가. 그것은 돈의 가치고 있는 그들 소유의 소나 나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구해내는 일에 대해서만은 특별히 안식일의 율법을 적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 이웃의 선을 위해서는 면제시킬 수 없는 율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쉽게 면제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의 이 질문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잠잠케 만들었던 것이다.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6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면 그 정당함이 드러날 것이며 따라서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Ⅱ. 청함받은 자의 마땅한 자세 14:7-14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있을 때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유익한 한 가르침을 제시하시고 계시다. 그는 낯선 자들, 아니 그를 지켜보는 적들과 함께 있을 때 그가 본 그들의 잘못된 점을 꾸짖으시고 그들을 가르칠 기회를 가지셨다. 우리는 우리의 식탁에서 순수하지 못한 어떤 교제가 용납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악의 없는 그 이상의 대화를 해야하며, 우리의 식탁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할 기회를 가지고,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중에 계셨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전혀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다.

1. 상좌에 앉으려는 자들을 꾸짖으심(7-11)

(1) 예수께서는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상좌에 집착하는지를 주목하셨다(7절).

그는 이미, 대체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을 책망하신 적이 있었다(11:43). 본문에서 그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죄를 절실히 느끼게 하신다. 그는 그들이 얼마나 높은 자리를 고르는가를 지적하셨다. 누구든지 들어오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자리 가까이 다가갔다. 평범한 일상생활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켜 보시며, 우리의 일거 일동을 주목하신다.

(2)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야심을 가진자들이 종종 수치를 당하고 밀려나는 대신 겸손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 있던 자들이 그 겸손으로 존경을 받게 된 사실을 주목하셨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강등되었을 것이며, 훨씬 고귀한 자에게 자리를 내어 주기 위해 내려오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8,9절). 세상적인 지위에 관한 것 뿐 아니라 개인의 장점과 재능에 있어서도 우리보다 훨씬 더 높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고 스스로 교만한 생각을 자제해야 한다. 잔치의 주인이 자기의 손님들을 안내하면서, 더 높은 사람이 마땅히 앉아야 할 자리에 앉지 못한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은 상좌를 차지한 더 낮은 자에게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고 말할 것이다. 자존심은 수치를 당할 것이며, 결국 낮아지고 말 것이다.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를 만족해 하는 사람들이 발탁될 것이다(10절). 가서 말석에 앉으라. 당신을 초대한 친구의 손님들은 당연히 당신보다 더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당신은 벗이여 올라 앉으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높이 올라가는 길은 낮게 시작하는 것이다.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그들은 당신을 존귀한 자로 여길 것이다. 영광은 어둠에서 비칠 때 도리어 더 빛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당신을 겸손한 자로 볼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가장 큰 명예이다. 랍비중에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어떤 비유를 들고 있다. "세 사람이 잔치에 청함을 받았다. 한 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며 나는 제후이니까 하였다. 다른 사람이 그 다음에 앉으며, 나는 현자이니까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가장 낮은 곳에 앉으며, 나는 비천한 자이니까 하였다. 왕은 비천한 자를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고 제후를 가장 낮은 자리에 앉혔다."

(3)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여 우리 모두에게 높은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교훈을 하시고 계시다.

자존심과 야심은 사람들 앞에 명예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과 자기 부정은 정말로 명예로운 것이다. 이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11절).

2. 잔치의 주인에 대한 책망(12-14)

예수께서는 잔치의 주인이 부자를 그렇게 많이 청한 것에 대해 책망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가난한 자를 초대했어야 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화려한 집안 치장에 사용하기 보다는 자선행위에 쓰는 것이 더 귀중하다는 것을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다.

(1) "부유한 자를 대접하려고 하지마라.

즉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12절). 이 말은 친척과 이웃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하는 대접을 금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초청이 습관이 되어서는 안된다. 부자를 위한 어떤 잔치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많은 식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자랑하지 마라. 단지 나타내기 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자기의 가족을 희생시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다시 보상받을 것을 생각하지 마라. 우리 구주께서 부자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신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너희는 보통 대접해 준 자들에게 다시 초청받을 기대를 가지고 대접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너희에게 갚음이 될 것이다."

(2) 먼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한다(13, 14절).

너희가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13절). 그러한 자들은 끼니를 이을 것이 아무것도 없거나, 생계를 위해 일할 수도 없다. 이 사람들은 자선의 대상이다. 그들은 생활 필수품이 없다. 그것들을 공급해 주라. 그러면 그들은 너희에게 기도로 보답할 것이다. 그들은 떠나서도 너희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갚을 수 없다하여 손해 보았다고 말하지 마라. 이는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기 때문이다. "자선 행위는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이 최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보상을 결코 잃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오랜 항해자가 가장 부유한 자가 되어 돌아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눅 14:15-35)

[ 성경묵상 ]

[ 질문 1 ] 천국 잔치 참여를 스스로 거절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각각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가?(18-20절)
어떤 사람은 새로 산 밭 때문에, 어떤 사람은 새로 산 소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결혼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 나라보다 더 급한 일이 있는 사람, 하나님 나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는다.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비천한 신분일지언정, 하나님 나라 잔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 나라가 허락되어진다(21절).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를 세상의 그 어떤 무엇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는 자들의 나라이다.

[ 질문 2 ]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에서 '자기 십자가'는 무엇을 가리키는가?(27절)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는 없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분명히 있다고 말씀하신다(27절).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 나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지를 항상 점검해 보아야 한다.


14:15-24 ; 예수님은 "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죄인들, 가난한 자들, 이방인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약간의 풍유가 섞여 있는 비유이다.

14:25-35 ;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을 따르는 일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을 소중히 여기며 죽을 각오로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둘째, 예수님을 따르기 전 끝까지 따를 수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 셋째, 예수님을 따르는데는 아무것도 갖추지 않는 무소유가 선결 조건이다.넷째.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갈 길을 잘 선택해서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14:15-24은 큰 잔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어떤 자들이 참석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비유에서 잔치를 배설한 주인은 이미 초청을 받은 자들이 이런 저런 핑계로 잔치에 불참하자, 그들 대신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과 멀리 있는 자들을 청하여 잔치에 참석하게 한다.

이상의 문맥의 흐름들을 관찰할 때 전체적으로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Those who enter the Kingdom of God)’라고 하는 한 가지 분명한 주제를 연속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의 자격에 관한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인식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

먼저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시고 많은 사람이 들어가고자 하여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13:22).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혈통적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는 선민(選民) 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결코 범상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이 쫓겨나고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게 된다는 것(13:29)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리라고 여기고 있던 바리새인들(14:15)을 향해, 이전에 초청되었던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지 못하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이 참석할 것을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실로 역설적인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여겼던 다수 유대인들과, 스스로 경건한 자로서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자라고 여겼던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를 배척하고 죽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고 느꼈던 많은 이방인들과 절뚝발이, 소경, 불구자, 가난한 자들이 그 나라에 초청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멀고,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마지막 14:25-35의 문단은 다시 배경이 바뀌어 이동하시는 도중에, 예수께서 과연 어떤 자들이 자신의 진정한 제자들(Jesus’ Real Disciples)이 될 수 있는지를 교훈하시는 내용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오류를 깨는 점에서 이 부분은 위의 문맥의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되는 것 역시 쉽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1. 여기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부모와 형제 자매와 처자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26절).
2. 또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는 자도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33절).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며 제자임을 자처하였겠지만, 진정으로 제자의 길을 이해하고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얼마나 되었을까? 실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역시 ‘좁은 문(the Narrow Door)’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과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은 오히려 그 엄격한 기준에 맞추어 자신의 부족함을 늘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을까? 하나님 나라의 ‘좁은 문’을 인식함으로써 그 문으로 들어가기에 힘쓰게 되는 것처럼, 제자도의 엄격한 기준을 올바로 이해하는 그 시점에서부터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상 앞에 함께 앉아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고 예수께 말하였다.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잔치 시간이 되어, 그는 자기 종을 보내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였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였다.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고 말하였다.

'겨리'는 ‘멍에를 함께 메다’는 뜻의 동사 ‘쥬그뒤미’에서 유래하여 두 마리로 이루어진 ‘쌍’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에서 말하는 소는 총 10마리가 된다. 그런데 쟁기를 갈기 위하여 소를 열 마리나 샀다면 그는 열 마리나 되는 소가 갈 정도의 굉장히 큰 땅을 소유한 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그가 이미 사 놓은 소를 다시 검사하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소유주는 그 소를 되파는 소 장수일 가능성이 크다. 유사한 내용이 기록된 마 22:5에서는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라고만 표현하고 있다. 마태의 이러한 표현과 연관하여 볼 때도 본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람은 농사에 종사하는 자가 아니라 장사꾼일 가능성이 많다.

한편 ‘시험하러’로 번역된 ‘도키마사이’의 원형 ‘도키마조’는 ‘검사하다’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그 소가 밭을 갈기에 훌륭한 소인지 아닌지를 검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실제로 새로 사게 될 소를 검사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산 소를 검사하는 일은 아무리 그가 소 장수라 하더라도 이미 가기로 응하였던 잔치 초청을 거절하면서까지 해야 할 중대한 사안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본절에 등장하는 사람은 잔치에의 초대를 거절하기 위한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초청에 대한 그의 거절은 그의 관심이 이 잔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산 소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오직 세상 일들에만 관심을 가진 채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을 거부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또 다른 사람은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소. 그러니 가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그 종이 돌아와서, 이것을 그대로 자기 주인에게 일렀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하였다.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그런 뒤에 종이 말하였다. 주인님, 분부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주인이 종에게 말하였다. 큰길과 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초대를 받은 사람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많은 무리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많은 무리들이 계속해서 자신을 따르기 위해 몰려드는 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25-35절까지 그들에게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교훈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막연히 예수를 따르는 자에 머무르기보다는 진정 십자가의 고난도 감수할 만한 성숙한 신앙과 헌신을 지닌 제자들이 되기를 소망하며 제자도에 대한 특별한 교훈을 주신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이 교훈 가운데는 세 개의 비유, 즉 ‘망대를 세우는 자의 비유’(28-30절), ‘전쟁을 준비하는 왕의 비유’(31,32절), ‘맛을 잃은 소금의 비유’(33-35절)가 등장한다.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를 위해서라면 본절에 열거되고 있는 대상들과 단절도 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그 어떤 무엇보다 우선하여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제자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히려 예수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미워하라’는 셈어적인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본절은 26절에 이어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두 번째 조건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쫓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고’에 해당하는 동사 ‘바스타조’는 ‘옮겨가다’(요 20:15), ‘참다’(계 2:3), ‘짐을 지다’(갈 6:2)는 뜻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의 고난의 모습을 다각도로 묘사하고 있다.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 10:38에서는 ‘취하다’는 뜻의 ‘람바노’ 동사를 사용하여 이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마태에서는 본절은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표현 대신에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로 표현되었다. 두 구절을 비교해 볼 때 마태보다 누가가 더욱더 강한 어조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조건을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하여는 어떠한 고난이라도 감수하여야 함을 당시 로마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이었던 십자가 처형까지 예로 들면서 강조하신 것이다. 스승되신 예수께서는 후에 실제로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모범을 보였고 베드로를 비롯한 수많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실제 십자가에 못박히는 등 죽음까지 불사하며 예수를 따름으로써 이 명령을 수행하였다.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본절부터 35절까지는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자의 자세에 대한 교훈적 내용을 담고 있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오며, 28-30절은 그 가운데 첫번째인 ‘망대 세우는 자의 비유’이다.

원어 성경에서는 한글 개역 성경에 그 번역이 생략된 ‘왜냐하면’이라는 뜻의 접속사 ‘가르’가 나오는데 여기서 ‘가르’는 앞절의 내용과 본 ‘망대를 세우는 자의 비유’를 연결하고 있다. 특별히 ‘가르’는 27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쫓지 않는 자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예수의 교훈에 대한 부연 설명을 제공해 주고 있다.

즉 망대를 세울 때 그 비용을 생각지 않고 진행한다면 중도에 그만둘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데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를 미리 생각지 않고 예수를 따르게 되면 중도에 그만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접속사 ‘가르’를 사용하여 연결시키고 있다.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그렇게 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기 시작하여,

원어 성경은 한글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하기 위하여’라는 뜻의 접속사 ‘히나’로 본절을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히나’는 왜 망대를 세울 때 그 비용을 먼저 계산해야 되는지(28절) 그 목적을 가리키고 있으며, 30절의 내용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본절에서 ‘히나’는 접속사 ‘메포테’와 결합하여 ‘히나 메포테’란 형태를 이루며 ‘혹 ~ 하지 않도록’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접속사 ‘메포테’와 연결된 것은 가정법 동사인 ‘아록손타이’이다. 한글 개역 성경은 ‘아록손타이 아우토 앵파이제인’을 ‘비웃어’라고만 번역하였지만, 이 부분을 직역하면 ‘그들이 그를 비웃기 시작할 것이다’이다. 이에 따라 이 부분을 ‘히나 메포테’와 연결하여 본절과 30절을 원문의 표현대로 다시 바꾸어 번역하면 ‘그가 기초만 쌓고 끝까지 완성할 수 없는 것을 지켜보는 자들이 이 사람이 건축을 시작했지만 마칠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를 비웃기 시작하지 않도록’이다.

그러므로 28절에서 말하고 있는 망대의 건축 비용을 미리 계산해야 하는 목적은 시작만 좋았지 끝은 맺지 못했다고 사람들이 비웃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지만 끝까지 따르지 못했다는 비웃음을 받지 않도록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 헌신하는 자들은 먼저 예수를 따르는 데 반드시 수반되는 고난의 십자가를 미리 생각해야 됨을 본 비유는 설명해 주고 있다.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말하기를 이 사람이 짓기를 시작만 하고, 끝내지는 못하였구나 할 것이다.

원문의 ‘후토스 호 안드로 포스’란 표현은 사람을 경멸하여 지칭할 때 사용된다. 즉 이러한 호칭 그 자체가 건축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끝까지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둔 자에 대한 비난과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 는것이다.

한편 본 비유에서 나타난 이러한 일은 실제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본 비유는 당시의 헤롯 일가의 건축 사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곳곳에 커다란 건축물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진행시켰지만 대부분의 공사가 미완성으로 끝남으로 말미암아 백성들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유는 당시 사람들이 매우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로 밀고 들어오는 자를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를,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앞선 비유에서는 한 건축자를 예로 들고 있다면, 본 비유에서는 전쟁을 앞두고 있는 한 왕을 예로 들고 있다. 이 왕은 상대방보다 병력이 반밖에 되지 않는 매우 불리한 여건을 안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나아갈 때 그들이 대적해야 할 적들이 무수히 많음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 닥칠 것임을 상징하고 있다. 만약 전쟁에 임한 왕이 이러한 적의 현황을 파악하였다면 이 왕은 적과 싸우기 전에 먼저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해야만 한다.

원문에서는 이를 ‘헤아리지’로 번역된 ‘불류세타이’의 원형 ‘불류오’ 동사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 동사는 ‘깊이 생각하다’, ‘의논하다’(행 27:39)는 뜻으로 전쟁에 임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며, 신하들과 의논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본문은 그리스도의 제자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앞으로 무수한 적들과 싸워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기다리고 있는 자들로서 이런 상황에 처할 경우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심사 숙고한 후 영적 전쟁에 임하라는 것이다.

한편 앞선 비유가 당시 유대 헤롯 통치하에 졸속하게 진행되었던 건축 사업을 반영한 비유인 것과 마찬가지로 본 비유 역시 치세 기간 동안 탐욕과 실정(失政)으로 얼룩진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의 상황을 반영한 비유이다. 헤롯 안디바는 동생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하여 과거에 정략적으로 결혼하였던 아라비아의 왕 아레 타스(Aretas)의 딸이었던 첫번째 부인과 이혼하였다. 이에 심한 모욕을 느낀 아라비아 왕은 헤롯 안디바와 전쟁하였으며, 헤롯 안디바는 크게 패하여 큰 수치를 맛보았다. 따라서 예수로부터 이 비유를 듣던 당시 사람들은 헤롯 안디바의 어리석음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이 비유의 의미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하여 영적 싸움에서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영적 진리를 설파하셨던 것이다.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당해 낼 수 없겠으면, 그가 아직 멀리 있는 동안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할 것이다.

본절은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은 상황을 가리키며 영적으로는 아직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을 헌신하기 이전의 상황을 상징한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로 헌신한다는 것은 무수한 적들과 맞부딪쳐 싸워야 하는 큰 위험이 따를 것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 비유는 아직 이러한 싸움이 시작되기 이전에 예수의 제자로 헌신하여 이러한 전쟁을 할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비유를 주시는 의도와 목적은 무리들이 자신을 떠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도전 정신과 분명하고도 확고한 제자도를 가지고 자신을 따르도록 독려하기 위한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제대로 본 사람은 나의 모든 소유와 내 모든 존재보다 그 나라가 더욱 소중하고 존귀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본절의 내용은 본 문맥과는 어울리지 않으며, 갑자기 나오는 돌출 구절처럼 보인다. 또한 ‘너희 중의 누구든지’라는 표현이나 본절 후반부의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앞서 26,27절에 나오는 표현과 거의 동일한 표현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본절은 26,27절과 연결된 또 하나의 결론적 진술로 보기도 한다. 본절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또한 앞의 비유와 연관되기보다는 26절과 더욱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은 ‘이처럼’이라는 뜻의 부사 ‘후토스’와 ‘그러므로’라는 뜻의 ‘운’으로 시작 함으로써 앞선 비유와 본절을 연결시키고 있다. 즉 본절의 내용은 앞선 두 비유와 비록 내용에 있어서 직접적 연관이 쉽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단어 사용으로 보아서는 앞선 두 비유의 결론을 본절에서 맺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은 제25절 이하에서 제시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자의 각오와 자세와 관련,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매우 큰 결단이 요구되는 것임을 말해 준다. 예수께서는 제자의 길이 아무 생각 없이는 결코 따를 수 없는 길이며, 사려깊은 생각을 통한 분명한 결단과 헌신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길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절은 다음에 나오는 제자도의 교훈을 총 마무리하는 ‘소금의 비유’(34,35절)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철저한 희생과 헌신의 삶을 제자의 자격으로 새로이 첨가하고 있는 부분이다.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짠맛을 나게 하겠느냐?

본절의 내용은 마 5:13과 막 9:50에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본절은 막 9:50과 거의 동일하다. 단지 누가는 ‘소금’ 앞에 ‘~조차도’라는 뜻의 부사 ‘카이’를 첨가하고 있다는 것만이 다르다. 이러한 누가의 표현은 짠 맛을 낼 수 있는 것이 소금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소금이 싼 맛을 잃는다면 그야말로 아무 가치 없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것은 자명한 일이다. 본절에서의 ‘소금’은 33절의 표현을 따르면 일차적으로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철저한 헌신을 가리킨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자세를 망라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기타 내용 및 의미는 막 9:50의 셜명을 참조하라.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그것은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가 없어서, 밖에 내버린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본절의 표현을 산상수훈 가운데 나오는 마 5:13과 비교해 볼 때 약간의 차이만이 발견된다. 즉 마태의 ‘아무 쓸데없이’란 표현을 누가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누가는 단지 ‘내어버리느니라’고 하였지만, 마태는 여기에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는 표현을 첨가하고 있다.

유대인 공동체를 일차적 독자로 삼고 있는 마태복음의 기자 마태는 유대인들의 고질적 병폐를 통렬하게 지적하기 위하여 누가의 표현에 비하여 보다 강하고 경멸적인 어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전반적 의미에 대하여는 마 5:13의 설명을 보라.

한편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는 표현은 비유 끝에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으로(마 11:15 ;13:43 ; 눅 8:8) 그 교훈을 새겨 들을 것을 촉구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표현으로 자신을 따르기 원하는 많은 무리들에게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는 보다 분명한 결단과 헌신을 각오하고 자신의 뒤를 쫓아야 함을 교훈하며, 더불어 그러한 참 제자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전반적 의미는 마 11:15의 설명을 보라.

 

 

제자가 되는 길의 어려움 ( 14:25-35 )

그리스도께서는 이 구절에서 자기를 따라 모인 무리들에게 직접적인 강론을 하시며, 제자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권고하신다.

(1)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던 무리들은 상당한 열성을 갖고 있었다(25절).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쎄. 많은 사람들은 사랑은 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사교상 모인 것이다. 여기에서 혼합된 군중들을 볼 수 있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열심을 보시고 그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시고자 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약속한 자들은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어야 하며, 따라서 그에 대한 채비를 차리고 있어야 한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닥칠 최악의 사태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제자가 될 생각이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계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리라고 기대하였다. "만일 누구든지 내게 나아와 나의 제자가 되면 그는 풍성한 부와 명예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말씀하신다.

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이익을 바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사랑하고 있는 것을 기꺼이 버려야만 한다(26절).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와…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만일 그가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 더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없다면 그는 신실한 제자가 아니며, 견실하고 변함 없는 제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본문에는 집이나 땅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철학은 이러한 것들을 경멸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더 높은 차원에서 다룬다. 선한 사람이라면 모두 자기 친척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상대적으로 그들 미워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들의 친척을 어느 정도 미워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만족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잠긴 바 되고 삼킨 바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부모에 대한 의무와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의무가 서로 앞을 다툴 때, 우리는 우선권을 그리스도에게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든가 아니면 우리의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배척받게 된다면(초대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잃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사회를 잃는 길을 택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사랑한다. 일찍이 어느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영적 생명에 대한 기쁨의 체험과 영생에 대해 믿는 소망과 기대는 이 어려운 고백을 쉽게 하게 할 것이다. 시련과 박해가 그 고백 때문에 일어날 때 주로 그 시험이 있게 된다. 평온한 시기일지라도 이 문제는 종종 시험을 일으킨다. 친척이나 친구의 마음을 상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고백하기를 주저하는 자들은 그리스도 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기꺼이 져야만 한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7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두 십자가 형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모두 자기들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모욕받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수형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가야 한다. 즉 그는 그리스도를 좇는 중에 십자가가 놓여있을 때는 언제든지 의무로서 그것을 짊어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자기를 부를 때 그것을 져야 하며, 그에게 있을 보상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라고 명하신다.

계속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작하기 전에 계속할 것인가를 고려하여야 한다. 이것이 이성적인 행동이며, 성숙된 인간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의는 아무리 세심히 살펴도 한결같다. 반면에 사단은 가장 좋은 것은 나타내어 보여주나 가장 나쁜 것은 숨긴다. 이와 같이 먼저 생각하는 일은 인내에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 구세주는 두가지 비유로서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설명하신다.

① 우리는 망대를 세울 임무를 맡은 어떤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그 공사에 대한 비용은 예산하지 않으면 안된다(28-30절).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28절). 끝마칠 수 없는 일을 시작하여 스스로 비웃음을 사지 않도록 재정 사정과 비교해 보라. 신앙 고백을 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을 내린 자들은 망대를 세울 임무를 맡은 것과 같다. 낮게 시작하여 기초를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세운다. 그리고 계속적인 공사를 통하여 마침내 하늘만큼 높이 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망대를 세우려고 하는 자들은 앉아서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과 깨어있는 생활을 위한 대가를 치룰 수 있을 것인가를 예산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 가운데 쌓아 올린 자신의 명예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소중한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어쩌면 지불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지불해야 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신 것에 비교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적은 것이다. 이 망대를 세우기 시작한 자들 대부분이 그것을 계속하지 못하고 또한 인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분수에 넘치는 예산을 세웠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들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 이 망대를 마치기에 충분한 자는 아무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은혜가 너희에게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신앙 생활을 잘 시작한 자들이 중도에 중지하는 것 보다 더 수치스런 일은 없다.

②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약속한 자는 싸우러 가는 사람과 같다.

따라서 그 싸움의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31,32절). 이웃나라 임금에게 선전포고하는 임금은 자기 편이 이길 수 있는 무슨 대책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일 이길 능력이 없다면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피할 것이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일종의 전쟁이 아닐까? 우리가 가는 매 발걸음 마다 싸움이 있다. 우리의 영적인 적들은 반대편에서 매우 끊일 사이 없이 달려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우리 이름을 기입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에게 마땅히 기대되고 예상된 어려움을 견딜 수 있을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상의 두가지 비유를 통해서 볼 때 세상을 포기한 것처럼 꾸몄다가 후에 세상으로 되돌아 가는 것 보다는 차라리 할 수 있는 한 세상과 최선의 관계를 갖는 것이 더 좋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소유를 내어 놓을 마음이 없었던 부자 청년은 자기를 숨긴 채 머물러 있기 보다 근심하며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가는 것이 더 잘한 것이었다.
이 비유는 다른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다. 즉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시작하기 보다는 오히려 빨리 시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받아들이 수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 5:25의 '급히 사화하라'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죄를 고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무리 도도하고 겁 없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적수는 될 수 없다. 이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우리의 이익이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강화조건을 사신을 통해 보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으며 훌륭한 것이다. 그 조건들을 잘 알고 화해하도록 하라.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32절3). 시간이 있을 때 화해하라.
그러나 본문(33절)에 나타난 이 비유의 적용을 보면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려 할 때 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문제를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배교에 대해 경고하신다.

왜냐하면 배교는 그들을 완전히 무익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34,35절).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특히 선한 사역자들은 더욱 그러하다(마 5:13). 소금은 좋은 것이며 크게 소용되는 것이다. 타락한 그리스도인들, 즉 세상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앙을 내 팽개친 자들은 그 맛을 잃은 소금이며, 세상에서 가장 무익하고 무가치한 것이다. 즉 그 안에 어떤 미덕이나 선한 자질도 찾아볼 수 없는 자들이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절대로 다시 회복할 수 없다.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34절). 너희가 그것을 짜게 할 수 없다. 이것은 배교자를 회복시키는 일이 극히 어렵고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암시하는 것이다(히 6:4-6).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쓸모가 없다. 똥처럼 땅을 위하여 거름이 되기에도 적합치 않을 뿐 아니라 또한 거름더미에 버려둔다 할지라도 썩지 않는다. 정신과 태도가 타락한 신앙인은 맛을 잃을대로 잃어버린 육욕적인 자이다. 그것은 버려지게 된다. 사람들이 그것을 내어버리는 것이다(35절).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과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름을 더럽히는 신앙인들은 교회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의해 영향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구세주는 모두에게 이것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계시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본문 ; 눅 14:25-35
제목 : 이러한 자는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전해진 복음으로 인해 교회를 찾아온 자들을 제자를 삼아, 우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셔서 가르치신 후 제자를 삼기를 원하셨다. 그렇다면, 제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일은 무엇인가?

청함을 받은 자는 높은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한다(눅 14:7-11)고 가르친 후,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 세 가지를 가르치고 있다.

첫째,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나아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제자가 되지 못한다.

예수를 위해서라면 본절에 열거되고 있는 대상들과 단절도 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그 어떤 무엇보다 우선하여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제자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히려 예수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미워하라’는 셈어적인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주께 합당하지 않고, 아들이나 딸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주께 합당하지 아니한다(마 10:37).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부모형제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 재물, 명예, 미디어, 휴대폰 등이 부모형제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 때에 가장 큰 극형이다. 사형수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자기 자신의 일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일하다 보면 고난을 당하게 되는데, 이 때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데 있어서 필요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 시대나 로마 시대에 우리들이 처해 있을 때 순교한 그들과 같이 우리들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시인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마 16:24).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마 16:24)

셋째,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부자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재물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그는 근심하고 돌아갔다. 자신이 갖고 있는 재물로 나의 도움을 기다리는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저주, 질투, 난폭함, 분열을 일으키는 것들을 버러야 한다.

주님은 버리지 못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집착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를 위해 우리 자신들은 행할 수 없다. 주님의 인도함을 받아야만 행할 수 있다.

결론을 맺겠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버리움을 받는다. 제자들이 맛을 잃으면 버림을 받는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맛 잃은 소금이 된다.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자와 싸움을 하고자 하는 자는 계산한 후에 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올바로 행하지 아니하면 제자의 길을 올바로 걷지 못하게 된다.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림을 받게 된다.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기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부모형제, 목숨보다 주를 더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주를 위해 사는 가운데 당하는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라는 말씀이다. 자신의 소유로 남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말씀이다. <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