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눅 8:22-25)
들어가며
이스라엘 땅의 북쪽에 위치한 갈릴리 호수는 예기치 않는 돌풍이 자주 불어옵니다. 갈릴리 호수의 돌풍은 시작된 지 몇 분 만에 2미터가 넘는 파도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전문적인 뱃사람들조차도 어려움을 겪게 만듭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갈릴리 바다를 종종 인생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잔잔하던 갈릴리 호수에 갑작스럽게 돌풍과 풍랑이 일 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갑작스럽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돌풍을 만나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그 어려움에서 벗어났는가를 말해주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갑작스러운 고난이 찾아올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 속으로
1. 제자들은 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게 되었습니까?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여전히 호수 위에 있을 때 그들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까? (22-23절)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22절) 예수님이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호수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22-23절) ‘들어가며’에서 말한 대로 갈릴리 바다에 광풍이 밀어닥쳤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베드로를 비롯해서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배에 가득하게 되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이 대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셔서 그 말씀에 순종했을 따름인데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의 삶에 갑작스러운 사고나 어려운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믿음대로 살아간다고 해서 이 세상의 어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그 광풍 속에서도 잠들어 계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려움을 만나서 힘들어할 때 주님이 우리의 상황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치 잠들어 계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고 아무리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해도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야속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게 우리의 삶의 한 모습입니다.
2.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 제자들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24절)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24절) 제자들이 한 일은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하면서 주님을 깨운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깨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광풍이 밀어닥치고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될 정도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때 예수님을 깨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깨우기 전에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배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썼을 겁니다. 뱃사람 출신도 있고 하니 자기들 힘으로 그 위기를 벗어나 보려고 노력했겠지만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자 예수님을 깨웠을 겁니다.
제자들의 간청에 의해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은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곧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어서 그렇지 대단한 일입니다. 그 모습을 직접 본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자기들의 힘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는데 예수님은 근본적인 문제(바람과 풍랑)를 해결함으로써 제자들을 위기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깨웠겠지만 그것만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풍랑이 밀어닥칠 때도, 우리는 대부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는 중에 문제가 더 악화되는 경우도 많았을 겁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깨워 도움을 요청한 것이 최선의 길이었듯이 우리도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을 때 오직 기도만이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최후에 기도할 것이 아니라 문제의 초기부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선의 길을 제일 마지막에 선택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최선의 길인 기도를 먼저 택하고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것이 인생에 밀어닥치는 바람과 풍랑을 이기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3.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신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5a절)
25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25절) 예수님이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믿음은 어디에 제쳐두고 두려워하느냐?”라는 뜻일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광풍이 불고 물결이 사나운 그 위기 속에서 그들이 믿음으로 이겨내기를 바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제자들이 주님을 깨워 도움을 요청했으니 믿음으로 이겨낸 것이기는 합니다만, 주님은 당신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두려워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무리 사나운 바람이 불고 물결이 거세도 우리는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이 바람과 물결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조차도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 문제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도 필요하지만 주님의 응답을 확신하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삶의 문제를 전적으로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4.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케 하심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5b절)
25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25절)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당연합니다. 바람과 물을 명하여 잠잠케 하신 주님이 얼마나 경이로웠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제자들의 반응을 통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분명하게 인식했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봤으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우리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그것을 주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고 문제가 생겨서 기도할 때는 간절하게 기도하지만 그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는 주님께 감사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이 은혜로 그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의 지나간 삶을 돌아보십시오. 비록 우리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주님이 우리의 삶에 있었던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했고 따라서 감사하지도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자들이 보여준 반응처럼 우리도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주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분명한 고백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근래에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경우였습니까? 그것으로 인해 어떻게 주님께 감사했습니까?
한 주간의 실천/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복음성가 하루에 한 번 이상 부르기
마무리하며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로 시작되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그 복음성가의 가사가 오늘 본문과 주제와 잘 어울립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주님께 우리의 문제를 맡길 수 있는데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연약하기에 걱정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지만 모든 걱정과 두려움을 주님께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입니다. 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주님이 행하신 그 일로 인해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복있는사람, 2018년 1,2월호
등불, 참 가족, 풍랑을 잠잠케 하심(눅 8:16-25)
[ 성경묵상 ]
8:16-18 ; 예수님의 가르침들 가운데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비유'는 그것을 듣는 자들의 마음 상태에 따라 두 가지의 상반된 결과를 낳게 된다. 가르침에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는 그 비유가 오히려 묵상의 근거가 되어서 많은 결실을 가져오며 등불처럼 빛을 발하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네는 한낱 이야기에 그침으로써 진리에서 멀어져서 있던 것마저 없어지게 된다.
8:19-21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참된 가족으로 간주된다.
8:22-25 ;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닥치는 상황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16-18절은 일명 ‘퉁불 비유’로서 막 4:21-25와 병행을 이룬다. 마 5:14-16에도 동일한 비유가 나오나 이는 본단락과 문맥이 다른 제자도를 가르치면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선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본단락에서 이 퉁불 비유의 핵심은 사람들이 퉁불을 켜서 사물을 밝히 비추도록 둥경 위에 두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비밀 역시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날 것이며, 복음을 받은 제자들은 그것을 혼자서만 갖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는 퉁불을 반드시 동경 위에 두어야 함을 강조함으로써 비유로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이 그것을 듣는 자로 깨닫게 하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다.
8:16-18의 등불 비유는 마태복음의 문맥에서는 성도들이 삶 속에서 선한 행실로 빛을 발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제시되어 있다(마 5:15,16), 그러나 본문의 문맥상 이 비유는 하나님의 진리인 복음은 반드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과 그러한 복음에 대한 자세가 결국에 는 영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하여 심판과 구원의 근거가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8:19-21의 짧은 본문은 예수의 참 가족관에 관한 내용이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선언하신다. 이 역시 문단 자체적 교훈을 포함하고 있지만, 복음에 대한 듣는 자의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문맥적으로 일관된 흐름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8:22-56 사이의 세 문단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련의 기사들이 문단별로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적, 거라사 지방에서의 축사 이적, 혈루증 여인의 치유 및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 기간 중에 행하신 세 번의 부활 이적 중 두번째인 회당장 야이로의 딸 소생 사건을 각각 보도하고 있다. 이 세 문단이 연속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다양한 차원에서 행해지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예수님의 권능이 자연계(自然界)와 영계(靈界), 그리고 인간의 질병과 생사(生死)의 영역에까지 고루 미치는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권능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 및 표준새번역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대 밑에다가 두지 않고, 등경 위에다가 올려놓아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
여기에서 ‘등경’으로 번역된 ‘뤼크 니아스’의 원형 ‘뤼크니아’는 ‘등잔을 받치는 등대’ 또는 ‘춧대’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알려지거나 환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7절의 의미는 숨은 것은 반드시 분명하고 명백하게 드러나 알려질 것이며, 감추인 것 역시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지금 비록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 셔서 그 의미가 일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만천하에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17절은 예수께서 오신 것도 자신을 숨기고 은폐하기 위함이 아닌 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주님의 직접적인 사역과 제자들의 전도 · 교육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지금은 숨겨지고 감추언 것 같이 보이지만 반 드시 밝히 드러나고 알려지게 될 것임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조심하여 들어라.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로 생각하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한글 개역 성경의 ‘스스로 삼가라’는 번역은 그 어순이나 의미에 있어서 원문과는 다른 뉘앙스를 조성한다. 원문상으로 볼 때 이에 해당하는 ‘블레페테’는 문장의 제일 서두에 나오며 복수 2인칭 명령형으로서 ‘너희는 보아라’ 또는 ‘너희는 식별하라’란 의미가 된다. 바로 뒤에 연결되어 나오는 내용을 고려하면 전자보다는 후자인 ‘너회는 식별하라’가 더 어울린다. 헬라어는 어순이 유동적이어서 무언가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문장의 맨 앞으로 보내는 것이 특진이다. 그러므로 본 표제어에 있어서도 ‘너회는 식별하라’란 의미가 강조되며 이를 반영하여 번역하면 ‘그러므로 너회는 식별하라!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를!’이 된다. ‘블레페테’가 가지는 ‘식별하다’는 의미는 의문사 ‘어떻게(포스)’와 의미상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렇다면 무엇을 식별하라는 것인가? 이것은 앞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계속 언급한 것처럼 씨가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떠한 마음 밭인가와 어떤 마음과 자세로 말씀을 듣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올바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듣는 행동 뿐만 아니라 들은 것을 지키고 행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등불 비유의 결론으로 예수님은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 원리를 빗대어 말씀하시며, 복음을 들고 행하는 신실된 자세를 촉구하신다. 또한 이 말씀은 달란트 비유(마 25:14-30)의 결부 부분에도(마 25:29), 므나 비유(눅 19:11-27)의 결론 부분에도(19:26), 그리고 본절의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의 등불 비유에도 등장한다(막 4:25). 본절에서 예수님은 ‘있는 자’와 ‘없는 자’ 를 비교하신다. 본절에서 반복하여 나오는 ‘호스 안’은 ‘~하는 자는 누구든지(whosoever)’라는 의미로서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총칭하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어떤 자들인가?
먼저, ‘있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을 환영하고 잘 활용하며 실행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15절) 계속적으로 삶의 더 많은 기쁨과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반면 ‘없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또한 그 말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경시하고 하찮게 여기며 행치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없는 자들에게 있어 치명적 함정은 자신들에게는 분명히 없는데 ‘있는 줄로’ 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이들을 향해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다. 사실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긴다’는 말은 어불성셜(語不成說)이다. 마 25:29와 막4:25, 그리고 눅 19:26에는 빼앗기게 되는 대상이 모두 ‘그 있는 것’, 즉 ‘호 에케이’로 기록되어 있다. 즉 18절의 ‘~줄로 아는’에 해당하는 ‘도케이’가 없다. ‘도케이’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그러하다고 독단적으로 생각하거나 잘못 믿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의 ‘없는 자’는 사실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는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으므로 빼앗길 것도 없다. 그런데 누가는 본절에서 그것조차도 빼앗길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바로, 사실은 없는데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국 그 마음이 더욱더 완악해지고 강팍해져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길에서 벌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말씀을 깨닫는 통찰력, 그리고 풍성한 은사들을 받았다. 그러나 말씀에 부주의하고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순종치 않는 삶을 사는 중에 그러한 것들이 사라졌다.
그는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자기 안에 그러한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줄 알고 계속해서 하나님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 결국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조차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경제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지적하시면서 복음에 대한 자세가 결국 내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원인이 될 것임을 교훈하신 것이다.
19.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로 왔으나, 무리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온 이유는 마가복음 3:21에 나와 있다.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0.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하고 전하였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다."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그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떠났다.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배를 저어 가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런데 사나운 바람이 호수로 내리 불어서, 배에 물이 차고, 그들은 위태롭게 되었다.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그래서 제자들은 다가가서, 예수를 깨우고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깨어나서, 바람과 성난 물결을 꾸짖으시니, 바람과 물결이 곧 그치고 잔잔해졌다.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 그들은 두려워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서로 말하기를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을 호령하시니, 그것들까지도 이분에게 복종할까?" 하였다.
(2) 말씀을 전파하도록 임명된 자들과 그것을 듣는 자들은 다음의 교훈을 명심하여야 한다.
은사를 받은 자들은 그만큼 베풀어야 한다 말씀으로 유익을 얻은 자들은 자신이 켜진 등불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등불은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어서는 안된다(16절).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하며 그 등불은 사람들 앞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지금 은밀하게 행한 일이 머지않아 '알려지고 나타나게 될 것이다'(17절). 우리 자신은 밝히 드러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재능을 묻어두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유익하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지속되든지 떠나든지 한다. 즉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게 되는 것이다(18절). 은사를 받아 그것을 가지고 선을 행하는 자는 더욱 많은 것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재능을 묻어 두는 자는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가지지 않은 자는 '그 가진 것'까지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마가복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즉, '가진 줄로 알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것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버려지는 은총은 단지 은총으로 보일 뿐 참된 은총은 아니다. 사람들은 단지 소용없는 것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보다 그의 제자들을 더 가까이 하며, 그들을 귀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계시다(19-21절).
이것은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말씀을 충실하게 듣는 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자들에게 크나큰 격려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쫓았는지를 살펴보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그에게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가까운 친지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다지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자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를 보려고 밖에 서 있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친지들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의 일을 하는데 더 분주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곧 자기의 가장 가깝고 소중한 친척들이라고 기꺼이 인정하셨다.
풍랑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권능 ( 8:22-39 )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을 입증해 주는 두가지의 예-바람을 지배하는 권능과 마귀를 지배하는 권능-을 보게 된다.(참조. 막4,5장).
1. 바람을 지배하는 권능(22-25)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바다로 나가자고 명하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다' (22절).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들과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동행하는 자들은 어디든지 안전하고 담대하게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그들은 바다가 고요할 때,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쫓아 바다에 나아갔지만 풍랑을 대비해야 했다.
바다로 나갔을 때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23절) 순식간에 배가 요동하여 물이 배에 가득찼고 그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3) 그리스도는 폭풍 속에서 잠들어 계셨다(23절).
그는 다소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바다에서 그리고 폭풍 속에서 은혜롭게 함께 계셨지만, 마치 주무시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당장 그들을 구해 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시고자 하셨으며, 그들이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되었을 때 더욱 기쁘게 맞아들일 수 있게 하셨다.
(4) 우리가 위험할 때 그리스도께 호소하는 길은 그를 깨워서 우리 앞에 나서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24절).
그들은 소리쳤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두려움을 잠잠케 하는 길은 그 두려움을 그리스도에게로 가져가는 것이다. 충심으로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자기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5) 사단이 하는 일은 광풍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하는 일은 광풍을 잔잔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일을 하기를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땅 위에 평화를 선포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가 바람과 물결을 꾸짖자 곧 그치고 갑자기 잠잠해 졌다(24절).
(6) 위험이 지나가면 우리가 두려워 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권능에 대해서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려야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을 책망하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25절).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 중에서도 그들이 정작 그 믿음을 사용해야 할 때가 오면 다시금 믿음을 구하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한 하찮은 것으로 낙심하게 되는 때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어디 있는가? 그들은 그의 권능에 대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기이히 여겼다. 풍랑을 무서워했던 자들은 이제 풍랑을 잠잠케 한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며 '저가 누구인가'하고 서로 말하였다.
2. 마귀를 지배하는 권능(26-39)
풍랑이 잠잠해지자 곧 그들은 그들이 가고자했던 항구로 가서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해변으로 나아갔다(26,27절).
(1) 이 악령들은 대단 많았다.
이 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자들은 자칭 군대라고 하였다(30절). 왜냐하면 그 한 사람에게 많은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오랫동안 귀신들려 있었던 자였다(27절). 그 많은 귀신들은 실제로 군대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군대로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2) 그들은 사람들에 대해 뿌리깊은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 귀신들려 있던 자는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않았다'(27절). 귀신들이 이 사람에게 '무덤 사이에 거하도록' 강요하였으며, 그 자신에게나 주위 사람들에게 더욱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3) 귀신들은 대단히 강하고 흉포하여 제어하기가 어렵다.
또한 그들은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29절). 어떤 다른 힘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자들은 그 자체로써 그들이 사단의 지배하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게 된다. 그는 귀신에게 몰려 나간다.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자들은 사랑의 유대로 부드럽게 이끌림을 받지만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은 광포하게 몰려 나간다.
(4) 귀신들은 우리 주 예수에 대하여 격노하며 그를 두려워 한다.
그 사람은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라고 시인하였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무한히 높고 어려운 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려 하지도, 그에게서 은혜를 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권능과 진노를 무서워 하였다. 그들은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그들은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지 말고, 단지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만 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만 있을 뿐 하늘나라를 성결과 사랑의 장소로써 소망하지 않는 자들이 어떠한 말을 하는지를 주목하자.
(5) 그들은 완전히 우리 주 예수님의 명령과 지배하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 흑암의 모든 권세들이 주 예수의 저지와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주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그리스도는 원하시기만 하면 그들을 그들의 본거지로 보낼 수 있으시다.
(6) 귀신들은 남을 해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별 도리없이 이 불쌍한 사람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였다(32절). 귀신은 그 사라믈 해할 수 없게 되자 돼지를 해하고자 하였다. 귀신은 사람들의 몸을 해할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의 재산을 해치려 하는데, 본문에서처럼 때때로 그것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도록 유혹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는 귀신들에게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귀신들은 돼지에게로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돼지떼는 광포하게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였다.
(7) 귀신의 권세가 파멸하면 귀신들렸던 자는 회복된다.
귀신 나간 사람은 예수의 발 아래 앉았다(35절). 그는 귀신의 권세 하에 있을 때 예수 앞에서 도망하려던 자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의 발 아래 앉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고 계실 때 우리가 스스로를 제어하고 향유하도록 하시겠지만, 우리는 건강하고 유쾌하게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사단이 우리를 점령한다면 그는 우리에게서 그러한 것들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적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첫째, 이 사건을 보고 그 마을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나?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했다(34절). 그들은 귀신들렸던 자가 어떻게 치유되었는지를 보고하였다(36절). 즉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가 돼지를 귀신의 손에 넘겨 주지 않고는 그 사람을 귀신에게서 구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귀신을 돼지에게로 보냈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두려워하였다(35절).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였다(37절). 그들은 고통받는 이웃의 구원보다는 돼지의 죽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예수께서 떠나시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기꺼이 자신의 죄된 생활을 버리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자는 그리스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말대로 하셨다.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돌아가셨다.' 돼지를 더 사랑하는 자들은 그들의 구주와 그에 대한 소망을 잃게 되었다.
둘째, 이 사건과 결과가 그 불쌍한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두려워 한 만큼 그리스도의 일행이 되고싶어 했다. 그리스도께 악령과 병을 치유받았던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그리스도에게 함께 있기를 구하였다(2절). 그는 그리스도가 떠나 주기를 바라는 그 거칠고 잔인한 거라사인들과 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하신 위대한 일을 그를 아는 자들에게 알리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이제까지 그 마을의 짐이 되어왔던 그를 이제부터는 축복이 되게 하셨다. 때때로 우리는 다음 사람에게 유익을 줄 만한 기회를 얻기 위하여 영적인 은혜와 위안에서 오는 만족을 거부해야 할 경우가 있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앓는 여인(눅 8:40-56)
[ 성경묵상 ]
40-56절은 예수께서 이방인의 땅에서 사역을 마치시고 다시 갈릴리 서쪽에 위치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 후에 행하신 혈루증 여인의 치유 이적과 야이로의 딸 소생 이적을 다룬다. 이 사건은 마 9: 18-26과 막 5:21-45에도 기록되어 있다.
[ 질문 1 ]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가다가 걸음을 멈추신 이유가 무엇인가?(43,44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 예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고침을 받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멈추었다.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청중들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낸 이유는 믿음과 소망의 효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지만(48절), 이 여인이 이제 종교적으로 부정하지 않다는 것, 그래서 더 이상 사회적 냉대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선언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 질문 2 ] 야이로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붙잡은 말씀은 무엇인가?(50절)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를 붙들었다. 붙들었던 그 믿음이 그의 달을 살리는 역사를 보게 되었다.
8:22-56 사이의 세 문단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련의 기사들이 문단별로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적, 거라사 지방에서의 축사 이적, 혈루증 여인의 치유 및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 기간 중에 행하신 세 번의 부활 이적 중 두번째인 회당장 야이로의 딸 소생 사건을 각각 보도하고 있다. 이 세 문단이 연속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다양한 차원에서 행해지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예수님의 권능이 자연계(自然界)와 영계(靈界), 그리고 인간의 질병과 생사(生死)의 영역에까지 고루 미치는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권능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40.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예수께서 돌아오시니, 무리가 그를 환영하였다. 그들은 모두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절은 예수께서 다시 바다를 가로질러 갈릴리 바다 서쪽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환영하였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스라엘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를 기다렸고 또 환영하는 것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중병으로 크게 앓아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치유자를 기다렸으며, 그가 오자 환영했던 것이다.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그 때에 야이로라는 사람이 왔는데, 이 사람은 회당장이었다. 그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자기 집으로 가시자고 간청하였다.
야이로는 그 당시 하나의 회당에 3명 정도 있었던 회당의 통치자인 회당장 중 한 사람이었음을 나타낸다. 당시의 회당장은 회당에서 이루어지는 업무, 즉 재판 주관, 설교자와 성경 봉독자의 선정, 설교의 심사 감독 등의 업무 일체를 모두 총괄하는, 사회적으로 매우 영향력 있는 직책이었다.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그에게 열두 살쯤된 외동딸이 있는데, 그 딸이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데, 무리가 그에게 바싹 붙어 밀어댔다.
"무리가 옹위하더라"라는 말은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에워쌌는지,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기적을 보고자 혈안이 되었었는지 생생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사실
은 직역하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즉 이를 직역하면 ‘무리들이 그를 질식시키고 있었다’이다. ‘옹위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부축하여 좌우로 호위하다’이다. ‘거의 질식시킬 정도로 밀어붙여 압박하다’는 의미이다. 즉 무리들은 야이로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단순히 둘러싼 것이 아니라,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몰려들어 압박하였던 것이다.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무리 가운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있었는데, [의사에게 재산을 모두 다 탕진했지만,] 아무도 이 여자를 고쳐 주지 못하였다.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는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니, 곧 출혈이 그쳤다.
이 여인은 자신의 부정함으로 인해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예수님이 걸치신 옷자락 끝에 있는 술에만 손을 댄 것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우리는 이러한 여인의 행통을 통해 그녀에게 예수의 옷 가장자리 술에만 손을 대어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간절하고도 확고한 믿음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예수께서는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으셨다. 사람들이 모두 부인하는데, 베드로가 "선생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서 밀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청중들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낸 이유는 믿음과 소망의 효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지만(48절), 이 여인이 이제 종교적으로 부정하지 않다는 것, 그래서 더 이상 사회적 냉대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선언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군가가 내게 손을 댔다. 내게서 능력이 빠져 나간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매우 강조하고 계신다. 그는 숨이 막힐 정도로 혼잡한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계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늘 깨어있는 모습과 신적 전지하심을 볼 수 있다.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그 여자는 숨길 수 없음을 알고서, 떨면서 나아와 예수께 엎드려서, 그에게 손을 댄 이유와 또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백성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본절에서 ‘딸’과 ‘평안’이라는 주제를 매우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열두 해 동안이나 부정한 병에 시달리며 멸시받던 여인에게 ‘딸’이라 매우 친근하게 호칭하심으로써 그 여인 역시 하나님의 귀한 딸임을 부각시켰다. 즉 이 호칭은 그 여인이 더 이상 부정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었음을 선포하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평안’을 선포하신 것은 이제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 가운데서 신적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물론 그 여인은 이 치유의 경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삶 가운데 때로 어려움을 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신적 평안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예수께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딸이 나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오직 예수님께만 있으며,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을 믿고 온전히 의뢰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의 목숨이 끊어진 절망스런 상황에서 하인의 말을 듣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을 믿고 신뢰하여 그분을 딸이 있는 방으로 인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굳건한 믿음의 결과로 그는 딸을 웃는 얼굴로 다시 안는 크나큰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그리고 그 집에 이르러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그 아이의 부모 밖에는, 아무도 함께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죽은 딸이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시면서 딸의 부모와 세 제자 등 다섯 명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해 노발 겔든휘스(N. Geldenhuys)는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않기 위함이라고 설명하며, 모리스(L. Morris)는 소녀가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 군중들에 휩싸여 있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느끼지 않도록, 즉 그 소녀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설명한다.
두 가지 설명 다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는 다섯 사람을 제외하고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사건을 수용할 만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50절에서 믿음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암시받을 수 있다. 또한 이는 이 이적이 다른 사람에게 공공연히 공개될 경우 주님의 복음 전파 사역에 방해를 받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사람들은 모두 그 아이 때문에 울며 애도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울지 말아라.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그들은 아이가 죽었음을 알고 있으므로, 예수를 비웃었다.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서 "아기야 일어나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그러자 그 아이의 영이 돌아와서, 아이가 곧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먹을 것을 아이에게 주라고 지시하셨다.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아이의 부모는 놀랐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다.
야이로의 딸의 부활 / 일리아 레핀(Ilia Repine) / 러시아 / 1844~1930년
고침받은 혈루증 앓은 여인과 야이로의 딸의 소생 ( 8:40-56 )
그리스도는 거라사인들에게 쫓겨 나셨다. 그러나 그가 갈릴리 사람들에게 돌아오자, 그들은 그를 기쁘게 영접하였다. 그들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그를 진정으로 환영하였다(40절).
그는 돌아오시자 그가 돌아온 곳에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내셨다. 우리 곁에는 언제나 도움을 기다리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두가지 기적이 얽혀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볼 수 있다.
(1) 한 회당장이 그리스도에게 공개적으로 간구하였다.
그의 이름은 야이로였는데, 그는죽어가는 어린 딸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간청하였던 것이다. 야이로는 회당장이었지만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렸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자기 집에 와 달라고 간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멀리서 나으리라는 말 한마디만 해 주셔도 나을 것이라고 했던 백부장의 믿음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요청을 들어 주셨다. 그는 야이로와 함께 가셨다. 강한 믿음이야말로 칭찬할만한 것이지만, 약한 믿음이라도 거부되지는 않는다.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42절). 우리가 의무를 행하며 선을 행하고 있을 때 무리가 몰려들어 법석을 떤다 하여 불평하지 말자.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가능한한 그런 일을 피할 것이다.
(2)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그리스도에게 은밀히 손을 대었다.
혈루증은 그녀의 몸과 재산을 좀먹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생활비를 모두 병치료에 써버렸으며, 그런데도 조금도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43절). 그녀의 질병은 공공연하게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녀는 무리 중에 끼여서 그리스도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 이 기회를 이용한 것이다. 그녀의 믿음은 대단히 강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옷자락만 만져도 고침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으며, 그를 넘치는 자비의 샘으로 생각하여 은밀하게 치유하는 힘을 얻어내어도 그가 부족함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치유받고 도움을 얻었으며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군중 속에서 잃어버린바 된 자들이었다. 그 여인은 곧 자신의 건강이 좋아지고 질병이 고쳐졌음을 알았다(44절).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은밀하게 평안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3) 은밀한 치유가 발각되었다.
1) 그리스도는 누군가가 치유되었음을 알았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도다(46절).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능력으로 치유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시인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그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에게서 능력이 나가 뭔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시어 결코 아까와 하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은, 마치 태양의 빛과 열처럼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2) 그 불쌍한 환자는 자기가 치유를 얻고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여자는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47절). 그녀는 두려워하였지만, 그녀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48절). 이렇듯 구원하는 믿음이 있다 해도 두려움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그에게 손을 댄 연고로 일어난 일을 사람들 앞에서 고하였다. 그녀는 한 번만 손을 대도 치유받게 되리라고 믿었으므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3) 주님은 그녀가 나았다는 것을 확증해 주었고, 그녀를 평안히 돌려 보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8절). 그 치유는 은밀하고 떳떳치 못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안심하게 되었으며 분명하게 나았다는 확증을 받았다. 그녀는 치유를 받았으며, 치유되리라는 선언을 들었다.
(4) 그의 딸이 죽었으며 그에게 그 소식을 전해준 자들이 이 일로 선생을 더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그리스도는 자신의 권능을 믿으라고 야이로에게 격려하였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는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그 아이는 죽었지만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은 잘 될 것이다.
(5) 그리스도는 그녀의 생명을 소생시킬 준비를 하셨다
1) 그리스도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증인을 선정하셨다.
무리가 그를 따랐지만, 아마도 그들은 무례하고 소란스러운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의 집에 많은 무리를 들어오게 한다는 것은 도무지 탐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돌려보내셨다. 그는 그 기적의 목격자들로 삼기 위해 예정하셨던 대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선정하여 부모와 함께 데리고 들어가셨다.
2) 그는 통곡을 저지시키셨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하였지만 그리스도는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이 아이의 경우는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즉 그녀의 친척들에게는 그녀가 잠간 동안 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주 안에서 죽은 모든 자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자들을 희망이 없는 자들로 생각하여 슬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죽음은 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이 통곡하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위로에 넘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사악하게도 그 말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여 비웃었다. 그들은 그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확신하였으므로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면 그 아이를 소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 모두를 나가게 하셨다(54절). 그들은 이 놀라운 사건의 목격자가 될 자격이 없었다.
(6) 그녀는 생명을 되찾았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마치 우리가 잠을 깨울 때 하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아이야 일어나라(55절). 본문에는 다른 복음 기자들이 단지 암시하기만 했던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즉 그 영이 돌아왔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때까지 이 아이의 영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영들의 아버지의 손 안에 있었다. 그녀의 영이 돌아왔을 때 아이는 곧 일어났으며 움직임으로써 살아 있다는 것이 분명하여졌다. 또한 그녀의 식욕을 보아서도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식욕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한 것에서 드러난다. 마지막 귀절에서 '그 부모가 놀랐다'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군대 귀신을 물리치신 예수님(누가복음 8:26-39)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예수님이 배를 타고 광풍을 헤치고 기어이 갈릴리 건너 편의 거라사인 지방으로 가신 이유는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한, 예수님의 긍휼이 필요한 한 영혼을 만나시기 위함입니다.
[ 질문 1 ] 거라사인의 광인에게 들어가 있던 귀신의 이름은 무엇인가?(30절)
예수님 없는 인생의 모습(26-29) 거라사인의 이 광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귀신들에게 장악되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합니다(26a).
다른 사람들도 그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29b).
더러운 귀신에 매여 벌거벗은 수치도 모를 만큼 더러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26b,29).
무덤에 살고 있는데 그것은 죽음과 흑암의 권세에 짓눌려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26c).
돌로 자기 몸을 해치면서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인생입니다(막 5:5).
조금의 안식도, 평안도 없습니다.
이것이 사탄에 매여 사는 인생의 본 모습입니다. 사탄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결국 노예 취급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존귀한 자녀로 대하십니다. 이 차이만 알아도 우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 사탄에게 매여 종노릇 하는 인생에게. 희망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지금 그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광인을 만나주십니다. 귀신을 쫓아내 주십니다. 모든 더러운 것들에게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새 인생을 살게 해주십니다(29a).
예수님 없는 인생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까?
[ 질문 2 ] 거라사인의 광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 어떻게 달라졌는가?(36,39절)
예수님 만난 인생의 모습(30-39) 거라사인의 광인에게 들어가 있다가 쫓겨 나온 '군대 귀신'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고, 그 이천 마리의 돼지 떼는 바다에 빼빠져 몰사합니다(33. 막 5:13). 분명한 것 하나는 이천 마리의 돼지보다 한 영혼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만난 그 귀한 영혼의 모습을 보십시오. 정신이 온전해졌습니다(35a).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습니다(35b). 그것은 예수님과 제일 가까운 인생,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인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큰일을 중언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39), 제자들은 예수님 없는 인생과 예수님 만난 인생의 그 현저한 차이를 확실히 보았습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시다. 예수님만이 능력이시다. 예수님만이 구원이시다." 마음으로 힘껏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뇌리에서 평생 잊을 수 없게 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큰 사랑'입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 만난 인생의 품격을 갖고 있습니까?
[ 성경개요 ]
"예수님 없는 인생과 예수님 만난 인생"이라는 주제로 묵상해 봄직도 하다.
8:22-56 ; 네 가지 기적(바람을 잠잠케 하심,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심, 야이로의 딸, 열두해 혈루증 여인)들이 기록되고 있다. 이 기적들은 예수님의 신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들을 나타내며, 또한 어떻게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을 베푸시는가에 대한 내적인 묘사들로 가득 차 있다.
8:38-39 ;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불쌍한 한 인간이 회복되었다. 그는 예수님의 구원에 감사하여, 그 분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다시 무덤에서 마을로, 곧 격리된 상태와 인정과 삶의 기쁨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과 어울려 살 수 있는 공동체 안으로 되돌려 보내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하라고 명령하셨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8:22-56 사이의 세 문단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련의 기사들이 문단별로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적, 거라사 지방에서의 축사 이적, 혈루증 여인의 치유 및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 기간 중에 행하신 세 번의 부활 이적 중 두번째인 회당장 야이로의 딸 소생 사건을 각각 보도하고 있다. 이 세 문단이 연속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다양한 차원에서 행해지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예수님의 권능이 자연계(自然界)와 영계(靈界), 그리고 인간의 질병과 생사(生死)의 영역에까지 고루 미치는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권능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 및 표준새번역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그들은 갈릴리 맞은편에 있는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에 닿았다.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동네에 사는 귀신 들린 어떤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았으며, 집에 머물러 있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서, 그 앞에 엎드려서, 큰소리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놀랍게도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베드로의 고백이 있기 전의 사건이다. 하지만 귀신은 결코 주님과 인격적 관게를 멪을 수 없다. "예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할 뿐이다.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귀신이 오래전부터 그 사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서 광야로 뛰쳐 나가곤 하였다.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예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니, 그는 "군대입니다" 하였다. 그 사람 속에 귀신이 많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귀신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던지지 말아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마침 그 곳 산기슭에, 놓아 기르는 큰 돼지 떼가 있었다. 귀신들이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 돼지들은 호수 쪽으로 비탈을 내리달아서 빠져 죽었다.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도망 가서 읍내와 시골에 이 일을 퍼뜨렸다.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그래서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보러 나왔다.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귀신들이 나가 버린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 두려워하였다.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처음부터 본 사람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낫게 되었는가를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그러자 거라사 주위의 고을 주민은 모두 예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이 크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타시고 되돌아가셨는데,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귀신 나간 그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를 돌려보내셨다.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네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하신 일을 다 이야기하여라." 그는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낱낱이 온 읍내에 전파하였다.
마귀를 지배하는 권능(26-39)
풍랑이 잠잠해지자 곧 그들은 그들이 가고자했던 항구로 가서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해변으로 나아갔다(26,27절).
(1) 이 악령들은 대단히 많았다.
이 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자들은 자칭 군대라고 하였다(30절). 왜냐하면 그 한 사람에게 많은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오랫동안 귀신들려 있었던 자였다(27절). 그 많은 귀신들은 실제로 군대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군대로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2) 그들은 사람들에 대해 뿌리깊은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 귀신들려 있던 자는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않았다'(27절). 귀신들이 이 사람에게 '무덤 사이에 거하도록' 강요하였으며, 그 자신에게나 주위 사람들에게 더욱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3) 귀신들은 대단히 강하고 흉포하여 제어하기가 어렵다.
또한 그들은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29절). 어떤 다른 힘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자들은 그 자체로써 그들이 사단의 지배하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게 된다. 그는 귀신에게 몰려 나간다.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자들은 사랑의 유대로 부드럽게 이끌림을 받지만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은 광포하게 몰려 나간다.
(4) 귀신들은 우리 주 예수에 대하여 격노하며 그를 두려워 한다.
그 사람은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라고 시인하였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무한히 높고 어려운 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려 하지도, 그에게서 은혜를 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권능과 진노를 무서워 하였다. 그들은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그들은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지 말고, 단지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만 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만 있을 뿐 하늘나라를 성결과 사랑의 장소로써 소망하지 않는 자들이 어떠한 말을 하는지를 주목하자.
(5) 그들은 완전히 우리 주 예수님의 명령과 지배하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 흑암의 모든 권세들이 주 예수의 저지와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주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그리스도는 원하시기만 하면 그들을 그들의 본거지로 보낼 수 있으시다.
(6) 귀신들은 남을 해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별 도리없이 이 불쌍한 사람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였다(32절). 귀신은 그 사라믈 해할 수 없게 되자 돼지를 해하고자 하였다. 귀신은 사람들의 몸을 해할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의 재산을 해치려 하는데, 본문에서처럼 때때로 그것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도록 유혹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는 귀신들에게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귀신들은 돼지에게로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돼지떼는 광포하게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였다.
(7) 귀신의 권세가 파멸하면 귀신들렸던 자는 회복된다.
귀신 나간 사람은 예수의 발 아래 앉았다(35절). 그는 귀신의 권세 하에 있을 때 예수 앞에서 도망하려던 자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의 발 아래 앉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고 계실 때 우리가 스스로를 제어하고 향유하도록 하시겠지만, 우리는 건강하고 유쾌하게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사단이 우리를 점령한다면 그는 우리에게서 그러한 것들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적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첫째, 이 사건을 보고 그 마을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나?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했다(34절). 그들은 귀신들렸던 자가 어떻게 치유되었는지를 보고하였다(36절). 즉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가 돼지를 귀신의 손에 넘겨 주지 않고는 그 사람을 귀신에게서 구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귀신을 돼지에게로 보냈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두려워하였다(35절).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였다(37절). 그들은 고통받는 이웃의 구원보다는 돼지의 죽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예수께서 떠나시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기꺼이 자신의 죄된 생활을 버리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자는 그리스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말대로 하셨다.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돌아가셨다.' 돼지를 더 사랑하는 자들은 그들의 구주와 그에 대한 소망을 잃게 되었다.
둘째, 이 사건과 결과가 그 불쌍한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두려워 한 만큼 그리스도의 일행이 되고 싶어 했다. 그리스도께 악령과 병을 치유받았던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그리스도에게 함께 있기를 구하였다(2절). 그는 그리스도가 떠나 주기를 바라는 그 거칠고 잔인한 거라사인들과 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하신 위대한 일을 그를 아는 자들에게 알리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이제까지 그 마을의 짐이 되어왔던 그를 이제부터는 축복이 되게 하셨다. 때때로 우리는 다음 사람에게 유익을 줄 만한 기회를 얻기 위하여 영적인 은혜와 위안에서 오는 만족을 거부해야 할 경우가 있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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