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

구원 받은 삭개오/ 열 문둥병자를 고치심 (눅 17:11-19 )

by 은총가득 2020. 11. 18.

구원 받은 삭개오(누가복음 19:1-10)

& 부자 삭개오가 한 일은?

1. 급히 내려와야 한다.

2. 즐겁게 행해야 한다.

3. 영접해야 한다.

& 부자라고 구원받기 힘든 것만은 아니다. 삭개오는 부자였다. 그러나 그는 구원 받았다. 구원받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 예수님께서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삭개오가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찾아 가신 것이다.

2.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신분을 내려 놓았기 때문이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으며 부자였다. 사회적인 신분이 높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아갔다.

3. 자신의 형편 탓을 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갔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니다. 키가 작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데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찾아오사는 주님을 만나야 구원 받을 수 있다.

&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1.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팔아 가난안 자들을 구제해야 한다.

2.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는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뉘우친다.

[ 메튜헨리주석 ]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 ( 19:1-10 )

의심할 것 없이 복음서 안에는 비록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삭개오의 경우처럼 특별한 무엇이 있는 사람의 회심은 기록이 되어져 있다.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여리고를 지나가시고 계셨다(1절). 이 도시는 저주 하에서 세워졌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곳을 찾아 오심으로 이곳에 명예를 주셨다. 복음은 저주를 없애 주기 때문이다.

(1) 삭개오는 누구이며 무엇하는 사람이었는가? 그의 이름은 그가 유대인임을 나타내 준다.

(1) 그의 직업과 그가 맡은 직책:그는 세리장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구원하실 자를 찾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괴수까지도 구원하시고자 오셨으며 따라서 이 세리장조차 구원하시고 계신 것이다.

(2) 세상에서 그의 환경은 매우 상당한 것이었다. 즉 그는 부자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방금 전에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 주셨다. 그러나 현재는 잃었다가 찾은 바 된 한 부자의 경우를 보여 주고 있다.

(2)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도에 들어 왔는가?

(1) 그는 예수를 보고자 하는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3절).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을 보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최소한 우리는 나중에 우리가 이러한 대단한 사람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보고자, 즉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힘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를 보게 될 것이다.

(2) 그는 키가 작았고, 사람은 많았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보이시려 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 중 한 사람으로 무리 가운데 보이지 않게 계신다. 키는 작지만 큰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영적으로 활발한 자들이 많이 있다.

(3) 그는 자기의 호기심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품위도 잊은 채 앞으로 달려가 그를 보기 위하여 어린아이같이 뽕나무로 올라갔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보고자 하는 자들이라면 그를 보기 위해 적합한 모든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자신이 작다고 생각되는 자들은 스스로 그리스도를 보는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난쟁이들은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하여 선한 도우심과 함께 큰 뜻을 품음으로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주목하셨다.

즉 그와의 더 깊은 교제를 하시기 위해서 그를 부르셨다(5절). 그리고 그 부르심은 즉시 선한 결과를 낳았다(6절).

(1) 그리스도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찾아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무를 올려다 보셨으며 삭개오의 보셨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서 왔을 뿐 그리스도께 환대 받으리라고는 거의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를 좋은 복들로 인도하시며 어떻게 그의 생각을 능가시는가를 보라. 또한 매우 미미한 시작을 그가 어떻게 크게 하시는가를 보라. 그리스도를 알고자하는 마음을 가졌던 그는 그를 알게 되었다. 단지 그를 보고자 원했던 그는 그와 대화하도록까지 허락을 얻었다. 때때로 삭개오처럼 단지 호기심만을 가진 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자 오는 자들이 그들의 양심의 깨어짐을 갖게 되며 그들의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삭개오야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신다. 그는 '속히 내려오라'고 그에게 명하셨다. 삭개오는 주저하지 말고 서둘어야 했다. 그는 내려와야 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날 그의 집에서 쉬시며 그와 함께 한 두 시간 유하시려 하시기 때문이었다.

(2) 삭개오는 자기 집에 있게되는 그러한 영광에 대해서 '즐거워 하였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절). 또한 자기 집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 그를 영접하는 것의 암시이자 증거이기도 했다. 우리가 마음 문을 닫고 변명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자주 우리에게 나에게 열어 보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삭개오가 주저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할 것이다.

(4) 옹졸한 영혼을 가진 비판적인 유대인들은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말하면서 수군거렸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은 죄인된 자들이 아니란 말인가? 또한 죄인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하실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의 집에 갔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것을 매우 부당한 처사였다.

(1) 그가 비록 세리였고, 대다수의 세리들이 악한 자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무더기로 정죄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사람이 각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가 죄인이었다고 할지라도 지금도 여전히 전처럼 악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여지를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3) 그 당시에 그가 죄인이었다 해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가시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의사가 병자에게 안가고 어디로 가겠는가?

(5) 삭개오가 이제 회개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들이 진술되고 있다(8절).

그는 자신의 선행으로 그의 믿음과 회개의 신실성을 증거하였다. 그는 서서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맹세하는 투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의 말이 신중하고 엄숙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는 그리스도께 말하였다. 즉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주께 말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생활의 변화를 통하여 그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즉 그가 회개하였음을 명백히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1) 삭개오는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장차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데 쓸 것을 결심하고 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8절). 즉 삭개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내가 이제까지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제 나는 그것을 하겠습니다. 즉 이제 나는 그들을 구제하되 오랫동안 의무를 무시해온 만큼이나 아주 많이, 내 소유의 절반까지라도 들일 것입니다." 삭개오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재산의 절반을 주었을 것이며 그것은 그로 하여금 쓸모 없는 낭비를 줄이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는 여기서 이것을 그의 회개의 열매로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2) 삭개오는 자기의소유 모두가 정직하고 공정하게 얻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배상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정해진 것보다 사 배나 더하여 그에게 갚아 주겠습니다."

① 그는 자신이 악을 행했던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참으로 회개한 자들이라면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사실을 시인할 뿐 아니라 특별히 세상에서의 사업과 직업으로 인하여 아주 쉽사리 죄를 범해 왔음을 뉘우치게 될 것이다.

② 그는 자신이 토색했음을 시인하고 있다. 세리들은 정부로부터 후대를 받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만일 그들의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악한 생각을 가질 경우 해를 입힐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③ 그는 사배나 갚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는 만일 내가 고소 당하므로서 그래야 하도록 강요 받는다면 나는 보상을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어쩔 수 없게 될 때에야 비로소 정직해 진다. 그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행하려는 것이다. 나쁜 일을 행했음을 확신하는 자들은 갚아 주는 것 외에 달리 자신들의 회개의 신실성을 증거할 길이 없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소유의 절반을 주는 것으로 자신이 행한 악한 일이 보상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주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위선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정직하게 벌지 않은 것을 우리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6)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회개를 인정하시고 받으심(9,10절).

1) 삭개오는 이제 복된 사람으로 공포되고 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9절). 이제 그의 회개는 결과적으로 그의 구원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집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곳은 어디든 구원이 수반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늘 구원이 그의 집에 있게 된 것이다.

① 삭개오가 회개했을 때 이전 보다 더욱더 그의 집에 축복이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집에 은혜와 구원의 방편을 가져온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 그는 그 자신의 집에 선행을 행한 것이며 복을 가져다 준 것이다.

②삭개오가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갔을 때 그의 가족 역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따라서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리들, 즉 이방인들에게까지 있게 된 아브라함의 축복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 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출생하였으나 세리였기에 이방인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참으로 회개한 자는 마치 전에 결코 세리가 아니었던 것처럼 선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져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그가 세상에 오신 큰 목적과 의도에 일치하는 것이었다(10절).

그가 전에 가진 적이 있었던 똑같은 논쟁에서 그는 세리들과 교제하는 것을 정당화 하셨다(마 9:13). 거기서 그는 자신이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해서' 왔다고 변론하셨다. 여기서도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① 사람들의 비참한 형편: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온 세상의 인류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파멸된 세상에 어울리는 자들이 된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길을 잃어 죽은 여행자와도 같고, 치료할 수 없는 질병으로 말미암아 죽은 병자와도 같다고 하겠다.

② 하나님의 아들의 자비로 우신 목적:그는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오셨다. 즉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잃어 버린 자를 위해서 그 대의를 맡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잃어 버린 세상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의 목적은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 목적을 수행하시는 가운데 그는 그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온갖 가능한 방법을 찾으셨으며 취하셨다. 그는 여기 삭개오처럼 그를 찾지 않은 자들, 그를 요청하지 않은 자들을 찾고 계시다.

 

 

한 가지 부족한 것(눅 18:18-30)

 

[ 성경대조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지도자가 예수께 묻기를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였다.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가 말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이 말씀을 듣고서, 그는 근심하였다. 그가 큰 부자이기 때문이다.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께서는, 그가 근심에 사로잡힌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베드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버리고서,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보상을 받을 것이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받을 것이다."

 


[ 설교요약 ]

부자 청년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마 19장, 막 10장에도 나오는 기사이다.
마태복음에는 부자, 청년이라고, 마가복음에는부자로, 누가복음에는 부자, 관리로 표현하고 있다.

이 부자 청년이 가지고 있는 고민은 영생에 대한 갈급함이었다. 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문제이다. 한 가지가 부족하여 실패한 내용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첫째, 세상에서의 성공과 부가 영원한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부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다 지켰다고 답할 정도로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다. 예수님은 그를 보고 사랑하실 정도로 칭찬 받을만한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부가 걸림돌이 되었다.
비어 있는 코코넛을 이용하여 원숭이를 잡는다고 한다. 코코넛에 들어 있는 좋은 것을 놓지 않는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활용한다고 한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에 집착함으로 인해 사람에게 잡히게 된다.

둘째,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부자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줄 알고 있었다.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정도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재물을 팔아 나눠 주라고 할 때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 자신의 무능함을 인식하도록 해 주기 위해서, 좀 더 높은 수준의 율법을 요구하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부가 걸림돌이 되어 자의적인 힘으로는 해결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 나눠주면 하늘에 있는 보화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자신의 자심됨을 가지고 구원받을 수가 없다(롬 3:19-25) 부자 청년은 한 가지 부족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살아가는 법을 부여해 준 것이 율법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택함을 받아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이 지켜야 할 법이 율법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자가 택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들이 지켜야 할 내용이다.

성철 스님과 같은 깨달음이 있다고 구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 문제는 오로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 일어나는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셋째, 구원은 자신을 낮추며 그것을 받아 들일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청년은 제사장이나 서기관을 찾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가 영생 문제를 해결하려는 영적인 식별력이 있었다. 이 청년은 지혜롭고 옳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안타까운 일은 주님 앞에 무릎 꿇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가 엎드려 나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도와 주시면 할 수 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만 하나님만 할 수 있음을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

넷째, 재물은 하나님 섬김의 좋은 도구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에게 필요한 재물을 주시면 이것으로 주님을 섬기는 데 사용하겠다는 고백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아굴의 기도와 같이 나에게 필요한 재물을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주님을 붙잡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그곳에만 소망이 있다. 주님만 붙들고,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가는 목회자가 되기를 바란다. 빌 1:21에서 내가 사는 것도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이라고 하였다.

내가 사는 것이 돈이면, 성공이면, 인정이면, 명예이면 죽는 것은 실패이며, 아무 것도 아니다. 죽음이 유익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 뿐이다. 그는 영원한 생명 뿐만 아니라 삶의 축복을 준다고 하였다.

베드로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버린 자는 현세에는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는 말씀을 믿고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가도록 하자.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누가복음 17:11-19) 

열 명의 나병환자가 똑 같은 고침을 맏았다. 감사할 조건이 동일하였다. 전혀 다르지 않는 병 나음의 은혜를 받았다.

1. 사람마다 받는 은혜, 주님께서 주신 은혜는 다를 수도 있다. 각자의 처지가 다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10명의 나병환자는 똑 같은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향한 감사,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은 달랐다. 같은 환경과 조건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에도 반응은 너무나 다르다.

2. 그리고 9명의 사람은 감사하지 않았다. 감사한 자는 한 명이다. 주님 앞에 반응하는 자는 10%이다. 주님 앞에 헌신하는 자는 다수가 아닌 소수임을 알 수 있다. 전부가 아니라 일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운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자. 쉽게 반응하지 말자.

3. 또한 자신은 주님께 감사하고픈 마음이 생기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하지 않으면 나도 덩달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은 하지 않는데 내가 특별나게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여 즉시 행동에 옮긴다.

주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하더라도 부하뇌동하지 않아야 한다. 주님과의 나의 관계에만 집중하자. 주님이 괜찮다고 하시면 묵묵히 실천해 나가자. 주변 사람이 나를 향해 어떤 반응을 보이더라도 묵묵히 행하자.

4. 이 때 주님이 칭찬해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며 위로해 주신다. 이러한 음성을 듣는 주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자.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라고 하신다. faith라고 하신다. 신실하다 하신다. 이런 신실함이 우리를 구원받게 하신다. 신실한 삶, 변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하루가 되도록 하자.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천국의 제자 된 삶은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의 핵심에는 회개와 끊임없는 용서가 있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섬김, 그리고 감사가 있습니다.

회개와 용서의 삶(1-4) 천국의 제자 된 삶은 공동체 속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책임은 형제가 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형제를 잘못된 가르침으로 타락하게 하는 일은 엄중한 심판이 따릅니다(2).

두 번째 책임은 형제가 죄를 지었다면 개인적으로 회개를 권면해서 회개하고, 잘못을 인정하면 언제든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같은 잘못을 반복해도 용서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비판적인 감시자가 아니라, 서로의 연약함과 짐을 짊어지는 것이 천국 공동체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 안의 형제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지나치게 비판적이지 않습니까? 형제의 신앙과 덕을 세우고 현학함과 짐을 나누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과 섬김의 삶(5-10) 먼저, 천국의 제자 된 공동체의 기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어떻게 커지는가를 묻지만, 예수님은 믿음이 겨자씨만큼이라도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작은 믿음도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섬김'입니다. 어떤 수고와 섬김을 감당해도,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 여겨야 합니다. 더 많이 섬겼다고 목소리가 더 커져서는 안 됩니다. 섬김을 이익의 재료가 아닌, 아름다운 의무로 여기는 것이 천국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섬김을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아름다운 의무로 여깁니까? 섬기려는 태도보다, 섬김을 통해 인정받으려는 태도 속에 나의 '믿음 없음'이 보이지 않습니까?

믿음과 감사의 삶(11-19)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열 명의 나환자들을 만납니다. 긍휼을 구하는 그들에게 주님은 즉시 응답하셔서 모두를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동일한 은혜를 받더라도 모두가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고도 쉽게 망각합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감사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감사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것을 받더라도 그 삶에는 천국의 기쁨이 없습니다.

많은 것을 받고서도 감사가 없기에 기쁨이 메말라 있지 않습니까? 상황과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모든 좋은 것들을 선물로 주시는 그분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 성경본문 이해 ]

17:11-19의 첫 문단은 이스르옐 골짜기를 여행하시던 예수께서 열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치유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아홉 명의 유대 출신 문둥병자들은 모두 제 길로 가고 오직 사마리아 출신의 한 문둥병자만이 예수께로 돌아와 감사와 경배를 드린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며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는데, 이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매우 상징성이 강한 사건이다. 즉 이 사건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과 계시를 먼저 받은 유대인이 육적 선민(選民)이라는 지위에 연연하여 그 구약의 성취로 오사 새로이 신약의 복음(福音)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거나 순종하지 않은 반면, 오히려 이방인은 주께 감사하며 경배함으로 결국 최종적인 구원을 먼저 얻게 될 것을 예표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일단 모두 복음의 은혜에 접하게 될 것이지만 그 중의 대다수가 육적 차원에서만 복음을 받아들여 복음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최종 구원의 가치를 깨닫지 못함으로 주님께 나아오지 않을 것과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주님의 복음의 참된 가치를 깨달아 주께 나아옴으로 영원한 천국 구원을 얻게 될 것을 보여 준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열 문둥병자를 고치심 ( 17:11-19 )

우리는 여기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수께서 열 문둥병자를 치료하시는 기사를 보게 된다. 문둥병은 유대인들에게 다른 어떤 질병보다도 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징표로 여겨진 질병이었다. 따라서 죄 없이 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께서 길가에서 마주친 문둥병자들을 특별히 깨끗케 해 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놓여 있는 경계, 즉 국경 지방에 계셨던 것이다.

1. 이들 문둥병자들이 그리스도께 외친 말(11-13)

그들은 열 명으로 무리지어 있었다. 이는 그들이 비록 사람들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병에 걸린 자들끼리는 서로 자유롭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1)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한촌에 들어가셨을 때' 그를 만났다. 그들은 그가 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하시기까지 기다리지 않았으며 그가 지친 상태로 그 마을에 들어오셨들 때 그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2)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우리가 영적으로 문둥병자라고 하는 의식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우리를 매우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누구이길래 한없이 정결하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겠는가?

(3) 그들의 요구는 한결같았으며 매우 끈질겼다.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13절). 그리스도께 도움을 기대하려면 그를 선생님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가 선생님이시라면 그는 예수, 곧 구세주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그들은 특별히 자신들의 문둥병을 치료해 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에 내어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그의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제사장에게 보내심(14)

이는 제사장으로 하여금 검사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고침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명확히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단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명하셨을 뿐이다(14절). 이것은 그들의 순종에 대한 시험이라고 하겠다. 그리스도께 은총을 얻으려면 자신들을 그의 방법에 맡길 수 었어야 한다. 그들 모두가 제사장에게 갔다. 의식법이 아직 유효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

3. 그들이 갔을 때 깨끗함을 받음(14)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만나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부족함 없이 채워 주실 것이다. 비록 그 방법 자체가 우리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대로 부지런히 준행하고 있는 우리들을 치료하실 것이다.

4. 그들 중 단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감사함(15)

그 사람은 자신이 고침받은 것을 보았을 때 자신을 치료해 준 분께로 돌아와서 그가 그 일의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랬다. 그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으로 그리고 매우 감격하여 감사하고 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15절).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은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리스도께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하되 특별히 질병에서부터 회복시켜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뿐 아니라 감사하는 일에 있어서도 또한 매우 겸손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태도이다.

5.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을 주목하심(16)

이는 다른 모든 사람이 유대인들이었음에 반해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16절).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나 경배하는 일에 있어서 유대인들처럼 잘 알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잊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에게 각별한 호의를 보이셨다.

왜냐하면 다른 아홉 사람도 함께 긍휼을 입었으나 그들은 모두 그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었던 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돌아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1) 그리스도께서는 선을 행하시는 일에 얼마나 풍성하신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17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일괄적으로 치료해 주셨다. 즉 전 병자가 한 마디 말씀으로 치유받았던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은혜 받는 일이란 결코 없을 것이다.

2) 우리는 다시 돌아오는 일에 얼마나 인색한가?

그리스도께서는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은혜를 잊어 버리는 것은 매우 흔히 범하여지는 죄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입으나 단지 적은 사람만이, 아주 소수만이 감사를 드린다.

3) 가장 감사하리라고 기대되어지는 자들은 과연 감사하였는가?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했으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심은 그들의 배은망덕의 죄를 더 무겁게 해 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에게 큰 위로를 베풀어 주셨다(19절).

다른 사람들도 치료를 받았으며 그 치료받은 것은 결코 번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각별하게 자신의 나음을 확신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곤궁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온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서 보셨던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본절부터 19:27까지는 예수께서 당신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전 마지막 순회 전도 기간 중에 있었던 일을 다룬다. 그 가운 데 본절은 예수의 순회 전도의 최종적 종착지가 예루살렘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 경로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온 각 지역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해 볼 때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게 된다. 바로 앞선 13:22-17:10은 예수의 베레아 지역에서의 사역을 다루고 있는데 지리적으로 이곳은 요단 동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요단강만 건너면 바로 유대 땅 예루살렘으로 가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께선 유대 땅 북쪽에 위치한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으로 다시 올라가셨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본서에 생략되어 있는 사건을 살펴 보아야 한다. 우선 예수께서 베레아에서 사역하고 계실 때 나사로가 병들었으며, 그 병을 고쳐 달라는 전갈을 받고 요단강을 건너 유대 땅 베다니로 가서 이미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학자들은 이를 예수의 단기 유대 사역이라 부른다(요 11:1-54), 그런데 이 사건은 예수에 대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반감을 더욱 고조시켜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모의를 꾸미는 계기가 된다(요 11:47-53), 이에 예수께서는 아직 죽으실 시점이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사마리아 지역의 에브라임이란 동네에 잠시 유하셨다가(요 11:54) 다시 최후 순회 전도의 길에 오르신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요 11장에 기록된 이러한 내용은 생략한 채 단지 사마리아와 갈렬리 사이로 지나가셨다는 기록으로 압축하여 예수의 여행 경로를 묘사한 것이다. 이처럼 누가의 기록은 극히 압축된 형태로 되어 있지만 사실의 묘사에 있어서는 더 정확성을 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마리아’를 ‘갈릴리’보다 먼저 쓴 것이 바로 그러하다.

예수께서 베레아에서 베다니로 가셨다가 다시 에브 라임으로 물러가셨으며, 여기서 자신을 적대시하는 유대인들과 직접 마주치지 않는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연히 사마리아 접경 지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 예수께서 유대 지방에서 출발하지 않고 갈릴리 지방에서 여행을 시작했다면 사마리아보다 위쪽에 위치한 갈릴리의 표기가 먼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사마리아가 먼저 나온 것은 예수의 여행 경로가 남쪽에서 북쪽을 향한 것임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는 거리상으로는 예루살렘에 서 더 멸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란 표현이 나오는 것은 예수의 최종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며 바로 여기서 있을 성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구속 사역의 완성, 즉 십자가 수난 사건의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비록 거리적으로는 예루살렘과 점점 멸어지고 있으나 그 마음은 항상 자신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다. 그들은 멀찍이 멈추어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였다.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께서는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하나는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런 다음에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