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만난 자의 이웃(눅 10:25~37)
[성경묵상]
1. 율법 교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가. 첫 번째 질문과 대답 :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질문
ㅡ>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ㅡ>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ㅡ>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ㅡ>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나. 두 번째 질문과 대답 : 강도 만난 자의 이웃 = 자비를 베푼 자
ㅡ>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ㅡ>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ㅡ>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ㅡ>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2. 자비를 베푸는 법
가. 불쌍히 여겨야 한다.
나. 가까이 다가 가야 한다.
다. 자신이 갖고 있는 소중한 것(기름과 포도주)을 투자해야 한다.
라. 돌보아 주어야 한다.
마. 추수 지도를 한다.
3. 부한 자들이 자비를 베푸는 방법
@ 부자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물질관 :
1. 부자들은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라.
2.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어야 한다.
3.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아낌없이 베풀어라)가 되라.
@ 해서는 안 될 두 가지
1. 마음을 높이지 말아야 한다(교만).
2.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
@ 마땅히 해야 할 네 가지
1. 하나님께 마음을 두어야 한다.
2.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해야 한다.
3. 나누어 주기를 좋아해야 한다.
4. 너그러운 자(아낌 없이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4. 올바른 물질관을 가져야 하는 이유
ㅡ>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영생)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기 위해서)
ㅡ> 이는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한 영생을 얻는 것과 관련 설명 가능
[성경대조]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예수께서 응답하여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다.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서,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그가 대답하였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
열 므나의 비유 (눅 19:11-27)
열 므나의 비유 19:11-27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제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1. 이때 그와 함께 하던 자들에게 일어난 생각(11)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때를 기대하고 있었다(눅 17:20).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조차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이 현세적인 영광과 능력과 더불어 그것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그의 나라의 보좌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결론내렸으며 따라서 이제 그가 곧바로 그곳에 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잠시 후에 그가 거기서 보좌에 앉은 것을 보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선한 사람들이라도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서 잘못을 범하기가 쉽다.
2. 그들의 잘못된 기대가 시정됨(12-27)
그는 다음 세 가지 면으로 그들의 잘못된 기대를 정정해 주신다.
(1) 그들은 그가 영광중에 지금 당장 나타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그가 공적으로는 아직 오랫동안 그의 나라의 보좌에 앉지 않아야 됨을 말씀하신다. 그는 어떤 귀인과 같은 자로 그는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가게 된다. 그는 왕국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돌아오셨다. 그 때 예루살렘이 멸망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고 있는 것은 그의 주된 귀환은 아직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서 마지막 심판날에 있게 되는 것이다.
(2) 그들은, 그의 사도들과 그를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자들이 영광과 위엄 가운데 나아가리라고 즉 그들 모두가 군주, 또는 고관대작이 되어질 것이며 왕궁과 도시의 고위직과 온갖 영화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들에게 이러한 것 대신에 그들을 일군된 자들로 계획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계시다.
즉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장사하는 직 이 외에 어떤 다른 높은 자리를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그는 그들로 스스로 사람들 가운데서 그와 그의 나라의 이익을 위해 섬기는 일에 종사케 하기 위해서 그들의 수중에 자본을 공급해 주셨다.
모든 현대적인 영광을 신앙심 깊은 경멸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사역자들의 참된 영예로움이 되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의 나라에서 그의 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꿈꾸었으며 그로 인해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생각을 품게 하는 것들 대신에 진지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것들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① 그들은 이제 해야 할 큰 일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주인은 그들을 떠나가게 되며 떠나는 자리에서 그들에게 각각 한 므나씩을 준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와 똑같은 것을 보여 준다(마 26장).
그러나 그 비유에서는 그들을 더 겸손케 하고자 하는 것이 나타나 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의 영예는 최고의 상인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장사군이라는 데 있다.
그는 이러한 책임과 함께 그의 종들에게 므나를 나누어 주었다.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부지런하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너희 직무를 기억하라. 그리고 그 일을 하라. 즉 열심을 가지고 그 일을 시작하라. 그리고 그 일에 몰두하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할 일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며 사역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전자나 후자 모두 게으르라고 세례받거나 임명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받은 자들에게 그들의 직무에 필요한 은사들을 공급하신다. 또한 그는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는 "가서 일하라 가서 장사하라"는 책임을 맡기며 므나들을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 오기까지 우리의 일을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
② 그들은 최종 결산을 하게 된다. 이 종들은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하는 주인에게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가운데 부지런히 그리고 신실하게 장사한 자들은 이득을 본 자들이 될 것이다.
많은, 수고한 장사군들이 손해보는 자이었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장사하는 자들은 이득을 본 자들이 될 것이다. 회개한 영혼을 가진 자들은 이기는 자들이다. 참으로 회개한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명확히 이익이 된다.
사역자들은 단지 그를 위해 일하는 자들로 그들은 자신들이 복음의 그물로 잡은 고기, 즉 그들이 장사함으로 이득을 본 것을 그에게 회계해야 한다.
㉠ 몇몇 종들에게 있어진 선한 회계와 그들에 대한 주인의 인정 :그 두 가지가 16절과 19절에 예시되어 있다.
첫째, 그들은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았다. 한 사람은 '열 므나'를 남겼으며 다른 사람은 '다섯 므나'를 남겼다. 똑같이 충성했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성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 모두가 함께 충성했다 할지라도 어느 한편이 다른 사람보다 더욱 수고하고 자기 일에 더욱 열심으로 몰두했을 것이며 따라서 더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둘째, 그들은 주인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인정하였다. 즉 "주여 내 것이 아닌 당신의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남긴 모든 것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한다.
셋째, 그들은 모두 자신의 충성과 근면에 대해 칭찬을 들었다. 즉 17절에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라고 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해선 19절에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라고 하였다. 만일 그가 잘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안된다.
넷째, 그들은 자신들이 이룬 성과에 따라서 상급을 받았다.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 차지하라(17절). 별로 없는 가운데서 시작하는 것에 만족하는 자들은 성공할 가망이 있는 자들이다.
이러한 비유로써 사도들은 두 가지 것을 약속받은 셈이 된다. 즉 그들이 많은 교회들을 세우기 위해 수고했을 때 그들은 큰 존대를 받게 될 것이며 선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존경 속에서 큰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자신들의 세대를 섬겼을 때 그들은 내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들로서 다스릴 수 있는 상급을 받은 천한 장사군의 경우보다 훨씬 더 나은 것으로 선한 사역자나 혹은 선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질 것이다. 다섯 므나를 남겼던 자는 다섯 등급이 있다. 즉 모든 그릇이 똑같이 쓸모 있는 것이나 다 똑같이 크지는 않다. 이와 같이 필요의 등급에 따라서 영광의 등급이 있게 될 것이다.
㉡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있어진 악한 회계와 그에게 내려진 선고(22절) :
첫째, 그는 자신이 맡은 므나로 장사하지 않았음을 인정하였다.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20절). 이는 곧 "내가 그것을 늘리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나는 그것을 줄게도 아니했습니다"라는 말이라고 하겠다. "나는 그것을 안전하게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것은 은사를 받되 그것으로 도무지 선을 행하지 않은 자들의 무관심을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이익이 줄건 말건 그 나라가 앞으로 나아가건, 후퇴하건 그들에게는 매 한가지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직무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아무런 악도 행하지 않았고 아무런 선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므나를 수건으로 싸두는 종들과 같은 자들이다.
둘째, 그 일을 더 좋게 만들지 못하고 나쁘게 만든 것을 변명함으로 자기를 정당화시켰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21절). '엄한'이란 곧 교활함을 뜻하는 말이다.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가 이것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그는 그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참으로 그는 심은 데서 거두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주인의 엄함을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단지 사기군에 불과한 자였다. 즉 자기의 게으름에 대해서 어리석고 근거 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자였다.
셋째, 그의 변명이 그를 판단한 것이 되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22절).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반드시 심판받게 된 것이다. "만일 네가 내 이익에 대해 유의했었다면 너는 내 돈을 은행에 두어 나로 내 것 뿐 아니라 그 변리까지 가지도록 했어야 했다." 설사 그가 본전을 잃을까 두려워서 장사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아무 이익을 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 게으른 자들의 구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참된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전적인 무관심인 것이다. 그들은 단지 편히 살게 되는 것 외에 신앙이 터전을 얻건 말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넷째, 그는 자기의 므나를 빼앗겼다(34절). 자기들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자들이 그것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에게서 그 한 므나를 빼앗아'라고 했다. 다섯째, 그것이 열 므나 가진 자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가 이미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지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을 때(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25절)) '무릇 있는 자가 받을 것이다'(26절)라고 대답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공평한 처사이다. 즉 가장 부지런했던 자들이 가장 큰 격려를 받아야 한다. 또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마치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같을 때 그들은 그것을 빼앗기게 된다. 자기들의 가지고 있는 은혜를 더욱 증가시켜 가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은혜를 무시하거나 은혜가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버려 두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3) 그들이 기대했던 또 다른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날 때 유대 민족이 곧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가 떠나신 후에 유대 민족이 완고하고 패역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1) 그의 백성이 그의 뒤에 보낸 전언에서 그것이 나타난다(14절). 그가 자기 나라에 왕위를 받으러 갔을 때 그들은 여전히 그의 대적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유대인들 속에서 널리 드러난 불신앙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들은 결코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의 말을 보여 준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것에는 틀림없이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나 그로 하여금 자기들을 다스리게는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2) 그가 돌아와 그들에게 내린 선고에서 그것이 나타난다.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27절). 그의 충성된 공복들이 상급을 받고 보상을 받을 때, 그는 그의 원수들에 대해서 원한을 갚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났을 때 그리스도와 그의 통치에 대해서 대적한 그 분간할 수 없는 원수들에 대해서 보복이 행해졌다. 즉 그들은 '끌려와서 그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신앙을 고집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비참한 멸망이 틀림없이 모든 그리스도의 원수들의 대가가 될 것이다. 그들의 어리석은 변명을 파기하고 그들의 공로에 따라 선고하기 위해 '그들을 이리로 끌어오라'고 했다. 그리스도로 자기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자들은 그의 원수로 여겨져 처리될 것이다.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인이 된 자들은 그리스도께 복종치 않은 자들로 여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은혜에 붙잡힌 바 되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의 진노로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다.
기도에 관한 교훈(눅 18:1-14)에 대한 주해
눅 18:1-14은 기도에 대한 교훈으로 공관복음서가 기자 중 누가만이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수록한 1절부터 8절까지의 내용을 보게 되면 앞선 17:20-37의 하나님 나라와 인자의 날에 관한 내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예수께서는 앞단락에서 메시야 왕국이 도래할 예수 재림 이전에 성도들이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될 각종 고난에 대하여 예언한 후 이제 본 단락에서는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낙망하지 말고 항상 기도로 그 날을 준비할 것을 교훈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있는 대상이 동일하게 제자들이라는 것과(눅 17:22 ; 18: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17:22-37에서 ‘인자의 날’에 관한 언급을 하셨듯이 18:8에서도 ‘인자가 올 때’라는 동일한 시점을 기록하고 있다는 데서 분명히 밝혀진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인자의 날, 즉 재림의 날과 관련하여서 그 때까지는 소망을 놓지 말고 기도하라는 동일한 교훈이 나온다.
이렇게 본단락은 앞의 17:22-37의 내용과 이어지면서 비유를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는 그 날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도할 것에 대한 예수의 권면이 나온다.
한편 본문은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한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구문이다. 이는 ‘~을 목적으로’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 ‘프로스’가 ‘기도하다’는 의미를 지닌 ‘프로슈케스 다이’와 ‘낙망하다’는 의미를 지닌 ‘앵카케인’이 두 개의 부정사와 상관적으로 쓰이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교훈할 목적으로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낙망치’로 번역된 ‘앵카케인’의 원형 ‘앵카케오’는 ‘완전히 정신을 잃다’, ‘녹초가 되다’라는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를 살려 본문의 의미를 파악해 본다면 낙심하였다는 것은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흔비백산하였으며 완전히 지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 것을 1절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17장에서 인자의 고난과 인자의 날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제 곧 다가올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환난과 핍박을 당하게 될 제자들을 향한 간곡한 당부의 말씀이기도 하다. 신자는 어떠한 시련이 있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오히려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한다.
여기서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의미는 시간적으로 쉬지 않고 장시간 동안 기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선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눅 12:1-12)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그 동안에 수만 명이나 되는 무리가 모여들어서, 서로 밟힐 지경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먼저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 곧 위선을 경계하여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덮어둔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한 말을 사람들이 밝은 데서 들을 것이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을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선포할 것이다."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내 친구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내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죽인 뒤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리시지 않는다.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당할 것이다.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가 회당과 통치자와 권력가들 앞에 끌려갈 때에, 어떻게 대답하고, 무엇을 대답할까, 또 무슨 말을 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너희가 말해야 할 것을 바로 그 시간에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다."
[ 성경 묵상 ]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해 심하게 질책을 하셨다. 이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반대자들의 적대감이 고조되었고, 이것은 제자들에게 위협적인 상황으로 작용되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에수님께서는 여기서 제자도의 본질과 성부의 보호를 상기시키면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제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이 아니라,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를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위선의 본질은 불신앙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사람, 즉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할 때에 나타난다. 그러한 불신앙, 거짓된 위선은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거짓된 신앙, 위선은 반드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잊어 버리지 않고 보호해 주시는 것처럼, 참새보다 더 귀한 너희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사람(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바리새인에 대한 질책으로 인해 발생할 바리새인들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참된 두려움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계신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8-10절)
우리들의 신앙을 사람 앞에서 고백하지 못하고 부인하면 하나님 앞에서 부인을 당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는 용서함을 받을지 모르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only)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신앙을 지켜 나가야 한다.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려 갈 상황이 올지라도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고난 당하고 있을 그 때에,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고 하신다(11-12절). 즉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끌고 갈지라도 그 곳에서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위선적인 신앙생활에서 떠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두려워할 대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둘째,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심을 믿고 깨달아야 한다.
셋째,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 힘들고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시인해야 한다.
예수님을 시인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는가?
첫째, 더 귀하게 여겨주신다. 7절
둘째, 예수님께서 인정해 주신다. 8-9절
셋째,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신다. 12절
외식하지 말 것과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하심(12:1-12)
[ 메튜헨리주석 ]
1. 많은 무리가 모임(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고소할 증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무리들은 아직 그를 따라 다니며 그를 찬미하고 존귀히 여겼다. 그 동안에(1절), 즉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있는 동안에 백성들은 오후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과 식사하신 후에 설교를 하셨다. 그는 모여든 무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비록 아침 설교에서 무리가 모였을 때에(눅 11:29), 악한 세대라고 심하게 그들을 꾸짖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그리스도를 찾아 모여 들었던 것이다. 그 무리들은 바리새인들 보다 훨씬 더 그러한 책망을 잘 참을 수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무리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많은 무리가 그에게 모여 들었다. 본문에는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라고 묘사되어 있다. 무리들이 말씀을 듣기위해 앞으로 다가가려는 것을 보여 주는 흐뭇한 광경이다. 그러한 고기떼가 있는 곳에 그물을 던진다면 얼마라도 잡히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제자들에게 교훈하심 (1-12)
(1) 그는 외식을 경계하라는 말로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는 이 말씀을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 제자들에게 하셨다. 이들은 그의 보다 특수한 보호아래 있었으므로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하듯이 특별히 그들을 경계시키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많은 신앙 고백을 하였는데, 신앙에서의 외식은 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죄이었다. 외식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다도 그들에게 있어서 더 악한 것이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들이었을 것이지만 여전히 외식에 대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무리가 듣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경고에 대해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자 함이었으며, 세상 사람에게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경계시킨 죄에 대한 묘사 :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했다(1절).
그것은 누룩이다. 즉 누룩처럼 퍼져나가 온전한 사람 속으로 그리고 그가 행하는 모든 것 속으로 교묘하게 침투해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것은 누룩처럼 부풀며 시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을 자만심으로 우쭐대게 하고 악의로 몹시 상하게 하며, 그들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누룩이다. "그것은 그들 대부분에게서 발견되는 죄이다. 그들을 닮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들이 유대교로 가장하듯이 너희들도 그리스도교로 위장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2) 그것을 경계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2,3절) :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2절).
조만간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만일 너희가 공중앞에서 행한 너희의 신앙 고백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어두운데서'말한다면 그것은 '광명한 데서' 들릴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은 알려질 것이며 따라서 너희의 어리석음과 허위가 밝히 드러날 것이다. 사람의 신앙이 자기 마음의 악을 치유하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언제까지나 가면으로 덮인 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위선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무화과 잎을 벗기게 될 그날을 오고 있다.
(2) 이에 덧붙여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할 것과 비겁함이나 천박한 불안으로 인해 그 의무를 배신하지 말 것을 교훈하셨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든지 말든지, 용납하든지 않든지 간에 그들에게 진리, 곧 온전한 진리를 말하며 진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 너희에게 은밀히 전해졌던 그것을 전파하되 누가 성을 내든 안내든 너희는 그것을 널리 전파하라."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이 결코 타락의 원인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고난을 받게하는 원인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용기로 자기 자신을 무장해야 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로 그들의 일에 대해 거룩한 결의로 강하게 하시기 위해 여러 가지 설명을 들려 주신다.
1) 너희 원수들의 권세는 제한된 권세이다(4절).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두려워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친구이다. 그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며 그들에게 이 우정어린 충고를 하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 친구로 인정하는 자들은 어떠한 적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육신을 죽이는 것 이외에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어떠한 근본적인 해를 결코 가할 수 없다. 그들은 다만 육신을 보다 빨리 그의 영원한 안식처로 돌아가게 하며, 영혼 또한 그의 영원한 희락으로 돌아가게 할 뿐인 것이다.
2) 하나님은 세상의 지극히 권세있는 사람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5절).
"너희는 그리스도를 시인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분노를 살 것이나 그를 부인하고 거절함으로 말미암아서는 너희를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그런고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축복받은 순교자인 후퍼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로 생명은 달고 죽음은 쓰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더욱 달고 영원한 죽음은 더욱 쓰다."
3) 선한 그리스도인과 선한 사역자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각별하신 보호아래 있다(6,7절).
하나님은 참새와 같은 지극히 하찮은 미물조차도 인식하고 계시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릴 정도로 그것이 하찮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는 바 되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그런고로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잊혀진 바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라."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속한 제자들의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인식하고 계시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7절). 하물며 너희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흘리는 그 땀방울임이랴!
4) "너희가 현재 그리스도를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에 따라 저 큰 날에 그리스도로부터 시인하심이나 부인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8,9절).
그리스도를 지금 시인하는 자들이 저 큰 날에 얻을 것을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든지 간에 우리가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그들을 위해 고난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했음을 시인하실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영예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은 그들이 비록 그를 부인함으로 생명 그 자체를 구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천하를 얻는다 할지라도 결국은 대실패자가 될 것을 확신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확신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부인하는 그들을 알지 못하시며 그들을 시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5) 그들이 곧 보내심을 받게 될 사명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귀중한 것으로 주어진 것이었다(10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전파에 담대하라고 명하신다. 왜냐하면 당시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자들 보다(회개의 최후 수단인 성령이 제자들에게 부은바 된 후) 이들을 배척하는 자들에게 더 한층 쓰리고 엄중한 심판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그럴 경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죄사함의 특권이 거부되어질 것이다. 그런 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의한 혜택을 입지 못할 것이다."비록 처음에 그들을 통해 진리를 확신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기뻐하는 자는 소망이 있으나 거스려 말하는 자는 완전히 내버림을 당했다.
6) 그들은 어떠한 시험에 부름을 당할지라도 이를 충분히 감당할 힘을 공급받을 것이며 명예롭게 그 시험들을 극복할 것이다(11,12절).
그리스도의 충성된 순교자는 겪어야 할 고난 뿐만 아니라 전해야 할 증거 곧 증거를 위한 선한 고백을 가지고 있는 자이며 이를 잘 해 내려 힘쓰는 자이다. 따라서 그가 비록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 고난 받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대의는 손상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그의 맡은 일이라면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서, 너희 믿는 바 교리에 대하여 심문하려 하거든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지에 대해 염려치 말라"
① 너희 자신을 구하기 위해 염려치 말라. 너희가 자유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너희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면 그가 그일을 효과적으로 이루실 것이다.
② 너희 주인을 섬기는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이것을 의중에 두되 당황하지 말라. 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명예와 그의 대의를 위하여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하며 어떻게 대답할 것을 가르치실 것이다.
죄인의 침묵(눅 18:9-14)
[ 설교 요약 ]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본문을 루터는 한 장소에서 같은 회중에서 25번 설교를 하였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다.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네용이다. 종교개혁의 근간을 설명하려고 시도를 하였다고 한다.
성경은 세리는 의롭다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 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주못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세라를 죄인의 대명사처럼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세리를 형편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형편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잘난 사람이고 현실적인 사람이다.권력과 타협을 한 사람으로 재산이 많은 사람이다. 권력과 접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금력과 권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이 성전에 와서 바리세인들로부터 푸대접을 받기까지 수모를 겪었다. 이 세리는 왜 성전에 왔을까? 이우 없는 불안감에 처해 있다가 왔는지도 모른다. 남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가 왔는지도 모른다. 남모르는 죄로 인해 영심에 찔려 하나님을 찾아 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은 무엇을 의미할까? 고백 후의 긴 침묵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 안생이 인생의 고와 낙을 다 맛 본 후에 인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다음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 우주를 능가하는 대 진리를 체험한 후에 인생이 만능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부족한 인생들은 자신이 잘난 사람인 줄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키를 마음대로 크게 하거나 작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들이다.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무능한 자들이다. 큰 소리를 아무리 친다할지라도 별 것 없는 자들이다.
세리는 이러한 것을 깨달은 후에 이러한 고백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체득한 후에 취한 행동이다.
백부장의 '이만한 믿음'(눅 7:1-10)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예수께서는 이 모든 말씀을 사람들에게 들려 주신 뒤에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마침 그 때 어떤 백인대자의 종이 중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이 대단히 아끼는 종이었다.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백인대장이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유다인의 원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서, 집에 오셔서 자기 종을 살려 주십사 하고 간청하게 하였다.
누가는 특히 그 백부장의 인품과 더불어 겸손을 강조하고 있는데. 예수께 직접 나아가지 않았다는 진술은 그 겸손의 측면을 부각시킨다. 이는 마태복음의 병행 기사에는 없는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7절)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장로들을 수식하고 있는 ‘톤 이우다이온’은 백부장이 유대인이 아님을 보여 준다. 만일 백부장이 그들과 같은 유대인이었다면 굳이 ‘유대인의’라는 수식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누가는 책의 첫머리에 밝힌 것처럼 데오빌로라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다(1:3). 결국 백부장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관심과 그의 복음이 유대인에게만이 아닌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방인 백부장이 보여 준 삶과 믿음 및 그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당시 이 책을 읽는 많은 이방인들에게 기독교가 유대교의 배타적 이미지를 탈피하는 개방적 종교임을 이해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왔지만 대부분 자기 가족이나 친척,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찾아왔을 뿐 부리는 종을 위해 찾아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백부장은 미천한 신분에 있는 자기 종의 치료를 위해 예수를 찾았던 것이다. 청교도 신학자 라일(J.C. Ryle)에 따르면 당시 헬라와 라틴 철학에서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더구나 더 이상 쓸모없어진 자를 돌아보는 성품은 칭찬하지도, 권장하지도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사회 분위기 가운데 대로마제국의 군인으로서 높은 위치에 있었던 백부장의 이러한 태도는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평소에 유대인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고, 회당까지 지어준 것을 생각해 볼 때(5절) 그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경험하고 있던 신앙인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와서 간곡히 부탁 드리기를 "그 백인대장은 도와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까지 지어 주었습니다" 하였다.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셨다.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인대장은 친구들을 시켜 예수께 전갈을 보냈다. "주님, 수고롭게 오실 것까지 없습 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사람이 못 되며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저도 남의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또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종에게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감탄하시며 따라 오는 군중을 돌아다보시고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만한’으로 번역된 ‘토사우텐’의 원형 ‘토수토스’는 ‘매우 많이’란 뜻이 있는 ‘토소스’와 ‘이것’이란 뜻이 있는 지시 대명사 ‘후토스’의 합성어로서 매우 강조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KJV는 ‘그렇게 위대한(so great)’이라는 의미로 번역했다.
실로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실 그리스도가 계시된 구약의 내용에 대해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이제껏 목격할 수 없었으리 만큼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이러한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은 이방인으로서 구약에 대한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메시야로 믿은 데서 출발한다.
이처럼 백부장은 당시 유대인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던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믿었을 뿐 아니라 예수께서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한다는 겸손한 신앙과 더불어 말씀만으로도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있었다.
이러한 백부장의 훌륭한 믿음은 예수께로부터 극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그 믿음대로 하인의 병이 낫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방인인 백부장의 이러한 성숙한 신앙은 장차 예수에 대한 믿음이 유대인의 혈통적 한계를 넘어서 전세계로 전파될 것임을 보여 준다.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 가 보니 종은 이미 깨끗이 나아있었다.
[ 설교요약 ]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였다.
백부장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는가?
1. 주님께 겸손한 자세로 구하는 믿음이었다(3-7절).
백부장은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보내어 예수께 간절히 구하였다고 하였다(4절). 자신의 종을 보낸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장로들을 보내었다. 그리고 자신의 벗들을 보내어 오시지 말고 말로만 하시라고 부탁하였다.
주님께 보낸 사람과 그의 말 내용을 살펴보면 백부장의 겸손한 자세를 볼 수 있다.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7절)."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겸손한 자의 자세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였다(약 4:6). 자신이 낮아진 자세로 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빌 2:5-11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신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그 결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하였다. 이런 자세로 살아갈 수 있을까?
2. 주님의 말씀이 능력임을 고백한 믿음이었다(7,8절).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7절)."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믿은 믿음이다. 그 결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이미 낳았다.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 8:13)"라는 말에 힘이 있어 백부장의 하인이 나음을 입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음은 눅 1:26-38, 시 107:10-22, 딤후 3:16,17에서 찾아 알 수 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내 종이 낫겠나이다(7절)"는 백부장의 믿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3. 이스라엘 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이었다(9절).
'이만한 믿음'을 볼 수 없다고 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믿음을 찾았지만 찾지 못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내용이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과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 신자들의 모습에서 이만한 믿음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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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이만한 믿음'(눅 7:1-10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예수께서는 이 모든 말씀을 사람들에게 들려 주신 뒤에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마침 그 때 어떤 백인대자의 종이 중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이 대단히 아끼는 종이었다.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백인대장이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유다인의 원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서, 집에 오셔서 자기 종을 살려 주십사 하고 간청하게 하였다.
누가는 특히 그 백부장의 인품과 더불어 겸손을 강조하고 있는데. 예수께 직접 나아가지 않았다는 진술은 그 겸손의 측면을 부각시킨다. 이는 마태복음의 병행 기사에는 없는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7절)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장로들을 수식하고 있는 ‘톤 이우다이온’은 백부장이 유대인이 아님을 보여 준다. 만일 백부장이 그들과 같은 유대인이었다면 굳이 ‘유대인의’라는 수식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누가는 책의 첫머리에 밝힌 것처럼 데오빌로라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다(1:3). 결국 백부장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관심과 그의 복음이 유대인에게만이 아닌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방인 백부장이 보여 준 삶과 믿음 및 그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당시 이 책을 읽는 많은 이방인들에게 기독교가 유대교의 배타적 이미지를 탈피하는 개방적 종교임을 이해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왔지만 대부분 자기 가족이나 친척,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찾아왔을 뿐 부리는 종을 위해 찾아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백부장은 미천한 신분에 있는 자기 종의 치료를 위해 예수를 찾았던 것이다. 청교도 신학자 라일(J.C. Ryle)에 따르면 당시 헬라와 라틴 철학에서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더구나 더 이상 쓸모없어진 자를 돌아보는 성품은 칭찬하지도, 권장하지도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사회 분위기 가운데 대로마제국의 군인으로서 높은 위치에 있었던 백부장의 이러한 태도는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평소에 유대인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고, 회당까지 지어준 것을 생각해 볼 때(5절) 그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경험하고 있던 신앙인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와서 간곡히 부탁 드리기를 "그 백인대장은 도와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까지 지어 주었습니다" 하였다.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셨다.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인대장은 친구들을 시켜 예수께 전갈을 보냈다. "주님, 수고롭게 오실 것까지 없습 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사람이 못 되며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저도 남의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또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종에게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감탄하시며 따라 오는 군중을 돌아다보시고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만한’으로 번역된 ‘토사우텐’의 원형 ‘토수토스’는 ‘매우 많이’란 뜻이 있는 ‘토소스’와 ‘이것’이란 뜻이 있는 지시 대명사 ‘후토스’의 합성어로서 매우 강조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KJV는 ‘그렇게 위대한(so great)’이라는 의미로 번역했다.
실로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실 그리스도가 계시된 구약의 내용에 대해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이제껏 목격할 수 없었으리 만큼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이러한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은 이방인으로서 구약에 대한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메시야로 믿은 데서 출발한다.
이처럼 백부장은 당시 유대인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던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믿었을 뿐 아니라 예수께서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한다는 겸손한 신앙과 더불어 말씀만으로도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있었다.
이러한 백부장의 훌륭한 믿음은 예수께로부터 극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그 믿음대로 하인의 병이 낫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방인인 백부장의 이러한 성숙한 신앙은 장차 예수에 대한 믿음이 유대인의 혈통적 한계를 넘어서 전세계로 전파될 것임을 보여 준다.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 가 보니 종은 이미 깨끗이 나아있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였다.
백부장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는가?
1. 주님께 겸손한 자세로 구하는 믿음이었다(3-7절).
백부장은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보내어 예수께 간절히 구하였다고 하였다(4절). 자신의 종을 보낸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장로들을 보내었다. 그리고 자신의 벗들을 보내어 오시지 말고 말로만 하시라고 부탁하였다.
주님께 보낸 사람과 그의 말 내용을 살펴보면 백부장의 겸손한 자세를 볼 수 있다.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7절)."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겸손한 자의 자세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였다(약 4:6). 자신이 낮아진 자세로 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빌 2:5-11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신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그 결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하였다. 이런 자세로 살아갈 수 있을까?
2. 주님의 말씀이 능력임을 고백한 믿음이었다(7,8절).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7절)."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믿은 믿음이다. 그 결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이미 낳았다.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 8:13)"라는 말에 힘이 있어 백부장의 하인이 나음을 입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음은 눅 1:26-38, 시 107:10-22, 딤후 3:16,17에서 찾아 알 수 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내 종이 낫겠나이다(7절)"는 백부장의 믿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3. 이스라엘 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이었다(9절).
'이만한 믿음'을 볼 수 없다고 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믿음을 찾았지만 찾지 못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내용이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과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 신자들의 모습에서 이만한 믿음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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