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네사렛 호수(눅 5:1)
게네사렛 호숫가 - 옥스포드 주석
네 제자 소명 기사의 장소적 배경이 되는 ‘게네사렛 호수’는 성경에서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구약 시대에는 ‘긴네렛’이라 불리웠다(민 34:11). 이 명칭은 수 19:35절에 나오는 요새화된 성읍인 갈릴리 지역의 ‘긴네렛(Chinnereth)’을 가리키는 데서 연유되었다. 또한 ‘갈릴리 바다’(마 4:18), ‘디베랴 바다’(요 6:1)로 불리우기도 한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겐네살(Gennesa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 이름은 이 호수의 모양이 수금 혹은 비파와 같이 생긴 까닭에 붙여진 것이다.
이 호수는 남북의 길이가 약 20km, 동서의 폭이 약 12km이고 연적이 약 144km2에 달한다. 헬몬산으로부터 흘러오는 맑은 물과 갈릴리 주변의 따뜻한 온천수로 이루어진 이 호수에는 200여 종류의 다양한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어서 그 호수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왔다.
이스라엘 지역에는 호수가 두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인 사해(死海)가 말 그대로 죽은 바다라면, 이 게네사렛 호수는 살아있는 호수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호수가 물을 계속해서 사해로 흘려 보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물이 고이지 않아서 썩지 않고 살아 항상 맑게 유지된다.
일명 ‘예수님의 배’(Jesus boat)
게네사렛
신약성경에서 “게네사렛 땅”으로 불리는 지역이다(마 14:34; 막 6:53). 게네사렛 땅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있는 평야로서 그 크기는 갈릴리 바다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5km, 동서로 1km 정도 된다. 갈릴리 바다 서쪽 해안에 있는 도시들을 북에서부터 나열하면, 가버나움, 답가(Tabgah), 긴네렛(Chinneret, 또는 게네사렛), 게네사렛 평야, 막달라(Magdala), 디베랴(Tiberias) 등이다. 이 게네사렛 땅은 긴네렛(게네사렛) 도시와 막달라 도시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이 평야는 비옥해서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종려나무, 다른 각종 나무들이 잘 자란다.
성경에서는 게네사렛 땅 이외에 동일한 이름이 사용되는 경우가 두 가지 더 있다. 첫째는 앞서 지리 설명을 할 때 나타났듯이 긴네렛이라는 도시이다. 둘째는 갈릴리 바다를 가리킨다. 누가복음은 갈릴리 바다를 “게네사렛 호숫가”(눅 5:1)라고 부른다.
게네사렛 땅, 곧 게네사렛 평야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법은 아르벨 산(Mount Arbel)에 올라가는 것이다. 아르벨 산 정상에 올라가서 보면 게네사렛 땅이 한눈에 펼쳐진다. 보통 아르벨 산 정사에서 절벽을 따라 내려오게 되는데, 이때 게네사렛 땅은 물론 나사렛에서 이어지는 길을 확인할 수 있다.
갈릴리 바다 동편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 게네사렛 항구에 달하면 큰 건물이 하나 보인다. 그 건물은 게네사렛 박물관인데, 여기에는 단 하나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2천년이 넘은 배, 곧 예수님 시대의 어부 배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1986년에 가뭄이 심했는데, 그때 갈릴리 바다의 수위가 내려가면서 침적토에 박혀 있는 가라앉은 배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일명 ‘예수님의 배’(Jesus boat)라고도 불리는 이 배는 키부츠 기노사르(Kibbutz Ginnosar, 기노사르는 게네사렛의 또 다른 이름이다) 출신 어부이며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모셰와 유발 루판(Moshe and Yuval Lufan) 형제들이 발견했다. 방사성 탄소를 이용해서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이 배는 기원전 40년 정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게네사렛[Gennesaret ] - 라이프 성경 사전
‘열 동산’이란 뜻. 갈릴리 호수 북서 해안으로부터 내륙으로 길이 6㎞, 너비 4㎞에 걸쳐 펼쳐진 비옥한 평원(마 14:34; 막 6:53). 갈릴리 호수를 ‘게네사렛 호수’(눅 5:1)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무화과, 감람나무, 종려나무 등 수종(樹種)이 다양하고 농사도 잘 되며, 수산물도 풍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가버나움, 막달라 등은 모두 이 지역에 속하는 성읍들이다. 구약 시대에는 ‘긴네렛’(신 3:17; 수 19:35; 왕상 15:20)으로도 불렸다.
베드로(성도)의 변화 과정(눅 5:1~11)
1.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아갔다. 그리고 감동을 받았다.
1-1.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있는 배 두 척 중에서 시몬의 배에 올라가 앉아서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갈릴리 호숫가에 정박해 있는 배 위에 올라 말씀을 가르치신 이유는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발디딜 틈 없는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1-2. 이 때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도 함께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1-3. 예수님의 말씀이 다른 어떤 사람들의 말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킬 정도로 위대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참 말씀은 그럴듯하게 잘 하신다고 생각을 하면서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을지도 모른다. 위대하신 분이라는 소문대로 말씀을 하시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4. 처음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는 것과 같은 단계라고 판단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은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지만 다가오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우리들은 이들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
1-5.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케리그마가 아니라 디다케이다. 디다케 사역은 말씀의 선포, 즉 케리그마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한 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이루어진 사역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풀어 해설하시는 것을 가리킨다(마 5:1-7:29).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자상하게 잘 가르치셨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뛰어난 가르침에 베드로의 마음이 조금씩 열렸고, 전적인 순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5절).
2. 하나님의 명령을 듣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2-1.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복수)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신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무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말씀하시는 것을 무시하지는 못하고 억지로 아니면 못 이기는 척하며 그물(단수)을 던졌을 가능성이 많다.
2-2. 왜 순종했을까? 왜 순종하게 되었을까? 베드로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어느 가르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권세와 능력을 발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말씀에 감동이 베드로로 하여금 순종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했을 것이다.
2-3. 그래서 베드로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던지리이다."하고 그물을 던졌다. 즉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상식적으로는 순종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의 배 위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뒤 그의 말씀이 참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에 한번쯤 들어보자는 판단을 하고,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물들을 던진 것이 아니라 그물 하나만 던졌을 가능성이 많다(4절의 그물은 복수이며, 5절의 그물은 단수이다).
2-4. 어부들은 이미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고기 잡는 일을 끝내고 배를 정박시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2절).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상황에서 다시 그물을 던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쉽게 순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5절). 에수님의 명령을 들은 베드로 일행은 단 한마디도 싫은 내색을 보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순종이 꺼려지고 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순종할 때 비로소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2-5. 직업이 목수인 예수님이 감히 어부로 잔뺘가 굵은 베드로에게 고기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어처구니 없는 방법까지 함께 가르쳐 주셨다. 그 방법이 어처구니 없는 이유는 상식적으로 오전에는 바다 깊은 곳에 고기가 없을 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고기가 다니는 길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베드로 일헹이 벌써 밤새도록 뒤져보았는데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부 어부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꺠끗이 씻어놓은 그물들을 들고 다시 고기잡이를 나서야 한다는 것이 그리 썩 내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이는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한 성도들이 목사님들을 통해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을 근성으로 실천해 보는 단계라고 판단된다.
3. 말씀에 순종했을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3-1. 베드로는 선생이여라는 표현을 써 가면서(8절에서는 '주여'로 변한다) 자신의 경험으로는 순종할 수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
3-2.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이다. 마지못해서나 억지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순종을 하겠다는 의지가 '칼라소'라는 원어에 잘 나타나 있다.
3-3. 베드로는 자신의 배 위에서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고, 거기에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권세가 있고 진실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으며, 그래서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해야겠다는 모종의 결심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는 그 명령이 비상식적으로 들렸으나 즉각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3-4. 우리는 베드로의 이와 같은 대답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과 그 믿음은 바로 주님의 가르침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3-5.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이란 내가 하기 싫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순종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이니까 능동적으로 기쁘게 순종하는 신앙을 말한다. 또한 그러한 믿음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과 주님의 성품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성숙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주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듣고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4. 기적을 체험한 자들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 겸손해진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한 자들은 교만할 수 없다.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4-1.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져서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이 와서 두 배에 가득 채워 잠기게 될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는 체험을 하게 된 베드로는 깊이 깨달아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4-2. 이 때 베드로는 자신의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던 예수님의 말씀이 능력 있음을 실제로 체험하였으며, 이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능력을 보고 놀라며 두려워하였다.
4-3. 여기서 나타나는 시몬의 행동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왕상 17:18, 사 6:5)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신적 능력이 나타나자, 시몬은 거룩한 분의 임재를 느끼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때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알게 되며,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4-4. 시몬 베드로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랐다고 하였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능력 행하심을 보거나 신앙적 체험을 하는 것을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보고 놀라며 예수님의 능력 행하심,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된다고 본다.
4-5.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적이나 이적 또는 축복을 받는 체험을 한 성도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4-6.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이유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랐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깨닫고 믿은 믿음이 아닌 기적과 이적을 보고 놀라 주를 믿게 되기도 한다.
5.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된 자들에게 사명을 주신다.
5-1. 고기 잡힌 것을 보고 놀라고 있던 베드로와 주변 사람들과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시며 사명(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주셨다.
5-2. 사명을 받은 베드로는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즉 즉시 순종했다는 말이다. 자신이 귀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 가치롭다고 판단되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아갔다.
5-3. 우리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는 있으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5-4. 내일 저녁에도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서 많은 고기를 잡아 팔면 부하게 살 수 있는데,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재물과 세상의 영화와 쾌락을 다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신자들이 지금도 망설이고 있다. 바닷가에 살고 있는 어부들은 고기잡는 도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어구들을 던져 버렸던 것이다.
5-5. 베드로와 같은 순종의 자세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것들이 너무 좋아 다 포기하고 주를 따르기에도 아직도 부족한 삶이라고 판단하고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5-6.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쫓은 베드로는 훗날 성령의 도움을 받아 설교를 하였을 때 3,000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며, 베드로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극찬을 들을 정도로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6. 사명을 받은 자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6-1. 베드로는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갔다. 마태복음 4장 22절에서는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었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마가복음 1장 20절에서는 그의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하였다.
6-2. 그들이 버린 것, 포기한 것은 구체적으로 배 두 척과 거기에 달린 그물 등으로 볼 수 있으나, 그것들은 그들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삶의 수단이었고, 그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비롯한 모든 소유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갈릴리 호수에 나가 잡은 고리를 시장에 내다 팔아 생활을 꾸려가는 그들에게 배와 그물은 재산의 전부요, 그것을 이용한 고기잡이가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삶의 모든 것을 과감히 포기할 결단력이 생겨났던 것이다.
6-3. 베드로는 나중에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6-4.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까닭은?
6-5. 바울이 자신의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일생을 바쳐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었던 까닭은?
6-6.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이후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을 때 산으로 기도하시러 갈 수 있었던 까닭은?
6-7. 주 안에서 더 높은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쫓으려고 지금까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7. 주를 위해 자신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버린 자에게 축복하신다.
7-1.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이를 발견한 자는 이를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게 된다(마 13:44).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이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였을 때, 그는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게 된다(마 13:45-46).
7-2.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깨닫게 된 자는 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것은 다 포기하고, 다 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고 하나님을 쫓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7-3.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자는 현세의 복과 내세의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 18:29-30)."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잠와 어머니와 지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재물이 많은 청년과의 대화를 마치고 난 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7-4. 우리들은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예수 - 피에트로 페루지노
1. 디베랴 호수라고도 하는 게네사렛 호수는 사해 바다로 물이 흘러간다. 사해 바다에는 광석들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2. 주님께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실 때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았다. 첫째, 목수 출신인 예수님이 어부 출신인 베드로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했다. 둘째, 시간적으로 낮시간엔 고기가 많이 잡히지 않아 고기 잡을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3. 이 사건을 통해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된다.
4. 주님 안에서 크게 쓰임 받는 일군으로 자녀들을 길러야 한다.
5. 자녀들 교육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첫째,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둘째, 바른 성품과 인성을 갖춘 자로 키워야 한다.
6. 하나님 마음을 알고 그 분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깊은 은혜의 바다에 들어가야 한다. 깊이 있는 인격을 요구하신다. 이웃에 대한 깊은사랑을 갖고 심정을 알아가야 한다.
사명 받은 자의 자세(눅 5:1~11)
[성경묵상]
1~11절은 예수께서 처음 네 제자를 불러 소명을 주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는 마 4:18-22와 막 1:16-20도 다루고 있으나 본서의 내용이 가장 세밀하다.
이러한 본단락은 ‘에게네토 데’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And it came to pass)’ 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앞단락과 구별되는 어떤 새로운 사건이 전개될 때 쓰이는 히브리어 ‘와예히’의 용법과 유사한 헬라어 관용적 표현이다. NIV는 이러한 의미를 반영하여 이를 ‘어느 날(one day)’ 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에게네토 데’로 시작하는 네 제자 소명 기사는 4장의 마지막 기사인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의 전도 사역과 시간적 연계가 분명치 않은, 즉 예수의 사역 중 어떤 불특정한 날에 있었던 사건이다.
마태는 이러한 네 제자 소명 사건(마 4:18-22)을 갈릴리에서의 사역(마 4:23-25) 앞서서 기록했고, 마가 역시 갈릴리 가버나움의 사건들 앞에 기록하였다(막 1:16-39). 그런데 누가는 예수의 영적 권위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난 가버나움 사건(눅 4:31-41)과 전도 활동(눅 4:42-44) 뒤에 제자들을 부르는 본단락의 장면을 등장시킨다.
4장의 그 기사들과 본장의 제자 소명 기사의 시간적 연계는 불분명하지만 제자 소명 기사를 4장의 귀신을 쫓으시고 병을 고치실 뿐 아니라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신 사건 뒤에 배치시킨 것은 예수의 제자들은 권세 있는 예수의 정열적인 전도 사역 결과 맺어진 전도의 열매이며, 더 나아가 더 효과적인 전도를 위한 계획된 선택이었음을 잘 보여 주는 효과를 거둔다.
예수님은 아무런 노력없이 네 제자를 우연히 얻은 것이 아니라 천국 복음의 열정적 선포와 땀흘림의 대가로 얻으셨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내다보고 행하신 결단이다.
[내용분해]
A.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무리률 가르치심(1~3절)
1.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다가 두 배가 물가에 정박해 있는 것을 보심(1-2a절)
2. 그 때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음(2b절)
3. 예수께서 그 중 한 배의 주인인 시몬에게 청하여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도록 한 뒤 배에 앉으셔서 계속하여 무리를 가르치심(3 절)
B. 시몬이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고기률 잡음(4-7절)
1.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하심(4절)
2. 시몬이 밤새 헛수고 하였으나 말씀에 순종하며 그물을 내리겠다고(5절)
3. 그 결과 시몬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됨(6절)
4.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물을 올리자 잡은 고기가 두 배에 가득(7절)
C. 시몬 베드로가 동업자들과 함께 예수를 좇음(8~11절)
1. 시몬 베드로가 이 일을 보고 예수께 무릎을 꿇으며 자신은 죄인이므로 자기에게서 떠나시기를 호소함(8절)
2. 시몬 베드로의 이러한 반응은 함께한 모든 사람들과 동업자 야고보와 요한 등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능력에 놀라 두려운 감정을 느꼈기 때문임(9-10a절)
3. 예수께서 시몬을 안심시키며 그가 장차 사랍 낚는 어부가 될 것을 예언하심(10b절)
4. 시몬 베드로를 비롯하여 그 동업자 어부들이 배를 육지에 댄 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쫓음(11절)
성 베드로의 배반 - 조르주 드 라 투르 /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성경본문 및 주해] - 누가복음 5장 1~11절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한글개역성경에서 ‘옹위하여’라고 번역된 ‘에피케이스다이’의 원형 ‘에피케이마이’는 문자적으로 ‘~위에 놓여 있다’(요 21:9)는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예수’를 의미하는 대명사 ‘아우토’를 목적어로 취했다. 따라서 ‘오클론 에피케이스다이 아우토’는 ‘무리가 그 위에 놓여 있다’는 의미이다. KJV와 RSV에서는 이를 ‘사람들이 그를 밀어붙였다(the people pressed upon him)’는 의미로 번역했다. 이러한 표현으로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기 위해 무리들은 예수의 주변으로 몰려와 바짝 밀착했을 것이다. 발디딜 틈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밀려오는 무리를 피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호숫가에 정박해 있는 배 위에 올라 말씀을 가르치셨다.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을 보면 예수께서 그 배를 보았을 때 그때서야 어부들이 그 배에서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어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그 배를 보았던 그 시점에 어부들은 이미 그 배로부터 나와 있는 상태였다.
한글 개역 성경에 ‘나와서’라고 번역된 단어 ‘아포반테스’에 분리 · 이탈을 의미하는 접두어 ‘아포’가 있음에도 그 앞에 ‘아프’라는 ‘아포’의 변형이 나와 있어 그 의미를 보다 강조해 주고 있다. 어부들이 이미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고기 잡는 일을 끝내고 배를 정박시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는 예수님이 배를 떡워 다시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을 하셨을 때(4절) 그 명령에 대한 순종이 선뜻 내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본 기사에는 예수의 명령을 들은 베드로 일행이 단 한마디도 싫은 내색을 보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순종이 꺼려지고 행하기가 어려운 것까지도 흔쾌히 순종할 때에야 비로소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물을 씻는지라"
‘그물’에 해당하는 단어 ‘닥뒤아’는 동의어 ‘앵피블레스트론’이 투망을 의미하는 단어임에(마 4:18) 반해, 모든 종류의 그물을 통칭하는 일반적 단어이다. 또한 본문에서는 복수 진행형이 사용되어 어부들이 각각 자기의 그물을 씻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5절) 가지고 나갔던 그물들을 씻고 있었던 어부들의 심정은 얼마나 허망하기 그지없었을까?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랄레오-전도자가 전하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보통 해가 떠오른 뒤에는 고기를 많이 잡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그들은 순종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지녀야 할 '자기 부인'의 정신이 암시된다.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레마-나에게 들려지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여기서 나타나는 시몬의 행동은 신의 임재 앞에서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왕상 17:18 ; 사 6:5)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신적 능력이 나타나자, 시몬은 거룩한 분의 임재를 느끼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때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알게 되며,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종들과의 회계와 세상 분쟁이 되심(눅 12:41-53 )
본문 : 눅 12:49
설교 : 성령을 받으라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종들과의 회계와 세상 분쟁이 되심 (눅 12:41-53 )
1. 베드로와 질문(41)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까.
베드로는 자주 그래왔듯이 여기서도 제자들의 대변인이었다.
이렇게 자진하여 의문을 밝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금 베드로는 그리스도께 그가 직접 하신 말씀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주여, 이 말씀은 우리를 의미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을 의미하신 것입니까"하고 베드로는 질문했던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한 답을 주셨다(막 13: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그런데 여기에서는 누구보다도 우선 제자들이 그 말씀에 깊게 관계하기를 지시하시려는 것 같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바로 제게 하심이니이까? 내 심중에 말씀하소서."
2.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심(42-48)
이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에게 대답하셨다. 뒤따르는 이 말씀은 특히 그리스도의 집에서 '청지기'인 사역자들에게 적용 되어진다.
(1) '청지기'로서 그들의 의무와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무엇인가(42절). 그들은 집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 아래서 하나님의 가속들을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사역자들의 그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그들의 일은 하나님의 자녀와 종들에게 적합한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며 저마다의 분수에 맞게 위로와 확신을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지혜있고 진실함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즉 그들의 주인에게 그리고 동료들에게 진실하고 지혜로와야하는 것이다. 사역자는 이 일에 숙련되어야 하며 진실해야 할 것이다.
(2) 그들이 진실하고 지혜롭다면 그들의 행복은 무엇인가.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3절). (1) 그 종은 게으르지 않고 행하는 종이다. (2) 그 종은 공중 설교와 개별적인 적용에 의해 마땅히 해야 할 바대로 그렇게 행하는 종이다. (3) 그 종은 주님이 오셨을 때에 그렇게 행하고 있음을 보여 주게 된다. 이제 그의 행복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에 충성한 종이 승진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보다 크고 보다 높은 자리로 승진하게 될 것이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44절). 주님의 은혜로 충성한 사역자들은 마지막 주님의 날에 그들의 충성의 대가로 더욱 풍성한 은혜를 받을 것이다.
(3) 그들이 악하고 신실하지 못했을 때 그들에게 임할 무서운 벌은 무엇인가(45,46절).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에서 이 모든 것을 살펴 보았으므로 여기서는 다음 몇 가지 사실만 지적해 보고자 한다. (1)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45절). 그리스도의 참으심은 매우 종종 더디 오시는 것으로 오해되어 그의 백성들에게는 낙담이 되고 그의 적들에게는 힘을 더해 주는 것이 되곤 한다. (2)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은 보통 방심과 환락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들 자신의 죄나 이웃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없이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한다.' (3) 모든 악한 자들에게 임할 죽음과 심판은 참으로 무시무시할 것이다. 악한 사역자에게는 특히 더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불시에 임할 것이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46절).
(4) 자기의 할 일을 알고도 이를 행하지 않은 죄와 이에 따르는 벌은 얼마나 심할 것인가(47,48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47절). 즉 보다 지독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고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즉 그의 형벌은 앞의 종에 비해 경감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무지로 인해 지은 죄와 의도적인 죄를 구분해서 벌하는 율법(민 15:29,30)을 암시하는 듯하다. (1)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면 죄가 경감된다. 그러나 이들도 즉 주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자도 맞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도록 노력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적게 맞을뿐인 것이다. 몰랐다는 것은 어느 정도 변명은 되나 전체적으로 죄를 탕감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무지함으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였으며, 그리스도는 그들의 무지를 이유로 그들을 변호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죄를 더 무겁게 만든다. 주인의 뜻을 안 종은 많이 맞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종을 더 무섭게 심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할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앎으로 인해 죄에 대해 극단의 고의성과 업수이 여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다음의 말씀이 부가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무릇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48절).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정신적인 능력을 가진 자들 즉 보다 많은 지식과 학식을 지닌 자, 그리고 보다 성경 말씀에 친숙하고 이와 대화하는 자들에게 더 많이 주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책임 또한 클 것이다.
3. 앞으로 맞게 될 고난을 말씀하심(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49절).
혹자는 이 말씀을 복음 전파, 성령 강림, 거룩한 불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이미 그 불은 붙은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연결되는 말씀으로 보아 이 불은 오히려 박해의 불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불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동자, 박해자들의 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는 그 불이 붙는 것을 허락하실 뿐이다.
박해받는 이들의 시련을 통해 그들을 단련시키는 불로서 허락하실 뿐인 것이다.
(1) 그리스도 자신도 많은 수난도 당해야만 한다.
이미 붙은 이 불속으로 통과해야만 한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50절).
고난은 불과 물로 비유 되어진다(시 66:12).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고난을 모두 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세례라 칭하시는데(마 20:22)이는 이스라엘이 바다 속에서 세례받았듯이 그 자신도 고난에 뿌림을 당하고나 적셔지고 또한 고난속에 잠겨져야 했기 때문이다(고전 10: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고난을 예견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는 받게 될 고난을 이와 같이 부름으로 그 고난을 완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홍수가 아니라 세례인 것이다.
"나는 결코 박해 속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살짝 잠기려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받게 될 고난을 이와 같이 부름으로 고난을 성스럽게 만들고 있다.
세례는 성스러운 의식이기 때문이다. 고난을 향한 그리스도의 발걸음이 어떠한가 보라.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그는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어야할 때를, 그리하여 자신의 고난으로 이루어진 영광스러운 자취를 보게 될 때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가 참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영혼의 산고였다.
이처럼 그의 마음은 인간의 구원과 구속을 바라고 있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 또한 이러한 고난을 감당해야할 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51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그러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넌즈시 비춰 주고 있다.
즉, 복음이 전세계적으로 환영을 받게 되고, 온 민족이 너나없이 이구동성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적어도 그들에게 화평을 주실 것이라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기대는 어긋날 것이며 결과는 정반대로 판명될 것이니 부질없는 기대로 기뻐하지 마라.
너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1) 복음 전파의 결과는 분쟁일 것이다.
복음의 계획과 그 본래의 목적은 사람의 자녀들을 서로 맺어 주고 거룩한 사랑 안에 함께 묶어주는 것으로, 만일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연 그렇게 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복음이 분쟁의 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쟁의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는 강력한 통치자가 정국을 지배하면 백성들은 평화를 누리게 된다.
각 파의 철학자들도,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도 모두 매우 잘 화합한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고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권세를 떠나 하나님께로 향함에 따라 소동이 일어났다.
즉 어떤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자신을 구별하게 되었고 다른이들은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해 분노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에도 분쟁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상호 관용을 배우고 행하게 하기 위하여 이를 허용하셨다.
2) 이러한 분쟁은 개인의 가정에까지 미칠 것이다.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분쟁하리라(53절).
한 가정 내에서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다른 사람은 이를 거부하였을 때 당연히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열심으로 설득하고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앙 속에 계속 머무르는 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으로 자신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책망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신앙의 사람들로 인해 자극되어 이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다.
심지어 어미와 딸들까지도 종교로 인해 갈라설 것이며 믿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친하고 사랑하는 자라 할지라도 믿는 자를 박해자의 손에 기꺼이 넘겨 주려 할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박해의 불길이 야기되는 것을 본다.
즉 죄를 책망하는 말씀이 들려지는 곳마다 박해가 일어났으며 복음의 길에는 늘 적지 않은 소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은 자신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평화를 약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청함을 받은 자 비유(눅 14:7~11)
청함을 받은 자에 대한 비유로서, 겸손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여기서 겸손은 은혜를 받는 자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마 23:5~7 경문 띠를 넓게 하는 것과 옷술을 길게 하고, 높은 자리에 앉는 것
마 23:8~11 진정한 스승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분 밖에 없다.
막 9장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35절에 뭇 사람을 섬기는 자
눅 14:7 높은 자리 택하는 것을 좋아하는 습관을 피하라.
마 22장 혼인잔치의 주인인 하나님께서 낮추는 자를 높여주고, 높이는 자를 낮추신다.
눅 17장 7~10절 종의 진정한 자세,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탕자의 비유에서 자신이 종임을 깨닫는 순간 하늘 나라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 이 기쁨을 알지 못하는 형은 자신을 높이는 자, 자신을 높임 받기를 원하는 자이기에 천국 잔치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
마귀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원하는 자이기에 징계를 받았다.
악해진 사울의 특징 2가지는 월권과 불순종이다.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있을 때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유익한 한 가르침을 제시하시고 계시다. 그는 낯선 자들, 아니 그를 지켜보는 적들과 함께 있을 때 그가 본 그들의 잘못된 점을 꾸짖으시고 그들을 가르칠 기회를 가지셨다. 우리는 우리의 식탁에서 순수하지 못한 어떤 교제가 용납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악의 없는 그 이상의 대화를 해야하며, 우리의 식탁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할 기회를 가지고,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중에 계셨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전혀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다.
1. 상좌에 앉으려는 자들을 꾸짖으심(7-11)
(1) 예수께서는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상좌에 집착하는지를 주목하셨다(7절). 그는 이미, 대체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을 책망하신 적이 있었다(11:43). 본문에서 그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죄를 절실히 느끼게 하신다. 그는 그들이 얼마나 높은 자리를 고르는가를 지적하셨다. 누구든지 들어오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자리 가까이 다가갔다. 평범한 일상생활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켜 보시며, 우리의 일거 일동을 주목하신다.
(2)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야심을 가진자들이 종종 수치를 당하고 밀려나는 대신 겸손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 있던 자들이 그 겸손으로 존경을 받게 된 사실을 주목하셨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강등되었을 것이며, 훨씬 고귀한 자에게 자리를 내어 주기 위해 내려오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8,9절). 세상적인 지위에 관한 것 뿐 아니라 개인의 장점과 재능에 있어서도 우리보다 훨씬 더 높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고 스스로 교만한 생각을 자제해야 한다. 잔치의 주인이 자기의 손님들을 안내하면서, 더 높은 사람이 마땅히 앉아야 할 자리에 앉지 못한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은 상좌를 차지한 더 낮은 자에게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고 말할 것이다. 자존심은 수치를 당할 것이며, 결국 낮아지고 말 것이다.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를 만족해 하는 사람들이 발탁될 것이다(10절). 가서 말석에 앉으라. 당신을 초대한 친구의 손님들은 당연히 당신보다 더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당신은 벗이여 올라 앉으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높이 올라가는 길은 낮게 시작하는 것이다.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그들은 당신을 존귀한 자로 여길 것이다. 영광은 어둠에서 비칠 때 도리어 더 빛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당신을 겸손한 자로 볼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가장 큰 명예이다. 랍비중에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어떤 비유를 들고 있다. "세 사람이 잔치에 청함을 받았다. 한 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며 나는 제후이니까 하였다. 다른 사람이 그 다음에 앉으며, 나는 현자이니까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가장 낮은 곳에 앉으며, 나는 비천한 자이니까 하였다. 왕은 비천한 자를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고 제후를 가장 낮은 자리에 앉혔다."
(3)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여 우리 모두에게 높은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교훈을 하시고 계시다. 자존심과 야심은 사람들 앞에 명예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과 자기 부정은 정말로 명예로운 것이다. 이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11절).
2. 잔치의 주인에 대한 책망(12-14)
예수께서는 잔치의 주인이 부자를 그렇게 많이 청한 것에 대해 책망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가난한 자를 초대했어야 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화려한 집안 치장에 사용하기 보다는 자선행위에 쓰는 것이 더 귀중하다는 것을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다.
(1) "부유한 자를 대접하려고 하지마라. 즉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12절). 이 말은 친척과 이웃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하는 대접을 금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초청이 습관이 되어서는 안된다. 부자를 위한 어떤 잔치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많은 식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자랑하지 마라. 단지 나타내기 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자기의 가족을 희생시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다시 보상받을 것을 생각하지 마라. 우리 구주께서 부자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신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너희는 보통 대접해 준 자들에게 다시 초청받을 기대를 가지고 대접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너희에게 갚음이 될 것이다."
(2) 먼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한다(13, 14절). 너희가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13절). 그러한 자들은 끼니를 이을 것이 아무것도 없거나, 생계를 위해 일할 수도 없다. 이 사람들은 자선의 대상이다. 그들은 생활 필수품이 없다. 그것들을 공급해 주라. 그러면 그들은 너희에게 기도로 보답할 것이다. 그들은 떠나서도 너희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갚을 수 없다하여 손해 보았다고 말하지 마라. 이는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기 때문이다. "자선 행위는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이 최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보상을 결코 잃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오랜 항해자가 가장 부유한 자가 되어 돌아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7 Now he told a parable to those who were invited, when he marked how they chose the places of honor, saying to them,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8 "When you are invited by any one to a marriage feast, do not sit down in a place of honor, lest a more eminent man than you be invited by him;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9 and he who invited you both will come and say to you, 'Give place to this man,' and then you will begin with shame to take the lowest place.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0 But when you are invited, go and sit in the lowest place, so that when your host comes he may say to you, 'Friend, go up higher'; then you will be honored in the presence of all who sit at table with you.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1 For every one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and h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누가복음 16장 12절 해석
누가복음 16장 12절 :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 주겠느냐?
10절에서 12절까지 각절의 내용들은 표현만 약간씩 다를 뿐 매우 긴밀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즉 어떠한 것에 ‘충성’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10절에서는 ‘지극히 작은 것’ 에, 11절에서는 ‘불의한 재물’ 에, 그리고 본절에서는 ‘남의 것’에 충성해야 한다는 교훈이 주어진다.
여기서 ‘남의 것', 즉 ‘알로트리오’ 란 청지기의 기본적 자세와 연관이 되는 표현이다. 청지기는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것을 관리하는 자이다. 그리고 위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으며 본절의 ‘남의 것’에 병행을 이루는 지극히 작은 것, 불의한 것 둥은 세상 재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본절에서 ‘남의 것’ 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이러한 재물은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닌, 단지 청지기로서 관리해야 하는 하나의 대상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바로 물질을 포함한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소유자가 아닌, 관리자라는 인식은 청지기가 지녀야 하는 기본 자세이다. 그러므로 ‘남의 것’은 청지기직의 성격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므나의 비유(눅 9: 11-27) 와 달란트 비유(마 25: 14-30) 를 통해도 재물 및 소유가 본인의 것이 아닌 타인, 곧 주인의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예수님은 거듭하여 재물에 대한 성실한 관리, 즉 주인에 대한 충성을 요청하고 있다.
여기서 ‘너희의 것’, 즉 ‘토 휘메테론’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10-12절에서 작은 것과 큰 것(10절), 불의의 재물과 참된 것(11절), 그리고 남의 것과 너희의 것(12절)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맥락으로 보아 결국 ‘너희 것’이란 문장 구조적으로는 큰 것이며, 참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언어학적으로는 ‘너희의 것’으로 번역된 ‘휘메테론’이 ‘너희에게 할당된(allotted to you)' 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너회의 것’이란 세상에서는 아직 소유하지 못하고 장차 하늘에서 받게 될 하나님 나라의 상급, 세상의 재물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세상에서 위탁된 것을 충성되게 관리하지 않으면, 우리 각자의 몫으로 할당되어 장차 천국에서 받기로 되어 있는 것도 결국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본절의 주된 메시지이다.
한편 ‘누가’로 번역된 의문사 ‘티스’는 일차적으로는 청지기에게 일을 일을 맡기는 주인을 가리키나,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맡기신 분이며, 크고 참되고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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