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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갚으신다”는

by 은총가득 2020. 11. 21.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 주간에도 말씀의 울타리 안에서 샬롬을 누리셨는지요?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사례를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사무엘서 시작 시점인,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사무엘서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사무엘하 22장 25절에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내게 갚으셨도다.”는 다윗의 고백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사무엘서 시작과 끝에 주신 말씀의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매우 중요함을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사무엘하 22장 26절부터 27절까지 말씀을 중심으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갚으신다는 다윗의 고백이 소개되었습니다. 그 사례들을 자세하게 소개하였습니다.

자비한 사람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으로 나타내시며,

완전한 사람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사람에게는, 주의 깨끗함을 보이신다고 했습니다.

사악한 사람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신다고 했습니다.

 

자비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세운 언약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께서도 언약에 충실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삶을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께서도 관심과 초점을 맞추어주신다고 합니다.

깨끗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자신의 경험, 지식, 생각이 삶의 기준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삶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삶의 기준이 말씀인 사람은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께서도 말씀이 능력이 되어 나타나도록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사악한 사람은, 악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에는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갚아주신다(삼하22:25)는 말씀은,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도 아시고, 멸시하는 것도 아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신다면, 내 의대로 갚아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계1: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사례가 계시록 2장부터 3장에 소개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에 대한 사례입니다.


오늘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세기 당시 교회는 건물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오늘 전할 말씀은 계시록 2장 1절부터 5절까지를 중심으로, 제목은 “(무엇)을 아노라입니다. (무엇)은 긍정적인 삶과 부정적인 삶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안다라는 동사 헬라어 ‘에이도’는 ‘보다, 알다, 경험하다’는 뜻으로 보상과 징벌을 전제로 하는 단어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칭찬받을 삶을 살아온 것도 아시고, 책망 받을 삶을 살아온 것도 다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안다고 말씀하신 것은, 내 의대로 갚으신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칭찬받을 삶을 산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은 삯(대가)으로 갚으시고, 책망 받을 삶을 산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삯(대가)으로 갚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 대하여 칭찬받을 삶을 산 것과, 책망 받을 삶을 산 것에 대하여 모두 다 일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의대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 중 가장 먼저 소개된 에베소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에 있던 교회였습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편지를 쓰고 있을 때, 당시 에베소는 약 이십만 명의 인구가 살던 대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곳 에베소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이곳이 아시아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의 총본부가 되었습니다.

 

1. 칭찬받을 삶(2:2-3) - 선을 선택한 삶

 

계시록 2장에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내용들이 자세하게 소개되었습니다(계2:2-3). 이는 그들의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계시록 2장 2절부터 3절까지 말씀입니다.

 

계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첫째, 네 행위, 수고, 네 인내한 삶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계시록 2장 2절과 3절의 말씀을 이해하기위해서는 일세기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시는 로마황제숭배를 강요당하던 시기였습니다. 우상숭배를 강요당하던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진리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비대면 예배를 강요당하고 있는 것과, 예배드리는 인원수 제안을 받는 경우도 비슷합니다. 물론 방법에 차이는 있지만, 국가에 의해 예배가 통제받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도요한은 노년에 에베소지방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황제숭배를 거부하며, 오직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예수그리스도뿐이시라고 증거하다가,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으며,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낮에는 발에 차꼬를 차고 노동에 시달렸으며, 밤에는 돌로 뒤덮인 맨바닥에 몸을 의탁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하늘의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주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행위는, 로마의 핍박 속에서 목숨을 건 믿음의 행위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행위들은 하나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 겪게 되는 여러 가지 핍박과 고통의 행위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이 처한 상황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통하여 비대면 예배가 강요당하고 있고, 대면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서도 인원수가 제한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부분 언론들은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기사를 전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여론 몰이로 국민들이 교회를 향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국가가 코로나 확장에 대한 책임을 교회로 전가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충돌하지 않고 지혜롭게 잘 대처하여 믿음의 행위들이 포기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수고가 있었음을 다 안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수고는,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아니하고 생명살리는 일을 위해 쓰임 받은 수고들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사도요한이 로마인에 의해 끌려가 밧모에 유배된 사실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수고는 단순히 땀 조금 흘린 수고가 아닙니다. 자신들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천국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한 수고입니다. 생명 살리는 일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건 수고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멈추지 아니한 환경속에서 예배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지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마음만은 포기하면 안됩니다. 항상 예배를 우선시 하기위한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소망의 인내가 있었음을 다 안다고 하십니다. 당시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인내는 잠시 조금 참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목숨을 건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목숨 건 인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생명을 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로마의 권력도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생명 살리는 일은 그저 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건 인내가 필요합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이 나약해지면, 로마권력의 위협아래 생명살리는 일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이고, 마음이 나약해지면 주의 일을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순간에는 인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주의 일을 하다보면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환경으로 인하여, 때로는 사람들로 인하여, 때로는 어떤 일로 인하여 시험 당할 때도 있고, 상처받을 때도 있고, 힘들어 그만둘까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상항에서 인내가 없으면 포기하게 됩니다. 예배를 드리는 일과, 생명 살리는 일은,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고, 보람된 일이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둘째,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삶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교회와 연관하여 악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말씀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하고, 끌리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말씀을 방해하는 악한 자들과 타협하지도, 용납하지도 아니함을 다 안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자들과 타협하거나, 용납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관용도 아닙니다. 유약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지 아니한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타협하거나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도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악은 나에게나 교회 공동체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가 장기화되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지치기도 하고, 자기 자신과 타협하기도 하고, 예배를 방해하는 세력들과 쉽게 타협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은 유약한 모습입니다.

 

비대면 예배를 드린다하더라고 마음만은 주님께 집중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모습은, 말씀을 듣다가 화장실 가기도 하고, 음식을 먹기도 하고, 전화를 받기도 하고, 자신의 일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예배를 드린다고 합리화시키는 행동이고, 타협하는 행동들입니다.

 

셋째,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삶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교회와 연관하여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의 거짓된 것은 어떤 것일까요? 로마권력에 타협을 부추긴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비진리에 마음 빼앗기게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게 하는 것, 교회 안에 세상적인 문화가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거짓선생들을 쫓아냈습니다. 거짓 선생을 구별하는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외관상으로 표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있는 이리 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깨어있어야만 구별이 됩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은 그들이 말씀으로 깨어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으로 굳게 서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를 하나님은 다 안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들도 말씀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바른 길을 갈수 있습니다.

 

넷째,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삶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예수믿는 것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 것 때문에 로마로부터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각자 제 몫을 잘 감당함을 다 안다고 하십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말씀 붙잡고 참고 견디었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주변 환경과 상황이 신앙생활에 위협을 가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는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핑계로 교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보다, 오히려 교회를 등한시 하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교회에 발걸음이 멈추어지고, 교회에 관심이 멀어진다면 이는 불행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앞서 소개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았습니다. 이는 성도들의 의대로 주님께서 갚아주신 것입니다. 선을 선택하였으니 선으로 갚아주신 것입니다.

 

2. 책망 받을 삶(2:4-5)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책망도 동시에 받았습니다. 다윗이 악을 행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나단선지자를 보내어 책망한 사례와 같습니다. 이 또한 그들의 의대로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 합니다. 계시록 2장 4절부터 5절까지 말씀입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처음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에 대하여 품었던 처음 열심과 사랑이 식었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식었습니다. 사랑이 식어짐으로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주지 못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부로서 위험에 처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다른 것을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성도들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주님을 향한 뜨거움과, 교회를 향한 뜨거움과, 생명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향한 사랑이, 생명을 사랑함이 식은 지 이미 오래 된 것 같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책망 받을 삶에 대해서는 해결방법도 함께 제시되었습니다.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계시록 2장 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일세기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나, 오늘 우리들이나, 처음 열심,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책망받을 당시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상황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직분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마지못해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변질입니다.

 

주의 일은 사랑으로,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직분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마지못해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안다”고 말씀하실 때는 삯을 주시겠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선을 선택한 삶에 대해서는 그에 합당한 삯을 받을 것이고, 악을 선택한 삶에 대해서는 그에 합당한 삯을 받을 것입니다. 악의 결과로 받을 삯은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계시록 2장 5절입니다.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께서는 내 의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받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통회하여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모두는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고, 주님께서 나의 모든 삶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에 근거하면, 주를 위해 하는 일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을 위해 드려지는 것도, 맡은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열심히 교회 일을 위해 시간 보내는 것도, 생명살리는 일에 우선하여 사는 것도,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주님의 일, 생명 살리는 일은 생명을 사랑함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하지 아니한 그 어떤 결과도 의미 없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는 칭찬도 있었지만, 책망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오늘 나는 주님의 시선에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까요?

 

오늘날 시대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예배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도 다 아십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을 향해 예배를 드리려는 성도들의 마음도 다 아십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마음을 더 집중시켜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하는 마음도 다 아십니다.

 

이런 모습을 주님께서 다 아시기에, 우리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처럼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책망이 따르지 않도록 말씀이 기준이 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몸부림 쳐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선을 선택한다면 선으로, 악을 선택한다면 악으로, 선과 악을 동시에 선택한다면 선과 악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다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내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항상 선을 선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주일 전해드린 말씀을 잠시 요약해보겠습니다.

계시록 2장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제목은 “(무엇)을 아노라였습니다. 주님께서 내 삶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은, 내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소아시아 교회 중 가장 먼저 소개된에베소인내라는 뜻입니다. 우상의 도시 에베소에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내가 요구되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인내는 필수적입니다. 바울도 주를 섬길 때,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섬겼다(20:19)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들이 선을 선택한 삶을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선택했을 때, 안다고 하는 것만큼 위로의 말씀이 없고, 악을 선택했을 때, 안다고 하는 것만큼 두려운 말씀도 없습니다. 내 의대로, 내가 살아온 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첫째, “네 행위, 수고, 네 인내한 삶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네 행위, 수고, 네 인내한 삶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로마의 핍박속에서 목숨건 믿음의 행위들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 겪게 된 여러 가지 핍박과 고통의 행위들입니다. 이런 삶을 주님께서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안다는 말씀은 많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삶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자들은, 예배드리지 못하게 방해하고,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예배보다, 말씀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가지게 미혹하였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이들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삶을 주님께서 다 안다고 하셨으니 그들에게는 많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셋째,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삶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자칭사도라 하는 자들은, 당시 로마와 타협을 유도하던 지도자들입니다. 우상숭배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게 하던 자들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이들의 설득에 미혹되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깨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굳게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주님께서 다 안다고 하셨으니 그들에게는 많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넷째,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삶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중에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각자 제 몫을 잘 감당했던 삶을 주님께서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처했던 상황을 상세하게 다 열거하시면서 안다고 하신 것은 그들에게는 큰 위로였습니다. 그들이 선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도 주님께서 다 안다고 하십니다.

신앙 생활하는 것 때문에 손해보는 것도 주님께서 다 안다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내 의대로 다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에 용기 잃지 말고, 좌절이나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달려가십시다.

 

오늘 전할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8절부터 11절까지를 중심으로, 제목은 안다입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안다는 말씀이 9절에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주님을 실망시키지 아니하여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일세기 당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로마 압제 아래서 신앙생활의 압박을 받을 때, 자기희생적인 삶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서머나 지명의 의미는 몰약이라는 뜻입니다. 몰약은 향기를 발합니다. 그대로 있을 때보다, 부서질 때 더 많은 향기를 발합니다. 잘게 부서지면 부서질수록 더 진한 향기를 발합니다. 부서진다는 의미는 자기희생적인 삶을 말합니다. 성도들의 희생적인 삶은 진한 향기를 발합니다. 서머나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5:14)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된 삶을 살려면 반드시 자기희생적인 삶이 따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희생이 따르면 손해가 된다는 생각은, 말씀을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나, 비그리스도인들의 생각입니다. 내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몰약은 죽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체에 몰약과 향료(요12:3)를 같이 넣어둡니다. 이들에게 몰약은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압니다. 서머나 교회의 뜻이 몰약이라는 것은 순교적 교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1.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크게 두 가지 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환난과 궁핍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9절 상반절입니다.

 

2:9상,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섬기는 것 때문에, 생명 살리는 일 때문에,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 것 때문에, 환난과 궁핍을 당할 수 있습니다. 환난과 궁핍을 당할 때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로 나누어집니다.

받아들이는 자는, 환난과 궁핍을 당하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실상은 부요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내 의대로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거부하는 자는, 환난과 궁핍을 피하기 때문에 부유하게 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궁핍하게 됩니다. 내 의대로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지명의 의미인 몰약이라는 뜻대로 환난과 궁핍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유한 자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당한 환난과 궁핍은, 그들의 욕심 때문에 당한 환난과 궁핍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이름 때문에 당한 환난과 궁핍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잘 믿어보려고 한 것 때문에, 믿음생활 잘 하려고 한 것 때문에, 잘 섬기려고 한 것 때문에 당한 환난과 궁핍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로마 지배하에 황제숭배사상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택한다면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하고, 화형에 처해지기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당했던 환난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었습니다. 다니던 직장에서도 쫓겨나 일자리를 잃었고, 상인조합에 가입을 할 수 없어 물건을 파는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당했던 궁핍이었습니다.

 

서머나교회 성도들이 세상풍조를 따라 신앙에 타협이 있었다면 무사히 지낼 수 있었고, 환난과 궁핍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굴하게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켜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도 믿음대로 살려고 하다보면 일세기 당시 서머나 교회 성도들처럼 환난과 궁핍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통하여 직장을 잃게 되고, 수입이 줄어들고 하는 상황에서도 교회를 섬기고, 생명살리는 일에 동참하다보면 환난과 궁핍을 당할 수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번 돈은 자신을 위해 다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쉬는 날도 없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비그리스도인들보다 더 궁핍에 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환난과 궁핍을 다 안다고 하십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굳게 지키려고 몸부림 치는 것을 다 안다고 하십니다.

 

이들에게 주님께서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삶에 대해 다 아시는 주님께서 내 의대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9절 하반절입니다.

 

2:9하,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9절 상반절에 의하면, 서머나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것은, 환난과 궁핍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9절 하반절에 의하면, 서머나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것은, 환난과 궁핍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훼방까지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이 무엇일까요?

서머나 지역은 상업지역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같은 동족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법정에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회당라고 자처하였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와 타협한 유대인들이 주님께 신실한 유대인들을 로마에 고소하였습니다. 이들을 주님께서는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것도 알고, 악한 것도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2. 선을 선택한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10절입니다.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첫째,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될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뒤에는 반드시 영광이 나타납니다. 십자가 뒤에 부활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끝이 아니다. 반드시 보상이 따릅니다.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 의대로 갚아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에게 신실한 삶을 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불러주시고 사명을 주신 그리스도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일하라는 의미입니다.

 

3.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위로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10절 하반절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리하면인과접속사를 사용하였습니다. 앞 구절에 제시된 내용들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두려움 없이 나아가기만 하면, 결국에는 믿음의 승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관을 받게 됩니다. 내 의대로 행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관을 받게 될 나의 모습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 안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자칭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삶을 자세히 열거하며 안다고 하신 것은, 그들의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각자의 상황에 따라 ‘OOO 야, 내가 다 안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네가 신앙생활 잘 하려고 하는 것 때문에 당하는 환난을 다 안다!

네가 신앙생활 잘 하려고 하는 것 때문에 당하는 궁핍을 다 안다!

네가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침도 다 안다!

제대로 신앙생활 해보려고 할 때 훼방 받는 것도 다 안다! 이렇게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사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대로 사업하려면, 주일날 문 닫아야 하고, 정직하게 해야 합니다.

직장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대로 직장생활하려면 아무리 회사가 바빠도 주일날 출근을 거부해야 하고, 수요일 잔업을 거부해야 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회식자리에서 술을 권할 때 거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직장 상사나 동료들로부터 욕을 먹기도 하고, 눈치를 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환난입니다.

 

특근, 잔업을 거부하면 수입이 줄어들기도 하고, 인사고가점수가 낮아 월급이 적게 인상될 수도 있습니다. 또 자신의 수입에서 십일조, 감사, 여러 가지 헌금을 드리다보면 금전적으로 궁핍함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을 할 때나 직장생활을 할 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비그리스도인의 비방도 따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안다고 하십니다. 안다는 것은 내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앞서 주일 전해드린 말씀을 다시 한 번 요약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소개에베소인내라는 뜻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좋은 일도 있지만 힘든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일세기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로마황제숭배를 강요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진리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많은 인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끝까지 인내하여 신앙을 지킨 사람은 칭찬받았고, 인내하지 못하여 중도에 로마와 타협한 사람은 책망 받았습니다. 칭찬과 책망은 자신의 의대로 나타난 결과들입니다.

두 번째 소개서머나몰약이라는 뜻입니다.

몰약은 매우 아름다운 향기를 발합니다. 덩어리가 부서지면 부서질수록 더욱 많은 향기를 발합니다. 부서진다는 것은 자기희생적인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막8:34; 눅9:23)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희생없이 불가능합니다.

 

서머나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많은 희생과 손해가 따르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고도 따랐습니다. 서머나 교회에서 안디바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를 바라본 성도들은 많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로마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당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환난과 궁핍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하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환난입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잃기도 하고, 상인조합에 가입할 수 없어,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한 것 때문에 당한 궁핍입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려는 이유 때문에 환난과 궁핍을 당하였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소요하고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이보다 더 큰 부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환난과 궁핍이 따를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직장에서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주일날 근무를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장기화된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수입이 감소한 상황에서도, 교회에 각종 헌금을 드려야 하고, 주일날도 교회에서 섬기는 일 때문에 육신이 피곤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다는 말씀을 통하여 위로받고, “내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약속 때문에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소개버가모 교회에 관한 내용입니다.

계시록 2장 12절부터 17절까지 말씀을 중심으로, 안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 성도들에게안다고 하신 것은, 내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삶의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내 의대로 갚아주십니다.

 

세 번째 소개버가모 지명의 의미는, ‘망대’‘높여졌다’는 뜻입니다. 버가모에는 세계칠대불가사의 중 하나인 제우스 신전이 높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해발 240미터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전의 외양이 보좌같이 보였다고 하여 사단의 권자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버가모는 종교적으로 ‘이중결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버가모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도 사랑하며, 이방신도 사랑한 자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처럼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그리스도인도 있었지만, 신앙의 정조를 잃어버리고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삶이 예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한 이중결혼입니다.

 

버가모의 위치는 서머나에서 북방 약96km쯤 되는 지점에 위치한 내륙도시입니다. 이곳은 소아시아 지방의 중심지였으며, 당시 황제숭배가 가장 철저하게 장려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선을 선택한 것은, 칭찬으로, 악을 선택한 것은 책망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1. 칭찬받을 만한 신앙생활입니다.

 

먼저 버가모 교회 성도들이,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신앙생활이 두 가지 소개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2: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첫째,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은 것을 칭찬받았습니다.

 

13절상,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큰 제우스 신전이 높이 서 있는 버가모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려고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다고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2장 21절에, 요엘 2장 28절부터 29절 말씀을 인용하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능력입니다.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예수님의 이름과 그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살아남습니다. 예수의 이름과 말씀을 굳게 붙잡은 사람은, 흔들리더라도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능력 있는 예수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얼마나 굳게 붙잡고 있습니까? 쉽게 흔들리고, 넘어지는 것은 능력 있는 예수의 이름을 붙잡지 않고, 세상 그 무엇을 붙잡으려고 하기 때문은 아닌지요? 이 땅에서 예수의 이름보다 더 귀하고 높은 이름은 없습니다.

 

찬송가 80장(통101장) 1절 가사입니다.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주 나시기 전 지으신 구주의 이름 예수

 

예수의 이름이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이름으로 병자들을 고치기도 하고, 능력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성전에 올라갈 때,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나세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3:6)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킬 때 일어나 걸었습니다. 예수이름이 능력임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우리도 능력 있는 예수이름을 사용하여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장기화되는 지금의 현실을 보십시오. 예수의 이름을 굳게 붙잡지 아니하고, 그분의 말씀을 굳게 붙잡지 아니한다면 쉽게 흔들리고, 넘어지고, 타협하게 됩니다.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삶이 고달프다고 여겨지십니까?

믿음 생활 하는 것이 힘들다고 느껴지십니까?

내 마음에 샬롬을 잃어버렸습니까?

능력이 있는 예수의 이름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한 것을 칭찬받았습니다.

 

13절하,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 성도들이 사탄의 권좌(2:13)가 있는 곳에서, 칭찬받을 신앙 생활한 것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고, 핍박이 심하였겠습니까?

 

실제로 버가모 교회에서 안디바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것을 본 성도들은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악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지킨다면 안디바와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받았습니다.

 

버가모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한 것을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그들의 의대로 반드시 긍정적 삯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기도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에도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자신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하던 대로 기도했습니다. 믿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의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높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높여드리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위해 목숨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주님께서 알고 내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약속입니다.

 

2. 책망 받을 만한 신앙생활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 성도들이 선을 선택하여 칭찬받을 삶도 아시지만, 반대로 악을 선택하여 책망 받을 삶도 아신다고 합니다. 본문 14절과 15절입니다.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본문 14절과 15절에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삶에 대하여 책망 받았습니다.

 

발람의 교훈에 대해서는 민수기 22장부터 25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와 이교도 여자와의 혼인을 부추긴 것입니다.

 

버가모에서는 그리스도와 이교를 혼합해도 무방하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말씀의 기초가 약하여 쉽게 타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주님의 책망입니다.

 

오늘날도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초상집이나 제사 집에 갔을 때, 우상 앞에 절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인에 대한 예의, 그리고 상주에 대한 예의라고 하며 합리화시키는 것은 타협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자 중에서도 회사에서 고사를 지낼 때 참여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적당히 타협합니다. 주님보다 사람을 더 크게 의식한 이들에게는 책망이 따를 것입니다.

 

코로나 19가 장기화되면서 신앙생활에 긴장이 풀릴 수도 있습니다. 비대면 예배가 익숙해져 모이는 일에도 등한시 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합리화 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위험합니다.

 

둘째,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삶에 대하여 책망받았습니다.

 

니골라 당은, 발람이나 그를 추종하는 자들과 같고, 이세벨이나 그를 추종하는 자들과도 같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는 버가모에 가이사를 위한 신당을 세웠습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향을 피우게 하고, 가이사가 주인이시라고 부르짖으라고 강요받았습니다. 버가모 교회 일부 성도들은 제사자리에 참여하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고, 분향을 해도 마음속으로는 우상을 안 섬긴다고 하면 된다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니골라 당의 교훈이 세상과 타협하게 만들고, 우상과 타협하게 만든 교훈입니다. 이런 삶이 이중결혼입니다.

 

오늘날 직장에서 고사를 지낼 때, 가정에서 제사를 지낼 때, 참여하여 우상 앞에 절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우상을 안 섬긴다고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책망한 두 가지 삶에 대해서는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하라입니다. 이는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회복시켜주시겠다는 주님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는 길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따르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중생활을 청산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따라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이 이기는 삶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선을 선택하여 주님으로부터 두 가지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은 것을 칭찬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한 것을 칭찬받았습니다.

그들의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뜻입니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선을 선택하여 주님으로부터 두 가지 칭찬을 받았으나, 악을 선택하여 두 가지 책망도 받았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삶에 대하여 책망 받았습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삶에 대하여 책망 받았습니다.

그들의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는 이중결혼에 대하여 책망 받은 것에 대해서는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세상과 타협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회복시켜주시겠다는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생각해보십시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이 주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했던 그 모습이, 오늘 나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십시다.

 


매주일 계속해서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안다는 단어와 내 의대로 라는 단어입니다. 안다는 단어와 내 의대로 라는 두 단어만 잊지 않고, 삶속에서 늘 기억하고 산다면, 삶의 브레이크가 잘 작동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여 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뜻입니다.

계시록에 소개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를 대표합니다. 우리 모두도 일곱 교회에 다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하신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연관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 전해드린 말씀을 다시 한 번 요약해보겠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첫 번째 소개에베소인내라는 뜻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힘든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일세기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로마황제숭배를 강요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진리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많은 인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끝까지 인내하여 신앙을 지킨 사람은 칭찬받았고, 인내하지 못하여 중도에 로마와 타협한 사람은 책망 받았습니다. 칭찬과 책망은 자신의 의대로 나타난 결과들입니다.

 

두 번째 소개서머나몰약이라는 뜻입니다.

몰약은 매우 아름다운 향기를 발합니다. 덩어리가 부서지면 부서질수록 더욱 많은 향기를 발합니다. 부서진다는 것은 자기희생적인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막8:34; 눅9:23)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희생없이 불가능합니다.

 

서머나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많은 희생과 손해가 따르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고도 따랐습니다. 서머나 교회에서 지도자 안디바가 순교를 당하였다고 소개되었습니다. 이를 바라본 성도들은 많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로마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당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환난과 궁핍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하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가 당하는 환난입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잃기도 하고, 상인조합에 가입할 수 없어,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한 것 때문에 당한 궁핍입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려는 이유 때문에 환난과 궁핍을 당하였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소요하고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이보다 더 큰 부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환난과 궁핍이 따를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직장에서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주일날 근무를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장기화된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수입이 감소한 상황에서도, 교회에 각종 헌금을 드려야 하고, 주일날도 교회에서 섬기는 일 때문에 육신이 피곤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다는 말씀을 통하여 위로받고, “내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약속 때문에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소개버가모‘망대’‘높여졌다’는 뜻입니다.

버가모에는 세계칠대불가사의 중 하나인 제우스 신전이 높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해발 240m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전의 외양이 보좌같이 보였다고 하여 사단의 권자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버가모는 종교적으로 ‘이중결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버가모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도 사랑하며, 이방신도 사랑한 자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처럼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그리스도인도 있었지만, 신앙의 정조를 잃어버리고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삶이 예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한 이중결혼입니다.

 

오늘은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네 번째 소개두아디라 교회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문은 계시록 2장 18절부터 23절까지 말씀을 중심으로, 제목은 19절에 근거하여 아노니입니다.

 

두아디라 지명이 소개되면 성경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지요? 자주장사 루디아입니다. 루디아가 두아디라 출신입니다.

 

루디아는 어느날 빌립보 지방에서 사도바울을 만났습니다. 자주장사 루디아와 어느 간수의 집안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심하였습니다. 이들이 유럽교회의 모태, 즉 유럽 땅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가 됩니다. 사도행전 16장 12절부터 15절까지 내용입니다.

 

행16: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행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행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행16: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소아시아 지역의 네 번째 소개된 두아디라 지명의 의미는, ‘희생제물’이라는 뜻입니다.

두아디라 여인 루디아가 희생제물이 되어, 유럽에 복음화 되는 일에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한사람 희생제물이 많은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반대로 한 여인 이세벨(계2:20)을 용납함으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행음하고, 우상제물을 먹음으로 많은 악영향이 나타났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소개된 일곱 교회 중, 네 번째 소개된 두아디라 교회는 크게 두 부류의 삶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루디아처럼 자기희생을 몸소 실천하여 칭찬받은 사람과, 이세벨처럼 자기희생을 거부하여 책망받은 사람으로 나누어졌습니다.

 

1. 자기희생을 몸소 실천하여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사람들입니다.

 

자기희생을 몸소 실천한 사람들은, 루디아처럼 주님의 의도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사람은, 선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19절입니다.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았다는 것은,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칭찬받은 내용은 크게 다섯 가지로 소개되었습니다.

 

첫째, 사업입니다.

 

두아디라는 버가모로부터 남동쪽으로 약64km 쯤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번창한 상업도시였습니다. 주요 특산품은 옷감과 구리였습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상인조합이 결성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출세를 하고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상인조합에 가입은 필수조건이었습니다.

 

조합원이 되면 사업은 마음껏 할 수 있는데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강요당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의식(고사)에 참여하여야 하고, 우상의 제단에 바쳐진 음식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업을 하던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상인조합에 가입하지 아니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주님께서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사업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참석하기 위해서는 가게 문을 닫아야 합니다. 시장이나 상가에서 내 집만 가게 문을 받으면 주변 상점들이 눈치를 주기도 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두아디라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희생이 따랐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려면 손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부지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단코 손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안다는 것은 보상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을 실천하기위해 당하는 희생은 주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셋째, 믿음입니다.

 

두아디라에서 믿음을 지키려면 많은 피해가 따랐습니다. 상인조합에 가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지키면 손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사업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나, 직장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예배에 우선해야 하고, 직장 생활하는 사람은, 주일날 특근이나 수요일 잔업을 해야 할 때, 믿음 지키기 위해 예배 참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섬김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비그리스도인들처럼 취함의 삶은 매우 쉽지만, 섬김의 삶은 매우 어렵습니다. 누구든지 취함의 삶은 유익이 되지만 섬김의 삶은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섬김의 삶이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삶으로 칭찬받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변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성도들은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하려면 희생이 따릅니다.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섬김의 삶이 손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섬김의 자리보다 취함의 자리에 머물 것이고, 섬김의 삶이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섬김의 자리에 머물 것입니다.

 

다섯째, 인내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인내 없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신앙생활은 인내가 절대적입니다.

 

씨앗을 뿌리고 인내해야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가 있어야 아름다운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먹는 음식준비도,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일정시간 인내로 기다려야 밥이 되고, 반찬이 만들어집니다.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모두 아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 이런 칭찬을 받기위해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가지고 신앙생활에 몸부림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내 의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2. 자기희생을 거부하여 책망 받은 사람들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칭찬받은 사람도 있지만, 책망 받은 사람도 있다고 소개합니다. 책망 받은 사람의 특징은 자기희생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자기희생을 거부한 사람들은, 주님의 의도와는 반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책망 받은 것은 자신들이 악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 20절입니다.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이세벨은 남편이었던 아합 왕을 꾀어 바알숭배를 강요한 여인입니다(왕상16:30-32).

 

왕상16: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왕상16: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왕상16: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을 용납하였다고 한 것은, 이세벨이 남편 아합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김보다, 바알을 숭배하게 한 것처럼(왕상16:31-33), 두아디라 교회 성도 중에서 세상의 의식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의식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자들은, 세상의 외적인 의식들과 예식들을 따른다고 하여 신앙생활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믿음이 약한 일부사람들이 동조하여 자연스럽게 이교숭배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이세벨을 용납한 것은,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에게 행음하게 하고, 우상제물을 먹게 한 것을 말합니다.

 

20절에서 말하는 행음은, 사람간의 성윤리를 말하기보다, 하나님을 저버린 행동을 말합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아디라의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자기희생을 거부했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이 행음을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유익 때문에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우상을 선택하였습니다.

 

둘째, 자복, 통회를 거부한 것입니다. 21절입니다.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이들은 세상의 일시적인 유익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께서 자복하고 통회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21절입니다.

 

3. 너희 각 사람이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2절과 23절에 소개되었습니다.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너희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은, 사무엘에서 다윗이 말한대로 내 의대로(삼하22:25) 깊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선을 선택한 것은 칭찬으로, 악을 선택한 것은 책망으로 나타날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첫째, 그를 침상에 던진다고 하셨습니다(22절)

 

침상에 던져진다는 것은, 행동의 부자유스러움을 말합니다. 자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임을 경고한 것입니다.

 

둘째, 악에 동참한 사람도 큰 환난에 던진다고 하셨습니다(22절).

 

악을 부추긴 사람이나 동참한 자들도 질병이나 빈곤을 겪게 될 것임을 경고하였습니다.

 

셋째,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인다고 하셨습니다(23절).

 

대가 끊어질 것임을 경고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그들의 의대로결과가 나타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악을 선택하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내가 쌓은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금방 무너지게 됩니다.

내가 돈을 벌려고 발버둥 쳐도,

내가 건강을 지키려고 발버둥 쳐도,

내 생각으로, 내 뜻대로 해보려고 발버둥 쳐도,

하나님이 후~~~ 불어버리면, 한순간에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집니다.

말씀에 순종하기위해 애쓰는 자들이 있고, 그저 왔다 갔다 하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살던 너희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아주리라.”는 말씀은 이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자신의 의대로”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기위해 애쓰는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있을 것이지만, 그저 왔다 갔다 하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이 있을 것입니다. 책망을 받은 자들은 주님께서 경고하신 말씀을 귀담아 듣고 돌아서면 살 것이요, 계속 그 자리에 머문다면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김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