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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언 3장 - 다섯 가지 약속 (Proverbs 3:1~10)

by 은총가득 2021. 2. 7.

 

 

다섯 가지 약속 / Proverbs 3:1~10

 

1. “그 사람 참 복도 많아” 누군가 말한다면 어떤 경우에 그렇게 말할까요?

-미인, 미남을 배우자로 맞이했을 때, 자녀들이 착실하고 성실하게 잘 자랄 때, 자녀들이 좋은 직장에 입사했거나 사업을 잘 운영할 때, 큰 병 없이 장수하다가 잠자듯이 돌아가셨을 때?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일면 비슷한 측면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오복(五福)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어떤 자료에는 오복을 ①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합니다. 장수, 경제적 풍요, 건강, 덕을 즐겨 행함, 평안한 죽음 등 다섯 가지를 의미합니다. 동의가 되십니까?

②또 다르게는, 수, 부, 강녕, 귀(貴), 자손 중다(衆多)를 일컫습니다. 유호덕, 고종명 대신, 귀함을 받는 것과 자손을 많이 보는 것을 꼽습니다.

 

-전체로 보면 일곱 가지 복인데, 유독 5라는 숫자를 좋아하다 보니 다섯으로 자꾸 압축하려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참된 복일까요?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오늘은 그 중에서도 잠언 3장 앞부분 열 구절의 말씀으로 이 주제를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2. 오늘 본문은 2개의 구절마다 명령이 나오고 그 약속이 나옵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명령과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①첫째 명령과 약속(1,2절):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여기 사용된 법이라는 말은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잊지 말고 간직해야 할 가르침(주의 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주어졌습니다. 구약의 모세오경을 의미할 수도 있겠고, 모세가 전한 십계명, 또는 레위기 19장의 이웃 사랑의 정신 등 명백한 가르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자손손이 이어져 내려온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 그 명령을 마음으로 지키라고 말합니다. '내 아들아'하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의 다음세대, 새로운 세대를 향한 당부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주의 법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법,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하나가 된 십자가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순종에 대한 약속은 장수와 평강입니다. 십계명 중 5계명을 기억나게 하는 약속입니다. 부모 공경에 대한 장수의 약속처럼, 주의 법을 잊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실천해 나가면 평강을 더하여 주십니다. 주님 주시는 강 같은 평화가 마음에 가득하도록, 배우고 가르침 받은 것을 지켜 나가기 바랍니다.

 

②둘째 명령과 약속(3,4절)

: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마음판에 새길 것은 인자와 진리, 즉 사랑과 성실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와 ‘에메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우리에게 이르렀고, 우리 역시 인자와 진리, 사랑과 성실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이 정신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말씀을 더 잘 기억하기 위한 조치도 필요합니다.

 

☞약속은 4절에 제시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을 받고 귀중히 여김을 받는답니다. 잠언의 병행법(평행법)을 활용하여 이해한다면, 은총이란 바로 귀중히 여김을 받는 겁니다.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 하나님도 귀하게 대우하시는 사람으로 사시도록, 사랑과 성실을 일상과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③셋째 명령과 약속(5,6절)

-처음과 둘째 명령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명심해야 할 중요한 원리를 제시한다면, 세 번째 명령은 약간 내용이 달라집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여호와를 신뢰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사람은 자꾸 자기 자신을 추켜세우려고 하는 자뻑(?) 기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화자찬에 능하고, 매일 거울을 보며 스스로 감탄에 빠집니다. 일이 잘 되면 내가 잘나서 그리 된 것이고, 일이 잘못 되면 너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그럼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잠언의 동어반복, 반의적 평행법을 활용하여 답한다면, ‘자기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다해 힘써야 가능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6절 말씀처럼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는 것을 통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표현 역시 두루뭉술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주님을 범사에 인정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고민이 드러나야 합니다.

 

-①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진정한 의미와 행복 면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다른 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뢰의 형식을 중요시하신다기보다는 중심을 보십니다. ②모든 사람은 (신이 아니라 해도) 무언가 궁극적 권위를 믿으며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내가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인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지 자신의 똑똑함인지 잘 분간하기 바랍니다.

 

☞약속은, 길을 지도해 주신답니다. 길을 곧게 펴주시고, 돌아가는 듯 보이는 길이 사실은 적절하고 필요한 과정이 되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길 안내자가 되시고, 앞서 가시며 길을 만들어 주시도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④넷째 명령과 약속(7,8절):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역시 앞의 세 번째 명령과 연관성이 큽니다. 잠언서의 부단한 권면은 지혜를 스스로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지혜가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겁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을 피하는 겸손한 사람은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갖습니다. 악이 뭘까요? 이 본문에서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그 자체가 바로 악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자세가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그분이 바로 지혜의 근원이십니다.

 

☞그것이 네 몸을 치료하고, 네 뼈들을 윤택하게 해 줄 것이다, 8절은 약속합니다.

좋은 약이 되고, 뼈마디가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하신답니다. 바로 건강의 복을 말합니다. 사람의 몸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낡아집니다. 그것을 늙는다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윤택함을 뼈와 관절과 골수도 누리도록, 주님을 경외하는 우리 모두 되기 바랍니다.

 

⑤다섯째 명령과 약속(9,10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첫 열매를 드려 공경하라는 이 명령은, 우리가 얻어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이웃과 함께 나누고 베푸는 삶이 포함됩니다. 한편, 이것은 성경 속에서 기념비를 세우던 일과 의미가 통합니다. 우리 인생길의 중요 전환점에서 하나님과 나만의, 하나님과 우리 가정만의 어떤 의미 있는 기념물을 남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의미로 에벤에셀의 돌을 세웠듯, 요단강 열두 돌을 물 속에 배치하고, 물 밖에도 열두 돌을 세웠듯 말입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이 의미를 후세대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면, 문화와 형식은 남지만 그 알멩이인 정신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우상숭배적 요소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 즐거이 드리는 물질관에 대한 재미난 예화가 있더군요.

어느 날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유난히 배가 크다 했더니 송아지가 두 마리 나왔답니다. 농부는 너무 기쁜 나머지 이웃 목사님을 찾아가 한 마리는 자기가 기르고 한 마리는 교회에 드리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며칠 뒤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목사님이 위로하기 위해 달려갔더니, 농부 왈,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습니다!” 하더랍니다. 왜 하필 죽은 송아지가 주님의 것이어야 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호와를 공경하는 것은 공상이 아닙니다. 삶의 실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물질과 돈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열매를 드리는 삶으로 그 공경하는 마음이 표현되어야 진짜라는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말로만 때우면서 자기 것을 희생하지 않는 연인이 있다면, 그 사랑이 진짜인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네 창고들이 차고 넘치게 될 것이며, 네 포도주통들이 포도주로 가득 찰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가난한 자들에게 꾸어준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채무자로 여기신다는 잠언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대신 갚아줘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신다는 거죠.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재정의 문제에서도 채워주심을 더욱 누리시도록, 여러분 손과 주머니에 있는 것으로 여호와를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3. 결국, 무엇이 복인가?

-‘현명한 아내, 만카’라는 체코의 설화를 보면 집에서 쫓겨나게 된 시장의 아내 만카는, 이별의 선물로 단 하나만 가지고 갈 수 있다는 남편의 말에, 잠자고 있는 남편을 몰래 수레에 싣고 갑니다. 잠에서 깬 남편은 어이가 없어 웃으며 만카를 다시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여인은 행복의 본질을 알아본 것이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사자성어 아닌 사자성어로 ‘여경지근’의 원리라고 합니다.(박상진 교수의 표현).

 

-가르침을 잘 간직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자니 성경의 기본 가르침을 알아야 하겠고, 지혜이신 주님을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성실과 사랑과 헌신이 바로 복입니다. 그 대상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가 마음껏 예배할 수 있고 경외할 수 있고 헌신할 수 있는 대상, 우리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결국 여호와를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이 복입니다.

 

4.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 알고 있나요?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와 모든 테스트를 마친 후에 한 말이 왕상10:8에 나옵니다. 누가 복이 있다고 외칩니까? 그 솔로몬을 매일 볼 수 있고, 손대어 만질 수 있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신하들과 그 식솔들이 복이 있답니다. 왜 그렇죠? 언제든지 그 지혜로운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지혜의 화신과도 같은 솔로몬 앞에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8:34는 지혜가 외치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

 

-솔로몬의 신하들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이런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 해도 우리 안에 지혜에 대한 목마름, 지혜에 대한 갈망, 지혜를 얻어 현실의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는 절박함이 없으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우리에겐 지혜의 근원 되신 생명의 주님이 계십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십니다. 잠8:35은, “나를 찾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을 것이다.” 말합니다.

 

*지혜를 찾는 자, 생명을 얻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확고히 믿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부단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찾고 누림으로써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 그 은총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물 찾으셨나요? / Proverbs 3:13~26

 

1. 작지만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한 맺힌 로망, 다들 하나쯤 있으시죠?

-대개 이런 작은 소망들은 경제적 빈곤이나 가족 내의 역동적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쌀이 귀하던 시절, 우리 강원도 사람들(특히 영서)은 쌀에 옥수수쌀을 섞어서 먹었습니다. 옥쌀이라고도 했죠. 옥수수를 작은 조각들로 으깨서 물에 불립니다. 적당한 크기로 불린 옥수수쌀과 흰 쌀을 섞어서 밥을 하면 얼마나 예쁜 색깔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노릇노릇한 옥수수쌀과 하얀 쌀의 조화. 하지만 좋은 건 거기까집니다.

 

-먹어보면 입안에서 돌고 돌면서 잘 씹어지지도 넘어가지도 않고 맛도 별로였습니다. 쌀을 아껴 먹기 위한 방편이었으니 당연하죠. 어린 시절 그 밥을 먹다 먹다 지친 어느 소년이 드디어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한 마디 던집니다. “아부지, 난 하얀 쌀밥을 원 없이 먹어봤으면 좋겠다.” 벌써 40년도 더 된 우리 집안 가족사, 바로 제 얘깁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땅이라고는 많지도 않았고, 논보다는 밭의 비중이 더 컸던 우리집이건만, 어느 날 아버지가 밭 하나를 논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하셨고, 실제로 양수기로 물을 퍼올리면서까지 벼농사를 지으셨습니다. 그 출발점은 바로 아들의 한 맺힌 소원 때문이었습니다. 쌀밥이 먹고 싶다는...

 

-여러분도 이런 저런 사연들이 있으시죠? 친구 집에 놀러갔더니 유리병 안에 사탕을 가득 담아두고 언제든지 먹게 하는 모습을 보며 기가 죽었던 일. 과일이 귀하던 시절, 어떤 집 식탁에는 언제나 사과 배 복숭아 자두 등 여러 가지 과일이 담긴 그릇이 아무렇지도 않게 올려져 있었던 기억 등등.

-우리가 하는 행동들 중 어떤 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몸에 밴 어린 시절 탓일 수도 있고 어린 시절의 로망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는)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지면 행복할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은, 땅에 한이 맺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넓은 집에 살면? 늘 방이 좁고 형제 자매가 같이 쓰는 바람에 사생활 보장되는 공간을 꿈꾸었던 사람의 로망일 수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이건 두말하면 잔소리죠. 현대인들은 대부분 돈을 사실상 최고의 가치에 둡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를 연구해 보면, 예수님이 언급하신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먹고 사는 문제, 경제적 문제, 결국 돈과 재정에 대한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갈망합니다.

평생을 두고 찾아 헤매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그것을 알면 다행인데, 뭔지도 모를 그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다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사실 우리도 이런 저런 갈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꿈과 도전의식을 길러주는, 보물을 찾기 위해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는, 사실 모양만 조금 다를 뿐 현대인들의 소유에 대한 집착과 갈망을 잘 보여주는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오늘 잠언은 바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개인마다 보물의 개념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은이나 금 같은 귀금속을 소유하는 것, 예술 작품을 소장하는 것, 건물을 소유하는 것, 많은 책을 소장하거나 읽는 것, 좋은 차나 집을 갖는 것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은 오늘 말씀에서는 은이나 정금이나 진주를 찾아 헤매는 모습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게 우리들 모습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오래 살기 위해서,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서 갖은 고생과 수고를 다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수고합니다. 애를 씁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입니다.

크고 작은 꿈들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것보다 더 나은 갈망이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잠언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바로 ‘지혜에 대한 갈망’입니다. 우리 인간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나는 지혜를 찾는(은) 사람인가’하는 것입니다.

 

2. 지혜의 가치(13~18)

*욥기 28장을 보면, 아주 구체적인 진술이 나옵니다. 은은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없습니다. 나는 곳이 따로 있답니다. 금도 제련하는 곳이 있고, 철은 흙에서 캐내고, 동은 돌을 녹여서 얻는답니다. 땅을 파고 줄을 달아 사람을 내려 이런 것들을 캐내던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광석은 그렇게 캘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지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고 욥은 묻습니다.

 

-욥은 탄식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일을 깔끔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찾는 길을 아는 사람이 없고, 사람 사는 땅에서는 도저히 지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다에게 물어봅니다. 바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지금 내 속에 있지는 않다고 대답합니다. 순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혜, 오빌의 금과 진귀한 산호와도 바꿀 수 없는 지혜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이며, 명철이 머물고 있는 그 주소는 어디인지 물으며 답답해합니다. 멸망과 사망이 말합니다, 자기들도 그 소문을 들어본 적은 있다고. 모든 생물체의 눈에서 숨겨졌고, 눈 밝기로 소문난 공중의 새들에게조차 가려져 있다는 그 지혜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많이 답답해합니다. 욥기 28장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욥은 뭐라고 결론을 내릴까요? 28:23처럼 하나님만이 그 길을 아시며, 지혜가 있는 곳을 아신다, 그게 욥이 내리는 작은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에서는 지혜와 명철을 얻은 자의 복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찾아헤매는 은을 얻는 것보다, 순금이나 진주를 얻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바로 지혜를 얻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사모하고 갈망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욱 가치 있고 본질적이어서 더 이상 헤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지혜라고 말합니다.

 

-지혜를 얻으면 다 얻는 겁니다.

그 오른손엔 장수가 있습니다. 왼손에는 부귀가 있습니다.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입니다. 지혜의 지름길은 평강입니다. 한 마디로 지혜만 있으면 됩니다. 지혜를 얻는 자는 천하를 다 얻는 겁니다.

 

-심지어 18절은 지혜를 얻은 자는 생명 나무를 가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짜 복을 받고 싶다면 (엄한 것 찾아 헤매지 말고) 바로 지혜를 만나고 찾으라고 합니다.

이쯤 되면, 지혜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입구쯤 됩니다.

 

*그래서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도대체 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앞에 언급한 욥기(28:28)에서는 주를 경외함이 지혜고 악을 떠나는 것이 명철이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인간의 겸손한 주제 파악입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좌우하지 못하며 사람의 일과 자연의 일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 질서와 권위에 순복하며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고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그분의 눈을 의식하며 악에서 떠나 사는 것, 그것이 지혜라는 겁니다. 적어도 지혜로운 처신,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요약할 수는 있겠죠.

 

-잠언에서의 결론도 비슷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다(9:10).” 하나님이 실재(實在)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악에서 떠나 사는 것, 그것이 지혜를 아는 사람이 사는 방식입니다.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참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3.하나님의 창조와 지혜(19~20)

*19절과 20절은, 하나님의 창조에 관여하셨던 지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땅의 터를 놓으실 때, 하늘을 견고히 세우실 때 하나님은 그것을 ‘지혜로’ 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8:22-31에서 언급되는 내용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기쁨으로 동참하고 즐거워했던 지혜, 바로 그 지혜가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 안에서 충만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요17:24, 창1:31, 요1:2~3, 고전8:6, 골1:16, 히2:10)

 

-아직 구약 시대에는 제2위 하나님의 존재가 감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바로 (잠언3장과 8장이 말하는) 이 지혜가 그리스도다’라고 단순하게 주장하긴 곤란합니다만, 거친 형태로라도 연관지어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창조하시는 하나님 곁에서 창조의 편수(the craftsman, 도편수)가 되어 함께 즐거워하며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던 지혜를 잠언 8장은 말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지식으로 바다를 구분하시고 바다의 한계를 정하시고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셔서 땅을 윤택하게 하셨습니다. 다분히 창조의 기사와 연관되는 용어(이미지들, 예를 들면 ‘이슬’, 창2:6의 안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가치에 대한 언급에 이어 19, 20절은 그 지혜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과 그 가운데 동식물과 사람을 만드실 때에 함께 했던 지혜, 어쩌면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던 지혜를 언급함으로써, 지혜를 얻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 창조의 일들을 온전하게 하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창조하시는 하나님, 새 일을 기획하시며 성취하시는 하나님은 지혜로 그 일들을 이루어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지혜를 외면하지 말라(21~26)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 할 것인가?

지혜가 그렇게 귀한 것이라면, 지혜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지혜를 귀하게 여기면 됩니다. 대단함을 인정하고 가까이 지내면 됩니다.

 

-자나깨나 오매불망 지혜와 근신을 명심하라는 겁니다. 지혜가 무엇인지를 21절은 다르게 보여줍니다.

근신(勤愼)은 말하자면 분별력입니다. 하나님의 판단력으로 사물과 이치를 분간하는 것이죠. 죄의 개념과도 통하는 말이죠? 헬라어로 죄를 ‘하마르티아’라고 하는데 바로 ‘과녁을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길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하여 생활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혜를 생명으로 삼고 목걸이처럼 드러내는 삶입니다(22). 지혜와 함께하며 분별력을 갖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안전하게 걸어갑니다. 헛된 길로 나가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23).

지혜와 근신을 지키는 사람, 바른 분별력을 발휘하며 사는 사람은 인생길을 염려 없이 안전하게 걸어갑니다.

 

-또한 지혜를 지키고 지혜와 동행하는 사람, 지혜의 길을 명심하고 걸어가는 사람은 잠잘 때도 안전합니다(24). 잠을 잘 때 사람은 가장 편안한 상태,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벨트도 풀고 화장도 지웁니다. 시원하게 발도 씻고, 답답한 것들을 벗어 던집니다. 말하자면 무장 해제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단잠을 잘 수 있는 까닭은 지혜의 길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5절은 반대 경우를 말합니다. 지혜가 뭔지 관심도 없고 분별력도 없이 사는 사람은, 갑작스럽게 두려운 일들을 만난다는 겁니다. 따라서 지혜의 길을 걷는 사람은 악인이 멸망할 때 일어나는 급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없게 됩니다.

 

*26절은 결론적인 요약입니다.

이렇게 지혜의 길을 걷는 사람, 분별력을 바르게 발휘하며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믿고 신뢰할 만한 분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바로 그 의지할 견고한 바위가 되십니다. 의지할 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소망을 두며 그분께 기대는 것이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현명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기댈 바위, 견고한 비빌 언덕을 찾으신 분들 맞으시죠?

 

-행여나 아직도 잘 모르겠다면, 진지하게 고민하시고 그 바위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위에서 안전하게 거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유일한 의지할 바위이신 그분을 신뢰하고 살 때, 우리는 헛된 발걸음을 걷지 않으며 험한 데로 헛디디는 일이 없게 됩니다.

 

5.정리: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지혜의 가치와, 하나님이 온 우주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한 방편으로서의 지혜의 역할과 대단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그리고 지혜에 대한 욥의 고백과 잠언의 중심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갈 필요가 있음을 배웠습니다.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나는 것이 명철입니다.

 

*신약의 3가지 말씀을 읽어보며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요17:3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조금 다른 말로, 영생은 한 분이신 참 하나님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언급하십니다. 신약으로 이해의 범위를 넓혀 보면 지혜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방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믿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취어져 있던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벧후3:18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의 은혜 가운데 자라나기를 축복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야말로 사람들이 알아야 할 참 지식, 지혜의 핵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골로새서 3장 10절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새 생활 가운데 더욱더 새로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점점 더 자라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곧 참된 지식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그분을 온전히 닮아가도록, 성장하고 성숙하는 이 가을이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는 실천이다 /  Proverbs 3:27~35

 

1. 대중매체를 통해 뉴스를 볼 때마다 사건 사고 소식은 참 많은데, 훈훈하고 감동적인 사연들은 왜 그렇게 적을까요?

-그만큼 우리 사는 세상이 각박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평균적인 정신건강 상태는 100년 전 조상들로 치면 아주 심각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스트레스 상황 속에 사는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멀쩡한 사람이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섣불리 미담과 선행이라고 소개하기가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만큼 자신과 타인의 정직성과 성실성, 한결같음에 대해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밖에도 많은 이유들이 더 있을 겁니다. 그래도 훈훈하고 감동적인 사연들을 일부러라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두 번에 걸쳐 잠언 3장을 공부했습니다. 처음 부분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메시지를 5가지 명령과 약속에 담았었습니다. 중간 부분은 ‘지혜의 존귀성을 알라’고 우리에게 힘주어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부분은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는 점을, 구체적인 일상에서 실천하기를 말하는 내용입니다.

 

-참다운 지각, 진정한 지식을 갖추는 것과 이웃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잠언 3장은 구조적으로도 잘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일상의 영성’입니다. 사실 영성이란 말은 현실과 동떨어진, 고립되고 격리된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성은 일상에서 드러나야 하고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17세기 평신도 수도사였던 로렌스 형제는, 자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취사장에서 일하는 시간에 또는 설거지를 하면서 가장 분명하게 체험한다고 고백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지혜로운 자일수록 두 발을 땅 위에 견고히 세우는 법입니다. 우리가 아주 시시콜콜하고 일상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절감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내용에 따라 27-28, 29-30, 31-35으로 구분해 보았습니다.

-세 단락을 열어가는 키워드로 저는 ‘언제나, 그러나, 그래도’라고 꼽아 보았습니다. 먼저 우리가 볼 앞 두 절은 ‘언제나’입니다. 늘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2. 언제나: 언제나 우리가 바라는 세상(27-28)

*문학에서는 이것을 ‘있어야 할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문학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가’인데, 이것을 대놓고 말하든지 에둘러 말하든지 풍자하든지 한다는 거죠.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 모습일까요? 바람직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는 성경과 기독교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선행에 대해서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지만, 결코 선행을 폄훼하거나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선행은 귀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연적인 인간성의 표출(表出)이기도 합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미담, 선행 뉴스가 나올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게 되고 머리를 끄덕거리게 됩니다. “그래 난 저렇게 살지 못했지만, 저렇게 사는 게 맞지!” 하는 의미겠죠.

 

*27,28절은 두 부류를 말합니다.

‘선을 행할 힘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선을 행할 힘 즉 능력이나 기회나 여유의 측면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먼저 말합니다. 그들은 인색하지 않도록, 주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기꺼이 줄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 다음 부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남고 넘치는 것이 낮은 곳,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게 하시려던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충실하려면, 그것(흘러감)을 막아서는 곤란합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말하면서 ‘마땅히 받을 자’라고 표현한다는 데 주목해 봅시다. 하나님의 본심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후8:14은,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게 뭔가가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생각하십시오.

누군가에게 흘려보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윙크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 바로 너야. 네가 해야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이 구절을, “그에게는 네 손이 하나님 손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내 손이 하나님 손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 하나님을 인색하고 쩨쩨한 분으로 만드시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28절은 더 구체적인 예입니다.

이웃에게 필요한 무언가가 즉 어떤 물건이 내게 있다면, 선행을 연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갔다가 내일 오라고, 그러면 그때 주겠다고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웃에게는 그것이 내일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이 시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일 필요할지 몰라 내가 베풀고 나누기를 지연시킬 때, 이웃은 그것이 없어 바로 오늘 배를 움켜잡아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나의 염려와 불안 심리 때문에, 이웃의 필요에 눈감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듯 베풀 힘이 있는 사람이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고 나눔으로써 그들도 사람으로서의 존엄함을 잃지 않게 하는 것.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거창한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웃의 궁핍과 곤란을 나와 무관하지 않게 여기는 우리들이기를 원합니다.

 

3. 그러나: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29-30)

*지금까지 ‘있어야 할 모습, 바람직한 모습’을 말했다면, 29-30절은 나눌 것을 나누지 않는 모습을 넘어 공격적으로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다룹니다.

 

-피스메이커로 살 것인가, 트러블메이커로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평안히 잘 살고 있는 이웃들. 안전이 보장되고 서로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거기에 끼어들어서 그들을 헤집고 해치려고 한다면, 그들의 관계를 깨뜨리고 모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악을 꾀하는 것이며,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려 하는 불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누고 베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손에 뻔히 있는 것을 나누지 않고 내일 오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하신 하나님이, 이런 해악을 내버려 두실까요? 결코 그럴 리 없습니다. 너무 의도적인 악이기 때문이죠.

-내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어떤 위협과 해로움도 주지 않는 사람들을, 이유 없이 비난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30절은 말합니다. 공연히 트집을 잡아서 고소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의 세태입니다.

악한 목적으로, 자신의 배를 더 불리기 위해서, 이웃의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땅의 경계를 변경한다든지 이유 없이 험담하고 알아보지도 않고 싸잡아 비판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있어야 할 모습’과는 대조되는 ‘있는 모습’입니다. 불법, 부당행위, 편법, 아전인수식 해석,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현대인의 자화상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 앞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소돔 성에 살았던 롯의 가족이 몸부림치며 저항했지만 그건 참 어렵고 힘든 싸움이었습니다. 물결을 거스르고 온 몸으로 저항해야 겨우 자신을 지켜 낼 정도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이 이렇게 이기심과 욕심, 모해와 비난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참 지혜를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악착같은 사람이 되기보다 자신이 팠던 우물마저도 양보했던 이삭처럼 살 수는 없을까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물은 또 나오지 않을까요?

 

4. 그래도: 그래도 우리가 추구할 모습(31-35)

*지금까지 ‘~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이 이어졌던 것을 눈치채셨습니까? 31절에 한번 더 나옵니다.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조적인 표현들이 주욱 이어지는데, 출발점은 부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는 말 아시죠? 부러워한다는 것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싶어서 갈망하는 겁니다.

런데 부러워함의 위험성은 그 부러움이 마음속에서 사무쳐 나중에는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른바 학습 효과입니다. 악과 불법이 답습되는 이유입니다. 욕하다가 닮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얼마나 괴짜인지 혀를 내두르며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합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싫었는지 몰라도 누군가를 자기 맘대로 이래라 저래라 부리는 모습을 부러워하다가 그 며느리도 똑같은 시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 어떤 부분을 부러워했던 겁니다.

-포학하다는 말은, 난폭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압제한다는 겁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프로갑질러?

-권위를 행사하는 맛에 중독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런 것을 넘어 포학한 모습을 부러워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를, 불쌍히 여깁시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들은 비뚤어진 사람입니다. 불량배, 패역한 자, 심사가 뒤틀린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대표적인 심사 뒤틀림증 환자는 우상숭배자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좋아하실 리가 없습니다. 뒤틀리거나 비뚤어진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기가 막힌 표현이 32절에 나옵니다.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친밀히 교통하시고 교제하신다는 말입니다. 늘 사귐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신뢰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문제를 함께 의논하신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친구였지 않습니까? 다윗도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비밀을 나누는 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겠죠?

 

*포학하고 패역한 자, 심사가 뒤틀리고 비뚤어진 자는 악인의 집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뒤틀린 사람은 뒤틀린 집에 살아야 합니다. 반듯하고 정상적인 공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집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찾아옵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교만한 자입니다. 거만하고 조롱하는 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 조롱하며 하나님을 비웃습니다.

 

-반면에 정직한 사람은 정직한 집에 삽니다. 반듯하고 질서가 있습니다. 의인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찾아옵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는 겸손한 자입니다. 남들의 불행을 보며 조소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형편이 곤란한 자들의 심정을 잘 압니다.

 

*35절은 결론적인 맺음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 겸손한 자는 영광을 상속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결국을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미련한 자는 수치를 상속받습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면 잘 나갈수록 더욱 큰 수치를 맞이합니다. 구약성경 <에스더>에서 기고만장했던 하만을 기억하십니까? 남을 해코지하고자 했던 그는 결국 자기가 만든 나무기둥에 달려 죽고 맙니다. 크나큰 부끄러움은 결국 그의 몫이었습니다.

 

5. 정리

*우리는 ‘있는 세계’를 살아가면서 부단히 ‘있어야 할 세계’를 꿈꾸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너무나 먼 세상의 이야기인 것만 같습니다. 포학하고 패역한 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성경의 가르침이 굳건한 진리의 근간임을 믿고, 작은 일부터 일상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진리, 거룩함,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 참다운 지혜는, 반드시 일상 속에서, 우리들의 작고 작은 일상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한 가지는, 베풀고 나누는 선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흘러감의 원칙에 따르는 삶입니다.

-또 한 가지는, 모해와 비난을 멈추는 삶입니다. 타인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비뚤어진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그러기 위해서 포학하고 비뚤어진 모습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불쌍히 여기는 가운데, 정직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비뚤어진 사람이 살게 되는 악인의 집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올 손님이 바로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살면서 하나님과 비밀을 나누는 사이가 되시고, 영광을 상속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땅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