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더불어 사는 삶

by 은총가득 2021. 2. 17.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본문: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祈禱)하고 구(求)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차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한 부인이 식료품 가게에 와서 성탄절 만찬에 아이들을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식료품을 달라고 했습니다.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주인이 물으니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어서 기도 밖에는 정말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기도를 종이에 써주십시요. 그러면 그 무게만큼 식료품을 주겠소 놀랍게도 부인은 접혀진 노트장을 주머니에서 꺼내 주인에게 건내주면서 '우리 어린애가 지난 밤에 아파서 옆에서 병간호를 하며 기도를 적어 두었지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읽어 보지도 않은 채 주인은 구식 저울의 추를 놓은 곳에 기도가 적힌 종이를 놓고는 '자 이 기도가 얼마치의 식료품무게가 되는지 달아봅시다'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놀랍게도 빵 한덩어리를 놓았는데도 저울은 꼼짝을 않했습니다. 다른 식료품을 올려 놓았는 대도 저울은 움직이지 않자 주인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드디어 저울에 더 이상 올려놓을 수 없으니 당신이 봉지에 담아가시요. 나는 바쁘니까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눈물 흘리고 감사하며 그 부인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저울이 고장난 것을 얼마 후 주인은 알게되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주인은 가끔 의아했습니다. 그 일이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왜 그 부인이 미리 기도를 써 가지고 왔을까? 왜 그 부인이 저울이 고장났을 때 왔을까? 그때 그 부인이 적은 기도문은 주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양식을 주시옵소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기도를 기뻐하시고 들으셨는 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아브라함의 기도


창세기 18장 16- 33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자가 소돔과 고모라로 떠난 이후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그곳에 나의 조카 롯이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우리를 불러내시고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하셨는데 롯을 버리시겠는가? 그리고 롯은 비록 죄악이 관영한 땅에 살지만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그리고 긍휼의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수많은 생명을 심판하고나면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 아브라함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악인들 때문에 의인이 함께 심판 당하게 하시렵니까?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중보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죄인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므로 아브라함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멸하시지 아니하시겠지요?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온 누리에 나누어 지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나를 위해서 나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기 이기심으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모두 받으십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무엇으로 사랑을 베풀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더 좋은 기도는 이웃을 위하여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를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2. 한나의 기도


기도는 신앙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유일한 두 장소가 있다면, 기도하는 방과 말씀을 만나는 방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바로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늘 응답 받는 신앙생활이 된다면, 이보다 더 복된 신앙생활이 어디에 있을까? 삼상1: 1- 11절을 보면 한나의 기도는 모두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기도에서 다시 음미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한나의 기도 동기는 사랑을 잃어버린 여인의 아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나의 남편은 브닌나와 한나 즉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 중 브닌나는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자녀가 없는 아내는 언제든지 퇴출될 수 있었습니다. 한나의 생애에 가장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한나는 이 위기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신앙자의 위기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한나의 기도 동기는 자기 자신의 문제 해결이었지만, 기도하는 중 서원하는 기도로 내용이 바뀝니다.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간구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였습니다. 이미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건강한 제사장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건강한 제사장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몸도 늙고, 가정을 잘 이끌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쓰실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한나가 애통하여 기도할 때, 긍휼히 여기시고, 한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응답에 한나는 성실히 서원을 지켰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문제가 있으면 기도방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솔로몬의 기도


열왕기상 8장 22- 30절에 보면 솔로몬의 기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우선 자기가 누구이며,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가를 잘 알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나왔을 때의 나이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직 미숙한 청년의 때였습니다. 그는 아직 국정을 살필 수 있는 특별한 수업도 받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섬겨야 할 사람이나 아직 어린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아야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 어른들이 필요한 것을 구한다든지, 어른이 어린아이들이 필요한 것을 구한다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까? "나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부족합니다."라고 자신을 고백하는 솔로몬의 기도는 하나님이 기다리신 기도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솔로몬도 백성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구하는 것은 당연히 내가 주리라. 그리고 너의 기도가 내 마음에 합했다. 그런고로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도 주리라. 너 자신을 위해서 큰 군대나 오래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은 구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훌륭한 왕이 되도록 돕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4. 히스기야의 기도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왕하 20:2,3)

히스기야는 유다의 14대 왕입니다. 그가 왕 위에 있는 동안 앗수르 군대가 침입하여 나라는 풍전등화 같았고, 자신은 죽을 병에 걸려 절박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간절한 심정으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심하게 통곡하며 '벽면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해주셨고, 18만 5천 명의 적군이 한순간에 멸절되는 기적까지 베풀어주셨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란 히스기야 왕이 인생의 가장 힘든 상황에서 드렸던 간절한 기도를 말합니다(왕하 19:15-19).


히스기야는 이처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히스기야의 기도를 배웁시다.
이사야 38장 5절에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년을 더하고"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고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다면 우리의 기도도 들으십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시편39:12)
여러분의 인생에서 히스기야나 시편기자처럼 기도해야 할 때는 언제입니까?

 


5. 다니엘의 기도


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단 2:17,18).
다니엘은 위급했던 한 때를 기도로 극복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자기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기도하고 감사하며 그 상황을 하나님 앞에 의뢰하고 있는 기도의 사람 다니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자마자 즉각적으로 기도에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승리의 방편으로서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했습니다. 다니엘은 응답받는 기도의 핵심이 회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다니엘은 유대 민족이 고난에서 해방될 것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그의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니엘의 기도는 죄에 대한 자복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민족에 대해서 기도하면서 그 민족의 범죄를 먼저 자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기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 민족의 범죄 가운데 자기 자신의 범죄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가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예외로 삼지 않았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웃들과 민족을 위해서 기도 할 때 나와 상관없는 대상인 것처럼 기도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민족의 고난을 바로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통감했습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회개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그 많은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자기 자신의 삶을 철저히 회개하지 않은 데에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는지가 다니엘 9장 20-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 나온 모범적인 기도들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응답된 기도가 바로 이 부분의 다니엘의 기도일 것입니다.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더니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일을 생각하고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다니엘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 쯤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성경은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하나님께서 행동을 시작하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있는 그 문제에 관하여 응답을 주시기 위하여 천사를 동원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모습을 보십시오. 때때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즉각적으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즉각적으로 천사들을 동원하는 역사를 시작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도를 일단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다 들으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뜻에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얼마나 흥분된 기대를 가지게 됩니까? 기도할 때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늘의 보좌 위에서 내 기도를 주께서 받고 계십니다. 천사를 거느리고 응답을 시작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을 보십시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백했던 모습들을 회개하며 기도의 위대한 부흥이 우리 속에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고 있던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그 민족의 역사에 관한 것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 아니 전인류 역사에 이루어질 가장 중요한 어떤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사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밀입니다.

 


6. 겟세마네의 기도


마태복음 26장 36- 46절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전력을 다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핏방울이 떨어지듯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진지하게 기도하셨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심한 갈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 형틀에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야 하는데 열두 제자마저 아직 제대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구원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흑암의 권세의 노예였습니다. 죽어가고 있고 삼키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없이 지낼 많은 영혼들의 앞날이 걱정스러우셨습니다. 동정심 많은 예수님은 이 땅에서 더 많은 사람들은 구원하신 다음 하나님께로 가야겠다는 마음에 십자가 짐이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죄가 없는 의인이 죄인의 손에 잡히시고 심문을 당하시고 불의한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을 받게되면 악이 의를 이기게 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악이 의를 이기게 하십니까?"라고 하나님 앞에 반문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두 번씩이나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에 침묵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가 되도록 해달라는 기도가 입술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하나님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가 바뀌게 될 때, 예수님은 십자가로 나가셨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되어야겠습니다.

 


7. 세리의 기도


우리가 생각할 때에 하나님은 의인들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좋아하시고 죄인들의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죄인 중에 죄인인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아들이신다" 내가 실수해서 혹은 내가 원치 않았지만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 9- 14절을 보면 어느 날 성소에서 가장 앞자리에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종교 생활을 낱낱이 아뢰면서 자기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의 삶과 자기의 삶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저들보다 훨씬 의롭다고 자만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소의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송구했습니다.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세리가 직업인지라 어쩔수 없이 범한 죄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애통하면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낱낱이 고하고 할 수만 있으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달라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시겠는가?"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 받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많이 지은 다음 기도하라고 말씀하지는 않았습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겸손히 하나님께 기도하면 죄의 용서와 축복을 주십니다.

 


8. 민족을 위한 기도


디모데전서 2장 1- 2절을 보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 그리하여야 평온한 중에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0- 35절에 보면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이스라엘을 버리신다면 차라리 나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시라도 내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람은 가정의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그릇이 드러납니다. "피붙이 즉 핵가족만 가정이다"라고 보는 사람은 생리적인 존재입니다. 이러한 가족 개념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기본적인 본능입니다. 곤충 내지는 조류들까지도 자기의 피붙이를 목숨걸고 사랑합니다. 그 다음, 대가족을 가족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보통 대가족을 가족으로 보았습니다. 당시는 넓은 농장을 소유하고, 함께 생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육신의 삶의 방안으로 이루어진 가족입니다. 좀 더 넓게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가족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1900년대 초부터 "동무"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싹 텄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은 온 세계, 온 인류를 가족으로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한 가족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민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했다 하더라도, 은혜로 구원해 줄 것을 간곡히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는 남한과 북한을 두 나라로 볼 것이 아니라 한 민족으로 보고 북한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동족들이 예수 믿도록 기도하고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자주 만나십니까? 여러분의 순종과 믿음을 어떻게 나타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여러분과 만나시길 원하시며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에 대한 순종과 확신의 증거로 기도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항상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모하여 만나기를 간절하게 원하는 자, 온전한 순종과 믿음을 보이는 자들에게 커다란 축복을 더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꾸준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끝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우리 신앙의 참됨을 증거하여 축복받는 성도들이 되도록 합시다.

 


* 기도: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주신 약속들을 다시 붙잡고 기도합니다. 내가 지칠 때에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주님께서 보여주실 결과들에 대해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하게 하시며, 주님께 속하여 합당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이 시대의 유일한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소서.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가 저의 기도가 되게 하시고, 저 역시 다른 이들을 품어 기도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기도의 동역자를 구하고 함께 합심하여 기도함으로써 응답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 앞에 두 무릎을 꿇은 자만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사오니 항상 기도에 힘쓰고 가정과 이웃과 나라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성도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구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을 언제나 갖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강한 팔로 우리를 붙드사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하옵시고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더불어 사는 삶

본문: 막 2: 1- 11

아프리카 정글을 탐험한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재미나는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그곳에 사는 수많은 종류의 짐승들을 한 종류씩 없애 보기로 한 것입니다.
먼저 새를 없애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새소리가 없는 정글은 마치 공동묘지처럼 적막한 숲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원숭이들을 쫓아내 보았습니다. 이가지 저 가지를 옮겨 다니며 나뭇가지를 꺾고 숲을 망가뜨리는 원숭이들인 줄 알았는데, 원숭이들이 떠난 숲은 나무들이 서로서로 엉키고 덮히면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징그러운 뱀들을 다 제거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천적이 없어진 쥐들이 그 숲에서 판치며 날뛰기 시작했고 쥐들로 인해 해충을 잡아먹던 벌레들이 모두 없어짐으로 숲이 병들어 죽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학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은 모든 것이 공존 할 때에 건강하고 질서가 잡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돕고 공존하며 관계가 아름답도록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가끔씩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나 같은 사람만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숨이 막혀서 나도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늘 감사하는 것은 나와 전혀 다른 성격을 소유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엑셀레이터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브레이크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모두가 다 엑셀레이터라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면 모두 다 브레이크라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넓은 의미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 헬퍼(Helper)입니다. 인간은 멍석을 깔고 함께 둘러앉아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가 봅니다.

 


사람을 인(人)이라고 합니다. 한국인,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인(人)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 사람이 서로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혼자 있으면 틀림없이 쓰러지고 맙니다. 서로가 서로에 기대어서 너는 나 때문에, 나는 너 때문에 안전히 서있을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첫째는 갓난아이입니다.

짐승은 태어나자 말자 훌훌 털고 일어나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동물의 왕국에 봅니다. 동물은 태어나자 말자 혼자서도 살아 갈 수 있지만 사람은 태어나자 말자 어머니의 돌봄이 없으면 도저히 살아 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둘째는 거동이 불가능한 노인입니다.

이제는 영육이 다 피곤하여져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슈퍼에도 혼자 갈 수 없는 거동 불가능한 노인은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됩니다. 도저히 혼자 살 수 없는 거동이 불가능한 노인이 있습니다.

 


셋째는 사고를 당한 이입니다.

사고를 당하여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차가 굴러 차가 다 찌그러진 속에 있는 운전수는 자기 혼자 힘으로서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타이타닉 영화를 보면 배가 뒤집혔습니다. 그 속에 사람들이 갇혔습니다. 위로 난 창구멍 통으로 손을 내밀며 사려달라고 손짓을 합니다. 철판을 자를 도구가 없습니다. 손을 잡고 기도하면서 애타서 발을 뒹굴지만 살려낼 수 없습니다. 움직이던 손이 멈추었습니다. 도저히 손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노상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혼자서는 일 미터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넷째는 병자입니다.

병자도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된 이가 병자입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꼭 붙어있지 않으면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 병자입니다. 그렇습니다. 갓난아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사고를 당한 이나 병자들은 혼자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그런 생생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복음을 증거하실 때였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서 말씀하실 때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송곳하나 들어갈 때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때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어 가지고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예수님은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소경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신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 하여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줄로 달아내렸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시 일어났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 처럼 사람은 이 세 가지가 없이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1. 사람은 사람 없이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중풍병자는 그냥 두면 죽습니다. 살 수 없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은 이제 완전히 상실한 사람입니다. 이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예수님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살았습니다. 중풍병자를 도운 이 네 사람은 과연 누구일가요?


제1 가능성은 가족이나 친척입니다. 이 세상에 가족보다 중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병원에 입원부터 퇴원까지 가장 곁에 많이 붙어 있는 사람은 가족입니다. 특히 부부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나 혼자는 소변도 볼 수 없는 아픈 사람이 되었을 때 옆에 있는 것은 아내입니다. 부부입니다. 밤 3시경 소변이 마려웠습니다. 옆에 자고 있는 아내를 불러 소변통을 달라고 부르려고 보니 불편한 보조의자에서 이불도 제대로 못 덮고 자고 있는 아내가 그렇게 불쌍하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 일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나는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지막까지 같이 있을 사람은 이 세상 많은 사람 가운데 가족밖에 없습니다. 코미디언 이 주일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사시는 동안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가족과 함께 더 즐겁게 지내지 못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 없이 2천년 동안 이 나라 저 나라로 쫓겨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 단위로 신앙생활을 한 것이었습니다.

히틀러가 600만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다 파괴시켰어도 유대인의 가정만은 파괴할 수 없었다"


가정 없이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최고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가장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 메고 가서 살린 네 사람은 누구일가요? 첫 번째 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이 가족이지만 두 번째 가능성은 가까운 이웃이거나 친구 아니면 교회 성도들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가족은 시작부터 같이 있었고 두 번째로 달려오기 시작한 이들은 친척들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혈연가족이 아니라 복음가족입니다. 혈연가족은 소식을 늦게 듣고 늦게 찾아 올 수도 있지만 복음가족인 우리는 거의 매일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눕고 나니 언제나 옆에 있는 이는 가족이고 그 다음이 교회 식구들입니다. 여러분들도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복음 가족들이 얼마나 소중한 분들이라는 것을 알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분들이 가장 귀중한 인생의 반려자입니다.

 


2. 사람은 하나님 없이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는 더욱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옆에 사람이 없어도 잠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안 계시면 잠시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양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는 당장 얼어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기를 거둬 가시면 5분내에 전 인류가 멸망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 숨쉬고 말하고 걸어가는 것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병든 물고기는 물 속에서 몇 달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 속에서 잡아낸 물고기는 숨을 쉴 수 없어서 곧 죽고 말게 됩니다. 꼼짝없이 죽게 된 중풍병자에게는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오게 하는 데까지만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중풍병자는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분은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물건이나 다른 사람이나 다른 소유는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 있을 때에서 죽어서나 영원히 우리에게 필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집에서도 송곳하나 들어갈 수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고침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기적을 보았습니다. 생명을 얻었습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입니다. 영이 떠난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4:24).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동물이거나 마귀일 뿐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3. 사람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적절한 자연 환경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본문의 중풍병자는 자기 혼자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환경이었으나, 이 평범하지 않은 환경이 이 중풍병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평안하면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어려움에 처하고 고통 속에 있어야 부르짖게 됩니다.

 


생물학자 최 재천 교수는 <알이 닭을 낳는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재미있는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 미국 케이밥 고원 사슴 이야기가 있습니다. 1906년 이 지역이 동물 보호 지역으로 지정될 때 이 곳에는 약 4,000 마리 정도 사슴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슴을 보호하려고 사슴을 잡아먹는 늑대, 퓨마 그리고 육식동물들 6,000 마리를 제거하여 버렸습니다. 17년이 지났습니다. 사슴이 70,000 마리로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사슴 수가 점점 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13년이 지나자 사슴은 10,000 마리 정도로 줄어 버렸습니다. 이유를 알아보았습니다. 사슴이 너무 많아져서 풀이 모자랐습니다. 안전하고 평안하게 보호하며 살다보니 사슴들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환경이 너무 평안하면 안 됩니다. 긴장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이야기를 그는 하고 있습니다.

 


미국 페인 박사가 바닷가에서 직접 한 실험입니다. 바닷가에서 바다를 망치고 있는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이 불가사리입니다. 그래서 해역을 정하여 놓고 불가사리가 눈에 뜨이는 대로 잡아 버렸습니다. 6개월 지나자 불가사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부터 바위틈에 따개비가 수없이 많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홍삼도 풍부하여졌습니다. 불가사리가 먹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위틈에서 집을 짓고 사는 해조류가 없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주변에 해조류를 잡아먹고 사는 동물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흉악한 불가사리를 없애고 나서 조사하여 보니까 7 종류가 사라졌다는 보고입니다. 불가사리가 있을 때에는 15 종류가 살고 있었는 데, 불가사리가 사라지고 나니까 8종으로 줄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많습니다.

 


캘리포니아 연안에서 내륙으로 송어를 나를 때입니다. 산 송어를 날라야지 죽은 송어는 상품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10시간 이상 내륙지방으로 송어를 물 속에 넣어 나르다 보면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송어 운반업자가 그 속에 조그만 상어 한 마리를 집어넣었습니다. 몇 마리를 잡아먹었지만 10시간 달려서 송어들은 모두 건강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상어 밥이 되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도망 다니다 보니 팔팔하였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환경이 나쁘고 악할 때 그 때 영적으로는 살아 날 때입니다. 그래서 고난 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시편기자가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는 <위대한 기회>가 됩니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입니다. 폭풍은 좋은 선장을 만들어 내는 법입니다. 좋이 않은 환경이 닥치거들랑 내가 살아 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맞서 나가시며 승리하여야 합니다. 중풍병자에게 중풍병은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환경도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이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 데 거실 TV에서 유행가가 울려 나왔습니다.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선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그렇습니다.
사람 없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적절한 자연 환경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가 더불어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에 '레드우드'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사막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공원에는 우람한 적송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심한 더위와 가뭄 때문에 아무 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막에 어떻게 레드우드 공원과 같은 숲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물을 주기도 하지만, 여러 나무가 함께 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많은 나무가 함께 자라면서 바닥엔 늘 그늘이 지고 습기의 증발이 억제되어 나무가 죽지 않고 숲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 울창했던 밀림의 나무들도 한 그루씩 자꾸 베어지면, 앞서의 경우와는 반대로 점차 땅이 보습(保濕) 기능을 잃고 메마르게 되어 나머지 나무들도 전부 말라 죽고 맙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할 때, 레드우드 공원의 숲처럼 사막도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잔디는 씨앗이 듬성듬성 뿌려지면 잘 자라지 못한다고 합니다. 씨앗이 서로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을 때 잘 자란다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잔디의 자라는 모습이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밀조밀 붙은 씨앗이 서로 경쟁을 하기보다는 양분을 나눠 가지며 더불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의식과 신념」은 필요 충분조건입니다.

 


어떤 농부가 쳐놓은 그물에 두 떼의 새들이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 떼의 새들은 『자, 우리가 힘을 합해 날아 올라 그물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면 산다 』고 외치며 동시에 솟구쳤습니다.

 


그러자 「연약해 보이는 날갯짓」이 큰 힘을 발휘해 조금 높은 버드나무 가지에 그물을 걸었고 새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한 떼의 다른 새들은 『우린 꼼짝없이 죽었구나』하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 모두 농부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설렁탕 곰탕 자장면 가게 등에 가면 나무젓가락을 씁니다. 쇠젓가락 보다 미끄럼이 덜해 한결 쓰기 편합니다. 나무젓가락은 대부분 이중으로 포장돼 있습니다. 겉은 상호나 선전문구가 인쇄되어 있고 안쪽은 얇은 종이가 젓가락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얇은 종이는 불면 날아가고 물만 닿아도 녹아버립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그 얇은 종이를 펴 새끼줄 꼬듯 두 겹, 세 겹으로 꼬면 놀라운 결과를 접하게 됩니다. 물방울에도 녹아버리는 그 종이가 가위나 칼이 아니면 자를 수 없는 단단한 노끈이 됩니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성경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 9-12) 는 말씀입니다.

 


줄은 꼬면 꼴수록 강해지는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힘의 원리란 나눌수록 약해지고 합할수록 강해집니다. 수력발전 역시 물보라를 튀기며 산산이 흩어지는 물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 에너지화하는, 이른바 집합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불의 경우도 다를 바 없습니다. 모닥불도 모으면 작열하는 불꽃이 피어오르지만 헤치면 꺼져버립니다. 벽돌도 한 곳에 모아 쌓아올리면 빌딩이 되지만 흩어놓으면 한 장의 벽돌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힘도 모으면 폭발력이 일어나지만 뿔뿔이 흩어지면 미력에 불과하게 됩니다. 건국 초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던 구호 속에 담긴 뜻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됩니다.

 


유치원에 들어가면 셈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셈에 익숙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합하고 곱하는 데는 서투르고 빼고 나누는 데는 지나치게 빠르고 익숙합니다. 하나인가 싶더니 열이 되고 함께 하는가 싶더니 철천지원수가 되어 갈라서기를 밥 먹 듯합니다.

 


OECD 국가들 가운데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상위를 기록하는 것도 바로 나누기에 익숙한 생활패턴 때문입니다. 분단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가 바라던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통일의 꿈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통일이 되리라는 소망과 믿음으로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네 현장입니다. 나누고 할퀴고 갈라서는 이합집산의 되풀이가 언제쯤 끝나려는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한 지붕 한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사람끼리도 이러하다면 반세기가 넘도록 색다른 체제와 이질문화로 조련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손잡고 껴안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겠는가 하는 염려를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삼 겹줄 기적을 일궈낼 수만 있다면, 아니 그것은 가능합니다. 작고 작은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치러냈고 월드컵의 꿈을 이룩했습니다. 그리고 외환위기의 수렁도 벗어났습니다. 우리에겐 위기 극복의 저력이 있고 슬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힘을 합하면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마는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진일보하여 삼 겹줄을 열 겹줄로 만들기만 한다면 쇠톱으로도 못 자르는 폭발적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여야도, 노사도, 계층도, 교파도 힘을 모아야 합니다. 주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정식이 다른 그 조건들이 삼 겹줄이 된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기러기들은 먼 거리를 이동할 때 한 줄 혹은 V자 형태로 날아갑니다.

그런 형태로 무리를 지어서 날면 한 마리가 날아갈 때보다 훨씬 힘이 덜 들기 때문입니다. 앞에 있는 기러기가 날갯짓을 하면서 내는 바람이 뒤에 있는 기러기를 올려주고 또 그 기러기가 내는 바람이 바로 뒤에 있는 기러기를 올려주어 혼자서 날 때보다 71%나 힘이 덜 든다고 합니다. 이 기러기떼의 원리는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일할 때 얻는 상승작용은 힘든 일도 훨씬 쉽게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서로 격려하고 세워줄 때 더 효과적인 사역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미움과 시기로 서로 헐뜯는다면 분열과 갈등이라는 고통스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한 겨울에 먼 길을 떠나는 두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눈보라까지 치게 되자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런데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산길에 이르렀을 때, 눈 위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한 나그네가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분명히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나그네는 "미쳤소? 우리도 죽을 지 모르는 상황에 어떻게 데리고 간단 말이오!"하며 도망치듯 가는 것이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은 나그네는 죽을 힘을 다해 걸었습니다. 눈보라는 더욱 더 심해지고 정신마저 잃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등에 업은 사람의 체온으로 점점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마을에 가까이 왔을 때, 길 옆에는 혼자서 먼저 간 친구의 얼어 죽은 시체가 있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을 업고 간 사람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지만, 혼자 간 나느네는 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죽고 만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전4:9-12)

 


해가 질 무렵 앉은뱅이와 장님이 고개를 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는 속도가 느리고, 장님은 보이지 않아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생각 끝에 장님이 앉은뱅이를 업고 앉은뱅이는 장님의 두 귀를 잡고 방향을 알려 주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무사히 고개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교회에서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이렇게 서로 도울 수 있다면 교회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종이 한 장은 간단히 누구나 찢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화번호 명부를 보십시오. 누가 이 책의 한 가운데를 찢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많은 종이가 겹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 장이라면 그처럼 간단히 찢어져도 여러 장이 겹쳐져 있으면 좀처럼 찢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신자들이 모여 함께 일하면 큰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마귀도 하나님의 자녀를 해치는 일을 어렵게 여길 정도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서 지키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한 몸 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 아버지, 내게는 가정과 부모와 가족과 친구들이 있고 또 일할 수 있는 직장과 조국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당신을 마음껏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나처럼 그렇게 행복한 삶을 거의 누리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거처할 가정이 없이 방황하는 자들과 신앙이 박해받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근로 환경이 열악한 상태에서 낮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격무에 시달려 일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과 가정에서 동정을 받지 못함은 물론 심지어 학대를 당하는 자들과 병원에 입원해 있는 자들과 정신 이상에 걸려 정신요양소에 수용되어 있는 자들과 옥에 갇혀 있는 자들과 사람들로부터 멸시 당하고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총을 베푸시옵소서. 오! 하나님, 내가 행복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그들의 불행을 결코 잊지 않게 하옵소서 더불어 사는 훈련을 하게 하소서. 우리 믿음의 가족들이 서로 돕게 하소서. 우리나라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참다운 사랑과 협력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