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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새의 계략과 아히도벨의 계략

by 은총가득 2020. 9. 23.

말씀: 삼하 17:14

제목: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하 17장 14절 말씀을 중심으로, 제목은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깨닫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악을 선택한다면, 내 생각과 내 눈에 좋은 것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부정적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선을 선택한다면, 내 생각과 내 눈에 불리한 것이 선택되었다 하더라도 결과는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라는 성경적 사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창세기 13장에 소개된 아브라함과 롯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서로 소유가 많아서 함께 동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서로 분리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네가 좌든 우든 먼저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제안에 눈을 들어 자기 눈에 좋은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한 요단 온 지역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좋은 장소를 선택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양떼들을 먹일 풀과 물이 풍부한 곳을 차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롯이 자기 눈에 좋은 곳을 선택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롯이 눈을 들어 자기 눈에 매우 좋은 장소를 선택한 그곳 소돔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기 때문(13:13)에 곧 심판받을 장소였습니다.

 

롯이 떠난 후,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그곳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롯은 자기 눈에 좋은 곳을 선택하였지만 결과는 부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하는 선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결과는 긍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사례를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시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과 압살롬의 사례에서도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본문에는 두 사람의 모사(지략가)가 소개됩니다. 아히도벨후새입니다.

 

아히도벨은 처음에는 다윗의 모사였습니다. 이름의 의미는 ‘무지한 형제’라는 뜻입니다. 다윗의 모사(지략가)였던 아히도벨은, 다윗이 자신의 손녀 밧세바를 취하고, 밧세바의 남편이었던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함으로 인하여, 다윗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두 번째는 다윗을 떠나 압살롬에게 갔습니다(대상27:33). 압살롬의 모사가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모사가 된 아히도벨은 자신의 이름 의미대로 무지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가 믿었던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후새의 계략을 받아들임으로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였기 때문입니다.

 

후새는 다윗의 기도응답으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으로 왕궁을 비우고 올리브산 방향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당시 다윗은 자신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반란을 주도한 압살롬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삼하15:31).

 

하나님은 다윗의 절박한 기도를 빠르게 응답하셨습니다. 다윗의 기도응답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후새입니다(삼하15:32). 후새 이름의 의미는 ‘급속함, 빠름’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매우 위급한 상황에 빠르게 다윗에게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후새는 이름의 의미대로 급속히, 발 빠르게 압살롬에게 나타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만들었습니다.

압살롬과 그의 사람들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후새의 모략을 받아들였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다윗이 보낸 후새에 의해 그 계획이 좌절되었습니다(삼하17:5-13).

 

후새의 모략을 들은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말을 오늘 분문의 제목으로 정하였습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말은 “(후새의 계획),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14)입니다.

 

(무엇)은 (무엇)보다 낫다 사람의 판단과 평가기준은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이 본문에서 확인됩니다.

 

사람은 매우 제한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본문에서 증명되었습니다. 본인이 맞는다고 확신하는 내용도 틀릴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머릿속에 입력된 정보가 틀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판단과 평가는 내 머릿속에 입력된 정보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어떤 답을 입력시켜 놓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하나님은 선악의 심판자이다.”

이런 고백을 쉽게, 자연스럽게 하면서도, 실제로 삶속에서는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압살롬의 사례를 통하여 살펴보면,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라는 뜻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미 힘의 무게가 압살롬에게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승리가 확실시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결과는 패하였습니다. 이유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간섭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에게 유리한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따르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후새의 나쁜 계략을 따랐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후새의 계략이 더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경우를 성경은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택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택이 본문 사무엘하 17장 14절 상반절입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무엇)은 (무엇)보다 낫다. 이런 생각과 판단은, 전적으로 내 생각, 내 경험, 내 지식에 근거하여 평가되고 판단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움직여졌습니다. 이 사실이 이해되어져야만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 평가와 판단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평가가 단순히 그들의 생각과 판단처럼 여겨지지만 이어서 나오는 말씀을 참고하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됩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까지도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후새의 계략보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낫습니다.

 

후새의 계략은 압살롬을 실패하게 하는 계략이고, 아히도벨의 계략은 압살롬을 승리로 이끌어주는 계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라고 말했을까요?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 때문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개입

 

본문 사무엘하 17장 14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과 판단을 하도록 개입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을 잘하고 판단을 잘한다고 말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착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미 앞서 아브라함과 롯의 사례에서도 설명한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오늘 내가 선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생각과 판단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내가 악을 선택하는 자리에 있다면 아무리 좋은 생각과 판단을 해도 결과는 잘못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선을 선택하는 자리에 머물고 있다면, 내 생각과 판단은 올바른 결과로 나타납니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을 따르지 아니하고, 후새의 계략을 따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개입이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선택과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택을 잘하여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

“내가 선택을 잘못하여 나쁜 결과가 나타났다.”

이런 생각을 하기보다도,

“내가 선을 선택한 것이 원인이 되어 좋은 결과로 나타났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악을 선택한 것이 원인이 되어 나쁜 결과로 나타났다”고 생각해야 성경적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생각과 선택까지도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다는 것이 이해됩니다.

 

압살롬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히도벨의 계략이 좋은 계략이었고, 유익한 계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후새의 계략이 좋은 계략이라고 생각하여 선택하게 된 것은 여호와의 개입이라고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무엘하 17장 14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의 간섭으로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을 따르지 아니하고, 후새의 계략을 따름으로 그의 반역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압살롬의 마지막은 다윗의 장수였던 요압과 그의 군사들에 의해 살해당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선택하는 것은 지난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와 연결이 됩니다. 압살롬은 지난날 악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승리로 이끌어주는 아히도벨의 계략을 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압살롬에게 불리한 후새의 계략이 더 신빙성이 있게 들리고, 좋게 들리어 선택한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오늘 내가 무엇을 선택하며 사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나타나지 아니한다 하여도 어느 때가 되던 그것이 반드시 어떤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사례를 생각해보십시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라고 생각하여 후새의 계략을 선택하여 반란을 실패하였습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라고 생각하여 후새의 계략을 선택하였지만, 그들에게는 아히도벨의 계략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왜 잘못된 선택을 하였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사실입니다. 악을 선택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한다고 후새의 계략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은 잘못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하려면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고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도 몰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압살롬은 다윗의 장수 요압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그 머리카락 때문에 자신이 죽게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려 매달렸을 때, 요압의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사람의 눈은 극히 제한적이라서, 한쪽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시력이 좋다한들 동서남북 위아래를 다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 눈에 좋게 보여 더 나은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악을 선택한 자에게는 악의 결과를 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동서남북 위아래 다 보고 계십니다. 악을 선택한 자가 자기 눈에 아무리 좋은 것을 선택하려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선택한 것 때문에 재앙을 경험하게 됩니다. 선을 선택한 자가 선택한 것은 결국에는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승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주님께 특별한 은혜로 선택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주님께 감사하는 한 주간되시기를 바랍니다.<김주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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