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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외

by 은총가득 2020. 6. 25.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역사적으로 평가해 볼 때 더러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설교자로서 크리소스톰의 명성은 거의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세대를 통해서 크리소스톰이 유능한 설교자 중에서도 제일인자라고 하는 평가에는 이의가 없을 줄로 믿습니다. 그의 개성에 대한 어떤 진지한 견해 차이도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또한 그의 뜨거운 도덕적 열정도 이미 오래 전부터 널리 인정받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의 도도한 웅변력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경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황금의 입’이라는 칭호가 크리소스톰처럼 유능한 사람에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초기 몇 년간에 쌓은 수사학적 훈련이 설교자로서의 그의 재능을 크게 드높였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석학적 방법론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사항이라 하겠습니다.

 

 

1. 주석학사에서의 위치

 

주석사에서 크리소스톰이 차지하는 위치는 주목할 만합니다. 특수한 여러 상황 때문에 크리소스톰은 동방교부 중의 어느 누구보다도 알레고리와 교리적 해석에서 나오는 오류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니케아(Nicene)회의 이전에 교회 안에서는 알레고리적인 성격해석이 널리 유행되었습니다. 교리적 해석은 서방 교회에서 성행했는데 니케아회의 후 기간 동안에 지배적인 추세를 보였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알레고리적인 방법에 대한 안디옥 학파의 반응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교회 또는 교리적 학설이 그 영향력에 있어서 두드러졌던 때를 염두에 둘 때 크리소스톰은 세대를 앞선 셈입니다. 이 역사적 위치가 성경해석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설명함은 물론이고 주석학자로서의 그의 인격을 평가하는 데 기여합니다. 현대의 학자들은 만장일치로 크리소스톰에게 이와 같은 명성을 부여하는 데 인색치 않습니다. 크리소스톰의 강해설교를 처음 읽을 때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현재의 주석학적 방법에서 훈련받은 독자는 헬라교부의 주석과 루터와 칼빈의 주석을 비교해 보고 무의식적으로 메이어(Meyer)와 바이스(Weiss)의 그것과 다르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비교는 주석학자로서 크리소스톰의 특징에 관하여 널리 알려진 견해의 추인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이를 위해서 크리소스톰이 저자인 방대한 강해설교의 내용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비길 데 없는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용구에서 방심한 흔적이 더러 있습니다만, 이는 설교자들이 가끔 본문의 진리성의 집착한 나머지 사소한 문제를 지나쳐 버리는 습관적 경향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설교자가 그러하듯이 크리소스톰도 해석 자체를 자신의 강해설교 목적에 맞게끔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끔 주석학적 난제가 닥칠 때 그의 독특한 강변이 등장합니다. 독자는 자칫하면 그러한 강변이 난제를 얼버무리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어느 곳에서도 그의 진실성 결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그 자신의 해석원리에 충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적용이 본문과 관련이 없는 듯 애매한 내용은 그 상황에 맞는 윤리적 교훈을 강조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사실 크리소스톰은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에 구약을 설명하는 데는 적절한 수준 이상의 준비를 갖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타 헬라어 사본의 다른 내용이 논쟁을 일으키는 몇 군데를 제외하고, 그는 70인역을 최고의 권위로 삼았습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에 없는 헬라어의 축자적 의미를 사용했지만 그 일로 인하여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에 대한 그의 주석은 신약의 주석과 같은 특징을 나타냅니다.

주석학자로서 크리소스톰의 가장 현저한 특징을 고대 기독교시대에 유행되었던 알레고리적 경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경향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유대인과의 논쟁에서 순교자 저스틴(Justin)으로부터 계속하여 기독교 변증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반대파의 방법을 어느 정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와 팔레스틴에 있는 유대인 주석학파들은, 서로 간에 어느 정도 대립적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레고리적 습관을 함께 지니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의미에 관한 논쟁은 필연적으로 기독교학자 중에서 유사한 경향을 불러왔습니다.

 

더구나 2세기와 3세기의 기독교학자들은 재능이나 학식 면에서 탁월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얻은 승리는 지적(知的)인 것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때도 정확한 지식이나 정신적 능력이 결핍되었다 할지라도 심오한 경건성이 신비적인 생각에서 칭찬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성경본문이 검토되기보다는 여러 가지 상징들이 보다 쉽게 창안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경향은 오리겐(Origen)으로 하여금 알레고리적 해석 원리를 구성하는 능력의 소유자로 인정받게 했고, 그 자신의 풍부한 주해방법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학적인 자세를 갖게끔 했습니다. 오리겐은 신비주의적 주석가로서의 제일인자의 위치에서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 시대로서는 그러한 방법이 주석학에서 독보적인 것이었습니다.

교리적 원리가 이미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헬라정교회와 그 반대자들은 아직까지도 다같이 알레고리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헬라정교회는 두 견해를 혼합하였고, 그 반대자들은 두 학설을 적대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이하게도 오리겐이 내놓은 몇 가지 견해 때문에 빚어진 교리적 논쟁이, 크리소스톰과 그가 친절을 보였던바 오리겐의 제자였던 몇 명의 애굽 수도사들에게 공격의 기회를 제공했고, 그것이 끝내 오리겐의 추방과 죽음을 가져온 강경조치에 대한 구실이 되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그의 작품 속에서 오리겐의 철학적 사변에 대해 결코 동정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또한 주석학자로서의 그의 접근방법은 오리겐이 제시한 원리에서 암시된 방법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위대한 이 설교자는 성경의 문자적, 또는 역사적 의미를 무시한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가 때로는 오리겐이 신비적 의미로 사용한 내용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본문의 일상적 뜻을 결코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크리소스톰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한 사람치고 오리겐의 작품을 모리는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리겐의 신비적 해석에 대한 옹호와 지나친 사변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크리소스톰은 그의 선배 중 어느 사람 못지 않게 주석학적 이론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그의 기여를 너무나 쉽게 망각하고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이 오리겐의 작품을 가까이 접했음에도 그가 지지하고 본부기로 제시한 그릇된 원칙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크리소스톰이 가졌던 실제적 목적은 스스로 알레고리적 해석에 빠져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소(Tarsus)의 감독직 이후 안디옥에서 디오도루(Diodorus)로부터 받은 훈련이 그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디오도루는 소위 안디옥 주석학파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오리겐의 잘못된 방법을 직설적으로 반대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갑바도기아의 3인’으로 통하는 유명한 바질(Basil)과 그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그리고 그의 친구 낫시안수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는 오리겐의 작품을 열심히 파헤쳐 그가 세운 주석학적 결과에 대한 권위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아리안(Arian) 논쟁의 교리학적 관심이 모든 신학적 조류를 압도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갈등의 기간은 진보적인 해석학의 등장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디오도루는 안디옥 근교에 자리한 한 수도원의 원장이었는데 크리소스톰과 그의 친구 바질은 거기서 수도사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거의 6년 동안이나 성경을 연구했습니다(주후 381년에 종료). 훗날 몹수에스티아(Mopsuestia)의 감독을 지냈던 데오도르(Theodore)는 네스토리안(Nestorian)신학의 교부로서 크리소스톰의 동료였습니다. 그는 디오도루가 합리적 견해에 매여 있을 때 크리소스톰에게 역사 - 주경학적 해석론에 대한 건전한 영향을 끼쳐준 친구였습니다. 이는 그들 유명한 두 제자, 크리소스톰과 데오도르의 작품에서 같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디오도루가 확립한 실제적인 요소, 즉 성경의 문자적이고 상식적인 그 해석방법은 주로 크리소스톰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적인 요소,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 연관성에 대한 그의 개념, 인류의 마지막 회복에 대한 그의 이러한 견해들은 주로 데오도르에 의해 재구성되었습니다. 이는 디오도루에 의해 정립된 영원한 형벌의 부인과 매우 유사합니다.

 

안디옥 학파의 영향력이 일시적이었다 할지라도 정확한 해석원리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는 일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그 원리는 헬라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인 크리소스톰에게 있어서 작품을 준비하는 데 계속 기여한 바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주석학자로서 오리겐과 디오도루의 극단주의를 상당한 범주에서까지 피함으로서 동방의 교부 중 그 누구보다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러한 확신이 더욱 굳어집니다.

 

‘그는 사상의 진행과정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그 내용을 상호 연관시키어 그가 택한 형식과 조화를 이루고, 본문에서 직접 찾은 신앙과 도덕적인 관찰 내용에서 축자적 의미를 보여준다. 교리 및 변증학적 면에서 더러 삽입된 알레고리적 부연은 해석에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수사학적 장식이나 관습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크리소스톰의 교리적인 입장은 일반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단적 견해를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위대한 설교자에게 신학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대로 교리적 해석원리가 그 주석을 크게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의 강해에 결점이 있고, 그의 주석이 우리에게 못마땅하다 할지라도 크리소스톰은 초대 교부 중 누구보다도 더 원칙을 정확하게 지킨 대표적 인물로 평가되어 마땅합니다. 설교자로서 그의 명성이 이런 사실에 기인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새로운 관심사는 해석의 역사 - 주석학적 방법론에 대한 일치성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유명한 강당설교자라면 신비적인 망상에 빠질 필요도 없었고, 성경의미의 교리적 오류가 있다면 그런 설교의 위력이 없을 것입니다.

 

2. 주석학적 업적의 범위와 특징

 

1) 크리소스톰의 주석학적 업적은 그의 강해설교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한 강해설교 중 6백 회 이상의 것이 보존되어 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설교는 해석학적 입장을 취한 것인데 성경을 연속적으로 강해한 것들입니다. 그가 연속 강해한 성경의 부분은 구약에서는 창세기와 시편이며, 신약에서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또 야고보서 이후의 모든 목회서신들과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책들입니다. 한편, ‘크리소스톰이 남긴 주석은 이사야서 1-8장과 갈라디아서뿐’(Schaff)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강해설교의 대부분은 속기에 의해 남겨진 것이지만 일부는 크리소스톰 자신이 간행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증거로 볼 때 그 설교들의 대부분이 사전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컨대 혼돈스런 문제에 대한 방치와, 또 책망과 찬사와 불만족한 부분에 대한 마무리의 아쉬움이 그 증거입니다. 미리 연구했다는 것이 강해에서 골고루 나타나지만 보존상의 문제나 전달방식의 허점 따위가 주석학적 정확성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더러 상치되는 내용과 부정확한 인용구가 그의 강해에서 엿보이는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히브리어에 통달하지 못했던 크리소스톰은 구약을 강해할 때는 필요한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점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강해할 때도 그는 역사적 문제는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나름대로의 강해 목적이 따로 있었기에 그리했다는 점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설교를 길게 설명하는 일에서는 바울 서신을 풀이할 때와 같이 주석학자로서 그가 지니고 있던 모든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2) 그의 모든 강해설교에서는 신·구약의 적절한 관계 개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신·구약에 대한 크리소스톰의 취급은 많은 측면에서, 전문적으로 성경신학이라고 하는 주경학의 한 분야에서 채택한 방법과 일치합니다. 그는 진행적인 움직임을 인정하고, 따라서 성경의 본질적 단일성을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구약의 미완성과 신약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두 책 사이의 특이한 점이 결코 대립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취급합니다. 강해설교의 날카로운 내용 중 일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버지로부터의 계시로서 구약의 권위를 부인하는 오류를 반대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두 책의 단일성이 구약의 역사적 의미를 희생하면서까지 유지되지는 않았습니다.

크리소스톰은 더 오래 된 계시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을 찾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비하는 측면에서 예언을 다루기보다는 하나의 교육체계로써의 예언의 훈계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주님을 영접하도록 훈련시켰다.’

 

아마도 유대인들에 대한 설교목적의 부재(不在)가 다른 대부분의 초대 교부들보다 크리소스톰에게는 더 뚜렷했던 것 같습니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가 마태복음 5장 17절의 강해에서 나타납니다.

영감 문제에 있어서 크리소스톰은 신인(神人)의 특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공식적 학설로 내놓지는 않았지만, 그는 성경 각 부분의 가치를 함축시키고 모든 말씀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기계적 영감설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복음서 본문 변화에 관한 그의 진술을 통해 볼 때 반대하는 입장이 분명합니다.

 

사실상 크리소스톰과 같은 주석학자가 성경의 신적 권위와 인적 저작권을 다같이 채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 관계는 부인할 경우 설교에서의 신령한 능력이 있을 수 없고, 인적 저작권을 무시할 때는 주석 같은 관심사가 필요 없게 됩니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심오하고 지속적인 성경연구의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연구의 결과 그는 성경해설에 넉넉함을 보일 수 있었고, 주목받는 강해설교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전체 성경에 대한 그의 지식과 사랑이 모든 곳에서 나타납니다.

 

3) 오리겐이 본문비판과 70인역을 인용하는 일에 탁월했던 것만큼, 크리소스톰은 우리에게 기대에 미칠 만한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부정확한 내용이 흔히 등장하고 교리적인 논쟁이 일어난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히브리 본문이 무시되기도 했습니다.

웨스트코트(Westcott)와 홀트(Hort)가 제시한 대로 신약의 시리아 본문이 주후 350년경에 동방교회에서 애용되었습니다. 당시 그 책은 훗날 17세기, 18세기 동안 공인본이 가졌던 것과 같은 지위를 가졌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대한 비평적인 검토의 시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리아 본문의 변화가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니었기에 강해설교에서 그것은 크게 중요시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공인본과의 차이점은 주목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로 인해 다소 불확실한 요소가 발생하기에, 비판적 목적을 위해 강해설교에서 가치를 추려내는 것도 유익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소스톰의 강해설교가 타인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교자 자신이 인용문을 얼마나 정확하게 사용했고, 또 어느 정도 정확하게 그것이 전달되었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후대의 필사자들이 자기 시대에 애용되던 문장과 맞추기 위해 문맥변경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알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같은 설교의 범위 속에 같은 성경이 두 가지 형식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꽤 빈번합니다.

 

크리소스톰의 헬라어 본문에 대한 필드(Field)의 노고는, 우리가 신약 본문의 사소한 변화에 관해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얻기 위해 이 교부를 인용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작업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다행스럽게도 마태복음 강해설교의 고대 사본에 접근한 디센돌프(Tischendorf)가 자신의 역작에서 그 연구의 결과를 제시합니다. 이 사본은 필드의 연구자료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디센돌프의 인용에 보완적 가치를 증대시켰습니다.

 

일부 독특한 문구가 마태복음 강해설교에서 등장합니다. 그 당시 널리 사용되지 않았던 것들도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크리소스톰의 부주의에서 비롯되었거나 아니면 설교자가 사용했던 단독 사본 속에 필사자의 실수로 삽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이나 시리아 본문이 당시 애용되었다는 사실에 한 증인이 됩니다. 그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의 얘기를 무시하고 있습니다(요 7:53, 8:11). 이것은 8세기 전 모든 헬라 교부들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사소한 변화는, 크리소스톰의 본문 차이점이 분명하다 할지라도, 흠정본 본문을 사용한 습관 때문에 옥스퍼드 번역에서는 충분하게 잡히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강해설교에서 나타나는 독구들은 개역성경 수정본의 역본이 난외주에서 보다 정확하게 논평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이미 시사한 대로 크리소스톰의 히브리어에 대한 무지가 구약성경 주해자로서의 신뢰성에 금이 가게 했습니다.

반대로 신약성경에서는 모든 면에서 우수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얼마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가끔 알레고리적인 주해에도 부정확성을 엿보이며 때로는 복음서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역사적 문제의 취급에서 일치성의 결여를 보여줍니다. 그는 그러한 문제의 논쟁에 대해 별 중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도 같습니다. 어거스틴(Agustin)은 이러한 문제의 취급에서 훨씬 단호한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윤리적인 목적이 크리소스톰으로 하여금 그러한 연구를 중단하게 한 것 같이 보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역기간과 관련하여 주님 형제의 난처한 질문, 막달라 마리아와 죄인이었던 여인과의 동일성 등에 관하여 우리는 이들 강해설교에서 만족할 만한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가끔 상징적으로 고고학적인 주제들이 오해나 확실한 과오를 낳는 어휘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대한 강해설교가 일반적으로 서신에 대한 강해설교보다 값진 평가를 받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그의 주석이 인간의 마음과 동기, 사람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심도 있게 다루었기에, 크리소스톰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추앙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비유, 병고침의 기적, 우리 주의 중요한 설교들을 강론하는 데 있어 그를 앞설 사람은 아직도 없습니다. 그의 탁월한 식견이 그로 하여금 천년설의 과격한 주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방법으로 중요한 종말론 설교를 할 수 있게 했음은 사실입니다(마 24, 25장). 오늘날도 그의 강해설교는 거의 수정 없이 사용되어도 무난하다는 정평을 받습니다.

 

그의 주석의 이러한 특징들은 서신서의 강해에서 크리소스톰의 우월성을 부여합니다. 복음서보다 서신에서 더 지속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이 등장합니다. 각 서신에서 크리소스톰은 신중하게 ‘전체의 연관성’을 검증합니다. 그리고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또 이해를 돕기 위해 설교 초두에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합니다. 그의 서론에서 그는 일반적으로 저자, 시간, 장소, 문장의 스타일, 그리고 그 편지를 받는 독자, 내용의 일반적 특징과 순서에 대한 유익한 관찰을 제시합니다. 히브리서를 바울이 썼다는 주장 역시 전반적으로 강해설교에 그것이 편입되어있다는 점과 성경의 다른 부분에 대한 참고내용에서 채택된 것입니다.


4,5세기 교부들

 

 

1. 암브로시우스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의 귀족 출신으로 밀라노 지방에서 지사로 있었다. 그런데 374년 밀라노의 감독 옥센티우스가 별세하고 새로운 감독을 추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리우스파와 정통파의 치열한 대립이 있었다. 이를 중재하던 암브로시우스에게 어떤 아이가 “암브로시우스가 우리의 감독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이때 온 무리의 박수와 찬동으로 그는 세례를 받고, 감독이 되었다.

 

 

1. 암브로시우스

 

그는 지사직을 떠나 감독 직분을 신중하게 받아들이고, 성경과 교부들을 열심히 연구하며 매일 설교했다. 그는 큰 웅변가이자 깊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였다. 그는 니케아 정통의 지지자로 당시 끊이지 않았던 아리우스 이단과 타협하지 않았다. 385년에 아리우스파를 지지해 온 발렌티니안 황제의 어머니 유스티나 황후가 암브로시우스에게 밀라노의 교회당 중 한 곳을 아리우스파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황제 경호원들이 완력으로 교회를 점령하려는 상황에서 암브로시우스는 교회 회중을 소집하고, 그가 작사 작곡한 찬송을 부르게 했다. 결국 황후는 교회당을 차지하려는 뜻을 포기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황실에 맞서 싸웠고, 결국 승리한 것이다.

 

이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에, 황제는 니케아 신경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암브로시우스와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었지만, 그가 황제를 권징한 일이 발생했다. 제국의 동방 데살로니가의 시민들이 무거운 세금에 반대해 그 지방 지사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에 황제는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7천 명의 시민을 학살한 것이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대학살을 큰 죄로 보고 그 죄에 상응하는 참회의 모습을 보일 때까지 황제에게 출교를 선언했다. 황제는 베옷을 입고 교회당을 찾았고, 감독 앞에 무릎 꿇고 사죄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종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암브로시우스의 신앙적 용기와 황제의 겸손을 보게 된다.

암브로시우스는 칭송 받는 설교자였고, 후일 서방 교회의 위대한 네 명의 교회 교사들(제롬, 어거스틴, 대 그레고리) 중 한 사람으로 불리게 된다. 이중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개종하게 되기도 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교회사에서 예배 의식과 찬송 작가의 선구자로 꼽힌다. 암브로시우스는 대 설교자요 실천적 신학자였으며, 진리에 양보가 없는 대담무쌍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2. 요한 크리소스톰

 

서방에 암브로시우스가 있었다면 동방에는 크리소스톰이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그의 별명으로 “황금의 입”이라는 뜻이며, 그의 본명은 “요한”이었다. 요한은 수사학과 법률학을 배우며, 어머니의 별세 후 금욕생활에 매력을 느껴 수도원에 들어가고, 381년에 안디옥에서 사제로 임직하게 된다. 그는 풍유적 성경 해석을 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달리 성경을 문자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안디옥의 전통을 따라 성경을 해석하며 설교자로 명성을 알렸다.

397년에 제국 동방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자리가 비게 되면서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황금의 입” 요한을 감독으로 선택했다. 요한은 안디옥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거의 납치를 당하듯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지게 되고, 398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필루스의 집례로 감독에 취임하게 된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도 능력 있는 설교로 많은 청중들을 얻게 되었다.

 

 

 

요한 크리소스톰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강력한 적들과 싸워야 했는데, 그들은 자기 감독 취임식을 집례한 알렉산드리아의 데오필루스와 황후 에우독시아였다. 데오필루스는 요한이 자기에게 순종해주기를 원했지만, 그렇지 않고 명성이 높아져 가는 요한을 시기하며 그의 성경해석이 편파적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요한은 주변 사제들의 부도덕한 모습을 정죄하는 강력한 설교를 하였는데, 특히 직선적인 그의 설교는 고위층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사치스러운 여성들이 지나치게 화려한 의복을 입는 것을 나무라며 책망했다. 이것을 황후 에우독시아는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다.

 

 

이 때,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오리겐 신학의 추종자 4명을 징계하였는데, 요한이 그들을 받아주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요한의 대적들과 데오필루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요한을 면직했다. 또한 에우독시아는 자신의 은 동상을 만들어 교회당 가까이에 세우고 제막식을 열자 요한이 이를 담대하게 정죄하였다. 이로 인해 요한은 미움을 샀고, 결국 안디옥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서방의 교황 이노센트1세가 항의했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유배를 당한 가운데서도 요한은 사람들과 서신 왕래를 하며, 교회의 자문 역할을 하다가 에우독시아는 407년에 그를 더 먼 외딴 지역 피티우스로 옮겨버렸다. 그는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요한은 황금의 입을 가진 목사로 놀라운 설교의 유산을 남겼다. 성경을 문자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안디옥의 방법을 발전시켰고, 암브로시우스와 함께 세상 통치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한 종이었다.

 

 

3. 제롬(히에로니무스)

 

 

4. 어거스틴(354-430)

어거스틴은 초대 교회 최고의 신학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게르만족에 의해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있던 시기에 활동했던 그는 초대교회 신학을 집대성하고, 중세 신학의 문을 연 사람으로, 초대교회의 마지막이자 중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가톨릭의 아버지이자, 개신교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그는 사도 바울 이래로 교회 역사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다.

 

 

(1) 고백록

그의 삶의 여정과 회심, 초기 신학에 대한 기록은 그의 책 “고백록”에 담겨있다. 이 책은 기도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제목과 아울러 이 책은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었다. 유년기부터 회심 직후까지 다루는 9권과 기억, 시간, 성경해석, 창세기1장 주석을 담은 4권으로 끝이 난다.

 

어거스틴

 

이 책에서 그는 전체 작품을 요약하는 하나의 단락으로 시작한다.

 

“주께서는 우리를 주님 자신을 위해 지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우리 마음은 쉬지 못합니다.”

 

이 단락에서 우리는 고백록의 중심 주제를 알게 된다. 바로 자기 자신과 모든 인간이 추구해 가는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으로의 여정이다.

 

 

그는 북아프리카 “타가스테”라는 지역에서 출생했다. 그는 불신자 아버지(파트리키우스)와 신실한 어머니인 모니카에게서 태어났다. 이후 그는 유아기를 반추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갓난아기에게서 나타나는 이기심을 통해 갓난아기조차도 죄책 아래 있음을 증거함으로써 고백을 써 내려간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죄악된 젊은 시절을 감명 깊게 추적해간다. 이웃집의 배를 훔쳐 먹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자신이 금지된 과일을 먹으려 했던 또 다른 아담이었음이라고 느낀다. 그는 불법을 행하기를 즐겨했던 것이다.

 

 

가족과 친지들의 권유로 수사학자가 되기 위해 그는 카르타고라는 대도시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비록 교리학교를 다녔지만 세례 받지 않고,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대도시 카르타고에서 유혹에 빠져 살았다. 한 여인과 동거하면서 18세에 사생아 아데도투스를 낳고, 10년 동안 마니교에 심취하여 살았다. 마니교는 이 세상을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이 투쟁하는 곳이라고 가르치는 이원론 체계를 가진 종교였다. 악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그에게 마니교의 이원론 사상은 그의 의문을 풀어주었고 마니교를 추종하게 되었다.

이후 친구들의 권유로 383년 로마로 옮겨가는데, 이 때 모니카도 아들의 회심을 기원하며 따라갔다. 신앙이 깊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기독교 신앙을 떠난 아들의 뒤를 평생 따라다니며 그의 개종을 위해 기도했다. 아들을 뒤따르며 그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모니카를 본 한 목사는 “눈물의 자식은 망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 밀라노에 갔는데, 거기서 당시 설교자로 있던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신플라톤주의에 매혹되어 여전히 철학의 영향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여전히 정욕의 노예로 살고 있었다. 그런 삶의 번민 가운데 있을 때, 어느 날 정원에서 아이들의 노랫소리인 “집어 들고 읽어라(Tolle Lege!)를 듣고, 성경을 펴서 읽었는데, 그때 읽은 본문이 로마서 13:13,14이었다. 이후 그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죄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을 그는 ”신앙의 빛이 내 마음에 쏟아지고 의심의 모든 어두움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387년 부활절에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타가스테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려고 결심하고 어머니와 떠났다. 로마의 항구인 오스티아에서 카르타고로 돌아오기 직전 어머니 모니카는 열병에 걸려 아들의 품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평생 그를 따르며 애타게 기도하던 그녀는 아들의 회심을 봄으로 사명을 다했던 것이다. 그가 고향 타가스테에 있는 동안 그의 사랑하는 아들 또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수도원을 세워 금욕생활을 할 것을 결심하고 히포로 갔는데, 거기서 뜻하지 않게 반강제로 391년 사제로 세움을 받게 되었다. 이후 감독이 되어(396년) 죽을 때(430년)까지 35년 동안 봉사하게 된다.

 

 

(2)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싸움

 

과거 디오크레티안 황제의 박해 시절(303-305년)에 많은 사제들은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문제는 핍박의 시대가 끝나고 기독교가 공인된 후 생겨났다. 과거 배교했던 사제들의 직분과 그들이 시행한 세례를 무효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이 바로 도나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인 도나투스파이다. 이들은 배교한 기존 교회로부터 분열해 나가서 거의 100년 간 분파교회를 세워 왔었다. 이들은 절대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를 원했다. 아프리카의 교회는 ‘타락한(?)’ 가톨릭 잔류파와 ‘지극히 순수한’ 도나투스 추종자들의 경쟁으로 나뉘어졌다. 이들은 자기 의견에 맞지 않으면 이단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이들은 스스로를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그리스도의 군대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라고 하며 교회 분열의 필연성을 부인했다. 모든 죄를 교회에서 추방할 수 없으며, 서로의 관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완전한 교회나 교단의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는 세례의 유효성과 효과를 구분했다. 그리스도가 성례의 최고 집례자이고, 세례를 주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것을 수행하였을 뿐이므로, 세례의 유효성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성례의 유효성은 집례하는 사람에게 달려있지 않고 성례를 세우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성례의 유효성은 집례자의 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집례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삼위 하나님께 있다고 함으로써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했다.

또한 동시에 성례가 자동적으로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성례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보편적 교회와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오직 거룩한 신자들만 거룩한 교회에 속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어거스틴은 종말에 완성될 때까지 교회는 혼합된 몸으로 남아 있는다고 주장하였다(알곡과 가라지).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보편적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고 분열시키는 반기독교적 행위를 했기 때문에 성례의 효과를 상실했다. 어거스틴은 성례의 객관성과 성례의 주관성을 종합시켰다.

 

 

(3) 하나님의 도성

 

410년 알라리쿠스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를 약탈하였다. 이것은 경악스러운 사건이었다. 800년간 단 한 번도 침략 받지 않던 제국의 심장 로마가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교도들은 로마가 기독교를 공식 종교로 채택하고 오랫동안 자신들을 보호해 온 신들을 저버린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고전적 이교주의로의 회귀를 부르짖은 것이다

.

어거스틴은 이에 대한 거대한 반대 변론으로서 성경적 역사관을 그린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작품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일하시며, 로마의 몰락은 죄의 결과라는 것을 밝혔다. 또 아벨과 가인 이후 세상에는 하나님의 도성(교회)과 인간의 도성(이방인 세계)이 있으며 이 둘은 언제나 상반관계에 있고, 인간의 도성은 무너지고 끝나지만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성경적 역사관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히 그 시대만을 위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아프리카에 머물면서 다시금 위대한 로마로 돌아가기를 고대하는 로마 난민들이 바른 생각을 가지기를 원했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래야 하는 도시는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 예루살렘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하늘을 향한 비전이 로마와 같은 이 땅의 제국들의 운명에 대해 바른 시각을 갖도록 한다고 역설했다.

 

 

(4)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맞서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 논쟁으로도 유명하다. 펠라기우스는 아일랜드 태생의 수도사로 385년경 로마에 온 뒤, 로마의 문란한 도덕 생활에 충격을 받고 도덕과 죄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가 형식화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앞장서 반대하는 가운데 수년을 로마에서 가르쳤다. 펠라기우스가 가졌던 믿음은 단순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도덕적인 완전에 이를 만한 잠재력이 있다고 믿었고, “완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노력으로 자력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펠라기우스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는 전가교리의 부정이었다. 즉,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는 죄책 같은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 아담의 죄는 아담에게만 제한될 뿐, 그의 자손들은 아담의 죄와 상관없고, 죄 없이 태어난다고 보았다(원죄 부정). 그렇기에 인간이 받는 저주의 죽음은 아담을 본받아 죄를 짓기 때문이지, 태어날 때부터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받아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구원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서 얻는 것이지, 새로운 출생(중생)을 통해 선물로 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우리 각자는 죄를 책임질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개인의 노력과 의지로 죄를 짓지 않고 구원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어거스틴의 주장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왜냐하면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인간에 대한 낙관과 개인의 자유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자력구원의 신학을 전파한 펠라기우스가 더 환영을 받았지만, 사실 그의 신학은 황량하고 냉랭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개인에게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책임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 각자는 반드시 완전해야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사실 자신의 생애에서 죄의 무서운 능력을 스스로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이 생래적으로 부패했다는 원죄를 부인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고 오염되었고(롬5:12), 우리에게는 선을 행할 자유의지가 없고, 있다면 오직 악을 향하여 달리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의지는 전적으로 오염되었기에 스스로 구원 받기 위한 어떤 것을 행한 능력과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우리의 의지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 없이는 우리 자신은 기꺼이 죄를 사랑하는 편을 택할 뿐 그 반대를 택하지는 못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본질상 그의 죄책과 본성을 나누어 받는다. 우리가 모두 그 한 사람이었을 때, 우리는 모두 그 한 사람 안에 있었다. 이와 같이 구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다시 태어나 그 몸의 지체가 되어 그의 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은혜의 교리를 밝혔다(롬9:16).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이 그의 주권적 은혜로 그가 기뻐하시는 자들을 구원하기로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고백했다(엡1:3-6). 어거스틴의 죄와 구원, 예정,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등의 교리는 이 펠라기우스 이단에 대한 반응에서 온 것이었다.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이후에 재연되는데,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논쟁(자유의지 vs 노예의지), 17세기 레이든 대학의 아르미니우스가 주장한 것을 반박한 도르트 회의와 신조가 있다(아르미니우스는 원죄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가 사람을 전적으로 타락시키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반펠라기우스주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은 가톨릭이나 개신교 양 진영이 모두 동의한다. 그런데 그 은혜가 주어지는 수단에서 차이가 난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본다. 그러나 가톨릭은 믿음+교회의 7성사 참여(사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주입, 개신교는 전가로 본다)해야 한다.


 

 

콘스탄티누스

 

313년을 기점으로 이때부터 Christendom이 시작된다. 이 개념은 한 나라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 있는 나라에서 교회와 정치가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주요인물이 바로 콘스탄티누스이다. 그는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305년에 디오크레티안 황제가 물러나고, 제국은 동,서로 나눠서 통치되었다. 제국 동방의 황제 갈레리우스는 311년에 기독교를 공인했다. 제국 서방에서는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패권을 두고 싸웠는데, 이때 열세였던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제국의 서방의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312년). 그 후 313년 밀라노 칙령을 만들게 되는데 그 때 기독교는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게 되었고,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을 금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사실상 기독교 평화시대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기독교의 양적 성장과 번성이 시작되었다.

 

 

이 후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일요일을 쉬는 날로 법 제정을 했다. 성직자들에게는 병역 면제, 세금 면제를 했다. 또 박해 때 몰수했던 재산을 반환하고, 교회가 자기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또 기독교가 국교가 아님에도 파괴된 이교도 사원을 다시 세우는 것을 금하였다.

 

 

Christendom의 장점과 단점

장점 : 교인들이 늘어남,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기반이 됨, 핍박의 시대에 할 수 없었던 것을 하게 됨(교회회의를 하고 신앙을 체계화, 조직 정비)

단점 : 신앙의 수준이 하락, 권력과 출세와 부유함을 위해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교리논쟁과 공의회

왜 공의회(The Ecumenical Council)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전까지는 핍박시대이기 공식적일 수 없고, 모든 교회들이 전부 모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이 있었기 때문에 공의회가 가능했다. 이때로부터 300년간 교회는 기독론 논쟁, “예수는 누구인가?”을 하게 된다.

 

 

1. 니케아 공의회 : 삼위일체 논쟁, 예수님은 아버지와 동등한 하나님, 니케아 신조

 

 

- 아리우스는 318년부터 325년까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로 있었다. 그는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 서로 다르다”는 견해를 가지고 가르쳤다(터툴리안 - 한 본질, 세 위격). 그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없는 가운데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 속한다고 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들에게는 시작이 있으나 하나님에게는 시작이 없다”는 주장을 하며, 성자는 탁월한 신이지만 어떤 특정한 시점부터 존재했다(오리겐은 eternal generation)고 주장했다. 즉,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성부와 동등한 하나님이 아닌 낮은 하나님이라고 본 것이다.

 

예수님은 본질과 영원성에 있어서 완전한 신이 아니라 제2의 신, 종속된 신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이지만 영원한 신이 아니고, 완벽한 인간도 아니다, 신과 인간의 중간에 있었던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소위 유사본질(homoi ousia)이라고 하는데, 반대로 아타나시우스는 동일본질(homo ousia)을 주장하였다.

 

 

이 때 콘스탄틴 황제는 교회의 분열로 인해 통일된 제국의 평화가 위협 받는다고 판단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국 감독들의 공의회를 니케아에서 소집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역사상 첫 번째로 열린 세계적인 교회공의회(the first ecumenical Council)였다. 제국의 비용으로 약 300명의 감독들과 자문위원들이 회의에 참석했고, 황제는 명예의장이 되어 분열을 초래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교회의 분열은 영원한 영혼에 관련된 것이므로 전쟁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했다.

 

이 때 아리우스주의를 대표해서 온 소규모 파견단은 아주 몹쓸 대접을 받았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견해를 그들이 표명했을 때, 어떤 감독들은 귀를 막았고, 어떤 감독은 멱살잡이를 하기도 하였다.

니케아 공의회 결과로 아타나시우스의 정통 교리가 채택되었고, 공의회는 성부, 성자의 관계에 대한 교회적인 신조를 작성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니케아신조이다. 그 결과 신조 속에 그리스도는 ‘성부로부터 나시고 지음을 받지 않으셨으며’ ‘아버지와 같은 본질에 속한다’는 진술로 성부, 성자 관계를 분명하게 했다.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와 두 감독 외에 모두 이 신조에 서명을 받았다. 이 니케아 신조는 동서방 교회 모두가 받아 사용하는 보편적인 신조이다.

 

 

- 부활절 날짜도 결정, 성탄절 날짜도 결정, 사순절 기간이 40일인 것도 결정.

 

- 평가

1. 예루살렘 공의회(주후 40년) 이후 첫 번째 공의회.

2. 교회에서 신학이라는 주제를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첫 번째 사례.

3. 이 회의를 주도, 결정하는 것에 정치적 개입의 문제가 있었다.

4.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짐 (모든 교회들이 공통으로 따르는 유일한 신조가 니케아 신조다.)

5. 니케아 신조를 사용하는 교회를 Catholic Church가 된다. (아리우스는 가톨릭이 아님)

 

 

- 아타나시우스

교회사에는 신앙을 위해 박해 받다 생명을 잃은 순교자들도 있지만,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다 무서운 수난을 겪은 투사들도 있다. 그중 아리우스 이단에 도전하고, 추방과 유배 등 갖은 수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싸워 승리한 투사가 있으니 그가 바로 “불멸”이라는 이름 뜻을 가진 아타나시우스다. 그는 296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그곳 감독 알렉산더의 서기로 발탁되었고,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타협을 모르는 강력한 정통교리 수호자였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이 득세하자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됐을 때, 알렉산더 감독과 함께 참석하여 아리우스가 이단임을 밝히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니케아 공의회 2년 후 알렉산더가 별세하고, 아타나시우스가 감독이 되었다. 그런데 이단으로 정죄 받았던 아리우스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득세하게 되었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정통파를 지지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아리우스를 다시 받아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조에 서명하지 않으면 복권시킬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하다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오는 밀 수입을 막고 있다는 모함, 그가 아르세니우스 감독을 살해하고 그 뼈를 마술에 사용했다는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잠적했던 아르세니우스를 찾아내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였다. 그러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갈리아 지방에서 감금당하게 된다. 이 때 아리우스는 죽고, 그는 “이교주의 대항하여”, “성육신에 관하여”라는 위대한 저작을 쓰게 된다.

 

이후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 복권되지만 다시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해 고소를 당하고 로마에서 7년 간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다시 복권되었지만, 아리우스주의자였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그를 체포하고자 5천 명의 군사들을 그가 기도회를 인도하는 교회로 보냈다. 그는 혼란한 상황 가운데 수도사들의 도움으로 광야로 피신하였고, 광야 사막에 은거하면서 “아리우스주의에 대하여” “성 안토니오 전”을 집필하게 된다.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리고, 마른 웅덩이와 공동묘지에 숨어 지내기도 하였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없애고자 혈안이 되었지만, 도리어 이러한 공격으로 인해 아타나시우스는 광야에서 이단 사상을 배격할 무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평생 5번, 20년 가까운 세월을 유배생활로 보내면서도 삼위일체 신학의 정통을 지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 아리우스 이단을 배척하는데 강력한 주장으로 초지일관한 신학자였다. 또한 은둔자들의 영향으로 교회의 영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까지도 정통 교회가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보편 신조 가운데 하나인 ‘아타나시우스 신조’도 그가 정통 교리의 투사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교주의에 대항하여 : 마카리우스라는 초신자에게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기 위해 집필된 책이다. 여기서 그는 형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형상은 인격적 지식과 교제를 토대로 하는데, 곧 인간 정체성의 중심에는 그리스도를 알고 교제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몰두하도록 지음 받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등졌고, 이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성육신에 관하여 : 이 책에서 그는 태초에 천지를 지으신 동일하신 말씀이 피조물의 갱신을 성취하셨다고 주장한다. 인간을 완전히 멸망에 두지 않으시고, 말씀이 오셔서 인간을 재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재창조와 구원이 단순히 구원된 지위를 받거나 하나님의 어떤 복이 아니라 구원은 성부와 성자와의 참 교제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우스는 이 구원을 빼앗아간 것이다. 진실로 성자는 우리로 하여금 신적 존재가 되도록 인성을 취하셨다.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 아리우스주의는 하나님이 어떠해야 하는지 철학적인 전제로 시작한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하나님은 사변적인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기원이 없는 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원이 없는 분으로 보거나, 창조자로 먼저 정의한다면 매우 추상적인 하나님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기원이 없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시다. 우리는 아들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로 안다. 우리는 아들을 통해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성경이 말하지 않는 다른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고,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은 창조자이기 전에 먼저 아버지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리우스가 말하는 고립되고 외로운 기원되지 않은 존재가 아니라 풍성한 사랑과 생명을 가진 아버지시기에 창조 사역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타나시우스는 “낳는 것”과 “만들어진 것” 간의 구별을 명확히 했다. 한 주체는 오직 자신과 동일한 종류의 것만을 낳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을 낳고, 성부는 성자를 낳으신다. 반면 어떤 주체는 자신과 다른 종류의 것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도넛을 만들고,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다. 사람이 도넛을 낳을 수 없고, 하나님이 세상을 낳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사람을 만들 수 없고, 하나님도 역시 아들을 만들 수 없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신데, 이것은 동일한 한 하나님을 절반씩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하나님, 동일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동일본질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즉시 우리는 성부와 더불어 성자의 존재를 나타낸다.

 

 

그런데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영원한 성자를 부정함으로서 결국 성부의 존재 자체와 정체성을 부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이 이렇게 처절하게 싸우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의 정체성과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

 

 

- 안토니

사도 시대 이후 교회가 점차 제도화되고, 신앙의 열정이 식으면서 교회생활은 빠르게 세속화되었다. 특히 기독교가 공인되고, 사람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교회에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교회는 더욱 세속화되었다. 이 때 세상을 멀리하고 외딴 곳으로 가서 금욕생활을 하면서 수도원 생활의 길을 연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안토니였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부자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19:21)에 감명을 받고, 자기의 모든 토지를 부락민에게 주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하며, 매일 한 끼의 식사를 하며, 맨바닥에서 잠을 잤다.

 

313년 기독교 공인 이후 박해가 그치고, 제국의 보호를 받는 특권집단이 된 기독교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리하여 참된 그리스도인과 외식적인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런 교회의 속화에 실망하여 순수한 신앙생활을 원한 안토니는 묘혈 속에 들어가 살았다.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의 전기를 보면 이 당시 12년 동안 안토니는 마귀에게 괴로움을 받으며 살았는데, 그 모든 시험을 다 이겼다고 한다. 이후 그는 세상으로부터 더 멀리 떠나 버려진 옛 요새에서 20년간 사람들과 멀리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러한 안토니의 경건 생활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집을 짓고 소박하게 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안토니는 그들에게 금식, 기도, 자비의 사역에 대한 상담을 하고 지도했다.

 

 

그는 은둔 생활만 한 금욕주의자만은 아니었다. 100세가 다 된 350년 경 아리우스 이단을 배격하기 위한 여행을 하기도 하고, 이로 인해 아타나시우스는 그를 존경하며, 이상적인 수도사로 그를 소개했다. 안토니는 105세에 별세했는데 혹 자신이 미신적인 숭배의 대상이 될까 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묻어달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안토니 이후, 금욕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수도사가 되는 전통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안토니의 젊은 제자 파코미우스에 의해 수도사들의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고, 종교개혁 시기까지 많은 수도원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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