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병자를 고치심 (마 9:1-8)
치유와 축사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전 지역에 전파되었고, 또 사역이 확장되어 감에 따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가와 누가는 갈릴리에서 일어난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 사건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했던 문제는 신성모독적인 발언, 죄인들과의 교제, 금식 문제, 그리고 안식일 문제 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세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전하심(마 9:1, 막 2:1-2, 눅 5:17)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마 9: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조차 자리가 없는 상태에서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막 2:1-2)..."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아 있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로 인해서 자신의 소문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공개적으로 마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밀려 드는 무리들로 인해서 공개적으로 사역을 하지 못하고 마을 바깥에 있는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의 다시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아마 이때에 예수님의 일행은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에 머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은 즉시 온 갈릴리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또 병도 고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시몬의 집은 문 앞에도 사람들이 서 있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에 그 자리에는 갈릴리와 유대,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가르치는 내용을 조사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들은 가버나움을 방문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2.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3, 막 2:3-5, 눅 5:18-20)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올 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3-5)..."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눅 5:18-20).."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에 네 사람이 침상에 누인 한 중풍병자를 침상 채로 메고 왔습니다. 네 사람이 메고 온 것을 보면 이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중증 환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밖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계단을 통해서 평평한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붕을 뚫어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앞으로 그 환자를 매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능히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들에게 이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이러한 비상식적인 시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매달아 내린 환자를 보고, 그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에 합당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환자의 질병이 그의 죄로 인해 생겼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병을 치료하기 전에 먼저 그의 죄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 예수님은 병을 치유하기 전에 먼저 죄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모든 병이 죄로 인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 질병은 죄로 인해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3. 서기관들의 반응(마 9:3, 막 2:6-7, 눅 5:21)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마 9:3)."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신성모독 적인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눅 5:21)"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마지막 때에 우리를 심판하실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심판할 권한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속죄 제물이 되어 돌아가실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에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실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그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 곳에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이러한 예수님의 말을 들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전문 교사로서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가 용서를 받았느니라!"고 하시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며 또 죄인을 위해서 돌아가실 분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발언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감히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으로 이미 예수님을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고 다음 시간에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전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서 파견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네 친구가 한 중풍병자를 침상 째 메고와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매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을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그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면서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1. 사죄의 권세를 가진 예수(마 9:4-6(상),막2:8-10(상),눅 5:22-24(상))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마 9:4-6(상))..."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막 2:8-10(상))..."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눅 5:22-24(상))..."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신적인 권세를 가진 것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러한 생각을 하느냐?"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말이 더 쉽겠느냐?"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죄 선언을 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일은 병을 고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는 병을 낫게 하는 일은 말씀으로 선포하면 되지만, 죄를 용서하는 일은 그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대신 죽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 하는 일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죄를 용서하실 권세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친히 속죄 제물이 되어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실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리들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을 통해서 자신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신적인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이 말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말세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이양 받을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분이었습니다(단 7:13-14). 당시에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 받아 사역에 장애를 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을 "인자"로 소개하셨습니다(8:31, 9:12,31, 10:33, 14:21 등).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사죄의 권세가 있음을 보여 주심으로 자신이 다니엘이 말한 종말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2. 일어나 침상을 들고 가라!(마 9:6-7, 막 2:11-12, 눅 5:24-25)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마 9:6-7)..."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막 2:10-12(상))..."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눅 5:24-25)..."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 예수님은 그의 병의 원인인 죄를 먼저 제거한 후에 그가 원하는 중풍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병이 나았다고 선언하신 후에 그의 병이 낫는다면 그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도 믿을 수 있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중풍병자의 병이 낫지 않는다면 그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믿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칩상에서 일어나서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메고 걸어나갔습니다. 중풍병자가 건강해져서 자기 발로 걸어나간 것은 그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주실 때에 우리의 영혼과 질병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원과 치유는 완전합니다. 이러한 치유 사건은 예수님을 통해 시닥된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메시아 시대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절름발이가 뛰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35:6, 렘 31:8 등 참고).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예언을 실제로 성취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러한 일들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고, 또 예수님께서 성경에 예고된 종말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무리들의 반응(마 9:8, 막 2:12(하), 눅 5:26)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9:8)."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막 2:12(하))."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 5:26)."
그 중풍병자는 인간적으로 전혀 희망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죄와 질병을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리들은 이 일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을 보고, 크신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무리들은 이 일을 보고 이 기적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예수님께서 특별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심히 두려워하면서 "우리가 (전에는)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오늘 목격한 일은 전에는 전혀 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이 하나님에 의해 일어났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기적을 보고도 계속해서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우리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자신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졌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둘째로 이 사건은 복음이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온전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믿는 사람의 죄(영혼의 질병)를 용서받게 해주고, 장차 우리의 몸을 예수님처럼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이 사건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으며, 예수님께서 성경에 예언된 종말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오래 전에 메시아께서 오시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소경이 눈을 뜨며, 앉은뱅이와 절름발이가 뛰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을 성취하심으로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으며, 또한 자신이 종말에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야이로의 간청과 혈루병에 걸린 여인 (마 9:18-22)
예수님은 거라사의 광인을 고쳐서 자신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만드셨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했으며, 또 경제적인 손실을 입을 것을 염려해서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대로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서 자신을 증거할 증인을 남겨주셨습니다. 그 일꾼은 바로 얼마 전까지도 귀신에 들려서 날뛰던 광인이었습니다. 그는 고침을 받은 후에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집에 가서 자신이 그에게 행한 크고 자비로운 일을 전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는 그 말씀대로 온 지역을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전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귀신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을 천국 일꾼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이방인의 마을인 거라사에도 천국 빛이 비취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또 다른 기적, 즉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고쳐 주신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참고: 샌드위치 기법에 대해서
이제 계속되는 본문에는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과,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본문에서 독특한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한 이야기(야이로의 딸을 고친 이야기) 사이에 또 다른 이야기(혈루증 여인이 고침 받은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와 같이 한 이야기 사이에 다른 이야기를 삽입하는 것을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특히 마가복음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 마가는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 사이에(막 3:21-22, 31-35),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사건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와 같이 유사한 두 사건을 동시에 기록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배척이 고조되고 있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샌드위치 기법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한 사건이 긴 시간이 경과한 경우.
2) 긴장이 극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경우.
3) 두 사건의 주요 유사점이나 대조를 통해 필요한 내용을 강조하는 경우.
본문에서도 야이로의 딸을 살린 이야기 사이에 12년 된 혈루증 여인을 고친 사건(5-34)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러한 샌드위치 기법이 사용된 것은 1) 첫째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동안에 많은 시간이 경과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2) 둘째로 비슷한 두 사건을 비교함으로써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 회당장 야이로의 간구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18),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마 9:18-19)..."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21).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22),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23),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막 5:21-24)."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40).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41), 이는 자기에게 열 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눅 8:40-42)."
예수님은 거라사 땅을 떠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서편(아마도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도착하셨을 때에, 그곳에는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동편에 있는 거라사 주민들은 예수님이 떠나기를 원했지만, 갈릴리 서편에서는 큰 무리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도착하신 후에, 배에서 내려서 무리들이 있는 해변가로 가셨습니다.
바로 그때에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회당장은 회당의 건물을 관리하고 예배를 책임진 평신도 관리였습니다. 당시에 회당장은 마을에서 크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겸손하게 엎드렸습니다. 당시에 마을에서 존경 받는 회당장이 예수님과 같은 젊은 청년에게 엎드려서 간청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내 딸이 죽게 되었으니 빨리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어 구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시에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치는 것은 병자를 치유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자기 딸을 고쳐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딸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을 향해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이 장면을 목격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면서 함께 야이로의 집으로 갔습니다.
3. 혈루증을 앓던 여인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25),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5-26)..."
"이에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눅 8:43)..."
그때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에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앓던 병은 자궁에서 하혈을 하는 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기록만으로는 그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유출병 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출병 환자들은 공적인 예배에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유출병 환자와 접촉하는 사람도 부정해진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유출병 환자와 접촉하는 일을 피했습니다. 그 동안 그녀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여러 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허비했지만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병은 치료 과정에서 더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수많은 의사들을 찾아 다니다가 전 재산을 허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전 재산을 쓰고도 병을 고치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그들은 신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들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신에게 매달립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능히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혈루병을 고침 받은 여인처럼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고쳐주신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갈릴리 서편의 거라사 지방을 떠나서 갈릴리 동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셨을 때에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죽게된 자기의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딸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그의 집을 향해 가셨습니다. 이때에 수많은 무리들도 예수님을 따라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무리들 중에는 12년 동안 혈루증에 걸린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많은 의원들을 찾아다녔지만, 병을 고치지 못하고 모든 재산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병은 더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이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 치유받은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옷 가를 만진 여인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20),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 9:20-21)."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27).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28).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 5:27-29)."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 8:44)."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불치병을 고쳐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주 오시는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때에 예수님은 거라사를 떠나서 그녀가 있던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 금지된 부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출병이 있는 사람을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과 접촉을 하면 그들 역시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할 수 없이 은밀하게 예수님께 접근해서 그 옷에 손을 대기로 계획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후에 아무도 모르게 그곳을 빠져 나오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러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녀는 무리들 틈에 끼어서 은밀하게 예수님의 뒤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순간 자기 몸에서 흐르던 피가 멈춘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수많은 의사들이 고치지 못했던 병이 한 순간에 치료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닫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비롭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혈루병으로 고통받던 여인이 예수님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녀에게 복음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고,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육신의 병에 걸린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간구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죄에서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사람을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 죄를 이기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그 옷에 손만 대어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과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바로 지금 예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30),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다 물으시나이까? 하니...(31).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32)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33),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0-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4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46),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눅 8:45-48)."
예수님은 그 순간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뒤를 돌아보시면서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데 누가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자들은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나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이 나은 여인과 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미신적인 신앙을 가진 채 돌려보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온전한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하신 후에 무리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때에 혈루병을 고침 받은 여인은 몰래 예수님의 옷에 손댄 일로 인해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용기를 내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서 자신이 한 일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신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 예수님은 그녀가 나은 것은 그녀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옷에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믿음을 통해서 고침받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신앙을 미신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 위에 세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완치되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34). 이제 그녀는 예수님의 옷을 몰래 만진 것에 대해서 가책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고민하지 않도록 그녀가 나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육체를 고쳐 주셨을 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도 평안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육신과 영혼을 모두 온전하게 해줍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여인을 불러서 치유를 선언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예수님을 속인 일로 인해서 가책 받으면서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병이 나은 후에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면 온전한 치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산 송장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성전에 나가서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소외된 여인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죄는 하나님과 이웃들로부터 사람을 분리시킨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적은 믿음을 보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치유는 육체와 영혼을 포함한 전인적이다.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심 (마 9:23-26)
예수님께서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고치시는 동안에 야이로의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과 함께 집으로 가다가 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네가 믿으면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낙심하기 쉬운 때에 야이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절망의 순간에 성도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신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23),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마 9:23-25)."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막 5:37-40(상))."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51).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52),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고로 비웃더라(눅 8:51-53)."
예수님은 야이로를 위로하신 후에,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야이로의 집을 향해 가셨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세 제자들은 중요한 때마다 예수님과 동행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세 사람을 야이로의 집으로 데리고 가셔서 죽었던 딸을 다시 살려 낸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 세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때마다 이 세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그들이 그 장면을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 세 제자들이 장차 하나님 나라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 야이로의 집에서는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 집에서는 죽은 아이를 위해서 애곡하며 피리를 불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례식의 초반에 직업적인 울음꾼을 고용해서 슬픈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난해도 아내가 죽으면 피리 부는 사람과 애곡하는 사람을 한 사람씩 고용했습니다. 회당장은 사회적 지위가 있고 또 재산이 많기 때문에, 더 많은 애곡인과 피리 부는 사람들을 고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며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슬퍼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이 아이는 완전히 죽어있었습니다. 그녀는 호흡을 멈추었고, 뇌를 비롯한 모든 신체 활동이 중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그 아이는 잠자고 있는 것가 동일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그 아이를 다시 살려 주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사람들이 잠시 잠을 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그들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에 죽은 생명을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 아이가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2. 달리다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 살이라(막 5:40-42)."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눅 8:54-55)
예수님은 애곡하는 사람들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다 밖으로 내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웃는 무리들에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에, 세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숨기십니다. 예수님은 방으로 들어가신 후에, 그 소녀의 손을 잡고 아람어로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로마의 독자들을 위해서 섰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람어를 모르는 로마의 독자들을 위해서 "달리다굼"의 의미가 무었인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람어로 '달라다굼'이라는 말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즉시 일어나서 걸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는 이 때에 그 아이의 영이 그의 몸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떠났던 그 아이의 영혼을 다시 불러서 그의 육신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강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죽음의 능력은 강력해서 아무도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세력이 야이로의 가정을 덮었을 때에, 그 가정에서 사망을 물리쳐 주셨습니다(호 13:14, 고전 15:16). 또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일어날 한 가지 장면을 미리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일어나라!"고 명령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이를 알리지 말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마 9:26)"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막 5:43)."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눅 8:54-56)."
소녀의 부모와 세 제자들은 이 사실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놀랐다'는 말(엑키스테미)은 "크게 놀라서 정신이 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죽은 줄로 알았던 소녀가 일어나서 걸어다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정신이 나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부모에게 그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는 죽어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의 몸은 많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모에게 그 아이에게 음식을 주어 그 아이가 그 음식을 먹고 힘을 낼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그 아이에게 음식을 주었고, 그 아이는 그 음식을 먹고 다시 힘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부모들은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이웃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부모들에게 그 날 그 집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때까지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와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유대인 중심의 세계적인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인들은 메시아를 로마에 항거할 반역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슬데 없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잠시 동안 자신의 신성을 감추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실을 완전히 숨기지 못했습니다. 이는 이를 본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죽은 아이를 살려신 일이 사방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소경과 벙어리를 고치심(마9:27-35)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가셔서 죽었던 딸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가셨을 때에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아이가 잠을 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신 후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 그리고 그 아이의 부모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 아이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이 광경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자신이 생명의 주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지시하시고,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통해서 갈릴리 온 지역에 전파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던 아이를 다시 살려 주신 후에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마태는 이 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다가 행하신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사건 중에 첫 번째 사건인 소경을 고쳐 주신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 새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마 9:27)..."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그 집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두 시각 장애자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종말에 와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메시아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말은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아께서 오셔서 자신들을 로마의 손에서 해방시킬 것을 고대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다윗의 자손'은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구원할 정치 지도자를 의미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은 자신을 공개적으로 메시아라고 소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로마 당국으로부터 혁명가로 오해받는 일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두 시각 장애자들이 자신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면서 따라올 때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두 소경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쳤습니다.
2. 믿음과 응답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28),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29),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마 9:28-30(상))."
마침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두 시각장애자들도 그 집으로 따라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부터 그들에게 반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집안에서는 로마 당국으로부터 오해받을 염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요? 이러한 때에는 예수님께 우리의 부족한 믿음의 도와 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 때에 두 시각 장애자들은 "주여! 그렇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고쳐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시각 장애자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 믿음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어야 하며, 둘째로 하나님이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하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에는 예수님이 계신 것과, 그 분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하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네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 우리의 믿음이 현실로 변하는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3.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30),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마 9:30(하)-31)."
예수님은 이번에도 고침받은 두 시각 장애자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한 기적으로 인해서 로마 당국이 자신에 대해 오해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에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서 로마에 반기를 들 정치 지도자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당분간 자신을 메시아로 나타내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알려지게 되면, 종교 지도자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을 로마에 고소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놓는 일, 즉 천국 복음을 전하고 제자들을 훈련하는 일에 방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장차 참된 메시아관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일시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셨습니다. 그러나 두 시각 장애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는 곳마다 자신들이 고침 받은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시각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일이 온 갈릴리에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두 명의 시각 장애자들을 고쳐서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면서 자비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집으로 쫓아 들어가서 눈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칠 줄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고, 그 즉시 그들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두 시각 장애자들의 믿음대로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을 고쳐주신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기뻐서 가는 곳마다 자신이 고침 받은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1. 귀신들려 벙어리 된 사람을 고치심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마 9:32-33(상))..."
두 시각 장애자들이 고침을 받고 나갈 때에, 귀신에 들려서 청각 장애자가 된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귀신에 사로잡힐 때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장애 현상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귀신에 들린 사람이 청각 장애자가 되기도 하고(마 9:32, 12:22, 막9:25), 간질에 걸리기도 하(마17:15-18), 또 등이 굽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눅 13:11).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 일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사단과의 영적 전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혼만 구원하시지 않고 우리의 육신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제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낼 때에, 힘들게 애쓰거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대로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께서 창조주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진리를 가르쳐 주셨고, 또 능력으로 자신의 신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진리를 깨닫게 되고, 또 하나님의 능력이 삶 속에 나타나는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귀신들림 현상에 대해서
헨드릭슨은 그의 마태복음 주석에서 귀신들림 현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신약의 저자들은 육체적인 모든 질병을 악령의 임재나 작용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 어떤 병은 귀신을 통해 오기도 하지만(마 12:22), 어떤 병은 단순한 장애로 인해 오기도 한다(마 15:30).
2) 귀신 들림 현상은 정신 이상 증세(insanity)와는 구별된다.
3) 귀신들림 현상이 정신 이상 증세와 비슷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귀신들림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귀신은 영적인 존재로 사람을 떠나서 돼지에게 들어갈 수 있다. 귀신은 항상 악하고 심리학적 치유 방법으로 치유할 수 없다. 귀신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쫓아낼 수 있다."
4) 귀신들림은 개인의 인격과는 구분되는 별개의 악한 인격이 그 개인을 사로잡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 악한 인격은 사로 잡고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말하기도 하고, 또 질문에 대답하기도 한다(막 5:7-10, 눅4:41, 행 16:18).
5) 귀신은 사단의 하수인이다. 예수님은 사단의 능력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사단을 공격하셨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사망과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셨다(창 3:15, 골 2:15).
3. 무리들의 반응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마 9:33(하)-34)."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에 들려서 청각 장애자가 된 사람을 고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이러한 일을 본 적이 없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예수님이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내쫓고 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시각 장애자들과 청각 장애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시각 장애자와 청각 장애자였습니다. 그들은 시기와 편견에 사로잡혀서 전혀 진실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은 성령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그것이 귀신이 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보고 귀신의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일로 돌리는 "성령 훼방죄"는 용서받을 길이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4. 갈릴리에서 하신 3대 사역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27-35)."
마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사역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마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회당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뜻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성경관과 율법 해석을 바로 잡아 주셨고, 또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역시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계속해야 합니다. 둘째로 마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갈릴리를 돌아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교회의 사명인 동시에 특권입니다. 셋째로 마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모든 병과 연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과 연약함을 담당하셨고, 또 우리를 사단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역시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러한 사역들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성령님의 능력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전도 여행 (마 9:35-36)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서 자신이 자라난 나사렛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에도 나사렛에서 말씀을 전했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셨고, 또 다시 나사렛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선지자로 믿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마지막 구원의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로 가셔서 세 번째 전도 여행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세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3차 갈릴리 사역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막 6:6(하))."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나사렛을 떠나서 3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을 시작하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셨다"고 말하고 있고, 마가는 예수님께서 "모든 촌에 두루 다니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있는 모든 성과 마을들을 직접 찾아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지어 사는 큰 마을과, 언덕 위에 있는 작은 마을,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까지 일일히 찾아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찾아 다니면서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또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마태는 이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신 사역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갈릴리 촌과 마을을 찾아가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신 첫째 사역은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성경 해석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 구약 성경의 참된 의미를 밝히고 그것을 삶에 적용해 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갈릴리의 각 성과 마을을 찾아가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신 두 번째 사역은 "전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각 마을을 찾아 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갈릴리의 각 마을을 다니면서 "모든 병과 연약한 것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신 세 번째 사역은 "치유"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람들의 질병과 모든 연약한 것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사단의 나라가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은 지금도 교회들이 해야 할 일들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교회에 교사들을 세우시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들은 교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교회는 천국 복음을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의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 충만을 구하고 부지런히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교회는 질병과 모든 연약한 것들을 치유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죄로 인해 여러 가지 질병과 악한 영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질병과 악한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이 땅에 사단의 나라가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2. 무리를 보고 민망히 여기심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예수님은 부지런히 각 성과 촌을 다니면서 세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열심히 사역을 하신 것은 무리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에서 "민망히 여기셨다"고 번역된 말(에스플랑크니세)은 "마음으로 동정심을 느끼거나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내장이나 창자"(상징적으로 감정)를 의미하는 "스플랑크논"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내장이 속에서 꿈틀거렸다"는 말입니다. 헬라인들은 내장을 감정의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보시고 내장이 뒤틀리는 아픔과 동정심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무리들은 마치 목자를 잃어버린 양처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권력과 외식에 빠진 거짓 지도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친히 선한 목자가 되어 그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면서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리들에 대한 동정심과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은 쉬지 않고 무리들을 위해 일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지런히 갈릴리의 각 성과 마을들을 찾아다니면서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셨으며, 또 질병과 연약한 것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는유리하며 방황하는 이웃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있습니까? 우리 안에는 그들을 향한 사랑과 구령의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에게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마 9:36-38)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돌아오신 후에 세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세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바리새인들의 왜곡된 성경 해석을 바로 잡으시고 성경의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각 성과 촌을 두로 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모든 질병과 연약한 것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각 성과 촌을 다니면서 사람들이 유리하며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유리하고 벙황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그들을 돌볼 일꾼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혼을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목자 잃은 양과 선한 목자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하))."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보시니 그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을 보면 긍휼한 마음이 듭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데려다 키울 형편이 안되면, 그들을 후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당시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 이익을 챙기기에 바빴고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백성들이 길잃은 양처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습니다. 좋은 부모는 거리에서 우는 아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수님 역시 길 잃고 방황하는 무리들을 보시고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방황하는 무리들을 좋은 꼴로 먹여주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오래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길잃은 양처럼 방황하며 어둠의 영들과 세상 풍습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거짓 목자들로 인해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정치 지도자인 헤롯은 사악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왕족인 유다 지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또한 그는 로마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서 친 로마 정책을 폈습니다. 그는 권력을 지키기에 바빴고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도 헤롯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돈을 주고 직책을 샀으며, 돈을 낸만큼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용 물품을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성전은 강도의 굴로 변했습니다. 또한 당시에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던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떠나서 형식과 외식에 치우쳤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법으로 하나님의 법을 벗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당시의 정치-종교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이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오래 전에 이러한 일을 예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거짓 목자"라고 고발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잡아서 자기 배만 채웠고, 상처 입은 양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길잃고 방황하는 양들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짓 목자들을 제거하시고, 친히 선한 목자를 세워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방황하는 무리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백성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셨고,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으며, 또 상처 입은 몸과 영혼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선한 목자였습니다.
2. 추수할 일꾼의 필요성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37),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7-38)."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셨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으며, 또 그들을 치료하고 고쳐주셨습니다. 당시에 길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은 곳곳에 널려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돌볼 일꾼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추수할 영혼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을 추수할 일꾼은 너무 적었습니다. 농부는 추수 때가 되면 밭에 나가서 추수할 때가 되었는지 살펴봅니다. 그리고 추수할 때가 되면 그는 지체하지 않고 사람을 고용해서 곡식을 추수합니다. 만일 농부가 추수할 때를 놓치면 곡식들은 썩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추수 때가 되면 농부의 마음은 분주해집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 데 그 곡식을 거둘 일꾼이 없으면 농부의 마음은 더 다급해집니다. 그러므로 농부는 주인에게 가서 추수할 일꾼을 더 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그 농부의 요청대로 일꾼들을 더 많이 고용해서 밭으로 보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추수를 앞둔 농부의 마음처럼 다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방황하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돌볼 일꾼들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3. 우리는 어떠한가?
갈릴리 사람들을 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선한 목자와 추수를 앞 둔 분주한 농부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선한 목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목자를 잃은 양처럼 유리하며 방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친히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 그들을 먹이고 돌보며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배만 채우는 삯꾼 목자가 아니라 양을 위해 목숨도 버리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혼을 추수하는 영적인 농부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추수를 기다리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추수할 영적인 일꾼들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추수할 주인에게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이 적어서 다급해진 농부의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보면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 눈에는 길잃고 방황하는 무리들이 보입니까? 우리 눈에는 추수할 때가 된 수많은 영혼들이 보입니까? 이러한 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영적인 시각 장애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성령님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돌볼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령 충만하게 하시고, 또 방황하는 사람들을 돌어볼 수 있는 천국 일꾼들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마 9장 요약강해]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사랑
[내용개요]
예수께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본 동네로 오셨다(1절).
사람들이 침상에 중풍병자를 메고 오는 것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시고 병을 고쳐 주셨다(2-8절).
예수께서 마태라는 세리를 제자로 삼으시고 그의 집에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자 의원은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신다(9-13절).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의 문제로 예수께 질문하자 예수는 당신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신다(14-17절).
또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쳐 주신다(18-26절).
그 후 예수께서는 두 소 경을 고치시고, 벙어리를 고치시고,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27-38절).
[강 해]
본장은 전장인 8장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과 죄와 죄의 올무에 대한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을
여러 사건을 통해 기록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요, 인류를 구원하실 참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장은 그러한 사실과 함께 죄인이야말로 예수의 사랑을 받을 자이라는 것과
구원에 이를 자가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를 은유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예수의 권세
1) 사망에 대한 권세
사망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참혹한 형벌입니다.
이 형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참조, 히9:27).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처럼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망의 올무에 걸려 있던 한 소녀를 사망으로부터 건지시사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하실 구주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a. 사망에 앉은 자들의 빛(마4:16)
b. 사망으로부터의 해방(롬8:2)
2) 죄에 대한 권세
죄란 본래 '과녁을 빗나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하나님에로부터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과만 관계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실 때에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는 죄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 죄 사함의 권세(눅7:48)
3) 죄의 올무에 대한 권세
또한 예수께서는 죄로 인해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올무에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인간들을 질병과 배고픔, 귀신들림 등으로부터 건져내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가 모든 죄의 올무에 대해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로 보건대 예수는 우리를 모든 질고에서 건져내 주실 메시야이십니다.
· 인생의 질고를 위함(사53:5)
2. 구원의 대상
1) 죄인
예수께서는 세리나 창기, 가난하고 병 든 자들과 같이 사람들이 멸시하거나 가까이하기 싫어하는 이들과 같이 지내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구원을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하고 죄에 억눌려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의롭다 생각하며 교만하지 말고 자기 죄를 자복하며 마음을 비워야 할 것입니다.
· 죄인을 위해 오심(딤전1:15)
2) 병자
예수께서 병든 자들에게 접근한 것은 그들이 고통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예수께서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부류는
죄로 말미암아 심한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우리 중에 인생의 고통을 짊어지고 괴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마음을 열고 그 고통의 질고를 벗겨 주실 주님을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a. 병 든 자에게 가심(마9:12)
b. 질병을 고치심(눅7:21)
3) 긍휼을 필요로 하는 자
고통 가운데 있는 병 든 자만이 예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 고통받는 자, 삶의 소망이 없어 고통받는 자, 사랑을 줄 사람이 없어 고통받는 자들도
모두 구주 되신 예수의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고통을 아시사 그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a. 약한 자에게 가심(마4:23)
b. 예수의 긍휼(마9:36)
3. 구원의 신앙
1) 바른 제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인간들에게 값없이 은혜를 주신다고 해서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받은 자는 이전보다 더 해야 할 일이 많아집니다.
그는 바른 인생의 궤도에 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은혜를 입은 자가 해야 할 첫번째 일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a. 긍휼 있는 제사(마9:13)
b.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제사(요4:24)
2)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은혜를 입은 자는 마땅히 그를 사랑하여야 할 것이며,
또 자연히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의 표시이며 하나 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a. 하나님 사랑(마22:37)
b. 그리스도 사랑(요16:27)
3) 새 계명을 지킴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말을 지키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참조, 요14:21).
사랑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었음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a. 사랑하는 자의 말을 지킴(요14:24)
b. 지키는 자가 복됨(계1:3)
결론
죄와 사망과 죄의 올무를 물리치시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실 참 하나님이시요 구주이십니다.
그분은 죄로 인해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바로 섬기고 그를 사랑하며 그 사랑을 따라 그의 말씀을 삶 속에서 지켜야 하겠습니다.
[단어해설]
3절. 참람하도다. 원어적으로는 '부당하게 대우하다, 모독하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태도를 말한다.
6절. 죄.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10절. 세리. 당시 세리는 죄인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학주제] -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사람들은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로 데리고 왔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지 않고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하셨다.
예수의 죄 사함의 선포에 대하여 서기관들은 하나님 이외에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예수의 말씀을 신성 모독으로 간주했다.
그러한 생각을 아신 예수께서 서기관들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는 것과
일어나 걸으라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신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당연히 죄 사함의 선포가 훨씬 더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지금 서기관들은 예수가 쉬운 쪽을 택했다고 생각했다.
죄 사함의 선포는 외관상 드러나는 것이 없지만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은 외관상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얄팍한 술수를 쓰고 있다는 것이 서기관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인자가 세상에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하셨다.
인자는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 죄 사함의 권세를 갖고 계신 분이다.
[영적교훈]
예수께서는 당시의 서기관들에 의한 율법의 해석을 거부하고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셨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종교 개혁 시대에 이르러 루터와 칼빈은 중세 교회의 성경관을 거부하고 오직 성경이라는 새로운 성경 해석을 했다.
이제 우리들은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jo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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