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감동시킨 믿음
마태복음 8:5~13
오늘 본문 말씀에는 신앙과 인격이 탁월하여 예수님을 감동시키고, 모든 세대 그리스도인들의 귀감이 된 한 로마 군대 장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서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 신앙적 인격이 최고라고 기뻐하십니다. 이방인은 물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감탄하셨습니다. 그의 신앙과 인격이 어떠했기에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었단 말입니까?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 바로 앞 장인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복음서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에 이어 나오는 오늘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마태복음 8장, 9장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아주 중요한 기적 10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는 산상수훈과 기적사건들을 연결하면서 우리에게 신앙의 균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이 곧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말씀과 능력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만! 말씀으로만!”하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씀이 삶의 연결되지 않고 말씀으로만 끝나면 그 말씀은 죽은 말씀이 됩니다. 내가 읽은 말씀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고, 말씀을 통해 이적도 경험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씀보다도 신비한 체험만 찾아다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경험되지 않은 말씀을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화끈하게 불이라도 받고 느낌이 와야 제대로 믿는 줄로만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신앙을 신비주의라고 하는데 이 신앙은 대단히 위험한 신앙입니다. 제대로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그 말씀은 자연스럽게 내게 능력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말씀만을 강조하다가 이성주의에 빠지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경험만을 강조하다가 신비주의에 빠지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이성주의와 신비주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본문도 “말씀과 능력”이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10가지 기적 중 두 번째 기적인 오늘 본문의 특징은 총 아홉 구절 중에서, “이르되”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오고, 전체 문장이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로마군대의 백부장과 예수님의 대화가 오늘 본문의 주요 내용입니다.
5절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나아와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백부장은 로마군대의 장교로서 유대 땅인 가버나움 지역에 파견된 지역 사령관입니다. 로마가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당시, 식민지인 유대 땅에서의 이 백부장의 권위는 것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백부장이 예수님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는데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호소합니다. ‘주여’ 라는 호칭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태도입니다. 백부장의 간청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의 정확한 해석은 이것은 ‘내가 가서 고쳐 주련?’ ‘날 보고 고쳐 달라고?’라고 하는 의문문입니다. 그러자 8절에서 백부장은 대답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유대인인 예수님께서 어찌 율법을 어기고 이방인인 저희 집에 오시겠습니까? 괜히 구설수에 오를까 조심스럽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인격적인 예의를 표하는 백부장을 보고 10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라며 칭찬하십니다. 그러면서 13절에서 예수님이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하시니 즉시, 하인의 병이 낫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핵심주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만한 믿음”입니다. 이만한 믿음, 최상급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크기와 믿음의 질이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을 감동시킨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도 기왕에 신앙생활을 할 바에는 한번쯤은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을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15장에는 자신의 딸의 병을 낫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온 또 다른 이방인인 어느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해서도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십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이 말을 핼라어로 “메갈레 피스티스”라고 하는데, 여기서 ‘메갈레’는 ‘메가톤’이라는 단어를 파생시켰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 메가톤급 믿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는 말씀은 이 메가톤급 믿음보다 더 큰 최상급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감동시켰던 백부장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일까요? 그가 어떤 믿음을 가졌기에 예수님께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셨을까요? 우리가 가져야 할 최상급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내가 가져야 될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면 근심하실까요? 아니면 감동하실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본문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이스라엘 중에서”라고 하신 것은 백부장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백부장은 이방인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율법을 공부해 온 유대사람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회당에서 말씀을 공부한 사람도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좋은 신앙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목회자나 장로의 신앙도 아니고, 모태 신앙도 아닌데 평신도 어린 신앙을 가진 사람이 이토록 귀한 믿음을 가졌다니 놀랍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가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기도 전에 벌써 예수님의 소식 곧 복음의 소식이 이방인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믿음이 이방인에게도 이렇게 흘러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마태는 매우 행복해 합니다. 마태복음을 해석하는 관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결론을 앞으로 가져와서 마태복음 전체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9~20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이방인 족속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길 원했던 마태의 결론을 제일 앞으로 끌고 와서 마태복음을 보면 마태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가 대단히 흥분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이 사건을 보면서 대단히 흥분하고 있습니다.
11~12절입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 말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을 때 천국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는 비극을 경험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이방인들, 특히 백부장이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한 이 사건이 예수님을 흥분하게 만들었고 마태를 흥분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감동은 구원받는 감동이요 복음이 전해지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라며 백부장의 믿음을 감동하셨던 것입니다.
이만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첫째, 이만한 사랑을 지닌 믿음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군사 통치 시대에 가버나움 사령관 백부장이라면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의 하인 한명이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폐기처분 감입니다. 그 당시 종은 인격이 있는 존재로 인정해 주지 않았고 재산목록 중 하나였습니다. 병든 종을 집에 둘수록 돈만 낭비할 인물이지요. 관심을 보인다 해도 “예수라는 사람을 한번 만나보도록 해, 내가 보냈다고 그래.” 부하에게 명함 한 장 보내어 예수님을 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직접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예의, 경의, 귀인을 알아보고 귀인을 대하는 아름다운 자세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옛 말에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귀인을 알아보는 눈이 귀한 눈입니다.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을 자존심 상해하는 인격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귀인을 귀인으로 알아보고 존경해야 될 사람을 존경할 수 있는 것, 당연한 것 같은데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인격은 얼마나 놀라운 인격인지 모릅니다.
더욱이 종을 사랑하는 윗사람의 인격으로서의 백부장의 인격은 매우 놀랍습니다. 헬라어에는 ‘종’을 표현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둘로스’는 ‘노예’입니다. ‘파이스’는 ‘종’이라는 뜻이지만 때로는 아들이라고도 쓰입니다. 종을 가족처럼 아낄 때 파이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자기 종을 둘로스라 하지 않고 파이스라고 말합니다. 종을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주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백부장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십니다. 아무런 가치 없는 종을 대할 때 불쌍한 아들처럼, 병들어 죽어가는 아들처럼 안타까움으로 대하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이만한 사랑을 가진 믿음을 내가 본 적이 없다고 감동하십니다. 아름다운 신앙인격은 상위 리더십을 ‘존경’합니다. 또한 하위 리더십을 ‘존중’합니다. 위를 향한 존경과 아래를 향한 존중, 이것이 멋진 인격입니다.
이만한 믿음이 어떤 믿음일까요? 둘째, 이만한 겸손을 지닌 믿음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련?’ 했을 때, 백부장이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반응했습니다. 점령군의 장교가 피점령민족의 무명의 랍비에게 취한 태도가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병 잘 고치는 명의 정도로 이해했다면 왕진을 요구했겠지요. 예수님을 능력 있는 종교 지도자로 알았다면 정식 방문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경험 많은 지혜자로 알았다면 좋은 말 한 마디 듣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주여!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물론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벌써 이해했다라고 보다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당신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세상 사람들의 안목으로 볼 때, 백부장의 집에 무명의 랍비인 예수님이 들어가는 것이 예수님께 더 큰 영광 아닙니까? 그러나 백부장은 “주님처럼 귀하신 분이 천한 우리 집에 오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당신처럼 존귀하신 분이 이방인인 우리 집에 오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을 때 백부장의 이 겸손한 인격이 예수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만한 믿음”입니다. 인격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인격은 겸손한 인격입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인격에다가 믿음까지 더해졌으니까 이만한 겸손을 지닌 믿음을 예수님께서 본 적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백부장은 누가 보아도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실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나는 부족합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마음과 자세가 예수님을 감동시킨 인격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귀히 여기셔서 과분한 직분을 주셨지.’ 감사하며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교회에 충성하지 못했고 갚지 못하고 살았는데 늘 과한 인정을 받고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늘 손해 보는 것 같고, 늘 빼앗기는 것 같고, 좀 더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 항상 섭섭하고 불평스러운 것이 교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강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교회를 아프게 하는 병든 인격입니다.
초대 교회 믿음의 공동체에는 신앙, 순종, 겸손이란 단어가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믿는 다는 것은 곧 겸손한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은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백부장의 이런 겸손한 신앙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교만하지 맙시다. 교만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도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이만한 믿음이 어떤 믿음일까요? 셋째,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원문의 뜻은 “한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알라모논” “오직 한마디” “에이페 로고” 말씀으로. “알라모논 에이페 로고” ‘오직 한 마디 말씀으로 끝장내 주십시오. 여러 말씀을 하실 것도 없고 길게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 자체이니만큼 단지 한 말씀만 하옵소서.’ 이런 뜻입니다.
마태복음 15:27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거절을 받으면서도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부스러기 같은 한 조각의 말씀이라도 내게 임하기만 하면 내 딸의 치명적인 병이 나을 수 있겠다고 호소합니다.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28에 보면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하시며 축복하시고 그 딸의 병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백부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지를 창조한 그 입으로, 왕의 권위를 가진 그 말씀으로 입을 열어 오직 한 마디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죽어가는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멀리서도 말씀만 하시면 낫는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처음 보는 믿음이라며 감동하십니다. “주님께서 직접 찾아와 손으로 어루만져 고치실 수도 있지만, 주님은 거리나 환경에 매이지 아니하시고 이곳에서 한 말씀만 하시면 그곳에서 낫겠나이다.” 멋진 믿음 아닙니까? 당시 중풍병은 불치병입니다. 이천년이 지난 지금 의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도 중풍병은 의학이 잘 못 고치는 난치병입니다. 그런데 무슨 배짱으로 ‘한마디 말씀만 하십시오.’라고 요청했을까요? 이것이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 이 만한 믿음, 평생 율법만 붙들고 살았던 이스라엘 중에서도 보지 못한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백부장처럼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기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신구약 66권을 다 믿어야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한 말씀만 붙들고 그 말씀만 믿어도 기적이 나타납니다. 창세기 1:1만 믿어도 기적이 나타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면 끝나는 것입니다. 신구약 66권 다 믿어야 기적이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한 말씀만 붙드십시오. 그러면 못 믿을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 인생에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이성이 갈 수 없는 곳까지도 믿음은 능히 갈 수 있다.” 토마스 왓슨의 말입니다. 이 믿음의 기름 부으심이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이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중풍병이 걸린 하인이 나아와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인의 믿음이 대단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의 주인 백부장의 믿음이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의 능력을 이토록 순수하게 믿는 ‘이만한 믿음’은 내가 보지 못했다.”고 기뻐하십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내가 이런 믿음을 본적이 없다. 감격해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정말 가슴이 훈훈해 집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참 좋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시시한 믿음, 2% 모자라 간댕간댕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내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키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크게 감격시킬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이 “저만한 믿음을 내가 볼 수 있다니 행복이로다. 저런 순수한 믿음을 보았다니 행복이로다.” 내 믿음을 보고 이렇게 감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남은 시간 동안 예수님을 감동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더 감동시키시고 여러분들을 더 깜짝 놀라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의 길: 영광과 고난 (마 8:19-22)
베드로는 예수님께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형제가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면,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유한한 자비로는 실수 투성의인 인간의 허물을 덮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우리의 엄청난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비유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우리들이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좆으리이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마 8:19)."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눅 9:5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마치시고 바다 건너 편으로 가려고 했을 때였습니다(마 8:18). 마태는 이 때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서기관"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 전문가로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큰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크게 감동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깊은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면 훌륭한 랍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되는 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가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지 생각해 보게 하셨습니다.
2.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 9:58)..."
그 때에 예수님은 그 서기관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당시에 서기관은 좋은 직업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이러한 모든 특혜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불해야 될 대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서기관에게 자신을 따를 때 지불해야 될 댓가를 생각해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서기관에게 자신을 따르면 안정된 거처도 없이 떠돌아 다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면 그는 백성들의 존경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서기관에게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생각해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불해야 될 대가를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충동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일시적인 충동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오면 쉽게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포기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 뿐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을 각오를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이러한 점을 충분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믿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영광은 좋아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은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3.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그 대가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한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 성악가를 찾아가서 성악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그 성악가는 그에게 반복해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왜 성악가가 되려 하느냐? 성악가가 될 각오가 정말 되어 있느냐?" 그 성악가는 성악가로서 성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또 성악가로 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야 하는 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 중에는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박수 갈채를 받는 화려한 모습만 보고 성악가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 성악가는 그 성악가 지망생에게 그가 정말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는 지 확인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많은 희생과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불해야 될 대가를 미리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유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많은 고난이 따르기 때문에 일시적인 충동으로 결정하면 안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사람들 중에도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학생들은 몇 차례 큰 갈등을 경험하고 그 갈등을 극복한 후에야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낭패를 경험하기 쉽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왕이 아니라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과 고난을 함께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한 서기관이 와서 예수님이 어디로 가든지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감명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은 위대한 선생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불해야 될 대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불해야 될 대가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을 따르면, 안정된 직업과 거처도 없이 떠돌아 다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부친을 먼저 장사하고 따르겠나이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 8:21)"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눅 9:59)"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좆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는 이 사람이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친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기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있지 않으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훈련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가 지금 즉시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에게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지금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부친에 대한 의무를 다한 후에 예수님을 따라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부친을 장사하겠다는 말은 단순히 돌아가신 부친을 장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늙은 부친에 대한 모든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의 부친이 살아있다면 그가 부친을 모시는 일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부친에 대한 의무를 다 한 후에는 예수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후에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던 일에 대해서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근거로 성도가 교회 일을 위해서 가정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해도 되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과 적용은 옳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교회뿐 아니라 가정과 세상에 대한 의무도 신실하게 이행해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상황은 매우 특수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어떤 사람을 풀타임 사역자로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예수님의 부름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에 순종하면 다른 가족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일꾼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에 우선권을 두고 살아가리를 원하십니다. 이거은 마치 군사로 부름 받은 사람이 나라를 지키는 일에 전념해야 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나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은퇴하고 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나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꾼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2. 먼저 나를 따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2)."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 9:60)...."
예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여기에서 앞에 나오는 "죽은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를 말하고, 뒤에 나오는 "죽은 자"는 실제로 죽은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에 이 제자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친을 모시는 일은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다른 가족들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른 가족들이 그의 부친을 모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복음의 증인이 되는 훈련을 받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동안에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훈련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름 받은 자기 제자들이 이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제자는 계속해서 부친에 대한 의무감으로 선뜻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곧 세상을 떠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주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세상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따르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예수님은 그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나라도 장남이 부모님을 모시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장남이 목회자가 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장남이 목회자가 되면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고 비난받기 쉽습니다. 또 이 일 외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은 많습니다. 안정적인 생활, 재물, 명예, 또는 지식이 예수님에 대한 헌신을 가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에 우선권을 두고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쫓겨나는 일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족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가족을 돌보는 일에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풀 타임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면, 다른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특별한 경우에 속합니다. 이러한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마땅히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한다(마8:22)
마태복음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문제
여기서 “죽은 자들”은 누구인가?
죽은 자들이 어떻게 장사를 지내는가?
만일 죽은 자들을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는 것이 되는가?
영적으로 죽지 않는 사람은 장례를 치르면 안 되는가?
해석
이 말씀은 제자 중 하나가 예수를 따르기 전에 먼저 부친을 장사하게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한 답으로 주어졌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부친의 장례도 치르지 말라는 말인가?
잘못 이해하면 기독교를 비윤리적인 종교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가지도 있으며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핑계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한 사람을 책망하신 일도 있다.(마15:1-6)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라는 말씀에서 죽은 자들은 죽은 자를 장사할 수 없기 때문에
처음에 나오는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죽 불신자들에게 죽은 자의 장례를 맡기라는 말씀이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아들이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겠다는데 막으신 것이 문제다.
장례는 중요한 것이고 더구나 장례에서 아들의 역할은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해석은,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삶에서 무엇이 우선 순위인지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부친의 장례는 불신자인 친척들도 얼마든지 치룰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인 기회는 한번 가 벼리면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예수께서 이미 “건너가기를”(마8:18)명하셨고, 배는 곧 항구를 떠날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만일 예수를 좇을 생각이라면 즉시 합류해야지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배가 떠나버리면 다시 찾아 합류하기란 힘들기 때문에 장례까지도 불신자인 천척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의 설명은,
예수의 “나를 좇으라”는 명령은 신적인 명령이어서
이 세상의 어떤 돌발사정으로도 무효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르심은 가볍게 생각하는 그 제자에게 이 사실을 깊이 인식시켜 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영적인 관계는 이 세상 어떤 관계보다도 뛰어난 것이어서
가족 관계라 할지라도 영적 관계가 우선이라는 것을 이 사람에게 가르쳐 주시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하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말고 나를 따르라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한 가지 가능하고 합리적인생각은
아버지의 장사를 꼭 장례식으로만 보지 말고 죽음으로 보자는 것이다.
즉 미래로 보자는 것이다.
이 사람의 아버지는 중병에 결려 있었을 것이다.
혹은 노쇠하셔서 장사할 날이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돌아가시면 아예 다 정리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이다.
우리말 에도 “불교를 믿으시는 부모님 장사나 끝난 다음에 교회에 나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교회에나 오겠다는 말이다.
이 대화를 다시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여 저에게는 연로하신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이 돌아가시어 장사를 치른 다음에야 자유롭게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그라나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의의 결단은 시급하고 때가 있는 법이다. 그것은 때로는 가족까지도 희생한다.
믿지 않는 너희 가족들이 아버지를 돌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지금 나를 따르라.”
요약
부친의 장사를 실제 장례식으로 해석한다면
예수께서는 부친의 장례식 참석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반윤리적인 분으로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좋은 해석은, 장사를 장례식이 아니라 죽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렸다 장사를 치른 후에 따르겠다는 말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불신자들)이 돌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레위)를 부르심(마 9:9-13)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권세가 있는 하나님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신격화하고 신성모독적인 언행을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당시 죄인으로 간주되었던 세리(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제를 금한 세리를 부르시고 그들과 교제한 일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저항과 비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사가 환자와 함께 있는 것처럼, 죄인을 구하러 온 자신도 죄인과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1.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심(마 9:9, 막 2:14, 눅 5:27-28)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마 9:9)."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막 2:13-14)."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눅 5:27-28)."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로 가셔서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르침을 마친 후에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지나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마태는 이 사람의 이름을 마태라고 소개하고 있는 반면, 마가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소개하고 있고, 누가는 레위라 하는 세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레위)가 속한 세관은 가버나움에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은 헤롯 빌립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갈릴리 북쪽에 있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마태(레위)는 분봉왕 헤롯 안디바에게 소속된 세리였습니다. 그는 세관에 앉아서 가버나움의 간선도로(북쪽으로 지중해와 다마스커스 사이에 있는)를 통과하는 상품에 대해 헤롯을 대신해서 세금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세리들은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했기 때문에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서 혹독하게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헤롯의 고용인이 되어 많은 강제로 세금을 뜯어내는 세리들을 쓰레기같이 취급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세리들은 백성들에게 크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가족 중에서 누가 세리가 되면 그를 가정과 사회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또한 그들은 재판정에서 증인이 될 수도 없었고 회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또 가족들도 여러 가지 직업 중에서 세리를 가장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멸시받는 세리들도 사랑하셨습니다. 마태(레위)의 부름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던 사람을 수용하신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마태(레위)는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면서 신뢰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를 부를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그에게 "나를 좆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마태, 즉 레위는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을 좆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강력한 권위가 있었으며, 레위 또한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직업을 버리고 즉시 예수님을 좆았습니다.
2. 바리새인들의 비난(마 9:10-11, 막 2:15-16, 눅 5:29-3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0-11)"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막 2:15-16)"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눅 5:29-30)"
그 후에 마태(레위)는 기쁨으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모시고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이 잔치는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축하하고, 또 그 동안 함게 했던 친지들과 송별하는 잔치였습니다. 마태(레위)는 동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세리를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알리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서에서 종종 "세리와 죄인들"이란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이 말은 백성들에게 가장 멸시받던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일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참석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초대받지 않았지만 죄인과 교제하는 예수님의 행동을 감시하게 위해서 참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세리들을 매우 경멸했습니다. 그들은 정결법을 따라 식사하지도 않고 십일조도 드리지 않는 세리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래 전에 시리아 왕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가 유대를 크게 박해한 적이 있습니다. 그 왕은 성전에 돼지를 제물로 드리고, 안식일과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에 유대 백성들 중에는 생명을 걸고 율법을 준수하기로 헌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바리새인의 기원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배우고 지키는 일에 헌신했고, 철저하게 율법의 규례를 따라 생활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세리나 죄인들과 교제하면 부정해진다고 생각하고 그들과의 교제를 금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모르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식사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너희 선생이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먹느냐?"
3. 주님의 대답(마 9:12-13, 막 2:17, 눅 5:31-3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12).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3)."(마 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31),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2)."(눅 5:31-3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비난하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가 있지 않느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느니라!(17)" 의사들이 환자를 고치려면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환자에게 전염될 것을 두려워해서 환자를 멀리하는 의사는 환자에게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기 위해서 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세리들과 교제하는 것을 기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해주시고 그들의 아픔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세리들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예수님을 정죄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에수님은 이 일로 인해서 다시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열심인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의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이 세리들에 비해서 율법을 준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의인보다 죄인들과 함께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의사로서 죄인들에게 깊은 동정심과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사가 환자들을 돌아보듯이 죄인들의 영혼을 돌아보셨습니다. 의사가 환자와 함께 있는 것을 비난할 수 없듯이, 영적 의사인 예수님께서 영적 환자인 죄인들과 함께 있는 일도 비난할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내가 제사보다 긍휼을 더 원한다"고 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리새인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제사 드리는 일보다, 그들이 어렵고 힘든 긍휼한 마음으로 죄인들을 돌아보기를 더 원하셨습니다.
교회가 가진 숭고한 사명 중의 하나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존경받는 사람들이나 보통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마땅히 예수님과 같이 죄에 빠진 사람들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죄인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하는 일도 계속해야 합니다. 죄인들을 정죄하고 교제하는 일을 무조건 금하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소극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처럼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며, 또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항상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세력에 정복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고 믿음으로 죄인들에게 다가가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능히 죄의 세력을 극복하고 죄인들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마 9:14-17)
우리는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게 된 두 가지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선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때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교제가 금지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교제가 금지된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본문에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충돌하게 된 세 번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의 시작은 금식 문제로 인해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과 여러 가지 문제로 충돌을 경험하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새로 시작될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낡은 종교 형식에 억지로 짜 맞추려고 하면 둘 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금식에 대한 질문(마 9:14, 막 2:18, 눅 5:33)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 9:14)"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막 2:18)"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눅 5:33)."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일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인기를 얻는 것에 대해서 시기하고 있었습니다(요 3:26).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해서 비평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어느 날 그들 중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 데, 어찌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과 기도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습니다. 원래 구약 성경에서 금식을 명한 것은 유대인들이 매년마다 정기적으로 지키는 대속죄일이었습니다(출 20:10, 레 23:26-32, 민 29:9-11).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속죄일에 죄를 회개하면서 금식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금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 애도의 표시(삼하 1:12), 2) 국가적 재앙을 만났을 때(느 1:4), 3) 죄에 대한 회개(왕상 21:2), 4) 자발적인 금식. 이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날에 매년마다 4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1) 4월 17일: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다가 징계 받은 일을 잊지 않기 위한 금식. 2) 5월 9일: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된 날을 잊지 않기 위한 금식. 3) 7월 3일: 바벨론이 세운 총독(그달랴)이 살해된 날을 기억하는 금식(왕하 25:25). 4) 10월 10일: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공략한 날을 기억하며 금식(렘 52:14).
유대가 바벨론에 포로가 된 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식을 공로를 쌓는 일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금식은 점점 종교적인 가치가 약해지고 형식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포로 시기와 그 이후의 선지자들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금식 태도를 종종 지적했습니다. 이때에 선지자들은 참된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보다 죄를 회개하고 떠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슥 7:5 이하). 1년에 4번씩 하는 금식 기도의 관습은 예수님께서 살았던 1세기에도 계속되었습니다(슥 7:5, 8:19).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일로 정하고 금식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경건과 자기 헌신을 위해서 매주 2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는 날이 올 수 있도록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금식하는 날이 늘어나면서 금식 행위는 점차 강제적이고 형식적이며, 또 과시용으로 행해지는 사례가 늘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대한 금식 행위는 바로 이러한 형식적인 금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금식을 하셨지만, 그것은 자발적인 영적 훈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마 4:2, 6:16-18). 그러나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세례요한과 바리새인들이 1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하는 금식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금식 대신 종종 잔치에 참석해서 연회를 즐겼습니다. 그러므로 평상시에 이러한 일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와서 왜 정기적인 금식에 참여하지 않느냐?고 묻게 되었습니다.
2. 첫 번째 비유(1): 결혼식 비유(마 9:15, 막 2:19-20, 눅 5:34-3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도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 2:19-20)."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눅 5:34-35)."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들어서 금식 문제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결혼식을 예로 들어서 지금은 자신과 제자들이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한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을 하지 않습니다. 결혼식은 큰 경사이며 중요한 축제입니다. 만일 하객들이 결혼식장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금식을 하면 신랑 신부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결혼식 잔치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사람들에게 하늘의 온갖 비밀과 축복들을 소개하셨습니다. 이때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때로서 인류의 역사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쁜 때였습니다. 이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고 축하하며 그 말씀을 듣고 베푸시는 놀라운 일들을 기쁘게 반응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은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즐겁게 지내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이때에 금식하며 어두운 얼굴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있을 때에 제자들이 금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시 후에 제자들이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올 것인데, 그 때에는 자기 제자들도 세례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곧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속죄 제물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예수님은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서 심한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슬픔 속에 금식하게 될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신 후부터는 다시 기쁨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이 시대에 교회들에게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들과 함게 하시는 복음의 시대에는 슬픔과 찡그린 얼굴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때때로 죄를 회개하거나 영적인 훈련을 위해서 금식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특별한 이유 없이 성령 시대에 일부러 금식을 습관화 하거나 고행적인 삶을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3. 두 번째 비유: 옷감 비유(마 9:16, 막 2:21, 눅 5:3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라(마 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막 2:21)."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라.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눅 5:36)."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말씀하신 비유는 옷감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예수님은 새 옷(카이논; 질적으로 새로운 옷)에서 옷감을 오려내서 헌 옷(파라이온; 사용하여 닳아 없어진 옷) 위에 깁는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일 이렇게 하면 새 옷과 헌 옷을 모두 다 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옷은 새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헌 옷은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따랐던 옛 종교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옛 종교 형식에 맞추려고 하면 둘 다 불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실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은 구약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패러다임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옛 생각과 사고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참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스스로 모순에 빠져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머물게 될 것입니다.
4. 세 번째 비유: 술과 부대(마 9:17, 막 2:22, 눅 5:37-39)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 5:38-39)."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해주신 세 번째 비유는 포도주와 포도주 부대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예수님은 "낡은 술 부대에 새 술을 담는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면 새 술이 발효되면서 낡은 부대가 터져서 술과 자루를 모두 버리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22).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새 포도주"(네온; 신선한, 완전히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로 비유하셨고, 종교지도자들이 주장해 온 옛 종교를 "낡은 부대"(파라이우스; 낡아서 부서지기 쉬운 부대)로 비유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옛 언약의 전통을 따라서 기계적인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한 임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께서 오시기 전에 백성들을 회개시켜서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회개를 위한 금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께서 오신 후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이 성취된 예수님의 때에는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고와 행동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이 시대에는 예수님에 의해 죄와 사망이 세력이 무너지고 모든 죄가 용서를 받는 시대였습니다. 또한 이 시대는 죄에 대해 패배하던 성도들이 성령님을 통해서 승리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금식보다 축제가 어울리는 시대입니다. 이 때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요구하는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고행보다 기쁨과 축제의 삶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대는 성령님을 통해 자원하여 하나님의 법을 행하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는 시대와는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고와 기치관이 필요했습니다. 새 시대는 그 시대에 맞는 사고와 행동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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