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에 대하여
1) 주기도문의 정의
주기도문은 크게 2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하나님 나라)는 교리로서 사도신경과 관련되고,
후반부(인간생활)는 윤리로서 십계명과 관련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내용(what)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방법(how)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기도의 내용을 획일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모본(pattern)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은 마6:9-13 과 눅 11:2-4 의 기도문 중 마태복음에 나오는 기도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주기도문이란 마태복음의 것을 말합니다.
2) 주기도문의 구성
(1) 형식적 구분
주기도문은 형식적으로는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의 대상을 부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둘째, 기도의 내용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셋째, 송영 :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 내용상 구분
주기도문의 내용을 분류하면 크게 2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에 관한 기원으로 2인칭 단수 대명사를 쓰고 있습니다.
둘째, 사람(우리)에 관한 간구로서 1인칭 복수 대명사를 쓰고 있습니다.
성격상 이 두 부분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하늘의 것과 땅의 것, 영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3) 후반부의 간구의 내용
그리고 사람에 관한 간구의 내용은 시간적으로 3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일용할 양식에 관한 부분은 현재적인 것
둘째, 죄 용서에 관한 것은 과거적
셋째, 유혹(시험)과 악에 관한 것은 미래적
3) 내용설명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1) '우리 아버지'라는 친근한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지존자 하나님을 친밀하게 부르도록 허락하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호칭은 단 14회이지만, 신약에서는 170회 나타난다.
(2)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의 뜻은 멀리 은하계 어느 구석에 떨어져 있는 우주 공간의 어떤 특정지역을 말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초월성, 영성, 거룩성, 하나님의 영적 자유를 상징하고 포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칼빈은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 우주에 대한 그의 통치권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늘'은 '땅'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피조영역이며, 지음 받은 실재로서 무한한 생명창세기조의 가능성, 잠재성, 충만성, 그런 의미에서 영적 실재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피조물과 함께 생명과 은혜의 빛으로서 현존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항상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이시다. 만유 안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지만 항상 하나님은 만유를 초월하여 만유 위에 계십니다(엡 4:6).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하나님 대하는 심정으로 경외와 감사와 깨끗한 맘과 정성을 다하여 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태도로 드리는 불경건한 예배나 기도는 차라리 드리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덜 손상시켜 드리는 일입니다.
흔히 예배가 무슨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방편으로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것을 엄히 경계해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자세는 순수해야 하고 겸허해야 하고, 정성을 다한 것이어야 합니다.
햇빛과 우로를 선한 이와 악한 이에게도 고루 내리시는 영원자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자세로 살아야하고 하나님을 불러야합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1) 국어학적으로 우선 전통적인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나라'라고 하는 주격에 붙는 토씨 '가, 이' 중에서 옛날로 올라 갈수록 '이'가 많이 쓰여졌던 흔적입니다.
현대 국어문법상 받침 없는 주격 체언에는 '가'를 써야 합니다.
(2)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 영광, 통치가 온전하게 실현된 영역입니다.
하늘나라가 하나님의 현존을 제약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과 영광의 임재가 하늘나라를 규정합니다.
하늘이라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늘입니다.
(3) '당신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안에서, 성령의 강림과 교회의 출현 안에서 이미 땅 위에 시작되었고 임했으나 아직 온전한 영광의 모습으로 완성되지 아니하고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 비유들은 하늘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으나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 곧 '이미와 아직'(already … not yet) 사이의 긴장을 보여줍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 사람들을 통하여, 땅의 피조물들 안에서, 또 그들과 함께 이뤄지기를 염원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과 삶의 모든 선물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과 하나님의 뜻의 구현에 동원하여 쓸 것을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재능, 시간, 물질, 은사, 능력, 기회, 생명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의 도구와 그릇(容器)이 될 것을 다짐하는 기원입니다.
(2)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드리는 크리스천은 결코 이 세상의 일들을 소홀히 하고 저 하늘나라만 앙망하는 타계주의 신앙, 몰역사주의 신앙, 영지주의적 신앙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주기도문은 성육신적 영성을 강조합니다. 하늘의 뜻과 땅위의 뜻이 하나로 통일되고, 하늘과 땅이 함께 영광의 나라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1) 우리가 교회 공동기도문에서 사용하는 주기도문은 개역성경을 따르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이라는 단어는 '오늘'이라는 단어의 뜻과 매우 다릅니다.
'오늘'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헬라어 쎄메론(Semeron)이라는 단어는 24시간 곧 하루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성경은 '오늘'이라는 헬라어 쎄메론을 this day, today로서 번역하고, 독일어 성경은 heute로, 중국 한문성경은 今日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한글 "개역성경"이 '오늘날'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늘의 시대,' '최근의 시기,' 즉 하루가 아니라 상당한 시간의 길이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의 뜻을 가리울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표준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번역하여 원문에 좀더 가깝고 충실한 번역을 하였습니다.
(2) '일용할'이라고 "개역성경"에서 번역한 헬라어는 에피우시온(Epiousion)인데 그 의미는 '필요한,' '존재에 필수적인,' '오늘을 위한' 등의 의미입니다.
"개역성경"은 "일용할 양식"으로, "새번역성경" 과 "공동번역성경," "표준새번역 성경"은 모두 '필요한 양식'으로 번역하였습니다.
(3) '양식'으로 번역한 원문은 유대인의 주식인 '빵'(Bread, artos)입니다.
(4) '주옵시고'는 '주시옵고'로 번역하는 것이 국어학적으로 더 옳다고 합니다.
(5) '오늘, 필요한 양식'이라는 말씀은 하루하루의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생명을 내가 담보하거나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먹을 양 이상의 '만나'를 거두어 들였을 때, 곧 벌레가 생기고 썩어버리며,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듯이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루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아 산다는 '겸허한 마음, 빈 마음,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 스스로의 자기 유혹, 곧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 하나님 없이 스스로 생명의 주인이 되려는 근원적 불신앙이 작동하여 스스로 유혹에 떨어지는 인간의 불신앙과 자기 파멸에서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시라는 기도입니다.
둘째, 인간보다 더 영적으로 간교하고 신령한 어떤 악의 실재들의 위협과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시라는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악한 자'의 시험과 유혹은 반드시 인간의 자의적, 의지적 동의와 감정을 유발시켜서 시행하므로 첫째와 둘째는 현실 속에서 날카롭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데 악의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성경은 '악,' 또는 '악한 자'가 아무리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 의지의 자유, 그 책임성을 악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있으며, 악은 절대적인 완전한 존재가 아니므로 인간을 유혹할 수는 있을지라도 인간을 희롱할 수는 없으며, 인간을 악에 빠뜨릴 수는 있어도 인간생명을 파멸하거나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구약 욥기).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당신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1) 송영 부분이 마태복음에서 괄호 안에 넣어 인쇄된 이유는 마태복음의 대부분 중요한 고대사본들 가운데서 (대개 주후 5~6세기 이전에 필사된 사본들) 송영부분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송영부분은 주님기도가 교회의 예배에 빈번히 사용되고 고백됨으로 인하여 후대에 덧붙여졌다고 봅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간구하는 것으로서만 끝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송영의 처음에 나오는 단어 '대개'라는 단어는 헬라어 '호티'(hoti)라는 단어를 중국 한문성경에서 참조하여 우리말 개역성경 번역시(1930년대) 참고하여 번역한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그 단어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그 의미는 영어의 because, for 등에 해당하므로, 우리나라의 말뜻으로는 '이는 …'정도입니다.
중국어 번역본에서 초기엔 <大槪, 大蓋>로 쓰이던 것을 그대로 참조하여 개역성경을 번역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중국의 성경도 <以, 또는 因爲>로 번역하여 이 의미를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 한글 번역본에서 1936, 1933년 신약성경 번역본에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대체로'의 뜻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찬송가 앞장에 인쇄된 주기도문에 그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3) 기도는 허락된 은총의 선물이며, 기독교 신앙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기도는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매개수단이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구하고,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신뢰와 하나됨 안에서 자녀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확신을 갖고 기도하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이뤄주소서'라고 맡기는 절대신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송영이며, 찬양과 영광돌림은 인간존재의 제일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영광 받고 교제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창골산>
김세윤 박사의 주기도문 강해
주기도문의 서론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인 주기도문 은 성도들이 매일 낭송하며 기도할 만큼 자주 대하는 것일 뿐아니라 사실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정성을 다하여 바른 의미를 알고 진심으로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이 기도문을 잘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우선 주께서 가르처 주신 기도의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기도문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개의 판(版), 즉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마태판은 마태복음 6장9~13절까지의 말씀이고, 누가판은 누가복음 11장2~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6장9~13절 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다음은 누가복음 11장2~4절 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하라.
왜 두개의 주기도문 본문이 있는가
우선 소위 ‘공관복음서 문제’에 속하기도 하는 신학적인 문제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방금 읽었듯이 주기도문에 대한 마태복음의 본문과 누가복음의 본문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즉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본문이 마태판과 누가판이 서로 다른데,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신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공관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는 마태판과 누가판의 공통 본문들을 학자들은 ‘Q자료’라는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 이 용어를 사용하여 방금 제기한 주기도문의 마태판과 누가판이 다르다는 문제에 대하여 간략하게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첫 번째로 가능한 설명은, 이 두 자료 곧 주기도문에 대한 마태판과 누가판이 우리가 보통 편리하게 부르는 ‘Q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복음서 본문에 모두 있기 때문에 이 주기도문은 Q 라는 자료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설명은, 마태복음판은 이른바 마태의 특수자료(보통 M이 라는 기호사용)에서, 누가복음은 누가의 특수 자료(보통 L이라고 표시)에서 이 주기도문을 각각 전승받아 기록했을 가능성입니다.
세번째로 가능한 설명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중 하나는 Q에서 자료를 받았고, 그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특수자료 즉 M이나 L에서 전승받았을 가능성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수 있는 것은, 누가가 마태에 의지하여 썼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본문에 대하여 왜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주기도문을 수록하고 있는 성경 본문에 대한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이 상당부분 공통점이 있으면서, 동시에 상당 부분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방금 말씀드린 몇가지 가설들 가운데서 어느 것이 가장 합당한지를 판정하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따라서 가능성 있어 보이는 네 가지 가설들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하고 옳은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최근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 네 가지 견해 가운데 처음 세가지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많은 학자들은 첫 번째 견해를 가장 가능성이 많다고 지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다음으로, 주께서 가르치신 이 기도를 ?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기도 본문들이 들어 있는 맥락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누가복음판의 주기도문에 대한 문학적 맥락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4절의 주기도문 본문에 앞서는 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처 주옵소서.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제 선생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문맥으로 볼 때, 예수는 그 요청에 응하여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일단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요청을 했다는 것이 사실은 매우 놀라운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수의 제자들은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은 기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기도를 할 줄 몰라서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들이 사실은 다 기도 아닙니까? 더욱이 예수 당시 유대에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잘 알고있는 유명한 기도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카디쉬(Kaddish)’라는 좀 짧은형태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18번 축복 기도’즉 ‘세모네 에레스(Shemone Esre)’라는 긴형태의 기도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카디쉬와 같은 기도문들을 매일 두세 번씩 낭송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기도를 많이 알고 있었고, 많이 하고 있었고, 시편 기도를 따라서 하곤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에게 기도를 가츠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요청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아무런 의문이 없는 것처럼 그냥 넘어갈수 없습니다. 왜 제자들이 굳이 또다시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 하는 질문이 당연히 생깁니다.
주기도문은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요약이다
기도를 잘 알고 있었고 기도를 늘 많이 하면서 지낸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 당시에는 메시아가 곧 와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리라는 기대가 유대인들 간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하려면 그에 앞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회개와 헌신과 순종을 새롭게 다짐해야 한다는 이런 현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부흥 운동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과 유대교 내에는 종말을 대비한 부흥 운동이 많이 일어났고,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단체들도 참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보는 바리새인들의 운동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회개하고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킬 정도로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메시아가 빨리 와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
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바리새 운동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제사장 민족으로 보려는 민족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 중산층 평신도 경건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센파 운동도 그 예입니다. 1947년부터 이스라엘 사해 주변의 쿰란(Qumran) 이라는 동네의 동굴에서 이른바 사해 문서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서들의 발견과 함께 주목 받게 된 예수 당시 사해 주변 쿰란에 모여 살던 일단의 무리들을 에센파(Essenes)라고 합니다. 이들은 쿰란 동굴에 은거하면서 성경 즉 구약을 연구하고, 서로 새롭게 회개하고 율법을 새롭게 잘 지키기로 헌신했는데, 이들도 바로 예수 당시에 있던 그 부흥 운동을 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런 부흥 운동을 한 사람 중에 하나가 우리가 잘 아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것, 다시 말해 임박한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였습니다. 그 심판에 대비해 회개하기를 촉구했고, 그리고 회개에 대한 표징으로 세례를 받도록 즉 옛 죄를 다 씻어 내는 의식을 하라는 그런 회개와 부흥 운동을 한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운동이 바로 회개와 헌신의 부흥 운동인 것입니다. 곧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에센인들, 그리고 세례 요한처럼 이런 부흥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학적인 이해와 이상과 소망 등을 담아 표현하는 특별한 기도문을 작성했습니다. 이런 기도문들은 부흥 운동을 하는 각각의 단체들이 내세우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이해, 자신들의 이상과 소망 등을 아주 압축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카디쉬 기도가 그렇고, 18번 축복 기도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도 자기의 신학과 종말론적 소망을 표현하는 기도문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회개와 부흥 운동에 대한 신학을 잘 표현하고 그 운동의 소망과 이상을 잘 표현하는 기도를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관행으로, 부흥 운동을 하는 단체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이끄는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복음서에서 모두 그 흔적을 볼 수 있는데, 특별히 요한복음 1장 19~51절까지 본문이 그것을 잘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고, 때문에 요한의 부흥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다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요한의 운동으로부터 점차 독립하여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 운동을 새롭게 시작한 것으로 사복음서들은 모두 그리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모두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3:13~17,1:9~11: 눅3:21~22: 요1:29-34)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는 세례 요한의 운동에 동참한 분으로, 일단 세례 요한이 선포한 회개이고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이어 받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스스로를 헌신해야 한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이어받습니다. 그러면서도 강조점을 좀 달리합니다.
요한이 불로 임하실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 반면, 예수는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불로 비유되는 심판을 말씀하지만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강조의 초점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예수는 요한 운동에서 독립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을 새롭게 한다는 점에서 요한의 가르침과 일부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새로운 정신, 새로운 강조점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심판에 대비한 극도의 절세적 삶 또는 금욕적 삶을 요구했다면, 예수는 그와 반대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을 복음서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 자신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따라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고, 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자주 벌이는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비슷한 점과 대조점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렇게 예수는 요한 운동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이상, 새로운 소망, 새로운 태도 등을 표방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 했습니다.
이와 함께 요한의 제자이던 일부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또는 예수를 따라서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를 따라 나선 제자들 중 하나가 예수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눅11:1)
기도를 요청하는 이 장면은 풀어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선생께서 이제 하나님의 구원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요한 운동과는 강조점을 좀 달리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니, 선생을 따르는 우리가 계속해서 요한이 가르쳐준 기도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요한이 자기 시대에 자신이 주도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 그에 맞는 기도문을 가르쳤듯이 선생도 선생의 구원사의 새 시대에 걸 맞는 기도를 가르치셔야 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1장 1절과 2절의 전반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예수의 공동체에 자신들의 신학과 자신들의 이상과 소망을 담아서 표현하는 새로운 기도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이 가르친 기도가 요한의 신학을 담아서 요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잘 나타냈듯이, 예수 운동도 예수의 가르친 신학과 예수의 이상과 예수의 소망 등을 잘 담아 표현함으로 예수 공동체, 예수가 지금 새롭게 구성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정체성(Identity) 을 가장 잘 나타낼 기도가 필요하게 되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기도를 가르쳐 달라 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 주기도문이 주어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본문의 전(前) 문맥은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 주기도문이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 바로 누가복음판이 소개하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이 ‘주기도문’ 이라는 단어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요약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 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맥락에서 누가복음을 보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려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신앙과 이상과 소망을 가장 잘 담아 표현해 주는 것임을 암시받을수 있습니다. 즉 이 기도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잘 나타내 주는 그런 성격의 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모든 제자들이 함께, 항상, 가장 기본적으로 드려야 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이며, 이는 또한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기도문은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 전체의 요약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기도문을 가르쳐 주게 됩니다.
주기도문을 교회의 기도로 공식화하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 교회안에서 공식적인 기도문으로 자리잡은 것과 관련
그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예수님 당시 유대교 안에는 아마 몇 개의 중요한 기도문들이 공적인 기도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에 두 개의 기도를 이미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그 하나는 ‘카디쉬’라는 기도로서, 이 기도는 유대 회당에서 설교 끝에 함께 낭송한 기도이며, 짧막한 형태의 기도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18번 축복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번 즉 아침과 오후가 시작되는 시간 그리고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에 각각 반드시 드려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이 ‘18번 축복 기도(Tepillah, Shemone Esre)’야말로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기도였습니다.
카디쉬(Kaddish)기도
따라서 당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소위 ‘주기도문’이 처음에는 아마도 ‘18번 축복 기도’와 함께 드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점차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18번 축복 기도(Tepillah, Shemone Esre)를 대신했다가 마침내 교회의 유일한 공통 기도로 자리를 잡게 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점차 이방인 선교를 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이방인 들이 많이 늘어나고 18번 축복 기도의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늘어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주후 66~70년까지의 유대 전쟁을 기점으로 해서 교회와 유대교는 완전히 분리하게 됩니다. 이 유대 전쟁 직후, 유대교 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규정하고 유대 회당에서 많이 축출(출교)했습니다.
"요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ταυτα ειπον οι γονεις αυτου οτι εφοβουντο τους ιουδαιους ηδη γαρ συνετεθειντο οι ιουδαιοι ινα εαν τις αυτον ομολογηση χριστον αποσυναγωγος γενηται."
<18기도문 Tepillah, Shemone Esre의 내용>
:그리스도인을 색출하여 출교 시키고 나아가 죽이기 까지 하기 위한 수단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태도가 18번 축복 기도에 반영 되어 있는데, 그 열두번째 기도(Birkath ha Minim)는 이렇습니다.
“배교자들에게는 소망이 없게 하시고,
교만한 나라는 빨리 우리의 생애에 뿌리 뽑히게 하소서,
그리고 나사렛 당원들(기독교인)과 이단자들은 빨리 망하게 하시고,
그들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시며, 그들이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교만한 자들은 겸손케 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반영합니까?
이 무렵에 벌써 예수당 혹은 나사렛당 곧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규정해 그들을 유대 회당에서 축출(출교)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때 교회와 유대 회당이 좀더 명백히 분리되면서 교회가 유대교와 공식적으로 관계를 끊게 됩니다. * 이것이 A.D. 85-90녕경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 상황임.
이 무렵, 즉 한편으로는 이방인들이 점점 교회의 다수가 되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교에서 교회가 분리되는 상황 속에서 18번 축복 기도는 이제 교회의 기도로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 대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교회 공동체의 기본적인 공중 기도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이제 마태복음판의 주기도문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를 이른바 산상수훈이라고 하는데, 산상수훈 전체를 놓고 보면 그 한가운데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위치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선 혹은 구제입니다.(6:1-4),
예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당시 유대인들 처럼 자기를 드러내 놓고 자랑하면서 자기 과시나 자기 만족을 위해 자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둘째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6:5-15)
셋째는 금식에 대한 가르침입니다(6:16-18),
금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가끔 40일 금식 기도 한다고 광고하고 다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금식을 하려면 즐겁게 하라는 것입니다.
금식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유대교의 대표적 종교 행위인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이 단락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들어 있으며,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도 기도에 관한 가르침 속에 이 주기도문이 속합니다.
즉 자선, 기도, 금식으로 대표되는 유대교의 종교 행위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의 중심 부분에 기도를 위치시켰고, 그 기도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에 주기도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조에 대하여 한걸음 더 들어가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 부분에서도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중심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장5-15절이 기도에 관한 가르침인데, 6장5-9절 전반부에서 그릇된 기도들을 먼저 다룹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지적하고, 두 번째는 이방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비판합니다.
그리고는 “너희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안된다” 고 하시면서, 이제 드디어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14-15절에서 주기도문의 강조점을 되새김하는 방식으로 다시 한번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요구 하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죄 용서의 문제를 강조하시면서) 이 단락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관련된 문학적 문맥은 아주 조직적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원래 문학적으로 아주 정교하게 구성된 복음서입니다. 예컨데, 마태복음 전체는 다섯개의 강론과 다섯 개의 설교로 아주 정교하게 교직(交織)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은 문학적으로 아주 치밀한 구조를 가진 책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전체를 그렇게 정교하게 문학적으로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자신의 문학적 성향을 산상수훈 문맥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본것처럼, 마태는 산상수훈도 굉장히 정교하게 구성해 놓았습니다.
마태는 산상수훈을 매우 치밀한 문학적 구조로 짜면서 주기도문을 그 한가운데 위치하도록 했습니다.
즉 산상수훈(마5장-7장) 가운데서도 가운데 부분에 종교적 관행 혹은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을 위치 시켰고(마6:1-18), 또 그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도 중심 위치에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배열했으며(마6:5-15), 그 가르침 중에서도 또 중앙 핵심부에 주기도문이 자리하도록 하는(마6:9b-10) 문학적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할 때 예수께서 강조한 부분을 잘 살리기 위해 일부러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산상수훈이라는 예수의 제자도 실천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의 핵심’ 에 위치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매우 치밀한 문학적 구조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 것입니까? 왜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핵심 중에 핵심에 위치하도록 구조되어 있는 것일까요? 마태는 이러한 문학적 구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능가하는 완벽한 법을 우리에게 전하신 예수님,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계시해 주시고 전달해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해야 할 도리인데, 그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잘 순종하는 동력이 바로 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제자도의 가장 기본이고 우리의 제자도를 가능케 하는 것임을 말하기 위해 마태는 이렇듯 정교하게 산상수훈을 조직했고, 그 핵심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넣어 놓았습니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가장 근본 도리이다. 이 기도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삶의 힘을 얻는다.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가장 중심에 기도가 있다는 것 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됨의 가장 핵심에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어떤 기도입니까?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입니다. 하나님 백성됨의 가장 근본 또는 중심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하며, 이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로 살아가는 방식임을 마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 백성’이 하는 기도이다
그러면 이제 범위를 좁혀 주기도문이 들어 있는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 전후 문맥 즉 6장5-15절의 단락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는 여기서도 자신의 문학적 특성을 좇아 본문을 아주 정교하게 구성해 놓고 있습니다. 자선, 기도, 금식으로 대표되는 세 가지 중요한 종교 행위들 가운데 기도를 다루는 이 단락에서, 마태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함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기도를지적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구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떠들썩하게 기도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기도의 사람이고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 내세우려 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자들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처럼 하지말고 “너는 기도할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고 가르칩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만남과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가능한 한 은밀한 중에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만남이 의식이 되고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절실한 헌신이 이루어집니
다.
사람들에게 보이기위해 기도하면 남에 대한 의식이 더 커지고, 다른 사람 앞에서 나의 체면과 명예가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가 우리를 압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되지 못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통성 기도하는 순간에도 내가 하나님께 은밀하게 한다는 정신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남에게 뽐내려고 혹은 남을 의식해서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청산 유수처럼 잘하는 사람을 간혹 보는데, 그 사람이 오랫동안 신앙 생활한 것을 은근히 자랑하거나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곧 유대인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기도 관행’ 에 대항하여 이렇게 가르친 예수는 이제 ‘이방인들의 기도 관행’ 에 대항해서도 새롭게 가르칩니다. 여기서 예수가 지적하는 이방인의 기도 관행의 특징은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7절 말씀을 봅시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왜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합니까? 구약성경에 의하면, 우상이란 나무 조각이나 돌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무 조각이나 돌 조각을 새겨서는 신이라고 했기 때문에, 구약 선지자들은 우상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눈이 멀었고 귀가 먹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 봐야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대결한 바알 선지자들이 아무리 소리 높여 기도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이방인들의 우상은 나무 조각과 돌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이 귀먹고 눈먼 존재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자꾸 중언부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문제와 필요를 다 아시는 아빠 하나님이십니다.(아바 아버지). 그러니까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아니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미리 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게 바로 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 종종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듣게 되는데,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아마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에 대하여 갖고 있는 생각과 비슷하게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한다면 이방인과 같은 셈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처럼,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8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기 때문에 유대인처럼도, 이방인처럼도 기도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주 의식적으로 이 주기도가 ‘하나님 나라 백성’ 의 기본적인 기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기도는 ‘유대인’ 의 기도와도 다르고 ‘이방인’ 의 기도와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는 기도하는 자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이며, 예수의 제자라면 지금 예수께서 새롭게 가르치는 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내용으로 보면 유대의 기도들과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사이에 같은 부분이 잇지만 이 문제는 뒷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의 바로 위아래 붙어 있는 근접 문맥을 조금 더 분석해 보겠습니다. 9절부터 13절까지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곧 ‘주기도문(Lord’s Prayer)’ 입니다
주기도문 원문 직독직해(해석) (마태복음 본문)
1. 제목: 너희는 이방인들처럼 되지 말라
마태복음 6:5-8 원문
5. και οταν προσευχη ουκ εση ωσπερ οι υποκριται οτι φιλουσιν εν ταις συναγωγαις και εν ταις γωνιαις των πλατειων εστωτες προσευχεσθαι οπως αν φανωσιν τοις ανθρωποις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τι απεχουσιν τον μισθον αυτων
6. συ δε οταν προσευχη εισελθε εις το ταμιειον σου και κλεισας την θυραν σου προσευξαι τω πατρι σου τω εν τω κρυπτω και ο πατηρ σου ο βλεπων εν τω κρυπτω αποδωσει σοι εν τω φανερω
7. προσευχομενοι δε μη βαττολογησητε ωσπερ οι εθνικοι δοκουσιν γαρ οτι εν τη πολυλογια αυτων εισακουσθησονται
8. μη ουν ομοιωθητε αυτοις οιδεν γαρ ο πατηρ υμων ων χρειαν εχετε προ του υμας αιτησαι αυτον
<직해>
마 6:5
5. και οταν προσευχη ουκ εση
카이 호탄 프로수케스쎄 우크 에세스쎄
그리고 / 너희가 기도 할 때 / 되지말라
ωσπερ οι υποκριται οτι φιλουσιν εν ταις συναγωγαις"
호스 호이 휘포크리타이 호티 필루신 엔 타이스 수나고이스
그 위선자들처럼 / 왜냐하면 / 그들은 좋아하기 때문이다 / 그 회당들 안에서
και εν ταις γωνιαις των πλατειων εστωτες
카이엔 타이스 고니아이스 톤 플라테이온 헤스토테스
그리고 / 모퉁이들에서 / 넓은 길거리의 / 서서
προσευχεσθαι οπως αν φανωσιν τοις ανθρωποις
프로슈케스싸이 호포스 파노신 토이스 안쓰로포이스
기도 하기를 / 나타내기 위하여 / 그 사람들에게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τι απεχουσιν τον μισθον αυτων
아멘 레고 휘민 아페쿠신 톤 미스쏜 아우톤
진실로 / 내가 말한다 / 너희에게 / 그들은 돌려받았다 / 그 보상을 / 그들의
6:6. συ δε οταν προσευχη εισελθε εις το ταμιειον σου εν τω φανερω
쉬 데 호탄 프로슈케 에이셀세 에이스 토 타메이온 수
너는 / 그리고 / 너는 기도할 때 / 들어가라 / 그 밀실로 / 너의
και κλεισας την θυραν σου προσευξαι
카이 클레이사스 텐 쑤란 수 프로슉사이
그리고 / 닫은 후에 / 그 문을 / 너의 / 너는 기도하라
τω πατρι σου τω εν τω κρυπτω και ο πατηρ σου
토 파트리 수 토 엔 토 크룹토 카이 호 파테르 수
그 아버지에게 / 너의 / 그 은밀한 곳 안에 계신 / 그리고 / 그 아버지는 / 너의
ο βλεπων εν τω κρυπτω αποδωσει σοι .
호 블레폰 엔 토 크뤂토 아포도세이 소이
보고 계시는 / 은밀한 곳에서 / 보상 하실 것이다 / 너에게
6:7. προσευχομενοι δε μη βαττολογησητε
프로슈코메노이 데 메 밧탈로게세테
기도하면서 / 그리고 /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
/ ωσπερ οι εθνικοι δοκουσιν γαρ οτι εν τη πολυλογια
호스페르 호이 에쓰니코이 도쿠신 가르 호티 엔 테 폴루로기아
마치 이방인들처럼 / 왜냐하면 그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 많은 말로 인해서
αυτων εισακουσθησονται μη ουν ομοιωθητε
아우톤 에이사쿠스쎄손타이 메 운 호모이오쎄테
그들의 / 응답되어진다 라고 / 그러므로 / 같게 되지 말라
αυτοις οιδεν γαρ ο πατηρ υμων
아우토이스 오이덴 가르 호 파테르 휘몬
그들처럼 / 왜냐하면 /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 그 아버지가 / 너희의
ων χρειαν εχετε προ του υμας αιτησαι αυτον
혼 크레이안 에케테 프로 투 휘마스 아이테사이 아우톤
필요를 /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을 / 너희가 구하기 전에 / 그것을
2.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주기도문)
마태복음 6:9-13 원문
9. ουτως ουν προσευχεσθε υμεις,
πατερ ημων ο εν τοις ουρανοις αγιασθητω το ονομα σου
10. ελθετω η βασιλεια σου γενηθητω το θελημα σου ως εν ουρανω και επι της γης
11. τον αρτον ημων τον επιουσιον δος ημιν σημερον
12. και αφες ημιν τα οφειληματα ημων ως και ημεις αφιεμεν τοις οφειλεταις ημων
13. και μη εισενεγκης ημας εις πειρασμον αλλα ρυσαι ημας απο του πονηρου
οτι σου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και η δυναμις και η δοξα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αμην.
<직해>
마 6:9 "ουτως ουν προσευχεσθε υμεις,"
후토스 운 프로슈케스쎄 휘메이스.
이렇게 / 그러므로 / 너희는 기도하라 / 너희는 /
여기서 ou{tw"는 이런 방법으로, 방식으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산상수훈 말씀중 외식하는 유대인들을 지적 한 것에 비견하여 그에 반해서의 의미이다.
πατερ ημων ο εν τοις ουρανοις
파테르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아버지여 / 우리들의 / 그 하늘 안에 계신
εν τοις ουρανοις 는 영어의 p+n의 인데 oJ가 붙어서 관계 대명사 역할을 한다.
who is in heaven 으로 영역본들도 번역 하고 있다.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이는 하늘이 둘이라는 뜻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독특한 표현 방식인데 장엄한 복수형이라는 표현 방식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이란 뜻이다. 하나님이란 단어 엘로힘도 복수형을 띠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하신 분을 표현하는 유대인들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αγιασθητω το ονομα σου
하기아스쎄토 토 오노마 수
‘거룩하게 되어 지게 해 주세요 / 그 이름이 / 당신의
αγιασθητω το ονομα σου는 동사, 명령, 과거, 수동태, 3인칭 단수이다.
번역하면 ‘당신의 그 이름이 거룩하게 되어 지게 해 주세요’의 의미로 하나님께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거룩하게 되게 해 달라고 하는 의미의 뜻이다.
10, ελθετω η βασιλεια σου
엘쎄토 헤 바실레이아 수
오게 해 주세요 / 그 나라가 / 당신의
여기서 동사 명령 ejlqevtw가 부과 명령으로 쓰였는데 이는 지금, 곧, 기도의 현장에서 임하게 해 달라는 의미이다.
γενηθητω το θελημα σου ως εν ουρανω
게네쎄토 토 쎌레마 수 호스 엔 우라노
행하여지게 하세요 / 그 뜻이 / 당신의 / 하늘에서 처럼
여기에서 하늘과 땅에는 관사가 없다. 하늘과 땅이라는 개념만 한정한 것이다.
και επι της γης τον αρτον ημων τον επιουσιον δος
카이 에피 게스 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신 도스
그리고 / 땅위에서도 / 그 빵(음식)을 / 우리들의 / 규칙적인(매일의) / 주세요
ejpiouvsion은 매일의, 정규적인, 규칙적인, 생존을 위한, 의 말로 생존을 위해서 날마다 먹는 규칙적인 식사를 말한다.
ημιν σημερον και αφες ημιν τα οφειληματα
헤민 세메론 카이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일레마타
우리에게 / 오늘(날) / 그리고 / 면제해 주세요 / 우리에게 / 그 채무(빚)을
οφειληματα 는 개역성경에서는 ‘죄’라고 번역 되었는데 의무, 빚, 채무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이는 죄의 값을 말하는 것이다. 즉 용서해 달라는 말이다. ajfivhmi는 인칭에 대해서는 ‘보내다, 떠나게 하다,내어 보내다. 쫓아 보내다등의 의리로 쓰이고 비인치에 대해서는 풀어놓다. 쏘다(화살), 포기하다,등의 뜻으로 쓰이며, 이 단어는 법적인 용법으로 '법적 속박에서 벗어나다, 방면하다, 면제하다, 용서하다(죄, 의무, 처벌로부터)'를 의미한다.
ημων ως και ημεις αφιεμεν τοις οφειλεταις
헤몬 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페카멘 토이스 오페일레타이스
우리들의 / 그리고 / 우리가 / 면제해 준 것처럼 / 그 채무자들에게
ημων και μη εισενεγκης ημας εις πειρασμον
헤몬 카이 메 에이세넹케스 헤마스 에이스 페이라스몬
우리들의 / 그리고 / 안으로 이끌지 말아주세요/ 우리를 / 시험 안으로
αλλα ρυσαι ημας απο του πονηρου
알라 흐뤼사이 헤마스 아포 투 포네루
오히려 / 구해내 주세요 / 우리들을 / 그 악한 것으로부터
ponhrou'는 형용사로 악한, 사악한의 뜻을 가진 단어로 관사가 합쳐서서 악한 것(것들)의 뜻이 된다.
οτι σου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호티 수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왜냐하면 /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 왕국과
και η δυναμις και η δοξα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카이 헤 뒤나미스 카이 헤 독사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그리고 / 그 능력과 / 그리고 / 그 영광이 / 영원 하도록( 영원들을 향하여)
αμην.
아멘.
οτι는 부사절을 이끄는 접속사로 거의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대체적으로 이유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 한다. 한글 성경은 ‘대개’라는 말로 번역 되어 있다. 본 절은 sou가 소유격이기 때문에 ‘당신의 그 왕국과 그 능력과 그리고 그 영광이 영원토록 있기 때문입니다’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역본들도 전자로 해석하고 있다. <글: 염 찬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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