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신앙을 가진 이방인 (마 8:1-13)
예수님은 산 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그 가르침을 들은 무리들은 권세 있는 예수님의 교훈에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침을 마치신 후에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듣고 크게 놀라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실 때에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교훈을 기록한 후에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력 기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교훈과 이적 사건을 5차례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러한 구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 8-9장)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9가지 기적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9가지 사건은 다시 3가지 사건씩 셋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세 가지 기적을 기록한 후에 그 사건들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기록된 세 가지 기적 사건(문둥병자, 백부장 하인,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 후에는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좆겠습니다!" 두 번째 세 가지 기적 사건(폭풍우를 잠잠케 함, 축사, 중풍병자를 고치심) 후에는 다음과 같은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리가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지막 세 번째 세 가지 기적 사건(회당장의 아이를 살림, 여인의 치료, 소경을 고쳐주심) 후에는 다음과 같은 반응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리가 기이히 여기니라!"
이 세 가지 기록 중에 제일 앞에 나오는 세 가지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인"으로 취급받던 소외된 사람들이 고침받은 사건입니다. 당시에 문둥병자는 저주받은 자로 간주되었고, 백부장의 종은 이방인이었으며,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는 사회에서 천대 받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신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심(마 8:2-3, 막 1:40-42, 눅 5:12-13)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2-3)."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막 1:40-4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눅 5:12-13)."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동네에서 전도하실 때에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이 환자가 신체의 일부가 아닌 온 몸에 문둥병이 든 사람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이 환자는 전신에 악성 문둥병이 걸려 고통을 받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문둥병을 하나님께 저주받아서 걸린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병은 전염병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일단 이 병에 걸리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사형선고 받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제사장이 정밀하게 진단한 후에 한 사람이 문둥병이 걸렸다고 진단되면, 그 사람은 즉시 가족과 그가 살던 공동체에서 격리되었습니다(레 13장). 율법도 문둥병 환자들이 타인과 접촉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그 병이 낫지 않으면 그는 죽을 때까지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혼자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레위기는 문둥병 자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습니다. "문둥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 즉 혼자 살되 진밖에 살지니라!(레 13:45-)" 이러한 점에서 문둥병자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을 찾아온 일은 율법의 규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것은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그가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능히 고쳐주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그 문둥병자의 고백은 그가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율법의 규례를 어기면서까지 예수님을 찾아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문둥병자는 예수님께서 다른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것을 먼 곳에서 목격했거나, 아니면 타인의 말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치유해 주신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간접적인 정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기 병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그 문둥병자를 보시고 그를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민망히 여겼다'(스프랑크니스데이스)는 말은 '깊이 동정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온 문둥병자를 보시고, 그가 받는 고통을 아시고 마음에 동정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을 때에 그 고통을 함께 느끼시며 마음 아파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체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에 예수님께 나아가서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서 그 환자에게 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문동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정상인인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접촉한 것도 율법을 어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보다 율법의 정신, 즉 긍휼과 자비의 법을 따라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문둥병자가 자신을 찾아온 일을 책망하시지도 않았고, 또 자신도 율법을 어기고 기꺼이 그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서 만져주셨습니다. 율법이 문동병자를 격리시키도록 지시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전염되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율법이 문동병자와 정상인의 접촉을 금지한 것은 치료가 가능한 것을 막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문동병자와 접촉해도 문둥병에 걸릴 위험이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이 문둥병자를 고칠 능력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크게 고통을 받는 문둥병자를 고쳐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당시의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따라 그 문둥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그의 믿음대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 나온 사람을 결코 거부하거나 돌려 보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 나온 사람들에게 항상 최선의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문둥병자처럼 관습과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담대히 예수님을 찾아 가서 때를 따라 필요한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치유의 선언이 선포되는 순간, 그 환자는 정상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8:4, 막 1:43-44, 눅 5: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마 8:4)."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43),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라(44)."(막 1:43-44)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눅 5:14)...."
예수님은 군중들이 이적과 기사에 열광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문둥병 환자를 고치신 후에 그에게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로 인해 자신이 그릇된 메시아로 오해를 받고 또 복음 전파 사역이 지장받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둥병자에게 율법에 명한 규례를 따라 병에서 나은 것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율법은 문둥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쳐서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레 14:2-31). 1)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이 나은 것을 알리고 제사장의 정밀 진단을 받는다. 2) 제사장이 나았다고 판단되면 정결 예식을 통해서 그가 병에서 나은 것을 증거했다. 3) 병에서 나은 자는 몸을 씻은 후에 규정된 예물들 드리고 1-2차 정결 예식을 행해야 했다. 4) 그 후에 그는 병을 치유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하나님께 다시 자신을 헌신하는 의미의 제사를 드렸다. 5) 이 모든 예식이 정상 적으로 마치면 제사장은 그 사람이 병에서 나았다는 사실을 선포했다. 6) 이 모든 절차가 마치면 그는 비로소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예수님은 문둥병에서 나은 사람에게 이러한 율법의 절차를 거쳐서 가족에게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특수한 상황에서 율법의 규례를 넘어서 그를 고쳐 주셨지만, 그가 고침받은 후에는 율법의 규례를 따르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이러한 절차를 거친 후에 자유인이 되어 그리운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겸손한 신앙(마 8:8, 눅 7:6-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
"예수께서 함께 가실 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 7:6-7)."
예수님은 유대 장로들의 권면과 백부장의 간청을 듣고 그의 집에 가서 종을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유대인은 이방인과의 교제가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인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집에 가서 종의 병을 고치는 일은 유대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 장로들의 권면을 듣고 기꺼이 백부장의 집에 가서 그의 종을 고쳐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이방인과 교제를 금하는 유대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일을 만류했습니다. 마태복음은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서 집에 오시는 일을 만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백부장이 자기 친구들을 보내서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일을 만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마태와 누가가 서로 다른 사건을 기록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두 저자가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관점과 방법으로 묘사했한 일로 인해 일어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기록은 누가의 기록보다 직접적이며 내용을 압축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트뢸치는 마태가 인칭을 바꾸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이 전한 백부장의 진술을 강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처음에 백부장이 자기 친구를 보냈지만, 후에 다시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서 집에 오는 것을 만류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백부장은(또는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내가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는 유대인인 예수님께서 이방인인 자기 집에 오셔서 문제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예수님처럼 거룩하신 분이 자신처럼 죄많은 사람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예수님을 모시는 일에 있어서 최상의 겸손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정복국의 군대 지휘관으로서 매우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우리 나라가 일본의 통치 하에 있을 때에 일본 군대 장교나 순사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일본 군대 장교나 순사는 한국 국민들을 매우 고압적인 태도로 대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정복국인 로마 군대의 장교가 유대의 한 청년인 예수님께 이와 같이 겸손한 태도를 취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의 겸손한 태도는 그가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었으며, 또한 성령님에 의해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자신을 남보다 크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이 아니라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백부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알았고, 또 겸손과 온유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이러한 백부장의 고백은 그가 얼마나 놀라운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말씀만으로도 얼마든지 자기 종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께서 굳이 자기 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자기 종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마 8:9, 눅 7:8)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9)."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8)."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자기 종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신앙은 군대의 장교인 그의 삶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세계 최강의 군대인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지휘관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했습니다. 그는 상관의 명령을 받고 복종했으며, 또 자기 부하에게 명령을 해서 복종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군인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린 명령이라도 복종해야 합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은 곧 법과 같습니다. 특히 전시에서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이러한 그의 환경은 그의 신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은 후에 세상에 가장 높으신 지휘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왕중의 왕이시며 모든 통치자 중에 통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가장 높은 지휘관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회당에서 율법을 듣고 율법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아무 것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지휘관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신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안에 있는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께서 명령만 하면 얼마든지 자기 종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굳이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당시의 상황에서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수많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또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또 다른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백부장은 하나님을 믿었을 뿐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율법에 순종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당시에 보기 드문 진실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목사나 장로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나,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 중에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만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미 받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큰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수많은 표적을 보아도 순종하지 못하고 더 큰 기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받은 은혜에 만족하고 성령님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하면서 더 큰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까?
백부장은 이스라엘의 정복국가인 로마의 군대 지휘관으로 예수님께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히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삶 속에서 그 열매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종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율법을 따라 살았고, 이웃을 구제했으며, 또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유대 장로들도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를 돕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군대 경험을 통해서 남이 갖지 못한 절대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주의 사령관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언제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수많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지만, 그는 율법에 온전히 순종했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자기 종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해 주신 사건에 대해서 함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믿음(마 8:10, 눅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눅 7:9)."
백부장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백부장의 말을 듣고 놀라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이러한 큰 믿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이러한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백부장은 그들과 달리 절대 순종의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뒤를 돌아보시면서 무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서부터 가정과 회당에서 철저한 신앙의 훈련을 받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에서 해방되었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신앙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철저한 율법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외식과 형식에 빠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백부장은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할만큼 큰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늦게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의 믿음은 유대인들을 능가했습니다. 백부장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처럼 이미 받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큰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큰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말씀에 절대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표적보다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그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체험적인 신앙을 갖게 되고, 살아 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람은 성령님의 통치에 순종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역전하는 신앙(마 8:11-12)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1-12)."
예수님은 이방인 백부장을 통해서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많은 이방인들을 미리 바라보셨습니다. 당시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방인 백부장처럼 온전한 믿음을 가진 이방인들이 수없이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들이 버린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대신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1차적으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세계로 알려진 모든 지역들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으며, 이를 통해서 수많은 이방인들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니아, 로마, 그리고 스페인의 수많은 이방인들은 복음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침노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전 세계에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천국으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방인으로 복음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잇는 천국의 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은 무리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는 한편,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천국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로마인의 손을 빌려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인 피값을 자신과 자신의 자손들의 머리로 돌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인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도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좆아가서 그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물론 소수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수많은 유대인들 이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경시하다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일이 일너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응답 받는 신앙(마 8:13, 눅 7:10)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 8:13)."
"보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눅 7:10)."
예수님은 백부장의 큰 믿음을 보시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백부장의 하인의 병이 낫게되었습니다. 백부장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집에 도착해서 백부장의 하인이 이미 건강해져 있는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백부장의 온전한 신앙은 그의 하인을 건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참된 신앙인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축복으로 인도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축복의 통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하인 역시 경건한 주인을 만나서 병을 고침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민족이나 신분을 초월해서 자신을 경외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정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숨겨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높이 들어서 세상에 빛을 비취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백부장이 남들과 다른 탁월한 신앙을 가지고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종을 아프게 하시고 이를 통해서 백부장을 사람들 앞에 높이 들어 보여주셨습니다. 백부장의 종이 병이 든 것은 그의 온전한 신앙을 유대인에게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백부장처럼 온전한 신앙을 갖고, 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발견하면 그들을 숨겨 두시지 않고 높이 들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온전한 신앙입니까? 우리는 삶 속에서 순종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베드로 장모의 치유 (마 8:14-15)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신 후에 그곳에 있던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단과 악한 영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의 세력을 제어하시고, 가시는 곳마다 숨어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추방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께서 악한 영들을 쫓아내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을 보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진정으로 능력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말했습니다.
1.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침(마 8:14-15, 막 1:29-31, 눅 4:38-39)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14),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15)."(마 8:14-15)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29),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30),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31)."(막 1:29-31)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38),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39)."(눅 4:38-39)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역을 하신 후에 회당을 나와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의 동역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동행했을 것입니다. 이 때에 시몬의 집에는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걸려서 누워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서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몸져 누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즉시 그녀가 누워 있는 방으로 가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는 열병에서 놓여 완전히 회복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어서 예수님과 그 일행을 시중드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악령 뿐 아니라 인간의 질병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세계 뿐 아니라 자연 세계도 주관하십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집과 자기 가족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좆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도 없습니다. 가장이 여자들과 식구들을 버리고 다른 일에 몰두하면 그의 가족들은 생활고로 심한 타격을 받게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 때, 그의 가족이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가족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좆았을 때에, 예수님은 그의 집을 갈릴리 선교의 중심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의 장모도 중한 열병에서 회복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위해서 희생한 가족들을 구원해 주시고, 또 그 집을 갈릴리 복음 전파의 기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2. 축사 및 치유 사역(마 8:16-17, 막 1:32-34, 눅 4:40-41)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6-17)."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막 1:32-34)."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눅 4:40-41)."
이제 예수님이 계시던 가버나움 해변에는 저녁이 되어 해가 지고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안식일이 지나고 안식 후 첫째 날이 되었습니다(유대인은 하루를 저녁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로 계산함). 저물어 해가 지고 안식일이 끝나게 되자. 동네 사람들은 모든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하신 일과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계신다는 소식은 곧 온 동네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환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규례는 안식일에 먼 곳을 이동하거나 병을 고칠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녁이 되어 안식일이 끝나게 되자, 그들은 즉시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게서 계신 시몬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본문에서 마가는 "병이 든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32). 어떤 사람은 모든 질병을 귀신이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누가 병이 들면 무조건 귀신을 쫒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감기만 걸려도 감기 귀신을 내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어떤 질병은 귀신이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을 때에 "귀머거리되고 벙어리된 귀신아 나오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사람의 귀와 입을 막은 것은 귀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귀신이 쫓겨 나간 후에 귀와 입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성경은 모든 질병이 귀신이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는 "귀신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고 말했고, 누가는 "각색 병든 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마가는 "병든 사람과 귀신들린 사람"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여기에서 귀신과 관계 없이 질병에 걸린 사람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모든 질병이 귀신이 가져다 준다고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이때에 온 동네 사람들이 시몬의 집 앞에 모여서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녁에 시몬의 집을 찾아 온 병에 걸린 사람들 귀신에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마태는 구약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의 치유와 축사 사건이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유명한 "종의 노래"에서 메시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이사야는 메시아께서 우리의 질병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친히 담당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의 질병(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 뿐 아니라 우리의 몸(질병)과 감정(슬픔)의 문제도 해결해 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전인격(영혼과 몸과 감정)적으로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전인적으로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셔서 백성들의 병과 슬픔을 담당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예수님의 치유와 축사 사건을 통해서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의 치유와 축사 사건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 예수님은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귀신들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자신(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에 의해 증거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에 득이 되기 보다는 해가 되기 쉽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귀신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또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귀신에 의해서 언급되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귀신들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 거룩하게 된 증인들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이 증거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악한 영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단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단은 교묘하게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예수님을 "이적을 행하는 메시아"로 알리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기적이 천국 복음 전파의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단은 군중들이 예수님과 복음보다 이적에 더 관심을 갖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군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되면 인기에 도취되서 본질을 벗어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간교한 유혹에 넘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단의 계략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환호하는 무리들을 뒤로 하고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은밀하고 깊은 교제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다음 사역을 위한 힘을 얻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군중의 지지를 받을 때에 더욱 더 하나님과의 교제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군중의 환호에 빠져서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숙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경건의 훈련을 계속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마 8:23-2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에서 마지막 때까지 일어날 일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로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침과 함께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그들에게 임한 것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강한 바람과 큰 파도를 잠잠케 하셨고, 군대 귀신에 들린 사람과 12년된 혈루병 환자를 고쳐 주셨으며, 또 이미 죽은 소녀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자신이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 그리고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사실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기적들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풍랑으로 이는 바다에서(마 8:23-24, 막 4:35-38(상), 눅 8:22-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23),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마 8:23-24)."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니,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막 4:35-38(상))."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22),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눅 8:22-23)."
예수님은 하루 종일 해안에 모인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날이 저물게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셔서 그곳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바다 일에 많은 경험을 가진 어부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평생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배에 타신 후에, 바다 건너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 때에 주변에 있던 다른 배들도 예수님이 타신 배를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타신 배가 바다 한 가운데 들어섰을 때에, 갑자기 바다에 큰 바람이 불고 큰 파도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과 파도는 사납게 배를 흔들어댔고 배 안에는 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주변이 높은 산들로 둘러 싸여 있어서 분지같이 되어있습니다. 이 바다는 길이 20km, 폭이 12km정도 되는 호수였고, 지중해 수면보다 약 208m정도 낮았습니다. 이 바다는 기온이 온화했고, 그물로 물고기를 잡을만큼 물고기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때로 서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남쪽 계곡을 통과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 때에는 바람이 분지같이 생긴 갈릴리 바다로 들어오면서 큰 폭풍으로 돌변하곤 했습니다. 이 돌풍은 대부분 오후에 불었다가 저녁 쯤에 약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어부들은 이 바람이 불지 않는 밤을 이용해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때로 강한 돌풍이 저녁 후에 불 때가 있었는데, 이러한 바람은 매우 강했습니다. 이 바람은 엄청난 힘으로 수면을 쳐댔기 때문에, 높은 파도를 일으켜서 고기를 잡는 배를 덮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배에 있는 사람들은 갑자기 위험에 빠지곤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폭풍이 바로 이러한 폭풍이었습니다.
2. 참 인간이신 예수님
그러면 이 때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 때에 예수님은 배의 선미 쪽에서 배개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배를 타고 갈 때에, 종종 배의 선미 쪽에서 피곤에 지친 몸을 쉬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날 하루 종일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피곤해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천사들과 영적 존재들은 음식이나 휴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셔야 했으며, 또 피곤하면 휴식을 취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할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죄는 없지만 우리를 위해서 육신의 연약함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셨고, 피곤함을 느끼셨으며, 또 휴식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고통 받을 때에 우리를 능히 도와줄 수 있습니다(히 4:15).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데자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일을 하다가 피곤하거나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때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기꺼이 우리를 도와주실 하늘의 대제사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만날 때에 예수님께 나아가서 필요한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거절하시지 않고 기쁘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어려운 일로 인해서 피곤과 낙심에 빠져 있는 분은 없습니까? 일을 하다가 시험에 빠지거나 실족한 분은 없습니까? 삶의 무게로 인해 삶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의 대제사장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피곤함과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능히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결코 거절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시고,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가서, 그 발아래 모든 짐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져주시고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파도치는 바다 위에서 곤히 주무시던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역경 속에서 평안히 잘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동편에서 말씀을 전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서편을 향해 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행이 탄 배는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에서 큰 풍랑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예수님이 타신 배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면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풍랑과 바람으로부터 배를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피곤에 지쳐서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체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거센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제자들의 부르짖음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 13:25)."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 4:38)..."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눅 13:24 (상)..."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수많은 풍랑과 싸워 이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은 바람이 너무나 거셌기 때문에 그들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서 배를 위험에서 건져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들이 애를 쓰면 쓸수록 배는 풍랑과 파도는 더욱 거세졌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배를 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그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센 풍랑과 바람 앞에서 이 모든 것을 잊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보다 풍랑이 더 커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자신들이 탄 배가 뒤집어질 것같아서 다급하게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사람들은 평상시에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할 수록 문제는 점점 더 꼬이고 어려워집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처음에 제자들도 자신들의 힘으로 풍랑과 바람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노력을 다해본 후에, 결국 풍랑과 바람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급하게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이와 같이 역경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올 때에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때에 제자들처럼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외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어떤 역경도 우리를 해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풍랑을 잠잠케 하심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 8:26)..."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에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눅 8:24)."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급하게 깨우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에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이 탄 배가 위급하게 된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다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향해 명령한 즉시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전에 예수님은 "미쳐 날뛰던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의해 미쳐날뛰던 사람이 잠잠해졌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미쳐 날뛰는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께서 "자연을 주관하는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걸어서 건너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도 육지처럼 건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홍해와 요단강의 물을 마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미친 듯이 날뛰던 바람과 파도에게 잔잔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에 미친 듯이 날뛰던 파도는 순한 양처럼 잠잠해졌습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조주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계속된 사역으로 지친 몸을 쉬기 위해서 배에서 주무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신 성도들은 어떤 환경이 와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를 능히 지켜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성도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역경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거나 떠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역경을 당할 때에, 더욱 더 그들과 가까운 곳에 계시면서 그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떠한 역경이 와도 낙심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이 원수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헙니다. 교회사를 읽어보면 기독교 교회는 수없이 많은 역경과 고난의 풍랑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풍랑과 역경도 예수님의 교회를 넘어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주인이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결코 그리스도의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3) 제자들의 반응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 8:2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40),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막 4:40-41)."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막 8:24-25)..."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평상시에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경을 만나면 우리에게 얼마나 믿음이 없는 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역경 앞에서 믿음을 잃고 동요하고 흔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역경 중에 믿음을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역경을 만났을 때에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역경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다를 잔잔케 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면서(포베오마이) 겁에 질려 떨었습니다(데이로스). 창조주께서 풍랑을 잔잔케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권세 앞에서 크게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저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순종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들도 종종 이러한 반응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면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4)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는 창조주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믿게되면, 위기를 만나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성을 믿으면, 우리를 덮쳐오는 위협 앞에서 당당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지금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역경을 만나서 헤메는 사람은 없습니까? 만일 이러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즉시 하늘에서 그 환경을 향해서 잠잠하라고 명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흔들던 역경은 순식간에 잠잠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이러한 사실을 삶 속에서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기적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예수님은 자연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2. 이 세상 환경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교회를 해치지 못한다.
3. 믿음이 없으면 세상의 환경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된다.
거라사에서 광인을 만나신 예수님 (마 8:28-34)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풍랑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참된 사람인 동시에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바다 위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피곤할 때에는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체험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우리를 능히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시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홍해와 요단강을 마르게 하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걸어서 건널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자신이 탄 배를 흔들어대는 강한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사건은 예수님께서 거라사에서 광인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1. 거라사인에서 광인을 만나심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마 8:28(상))..."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막 5:1-2)."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눅 8:26-27(상))..."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배로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데에는 보통 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바다 건너편에 도착해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들어갔습니다. 학자들은 이곳이 현재 케르사(Kersa), 또는 코우르시(Koursi)로 불리는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케르사 근처에는 평평한 해안선은 있지만 무덤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남쪽으로 약 1.5km 더 내려가면, 해안선에서 약 40m쯤 떨어진 곳에 가파른 지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약 3km정도 더 내려가면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 동굴 무덤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바로 이 동굴이 광인이 머물던 곳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거라사 지역에 살던 주민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이방인들이 살던 지역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배에서 내렸을 때에, 예수님은 무덤에 사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누가는 그를 "그 도시(거라사) 사람으로 귀신에 들린 사람"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도시에 살다가 귀신에 들리게 되어 무덤에 살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 사람은 당시에 그 도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는 이때에 "귀신 들린 두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와 누가는 귀신 들린 사람이 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태는 귀신에 들린 사람이 두 사람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이 서로 차이가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견해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마가와 누가에 의해서 소개된 사람이 다른 한 사람들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어거스틴, 데오필랙트). 2)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심하게 귀신에 들렸고, 그가 몹시 사나운 사람이었다(크리소스톰, 유디미우스). 3)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마태는 유대인에게 초점을 맞추었고, 마가와 누가는 이방인에게 초점을 맞추었다(라이트 훗). 4) 두 사람이 모두 고침을 받았지만, 한 사람만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다(후에 그 사람이 이 사건을 전파했다). 그러므로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기록했다. 이와 같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마태가 마가와 누가와 다르게 기록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마태는 고침을 받은 두 사람 모두에게 관심을 가진 반면, 마가와 누가는 고침을 받고 복음 전도자가 된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2. 귀신 들린 사람의 상태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마 8:28(하))."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하는 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막 5:3-5)."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눅 8:27(하))."
마태는 귀신 들린 사람이 심히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누가는 그가 오래 동안 옷을 입지 않고 무덤 사이에 살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마태와 누가보다 광인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마가는 광인이 무덤에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무덤은 바위 속에 있는 동굴로, 가끔 정신 이상자들이 살곤 했습니다. 이 과인이 무덤에서 살았다는 것은, 그가 사회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마가는 광인이 힘이 너무 강해서 쇠사슬로도 그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미쳐 날뛰는 그를 통제하기 위해서 여러 번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그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깨뜨려버렸습니다. 셋째로 마가는 광인이 밤낮으로 무덤과 산을 배회하면서 괴성을 질러대고, 또 날카로운 돌로 자기 몸에 상처를 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트렌취가 쓴 책(the crescent and the cross)을 보면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여행자가 레바논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레바논 고지에서 내려가다가 공동묘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공동 묘지에 미친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은 채로 짐승의 뼈를 먼저 먹겠다고 들개들과 먹이를 놓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그 곳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행객을 보고 즉시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여행객이 탄 말의 고삐를 잡아 당겨서 그를 낭떠러지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트렌취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거라사 광인의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사단에게 사로 잡힌 사람의 비참한 상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성경에 나오는 귀신 들린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경우에 해당했습니다. 사단은 사람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그의 정신과 육신을 자기 뜻대로 움직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통해서 사단이 얼마나 인간을 유린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사람들을 좌와 방탕으로 내몹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채 짐승처럼 살아갑니다. 물론 이와 같이 극단적으로 사단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지금도 사람들을 자기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할 수만 있으면 택한 백성이라도 넘어뜨리기 위해서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사단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후에, 여러 가지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심으로 자신이 자연 세계의 주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온전케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자신이 영적인 세계를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거라사 광인으로부터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 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마 8:29)..."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막 5:6-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28),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눅 8:28-29)."
귀신에 들린 사람은 멀리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 앞에 와서 절을 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 같았으면 광인이 달려들어서 크게 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인을 사로 잡은 귀신은 예수님이 영적 세계의 주인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귀신은 예수님을 해치지 않고 그 앞에 와서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귀신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심판하실 분이라는 사살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은 아직 그 심판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귀신은 예수님께 와서 절을 하고 "아직 심판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자기들을 괴롭히느냐?"고 말하고,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하지 알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 광인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부르짖었을까요?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본 순간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광인을 보는 순간, 더러운 귀신들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귀신들을 보는 순간, 그들에게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사람 안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귀신들을 볼 때마다 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사와 사단, 그리고 악한 영들을 통제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중무장한 병사보다 더 강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능히 우리들을 사단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고 사단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을 죄와 사단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2.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니(막 5:9-1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않기를 간구하더니(눅8:30-31)..."
예수님은 그 귀신들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귀신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이는 우리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군대"(legion)로 번역된 말은 약 6000명으로 이루어진 로마 군대의 "연대"를 의미합니다. 그 사람 안에는 수많은 귀신들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이 광인이 그토록 사납고 괴력을 발휘한 것도, 그 안에 수많은 귀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많은 귀신들은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를 야생 짐승처럼 사납게 만들었습니다. 그 귀신들은 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 그를 통해서 거라사 지역을 광란과 공포의 장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악한 영들은 사람들의 인격을 파괴하고, 그를 통해서 그 지역 전체를 오염시켜 버립니다. 또한 그들은 연합해서 그 지역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먼저 그 지역에 있는 악한 영들과 영적 싸움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곳에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악한 영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에 가셨을 때에도 그 지역을 오염시킨 군대 귀신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는 순간 그들에게 추방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들은 그 지역에서 떠나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무저갱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저갱은 귀신들이 최후에 심판을 받고 들어갈 형벌의 장소입니다(계 20:1,3). 그들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세상에 남아서 활동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세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면서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유혹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성령님 안에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악한 영들이 쫓겨나고 성령님의 통치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악한 영들이 쫓겨나고, 그 지역이 성령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지역을 악한 영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그곳이 하나님 나라의 전초 기지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예수님은 악한 영과 사단을 다스리며 마지막에 그들을 심판하실 분이다.
2. 복음 전파는 강력한 영적인 싸움이 동반된다.
3. 효과적인 영적 전쟁을 위해 우리는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에 사로 잡힌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악한 영들이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귀신에게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들을 심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고 그 앞에 나와서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귀신들은 예수님께 아직 심판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을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온전케 해주신 일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돼지 떼에게 들어간 군대 귀신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30).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보내소서 한대(31),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마 8:30-32)..."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 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11-13)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신대(32),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눅 8:32-33)..."
귀신들이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 멀리 있는 산 곁에서 수많은 돼지 떼들이 먹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돼지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데가볼리"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방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방인들 중에는 시장에 고기를 팔기 위해서 돼지를 사육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산등성이나 들판에서 돼지를 방목해서 키웠습니다. 그러므로 데가볼리에서 산 곁에서 돼지 떼들이 먹이를 먹고 있는 장면은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데가볼리"는 10을 의미하는 "데카"와 도시를 의미하는 "폴리스"가 합쳐져서 된 말로, 10개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이름은 이곳에 10개의 헬라의 동맹 도시들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님은 그 요청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 나와서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들이 갑자기 비탈길로 내리달려서 모두 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는 일을 허락해서 수많은 돼지들을 죽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은 짐승들을 사랑하지 않으실까요? 성경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몇 가지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아직 귀신들을 멸망시킬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귀신들에게 잠정적인 활동을 허락하셨다. 2) 귀신들의 잔인성과, 그들의 목적이 파멸과 죽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 일을 허락하셨다. 3) 돼지들의 죽음을 통해서 거라사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귀신의 정체를 밝히고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허락하셨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이 돼지들에게 들어가는 일을 허락하신 이유는, 이러한 세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사람을 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에 귀신들에게 돼지 떼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을 통해서 귀신들이 얼마나 악하고 잔인한 존재 인지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돼지를 키우는 이방인들이 이러한 일을 보고 그들이 자신을 믿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사건은 거라사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요?
2. 두려워하는 마을 사람들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33),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마 8:33-34(상))..."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고쳐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막 5:14-15)."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34),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눅 8:34-35)..."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귀신들로 인해 돼지들이 비탈길로 달려내려가서 모두 다 죽게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놀라 마을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을과 그 주변에 있는 촌에 가서 자신들이 본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와서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와서 귀신에 들렸던 사람이 온전한 정신으로 옷을 입고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이 전에 쇠사슬로도 묶어놓을 수 없던 포악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그 사람은 벌거벗은 몸으로 괴성을 지르면서 동굴 무덤에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람은 옷을 단정히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나간 것만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더 큰 일은 그 사람이 새 사람이 되어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님 발 아래에 앉아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은 귀신이 쫓겨가는 일보다 더 큰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지배를 받던 사람들을 사단으로부터 해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러한 일은 창조적인 사건입니다. 그들은 전에 육신을 쫓아 살면서 육신의 열매를 맺었지만, 이제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사단의 통제에서 벗어났습니까? 우리는 지금 새 사람이 되어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발 아래 앉아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자녀처럼 단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러한 일은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도 온전한 정신으로 빛의 옷을 입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예수님은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들린 한 광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는 순간, 그 안에 있는 귀신들에게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들을 심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들은 아직 심판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을 무저갱에 보내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그 귀신들은 돼지들에게 들어가서 돼지들을 물에 빠져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지켜 본 사람들은 즉시 마을로 달려가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귀신에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장면을 보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예수님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마 8:34(하))."
"이에 귀신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고하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막 4:16-17)."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36),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눅 8:36-37(상))."
거라사의 마을 주민들은 귀신에 들렸던 사람이 온전해진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때에 그 일을 목격한 사람이 자신이 본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귀신을 좇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 그곳을 떠나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간청대로 배를 타고 그 마을을 떠나셨습니다. 거라사의 주민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님을 영접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경배해야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볼만한 안목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면 경제적인 손실을 입을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 그곳을 떠나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도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 자신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도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두렵고 부담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돼지 떼를 잃은 동료처럼 경제적인 손실을 입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 마을을 떠나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죄를 짓는 일에 익숙해져서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살 때가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귀신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럴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악한 영을 쫓아내시고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떠나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경우에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가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2. 친족에게 가서 네게 베푼 큰 일을 전하라!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막 5:18-19)...."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쌔(37(하)),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38),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눅 8:37(하)-39(상))...."
예수님은 거라사를 떠나서 건너편으로 가려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치유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가족, 친구, 그리고 친지와 함께 있는 것보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이 자신을 따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집으로 가서 자신이 그에게 행한 큰 일과 자비로운 일을 전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 사람이 자신을 따르는 것을 거절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를 거절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자신을 따르는 것보다, 가족과 친지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마을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서 거라사 지방을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대신해서 거라사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거할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만일 그 사람마저 예수님을 따라갔다면, 거라사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마을에 남겨두고, 그를 통해서 그 지역을 전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는 그곳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예수님을 증거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예수님께서 거라사 사람들을 위해 남겨 두신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우리가 있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자!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막 5:20)."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눅 8:39(하))."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데가볼리"(요단 동편에 있는 10개의 헬라 도시)를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크로 자비로운 일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고, 그를 통해서 데가볼리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 원해도 예수님을 따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는 불평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일을 맡겨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 있지 않아서 바로 그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구원받은 후에 신학교에 가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이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은 목회자나 선교사로 삼고, 어떤 사람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곳에 세워 주시든지,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크고 은혜로운 일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잘 감당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데가볼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한 증인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데거볼리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에 들렸던 사람을 통해서 그 지역에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기를 구하는 마을 사람들과 같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들과 같습니까?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귀신이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멸망시키려는 것이다.
2.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3. 하나님은 연약한 죄인을 들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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