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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두 길 - 마태복음 7장 13 - 28

by 은총가득 2020. 9. 18.

산상수훈의 내용 요약(마7:13-14)

 

우리는 그 동안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의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황금률로 그 내용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 후에 나오는 내용은 산상수훈의 실천을 촉구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제시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뒤에 추가된 내용을 생각해 보기 전에 한 번 더 산상수훈의 내용을 정리해 볼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계속해서 산상수훈의 실천을 촉구하기 위해서 추가된 네 가지 이야기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볼 것입니다.

 

1. 산상수훈의 내용 요약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나라는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고된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 동안 말세에 메시아께서 세우실 하나님 나라를 고대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나라는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하나님 나라와는 달랐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한 후에 이 땅에 세울 이스라엘 중심의 세계적인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획 하신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고 성령님을 통해 확장될 거룩한 신적인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8복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특성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님을 통해 각 사람의 마음에 세워질 영적인 나라입니다. 성령님은 천국 백성들의 마음가난하게 만들고, 에 대해 애통하게 하며, 그들을 온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천국 백성들이 의를 갈망하게 하고, 이웃을 긍휼히 여기게 하며,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님은 천국 백성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을 갖게 하고, 또 의를 위해 핍박을 받으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의를 소유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백성들은 육신의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힘으로 의를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는 자신을 의지하는 외식하는 율법학자들의 의를 능가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백성은 성령님을 통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주의해야 할 두 가지 함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백성들이 빠지기 쉬운 첫 번째 함정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외식과 형식주의입니다. 예수님은 3가지 실례(구제와 기도와 금식)를 들어서 천국 백성들 외식을 피하고 참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길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국 백성들이 빠지기 쉬운 두 번째 함정은 세속주의생활에 대한 염려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세속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이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고 생활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에게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지 못합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를 용서받은 사람인지 잊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이 남보다 탁월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지 못하고 남을 비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판받지 않으려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백성들은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이가 얻고, 찾는 이가 찾게 되며,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교훈을 말씀하신 후에 황금률(마 7:12)로 이야기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시고,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려면, 남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황금률은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산상 수훈의 실천을 강조하는 네 가지 이야기

예수님은 산상 설교를 들은 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 교훈을 잊어 버리고 실천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마치신 후에 이 교훈에 대한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서 네 가지 이야기(좁은 문, 거짓 선지자, 거짓 신자, 반석 위에 지은 집)를 추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천국 백성들이 이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방해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실천하도록 강조하셨습니다. 산상 설교는 실천할 때에만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듣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천국 백성들이 이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방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천국 백성들이 자원해서 이 교훈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옛날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때에 모세도 율법을 기록한 후에 그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강조했습니다. 모세는 (신 28장)에서 율법에 순종하는 자에게 내릴 축복과 거역하는 자에게 임할 저주를 상세하게 예고했습니다. 신 28장을 보면 축복보다 저주의 내용이 훨씬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말씀을 거역하게 만드는 강력한 죄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 백성의 앞에는항상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에 순종하고 영생의 삶을 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거역하고 사망의 살믈 사는 길입니다. 모세는 신명기를 기록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생명사망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사랑하고, 그 말씀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신 32:19-20)."

예수님도 모세처럼 산상설교를 마치신 후에 실천의 필요성을 크게 강조하셨습니다. 에수님은 이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야기를 추가하셨습니다.

1.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천국 백성 중에는 예수님의 교훈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이 사는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길로 가는 문은 크고 그 길도 넓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천국 백성들 중에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어려움을 참으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길은 문이 좁고 그 길이 협착해서 찾는 사람이 적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은 영생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3-14).

2.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거짓 선지자들을 동원해서 천국 백성들이 넓은 길로 가도록 미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들은 그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오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이 여러 가지 이적을 통해서 천국 백성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입으로만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마 7:21).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고 그 미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3. 참된 신앙의 표시는 말씀 순종의 열매이다.
예수님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 열매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7:15-20). 예수님은 말로는 예수님을 불러도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 신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들은 이적이나 입술로 하는 신앙 고백이 아니라 행위의 열매로 거짓 교사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열매로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고 그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4. 말씀을 실천하는 자와 거역하는 자의 대조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듣고 지키는 자그 기초반석 위에 놓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처럼 어떤 인생의 역경도 능히 극복하고 든든히 서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듣고 지키지 않는 자그 집모래 위에 세운 어리석은 자와 같다고 경고하셨습니다(7:24-27).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듣고 지키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인생의 역경이 찾아오면 크게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위와 같은 네 가지 교훈을 통해서 산상수훈의 실천의 필요성을 크게 강조하셨습니다. 다음 시간부터 우리는 이 네 가지 가르침의 내용에 대해서 차례로 생각해 보게될 것입니다.

1.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2. 산상수훈을 듣고 그것을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보자.

3. (마 7:13-27)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실천을 촉구하는 네 가지 교훈은 무엇인가? 그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보자

 

좁은 문과 넓은 문 (마 7:13,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은 복음을 믿고 예수님의 교훈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문은 우리를 구원과 영생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은 좁고 힘들어서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도 넓어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넓은 문은 예수님의 교훈대로 살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세상의 풍습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거부하고 쾌락과 정욕을 좆아 사는 사람은 사망을 열매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좁은 문과 넓은 문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마 7:13)..."

 

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좁은 문"은 무엇일까요 ? 얼핏 보면 좁은 문은 마치 금욕주의나 고행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좁은 문은 금욕이나 고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좁은 문은 무슨 의미로 사용되었을까요? 우리는 (눅 13:22-30)을 통해서 좁은 문의 의미를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눅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면서 각 성과 촌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얻는 자적습니까?(눅 13:23)" 그때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기를 구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눅 13:24)." 여기에서 "좁은 문"은 구원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나오는 좁은 문은 구원에 대한 질문의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 즉 구원의 길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좁은 문, 즉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히면 후에는 열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눅 13:25).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즉 구원의 기회가 한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은 마치 노아 때에 노아가 지은 방주의 문과 같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사람들에게 홍수가 있을 것이며, 따라서 방주를 짓고 그 안으로 피해야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120년 후에 노아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스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식구를 방주에 태우신 후에, 친히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예고한대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수많은 폭우로 온 세상에 덮일 때가 되서야 사람들은 노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방주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직접 방주의 문을 닫으신 후에는 아무도 그 문을 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후회를 해도 더 이상 방주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좁은 문, 즉 구원의 문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원의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거부하고, 그 말대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2. 왜 좁은 문, 좁은 길인가?

그러면 왜 예수님은 복음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좁은 문"이라고 부르셨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 문은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해서 찾는 사람들이 적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구원받는 일은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에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이 길은 매우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의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 자기의 고향과 친척과 가족과 이별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집을 떠난 뒤에 안정된 정착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수많은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는 흉년의 어려움을 겪었고, 아내와 생이별하는 위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평생 나그네처럼 떠돌며 살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이 묻힐 무덤 외에는 얻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이러한 고난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어렵지만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디를 가든지 그와 동행해 주셨습니다. 이 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온 세상에 축복을 주는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약속대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3.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예수님은 우리 앞에 두 개의 문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앞에서 생각한 좁은 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넓은 문입니다. 넓은 문은 문도 넓고 그 안에 있는 길도 평탄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좁은 문은 문도 좁고 그 안에 있는 길도 협착해서 적은 사람만이 발견합니다. 그러나 넓은 문은 멸망으로 가는 문인 반면에, 좁은 문은 생명으로 가는 문입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은 넓고 그 길도 평탄해서 많은 사람들은 들어갈 것입니다. 이 문은 예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기 이익과 세상의 풍습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지 말고 의식주를 위해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사단은 이렇게 하면 명예와 부와 쾌락을 누리며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이를 위해서 말씀을 버리고 적당히 죄와 타협하면서 즐겁게 살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이 길이 성공으로 이끄는 가장 지혜로운 길이라고 말합니다. 이 길은 세상의 풍습을 따르는 길이고, 또 개인의 죄성과 잘 어울리는 길입니다. 이 길은 오해나 박해를 받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 문은 넓고 길이 평탄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가면 결국에는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자신이 길을 잘못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돌이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돌아갈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넓은 문으로 가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너희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그 일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 사망이기 때문이다(롬 6:21)." 이 길은 보기에 넓고 평탄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들이 다 가는 일이라고 따라 가지 말고 좁더라도 생명의 길로 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넓고 평탄한 문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성령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인 잠을 자다가 넓고 평탄한 문으로 들어가서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고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좁은 문은 복음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길은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좁은 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결단과 실천을 요구합니다. 복음은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대로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관과 풍습을 따라 손쉽게 사는 길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사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좋은 문으로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으니라(마 7:14)."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도 좁아서 찾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좁아서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실천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생명의 길을 가지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 길은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길입니다. 천국 백성들은 세상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늘의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많은 오해를 받고, 또 고독하고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 길은 세상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소수의 사람만이 이 길을 발견합니다. (히 11장)을 보면 우리보다 앞서서 믿음의 길을 걸어간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살면서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받는 오해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삶을 산 수많은 증인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도 그 길을 걸어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히 12:1). 우리는 순례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 문은 좁고 그 길도 좁아서 찾는 사람은 적지만,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될 것입니다(벧전 1:4).

 

2.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가야 함

좁은문은 문이 좁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으로 들어가려면 무거운 짐을 모두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 문은 세상의 짐을 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문으로 들어가려면 다음과 같은 짐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로이드 죤스).

1) 세속적인 것들(물질, 인기, 명예, 권세 등)
좁은문은 큰 짐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문은 좁기 때문에 자기 몸만 겨우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문은 물질, 명예, 정욕을 모두 내려놓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는 오해를 각오해야 하고, 인기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하며, 또 쾌락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 길은 사랑하고 희생하고 섬기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가려면 물질, 명예, 정욕, 쾌락, 그리고 교만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은 남에게 사랑과 주목을 받고, 많이 소유하며, 또 남을 지배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세상의 가치관과 일치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하고, 나누어주며, 또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은 자신의 뜻과 비젼을 모두 내려놓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2) 세속적인 가치관
이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명령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명령은 대립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기차관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밑에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3) 가족의 정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족의 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때로는 가족간의 사랑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방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은 가족에 대한 인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모나 처자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족을 예수님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하면, 가족 때문에 예수님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교훈대로 살기 위해서는 가족과 친지의 외면도 각오해야 합니다.

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한다.
이 문은 자신도 내려놓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포기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뜻과 이익을 포기행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뜻을 내려놓아야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자신을 부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처럼 될 때까지 치열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과 뜻, 그리고 생명도 포기할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이 길은 찾는 사람이 적다.

이 문은 좁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 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기 원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좁은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오해와 고난이 따르지만,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의를 위해 고난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10)."

우리는 넓은 문과 좁은 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두 문 사이에 서서 적당히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에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든지, 아니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든지 해야 합니다. 복음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넓은 문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좁은문으로 들어 가지 않는 사람은 넓은 문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두 대의 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각오하고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넓은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까 ? 좁은문입니까 ? 아니면 넓은문입니까?

 

4. 이 길은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길이다.

예수님은 먼저 좁은문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만 이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앞어서 이 문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자신의 뒤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고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명예를 구하지 않으셨고 죄와 타협하고 쉽게 살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후에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한 결과로 수많은 영혼을 열매로 거두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나 이 길은 내 힘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능은 십자가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힘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서 찾는 이가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서 찾는 이가 적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믿음 실천을 요구합니다. 복음을 믿고 복음의 원칙을 따라 살아가는 일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이 길은 세상의 길과 달라서 많은 오해와 장애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과 풍습을 따라 사는 길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쉽습니다. 이 길은 장애물이 작고 또 쉽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산상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두 가지 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실천하든지, 아니면 말씀을 듣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좁은 문과 넓은 문 사이에 중간 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보다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인류를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천국 백성들도 예수님을 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 가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으니라(마 7:14)."

 

1. 첫째 질문: 우리는 태어날 때에 선과 악의 중간 지대에 서 있는가?

이 교훈을 보면 이 교훈에 나오는 사람들은 좁은 문과 넓은 문 사이에 서서 어느 문으로 들어갈 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을 보면 사람들은 마치 선과 악의 중간에 서있는 중간적인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사람은 윤리적으로 중간 존재로 태어날까요? 사람이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입장은 성선설이라고 하고,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는 입장을 성악설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선하게 지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사람들이 강력한 죄의 영향력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처음에 넓은 문에 가까이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람들은 처음에 악한 길로 치우쳐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대부분이 좁은 문보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넓은 문을 떠나서 좁은 문으로 들어 가기를 힘쓰라고 강하고 요청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태어난 죄의 본성에 자신을 맡기지 말고, 성령님을 좇아 영생의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령님 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천국 백성들에게 죄의 본성에서 벗어나서 성령님을 따라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2. 둘째 질문: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가?

또한 이 교훈을 보면 구원이 인간의 선택(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먼저 성경은 사람들이 자기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의밈은 없으며 모두 다 악에 치우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셔야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의가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성령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애통하게 하며, 온유하고 의를 갈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이 축복된 사람들이며,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보면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선택으로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자기 백성을 선택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사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3. 셋째 질문: 넘어지는 기독교인은 넓은 길에 서 있는가?

우리가 이 교훈을 들을 때에 다음과 같은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넓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인가?"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교회에 다니면서도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며, 오른뺨을 맞고 왼뺨을 돌려대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들이 모두 다 넓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일까요?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8복에 나오는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연약하고 자주 넘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가다가 넘어져도, 그들이 세상으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죄를 자백하고 다시 일어나서 걸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넘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오면 언제든지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요일 1:9).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유혹에 넘어져서 예수님과의 교제를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과 성령, 그리고 환경을 통해서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상수훈의 교훈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을 모두 다 넓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습관적으로 죄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잠시 넘어졌다가도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4. 넷째 질문: 소수의 사람만 구원을 받는가?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구원받는 사람이 매우 적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눅 13:23)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구원을 얻는 자가 적습니까?" 이 때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그 날에는 이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사람들 중에 분명히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까요?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서 아무 대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단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아니라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인 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는 사람을 선택하고 그 수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지에 대해서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1.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선과 악의 중간 지대에 서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성경은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2. 성경은 구원이 인간의 행위와 결정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는가? 시험에 들거나 넘어지는 사람은 모두 다 넓은 문에 들어간 사람들인가?

3. 우리는 구원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거짓 선지자(마7:16.17)

 

 

복음결단실천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산상설교를 하신 후에 그 말씀에 대한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멸망으로 가는 길은 문이 넓고 길이 평탄해서 많은 사람이 그리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풍습을 따르는 길은 오해와 충돌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갑니다. 그러나 그 길은 멸망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복음의 가치관을 따라 사는 길은 좁고 힘들어서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이 문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또 다른 이야기를 통해서 말씀의 실천에 대해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좁은 문넓은 문 대신, 참 선지자거짓 선지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 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6)."

 

1.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16(상))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참된 선지자를를 따라야 합니다.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합니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지 않고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을 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과 이익을 좇아 행합니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자기 욕심을 좇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들은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잘 구별하고, 참된 교사를 따르고 거짓 교사를 피해야 합니다. 좁은 의미에서 선지자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활동했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의 말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으며, 선지자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거역하는 데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구약 시대에 선지자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로이드 죤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다 직접, 간접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거나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말은 "거짓 교사를 조심하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는 사람들을 넓은 문으로 가도록 선동합니다. 그러므로 거짓 교사를 피하지 않으면 멸망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거짓 교사를 분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16(중))...

그러면 거짓 선지자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 오지만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양의 옷"은 당시에 목자가 입었던 옷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옷을 입은 거짓 선지자는 목자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겉으로는 목자와 똑같이 보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참된 교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위장하기 때문에 올바른 분별력이 없으면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를 말하고,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며, 또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을 도둑질하는 이리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 재어낸 말을 하며, 자기 욕심을 위해서 성도들을 이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을 구별하여 그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는 성경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는 지금도 존재하고 잇으며, 또한 교회가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민간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벧후 2:1)." 사도 베드로는 과거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고, 당시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었으며, 또한 미래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러한 예언대로 거짓 선생들은 현재와 미래에도 계속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구약성경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의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우리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말을 전함"

첫째로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꾸며낸 말이나 인간의 생각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그들의 말은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묵시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렘 23:16)." 거짓 교사들은 지금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사상이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기 뜻에 맞게 억지로 뜯어 맞춥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예언하느니라(렘 23:25)."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이 교묘하게 꾸며 만든 간교한 교훈을 가르친다고 말했습니다(렘 23:27). 그러나 거짓 교사들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용과 능력에 있어서 거짓 예언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참된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좁은 문, 즉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지어낸 말로 사람들을 넓은 문, 즉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참된 교사들은 알곡을 만들어 내고, 거짓 교사들은 쭉정이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불과 바위를 쳐서 부서뜨리는 방망이처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이 전하는 말은 솜방망이처럼 힘없고 무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통해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참된 교사와 거짓 교사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좁은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넓은문으로 들어가라고 유혹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그들에게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실제로는 양을 해치는 이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흉내를 내지만 인간의 교훈과 거짓말로 성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고 피하기 위해서 거룩한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의 특징과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짓 평화를 외침"

우리는 지금 구약성경에 나오는 거짓선지자의 특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처럼 위장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거짓 선지자의 특징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둘째로 구액의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피상적으로)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8:11)."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롭게 되려면 하나님과 화목해져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화목해지려면 회개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지자는 회개와 순종을 촉구합니다. 이 일은 때로 고통스러운 과정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들은 이러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돌팔이 의사처럼 적당히 상처를 싸맨 후에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돈만 많이 주면 "평안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는 사람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는 참된 선지자의 말보다, 적당히 죄를 덮고 축복하는 거짓 선지자의 말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참된 선지자보다 거짓 선지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 백성이 이(거짓 선지자의 교훈)를 좋게 여긴다"고 책망하셨습니다(렘 5:31).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을 넓은문으로 인도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거스리는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를 적당히 덮어 버리고 사랑과 축복을 외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고난이나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듣는 자는 결국 멸망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불완전한 가르침"

셋째로 구약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불완전합니다. 그들은 성경 전체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 강조해서 가르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심판이나 지옥이 필요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공의의 실천을 요구하지 않고 적당히 평화롭게 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인간이 가진 죄의 심각성을 간과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자기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는 죄의 정체와 심각성을 분명히 지적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어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는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고행과 덕을 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율법주의자와 외식주의자들이 됩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3.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16(하)).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이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사실은 양을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이리는 양을 잡아먹는 대표적인 짐승입니다. 물론 사자나 곰도 양을 해치지만, 이리 만큼 양을 해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양의 옷을 입고 접근하는 이리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이 성도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양을 도둑질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고, 성도들을 이용해서 돈이나 명예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거짓말로 사람들을 미혹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또한 그들은 성도들에게 자신을 섬기고 따르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에 미혹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실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영혼을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만듭니다.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모습으로 그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판단할 것은 그들이 성도들을 하나님께 다가가게 하는지, 아니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지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들을 하나님께 다가서게 만드는 사람은 참된 선지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인간을 따르게 하면 그들은 거짓 선지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17).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본문에서 성도들이 거짓 선지자를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침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는 "그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17,20)."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오기 때문에 겉모습으로는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하는 일들을 살펴보면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겉모습은 위장할 수 있지만 행위까지 위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보다 행위와 열매를 통해서 서짓 선니자들을 구별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예수님의 교훈을 가르치지 않고, 또 그 교훈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은 잘하지만 삶은 말씀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들은 좁은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넓은문으로 들어갑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넓은문으로 들어가도록 미혹하고 유혹합니다.

초대교회 교육지침서 중에 "디다케"라는 문서가 있습니다. 이 책은 당시 교회교육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이 책에는 당시의 상황에서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기록될 당시에 보따리를 싸서 이곳 저곳을 순회하는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던 사람들은 이러한 전도인들로 위장하고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돈을 요구하고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디다케는 성도들이 참된 전도인과 거짓 전도인을 구별하는 지침을 제시했습니다. 이 책은 "사흘 이상 한 교회에 머물려고 하는 자, 음식 외에 돈이나 다른 것을 요구하는 자, 방언으로만 말하려고 하는 자, 자기가 말하고 행하지 않는 자, 그리고 어려운 자를 돕지 않는 자를 거짓 선지자로 여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는 겉모습은 위장할 수 있지만 행위를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찾아 다니면서 재물을 요구하고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행동들을 보고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겉모습이나 말이 아니라, "그들의 열매를 보고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예수님의 교훈을 실천하면서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 속에는 위선과 거짓의 열매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모습이나 말보다, 삶을 통해서 참된 교사와 거짓 교사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필요한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민감하게 따르면 다른 영의 인도를 받는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고 그들을 피할 수 있습니다.

1. 왜 거짓 선지자를 영적 돌팔이 의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의 가르침이 일부분만 강조하거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예수님은 거짓선지자의 정체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노략질하는 이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3. 겉으로 비슷해 보이는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해보자.

 

나무와 열매 (마 7:18-2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사실은 영혼을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오기 때문에 겉모습으로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행위의 열매를 보고 아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말을 전합니다. 그들은 천국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자신을 따르게 만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신의 뜻과 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없고 육신의 열매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외모는 위장할 수 있지만, 행위와 열매는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행위와 열매를 잘 살펴보고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고, 그들에게 미혹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의 행위와 열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나무와 열매는 일치한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18-19)."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는 그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가시나무에 포도가 열리지 않고, 엉겅퀴에 무화과 열매가 열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각 나무는 각자 고유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나무는 이 법칙을 넘어서서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18-19)." 이러한 나무와 열매의 법칙은 영적인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거짓 선지자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성령을 좇는 참된 선지자가 악한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악한 영과 육신을 좇는 사람은 악한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성령과 말씀을 좇는 사람은 성령의 일과 선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행위와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니면 거짓 선생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거나 깨닫지도 못하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전하지도 못하고 또 성령님을 따르지도 못합니다. 그는 오직 인간의 생각과 사상을 전하고, 악한 영과 부패한 마음을 따라 말하며, 또 정욕을 따라 악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잠시 동안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숨겨진 부패성을 근본적으로 숨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결과들을 통해서 거짓 선지자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이중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습니다.

"그들은 월요일에는 아담과 하와처럼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하고,
화요일에는 가인처럼 사람을 미워하고 살인하며,
수요일에는 노아 시대 사람들처럼 술 먹고 방탕하고,
목요일에는 다윗처럼 부하의 아내와 간통하고,
금요일에는 가룟 유다 처럼 예수님을 배반하고,
토요일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성령님을 속이고,
주일에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회개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위장에 능하기 때문에 정체를 알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보면, 시간을 두고 자세히 그들을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반드시 육신의 열매들, 즉 음행, 탐욕, 불법, 시기, 다툼 등과 같은 육신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심이 가는 사람들의 행위와 그 열매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육신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

그러면 거짓 선지자가 맺는 가시와 엉겅퀴, 즉 육신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가시나무는 교만하고 자만에 빠진 사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가시나무는 남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고 상처만 입힙니다(삿 9:14-15). 가시나무는 왕성하고 남의 눈에 잘 띄지만, 사람이 먹는 열매는 맺지 못하고 가시로 찌르고 상처만 입힙니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아담의 타락 후에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무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을 따를 때에 나타나는 육신의 열매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육신의 열매는 무엇을 말할까요? 사도 바울은 육신의 열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더러운 것호색우상 숭배술수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시기분냄당짓는 것분리함이단투기술취함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그러면 참된 선지자가 맺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즉 성령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겸손하나님경외하고 이웃유익하게 하는 사을 의미합니다. 참된 선지자는 성령님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성령님의 열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온유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모두 기쁘게 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산상수훈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그들의 삶 속에는 8복에 기록된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열매들을 통해서 참된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3. 거짓 선지자의 최후(20)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20)."

예수님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을 미혹하고 육신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다가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좇다가 그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믿기 전에 "허물과 죄로 죽었으며, 세상 풍습을 따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엡 2:1).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가시나무였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어둠의 영과 세상의 풍습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다가 영원한 심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때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좋은 나무였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좋은 열매를 맺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끝내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좋은 나무에서 꺾어 버리셨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접붙여 주셨습니다(롬 11:13). 이로 인해 이방인들이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되려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육신의 열매를 맺는 악한 나무입니까? 아니면 믿음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입니까?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조심하라고 말씀하시고, 거짓 선지자 그 열매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오기 때문에 말과 외모로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이 외모와 말은 위장할 수 있지만 본성은 위장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육신을 좇아 행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성령의 열매 대신에 육신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시나무가 포도나 무화과 열매를 맺는 수 없으며 가시 나무에는 가시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거짓 선지자도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육신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와 열매로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1.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21(상))..."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경고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주"라고 부르는 자들 중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실제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만으로는 그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일에는 믿는 사람인 것 같은 데 사회로 나가면 전혀 불신자와 차이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도 없고, 또 그들의 삶 속에 성령님께서 동행하는 열매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양 떼 중에 염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그들은 성도들 틈에 있지만 예수님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2. 단순한 지적 신앙만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

그러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전통적인 신앙 고백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거룩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을 "주님(아도나이)"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권고했습니다. 신약의 성도들 역시 예수님을 "주님"(큐리오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며, 우리는 그 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롬 1:1, 고전 1:2 등). 이와 같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은 전통적인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백을 해야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11)."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자신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들은 입과 지식으로만 신앙을 고백하고 실제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믿고 떠느니라(약 2:19)."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는 성도들에게 "잘한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과 지식으로만 하는 신앙에 만족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지식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귀신들은 예수님에 대해 정확한 고백을 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 4:48, 8:28).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면서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점령하여 넘어뜨리고 멸망으로 끌고 갑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 중에는 말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 뜻에 거역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다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3. 단순한 감정적 신앙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한 가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거짓 신자들이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따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적당히 신앙 생활을 한 사람이 아니라 열심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미지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열정적인 사람들 중에도 거짓 신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 중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주장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을 섬긴 것에 불과합니다.

성령님에 의해 주어진 열심과 육신적인 동기로 하는 열심은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님에 의해 주어진 열심은 겸손과 온유함 속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자기 유익이나 영광을 위한 열심은 자만과 시기와 다툼과 같은 육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육신의 열심을 내는 사람은 예수님을 잘 따라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돌아섭니다. 가룟 유다가 이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육신적인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소망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 4:10-11)." 데마는 처음에 열정적으로 사도 바울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심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육신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후에 자신이 믿었던 바울이 투옥되고 희망이 없어 보이게 되자, 바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열심도 성령에 의한 것과 육신에 의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에 의한 열심은 빛과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지만, 육신의 열심은 육신의 열매를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열심은 성령에 의한 열심입니까? 아니면 육신에 의한 열심입니까?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입으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 예수님을 주로 믿지도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동의하지만 믿음과 순종의 열매가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추종한다고 해서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중에 육신적인 동기로 열심을 내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또 다른 거짓 신앙에 대해서 말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적과 기사를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적과 기사도 참된 신앙의 표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1. 말씀을 전했다고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22(상)).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22(상))..."

우리는 앞에서 입으로 하는 신앙고백과 열정적인 신앙생활이 참된 신앙의 표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없는 신앙 고백육신적인 동기열심을 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22절에서 말씀 사역 기적을 행하는 일도 구원의 표지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선지자 노릇을 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예수님은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에 나온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는 말과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했다'는 말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주어진 영적인 은사들 중에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그리고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에는 성도들 중에 예언의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 중에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발람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 선지자로 책망과 징계를 받았습니다(벧후 2:15,24, 유 11절, 민 22:24 참조). 그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 나라의 밖에 있는 외인이었습니다. 사울 왕에게도 가끔 하나님의 영이 임했으며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삼상 10:10). 그러나 후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끝내 거역하다가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위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볻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염려함이라(고전 9:27)." 바울은 복음을 전한 후에 자신이 거짓 사역자가 되어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철저히 제어했습니다. 또 바울은 (고전 13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3)..." 바울은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서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바울은 (빌 1:15)에서 일부 사람들이 "시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시기해서 바울을 이겨보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복음 전하는 일을 다툼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도 잘못된 동기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2. 이적을 행했다고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22(하)).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하))"

또 예수님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항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능력들도 많이 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에 그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한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느 정도 사역에 익숙해 지게 되자, 그들을 자신이 가려고 하는 동네로 먼저 보내서 천국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후에 각 동네로 파송되엇던 제자들은 돌아와서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이러한 일은 당시에 예수님의 제자로 있던 가룟 유다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상황이 어렵게 되자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을 보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 중에도 거짓 신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예고하셨습니다.

또 여러 가지 능력과 기적을 행한 사람들 중에도 거짓 신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애굽 술사들이 모세와 비슷한 이적을 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방해하기 위해서 모세와 비슷한 이적을 행했습니다(출 7:11-22). 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적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미혹하게 하리라(마 24-25장 참조)." 바울도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표적거짓 기적불의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리(살후 2:8)..." 이와 같이 성경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도 여러 가지 능력과 이적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탄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성도들을 유혹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고후 11:14). 사탄은 이러한 일을 위해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을 이용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여러 가지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여러 가지 능력과 기적을 행해도, 그들에게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을 조심해서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볼 때에 성령님께 영적인 분별의 은사룰 구하고, 또 성숙한 지도자들에게 분별을 의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능력과 기적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접근하는 거짓의 영에게 미혹 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여러 가지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일도 참된 신앙의 표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능력을 행하면서 그의 삶 속에 성령님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모두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한 믿음 없이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열정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육신적인 동기에서 열정적으로 주님을 따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뿐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으며, 능력을 행한 사람들 중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는 사단도 얼마든지 비슷한 사역과 능력으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던 사람일까요? 오늘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것이니라(마 7:21)."

 

1.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외칠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러나 예수님은 그 날에 그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심을 내쫓으며, 또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한 사람들 중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발람 선지자는 성령님의 인도 하에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이 탐욕을 좇은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가룟 유다도 전도 사역 중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상황이 어렵게 되자 예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단들 중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귀신을내 쫓으며, 또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단들이 보통 목회자들보다 더 많은 능력을 행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 대신 인간의 사상과 뜻을 전하고, 성령님의 통치가 아닐 육신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삶 속에서 육신의 열매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말렉 왕과 가축을 살려두었습니다 (삼상 15:1-15).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 뜻대로 행한 결과, 불법을 행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에게 모압 왕이 보낸 신하들을 따라 가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주는 재물이 탐이 나서 발락 왕이 보낸 신하들을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후에 은밀하게 발락 왕에게 이스라엘을 넘어뜨릴 계략을 가르쳐 주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말씀을 전하고 능력을 행하는 이단들은 자기 생각과 뜻을가 전하고, 또 성령님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역이나 업적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근거를 믿음보다 사역이나 기사와 표적에 두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기 사역과 능력을 더 자랑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예수님은 그들을 행해서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때에 그들을 향해서 "내게서 떠나가라!"고 외치실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말씀 사역과 능력과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관계 없이 다른 영을 따라 사역을 하고 능력을 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아닌 육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행위와 열매로 그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하는대로 심판 날에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이 행한 사역과 능력을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도무지 너희를 모르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 내게서 떠나가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전하면서 삶 속에서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일은 거부합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차 있으며, 그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면서 주의 깊게 살펴보면, 거짓 교사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2. 천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하))."

우리는 앞에서 입으로만 고백하는 신앙 고백과, 육신적인 열심, 그리고 사역이나 능력도 천국을 가는 참된 표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앙고백과 열심, 그리고 사역과 능력을 행하는 일은 천국 백성들에게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표지가 될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참된 신앙의 표지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거짓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육신적인 동기로 예수님을 열심히 좇으며, 또한 예수님과 상관 없이 사역을 하고 놀라운 능력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은 거짓으로 위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일은 성령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뜨대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참된 믿음의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또 외적인 환난이나 세상의 염려 앞에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어떤 박해와 시험이라도 능히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은 성령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분명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있을 때에 유대 기독교인들 중에 신앙을 고백하고 복음의 원리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야고보는 그들에게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야고보의 가르침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성령이 열매가 삶 속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믿고 천국 백성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그들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강력한 죄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죄의 세력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수불가결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만이 죄의 세력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거하면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증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내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분명히 믿음과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참된 신앙은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11)." 올바른 신앙은 입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믿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하는 신앙 고백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도덕률 폐기론자"들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에 구원받은 후에는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영지주의자들이 이러한 그릇된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치 않는 것입니다(요일 1:6)"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깨달음과 신비한 지식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지식만 강조하고 새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부패하고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죄와 불법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들을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했습니다(요일 3:23).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참된 신자인지 구별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그가 정말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있는가 ?", "그는 정말로 성령님의 통치를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 ?" 또한 우리는 이 기준을 자신에게도 던져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있는가 ?", "나는 정말로 성령님의 통치를 받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 "나에게는 산상수훈의 교훈을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향해서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고, 진지하게 자신의 신앙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질문들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글쎄요!", 또는 "아니요!"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 진실한 것인지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많은 사역을 하고 또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하고도 예수님께 외면을 당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22).

1. 왜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능력을 행한 사람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셨는가?

2. 왜 참된 신앙의 표지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인지 말해보자.

3. 이 말은 구원이 행위로 결정된다는 말인가? 왜 도덕률 폐기론자의 주장이 그릇된 것인가?

4. 우리에게 참된 신앙의 표지가 있는 지 진지하게 반성해보자.

 

 

반석인가? 모래인가? (마 7:24-27)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후에 4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산상수훈실천할 것촉구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7:13-14). 세상의 가치관과 습관을 따라 사는 길은 크고 넓어서 그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길은 사망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교훈을 따라 사는 길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지만, 그 길은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7:15-20). 거짓 선지자는 인간의 사상과 뜻을 전하고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며, 또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입니다. 거짓 교사를 구별하는 방법은 그 행위와 열매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선지자 사역을 하고 또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7:21-23). 우리는 이미 세 가지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산상수훈의 실천을 촉구하는 네 번째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1.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24절 부터 나오는 말이 앞에 나온 말과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천국 백성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고, 거짓 선지자를 조심해야 하며, 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이야기를 하신 후에, 마지막 교훈을 통해서 결론을 맺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지만,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은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말씀은 앞에 나온 세 가지 교훈의 반복인 동시에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누구든지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본문에서 두 번째로 나오는 말은 "누구든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산상설교를 들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대통령이나, 재벌, 지혜자, 그 외에 어떤 사람도 이 교훈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들은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고 촉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산상설교를 들은 사람들을 둘로 구분하고 계십니다. 첫째 부류는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고, 둘째 부류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두 가지 부류에서 제외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하실 때에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감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천국 백성들이 이 말씀을 듣고 삶 속에서 실천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듣고 실천하면 유익을 주지만, 듣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참된 선지자", "참된 신자", 그리고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양의 옷을 입은 거짓 선지자", "사역과 기적으로 자신을 기만하는 거짓 신자", 그리고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

3.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자와 같으리니...

예수님은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산과 사막으로 된 나라입니다. 사막에서 좋은 집을 짓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군데군데 있는 바위를 깎아 내고 기초를 잘 닦은 후에, 그 위에 견고한 집을 짓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재정이 필요합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에는 좋은 건축 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바위를 뚫고 깎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아무 곳에나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 노력, 그리고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비와 바람과 홍수에 견딜 수 있는 집을 짓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서 땅을 깊이 파고 튼튼한 기초를 찾아서 그 위에 집을 짓습니다(눅 6:48(상)). 팔레스타인에서는 비가 오는 시기(우기)에 갑자기 많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 때가 있습니다. 이 때에는 갑자기 내린 비로 인해서 강이 만들어지고, 그 물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건축자는 이러한 비와 홍수와 바람에 집이 넘어지거나 쓸려가지 않도록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짓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인생을 "건축", 즉 집을 짓는 일로 비유하셨습니다. 인생은 집을 짓는 일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소원과 꿈을 갖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면서 살아갑니다. 인류와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나라와 민족을 품을 수 있는 큰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작은 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집을 짓든지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튼튼한 기초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집을 지어도 비와 홍수와 바람 앞에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주저앉는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기초를 견고하게 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큰 건물도 한 순간에 주저앉을 수가 있습니다. 특히 크고 높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더욱 더 견고한 기초가 필요합니다. 높은 빌딩일 수록 기초가 약하면 크게 붕괴되어 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에도 고층 빌딩이 많이 건축되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대치동에도 75층이나 되는 타워 펠러스가 있습니다. 이 건물들은 건문 안에 상가와 주거지가 복합적으로 설계된 건물입니다. 또 월드컵 경기장이 있는 상암동에 100층이 넘는 건물이 세워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이러한 높은 빌딩들은 아무 곳에나 세울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고층 빌딩들은 그 무거운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지반이 있어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반에 견고한 기초를 놓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건축가는 이러한 수고와 비용을 기꺼이 지불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견고한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는 튼튼한 기초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짓는 안전하고 견고한 기초는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어떤 인생의 시련과 역경도 능히 견딜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모든 인생의 장애물들을 넘어서서 영생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거부하거나 다른 것에 인생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시련과 역경의 홍수와 바람이 불어올 때에 크게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상수훈의 교훈을 듣고 잊어 버리지 않고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도우심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반석 위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그 집을 바위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만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완전한 인생의 집을 짓는 설계도와 같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완전한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구하고, 찾고, 또 두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완전한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 7:25)..."

1. 참 신앙은 역경을 통해 증명된다.

왜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인생의 역경을 극복하고 영원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안내서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넘어지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인생의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또 태풍이 불어와도 넘어지지 않고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겨울은 비가 많이 오는 우기입니다. 그리고 1년 중에 대부분의 비가 이 때에 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우기에 갑자기 많은 비가 쏟아지면 "와디"라고 부르는 작은 강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와디"는 모든 것들을 쓸어가 버렸습니다. 또한 이 때에는 보통 강한 바람이 불어 와서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초를 깊이 파고 바위 위에 세운 집은 이러한 비와 강과 바람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역경의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또 태풍이 불 때가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역경의 비와 홍수와 바람을 이용합니다. 사단은 욥에게 한 것처럼 경건한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사단에게 욥의 경건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의 신앙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에, 욥이 가진 모든 것, 즉 재산, 자녀, 아내, 건강, 그리고 명예를 빼앗았습니다. 이로 인해 욥은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채 고독과 고통 속에서 울부짖었습니다. 인생에는 종종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극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때로 우리는 큰 병에 걸리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며, 사업이 부도나고, 또 직장이나 사회로부터 외면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비행기가 추락하고, 열차가 전복되며, 또 친한 가족이나 애인과 사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역경이 찾아올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역경이 찾아왔는 지 모릅니다. 때로 성도들은 세속적인 가치관이나 풍습, 그리고 세속적인 생활방식에 의해 위협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이러한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견고하게 서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참된 신앙은 역경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세 가지 유혹과 시험

"씨뿌리는 비유"를 보면 사탄이 성도들을 공격하는 무기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공격하는 첫째 무기는 "말씀을 받지 못하도록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단은 복음을 들을 때에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유혹에 빠진 사람들은 말씀을 무시하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단단한 "길가"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흙이 단단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라버립니다. 사탄이 공격하는 두 번째 위협외적인 핍박, 즉 위협과 박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즉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뿌리가 깊지 못해서 박해와 핍박을 당하면 쉽게 뽑혀버립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복음을 따라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흙이 얇은 바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흙이 얇은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은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면 말라서 시들어 버립니다. 또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세 번째 위협재물과 생활에 대한 염려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들을 때에 기쁜 마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재물과 생활의 염려에 짓물려서 복음을 따라 살아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음을 "가시밭"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은 가사 나무에 막혀서 크게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 버립니다(마 13장).

3. 시련에 넘어지지 않는 신앙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이러한 위협들을 넉넉히 극복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성령님께서 부드럽고 온유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어려움이 와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복음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령님을 통해서 많은 열매들을 맺게됩니다. 요셉, 욥, 그리고 다니엘과 같은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다 인생의 시험과 유혹을 극복하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성령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시험과 시련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은 시련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좋은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장성하여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가난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듣습니다. 성령님은 그들의 마음에서 완악한 마음을 제거해 주시고 그 마음을 온유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러한 사람은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마음 깊이 간직합니다. 또한 그들은 말씀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합니다. 이러한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사탄이 가져오는 인생의 역경과 시련 앞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고 인내하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마 13:23). 이러한 사람들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성령님 안에서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모든 시련이나 고난을 극복하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생의 모든 역경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안내서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인생의 역경들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대로 사는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이 집은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집이 극한 시련 앞에 무너지지 않는 것은 그 집의 기초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6)..."

1.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

우리는 지난 두 시간에 걸려서 산상수훈을 듣고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성공적인 삶을 살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 다 성공적인 삶을 살고 또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만나게 되고, 또 죽은 후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무시하거나 말씀을 기쁘게 받더라도 박해나 시험이 오면 말씀대로 사는 일을 포기해 버립니다(마 13:21-22). 이러한 사람들은 이익과 세상의 풍습을 따라 살다가 여러 가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또 죽은 후에 영생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2.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

예수님은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미래에 일어날 여러 가지 일들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합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집을 지은 후에 갑자기 비가 와서 홍수가 나거나 강한 바람이 불 것을 예측하고 이에 대비합니다. 그는 비와 홍수와 바람을 이길 수 있도록 땅을 깊이 파고 바위를 찾아서 그 위에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미래에 일어날 여러 가지 일들을 예측하고 대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집을 지은 후에 찾아올 비와 홍수와 바람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땅을 깊이 파거나 견고한 기초를 닦기 위해서 시간과 재정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어리석은 사람은 성격이 급합니다.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대바하기 위해서 정당한 절차를 따라 일을 진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 시간과 수고와 비용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어도 인내를 가지고 천천히 한 단계씩 밟아서 일을 추진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성격이 조급하여 지름길만 찾습니다. 그는 좋은 집을 원하지만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 필요한 댓가는 지불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어리석은 사람은 건축에 필요한 원칙을 지키지 않고 또 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건축에 필요한 여러 규칙과 법칙을 지켜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전문적인 건축자와 상담을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건축자는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에 각 상황에 적합하도록 설계도와 설명서를 작성하고 견적서를 만듭니다. 현명한 사람은 이러한 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따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건축의 원칙과 규칙을 무시하고, 전문가의 말이나 조언을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만 하고 남의 말에는 귀를 닫아 버립니다. 그는 정당한 건축 과정을 무시하고 빨리 집을 짓기를 원합니다. 때로 어떤 사람은 빨리 집을 짓기 위해서 불법 세력들과 손을 잡기도 합니다. 전문가들은 땅을 깊이 파고 견고한 바위 위에 집을 지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그 말을 무시하고 모래나 연약한 흙 위에 적당히 집을 짓습니다(눅 6:49(상)). 셋째로 어리석은 사람은 앞으로 있을 일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집을 지은 후에 비와 바람과 홍수가 올 것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집을 아무렇게나 짓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은 집은 비와 홍수와 바람이 찾아오면 크게 무너져 버립니다.

3. 영적으로 어리석은 자의 특징

이러한 일은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교사나 거짓 신자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거짓 교사와 거짓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가치관과 자기 생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 풍습과 자기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육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둘째로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과 자기에게 유리한 내용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셨는 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과 주장을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이용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씀 전체에 관심을 갖지 않고 여기 저기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성구만 골라서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과 말은 성경의 원래 가르침과 뜻에서 벗어나는 격우가 많습니다. 셋째로 거짓 교사와 거짓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고도 그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말씀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씀을 무시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말씀을 듣고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리 말씀을 듣고 배워도 그 말씀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옳지만 그렇게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쉽게 말씀을 버리고 또 세상의 가치관과 자기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씀을 통해 열매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가장 탁월한 전문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보물 지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말씀을 주의 깊게 연구하고 이를 실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동안에 그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생에 찾아 오는 모든 어려움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인생의 모든 역경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영원히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잇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무시하고 그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 올 때에 크게 당황하고 쉽게 무너집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히 고통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듣고 그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살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산상설교 듣고 행하는 사람 바위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은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성공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대로 사는 사람은 모든 역경을 이기고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듣고 행하지 않는 자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자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유한은 인간은 미래도 모르고 변화무쌍한 세상을 대처해 나가는 법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만 예상치 못한 위험과 역경으로 인해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다가 인생의 역경에 의헤 무너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7)."

1. 환난의 바람이 불 때(27)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칠 때 크게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 7:27). 모래나 흙 위에 적당히 지은 집들은 갑자기 많은 비가 와서 홍수가 나고 강한 바람이 불면 크게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태풍과 홍수와 거센 비를 견딜 수 없도록 허술하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래 위에 아무렇게 집을 지은 사람들은 비와 바람이 불 때 크게 무너진 집을 보면서 크게 후회하고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아무리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말을 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바보가 모래 위에 집을 짓냐 ? 아무리 바보라도 모래 위에 집을 짓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러한 어리석은 일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떠나서 자기 생각과 세상의 가치관과 습관을 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한한 자신의 지혜와 학식을 의지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의 사상이나 철학을 따라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예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기심과 탐욕을 좆아 남들이 하는 대로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유한한 지혜와 지식은 앞 일을 예측할 수도 없고, 또 항상 흠과 티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인생의 비와 바람이 불어올 때에 당황하면서 크게 무너질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비와 바람은 인생의 시련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는 마지막 날에 예수님 앞에서 받을 최후의 심판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2. 인생의 폭우와 홍수를 만났을 때

우리가 살다 보면 인생의 비가 내리고 큰 바람이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인생의 비와 홍수, 그리고 태풍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삶이 올바른 지 시험하는 여러 가지 역경과 시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갑자기 부도가 나거나 파산을 당할 수도 있고, 식구들이 병에 걸려서 위급할 때도 있으며, 또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능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에는 이러한 일들이 갑자기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은밀하게 행한 부정과 불법이 드러나서 수치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련의 대명사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의 진실한 신앙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욥의 신앙의 진실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단에게 욥을 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사단은 즉시 가서 욥의 자녀들의 생명을 거두고, 그가 가진 모든 재산과 건강을 모두 빼앗아 버렸습니다. 욥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크게 고통스러워 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것을 잃고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아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세상과 남편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남편이 모든 것을 잃고 고통하는 것을 보고 온 세상을 잃은 것처럼 생각하고 크게 낙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비난했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욥의 아내처럼 시련의 비와 바람이 불어올 때에 크게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갑자기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갑자기 부도가 나고 파산을 당해서 모든 것을 잃게 되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우리는 갑자기 건강을 잃고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우리는 가장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고 떠날 때에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시련 앞에 크게 무너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시련의 날에 큰 차이를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 살아갈 때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단은 정치 지도자나 힘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성도들을 박해합니다. 기독교 교회 역사를 보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 때문에 가족과 직장을 잃었고,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도 이러한 위협을 받았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체포하고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위협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황제에게 절하도록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만 경배하고 황제에게 절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직장과 가족을 잃게 되었고 때로 체포되어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신앙 때문에 가족, 직장, 그리고 생명을 포기해야 될 때가 오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보고 실망하여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또 데마도 바울이 옥에 갇힌 것을 보고 실망해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시련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모든 시련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견고히 서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고난을 받을 때에 예수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 역시 찬송을 부르면서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에 기독교인들은 결국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시련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거짓 신앙입니까? 아니면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진실한 신앙입니까?

3. 인생의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큰 바람이 불어올 때도 있습니다. 태풍이나 강한 바람은 집을 무너뜨리거나 날려버립니다. 폭우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태풍이 불면 기초가 약한 집은 넘어지거나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와 같이 우리를 넘어뜨리는 강력하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재산, 멋진 외모, 그리고 정욕과 쾌락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하고,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탄은 박해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을 협박하고, 박해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쾌락과 명예와 정욕으로 유혹하여 넘어지게 만듭니다. 욥을 찾아왔던 세 친구들은 세속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지혜, 전통적인 종교와 윤리관, 그리고 신비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욥을 공격했습니다. 이로 인해 욥은 크게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욥은 재산이나 가족을 잃은 것보다 친구들의 비난이 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박해보다 쾌락과 향락, 또는 명예와 재물 앞에서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활에 대한 염려로 복음을 좆는 일을 포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인생의 집을 지은 사람들은 강한 인생의 시련이 찾아 올 때에 크게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은 어떤 시련과 고난이 와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은 인생의 시련과 재난이 찾아올 때에 크게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두 사람 중에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나는 어떠한가 ?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강력한 죄의 세력이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신명기를 기록한 후에 (신 28장)에서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이 받을 축복과, 율법을 거역하는 사람이 받을 저주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저주의 내용이 축복보다 배나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축복보다 저주를 더 많이 기록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이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말씀을 거역할 때에 임할 재앙과 저주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강력한 경고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순종할 수 있도록 조치하셨습니다.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길은 말씀순종함으로 생명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말씀거역하고 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산상수훈을 들은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이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장차 닥쳐올 어떤 시험과 역경도 능히 극복하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장차 다가올 시험과 역경 앞에 크게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 중에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아니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까?

2. 영적 진단의 필요성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을 버리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어떤 길을 가는 사람인지 주의 깊게 반송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8복을 보면 천국 백성에게 나타나는 특성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이러한 특성들이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심령가난해졌습니까? 우리는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알고 영적인 파산을 당한 사람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 죄에 대해 깊이 애통하고 있으며, 또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갈망하고 있으며,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령님의 힘으로 평화를 만들고,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를 위해 박해를 받으면서 더할 나위없이 기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대답들에 대해서 "예!"라고 말할 수 있으면 우리는 천국 백성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만일 "아니요!"라고 대답하거나, 대답하기를 주저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신앙이 진실한 것인지 깊이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썩어져 가는 세상의 부패를 막고 있으며, 또 어두운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추고 있습니까 ? 아니면 우리는 세상과 함께 부패하고, 함게 어둠 속을 헤메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천국 백성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부패한 삶을 살고, 어둠 속을 헤메고 있다면 우리 신앙은 주의 깊게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습니까 ?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고 있다면 우리 신앙은 진실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의를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신앙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식주를 채워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 우리는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좁은 문과 좁은 길로 가고 있습니까 ? 우리는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 우리는 자신들을 향해서 이러한 질문들을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매일 자신이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사는지 ? 아니면 모래 위에 기초를 놓고 사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을 때에 바쁜 국사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경건한 시간을 통해서 포로의 신분으로 바벨론에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쁜 일과를 보내신 후에, 새벽 미명에 홀로 일어나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실 수 있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힘을 얻으셨습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은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찬송할 수 있습니까? 한 설교자가 설교 사역으로 30년 동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일할 수 있는 터전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갑자기 인생의 비바람과 홍수가 찾아왔습니다. 그때에 그는 낙심이 되어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그는 너무 힘이 들어서 하나님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인생의 시련 앞에서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는 그 동안 자신이 남에게 설교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지, 정작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하는 일에는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기도하면서 신앙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하게 되자 다시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20년 동안 더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또 죤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사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교지에 도착하자 마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모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후에 선교 일을 중단하고 기독교서점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서 상담을 했고 그에겐 많은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시 37:)에서 시인은 "온유한 자와 의인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사 28:16). (고전 3장)은 "믿는 자는 급절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3:10-13)은 "모든 성도들이 집을 짓고 있으며, 장차 시험의 불이 나타나서 시험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 안에서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지은 사람은 시험의 불이 나타날 때에 사라지지 않지만, 육신을 따라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지은 사람은 시험의 불이 나타날 때에 모두 타버리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고 있습니까? 아니면 육신을 좇아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집을 짓고 있습니까?

1. (신 28장)에 약속된 축복과 저주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 왜 이 곳에 저주의 내용이 축복 내용보다 더 자세히 경고되어 있는가?

2. 8복에 언급된 기독교인의 특징들은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이러한 특성들이 나타나고 있는가?

3.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가지고 자신의 신앙을 솔직하게 반성해 보자. 우리는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있는가? 아니면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가?


권세 있는 가르침(마 7:28)

 

산상수훈의 마지막 두 구절은 산상수훈을 들은 무리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은 우리의 관심을 권위 있는 교사이신 예수님께 주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태는 산상수훈을 들은 무리들이 크게 놀랐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무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전해 주는 권위 있는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오늘날에 산상수훈의 교훈을 듣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산상수훈을 들은 무리들의 반응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마 7:28)..."

 

1. 말씀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놀라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여기에서 "놀랐다"고 번역된 말('에크플랫소')은 '무엇으로 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스트롱 no. 1605). 이 말은 큰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무엇에 맞은 것처럼 크게 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마치셨을 때에 청중들이 "무엇에 맞은 것처럼 크게 놀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 5:1)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려고 처음에 산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나아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셨을 때에는 많은 무리들이 그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한 젊은 사람이 산 위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무리들은 그 젊은 사람의 말에 완전히 빠져 들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빠져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그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말씀이 끝났을 때에 무리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30살을 갓 넘긴 젊은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가르치는 의무 교육만을 겨우 마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처럼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우지도 않았고, 높은 학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그 젊은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젊은 이의 말에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발견할 수 없는 놀라운 신적인 위엄과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들은 무리가 놀한 것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권위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산상수훈을 여러 번 공부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자라난 교회에서 새벽 예배 때에 6개월 동안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설교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말씀 한 말씀 묵상하고 전하는 동안에 "과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씀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저는 이 말씀을 충현교회에서 새벽 예배와 교구예배 때에 전했습니다. 이 때는 교구 예배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요약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저는 그 때에도 이 말씀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후에 설교 원고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심방하는 도중에도 성도들 중에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세 번째로 이 말씀을 인터넷을 통해서 네티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네 번째로 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이메일을 통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이 말씀을 쓰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책망, 그리고 위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말씀은 신적인 권위가 있고,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신약 신학을 배울 때에 충현교회 당회장으로 계셨던 신성종 목사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때에 신 교수님은 산상수훈을 암송하는 사람에게 시험도 보지 않고 무조건 A+를 주셨습니다. 그때에 신 교수님은 "산상수훈을 암송하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이미 신약을 다 배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시에 그 말의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가르침을 들은 무리가 놀랐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태가 기록해 준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면,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이 가르치는 것을 직접 들은 무리들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2. 권위의 근거: 하나님의 아들

이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 이유는 이 말씀을 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이 말씀을 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학교와 교사들, 그리고 여러 곳에서 많은 교훈을 듣습니다. 어떤 강사는 정말 탁월해서 듣는 사람을 감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가르친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산상수훈을 가르쳐 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들의 말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 말씀에는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과 위엄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옛적선지자들로 여러 부분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모든 날 마지막아들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직접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전해주셨습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이 말씀을 신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사람은 신약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만물을 만드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만물의 상속자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고, 또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입니다. 또한 이 분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신 분입니다. 또한 이 분은 마지막 날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이 전한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무리들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분이 바로 이러한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무리들이 그 분의 말씀을 듣고 크게 놀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이러한 경외감은 산상수훈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 7:28-29)에는 산상수훈을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랍비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또 나이 많은 지혜자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무 교육만을 받은 평범한 30대의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입을 통해 나오는 가르침에는 거부할 수 없는 신적인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말씀을 듣고 신적인 능력과 권세를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신적인 권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1. 권위의 이유-권세 있는 가르침(29)

마태는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란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는 것 권세 있는 자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음이라!(29)"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권세"때문이었습니다. 무리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 안에 거부할 수 없는 엄청난 권세가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방법은 당시의 율법 학자들과 달랐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해설하는 일에 전문가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칠 때에 주로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해서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율법을 가르칠 때에 "모세가 이렇게 말했다.", "어느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위대한 학자가 이렇게 말했다."하는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각종 책과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가르침의 근거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주목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글을 아는가?(요 17:15, 마 13:5)" 그들은 배우지 못한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칠 때에 타인의 말을 인용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권세로 가르치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칠 때에 "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교훈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도 독창적이었고,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8복은 천국 백성의 특징들을 놀랍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천국 백성의 모습을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 5:11)을 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예수님은 "모세나 선지자를 인해" 핍박을 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인해"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신적인 권위를 가진 분만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실 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에서 "옛 사람에게 말했다"는 것은 당시 율법 학자들의 율법 해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권세를 넘어서서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로 모든 율법학자들의 해석을 교정하고 바로잡으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율법을 만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의 그릇된 율법 해석과 남용바로 잡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진정한 율법의 정신완성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로만 율법을 가르치지 않고, 직접 율법을 실천하면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옛날 시내산에 임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시고 그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한 후에 그 내용을 글로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처럼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산상수훈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실천 강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마7:21)"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거짓 신자와 참된 신자를 구별하는 최종 심판자가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아니라,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 심판자, 그리고 참 진리의 주체로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무리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계신 것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권세를 느꼈습니다. 옛날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두려워한 것처럼, 무리들도 산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마태가 기록해 준 산상수훈을 읽고 놀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가르쳐 주신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 크게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이 말씀을 행할 것인가 ? 지나쳐 버릴 것인가 ?

우리들도 무리들처럼 예수님의 가르침경외심을 가지고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태가 전해준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직접 들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에 예수님을 통해 직접 들든 무리들이나, 마태가 전해준 글을 읽는 우리들에게 동잃하게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와 같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마태의 글을 읽는 우리들도 이 말씀을 읽고 지키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천국 백성이 된 사람은 8복에 기록된 특징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이 말씀을 읽고 실천하지 않으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을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무리들에게 자신을 주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입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에 천국 백성의 위치를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읽고 뭇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히 2:1)."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가르쳐 준 말씀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삼가라!"고 권면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천사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습니다(히 2:2).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전해 주신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은 더 큰 심판을 받게될 것입니다. 마태가 기록한 산상수훈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말슴해 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 백성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령님의 통치를 받아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소금과 빚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이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율법을 가르쳐주신 방법과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가르친 방법이 어떻게 다른 지 설명해보자.

2.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권세와 율법학자들의 권세는 어떻게 달랐는가?

3.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실천할 것인가? 아니면 지나쳐 버릴 것인가? 말씀을 듣고 행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자.

< 최영찬>.  cafe.daum.net/correct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