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에 대한 가르침(마 6:1-4)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준수해야 할 구제의 방식과 의의
본문에서 저자는 참된 구제의 전형을 외식적인 구제와 비견해 설파함으로써 진정한 구제는 그 본질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신앙적 동기에 기인되어야 함을 주지시키고 있다. 실로 유대인들에게 있어 '구제'는 그들의 종교적 삶에 있어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중요한 신앙적 관행의 하나였기에(신14:2924:19-21;26:12), 본문에서 재삼 참된 구제의 전형이 제시된 것은 곧 당시의 종교적 정황이 극단적인 외식주의로 흐르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참된 구제의 모본으로 제시한 바 있다(고후8:9).
1. 형식적 의에 대한 규정(1절)
본절은 실제적으로 18절까지 이어지는 참된 구제, 기도, 금식의 내용을 포괄하는 전체적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곧 본절에서 저자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삶 전반에 걸쳐 편재해 있던 극단의 외식주의적 행태(5:20)를 보편적인 시각에서 비판함으로써 참된 의의 실천 방식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1) 외식적 의에 대한 규정
(pro;" to; qeaqh'nai aujtoi'"프로스 토 데아데나이 아우토이스, 1a절)
본문에서 데아데나이(qeaqh'nai보이려고)는 제1부정 과거 수동 부정사로 특별한 목적을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 보이려고 하는 목적의 궁극적은 대상이 바로 사람들이란 점에서, 외식하는 자들의 전반적인 행위가 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에 준거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실로 이러한 사실은 유약한 인간에게 있어 필연적인 위선의 결과를 낳기 때문에 그러한 위선과 가식의 극복은 오직 모든 행위의 내적 동인(動因)이 곧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 기인할 때 가능한 것이다. 한편 '데아데나이'는 '연극적', '과장된'이란 뜻의 영어 theatrical의 어원이기도 하다.
2) 외식적 의에 대한 경고
(Prosevcete 팪e;■th;n dikaiosuvnhn uJmw'n mh; poiei'n e[mprosqen tw'n ajnqrwvpwn프로슈케테 텐 디카이오쉬넨 휘몬 메 포이에인 엠 프로스덴 톤 안드로폰, 1b절)
혹자는 본문의 디카이오쉬넨(dikaiosuvnhn의)을 2-4절의 구제와 연관시키나(신6:25) 여기서는 18절까지 이어지는 '구제', '기도', '금식'등 당시 유대인들이 준수하는 보편적인 종교적 관행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따라서 본문은 '항상 생각하다', '(그 일에) 집중하다'란 뜻의 프로세케테(prosevcete주의하라)란 경고적 낱말(욥7:17)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종교적 삶이 사람들의 이목을 중시하는 외식주의적 행태가 되어서는 안되며, 오직 항상 '하나님 앞에서'라는 신앙적 동기에 근거해야 함을 지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Carson).
3) 외식적 의의 결과
(eij de; mhv ge, misqo;n oujk e[cete para; tw'/ patri; uJmw'n tw'/ ejn toi'" oujranoi'"에이 데 메게 미스돈 우크 에케테 파라 토 파트리 휘몬 토 엔 토이스 우라노이드, 1c절)
본문에서 파라 토 파트리 휘몬(para; tw'/ patri; uJmwn너희 아버지께)이 원문상 '너희 아버지 옆에'란 뜻을 가진다는 점과 '상'이 원어상 미스돈(misqovn)으로 '보상', '삵'이란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본문의 '상'은 곧 하나님 옆에서 받을 보상을 가리킨다. 이는 참된 내적 동기에 의해 시행되는 현세적인 의의 결과적 상급이 종말론적으로 있을 하나님의 보상의 성격임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외식주의자들이 그러한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고의적인 외식적 행위로 말미암아 세속적인 존경과 칭찬을 그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받았기 때문임을 보여 주며, 나아가서는 그러한 외식적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범죄 행위이기에 하나님께 받을 보상이 없음은 물론 엄중한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삼상15:22,23).
2. 외식적 구제에 대한 규정(2절)
유대인들의 종교 관습 중 먼저 '구제'가 언급된다(토비트12:8,9). 본절은 특별히 구제의 본질적인 동기와 정신을 망각하고 진정한 신앙 정신에 의거하지 않은 채 자기 과시의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는 당시 유대인들의 왜곡된 구제관을 경고한다. 한편 본절 초두의 불변사 '운'(ou|n그러므로)은 '일례로', '그러한 사례 중의 하나라'란 뜻으로 1절의 '의'가 곧 '구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1) 외식적 구제의 목적
($Otan ou&n poih'/" ejlehmosuvnhn ... e[mprosqevn sou, w{sper oiJ uJpokritai; poiou'sin호탄 운 포이에스 엘레에모쉬넨…엠프로스덴 수 호스페르 호이 휘포크리타이 포이우신, 2a절)
본문은 먼저 '~인 체하다', '가면을 쓰다', '가장하다'란 뜻의 휘포크리노마이(uJpokrivnomai)에서 파생된 말로서 '배우', '흉내내는 자'란 뜻을 가진 '호이 휘포크리타이'(oiJuJpokritai외식하는 자)란 말을 통해 위선과 가식으로 점철된 '외식하는 자'들의 실체(7:5;15:7;24:51)를 규정한 다음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란 구절로 그러한 자들이 행하는 왜곡된 구제의 궁극적인 목적을 명시한다. 곧 여기서의 '영광'(doxasqw'sin독사스도신)이 성경의 일반적인 용례로서의 신적 영광의 의미보다는 '명예'(honor), '명성', '평판' 등의 세속적 의미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외식하는 자들이 행하는 구제의 목적이 자신에 대한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정욕의 충족에 있음을 알게 한다. 실로 오늘날에 있어서도 참된 신앙적 동의없이 행해지는 대부분의 자선과 구호에는 결국 자기 과시나 배면의 이득을 꾀하는 악의적인 동기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계해야 한다. 한편 본절의 초두에 언급된 호탄 운 포이에스 엘레에모쉬넨({Otan oupoih'/" ejlehmosuvnhn구제할 때에)의 불변사 '호탄'은 가정법 현재 시상과 함께 쓰여져 '~한다면'이란 '조건'의 의미보다는 '언제든지, ~할 때마다'란 반복의 의미로 쓰여졌다는 점(막13:11눅12:11)에서, 성도들에게 있어 구제가 조건적 의무가 아닌 필연적이고 당위적인 신앙 행위란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2) 외식적 구제의 전형
(mh; salpivsh/" ... ejn tai'" sunagwgai'" kai; ejn tai'" rJuvmai", o{pw" doxasqw'sin uJpo; tw'n ajnqrwvpwn메 살피세스…엔 타이스 쉬나고가이스 카이 엔 타이스 흐뤼마이스 호포스 독사스도신 휘포 톤 안드로폰, 2b절)
'회당'(sunagwgai'"쉬나고가이스)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경건한 자세로 기도하는 곳을 '거리'(rJuvmai"흐뤼마이스)는 원어상 '좁은 골목길'이란 뜻으로 당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은밀하게 다니던 뒷골목을 가리키는 말이다(눅14:21). 한편 메 살피세스(mh; salpivsh"나팔을 불지 말라)란 말에 대해 혹자는 이를 문자적 의미 그대로 당시 예루살렘 등지에서 구제물을 헌납받기 위해 또는 헌납한 뒤에 실제로 나팔을 분 것으로 보며(Bonnard, Calvin), 또 혹자는 구제물을 받기 위해 마련된 성전의 13개의 헌금궤(눅21:2)가 뿔피리 모양이었던 데서 이 말이 기원했다고 주장한다(Vincent, Jeremias). 본문에서는 '나팔을 분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알린다는 의미에 합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한다는 상징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 자기 과시를 위해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경건의 모습을 드러내는 곳과 궁핍한 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자신들의 구제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외식주의자들의 전형을 주지시킴으로써 그러한 악의적인 전철을 따르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3) 외식적 구제의 결과
(ajpevcousin to;n misqo;n aujtw'n에페쿠신 톤 미스돈 아우톤, 2c절)
여기서의 '미스돈'(misqo;n상)은 문맥상 1절의 '상'(하늘 상급)과는 달리 현세적이고 세속적 의미의 보상을 가리킨다. 또한 '아페쿠신'(ajpevcousin받았느니라)은 상용어로 '영수증을 받다'란 뜻을 가지는 바(눅6:24빌4:18), 본문은 외식주의자들이 구제 행위에 대한 보상이 give and take 형태의 세속적 방식으로 이미 확고하게 주어졌으며, 그 받은 보상이 결코 철회되거나 소멸될 수 없는 확증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러한 세속적 보상의 확증에 따라 그들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 행위에 대한 보상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로 그들이 받은 이러한 세속적 보상은 인간의 유한성에 비추어 가시적이고 한시적인 헛된 것이었다.
3. 참된 구제의 방식과 결과(3,4절)
본문에서는 자기 과시나 이기적 정욕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외식적 구제와는 달리 진정한 신앙 정신과 신적 사랑에 의거해 시행되는 참된 구제의 자세와 그로 인해 얻게 될 종말론적 상급을 피력한다. 곧 본문은 참된 구제는 구제하는 자의 내적 동기 여하에 달려있는 것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1) 참된 구제 실천의 비유
(mh; gnwvtw hJ ajristerav ... hJ dexiav sou메 그노토 헤 아리스테라…헤 덱시아 수, 3절)
'모르게 하여'란 구절은 원어상 부정을 나타내는 불변사 메(mhv)가 첨가되어 직역하면 '알지 못하게'이다. 이러한 어투는 곧 그 말이 지니는 의미의 정도를 더욱 강조하는 표현이다. 또한 왼손과 오른손이 결국은 한 지체에 속한 것이란 점에서, 본문의 비유는 자신이 행한 구제 행위에 대해 결과적 보상을 바라지도 말며(Luther), 심지어는 나중에라도 결코 기억하지 말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로 이러한 참된 구제는 사람들의 안목과 평판을 초월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내적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롬11:36).
2) 참된 구제의 전형
(o{pw" h/ sou hJ ejlehmosuvnh ejn tw'/ kruptw'/호포스 헤 수 헤 엘레에모쉬네 엔 토 크뤼프토, 4a절)
크뤼프토(kruptw'/은밀하게)는 원어상 '숨기다', '감추다'란 뜻으로서 참된 구제의 전형은 자신의 구제 행위가 남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숨어서 비밀스럽게 행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곧 2-2)에 언급된 외식적 구제의 전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이러한 은밀한 구제는 결코 사람들에 의한 보상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라는 진실한 신전(神前)의식의 결과로 발원됨을 나타내고 있다.
3) 참된 구제의 결과
(kai; oJ pathvr sou ... ajpodwvsei soi카이 호 파테르 수…아포도세이 소이, 4b절)
미래형 '아포도세이 소이'(ajpodwvsei soi갚으시리라)는 '주어야 할 것을 주다', '되돌려주다, 보상하다'란 뜻으로 미래적 보상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한편 공인본문(Textus Receptus)과 KJV는 이 구절과 6절에서 '엔 토 파네로'(ejn tw'/ fanerw'/드러내놓고)란 말을 첨가해 그 보상이 공개적으로 주어진다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삽입으로 성경 어디에도 본문과 같은 은밀한 경건에 대한 공개적 보상이 언급된 바가 없다는 점과 은밀한 구제의 보상이 곧 하늘 상급이란 점 그리고 동일한 문맥인 18절에서는 이러한 문구가 삽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 특별히 본문은 소유의 형태인 호 파테르 수(oJ pathvr sou너의 아버지)란 말을 통해 그러한 보상의 대사인 구제자를 부자간의 관계를빌어 하나님의 소유로 언급함으로써 은밀하게 행해지는 참된 구제의 배면에 있는 현세적인 기쁨과 위로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있을 확정된 상급의 소망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Broadus).
기도에 대한 가르침(마 6:5-15)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참된 기도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오전9시, 정오, 오후3시) 정규적인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눅18:9-14행3:110:9). 그러나 일부 외식주의자들은 이 시간에 고의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자신의 경건함을 과시하려 했고, 본문은 그러한 외식주의자들의 가식적인 기도와 잘못된 기도를 경고하는 동시에 참된 신앙 정신에 근거한 올바른 기도의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실로 기도는 기도자와 하나님과의 은밀한 인격적 만남과 교제의 행위로서 성도들의 신앙적 삶의 영위에 필연적인 것이므로 참된 기도는 그 내적 동기가 온전히 우리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만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1. 외식적 기도와의 비교를 통한 참된 기도의 실제(5-8절)
본문에서 저자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경건성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드리는 외식적 기도 그리고 입으로만 행해지는 잘못된 기도의 형태를 제시하고 경고하는 동시에 참된 기도의 방식을 교훈하고 있다. 곧 본문을 통해 전하는 단순히 기도의 외적 방식만이 아닌 참된 기도의 내적 동기와 목적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5절초두'기도할 때에'(o{tan proseuvchsqe호탄 프로슈케스데)의 시간을 나타내는 불변사 호탄은 2절의 '구제할 때에'와 동일한 형식으로 반복의 의미를 내재하고 있어, 규칙적인 기도의 생활을 암시하는 것이다.
1) 외식적 기도와 참된 기도의 전형
(kai; ejn tai'" gwnivai" tw'n plateiw'n eJstw'te" proseuvcesqai ... ei[selqe eij" to; tamei'ovn sou kai; kleivsa" th;n quvran sou 카이 엔 타이스 고니아이스 톤 플라테이온 헤스토테스 프로슈케스다이…에이셀데 에이스 토 타메이온 수 카이 클레이사스 텐 뒤란수, 5,6절)
외식적 구제와 마찬가지로 외식적 기도의 전형이 먼저 제시된다. 여기서 특별히 그 기도의 장소가 '회당'외에 엔 타이스 고니아이스 톤 플라테이온(ejn tai'" gwnivai" tw'n palteiw'n큰 거리 어귀에)으로 언급된 것은 일반적으로 그곳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상거래를 하거나 정보의 교환이 쉽게 이루어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외식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공개된 기도를 통해 자신의 경건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과시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이는 곧 외식적 구제를 행할 때 찾았던 '거리'(좁은 골목)와 함께 그들의 기회주의적 면모를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서 그들의 종교 생활 전반이 곧 자신의 이기적 정욕과 세속적 명예의 획득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지속적인 동작의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 시상의 과거형 헤스토테스 프로슈케스다이(eJstw'te" proseucesqai서서 기도하기를)와 함께 그들의 외식적인 기도 행위가 이미 습관화되어 있음을 시사해 주며, 그들이 행하는 기도의 불순한 동기를 암시케 한다. 한편 6절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참된 기도 자세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기서 타메이온(tamei'ovn골방)은 '단절하다, 자르다'란 뜻의 템노(tevmnw)에서 유래한 어근 탐(tavm)이 첨가된 타미아스(tamiva"청지기)의 파생어 타미에이온(tamieivon)에서 i가 탈락된 후기 형태의 단어이다. 이는 하나님의 청지기가 그 주인 되신 하나님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듯 세상적인 모든 것과 단절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한 기도의 장소를 지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징적으로 참된 기도의 방식과 의미를 지침해 주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다. 실로 참된 기도는 세상의 안목에 구애됨 없이 기도자와 그 기도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은밀한 만남과 인격적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2) 잘못된 기도의 전형
(de; mh; battaloghvshte w{sper oiJ ejqnikoiv데 메 밧탈로게세테 호스페르 호이 에드 니코이, 7절)
5절이 기도의 외식적인 행태, 곧 불순한 동기에 의한 기도를 비판한 것인데 반해, 본문은 종교적 무지에 기인한 잘못된 기도의 관행, 곧 기도의 내용적 측면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에드니코이(ejqnikoi;이방인, 32절;5:47)의 삽입은 이방 지역과 연접한 갈릴리 지역의 특성상, 잦은 이방인의 출입으로 인한 이방적 관행의 편만함을 염두에 둔 것이다. 곧 밧탈로게세테(battaloghvshte중언부언)란 말은 같은 말을 더듬어 반복하는 것이나 허튼 말의 반복을 가리키며, 헹 테 폴뤼로기아(ejn th'/ polulogiva말을 많이 하여야)는 무익한 말의 수다함을 가리킨다. 또한 그 말은 이방의 종교적 관행상 제의적 주문의 반복(왕상18:26,28행19:34)이 자신들의 요구를 신에게 전달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이라고 여기는 이방적 관념을 지시한다. 본문은 그러한 이방적 요소에 기인한 잘못된 기도의 관행을 경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Bruce). 실로 참된 기도는 기도의 길고 짧음 여하에 관계없이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진솔한 내면의 신앙적 고백에 근거한 것이어야만 한다(사65:24히11:6).
3) 참된 기도의 전제가 되는 신지식
(oiga;r ... aijth'sai aujtovn오이덴 가르…아이테사이 아우톤, 8절)
오이덴(oi아시느니라)이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사귀어 안다'란 뜻으로 단순한 이론적 앎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적이고 인격적인 앎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본문은 우리들의 기도 이전에 항상 우리의 삶에 개입해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제의적(祭儀的) 주문처럼 허튼 말의 수다함에 자신의 뜻을 변경시키는 분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모든 정황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합당한 계획을 준비해 놓으신다. 한편 이러한 표현이 왜곡되어 전해질 때 이는 기도의 필요성 자체를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으로 우리와의 인격적 교제를 기뻐하시며 이로 인한 믿음의 형성을 바라신다는 점에서, 진솔한 내면의 고백에서 우러나오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기를 원하신다(Hill).
2. 참된 기도의 모본으로 제시된 주의 기도(9-13절)
외식적 기도, 잘못된 기도의 전형과 참된 기도의 전형을 대비시켜 진정한 기도의 내적, 외적 동기와 자세를 피력한데 이어 본문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직접 참된 기도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눅11:2-4과 병행을 이루는 본문은 십계명의 경우(제1-4계명:대신적 의무 규정;제5-10계명:대인적 의무 규정)와 마찬가지로 참된 기도에 있어서 세 가지의 수직적 요소(9,10절)와 네 가지의 수평적 요소(11-13절)를 포괄하고 있다(출20:3-17). 곧 본문은 기도의 정형적인 틀을 문자적으로 제시한 것이라기보다는 9절 초두의 부사 후토스(Ou{tw"이렇게)가 암시해 주는 것처럼 참된 기도의 모델, 곧 기도자가 행할 참된 기도의 방법론과 거기에 내재된 신앙 정신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대신적 기도의 요소
(Pavter hJmw'n ... wJ" ejn oujranw'/ kai; ejpi; gh'"파테르 헤몬…호스 엔 우라노 카이 에피게스, 9,10절)
본문은 하나님의 신성과 절대 주권을 찬양하고 고백하는 대신적 내용이다. 먼저 하나님 호칭의 전제로 나타난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oJ ejn toi'" oujranoi'"하늘에 계신)란 말 중 복수로 표현된 '하늘(들)'은 하늘이 3층천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어 온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 반영된 것이다(시33:14사63:15). 이것은 하나님의 신적 속성(전능성, 편재성, 영원성)을 강조하는 말이므로(왕상8:27사66:1), 하나님의 절대적인 신성과 주권을 시인하는 이 말은 기도의 대상인 그분을 향한 기도자의 기도를 통한 응답의 소망과 절대적인 확신을 갖게 한다. 한편 대신적 기도 요소의 첫 번째인 하기아스데토 토 오노마 수(aJgiasqhvtw to; o[nomav sou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서 오노마(o[nomav이름)는 히브리 개념상 '이름'이 그 존재의 전인격과 속성을 대변하는 것이란 점에서 하나님 자신을 지칭한다. 따라서 그 말은 '의식적인 목적에 합당하도록 구별하고 분리한다'는 뜻의 미래 수동형 하기아스데토(aJgiasqhvtw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신앙과 경외의 대상이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 요소인 엘데토 헤 바실레이아 수(ejlqevtw hJ basileiva sou나라이 임하시옵시며)에서 헤 바실레이아 수(hJ basileiva sou나라)는 이미 도래하였으며 종말론적으로 온전하게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12:28,29;19:28;눅17:21)를 지칭한다. 곧 헤 바실레이아 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그 나라의 조속한 성취에 대한 갈구를 표현한다(계11:1722:20). 기도의 세 번째 대신적 요소인 게네데토…에피 게스(genhqhvtw... ejpi; gh'"뜻이 하늘에서…이루어지이다)에서 델레마(qevlhmav뜻)는 여기서 특별히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모든 섭리와 계획을 포괄하는 말이다(롬12:2). 이 구절은 하나님의 그러한 뜻이 지금 우리가 속한 땅에서 조속히 실현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앞서 언급한 '나라이 임하옵시며'와 마찬가지로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조속한 성취를 원한다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2) 대인적 기도의 일상적 요소
(To;n a[rton hJmw'n ... shvmeron 톤 아르톤 헤몬…세메론, 11절)
4가지 대인적 기도 요소 중의 첫 번째 것이다. 에피우시온(ejpiouvsion일용할)은 원어상 에피(epiv)와 우시아(oujsi")의 합성어로 '우리의 매일의 생존에 필요한'이란 뜻으로, 본문은 문자적으로 육적 생존의 필수적 요소인 '양식'(a[rton아르톤)과 함께(막3:20살후3:12약2:15) 우리들에게 매일 필요한 삶의 요소들에 대한 간구를 지시하고 있다. 혹자는 이를 모두 영적 양식과 연관시켜 해석하나(Jerome), 그 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측면뿐 아니라 우리의 육적 삶의 문제에까지 세심한 배려를 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 듯한다(Luther). 이는 곧 12,13절이 우리 삶의 영적 측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조화를 이룬다. 한편 세메론(shvmeron오늘날)은 원어상 '오늘, 지금'이란 뜻으로(눅4:21행4:9) 육적 필요에 대한 기도가 바로 그 날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말함으로 기도에 있어서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의 배제를 암시한다.
3) 대인적 기도의 신앙적 요소
(kai; a[fe" hJmi'n ... ajpo; tou' ponhrou'카이 아페스 헤민…아포 투 포네푸, 12,13절)
11절에 대비시켜 기도자의 영적(신앙적) 측면의 요소를 언급한다. 곧 대인적 기도 요소 중 두 번째 것인 본문에서 나타나는 '죄'란 말이 동일한 내용을 다룬 누가복음에서는 신약의 일반적 용례인 하마르티아(aJmartiva)로 나타나나(눅11:4), 여기서는 '부채, 빚'을 뜻하는 오페일레마타(ojgeilhvmata)로 쓰여졌다. 이는 '죄'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종교적, 도덕적으로 당위적인 일을 행치 않은 사실이 곧 필연적인 갚음(용서)을 요하는 빚진 것과 같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18:30, Vincent). 한편 '사하여 준 것 같이', '사하여 주옵시고'에서 전자 아페스(a[fe")는 제2과거형이며, 후자 아페카멘(ajfhvkamen)이 제1과거형이기에 특별한 시제상의 차이를 발견할 수는 없으나 사건의 배열에 의거한 동작의 우선 순위에 따라, 본문에서 우리의 대인적인 용서 행위가 곧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하여 주다'란 말이 원어상 '포기하다, 버리다' 등의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여기서의 용서는 곧 빚(죄)의 완전한 탕감과 소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18:27). 세 번째 기도 요서(우리를…들게 하지 마옵시고) 중 '시험'(peirasmon페이라스몬)은 '유혹'의 의미라기보다는 특별한 연단과 고난을 가리킨다(Vincent, Scotts). 따라서 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한 예수그리스도의 기도 중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26:39)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 구절 뒤에 이어지는 '다만'(ajllav알라)은 보다 강한 뜻의 반의적 불변사로 이하 문장이 별도의 또 다른 내용, 곧 본문에 나오는 기도의 네 번째 요소임을 입증시켜 준다. 곧 전 문장이 시련받지 않게 해달라는 소극적 자세였던 데 반해 이 문장은 제1과거 명령형으로 '(항상, 언제나) 구출하소서, 보존하소서'란 뜻을 지닌 흐뤼사이(rJu'sai구하옵소서)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악의 세력, 곧 사단의 세력으로부터의 지속적인 구원과 보존을 강렬하게 원하는 적극적인 기도의 자세를 보여준다(엡6:16요일3:12). 한편 투 포네루(tou' ponhrou'악)는 남성 소유격으로 성경의 용례상 단순한 악의 세력이 아닌 '사단'을 지칭한다(살후3:3요일2:13,14). 마지막 구절(나라와…있사옵나이다)은 원전에는 없는 구절로서 주의 기도를 정형화하기 위한 후대의 삽입으로 보여진다.
3. 참된 기도를 위한 삶의 전제(14,15절)
참된 기도의 모본으로 제시된 주의 기도 뒤에 특별히 용서에 관한 내용이 별도로 첨가된 것은 참된 기도의 전제로서 행해야 할 신앙적 삶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1) 대인적 용서
(!Ea;n ga;r ajfh'te ... ta; paraptwvmata aujtw'n에안 가르 아페테…타 파랍토마타 아우톤, 14a절)
12절 내용('우리가 우리에게…준 것 같이')과 동일한 맥락이다. 한편 여기서 심각한 종교적 도덕적 범죄를 의미하는 하마르티아(Jhamartiva) 대신에 완곡하게 '실책'의 의미를 지닌 파랍토마타(paraptwvmata)가 쓰여진 것은 12절의 오페일레마타(ojfeilhvmata)와 마찬가지로 대인적 용서의 가능성이 있는 일상적인 범죄를 가리키기 위함인 듯하다.
2) 용서의 결과
(ajfhvsei kai; uJmi'n oJ path;r uJmw'n oJ oujravnio"아페세이 카이 휘민 호 파테르 휘몬호 우라니오스, 14b절)
12절의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와 동일한 의미로 진정한 실천적 신앙의 삶을 암시한다.
3) 용서치 않음에 대한 결과적 경고
(eja;n de; mh; ajfh'te ... oujde; oJ path;r uJmw'n ajfhvsei ta; paraptwvmata uJmw'n에안 데 메 아페테…우데 호 파테르 휘몬 아페세이 타 파랍토마타 휘몬, 15절)
14절과 동일한 내용을 '만일…아니라면' 이란 뜻의 가정법 현재형 에안 데 메(eja;n de; mh;)를 사용하여 역설적인 경고형의 어투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곧 대인적 용서의 현재적 실천을 특별하게 강조하려는 의도에 기인한 것이다. 실로 우리의 종교적 행위에는 먼저 신앙적 삶의 실천적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
본 문 : 마6:13(누가복음 10:17-20)
여는 말
주기도문을 하나님께 드릴 때 마지막 끝맺음은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 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분들은 여기에 의문점을 갖습니다.
1.왜 마태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괄호 안에다 넣어 놓았을까?
2.왜 권위 있는 현대판 영어성경에서는 이 내용을 삭제하여 버렸을까?
3.왜 누가복음에는 이 부분이 들어있지 않는가?
4. 대개라는 말은 원래 없는 말인데 어디서 나온 것이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
푸는 마당
1. 괄호 속에 든 기도
이런 것들은 평신도에게 별 흥미가 없는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문제는 성경학자나 교회지도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면 되지 우리가 알아서 뭘 하느냐고 넘겨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이므로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은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하고 또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 기도에 관한 무엇이든지 알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는 기도를 해야지 모르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하는 이 본문을 영광송(榮光頌)이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본문을 괄호 안에 넣은 이유는 신약성경의 원문이라고 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사본 중에 이 부분 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사본은 수백 개가 되는데 그 사본 가운데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또 초대교회 때 널리 읽혀지고 인정을 받았던 사본에서는 이 영광송이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좀 후대에 기록된 사본 중에 4-5세기경에 나온 <고대 라틴어역본> 에서는 이 영광송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광송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원래의 원문에는 없었으나 초대교회가 나중에 첨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입니다.
오래 전부터 유대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를 드린 후, 찬양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관습에 따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영광송을 붙였다고 보는 것이 권위있는 바람직한 해석입니다. 기도를 드리고 난후 금방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던 유대교의 관습은 초대교회에 그대로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이는 바울 서신서에도 등장합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딤후4:18) 이 말씀처럼 기도를 하고 단순히 일어나는 것보다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 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와 같은 영광송을 주기도문에 붙여서 우리에게 전해준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대표기도를 드린 다음에는 반드시 기도송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분들에게 기도를 부탁받습니다. 함께 앉아서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나면 성도들은 반드시 작은 목소리로 '주여, 아멘, 믿습니다'를 합니다. 이 또한 이런 전통을 이어서 하는 것임을 아아야 합니다.
2. '대개'라는 말
1) 대개의 사용 변화.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대개(大槪)>라는 말은 중국에서 도입하여 오래 전에 쓰이던 말로서 오늘날에는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것은 '큰 원칙은' 또는 '큰 원칙으로 말하면'의 뜻인데, 오늘날에는 '대충'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옛말의 뜻을 미리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외우고 있을 뿐입니다.
2) 성경에는 없는데 삽입되어야만 하는가?
주기도문을 주님 앞에 드리면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좀 어색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소위 '대개'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대개'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 표지안에 삽입한 주기도문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이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사실 원문 상으로 볼 때 대개라는 말이 꼭 들어가야 하는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고대 라틴어역본>에는 < >가 삽입되어 있어서, 권위있는 영어성경인 King James판이 '거기에' for(왜냐하면)라는 접속사를 붙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의미로 나와 있는데 100여년 전 우리 조상들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왜냐하면> 이라는 의미대신 <대개>가 붙여진 것입니다.
1)로스역(1887년)// 송영 자체가 없다.
2)구역(1906년), 게일역(1925년)// 본문 가운데 있다.
3)개역(1976년), 공동번역(1971년)// 괄호 안에 두었다.
4)새번역(1967년)// 본문에는 생략하고 뒷면 사본 고증란에 두었다.
5)표준새번역(1993년)// 괄호 안에 두고 난외주에 고대 사본에는 없다고 언급함.
현대에는 이 대개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곳은 두 곳 뿐입니다. 하나는 찬송 가 표지 안에 있는 주기도문이고 다른 하나는 습관적으로 우리의 입에 익숙 해진 주기도문입니다. '대개'의 뜻은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을 좀더 요약하면 '요컨대'라는 뜻이라고 생각 되는데 이 단어가 뚜렷한 의미가 없이 주기도에 붙여 있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기독교 일각에서 제기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다가 최근에는 다시 사용하는데 이것은 다분히 습관때문에 보편화된 것입니다.
3)'대개'를 사용하지 않는 교우들의 타당성 있는 이유.
① 무슨 뜻인지 의미도 모르는 단어를 습관적으로 횡설수설하듯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증언부언 하지 말라는 기도원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② 한국교회에 문제의식을 던져주기 위해서입니다.
수 십년 전에 번역된 기도문에 문제가 있다면 좀 더 잘 다듬어서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에게 분명하게 다시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을 성도들이 습관적으로 그냥 외우는 것을 방치한 채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국교회의 고쳐야할 과제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아름다운 영광송을 드림의 타당성.
1)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튼 영광송이 원문에는 없이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기도를 마칠 때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기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십시오! 주십시오! 하는 것으로만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만 늘어놓고 일어서려면 하나님 앞에 겸연쩍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우리는 기도를 마치고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찬양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진정한 기도자는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생각하면서 기도가 끝날 때에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영광송을 즐겁게 사용했습니다.
2)기도의 응답자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기도문 초두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또 주기도문 끝에는 영광송에서도 "나라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하고 찬양합니다. 성도들이 기도하는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의 주권자이시고, 기도하는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종일 뿐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마치면서 "아버지여, 이 세계와 장차 나타날 영원할 나라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있음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심을 감사합니다."라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일어난다는 것은 아름다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3)당연한 사항을 재확인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초두에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렇게 기도하기 때문에 마지막 영광송에서도 "권세가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하면서 찬양을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광 중에 권세를 가지신 전능자로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하늘에서 펴시고 땅에서도 펴시는 분입니다. 그의 뜻을 펴지 못할 장애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에 있는 모든 기도를 드린 다음에 조용히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향해서 "권세가 우리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찬양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4)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 서두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옵소서." 마치면서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을찌어다."하는 기도로써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독특한 말입니다.
<예화>// 로마의 황제 트라이안은 유태인의 유명한 학자였던 여호수아 랍비를 만나 "랍비여, 내게 하나님을 보여 주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여호수아 랍비는 "폐하! 당신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보면 죽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 대답하자 황제는 다시 "그러나 그러한 말로 나를 설복시킬 수는 없다. 나는 꼭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랍비는 궁전을 비추고 있는 정오의 찬란한 태양을 가리키며 "폐하! 그렇다면 저 태양을 바라보십시오"고 말하자 태양을 바라 본 황제는 "너무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랍비는 "그렇습니다. 폐하! 피조물의 광채도 바라보기 어렵거든 어찌 창조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겠습니까?"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아니,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완벽하신 절대자 하나님, 내 모든 것을 불꽃같은 안목으로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사람들은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 이름이 영원히 높임을 받고 영원히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 그 놀라운 분에게 우리가 기도하는데 어찌 영광을 노래하고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자녀를 키워 보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부모 생각은 안하고 날마다 달라! 달라고만 하는 자식은 주면서도 밉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존경해 주는 자식은 달라고 하지 않아도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자는 달라하고는 그대로 일어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아뢴 다음에 기도를 들으시는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생각할 때 너무 기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교우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길 바랍니다.
4.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영광송들
(롬 11: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딤후4:18)"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계1:6)"...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계4: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계5:12-13)"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계19:1)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닫는 마당
주기도문에 대하여 장로회신학대학에 있는 나채운 교수는 16곳(반복까지 합하면 20곳)에 문법, 의미, 표현 등에서 국문학적으로 시급히 대폭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아마 성경 번역의 방법과 과정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 성경상의 변경을 금물로 하는 보수적인 교인들에게는 충격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빨리 수정해야 할 것은 2인칭 대명사인 <당신>이라는 용어입니다. 현재 젊은이들이 너무 가볍게 사용하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오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또한 악에서도 건지시옵소서,
이는 나라와 권세와 권능과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이니이다. 아멘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송영은 이러한 뜻입니다.
1)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될지어다.. 왜냐하면 나라가 아버지의 것이기에.
2)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할지어다 ..... 왜냐하면 나라가 아버지의 것이기에.
3)아버지의 뜻이 ... 이루어지이다 ..... 왜냐하면 나라가 아버지의 것이기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의 것입니다. 주여! 이것을 믿을 때 나는 기쁩니다.
내 기도 하나님이 들어주심을 나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을 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자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로부터 날마다 얻을 줄을 확신합니다. 이러한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그 하나님을 위해 사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 앞에서의 금식: 금식의 진정한 의미(마6:16-18)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녀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16-18)
금식은 왜 하는가? 종교심을 가지고 음식을 굶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금식은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금식에 관한 중요한 교훈들을 주고 있다. 성경은 금식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금식이 아니라면 하나님께 영광은커녕 도리어 욕이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미 없는 그런 금식 행위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설령 인간의진심 어린 종교성에 의한 금식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이 아니면 의미 없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절기에 따라 금식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여전히 구약의 가르침에 따라 금식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종교적인 열성을 가진 자들은 금식하기를 즐겨 했다{녹 18: 12. 참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신앙을 인정 받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부지런히 금식함으로써 자기가 얼마나 율법을 잘지키고 있는지 보여 주려고 했다. 그것을 통해 열성적인 종교인으로서 자기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인가 하는 점을 지적하신다. 그들은 금식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것을 통해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가식적인 자들이라고 질책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금식을 하면서 슬픈 기색과 더불어 얼굴을 흉하게 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이 금식중인 그들을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금식하는 구별된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함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의미 없는 금식을 하지 말도록 당부하신다. 그런 금식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증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금식을 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아니라 성도들의 금식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금식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며 그 행동이 개인의 종교적 신앙을 확인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이스라엘민족에게 있어서 금식은 메시아와 연관된 구속사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금식은 개인적 판단이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절기와 연관되는 것이다.
우리는 금식에 관련된 성경의 내용들 가운데 이사야서에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 금식 에 관련된 본질적인의미를 살펴 보아야 한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님께서 너희를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 받는 사림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4- 7, 표준새번역)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은 금식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음식을먹지 않으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깔고 앉아 스스로 괴로움을 겪는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를 하나님께서 연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금식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욕망을 좇아 실아 가는 백성을 책 망하고 계신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자기의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서 여전히 또 다른 자기 목적을 추구하기위해 이웃과 다투며 싸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으로서 그와 진정한 폐를 원하는 금식이라면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금식이라면 아무리 음식을 먹지 않고 대단한 종교적 성의를 보인다 할지라도 무의미한 것이다.
특히 4절 말씀에서 우리가 눈 여겨야 할 점은 다투고 싸우며 주먹질하는 자들에 관한 기록이 민족적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금식하는 기간 중 실제로 그런 싸움을 하는 자들은 전체백성 중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다수 백성들은 조신하게 금식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일반화하여 질책하고 있다. 이는 그것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 문제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58장 6, 7절에서 금식의 본질에 관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신다. 6절 에서는 금식이 음식을 먹지 않는 문제를 넘어서는 개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 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금식하는 것과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의 의미가 어떻게 서로 연결 된다는 말인가? 우리가 명확히 깨달아야 할 점은 단순히 음식을 금하는 것이나 일반적인 구제 차원이 아니라 메시아를 소망하는 이스라엘의 구속사적 의미이다.
또한 7절 말씀에서는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것,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 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라고 말씀 하신다. 이 역시 개별적 자선적 구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적 배려와 관련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실 메시아만이 그 모든 것을 온전히 해결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이해해야 할 점은 금식이 메시아 사역과 직접 연관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다‘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며 ,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 압제 받는 사람을 놓아주며,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일’은 오직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그놀라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금식의 목적은 메시아 사역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리고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며,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며, 고통 받는 골육에게 평강을 주는 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는 일은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민족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금식을 통해 언약의 백성을 위해 무언가 하려 할지라도 인간의 나약성을 깨달을 따름이며 결국 모든 것을 해결 하시게 될 메시아를 소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백성에게 금식을 요구하선 핵심적인 의미는 바로 그것이다.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 금식은 자기의 종교 생활일뿐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금식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금식하는 방법을 가르치신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금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금식하라는 일종의 지침을 주신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금식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역겨운 것인가 하는 점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금식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 2:18-20).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금식이 있었던 것은 구약적 언약 개념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위에 소개한 것처럼 마가복음에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한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우리가 명확하게 이해 해야 할 점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행한 금식은 언약적 의미를 동반한 올바른금식이었다는 사실이며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의미 없는 잘못된 금식 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음식을 먹지 않고 금식했는데 , 왜 한쪽은 올바른 금식을 한 것으로 인정받고 다른한쪽은 인정 받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를 이해하기 위해 금식의 의미가 그리스도께 맞추어져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즉 금식은 배고픈 자신에게 일차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며 가난한 이웃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은 메시아를 소망하며 그로 인한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는 금식이었던데 반해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자기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메시아와 연관되지 않는 금식은 아무리 많은 애를 쓴다 할지라도 무의미한 종교 행위일 따름이다. 즉 메시아를 소망하는 구속사적 의미가 동반 되지 않은 금식은 의미 없는 종교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가복음의 본문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음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이는 일상적인 금식이 아니라 절기와 연관된 금식 기간에 있었던 일로 이해된다. 즉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금식할 때 유독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그 규례를 파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께서 그 완성된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그 문제에 대해 질문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은 금식할 필요가 없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는 구약시대 때 요구되는 금식의 의미가 메시아와 연관 되어 있으며 이제 메시아가 도래한 상황에서는 그 의미가 성취되어 더 이상 금식이 필요하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혼인 잔칫집의 신랑과 손님들을 비유로 말씀 하시면서 잔칫집에서 금식할 필요가 없음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멈추게 하는 말씀이 뒤따라 나온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 2:20),
여기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랑을 빼앗길 날’ 이란 주님의 고난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난 당시와 직후에는 일시적으로 금식하라는 말인가? 아니면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십자가 사역이 있은 이후부터 금식을 재개 하라는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지금 금식에 관해 중점적으로 말씀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다. 만일, 신랑을 뺏기게 될 때 금식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게 되면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실 때인 잠시 동안만 금식을 하고 부활하신 이후로는 다시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또 다른 논리가 성립된다.
주님께서 나중에 금식할 날이 온다고 하신 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진정한 금식의 의미를 모르면서금식을 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즉 나중에 금식할 때가 온다는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교훈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슬픔,곧 구약시대의 금식의 의미가 완성되는 때를 염두에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또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금식은 사도교회 시대의 특별한 금식이다. 신약성경에는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금식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13장에는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에게 특별한 주님의 일을 맡길 때 금식한 기록{행 13:2, 3)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전파를 위해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의 안디옥 지역을 여행하는 중 그곳 장로들과 함께 금식 기도한 내용(행 14:21-23)이 나온다. 그것은 사도교회가 온전한 성령님의 뜻을 찾기 위한 방편 이었으며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 사도들과 교회가 율법에 관해 구속사적 특별한 위치에 놓여있었음을 잘 기억하고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사도들은 여전히 기도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으며(행 3:1),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행 2:46), 필요에 따라 결례를 행하기도 했다{행 21:24-26}.
그러나 사도들과 교회는 구약의 모든 규례들을 율법적으로 지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교회의 정착을 위한 율법의 의미가 사도시대 교회 가운데 특별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사도시대의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금식한 내용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는 어떤가? 우리 시대에도 교회와 성도들은 금식할 필요가 있는가? 신랑이 우리와함께 있는데 우리는 금식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신약시대에 금식하라고 가르치신 것이아니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특별히 금식할 필요가 없다. 혹 금식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언약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단순한 행동일 따름이다. 이는 금식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특별히 영광을 돌리려 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가르쳐진 교훈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성도들이 금식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이 특별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공급하시는 음식을 풍족히 먹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또한 성도가 여행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것 자체를 통해 하나님께 특별히 영광이 돌려지는 것이 아님과 동일하다.
우리시대에 많은 교인들이 금식 하는 것을 종종 본다. 한끼 음식을 거르고 돈을 아껴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괜찮은 행동이다. 항상 배부르게 먹어 정신이 혼탁해졌다고 생각될 때 몇 끼 금식함으로써맑은 정신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우리 시대의 금식은 성경에서 언급 되고 있는 금식의 언약적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행위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우리 주변에 7일 금식기도’, ‘40일 금식기도’ 등을 함으로써 종교적 의미를 찾으려는 기독교인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서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의미를 지니지는않는다. 그것은 도리어 자기 의를 채우려는 위험에 빠질 우려마저 있다. 굳이 7일 금식, 40일 금식이아니어도 성도들 가운데는 개인과 가정의 어려움이나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 금식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금식은 성경에 나타나는 구속사적 의미 가운데서의 금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 해야 한다.
성경에 금식에 관한 기록들이 많이 나오지만 모든 금식은 메시아와 연관된 구속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단순히 개인의 종교적 신앙심 자체에 관심을 집중할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사탄과 싸우신 내용은 구속사의 의미를 완성하신 메시아 사역이며 우리가 본으로 삼을 수 있는 일반적인 사건은 아니다. 우리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가운데 율법으로 요구되었던 금식의 의미를 올바르게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과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기도로 염려가 없어지지 않는다 (마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염려를 지고 가는 인생
미국의 일간 신문은 독자로부터 질문을 받아 인생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칼럼이 꼭 있다. 그런 상담가인 론 애슐리씨가 전국에서 오는 그 수 많은 상담 편지의 주제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염려’라고 했다.
인생은 염려로 시작하여 염려로 끝이 난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엄마 젖만 먹고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도 되는 갓난 아기도 염려한다. 배 부르고 잠 잘 잤고 기저귀도 갈아 주었는데 까닭 없이 울고 보채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엄마 태 속에서 안전하게 있다가 세상의 온갖 위험에 신체가 노출되므로 그 시기는 본능적으로 조금만 불편해도 불안을 느끼게 되어 있다. 세상에 적응 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이므로 그럴 때는 억지로 달래려 하지 말고 조금 울게 내 버려 두는 것이 낫다. 또 사람은 죽기 직전에도 죽음이 가져 올 고통을 두려워 하고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닥칠까 몰라 불안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염려를 짊어지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해 교회에 출석하는 계기나 믿고 난 후 신앙 생활의 중심도 따지고 보면 염려를 없애고 평강을 얻으려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직접 신자를 대면하여 주시는 말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 아니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가? “두려워 말라”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나 신기하게 성경 전체에 두려워 말라는 말이 365번 나온다. 일년 365일 힘든 일의 연속으로 염려가 끊이지 않으며 신자도 예외가 아니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러분은 어떻게 염려를 없애는가? 다른 바쁜 일에 몰두해 잊어버리려 하는가? 염려거리 자체를 아예 망각하려고 노력하는가?
청계천에서 빈민 선교하셨던 김진홍 목사님이 유신시절 반정부 데모를 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한 겨울에 감방 안이 너무 추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성경에서 불이나 뜨거운 것에 관한 기사를 처음부터 한 절씩 찾아 읽으며 추위를 이기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그 차가운 시멘트 바닥과 벽이 온돌 방처럼 뜨끈뜨끈해지는 성령체험을 했다는 간증을 한 적이 있다.
우리도 성경에 365번 적혀 있는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매일 한 절씩 찾아 읽으며 간절히 기도하면 염려가 없어지겠는가? 지난 경험에 비추어 기도하고 말씀보았더니 염려가 없어졌는가? 아니면 기도하고 말씀 본 적이 별로 없어 잘 모르겠는가?
미래는 하나님의 소관
대부분의 신자들은 큰 일이 생겨야 기도한다. 그러나 고난이 이미 발생한 후에는 힘들고 불편하고 짜증은 나지만 염려는 없어진다. 더 이상 고난이라 할 수도 없다.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지고 진행 과정도 알 수 있고 어느 정도 결과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간혹 구체적인 원인과 결과를 도저히 모를 때도 있지만 어쨌든 고난이 발생한 후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고난을 이겨내는 일만 남는다. 미국 이민 생활에 아파트 렌트비나 집 페이먼트가 모자라는데 집에 가만히 앉아 기도만 하고 있다면 살짝 맛이 간 사람임에 틀림 없다.
염려의 대상은 근본적으로 이미 일어난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우리 아이가 남들 아이보다 미숙한 아이가 되면 어떻게 하나? 애인이 변심하면 어떻게 하나? 직장에서 해고당하면 어떻게 하나? 245 I 조항이 영영 다시 발효되지 않고 불법체류자 단속이 더 강화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 즉 미래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돈으로 세상 만사를 떡 주무르듯 할 수 있는 재벌 회장이나 정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대통령이나 심지어 평생을 미래 예측만 연구하는 미래 연구가도 알 수 없다. 먼 장래가 문제가 아니라 단 5분 10분 앞도 내다 보지 못한다. 19세기 말의 미래 연구가들이 인터넷이나 유전자 공학 기술이 개발 되리라고는 꿈도 못 꾸었고 10-20년 후에 등장할 공산주의마저 예견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은 통제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야 준비하고 대책을 세워 연습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 밖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18세기의 불란서 영성 신학자 프랑소와 페네롱은 “미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오직 그 분만이 주관하신다”고 너무나도 당연하면서도 우리가 잘 잊고 있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것으로 그쳤다면 평범한 말이었을 텐데 “그 분의 마음을 미리 추측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이 365번 나온 것은 근본적으로 매일이 염려의 연속이라는 뜻일 뿐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기의 죄를 씻고 영혼의 고통을 덜어내지 않고 자유와 평강과 능력을 맛볼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살려면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 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도 받고 보호 받는 길 뿐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이 추측해서 대책을 세울 수 있는 방도는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 삶을 맡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기도할 수 밖에 없다. 고난이 닥쳐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닥치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예측과 통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기도해야 한다.
인생으로 따지면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하루로 따지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걱정거리 투성이므로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뿐이다.(살전5:17) 불신자는 인생을 염려로 시작해 염려로 마칠 수밖에 없지만 신자란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칠 수 있는 자다.
고난은 나의 친구
그럼 다시 처음 제기 했던 질문을 해보자. 과연 기도하면 불안, 염려, 초조가 없어지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모두 경험했듯이 기도할 당시 뿐이지 않는가? 조금 염려가 줄어든 것처럼 느껴지다가 얼마 안가 전과 같아진다. 그러다 뾰족한 수가 여전히 보이지 않으면 이제는 다른 염려가 더 겹친다. 하나님이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지? 내가 죄를 지어서 그런가? 지난 주일 교회 오지 않고 오랜만에 골프 치러 갔더니 하나님이 노하셨는가? 그래서 믿음으로 이기려 찬송가 테이프도 틀어 놓고 '믿슙니다' 하며 더 뜨겁게 기도하고 의지적으로라도 이기려 해 보는데도 나아지지 않는다.
신자가 믿음이 약해지거나 죄를 지어서 염려가 없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미래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다. 하나님이 왜 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빨리 응답을 받고 싶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미래를 자기의 예측 가능한 가시(可視) 거리 안에 두고 싶어 안달한 셈이다. 하나님에게 어서 빨리 내가 통제 할 수 있는 사정권 안에 미래가 들어와야 한다고 요구한 것과 같다.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그 분께 완전히 맡겨야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인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염려의 연속이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라는 것이다. 내가 믿었으니 그렇지 않으리라 혹은 그렇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만큼 착각은 없다. 염려가 생기고 불안하며 형통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불신앙이라고 생각하는 데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가장 큰 불신앙이다. 믿음이란 미래를 하나님의 손 안에 맡기는 것이지 믿음을 이용해 미래를 내 입맛대로 조종하려는 것은 믿음이 아닐 뿐 아니라 가장 교만한 죄악이다.
목사도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을 수 있다. 정말 신실하고 남에게 손해 한 번 끼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자기 가진 것 희생하며 남을 섬기고 도와 준 사람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불행을 겪는 경우도 얼마든지 많다. 그것도 당사자 본인이 겪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하나 뿐인 아들이 희귀한 병에 걸려 옆에서 부모로서 쳐다보지도 못할 고통에 신음하며 죽어간다. 그 고통을 들어주는데 부모로서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기도해도 묵묵부답일 때도 있다.
이것은 신자의 잘못이 아니며 하나님의 심술도 아니다. 공중 권세 잡은 사악한 사탄이 교묘하고도 치사하게 인간과 이 세상을 조종한 것이다. 불신자는 영혼이 전적으로 부패해 있으며 신자도 아직도 더럽고 추한 죄의 본성이 영혼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잘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모든 인간의 죄와 사탄과 세상이 합작하여 만들어 낸 결과다. 이 세상은 썩어 무너져 내려가고 있으며 흑암의 세력에 눌리고 묶여 있다.
울리버 윈델홈즈란 분이 “만일 내가 고난을 피할 수 있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내 자식에게는 절대 가르치지 않겠다. 고난을 이겨내는 힘은 고난 만이 만들어 낸다. 고난은 친구처럼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 인정하기 싫고 신자가 된 후는 더 인정하기 싫지만 인생은 고난의 연속임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일들이 잠시 쉴 틈도 주지 않고 밀려 온다. 우리 쪽의 형편과 사정을 봐 주는 법이 없다. 하나가 끝난 것 같으면 바로 다음 것이 오고 어떤 때는 한꺼번에 여러 개가 겹친다. 염려가 그치지 않는다는 것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다. 미친 사람과 바보 두 사람을 빼고는 말이다.
돈을 벌면 누구나 하는 일
미래는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인트도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않으셨다. 기도하고 말씀 보아 염려를 없애라고 하지 않았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기도와 말씀을 등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염려를 없애는 근본적인 대책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염려 전부를 부정하여 아예 아무 염려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오해를 마셔야 한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이 물질에 불과하고 형이하학적이라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들이 신자가 쳐다보지도 말고 구하지도 말아야 할 사악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강조하는 포인트는 본문 후반부에 있는 대로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을 염려하라는 것이다. 당장 아파트 렌트비 몇 백불 모자라는 것과 직장에서 해고 당하는 것 중 어느 것을 더 염려해야 하는가? 아이 공부 잘하고 못하고보다 나중에 마약을 하며 갱단에 휩쓸릴까 더 염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장이 회사 부도나는 것과 자기가 암에 걸리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택하겠는가?
예수님의 뜻은 염려하는 순서를 분명히 정하라는 것이다. 인생이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고 염려가 끝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미래를 예측하고 염려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통제해서 염려를 없애려 한다.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으며 신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을 보아도 불안이 끊일 수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어차피 염려가 끝이 없다면 큰 염려부터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염려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염려하는 순서를 정해서 마땅히 염려해야 할 것부터 염려하는 길 말고는 없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셨다. 앞(19-24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이유 내지 근거가 되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셨다. 하나님과 재물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선택하라고 했다. 만약 하나님이 중요하면 재물은 덜 중요하게 되고 재물이 중요하면 하나님이 덜 중요하게 되므로 당연히 자기 마음이 가는 곳에 보물을 쌓게 된다.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더 중요하고 목숨과 몸을 보호하고 유지해준다고 생각하면 그런 것들이 부족하면 필연적으로 염려하게 된다.
예수님은 지금 신자들더러 “네 인생의 중심이 무엇이냐? 분명한 삶의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느냐? 무엇 때문에 먹고 마시고 입는가? '너'라는 존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이 땅의 삶을 영위하는가? 인생의 소망과 비전과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대로 생각하고 염려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믿었다고 해서 평강이 속에서 항상 샘솟듯 하고 무슨 환각제 먹은 것 같이 비몽사몽 간에 구름 위를 걸어가는 듯이 염려 불안 하나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법은 절대 없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단지 불신자 시절과는 그 염려의 순서가 정 반대로 바뀌었다는 것 뿐이다.
삶에서 진정으로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인지, 참 인간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알게 되어 그것을 위해 염려하는 자로 변한 것이다. 인생이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으며 돈으로 쌓을 수 있는 것 이상의 가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게 된 것이다. 진정으로 두려워 할 것을 두려워 할 줄 알기 때문에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은 이제 더 이상 안 중에도 없게 된 자가 신자다. 더 큰 갈등과 고민을 갖게 됨으로 그 염려의 질과 내용이 바뀌었다.
인생에서 돈이 주는 유익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제공하는 풍요로움은 일시적인 편안한 삶은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좀과 동록과 도적이 들어 썩어지게 마련이다. 진정으로 인간의 영혼과 전 존재가 살고 죽는 것과는 아무 관계 없고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죄를 씻어 주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길만큼 시급한 일이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 품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공급 받으며 사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모든 인생이 백이면 백 돈을 벌고 나면 꼭 하는 일이 있다. 남자는 바람 피우고 여자는 사치하는 것이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의 걱정이 없어지고난 후 그 다음에 가치 있는 일을 모르니까 당연히 따라가는 순서다.
걱정하는 순서를 정하라
염려의 성경적인 뜻은 불안하고 초조해져 손에 땀이 나는 식의 감정적 생리적 현상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지성적 의지적 의미를 갖고 있다. 생각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을 말한다. 걱정하는 우선 순위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저 이것도 걱정, 저것도 불안하여 인생에 향방이 없어 단지 오늘 하루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만 염려한다. 365일 염려로 시작해 염려로 끝난다.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사탄과 죄악에 조종당하며 산다.
하나님 안에 자기가 갈 길이 분명히 정해져 있는 자는 진정으로 죽고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오직 그것만 걱정하니까 나머지는 자연히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죄송하지만 순전히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하겠다. 저는 솔직히 돈 걱정은 거의 하지 않는다. 절대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현재도 매달 적자다. 대책을 세우지도 않고 별 염려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때에 맞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공급해 주셔서 정말 아슬아슬하게 꾸려가게 해 주신다. 대신에 진정으로 가장 크게 걱정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께 소명 받은 일을 제대로 다 이루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를 끝없이 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 낭비하는 것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 동안 허송세월하며 보낸 것만큼 후회 되는 일이 없다. 다른 사소한 염려가 끼일 틈 새가 없다.
사람의 앞날은 분명히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며 염려거리 자체를 다 없앨 수는 절대 없다. 불신자도 믿음과 상관없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어지간한 상식을 가지고 인생을 조금만 살아 본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도 나름대로 먼저 걱정할 순서를 정해 놓았고 각 자 나름대로 그 대비책을 세워 놓고 산다. 권력, 학식, 집안 배경, 건강, 자신의 배짱, 종교, 심지어 점쟁이나 폭력도 의지한다.
그러나 그들 인생살이의 결론은 한결 같다. 하나님과 자기 삶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하나님과 예수가 밥 먹여 주나 차라리 내 주먹을 믿고 말지다. 오직 관심은 밥 많이 먹는 것 뿐이며 금고 속의 돈이 내 목숨을 살리고 몸을 보호해 준다고 믿는다. 걱정하는 우선 순위가 첫째도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요 둘째도, 셋째도 전부 그것이며 그 염려를 없애 줄 수 있는 돈 뿐이다. 그래서 저들의 염려 순서는 자나깨나 돈이다.
신자는 어떠한가? 여전히 세상에서의 삶은 궁핍하고 힘들어 염려가 끊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도저히 움치고 뛸 수도 없는 궁지에 몰린다. 가끔 스스로 죄악과 유혹에 넘어져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를 겪든 돈이 해결사가 아니라 최후에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 뿐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미래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맡기게 된 자다.
신자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들리고 손에 잡히는 일들이 자기 인생의 실체(reality)가 아님을 안다. 비록 그것들이 자기의 기대와 예상과 심지어 기도한 것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정 반대로 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렇다. 대신에 신자가 붙들고 있는 삶의 유일한 실체는 그런 와중에도 엄연히 하나님은 자기와 함께 하셔서 당신만의 계획을 갖고 자기 삶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염려거리로 가득 차 있지만 십자가에 독생자를 죽이시면서 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일년 365일 단 하루도 빠짐없이 신자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결국은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기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추측하려는 것이 신자의 염려거리가 되어선 안 된다. 정작 염려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이 포함되어져 있는 지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내고 있는가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을 분명히 확신하고 그 일을 이뤄내고 있는 지부터 두려워 해야 한다.
기도란 하나님께 간구하여 자기 염려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장 먼저 걱정해야만 하는 일을 하나님과 함께 걱정하는 것이 기도다. 나아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우리 인생들과 나 자신을 위해 갖고 있는 걱정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 기도다.
본 단락의 마지막에 예수님은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미래는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고유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대신에 인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셨다.(마6:34)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주기도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의 모범이다. 기도는 창조주이시며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그런 점에서 주기도문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신앙고백서이기도 하다. 기도는 단순히 입으로 하는 것만이 아니다. 기도한 그대로 실천해야 바른 기도이다. 예수께서 실천이 없는 기도는 이방인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라고 경고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마 6:7).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내용 중 하나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다. 그것은 우리가 드릴 기도 내용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가를 보여준다. 이 기도를 통하여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중심 메시지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다.
첫째로, 하늘에서부터 땅으로의 방향성(方向性)이다.
우리의 기도는 땅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바른 기도는 하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기도는 나의 생각이나 계획을 하나님께 보고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분별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기준과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도 바른 신앙생활의 기본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2)고 권면하였다.
둘째로는, 하늘과 땅의 상합성(相合性)이다.
하늘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신앙 안에 하늘과 땅의 만남이 함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즉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과 함께 어우러지는 이중 합창곡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탄생하셨던 첫 번째 성탄절에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하늘의 기쁜 소식을 이렇게 전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성탄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께서 땅의 기쁨이 되시기 위하여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성육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삶의 참 기쁨과 행복으로 하늘의 영광을 선포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궁극성(窮極性)이다.
우리의 기도를 궁극적으로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세심하게 들어 주실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하여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는 분’이시다(시 121:4). 하나님은 우리들 보다 앞서 기도의 응답을 준비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부르기 전에 응답하시고 말을 마치기 전에 들으시는 분이시다(사 65:24).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미리 다 알고 계신 분이시다(마 6:32).
우리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그것은 소극적 차원의 수동적 기다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삶을 맞추며 그 뜻을 실천하는 적극적 차원의 기다림이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기다림이 삶의 원동력이 되는 그런 기다림이다. 기다릴 있다는 것 자체가 기도의 우선적 응답일 수도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바라보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권혁승 교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더 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그러므로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너희는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 그러므로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다른 본문도 그러하거니와 이 본문 역시 교회적 공개념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할 바는 이 말씀이 성도들 개개인의 삶에 관한 문제이기에 앞서 전체 교회에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언약 공동체로서 교회는 상당한 염려 기운데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세상과 상이한 가치관으로 인한 핍박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교회가 세상에서 힘든 상황 가운데놓이게 될지라도 미래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로 인해 염려하지 말라고 요구하신다. 그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의 삶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몸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문제들에 대해염려하지만 그것으로써 영구적인 삶을 보장 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그런 삶을 살면서 헛된 인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과 ‘너희’ 곧 제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과 제지들 사이에 매우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언약적 관계가없는 하잘것없는 미물들에게도 섭리로 먹이시고 입히신다. 공중의 새를 배불리 먹이시고 들에 핀 꽃을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의 삶에 무관심 하실 리 없다.
주님께서는 농사와 추수를 하지 않는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며 수고와 길쌈을 하지 않는 들의 백합화에게 솔로몬보다 화려한 의상으로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의 삶에 무관심하지 않음을 말씀하고계신다. 미물들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진정한 생명을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두고 계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두고 그것을 위해 간구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런 일상적인 문제에 대해 아무 염려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는 의식주와 관련된 것으로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과 연관된다. 주님께서는 그 중요한 것에 대해서 아예 간구 조차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며 구해야 할까?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떤가? 주님께서는 의식주 문제마저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사치스런 것을 바라며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주님께서 구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을 구하면서도 그것을 도리어 믿음이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것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성경은 그런 것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행하는 잘못된 종교 행위라고 분명히 말씀하고있다. 보잘것없는 미물들마저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 완벽한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이 자기 자녀에게 있어야 함을 미리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 없는 자들처럼 그런 것들을 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먼저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신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의 나라’는 무엇이며 ‘그의 의’는 무엇인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는 그 성격이 정 반대적이다. 즉 두 나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다. 그 두 나라 사이에 본질적으로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 나라를 거부하는 주님 의 백성들은 괴로움 가운데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즐거움으로 살아가게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의’ 가 이 세상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 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 발생할 수 없는 것이다. 죄악 된 세상에서 생성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불의’ 한 것들이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 자체로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의롭지 않은 불의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바는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의’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아 전혀다른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은 의로우며,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불의하다는사실이다. 그것이 설령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의 눈에 온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것이며, 반대로 설령 인간들의 눈에 좋고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불의한 것이다. 즉 의와 불의에 대한 판단의 근거와 기준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 한 분만이 의로운 존재이며 그로부터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 홀로 의로운 존재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요구를 단순히 상징화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국 관념화로 이어지게 되며 자기와 상관 없는 글귀로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먼저’라고 하는 말은 순서나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 이 아니다. 즉 우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그 다음에 각자가 원하는 것을 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이 구할 것은 바로 ‘그것’ 이라는 의미이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영원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와 연관 될 때 자기 백성 가운데서 발생하게 된다. 우리가 또한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할 점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가운데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다양한 속성이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으며 자기 백성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들어 있다. 그 모든 것들은 온전히 주님께 속한 것이며 이 세상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자에게 ‘이 모든 것’을 더 하시겠다는 약속의 의미는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주님께서 일반적으로 일 걷는 세상의 복을 제자들에게 약속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소위 말하는 물질적 복이나 자식의 복 등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을 덤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소망하는 자들의 모든 삶을 주님께서 전적으로 책임 지시겠다는 궁극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통해 분명히 증거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34절)고 하신 말씀에서 하나님께 속한 백성은 날마다 괴로움 가운데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주님의 교회는 이 세상에서 평화와 안정된 삶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연 모든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날마다 괴로움에 빠져 살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일부 성도들은 괴로운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성도들도 다수 있다. 많은 성도들은 평안을 누리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마치 모든 성도들이 날마다 괴로움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처럼 말씀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일부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말씀인가?
우리는 이 말씀을 전체 공 교회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지체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세상은교회를 배척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가치가 다른 세상 가운데 살면서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 가운데서 오늘의 괴로움에다 내일의 염려까지 더해 오늘의 괴로움을 가중시키지말도록 요구하고 계신다. 천국에 속한 주님의 백성은 지나가는 이 세상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존재이며 인생은 마치 안개와 같이 잠시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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