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과 빛의 비유와 율법의 완성자(마 5:13-20)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영향과 선하고 거룩한 율법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대한 중요한 책임을 주로부터 부여받았다. 이 책임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가가 기준이 된다. 주께서는 매우 구체적인 표현으로 아무도 무시해서는 안 되는 책임 범위를 명시하셨다. 또한 본문에서 주님은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이해와 관련하여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1. 세상의 소금과 빛(13-16절)
소금과 빛에 관련하여 사용된 '세상'(kovsmo"코스모스)은 땅을 의미하지 않고 세상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가 어두울 때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어느 때보다도 중시된다.
1) 세상에 대한 책임과 변질에 대한 경고
(JUmei'" ejste to; a{la" th'" gh'": eja;n de; to; a{la" mwranqh'/, ejn tivni aJlisqhvsetai휘케이스 에스테 토 하라스 테스 게스 에안 뎉 할라스 모란테 엔 티니 할리스데세타이, 13절)
할라스(a{la")는 호머(Hommer) 이후로 소금을 뜻하며, 시적으로는 바다를, 속담으로는 오랜 친구들을 의미한다. 소금이 양념과 방부제로서 지니는 특성과 의약상의 가치는 오늘날만큼이나 고대 세계에서도 보편적인 것이었다. 헬라 사람들은 소금을 '신과 같은 것'(Qei'n, 데이온)이라고 하였다(W.Barclay). 라틴시에는 "태양과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Nil utilius sole et sale)라는 구절이 있다. 예수 당시에 소금은 순결을 연상케 하였고, 가장 일반적인 방부제였으며, 음식에 맛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유용한 사람들로 인정받아야 하고, 삶의 기쁨과 행복을 전달해 줘야 한다(롬15:2갈5:22,23). 에안(ejavn만일)은 종속절의 초두에 오는 접속사이며, 가정법과 함께 사용되는데 어떤 환경하에서 기대되는 바를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모란데(mwranqh'/그 맛을 잃으면)는 모라이노(mwraivnw어리석은 것을 드러내다, 무미하게 만들다)의 단순과거 가정법 수동형으로 일회적으로 발생하는 동작을 나타낸다. 따라서 '맛이 없어진다면'이라는 의미가 된다(A.T.Robertson). 수리아와 팔레스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가운데 하나는 소금이 그 독특한 맛을 잃어 버려진 채로 쌓여 있는 모습니다(B.Scotts).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도 이처럼 변질될 가능성이 다분하므로 세속과의 타협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 필요하다(약4:4).
2) 세상을 비추는 빛
(JUmei'" ejste to; fw'" tou' kovsmou휘메이스 에스테 토 포스 투 코스무, 14절)
코스모스(kovsmo"세상)는 '세계, 인류'를 의미하는데, '우주'로서 쓰인 이 단어의 첫 번째 용례는 우주 자체보다는 오히려 전체성을 이루고 있는 질서를 가리키다가 후대에 이르러 이 질서에 의해 이루어진 우주를 가리키게 되었다(H.Sasse). 계시의 빛이 없을 때 이 세상은 영적인 암흙 상태가 된다(Smith).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의 영역이 어두움의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중시된다(엡5:11). 포스(fw'"빛)는 문자적 의미에서 전이되어 '착한 행실'을 가리킨다. 빛은 보는 매체이고 보아야 할 목표이다. 빛은 자유, 구원, 희망을 가져다 준다. 영적 빛은 하나님의 현현을 동반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자녀들(엡5:8)이므로 빛의 열매를 내도록 힘쓰는 것이 마땅하다. 의로움과 착함, 진실함으로 세상을 비추지 못하면 사람들은 여전히 영적인 흑암 가운데서 행하게 되어 있다(엡6:12).
3) 모든 사람에게 비치는 등불
(uJpo; to;n movdion ajll! ejpi; th;n lucnivan, kai; lavmpei pa'sin toi'" ejn th'/ oijkiva/. ou{tw" lamyavtw to; fw'" uJmw'n e[mprosqen tw'n ajnqrwvpwn휘포 톤 모디온 알 에피텐 뤼크니안 카이 람페이 파신 토이스 엔 테오이키아 후토스 람프사토 토 포스 휘몬 엠프 로스덴 톤 안드로폰, 15,16절)
휘포(uJpo;)가 장소에 대한 목적격과 함께 쓰일 때 일반적 의미의 '아래, 밑에'라는 뜻과 세력, 통치, 지배, 명령 등의 '아래'를 의미한다. 모디오스(movdio"말)는 곡물을 되는 용기를 가리킨다(W.Baner). 이 예화는 가난한 농가의 생활상과 관계가 있다. 그 집은 방이 하나뿐이어서 조그마한 등 하나로 집안 전체를 밝히기에 충분하였다(F.F.Bruce). 등불을 말 아래에 두는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은둔코자 해서는 안 된다. 세상 속에 주를 증거해야 한다(행1:8). 오이키아(oijkiva/집)는 오이코스(oi"집)보다 좁은 의미로 쓰여서 오로지 집만을 가리키나 신약은 이 단어를 집뿐 아니라 가옥을 지칭할 때에도 사용하고 있다(10:12). 심지어는 '재산'을 가리키기도 한다(막12:40). 람프사토(lamyavtw비취게 하여)는 람포(lampw비취다)의 부정과거 명령법으로 비취게 한다는 어떤 사건, 사실에 대한 동작을 명령한다. 이는 예수의 제자들이 처신해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하여 하늘 아버지로부터 받은 빛을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비취도록 허락된 사람들이다(Tdnt). '람프사토'가 명령형이라는 사실은 주의 권고가 지닌 권위와 비중을 잘 알게 한다. 등불을 켜는 목적이 집안을 밝게 비추는 것이든, 주께서 성도를 새로 지으신 목적 중 어느 하나도 이 세상의 어두움을 내어 쫓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빛을 비추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다. 빛의 근원이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Smith).
2.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신 그리스도(17-19절)
율법에 관한 주의 교훈은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율법의 영원성을 제시하시며, 여러 번에 걸쳐서 유대인들이 소위 율법이라고 규정한 것들을 파괴하셨음에도 랍비들이 넘어설 수 없는 외경심을 가지고 율법에 대해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W.Barclay).
1) 율법을 완전케 하려 오신 예수
(Mh; nomivshte o{ti h&lqon katalu'sai to;n novmon h] tou;" profhvta": oujk h&lqon katalu'sai ajlla; plhrw'sai메 노미세테 호티 엘돈 카탈뤼사이 톤 노몬 에 투스 프로페타스 우크 엘돈 카탈뤼사이 알라 플레로사이, 17절)
노미세테(nomivshte생각지)는 노미조(nomivzw생각하다, 간주하다)의 단순과거 가정법으로 본문에서는 부정사 mhv(메;아니)와 함께 명령이나 권고를 표시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과격주의, 율법 파괴주의자로 오해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옳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그분에 대해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사사건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곤 했다. 카탈뤼사이(katalu'sai페하러)는 카탈뤼오(kataluvw파괴하다, 무효케 하다)의 단순과거 부정사인데, 부정사는 목적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그리스도는 구약 전체를 일컫는 율법과 선지자를 무효케 하고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의 행동이 율법학자의 행동과 상치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되, 율법이나 예언을 무가치하다고 폐기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사34:16).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신약이 나오기까지는 구약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플레로사이(plhrw'sai완전케 하려)는 단순과거 부정사로서 목적의 의미로 쓰였다. 주께서 자신을 율법의 완성자로 말씀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다만 형식적으로 지킨 것과는 달리 본래의 의의(意義)대로 완전히 이루고자 오셨음을 공포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은 완성하고 그것이 나타내려고 하였던 깊은 의미를 완전히 보여주시려고 오셨다(McNeile).
2)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율법
(ijw'ta e}n h] miva keraiva ouj mh; parevlqh/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우 메 파렐테, 18절)
이오타(ijw'ta일점)는 희랍어 모음문자(i)이며, 히브리어 알파벳 가운데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드(y)를 표시하기 위해 쓰였다. 케라이아(keraiva뿔, 획)는 글자의 한 부분으로서의 '뿔, 모양 혹은 돌출부)를 가리킨다(W.Bauer). 파렐데(parelqhv/없어지지)는 파레르코마이(parercomai지나가다, 사라지다)의 단순과거 가정법으로 단순한 과거 사실을 나다낸다. 우 메(ouj mh;:반드시…아니하고)는 미래의 사건을 가장 결정적으로 부정한다. 여기서 이 말은 알파벳의 이오타(i)도, 쉼표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Moffat).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이다(딤후3:16).
3) 계명을 대하는 바른 태도
(luvsh/ mivan tw'n ejntolw'n touvtwn tw'n ejlacivstwn kai; didavxh/ ou{tw" tou;" ajnqrwvpou" ... poihvsh/ kai; didavxh/, ou|to" mevga" klhqhvsetai뤼세 미안 톤 엔톨론 투톤 톤 엘 라키스톤 카이 디닥세 후토스 투스 안드로푸스…포이에세 카이 디닥세 후토스 메가스 클레 데세타이, 19절)
뤼세(luvsh버리고)는 뤼오(luvw풀다, 깨뜨리다, 폐지하다)의 단순과거 가정법으로 '버린다'는 사실 자체를 표현하고 있다(W.Bauer). 엘라키스톤(ejlacivstwn지극히 작은 것)은 미크로스(mikro"작은)의 최상급으로 '가장 작은 것'을 가리킨다. 엔톨레(ejntolhv계명)는 계명이나 율법을 의미한다. 주께서 주신 계명은 인간의 객관적인 평가에 관계없이 모두가 권위있고 가치를 지닌 것이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율법의 특별한 명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일 때 매우 엄숙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G.Schrenk). 히브리어에서는 주로 미츠바(hb;zmiCommand)나 페쿠딤(mydiWqP]Precepts of God)의 번역어로 나타난다. 계명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롬7:12). 포이에세(poihvsh행하며)는 '포이에오'(poievw행하다)의 단순과거 가정법으로 단순히 '행한다'는 사실 자체를 표시한다. 70인역(LXX)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의 창조자로서의 활동과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활동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남을 가르치거나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먼저 주의 교훈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만 하고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다(23:3). 율법의 사소한 요구를 피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작은 상급을 받게 된다.
3. 좁고 협착한 천국의 문(20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義)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안이하게 일상에 대처하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려 준다.
1)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
(perisseuvsh ... plei'on페리슈세…플레이온, 20절)
페리슈세(perisseuvsh낫지)는 페리슈오(perisseuvw탁월하다, 뛰어나다)의 단순과거 가정법으로 단순히 사실을 표시하며, 강물이 둑을 넘쳐 흐르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이다(A.T.Robertson). 플레이온(plei'on더)은 폴뤼스(poluv"많은)의 비교급으로 수나 양에 있어서 '더 많은'을 의미한다. 이는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의보다 월등하게 탁월해야 함을 나타낸다. 결국 율법을 문자대로 준수하려는 율법적인 의를 가지고서는 천국 입성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사람도 의롭게 될 수가 없다(롬3:20). 유대인들도 모세의 법전을 단지 외형적이며 비영적(unspiritual)으로 적용시킬 뿐이었으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다(롬9:31).
2) 그리스도인의 의
(uJmw'n hJ dikaiosuvnh휘몬 헤 디카이오쉬네, 20절)
디카이오쉬네(dikaiosuvnh:의)는 70인역(LXX)에서는 강력한 법적 및 언약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히브리어 체덱(qr,x,righteousness)의 역어이며, 이는 인간의 의와 관련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1:30). 이러한 의는 정통적 경건주의자들의 형식적인 삶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므로(엡2:8,9), 아무도 스스로 자랑하거나 자만해서는 안 된다. 신자의 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이시다(롬3:21,22,Wycliffe). 스스로 얻은 의는 참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3)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
(ouj mh; eijsevlqhte우 메 에이셀데테, 20절)
우 메(ouj mh;못하리라)는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에이셀데테(eijsevlqhte들어가지)는 에이세르코마이(eijsevrcomai들어가다, 들어오다)의 단수과거 가정법으로 연속이나 확장의 의미가 없고,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를 표현한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가진 의, 즉 율법적인 의를 가지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음을 강력하게 경고하는 말씀이다. 인간은 율법의 요구에 대해 무능력하며,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함이 불가능하다(W.Barclay). 율법의 요구를 이론적으로 완전히 만족시킨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대 경건주의의 함정이 이것이었다. 그들은 일의 순서를 바꿔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후에 원하는 것들을 해야 한다(22:36-38, Augustine).
맹세와 보복의 금지 및 원수에 대한 사랑(마 5:33-48)
새로운 윤리적 표준의 제시
그리스도는 당시 유대인들의 관행과 습관을 깨고 새로운 윤리적 표준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1. 맹세하지 말라(33-37절)
당시 유대에는 하나님뿐 아니라 여러 가지 피조물 등을 가리켜 맹세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는 자기의 불성실함을 기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黑崎). 그리스도는 구약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신다. '너희가 들었으나'(hjkouvsate에쿠사테)는 이 지식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1) 맹세하지 말 것
(mh; ojmovsai o{lw"메 오모사이 홀로스, 34절)
오모사이(ojmovsai맹세하지)는 옴뉘미(o[mnumi맹세하다)의 단순과거 부정사 일회적으로 발생하는 동작, 사건을 가리킨다. 그리고 메…홀로스(mh; ... o{lw"도무지…말라)는 절대적인 부정을 나타내는 간접명령이다(Adolf Schatte). 따라서 본문을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전혀 맹세하지 말라'(A.T.Robertson)가 된다. 옴뉘미(o[mnumi)는 '맹세하다' 또는 '맹세로 확언하다'라는 뜻이며, 대부분 맹세의 증거가 되는 사람이나 사물의 목적격과 함께 사용된다. 70인역(LXX)에서는 맹세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어 있는데, 고대 세계에서는 증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신(神)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J.Schneider). 본문은 신약의 맹세와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는 분명히 어떤 종류의 맹세라도 예외가 없는 것처럼 보이나(Wycliffe), 주님은 맹세하는 것은 금하지 않으셨다(A.T.Robertson).
2) 인간의 능력의 한계
(ouj duvnasai mivan trivca leukh;n poih'sai h] mevlainan우 뒤나사이 미안 트리카류켄 포이에사이 에 멜라이난, 36절)
뒤나마이(duvnamai할 수 있다)는 '능력'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로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을 가능하게 해주는 태도와 관련하여 '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사물들에 대해서는 '~와 동등하다'를 의미한다(W.Grundmann). 인간 능력의 한계는 미안 트리카(mivan trivca한 터럭)에서 결정적으로 입증된다. 드릭스(qrivx털)는 동물의 털이나 머리털을 가리킨다. 인간의 능력은 이것4조차도 임의로 희거나 검게 할 수 없을 만큼 보잘 것 없다. 따라서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는 하나님께 행한 서약이 헛맹세로 끝날 가능성이 다분하다(출20:7레19:12). 실제로 당시의 종교가들은 헛된 맹세로써 자신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수께서 배격하신 것은 이와 같은 비진실과 허위성이다(엡4:25).
3) 분수를 넘어서지 말 것
(to; de; perisso;n touvtwn ejk tou' ponhrou' ejstin토 데 페리쏜 투톤 에크 투 포네루 에스틴, 37절)
에크(ejk~로부터)는 속격을 지배할 때 기원(起原), 원인, 동기, 이유 등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에크 투 포네루 에스틴은 직역하면 '악에게서 난다' 혹은 '악에게서 온다'이다. 이는 분수를 넘는 일은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포네루(ponhrou')는 '나쁜, 악한'을 뜻한다. 이는 육체적 의미와 윤리적 의미를 갖는다. 명사적으로는 '악한 사람'이나 '악의를 가진 자'를 의미한다(Arndt, Gingrich). 70인역(LXX)과 다른 구약 번역본들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의 다양한 의미들을 표현한다(G.Hander).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은 죄가 된다(롬12:3).
2. 보복하지 말라(38-42절)
동일한 대가의 보복법, 즉 동해보복법(Lextalionis)은 복수의 한계를 분명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사실은 자비의 의도를 함축하고 있는 법이며(W.Barclay) 주께서는 이에 관한 계명의 완전한 의미를 알게 하신다.
1)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 것
(ejgw; de; levgw uJmi'n mh; ajntisth'nai tw'/ ponhrw'/에고 데 레고 휘민 메 알티스테나이토 포네로, 39절)
'이르노니'(legw레고)가 1인칭 단수 용법인데, '나는'(ejgw;에고)이라는 1인칭 대명사 주격이 언급된 것은 그 의미를 강조하는 데 있다. 안티스테나이(ajntisth'nai대적자)는 안디스테미(ajnqivsthmi대항하다, 거역하다)의 단순 과거 부정사로서 간접 명령의 성격을 띠고 있다. 토포네로(tw/ponhrw'/악한 자를)가 여격인 사실에 대해서는 남성과 중성의 의미가 동일하므로 여기서는 악한 사람인가 혹은 악한 행위인가가 문제된다. 후자를 취한 경우들이 많이 발견된다. 즉 '위해 행위'(an injury, Moffat), '권리 침해'(injury)등 주께서 본문에서 강조하는 바는 질서를 유지해야 할 행정부의 의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천국 시민인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게 되는 일신상의 모욕에 대응하는 방법이다(Wycliffe). 다른 사람이 악의를 품고 나를 대하며 내게 해를 끼칠지라도 선의와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대해야 한다는 것이 주의 가르침의 핵심이다(黑崎). 욕설에 분개하지 않으며, 복수하려는 생각을 조금도 가지지 않는 태도를 습득한 자라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롬12:21,W.Barclay).
2) 권리보다 의무에 충실할 것
(ajggareuvsei ... u{page met! aujtou' duvo앙가류세이…휘파게 메트 아우투 뒤오, 41절)
앙가류세이(ajggareuvsei억지로 하게 하거든)는 앙가류오(ajggareuvw강제로 봉사케 하다, 억지로 일을 시키다)의 미래형으로 '강요하거든'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상관치 않고 봉사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가리킨다(W.Barclay). 벌게이트(Vulgate)역에는 '억지로 하게 하다'로 되어 있다. '억지로'란 징벌의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문을 공공의 노무(勞務)에 징발당할 때의 태도에 관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黑崎). 뒤오(duvo둘)는 오 리의 두 배, 곧 십 리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권리보다는 의무를, 자기의 특권보다는 책임을 생각하는 자임을 알게 한다(눅6:38 W.Barclay).
3) 주는 데 인색하지 말 것
(dov" ... ajpo; sou' danivsasqai mh; ajpostrafh'/"도스…아포 수 다니사스다이 메 아포스트라페스, 42절)
도스(dov"주며)는 디도미(divdwmi주다)의 단순과거 명령법으로 자비를 거절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가르쳐 준다. 자비를 거절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W.Barclay). 아포스트라페스(ajpostrafh'/")는 아포스트레포마이(ajpostrevfomai돌아서다, 거절하다)의 단순과거 가정법으로 일회적으로 발생하는 동작을 나타낸다. 본문의 말씀은 단순한 자선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있다(McNeile0. 그리스도인들은 무분별한 자선을 행할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달라는 대로 주라는 말은 아니다(살전5:22,黑崎).
3. 원수를 사랑하라(43-48절)
본문은 산상수훈에서 '중심이 되며 가장 유명한 부분'이라고 평가할 정도로(C.G.Montefiore) 인간 관계에 대한 기독교 윤리의 집약적인 표현을 담고 있다(W.Barclay).
1) 원수를 사랑함
(kai; mishvsei" ... ajgapa'te tou;" ejcqrou;" uJmw'n카이 미세세이스…아가파테 투스 에크드루스 휘몬, 43,44절)
미세세이스(mishvsei")는 미세오(misevw미워하다)의 미래형으로 '미워하다'이다. 레19:18에도 이 말이 없고 랍비들의 가르침이나 탈무드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이 한 마디도 없다(A.T.Robertson). 아가파테(ajgapa'te사랑하며)는 명령형이다. 이 단어의 참된 의미는 억제할 수 없는 자비심, 추종을 불허하는 선의(W.Barclay)와 관련이 있다. 구약에서 '사랑'을 지칭하는 주된 히브리어는 아헤브(bh,a;)이다. 아헤브는 세속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어 사람과 사물 모두에 대해 사용할 수 있다(E.Stauffer). 주께서 명하신 사랑은 지성적인 사랑으로 인간들을 향하신 주의 사랑에 가깝다(요3:16,Wycliffe).
2) 만인에게 인자하신 하나님
(ajnatevllei ejpi; ponhrou;" kai; ajgaqou;"아나텔레이 에피 포네루스 카이 아가두스, 45절)
아나텔로(ajnatevllw높게 하다, 떠오르게 하다)는 의미에 있어서 타동사이며 사역적이다(Blass & Debrubner, p163). 햇빛은 비와 함께 생물의 발육과 성장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주의 은혜이다. 그분은 이것들을 차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黑崎). 여기에 하나님의 위대성이 있다. 선한 자도, 죄인도 다같이 사랑하시는 사랑이 그분의 위대한 특성이다(W.Barclay). 누구든지 자신이 하나님의 참된 아들임을 입증코자 하면 이러한 사랑을 갖도록 해야 한다. 보편적 자비와 더할 수 없는 선의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는 아버지를 증거하고 나타내기가 심히 어렵게 된다(요일4:7,8).
3)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될 것
(Esesqe ... tevleioi wJ" oJ ejn toi'" oujravnio" tevleiov" ejstin에세스데… 텔레이오시 호스 호 엔 토이스 우라니오스 텔레이오스 에스틴, 48절)
에세스데(Esesqe하라)는 에이미(ejimiv되다, 이다)의 2인칭 복수 미래형으로 계속적인 성장으로 미래에 그렇게 '되라'는 뜻을 함축한다. 텔레이오스(tevleio"온전하다)는 텔로스(tevlo"끝, 목표, 종착점)에서 온 형용사이며,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흠 없는, 분할되지 않는'(왕상8:61). '온전한'(렘13:19)을 의미한다(G.Delling). 본문에서는 바로 이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어떤 물건이 본래 계획된 대로 목적이 실현되는 것, 사람이 자기가 창조되어 세상에 보내어진 목적을 다하는 것이 텔레이오스이다(W.Barclay).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사랑의 완성이요 율법의 성취가 되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제시하셨다. 호스(wJ"같이)는 방향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인격적인 면이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암시한다(고전11:1).
모순되는 듯한, 놀라운 복음진리(마 5:3, 11-12, 9:12-13)
2008년 7월부터 2019년 9월 15일까지 12년 동안 이곳에 와서 29번 설교를 했는데, 제가 이렇게 많이 와서 설교한 교회는 그레이스 선교교회밖에 없습니다.
2020년 2월 9일 주일, 30번째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황은혜 목사님과 이종헌 장로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무슨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황 목사님이 ‘약할 때에 강함이라’는 설교를 해 달라고 해서, 오늘 이를 포함해 ‘모순되는 듯한 놀라운 복음진리’라는 제목으로 네 가지 복음진리에 대한 설교를 하려 합니다. 이와 같은 제목으로 설교하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1.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
첫 번째 ‘모순되는 듯한 놀라운 복음진리’는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는 복음진리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팔복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첫 번째 복이 ‘가난한 자’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저 “가난한 자”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누가복음 16장에서는 가난한 거지가 천국에 가는 복을 받았다고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19-25).
부자는 모두 지옥에 가고 가난한 거지는 모두 천국에 간다는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이 많은 부자보다는 가난한, 그래서 고난을 받는 거지가 천국에 가는 영적인 복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구약성경 이사야서도 같은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3)”.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 즉 마음이 상한 자들과 슬픔을 지니고 있는 자들에게 여러가지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자들에게 영적인 은혜와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좀 이상한, 모순되는 듯한 복음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 프랜시스(프란치스코)는 이런 말씀들을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면서 가난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가난하게 살게 되었는데,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가난은 나의 애처입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난의 삶을 본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가난과 버림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상속권은 물론 지식과 학문도 버렸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두 벌 옷을 가지지 않고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걸어 다니며 한평생 가난하게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성자 예수님을 닮기를 간절히 소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성 프랜시스의 영향을 많이 받으신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도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집도 자동차도 재산도 은행의 통장도 없는 가난과 버림과 청빈의 삶을 사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별세하셨을 때 『신앙계』는 한경직 목사님을 기리며 “3무의 삶”을 사신 분이라고 하면서, 그분은 “통장, 집, 재산이 없는 3무의 삶을 실천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한국의 작은 예수’라고 불리시던 장기려 박사님도 아시아에서 최고의 의사라고 존경을 받으시던 분이셨는데 모든 소유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3무 4무 5무의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무디라고 불리던 한국교회 최고의 부흥사 이성봉 목사님도 사례비를 집으로 가져오시는 때가 거의 없이, 모든 곳의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시며 가난과 버림과 청빈의 삶을 사셨고, 나중에서 소유하고 있던 작은 집까지 팔아서 불우한 사람들을 도왔기 때문에, 사모님과 자녀들은 거지와 같은 가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일이고, 너무너무 귀중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모순되는듯한 놀라운 복음진리라고 생각합니다.
2. 고난 당한 사람이 하늘의 큰 상을 받는다
두 번째 모순되는 듯한 놀라운 복음진리는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 아닌, 고난을 당하면서 힘들게 사는 사람이 하늘의 큰 상을 받게 된다는 복음진리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팔복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여덟 번째 복이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는데 천국이 저희 것이고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사실 성경은 가난과 함께 고난의 귀중성을 지적하고 또 지적했습니다. 구약의 욥처럼 다양하고 극심한 고난을 당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처럼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지니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성자 예수님의 예표였다고 생각합니다.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욥은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지니고 다음과 같은 귀중하고 아름다운 찬송의 고백들을 했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욥은 나중에는 처절한 회개의 고백까지 했습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1-6)”.
신약성경 야고보서는 욥을 본받아야 할 귀중한 신앙의 선배라고 지적했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약 5:11-13)”.
성경은 ‘고난’의 유익함을 계속해서 지적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사도 바울은 자기가 당한 고난의 귀중함을 아주 길게 나열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사실 한국교회의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은 거의 모두 극심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최권능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께서 모두 극심한 고난을 당하셨고, 대부분 순교의 길로 달려가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처음에는 고난을 싫어하고 반대했지만,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거친 다음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난 부활의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하면서 회개한 다음, 앞으로는 팔을 벌리고 자기가 원치 않는 죽음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부터 조금씩, 조금씩 십자가의 길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소 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고난과 핍박과 불 시험”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과 마음과 뜻과 소원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영광과 연결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벧전 4:12-19)”.
십자가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피하는 대신, 십자가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달려간 사도 베드로는 결국 사도 바울과 함께 로마 세계를 십자가의 복음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복음화한 초대교회의 가장 보배로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 너무나 유익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의 뒤를 이어 고난과 핍박의 길로 달려가신 분등 중에 길선주, 이기풍, 최권능,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이 계십니다.
3. 약하고 아픈 사람이 십자가의 복음진리를 전한다
세 번째 모순되는 듯한 놀라운 복음진리는 강하게, 즉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아닌, 약하게 즉 질병을 몸에 지니고 아프게 사는 사람이 영적으로 강한 사람이 되어 십자가의 북음 진리를 전하게 된다는 복음 진리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쓸데 없고, 병든 자들에게라야 쓸데 있다는 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그리고 각색 병든 사람들을 찾아 다니시면서 긍휼과 사랑과 치유의 손길을 폈습니다(마 8장과 9장).
건강하고 강한 사람들보다는 약함과 질병을 지닌 사람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다는 모순되는 듯한 놀라운 복음진리는 욥에게도 나타났지만, 사도 바울에게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치유의 은사도 받았고 삼층천에 올라갈 정도의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불치의 병을 고쳐달라고 성자 예수님에게 세 번이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으시고, 약함의 유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불치의 병인 약함을 지니고 오히려 기뻐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10)”.
약함, 즉 불치의 병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교만의 죄에서 벗어나게 했고, 온유와 겸손을 지니고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모순되는 듯한 놀라운 복음진리는 강하게 즉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아닌 약함 즉 질병을 몸에 지니고 아프게 사는 사람이 영적으로 강한 사람이 된다는 복음 진리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약함’의 예찬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들을 인용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4,25)”.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 약함의 귀중성을 강조한 사람이 영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요 설교자인 존 스토트 박사라고 생각합니다.
존 스토트 박사는 2000년 7월 18일 영국 케직사경회에서 ‘Power through weaknesses’, 즉 ‘약함들을 통함 능력’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나중에 제가 직접 들은 존 스토트 박사의 설교 5개와 함께, 루이스 팔라우 박사와 안 그레함 로츠와 제임스 패카 박사와 게리 갈리모아 박사와 김장환 목사의 설교를 모아서 『케직, 암스텔담 매시지』 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을 했습니다.
존 스토트 박사의 ‘약함을 통함 능력’이란 제목의 설교 첫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능력이란 말이 5번이나 나옵니다. 고린도전서의 주제는 약함을 통한 능력입니다. 인간의 약함을 통한 신적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나타난 능력을 언급하고, 복음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난 능력을 언급하고, 복음을 전한 사람에게 나타난 능력을 언급합니다.”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 약함, 즉 불치의 병들을 몸에 지니고 살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서,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몸으로 전하면서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찬송가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패니 크로스비는 태어난지 몇 주만에 맹인이 되어, 95년 동안 평생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은 찬송가를 쓴 ‘찬송가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의 가슴과 그가 쓴 찬송가에는 주님 사랑과 천국 사모로 가득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다시 태어나도 맹인으로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놀라운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가 천국에 이르러, 그의 눈으로 제일 먼저 보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이라는 설명까지 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9천여 개의 찬송시를 썼는데, 우리나라 찬송가에도 23개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찬송들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그녀가 92회 생일을 맞았을 때,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내게 데려오세요. 그 사람과 악수하고 싶어요.”
맹인 패니 크로스비는 주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서,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몸으로 전하면서 산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조니 에릭슨은 장래가 촉망되던 예쁜 소녀였는데, 다이빙을 하다 머리를 부딪혀서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도 자신도 모두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에 지닌 장애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결국에는 보석으로 바뀌었습니다. 조니 에릭슨은 몸도 손도 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의 몸을 가지고서도 천사와 같은 아름다운 얼굴과 목소리로,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노래와 간증과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린 그림 등은 너무너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되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박사님과 간증도 했습니다.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격려와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저는 조니 에릭슨의 간증을 직접 두 번 들었는데, 마치 천사의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너무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불치의 병과 약함을 지닌 조니 에릭슨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은,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몸으로 전하면서 사는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닉 부이치치는 두 팔도 두 다리도 없지만,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니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수년 전 닉 부이치치를 대구에서 만났는데, 그의 얼굴에는 행복과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닉 부이치치는 지금도 세계 곳곳을 찾아 다니면서 절망 중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소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소망과 행복의 천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기쁨과 위로를 전할 수 있어 너무 감사합니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역경 스토리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너무너무 귀중하고 보배로운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치의 병과 약함을 지닌 닉 부이치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서,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몸으로 전하면서 사는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송명희 시인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으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면서, 하나님께 온 몸으로 소리지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 모순되는 듯한 놀라운 복음진리는 강하게 즉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아닌 약함, 즉 질병을 몸에 지니고 아프게 사는 사람이 영적으로 강한 사람이 된다는 복음 진리입니다.
황은혜 목사님과 이종헌 장로님이 몸에 지닌 약함과 질병이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네 번째 모순되는 듯한 놀라운 복음진리는 죄를 많이 짓지 않으면서 의인으로 자랑스럽게 사는 사람이 아닌, 죄를 많이 짓고 부끄러운 죄인으로 사는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는 사람이 된다는 복음 진리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는 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그리고 의인들이 아닌 각색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죄인인 한 여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펴신 이야기를 누가복음 7장에서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36-50)”.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귀중하게 보시면서 사랑하신다는 말씀도 누가복음 15장 한 장에서 아주 길게 하셨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1-32)”.
너무너무 귀중하고 은혜롭고 감사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매일 기도하는 기도의 한 마디는 “하나님 아버지, 못된 탕자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시며 즐거워하신 하나님, 부족한 죄인을 안고 즐거워하시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사용하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직접 죄인인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서 세리장 죄인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5-10)”.
요한복음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함께 죄 사함과 치료의 손길을 펴신 이야기들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살던 남편 다섯을 두었던 부도덕한 죄인인 한 여인을 찾아 일부러 수가성 우물가로 가서 그 여인을 기다리시다가, 그 여인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시며 그 여인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함께 죄 사함과 치료의 손길을 펴시므로 그 여자의 삶과 운명이 바뀌어진 이야기를 요 4장이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4-19)”.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간음 현장에서 잡힌 죄인인 한 여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함께 사죄의 은혜를 베푸신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3-11)”.
죄인 중의 죄인,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그리고 일곱 가지 죄악에 늪에 빠졌던 막달라 마리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죄악의 늪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지옥의 저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인간 쓰레기였던 막달라 마리아의 죄를 그저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가장 귀중하게 보시면서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은혜로 막달라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과 함께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게도 되었습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나타나서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주신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6절 이하의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6-18)”.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의인들보다는 극심한 죄악에 빠졌던 죄인들을 더욱 더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사울이야말로 그와 같은 부류에 속한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사울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서 죽인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둔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런데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풍성하신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라고 부드럽게 부르시고 사도의 직분까지 맡겨주시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극진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물론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하신 놀라우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축복의 손길을 펴시는 너무너무 이상하신 놀라우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명혁>
'하나님의 의'(마6:33)에 대한 연구
Ⅰ. 들어가는 말
예수가 선포한 중심적인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였다고 하면, 바울이 선포한 중심적인 주제는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의(ՄՉՊՁՉՏՓՕՍՇ)의 개념은 구약과 유대교적 맥락에서는 약자를 돕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의 의미, 그리고 여러 다양한 의미로 사용이 되었었고, 또한, 바울의 "하나님의 의"의 개념 역시 많은 해석과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의" 는 그 의미의 해석이 계속 있어왔고, 또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의해서 다양한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므로 본 발제에서는 "의"에 대한 성서적 고찰을 시작으로, 지금 다루어지는 바울의 로마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이르기까지 성서적인 면과 신학적 해석 면에 있어서의 의미와 내용들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 범위를 제시하면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많은 학자들의 논쟁점이 되고있는 속격 해석의 문제. 둘째, 바울의 하나님의 의는 바울 자신의 고유한 것인지 아니면, 구약 및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 문제. 셋째, 각 학자들의 다양한 해석들을 통하여 로마서 1장 16-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중심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Ⅱ. 하나님의 의의 어원적 해석
"하나님의 의"에서 "하나님의"(ՈՅՏՕ)라는 소유격 형태의 정확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학자들의 견해가 나뉘어지고 있다. 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1) 주격적 속격 :
ՈՅՏՕ를 주격적 속격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주시요,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크레머에 의해 제공되었는데 그는 ՄՉՊՁՉՏՓՕՍՇ ՈՅՏՕ를 (ࠗࠃࠕ)의 관점에서 , 즉 계약을 지키는 양당사자간의 행동을 가리키는 관계개념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논증하였다.
케제만은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이 바울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마태복음 6:33과 야고보서 1:20에 독립적으로 나타나며 구약에서는 신명기 33:21로 소급될 수 있고 또 유대교에서 지속되었음을 상기시킨다. 그에 의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구약과 유대교 일반에 있어서처럼 하나님의 활동을 표현하는 어구, 즉 자존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어구인 것이다. 케제만은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승리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의"의 개념 안에서 능력과 선물의 분리할 수 없는 연관성을 강조했다.
케제만의 이와 같은 해석은 한편으로 의(ՄՉՊՁՉՏՓՕՍՇ)를 순수한 선물이나 죄인의 해방선언과 새로운 복종의 기초로서의 부수적 문제로 보는 인간중심적 관점의 편중성을 지양한다. 다른 한편 일방적인 신 중심적인 관점도 지양한다. 즉 "하나님의 의"의 계시는 인간의 응답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2) 대격적 속격 :
대격적 속격으로 이해하는 경우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선물로서 인간이 가지는 의를 의미한다. 이 해석은 종교개혁 이전에 ՄՉՊՁՉՏՓՕՍՇ ՈՅՏՕ ԇ'분배적 정의'라는 지배적 해석에 반하여 루터가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리더보스는 롬1:17과 3:21에 나타나는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닌 인간의 속성이며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서 그의 심판 앞에 타당한 그런 속성이라고 정의하였다.
3) 기원적 속격 : 불트만의 경우 속격을 기원의 속격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의"의 특성을 구원선물, 즉 오직 은혜로 값없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라고 한다. 왜냐하면 의는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아브라함이 그 의가 약속을 받는데 전조건이었던 것과 같이(롬4:13) 지금은 신앙이 의를 얻는데 타당한 것이 되었다.(롬1:17). 지금 의로 여겨지는 자들에게 구원은 주어진다(롬5:1). 그러므로 의와 구원사이의 연관성이 확고하므로 의 자체에 이미 구원선물의 성격이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콘첼만의 경우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서의 주격적 속격에 대한 해석을 고려함이 없이 속격 구조의 주격적 의미를 철저히 거절한다. 그에 의하면 바울이 "하나님의 의"란 용어를 사용하는 곳에서 바울은 하나님에 의해서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 자신의 의를 말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의 구원문제 즉 인간이 어떻게 구원의 조건을 성취하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의를 얻을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보른캄 역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고 인간에게 주시는 의이다. 하나님은 죄인인 자에게 자신의 의를 주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그의 의를 창조하심으로 인간은 생명을 갖게 되었다. 로마서 1:17에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는 동일하며 믿음을 통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이다.
Ⅲ. 하나님의 의의 성서적 배경(구약성서)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의에 대해서는 의의 구원적 특성과 의의 징계적 특성을 말할 수 있다. 구약에서 의에 대한 용어들은 (ࠗࠃࠕ)과 (ࠄࠗࠃࠕ)이 나타난다. 폰라트의 경우, 구약에서 나타난 "의"는 전적으로 히브리적 개념으로서, 어떤 윤리적, 법적, 심리적, 종교적 혹은 영적 규범에 따르는 행동이나 처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아무리 순수하다 할지라도 신성이나 인간성에 의해 지시받는 행위가 아니며 또한 어떤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적절한 활동이나 이웃사람들에 대한 공정한 봉사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의"는 그 관계가 인간과의 관계이든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이든 관계의 요구를 이행 또는 충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자가 자신을 발견하는 그 때 마다의 공동관계는 어느 정도 그 자체가 규범이며, 이 모든 것 위에 야웨가 이스라엘에 제공했던 공동관계가 군림하게 되는데, 이 공동관계의 요청들을 옳게 대하는 자들이 옳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의의 행동을 하신다. 그래서 야웨의 의는 그의 선하심, 자비, 공의, 구원, 자유, 영광 및 진실성들을 그 평행어로 갖는다. 예컨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먼저 찾아오셔서 구원하심으로 그의 의를 입증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의는 현재적 구원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Ⅳ. 하나님의 의의 유대적 배경
유대주의에서는 법정적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심판을 (묵시사건) 저쪽 세상에로 옮김으로써 그 의미를 수정한다. 두 번째 특성은 그것과 관련된 것으로서, 개인의 위치가 문제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두가지 발전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의미를 세밀하게 다루었다.(솔로몬의 시편과 희년서에서). 둘째, 그 반대로 적극적인 구성요소들이 발전되었다. 즉 의는 곧 계약에 대한 신실성이라는 뜻과 자비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Ⅴ. 하나님의 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1) 구원 선물로서의 의(구원을 얻게 하는 조건이 되게 한다는 의미)
신앙(ՉՓՔՉՒ)이전의 인간이 죽음에 빠진 인간임에 비해 신앙(ՉՓՔՉՒ)하의 인간은 생명을 얻은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 생명을 얻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신에게 맡기고 '자기를 얻는데서 시작이 된다.
바울의 경우, '의인됨'은 생명을 받는데 전제가 된다. 즉, 구원, 생명을 받는 일이 그 조건으로서의 인간의 의와 결부된다는 것이다.
의는 구원, 즉 생명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의인(義認)은 생명을 얻는데 타당한 조건이 된 것이다. 이 두 단어, 의와 구원 사이의 연관성은 아주 확고하고 필연적이기 때문에 의 자체에 이미 구원 선물의 성격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의((ՄՉՊՁՉՏՓՕՍՇ)와 생명(ՆՙՇ) 사이에는 전제와 결과로 존속하는 확고한 연관성이 있다.
2) 법적, 종말론적 개념으로서의 의
의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 그 중 윤리적 의미(정직함) 으로도 쓰이며, 법적 의미로도 사용이 된다. 그런데, 구원 조건 또는 구원 내용의 표지인 (ՄՉՊՁՉՏՓՕՍՇ)는 법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개인이 가진 의(ՄՉՊՁՉՏՓՕՍՇ)가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라 의를 선언하는 다른 사람의 판결에서, 그가 책임을 지는 심판대 앞에서 가지는 의이다. 인간은 그러한 자로 인정받을 때, 다시 말하면 자신의 인정(認定)이 문제될 경우, 즉 그가 "의인(義認)되고", 그에게 "정당함이 선언될"때 의를 가지거나 정당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죄하다는 점이 아니라, 그런 자로 인정된다는 점이다.
이제 경건한 자가 신의 의롭게 하는 재판 선고를 종말론적 심판에서 기대했을수록 그만큼 더 의의 법정적 개념은 종말론적으로 되었다. 여기에서 유대교의 관점과 바울의 관점의 중요한 차이점이 발생을 하는데, 바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신의 판결의 전제가 되는 조건들을 실천하는 것이지만, 바울은 "율법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용어는 단순한 순수 미래의 의미가 아니라, 격언적(논리적)미래로, 혹은 현재형의 서술은 순수현재가 아니라, 무시간적인 교훈의 현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법정-종말론적 의를 그는 이미 현재에서 인간에게 선언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는 고전6:11에서 고린도인들에게 "너희는 의롭다함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나타나다" 또는 "작용하다"에서는 그것이 인간들에게 또는 그들을 위해 수행되는 사건을 문제삼기 때문에 사람들 측의 이해와 소유의 가능성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ՁՐՏՊՁՋՕՐՔՅՓՈՁՉ에 의해 표시되는 것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곧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ՄՉՊՁՉՏՓՕՍՇ)의 현재성에 관한 그의 주제로 법정적-종말론적 의미를 이 의에서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의 주장의 역설은 바로 신이 (믿는 자에 관한) 그의 종말론적 심판의 판결을 이미 지금 선포한다는 것,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현재라는 것, 혹은 현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사람에게 선포한 의는 윤리적 완전이라는 의미에서 "죄없음"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죄를 "간주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죄없음"이다. 신이 죄인을 의롭다고 하고 "정당하게" 여기면 인간은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일"뿐 아니라 그는 실제로 정당하다. 이런 결과들이 일어나는 것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종말론적 실존에 옮겨졌고 사실 이미 죄와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성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의의 현재성은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작용하는 구원사에 의해 "계시"되었다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구원 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인바, 신은 이를 통해 옛 세계 진행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세대를 시작한 것이다.
3) 의의 현재와 미래의 문제
바울에게 있어서 의라는 것은 현재적인 동시에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희망으로 이해되던 것을 바울은 오히려 현재의 현실성, 또는 동시성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종말론적 생명(구원)이 희망의 대상이기는 하나 그렇더라도 특정한 방식에서 이미 현재한다는 것을 보이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제시하는 의는 미래적이면서 그러나 이미 현재적인 구원의 특유한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4) 바울의 하나님의 의의 개념
이제 유대교에 대한 바울의 대립은 (ՄՉՊՁՉՏՓՕՍՇ)의 현재성에 관한 그의 주장뿐 아니라 훨씬 더 결정적인 주제 즉 자유를 명하는 신의 선고에 결부된 조건에 관련된 주제로 발전을 하는데, 이 조건은 유대인에게 자명한 것인바 율법의 실천, 율법이 명하는 "일들"의 실천이다. 이에 대해 바울의 주제는 부정적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는 ՐՉՓՔՉՒ 는 "자랑"(ՊՁՕՇՓՉՒ)에 대한 철저한 대립이라는 것이다. "자랑"에 대한 철저한 포기가 의 태도인 것이다. 바울은 그의 일들이 아니라 그의 ՐՉՓՔՉՒ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에 관련시켜서도 그에게 "자랑이 없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인간의 공로에도 의를 요구할 권리가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순수한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근원을 신의 은혜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작용하는 그의 은혜로운 행위에 두고 있다. 이 신의 "은혜"(카리스)는 역시 그의 노력을 긍정하는 자로서나, 그의 힘을 지원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결정적인 물음으로서 즉 그가 자신을 완전히 신의 행동에 내맡기려는가 - 다시 말해서 자신을 신 앞에서 죄인으로 이해하려는가라는 물음으로서 그를 만난다. 바로 그 까닭에, 즉 이 의는 오로지 신의 "카리스"에만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신의 의", 신이 선사한, 약속한 의인 것이다.
Ⅵ. 결론
바울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서의 하나님의 의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하나님밖에 있는 의로서 말씀 안에서 경험되고, 말하여짐으로써 체험되는 의이다. 듣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정말 의로워졌다는 것을 깨달으며, 또 새로운 삶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의 변증법은 언어적 용법의 변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의가 구원의 한 조건으로 나타나는데, 또 한편으로는 구원의 혜택 그 자체로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현재의 선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선물로 나타난다.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서술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관한 복음은 보편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그 복음은 아담으로부터 시온에 임하시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의 역사를 포괄하고 있다. 그 복음은 예수의 보내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은총의 능력으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복음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은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이방인을 멸망시키시기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사귐을 나누는 생명을 주기로 하신 것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4복음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6장 매튜헨리 주석 (0) | 2020.09.18 |
---|---|
마태복음 6장 원어 강해 (0) | 2020.09.18 |
빌라도법정, 안토니아 요새 (예루살렘) (0) | 2020.09.17 |
1. 예수님 제자들의 순교 장면 2 (0) | 2020.09.15 |
예수님의 12제자 순교 장면 1 (0) | 2020.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