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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태복음 7장 - 비판하지말라 / 구하라 -황금률

by 은총가득 2020. 9. 18.

비판하지말라!(마7:1-6)

 

 

우리는 그 동안 마 5-6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 5-6장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천국 백성의 특징과 성격(8복)
2) 세상에서의 천국 백성의 역할(소금과 빛)
3) 천국 백성의 의(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 6가지 예)
4) 참된 경건(구제, 기도, 금식)
5) 주기도문
6) 천국 백성조심해야 할 두 가지 함정(세속주의, 생활에 대한 염려).

이제 우리는 산상수훈의 마지막 장인 마 7장의 내용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마 7장에는 비판 금지, 기도, 생명의 길, 거짓 선지자, 그리고 말씀 실천의 중요성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 7장의 첫 부분에 나오는 '남을 판단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비판을 싫어하는 시대

현대인은 비판을 싫어하고 모든 것을 똑같이 인정하는 상대주의다원주의가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비판보다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고 평화를 위해서는 무엇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현대인은 비판보다 평화와 화합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한 쪽에 서 있는 사람보다 중간에 서있는 사람이 인기가 높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극단에 서는 것을 피하고 적당히 중간에서 서로를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어떤 사람은 비판을 금지하는 예수님의 가르침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기독교인은 모든 비판과 판단을 하면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인들은 남을 비판하지 말고 이웃을 포용하고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은 평화를 위해서 어떤 일도 용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중요한 것은 비판이나 판단이 아니라, 연합사랑 친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마 7:1-5)의 가르침은 정말로 "모든 비판과 판단을 금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기독교인은 모든 비판을 금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은 "모든 비판과 판단을 금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 7:6)을 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 여기에 나오는 거룩한 것이나 진주는 복음과 진리를 의미하고, 개나 진주는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복음과 진리를 분별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판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 기독교인은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복음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는 고도의 분별력과 판단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올바른 판단력이 있을 때에 개나 돼지와 같은 사람을 분별하고 그들을 피할 수 있습니다. 또 (마 7:15)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 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고 피하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판단력이 필수적입니다. 특히 양의 옷을 입은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판단력과 비판의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열매를 보고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교회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권징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15-20). 권징은 성도들이 옳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을 판단하고 적절한 징계를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올바른 권징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판단력과 비판이 필요합니다. 구약 성경을 보아도 이러한 예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을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공의를 실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재판장들은 피고와 원고의 말을 듣고,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사건의 시비를 가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재판장에게는 예리한 판단력이 필요합니다.

또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교리에 대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갈 1:8)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나 아니면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는 사람들을 저주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교사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성경적으로 옳은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판단력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판단과 비판력이 결여되면 갈라디아 교회처럼 다른 복음에 미혹될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딛 3: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단을 한 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요한"거짓 스승과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조심하라!"고 지시했습니다(요한1서). 그는 요한2서에 "거짓 교사를 집에 들이거나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구절들은 기독교인들이 교리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모든 판단을 금지하고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마 7:1-5)에서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말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서 나오는 "비판'은 "정당한 판단"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금하신 비판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비판"으로 번역된 말("크리노")은 원래 "재판한다, 송사한다, 심판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재판관이 판결하는 것처럼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금지한 비판은 올바른 비평(critic)이나 감상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금하신 것은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형제를 심판(judgement)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고 다음 시간에 계속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정죄 의식을 금함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습관적으로 남을 정죄 하는 태도를 금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비판"으로 번역된 말(크리노)은 "재판, 송사, 심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올바른 비평(critic)이나 감상(appreciation)을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남을 정죄하고 심판(judgement)하는 일은 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어느 정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의식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특별한 열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시간이 흐르면서 외식으로 흐르고, 자기를 남보다 의롭게 생각하고 남을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눅 18:9-14)에 나오는 비유를 보면 이러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공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남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입니다(눅 18:9). 어느 날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기 위해 올라갔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경건한 생활로 백성들에게 존경 받는 바리새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였습니다. 그때에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 나는 토색(노략질),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도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도 드리나이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볼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가슴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 날 하나님은 죄인인 세리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남보다 의롭다고 생각했고 율법을 모르는 이웃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남의 정죄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의 정죄와 비판을 금하셨습니다.

또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정죄와 분노심으로 가득찻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은 무리들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모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정죄와 비판 의식은 바리새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비판과 정죄는 우리들에게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교훈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남을 비판하고, 사건의 내막을 알기도 전에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우리는 이럴 때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요 8:7)"

 

정죄는 우월감에서 나온다.

우리는 우월감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는 일을 금해야 합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정죄의 배후에는 반드시 자기 우월감과 자만심 도사리고 있기 마련입니다. 정죄의 영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고 남을 멸시하고 무시합니다. 그들은 비난을 통해 남의 인격을 해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정당한 비평(critic) 대신 혹평하는(hypercritical) 말을 많이 합니다. 보통 사람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평은 올바른 감상(appreciation)에서 나오는 건전한 비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만심에 빠진 사람은 남을 무시하고 악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난하기 위해 남을 비판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결점을 잡기 위해 접근하고, 흠을 발견하면 가차없이 공격하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남을 비난하는 일을 통해서 자신이 의롭다는 대리 만족을 느낍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정죄의 영을 가진 사람은 이웃의 결점과 흠을 찾고 지적하는 일에 만족을 느낍니다. 그들은 비판을 통해서 자신이 의롭다고 느끼며, 이웃의 흠을 발견하지 못하면 낙심합니다. 또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먹고 마시는 문제날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 안에는 먹고 마시는 문제와 날짜에 대한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형제들을 서로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이와 같이 정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를 중요하게 만들어서 비난하고 다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에 바울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먹는 것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롬 14:17)." 바울은 이러한 문제는 각자 개인이 양심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인정해 주라고 권면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죄 의식들

어떤 사람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고 남을 비난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생각하고, 남이 잘될 때에 함께 기뻐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합니다. 그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파서 흠을 찾아내고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종종 편견을 가지고 남을 판단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비평할 때에 주관적인 생각으로 형제들을 비난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비평은 참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인신 공격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미리 판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건의 전말을 듣기도 전에 성급하게 남을 정죄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비판과 정죄는 모두 다 예수님께서 금하신 비판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만심에 빠져서 정죄의 영을 가지고 습관적으로 형제와 이웃을 비판하는 일을 금해야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1-3)"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1)."

첫째로 우리가 비판을 금해야 하는 이유는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은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은 실수를 한 이웃을 비판하고 정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비판하게 되면, 우리 역시 우리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비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은 자신의 약점도 숨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은 자신도 비판과 정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의 죄를 덮어주는 사람을 용서해 주시고, 남의 죄를 비판하는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남을 비판하는 일에 앞장 섰던 사람들이, 후에 자신의 비리가 발각이 되서 크게 망심을 당하는 일를 볼 때가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적극적으로 남을 비판하지 않았다면, 그들도 실수도 덮어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죄인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함부로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 심판을 받습니다. 성경을 보면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종은 왕의 자비로 인해 일만 달란트라는 막대한 부채를 탕감받았습니다. 그 종은 기뻐서 집으로 가다가 자기에게 작은 돈을 빚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친구에게 자기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지금 돈이 없으니까 조금만 참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친구를 용서하지 않고 감옥으로 끌고 가서 그곳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에 그 소식이 왕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왕은 자기 친구를 긍휼히 여기지 않은 종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노했습니다. 그 왕은 당장에 무자비한 그 종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그가 모든 빚을 갚기 전에는 풀어주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에게 작은 실수를 한 이웃들을 저죄하고 용서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이러한 무자비한 일을 할 때에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형제의 작은 실수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실수와 죄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마 18:21-35).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남을 비판의 기준이 우리를 비판하는 기준이 된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

둘째로 우리가 비판을 금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비판한 원칙으로 우리가 비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비판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헤아림받을 것이라." 우리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원칙으로 우리를 비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웃이 잘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우리도 비슷한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 우리도 남을 비판했던 그 기준에 따라서 비판을 받게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판단하는 것으로 정죄함이니, 이는 판단하는 같은 일행함이니라(롬 2:1)."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웃을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실수를 하면 우리는 남이 우리를 용서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남을 비판했던 사람은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도 용서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선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 되지 말라(약 3:1)." 야고보는 선생들을 향해서 그들이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남을 비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남보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교사들 역시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남을 비판한 교사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교사, 교수, 또는 판사나, 성직자들이 법을 어기면 보통 사람들보다 더 큰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가르치거나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남을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을 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

셋째로 우리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남을 판단할 자격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깨닫지 못하느냐?" 들보는 집의 지붕에 올리는 통나무입니다. 이에 대해서 티끌은 먼지처럼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들보처럼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이 지은 티끌만한 죄와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비판하고 정죄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마치 100억을 도둑질 한 사람이 100만원 도둑질한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와 실수를 범하는 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피로 우리가 지은 무수한 죄와 실수를 덮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이 행한 작은 죄와 실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기 죄와 허물은 간과하고 남의 허물은 비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남을 정죄할 만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있는가?" 아마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참된 예술가는 타인의 작품을 비평하는 이상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비판하기 마련입니다. 참된 비평가는 남의 작품 뿐 아니라 자기 작품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게 대하면서, 남의 죄와 실수는 크게 비판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은 자로서 남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일심판하실 분은 온전하신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한침범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비판함으로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판단력은 매우 부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전체를 볼 수도 없고, 또 사람들의 마음과 동기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분적인 자료와 빡으로 나타난 일을 가지고 이웃을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판단은 매우 부정확하고 왜곡된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 우리는 편견이나 감정에 휘말려서 그릇된 판단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남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일을 그치고, 모든 판단을 모든 것을 아시고 가장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처럼 편견이나 감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잘못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누가 보아도 공정하며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다 만족할 수 있도록 완전하게 심판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이 실수할 때에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를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남이 실수할 때에 우리도 같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정죄의 영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눈에 들보가 있는 채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뺄 수 없다(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4)"

예수님은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 이 말씀은 최고의 풍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들을 "눈에 들보가 박힌 채로 남의 눈에서 티를 빼려는 의사"로 비유하셨습니다. 때로 우리 눈에 티끌이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 티는 대부분 눈물에 의해서 저절로 빠집니다. 그러나 눈에 들어간 티가 눈에 깊이 박혀서 쉽게 빠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 눈을 잘못 건드리면 큰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경우에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안과 전문의를 찾아갑니다. 눈은 미세하고 섬세하기 때문에 위험한 일을 당했을 때에는 전문의에게 맡기는 것이 안전합니다. 만일 눈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함부로 눈을 다루면 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간 안과 전문의가 자기 눈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자기 눈에 큰 상처를 입어서 사물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남의 눈에서 미세한 티를 빼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우리는 그 안과 의사에게 우리 눈을 맡길 수 없습니다. 이 경우에 그 안과 의사가 우리 눈을 고치기 위해서 그는 먼저 자기 눈을 고쳐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을 "자기 눈에 들보가 박힌 채로 남의 눈에서 티를 빼려는 의사"로 비유하셨습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박혀 있는 의사는 남의 눈에서 메시한 티를 빼낼 수 없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사람입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족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될 큰 죄와 허물과 실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어두워져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채로 그들이 남의 죄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남의 죄와 허물을 해결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불을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와 허물이 있는 지 아는 사람은 함부로 남의 죄에 대해서 비난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를 해결하지 않고 남의 죄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마치 중환자가 남을 수술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시각 장애자가 시각 장애자를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시각 장애자가 시각 장애자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져버릴 것입니다. 눈 먼 안과 의사가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를 뺄 수는 없습니다. 눈 먼 의사가 남의 눈을 수술하면 그 환자의 눈은 더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남의 결점을 해결하는 일은 민감하고 섬세하며 어려운 작업입니다. 이는 이러한 일은 연약하고 섬세한 영혼을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남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일을 금해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남을 도울 수 있다(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리라."(5)

예수님은 자신을 고치지 않고 남을 고치려는 사람을 "위선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큰 죄를 해결하지 않고 남을 정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고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해결받은 사람이 남의 죄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남의 결점만 고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을 고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 티끌과 같다면, 남을 비판하는 사람의 잘못은 들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연약하기 때문에 종종 죄를 짓거나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기꺼이 그를 용서해 주시고 성령님을 통해서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형제의 죄를 고치겠다고 덤벼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의 결점을 고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는 더 큰 죄악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리라!" 남의 결점과 허물을 고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자신의 죄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마음을 열고 고전 13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열매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여러 가지 사랑의 목록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얼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께 부족함을 고하고 도움을 요청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한 사람은 함부로 남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형제의 결점에 대해서 전혀 다른 태도를 갖게됩니다. 그들은 형제의 결점을 보고 쉽게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 결점이 형제의 결점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나가면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형제를 정죄하지 않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께 인도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때에 그는 자신이 형제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형제의 마음에 회개할 마음을 주시고 그 영혼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한 사람만이 이웃의 죄와 허물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돌팔이 의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도 보지 못했고 또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남의 죄와 허물을 비판하면서 그들을 심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먼저 자기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남을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렇다면 우리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자신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성령님을 통해 맑은 눈과 영을 가지고 형제들을 도와줄 수 있게될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염려하라(7:6)."

 

거룩한 것과 진주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거룩한 것"과 "진주"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원래 "거룩한 것"은 '구별된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거룩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 즉 복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천국 복음이나 산상 설교와 같은 교훈과 진리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 13:45-46)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진주 장사로 그리고 복음극히 값진 진주로 비유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5-46). " 여기에 나오는 극히 값진 진주는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진리를 찾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고 방황합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게 되면,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러한 예에 해당합니다. 그는 이전에 유대교에서 율법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후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일생을 헌심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 나라와 의를 위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개와 돼지는 누구인가 ?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개와 돼지"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여기에 나오는 "개나 돼지"는 진리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동물처럼 진리에 대해 분별하지 못하고 육신과 세상의 것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는 귀여운 애완용 개가 아닙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는 쓰레기를 뒤지고, 썩은 고기를 먹는 사납고 위험한 주인 없는 반 야생 동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지조없이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처럼 취급했습니다. 유대인은 돼지 역시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돼지를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묘사했습니다(벧후 2:12). 이와 같이 성경에서 '개나 돼지'는 진리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정욕을 따라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묘사된 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음란한 동물-성경은 개를 음란한 동물로 취급하고, 또 지조없이 우상을 숭배하는 자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2) 싸움을 좋아하는 동물-성경에서 개는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리고 짖어 대는 동물로, 감정을 따라 쉽게 화를 내고 싸우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3) 회개한 후에 다시 그 죄를 반복하는 사람-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가 그 토하였던 곳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누웠다는 것이 응하였도다(벧후 2:2)."
4) 사람을 멸시하는 표현-골리앗은 막대기를 들고 나오는 다윗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막대기는 왜 가지고 나왔느냐 ? 내가냐?(삼상 17:4)"
5) 무가치한 사람-(삼하 16:9)을 보면 다윗의 신하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죽은 개만도 못한 자가 왕을 욕하는데 내버려두십니까?(삼하 16:9)"

성경에서 묘사된 돼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먹고 놀기만 하는 자(벧후 2:12)-먹고 놀다가 살이 찌면 잡혀 먹는 짐승과 같이 게으르고 무익한 자들.
2) 더러움의 상징-돼지는 항상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죄와 부정을 행하는 사람을 돼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3) 회개하고 나서 죄를 반복하는 사람(벧후 2:2)-이것은 앞에 나온 개와 같은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자신들을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과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는 죄인들을 "개나 돼지"로 간주했습니다. (마 15:21)에서 예수님은 자녀의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에게 주는 것이 합당치 않도다!" 유대인들은 개나 돼지를 가축 가운데 가장 부정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개나 돼지를 식용이나 제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창녀불법을 통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 취급을 했습니다. (신 23:18)에서는 이러한 사람이 번 돈을 하나님께 드리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하나님께 가져오지 말라."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개와 돼지'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바로 '진리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반대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거룩한 것을 어떻게 취급하셨는가?

그러면 "거룩한 것을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먼저 예수님과 사도들을 통해서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실 때에 복음을 받는 사람들에 따라서 다르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의 진실함을 인정해 주셨으며, 니고데모에게는 중생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녀의 숨겨진 죄를 지적함으로 자신의 신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죄를 인정하는 세리와 창녀들에게 다소 우호적으로 접근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월감에 빠진 바리새인들은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실 때에 각 사람에게 제일 적합한 방법으로 진리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내용은 바꾸지 않은 채 여러 가지 적절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사역에 파송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성에서 나가서 너희 발에서 뭍은 먼지를 떨어버리라(마 10:14)." 예수님은 복음을 전할 때에 그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발에 묻은 흙을 떨어버리고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은 수용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되지만, 거부하는 자는 정죄와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6:16).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복음의 가치를 모르고 끝까지 복음을 거부하고 전도자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개와 돼지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 사도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행 13:46)에서 복음을 끝까지 거부하고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해야 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사도들은 한 지역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에게 거부당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부로 사람을 '개나 돼지'처럼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죠지 뮬러는 일평생 남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그가 죽기 한 달 전에 예수님을 믿게되었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그가 죽은 지 한 달 후에야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한 후에 사람들이 즉시 그 복음을 믿지 않는다고 성급하게 그들을 개나 돼지로 취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인내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복음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개와 돼지 같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농락당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소중하고 귀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멸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함부로 남을 비판해도 안되지만, 동시에 복음을 값싸고 천하게 만들어도 안됩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고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염려하라(7:6)."

 

복음을 전할 때는 여러 유형의 사람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은 복음을 받는 사람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을 듣는 대상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대부분 역효과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일즈맨들은 상품을 팔기 위해서 판매 심리학의 훈련을 받습니다. 이는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상품을 팔기 위해서는 구매자들의 심리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성격과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같은 물건도 사람마다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또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 중에 "개와 돼지"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이러한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항상 성령님의 인도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전도자들이 각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백인들이 아프라카에 처음 갔을 때에, 원주민 아이들이 다이아몬드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그 백인들은 초콜렛을 주고 아이들이 갖고 놀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교환했습니다. 아프리카 아이들은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귀한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초콜렛과 바꾸어 먹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 중에도 복음과 진리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복음과 진리보다 돈이나 쾌락 또는 명예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에서처럼 영원한 것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어 버립니다. 그들은 하늘의 것보다 땅의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들에게 복음과 진리를 전해 주면 그들은 그것을 멸시하고 전도자를 짓밟고 해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이러한 자들이 복음과 진리를 멸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고 나서 핍박을 받았다고 자위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짓밟고 멸시하는 자들에게 무모하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박해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일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복음이 개와 돼지들에게 멸시받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효과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각 사람들을 잘 분별해서 그들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몇 마디 답변을 하셨지만, 헤롯 왕에게는 한 마디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빌라도는 어느 정도 진실에 대해 열려 있었지만, 헤롯은 전혀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너희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성에서 나가서 너희 발에서 뭍은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14)." 사도들은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파를 중지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해야 할 것이로되, 너희가 (복음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에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또 바울도 복음을 거부하는 무리들에게 옷을 털어버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 피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 18:6)."

또 복음을 전할 때에는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 따라 전하는 내용도 다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신자에게 여러 가지 난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히려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요 4장)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하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할 때에 예배 장소 문제에 대해 예수님과 논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논쟁을 피하고 그녀의 죄에 대해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불신자에게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또 전도자들은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에도 신앙 수준에 맞게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에게 "단단한 음식"을 먹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들은 아직 영적인 어린 아이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단단한 음식이 아닌 "영적인 젖"으로 먹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을 가르칠 때에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면서 청중들에게 알맞은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강요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진리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강제로 복음을 전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개나 돼지에게 거룩한 것이나 진주를 던지면 그것을 짓밟고 전도자를 해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잠언서 기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 말하지 말찌니, 이는 그가 너의 지혜로운 말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라(잠 23:9)."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 겸손과 사랑의 태도를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소중하기 때문에 무분별한 사람들로 인해 멸시를 받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개나 돼지와 같은 사람들이 복음을 농락하도록 내버려 두면 안됩니다. 진주는 진주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주어야 하며, 거룩한 것도 거룩한 것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주어야 소중하게 취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과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분별하게 복음을 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개와 돼지와 같이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에게 강제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고 나서, 예수님을 위해 박해를 받았다고 자위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무모하게 복음을 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도와 지시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사도 바울을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된 지역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무리하게 복음을 전하는 거보다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죄에 깊이 빠진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진리를 거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술좌석에서 찬송을 부르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것은 거룩하게 취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개나 돼지와 같은 사람인지 분별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님의 인도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면, 성령님께서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1.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을 받는 사람을 분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왜 우리는 복음을 듣는 대상에게 알맞은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 고민하며 연구해야 하는가?

3.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님의 인도에 민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하라!(마7:7-11)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도 같은 기준으로 비판을 받게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부터 바르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자신을 바르게 하지 않고 남을 고치려는 사람은 마치 장님 의사가 환자의 눈에서 미세한 티를 빼려는 것과 같습니다. 눈이 어두운 사람은 남의 눈에서 미세한 티를 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개에게 진주를, 그리고 돼지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보음을 전하면 그는 복음을 멸시하고 전도자를 해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이 멸시받지 않도록 조심해서 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진리와 사람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만일 지혜가 부족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와 분별력을 달라고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자가 얻을 것이요, 찾는 자가 찾을 것이며, 또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7-8)."

 

1.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궁핍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죄에 깊이 감염되어 있는 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죄에 깊이 감염이 되어서 우리의 의지와는 반대로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기 원하면서도 악을 행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만 행한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는자기 안에 강력한 악의 세력이 있어서 자신을 악으로 끌어간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도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죽인 후에야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와 같이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께 달려가서 간절하게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서 그들은 먼저 자신이 얼마나 죄에 깊이 감염되어 있는 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한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고, 또 두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면 우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는 지 알게 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예비된 풍성한 축복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영적 궁핍함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주신 은혜거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 것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은혜를 예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다(마 22: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들을 위해서 혼인 잔치를 연 임금과 같습니다. 왕의 결혼 잔치집은 최상의 것으로 가득 채워진 풍성한 곳입니다. 잔치 집에는 손님들을 위해서 온갖 좋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잔치 집은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천국 백성들을 위해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은혜들을 준비해 주셨습니다(엡 1:3). 하나님은 천국 백성들을 자기 양자와 상속자로 삼으시고(요 1:12), 성령님을 통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자기 자녀들을 진리로 인도해 주시고, 모든 위험과 대적으로부터 지켜 주시며, 죄와 싸워 이길 수 있게 해주십니다(요 16:13, 롬 8:1). 하나님은 천국 백성들이 한 가족이 되어 자신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계서 자기 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축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놀랍고 풍성합니다.

 

3. 그러나 이 은혜는 겸손히 구하는 자가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과 은혜는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은혜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교만하여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이 풍성한 은혜를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자만에 빠져서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들을 불러서 그 자리를 대신 채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난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고, 찾고, 또 두드리는 사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우리는 산상수훈의 교훈을 들으면서 우리가 과연 이렇게 수준 높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국 백성들을 위해서 성령님 안에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고, 또 두드려야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신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4.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그러면 여기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풍성한 은혜를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눅 11장)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한 가지 비유를 해주셨습니다. 어느 날 밤에 한 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밤이 늦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손님에게 줄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급히 자기 친구를 찾아가서 손님을 대접할 떡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일어나서 떡을 빌려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친구에게 떡을 요구했습니다. 친구가 하도 간곡히 부탁을 하게 되자 그 사람은 귀찮지만 일어나서 친구에게 떡을 빌려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과 인내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또 (눅 18장)에도 비슷한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과부가 된 여인입니다. 그 여인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웃에게 크게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재판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판장은 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재판장을 찾아가서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재판관은 귀찮아서 할 수 없이 그녀의 일을 처리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이 믿음과 인내를 갖고 끝까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겸손함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위해서 준비하신 풍성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 되지 않는 긴 시간을 통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잃지 말고 계속해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밤에 친구를 찾아 가서 손님에게 먹일 떡을 빌려달라고 한 사람처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처럼 응답해 주실 때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녀들을 위해 준비하신 풍성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자기 백성들을 위해 준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9)"

예수님은 기도 응답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예수님은 천국 백성을 자녀로, 그리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어떤 부모가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할 때에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고 할 때에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부모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기를 원합니다. 부모는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자녀만큼은 잘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라는 말을 들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그래? 그것쯤은 나도 알아!"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경우는 매우 적습니다. 우리가 풍성한 신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것에서 생겨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부도덕하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일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먹여주시고 또 입혀주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가 단절된 채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또한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그들의 구원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영광뿐 아니라 고난에도 기쁘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면 모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늘 아버지는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10-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10-11)"

아들에게 해로운 것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도 자기 자녀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합니다. 인간의 부모도 이렇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시고 그것을 유지하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돌보시며, 양육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미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시며 돌보아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자신을 닮아을 수 있도록 훈련하고 양육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갈 때에 우리를 징계하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세상의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지만 한계가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 그들은 지식이 부족해서 자녀들에게 해가 되는 것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이 모든 좋은 것으로 자녀들에게 공급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실수로 해로운 것을 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늘 아버지 안에서 정말로 놀랍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는 좋은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좋은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2:13)" 누가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좋은 것이 성령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과 명예와 지식과 미모를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면 재물과 명예와 지식, 그리고 미모를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정말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언제든지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또 우리는 천국으로 인도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준비해 주신 가장 좋은 것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영생의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바로 성령님 안에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 1:3)..."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해서 성령님 안에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살아갈 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고 참된 경건, 즉 신앙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첫째로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해 줍니다. 둘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요 6:13). 셋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해줍니다. 넷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갈 5:22-23). 성령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희락과 기쁨을 주시고, 인내와 자비와 선한 성품을 주이며, 또한 충성되고 온유하며 절제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다섯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사단과 악한 영들과 사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 아에 사는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섯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십니다(행 1:8).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느력을 받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일곱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모든 필요한 것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산상수훈의 교훈을 주신 것도 바로 이러한 성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탁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 안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 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 성령님 안에서 준비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이 모든 축복과 은혜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1.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기 때문에 얼마나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 이야기해보자.

2.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는 일에 대해서 세상의 부모와 하나님이 어떻게 비슷하고 또 다른 지 이야기 해보자.

3.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예비해 주신 좋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최상의 선물을 얻기 위해서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는가?

티와 들보(마7:1-5)

"너희는 판단받지 아니하도록 판단하지 말라. 2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3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하지 못하느냐? 4 보라, 너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어찌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네 눈에서 티를 빼내게 하라, 하겠느냐? 5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 버리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 버리리라."(마 7:1-5)

본문에서 獵纛?판단에 근거한 평가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역자 주(註):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을 피하거나, 모든 형태의 판단을 금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별력이나 지혜를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는이들에게 판단하고 분별하고 구별할 것을 명령합니다(고전 6:1-8;5:9-13;14:29; 고후 6:14; 딤전 3:1-13;살전 5:14). 세상은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심지어 사탄의 사역자들로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깨어있어야 하고 "영들을 시험해야"합니다(요일 4:1)>

주님은 정죄 문제에 관하여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남을 정죄하는 이 성향을 피하려 애쓰면서 반대편 극단으로 돌아가 다시 잘못된 입장을 취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와 같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균형 잡힌 삶의 하나입니다. 믿음으로 걷는 것은 칼날 위를 걷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에 대하여 많은 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편이나 저편으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편이나 저편의 오류를 피하여 계속해서 진리의 중심을 붙들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분별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리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이 남을 정죄하는 무서운 위험과 최종적인 의미에서 심판을 선언하는 무서운 위험을 경고하고 있음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입니다. 이 신상설교에서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내내 마음에 두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율법관과 생활 방식에서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구제할 때 자랑하며 과시했습니다. 그들은 길모퉁이에서 기도하는 것과 성구함을 넓히는 것에서 과시적(誇示的)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금식 중임을 널리 알렸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이 세상사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 금전만능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특별한 점에서도 그들을 마음에 두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누가복음 18:9-14에서 보여주신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시여,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크게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 태도가 바리새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애써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태도는 초대교회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하나님의 교회를 계속하여 괴롭혀 왔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히는 것도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주제에 접근할 때 이 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요 8:7).

산상설교 중에서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이 말씀보다 더 우리에게 정죄감을 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얼마나 죄가 많은지요! 이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망치고 우리로부터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얼마나 황폐케 했으며 지금도 황폐케 하고 있는지요! 이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대한 말씀입니다.

이 주제는 고통스럽지만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설교가 우리에게 와서 말씀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이곳에서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는 우리의 책임으로 이것을 무시합니다. 비록 이 주제가 고통스럽겠지만 너무나 중요하므로 필히 계속해서 더 분석해야 할 것입니다.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단지 상처를 무시하거나 또는 상처 부위만을 피상적으로 치료해서는 안됩니다.

올바른 치료법은 그 상처를 탐침(probe)으로 조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깨끗해지고 정결해지고 건강해지려면 반드시 탐침을 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깨끗해지기 위하여 이 상처를, 혼 속에 썩고 있는 이 창(瘡)을 탐침으로 조사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이 위험은 어떤 위험입니까?
우선 이 영은 어떤 점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영의 일종이라 하겠습니다. 정죄하는 이 영은 어떤 영입니까? 이 영은 스스로 의롭다하는 영입니다. 그 배후에는 항상 자아(自我)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영은 항상 자기의(自己義)의 나타냄이요, 우월감이요, 다른 사람들은 틀리고 우리는 모두 옳다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이 영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만듭니다. 이 영은 항상 경멸하는 태도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영입니다. 이러한 것에 곁들여서 이 영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며 경멸적으로 대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바리새인들을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의 영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핵심부는 혹평적 성향인 것 같습니다. 비평적인 것과 혹평적인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참된 비평은 뛰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참된 비평은 거의 없습니다. 문학이나 미술이나 음악이나 기타 어떠한 것이든지 참된 비평은 인간 정신의 최고의 활동 중 하나입니다.

참된 의미에서의 비평은 결코 파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건설적입니다. 그것은 감상입니다. 비평을 하는 것과 혹평적인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서 사용하신 용어의 의미에서 판단하는 죄를 범하는 사람은 바로 혹평적인 사람으로서, 비평을 위한 비평을 기뻐하며 그것을 즐기는 사람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람은 결점을 발견하기를 기대하고, 실제로 결점을 발견하기를 바라며 비평을 요청 받은 일에 접근하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주님께로부터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 그대로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만날 것이며,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표현한대로 우리가 그 때에 부끄럽지 않기를 원한다면, 지금 주의합시다(요일 2:28).

만일 우리가 심판날에 담대함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생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우리가 판단하는 바로 그 판단으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하늘에 가게 될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곳 이생에서, 그리고 이생 후에 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이요, 우리 주님께서 산상설교의 이 대목에서 첫 번째 말씀으로 요약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판단받지 아니하도록 판단하지 말라."

이 말씀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불친절한 말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너희도 그들에 대하여 절대로 불친절한 말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옳으며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자신을 심판에 노출시키고 있으며, 장차 이러한 일들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잃지는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는 잃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제시하신 바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두 번째 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우리는 이것을 한 원리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판단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낳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의 표준을 정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거니와, 이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은 항상 '앙갚음을 당한다'고들 말합니다.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면밀하게 살피고 조사하여 그들 속에 있는 사소한 결함에 대해 말했던 사람들이 거꾸로 그들에 의해 자신들이 판단을 받을 때에 흔히 크게 놀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는 판단을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들의 기준과 자신들의 척도로 판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술을 여기서 그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필히 더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실지로 선언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가 앞에서 설명해 온 이 판단으로, 우리 자신의 표준에 따라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해석에 대한 몇 가지 성경의 권위를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12장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봅시다.
거기서 주님은 "알지 못하고 채찍 맞을 일을 한 사람은 적게 맞으리라. 누구든지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사람들이 많이 맡긴 자에게는 그들이 더 많이 달라고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48).

다음으로 로마서 2:1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오 사람아, 판단하는 네가 누구이든지 변명하지 못할 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 스스로를 정죄함이니, 이는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너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네가 알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옳은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네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에 대한 가장 명백한 말씀은 야고보서 3:1에 주어졌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구절이지만, 야고보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롭다함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야고보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 무시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야고보가 이 특정한 문제에 관해 어떻게 말씀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내 형제들아, 많이 선생이 되지 말지니,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앎이라".

달리 말하면, 만일 여러분이 권위자인체 한다면, 만일 여러분이 선생이 된다면, 그래서 여러분이 선생으로 권위자로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권위에 의해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바로 그 주장에 의하여 여러분은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권위자로 자청하십니까? 좋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여러분에게 적용될 바로 그 표준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구절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판단받지 아니하도록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진술의 하나입니다. 내가 성경에 대해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까? 만약 그렇게 주장한다면 나는 내가 주장하는 그 지식의 관점에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이 일들에 관하여 실지로 잘 알고 있는 종이다'라고 주장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매를 많이 맞는다고 해서 결코 놀라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권위자로 자처한다면, 바로 그 표준에 따라 판단을 받을 경우 우리는 불평을 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불평할 어떠한 근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지식을 갖고 있다면, 필히 이 지식에 맞는 삶을 삶으로 이 지식을 보여줘야 합니다. 내가 주장한 그 주장에 의해 나 자신이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유심히 살피는 일에 용의주도하다면, 바로 그 표준이 내게로 돌아올 것이며, 나는 전혀 불평할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불평한다면 내게 이런 반론이 주어질 것입니다.

'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것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경우에 대해서는 왜 실행하지 않느냐?'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놀랍고 두려운 생각입니다. 내가 알기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이 죄악스러운 습관으로부터, 그리고 그같이 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더럽고 추악한 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주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이유로 인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3∼5 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하지 못하느냐? 보라, 너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어찌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네 눈에서 티를 빼내게 하라, 하겠느냐?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 버리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 버리리라."

이같은 풍자가 일찍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보다 더 완전한 반어법의 실예가 일찍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얼마나 값진 것인지요. 이같은 방식의 논증을 많은 원리의 형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세 번째 이유로 우리가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판단을 시도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이 이러하기 때문에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판단을 받을 것이고, 판단의 표준을 우리가 결정한다는 사실을 필히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주님은 '잠깐 멈추어라, 너희는 판단할 능력이 없으므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이렇게 증명하십니다. 주님은 우선 우리가 의나 참된 판단에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십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관심을 두었다면, 그것을 우리 안에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지로 진리와 의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라고 자신을 설득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기를 원치 않으며 비판하기를 원치 않으며, 오직 진리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진실로 진리에 관심을 두었다면 너희 자신을 판단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의 관심은 실지로 진리에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공평한 논증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유일한 관심사가 의와 진리에 있으며 인신 공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는 항상 자신에 대하여 가장 가혹한 비평가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직업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래이든, 연극이든, 그림이든, 기타 어떤 것이든,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와 참된 비평가는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객관적 표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는 객관적 표준을 갖고 있지 않다. 너희는 진리와 의에 관심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항상 그랬듯이 너희 자신은 눈감아주고 다른 사람들만 비판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이 이같은 원리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사람들에만 관심을 갖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혹평의 영은 원리보다는 인신 공격에 관심을 갖는 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것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거리입니다.
우리는 실지로 특정한 주제나 원리가 아니라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제거하기보다는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혹평의 영은 우리로 참된 판단을 할 수 없게 합니다.
만약 편견이 있다면, 만약 사적인 감정과 개인 의사가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참된 심문관이 아닙니다.

율법조차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배심원중 한 사람과 재판받고 있는 사람이 어떤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그 배심원은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배심원에게 요구되는 것은 공평입니다.
절대로 편견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사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편파적이지 않은 객관적인 재판이어야 합니다.

바른 재판이 되려면 사전에 반드시 사적인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에 적용할 때, 우리는 우리가 개인이나 인신 공격에 너무나 관심을 갖기 때문에 전혀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판단에는 이처럼 숨은 동기가 너무나 잦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과 그의 행동을 구별하는데 너무나 자주 실패합니다.


주님의 분석을 따라가 보기로 합시다. 주님의 다음 논증은 4절에 있습니다.

"보라, 너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어찌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네 눈에서 티를 빼내게 하라, 하겠느냐?"

이 말씀은 최고의 풍자입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의 상태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전혀 무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허물에 큰 관심을 갖는 체하고 그들의 유익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그들 속에 있는 이 사소한 결점으로 괴로워하며 이 티를 제거하고 싶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티를 제거하는 일이 너무 섬세한 과정이기 때문에 너희가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눈 속에 있는 이 들보가 여러분을 그렇게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것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매우 통렬한 비평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 비평에는 눈먼 사람이 다른 눈먼 사람을 인도하려고 애쓰는 것이 매우 우스꽝스런 일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우스꽝스러운 일은 눈먼 안과의사라고 쓰여있습니다.
눈먼 안과의사가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눈먼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아무 쓸모가 없다면 눈먼 안과의사는 얼마나 더 쓸모가 없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는 체하는 사람의 민감한 눈에서 작은 알갱이의 티를 빼낼 수 있을 만큼 분명히 볼 수 있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자신의 눈이 완전히 맑은지를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의 눈 속에 있는 들보에 의해 눈이 멀어 있는 한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끝으로, 주님은 실제로 우리를 위선자라고 정죄하고 계십니다.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 버리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 버리리라".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문제의 진상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실제로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정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척합니다.
우리는 이 결점을 발견하는데 매우 고통스러운 척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바와 같이 (이것은 무서운 부분입니다) 사실은 그 결점을 발견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칭 친구인 것처럼 찾아가서는 '이런 결점이 당신 속에 있다니, 매우 부끄럽군요'라고 말합니다.
이같은 행동에 의해 흔히 나타나는 악의와, 이러한 사람이 흔히 즐기는 쾌감은 어떠한 것인지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너희가 이 문제에 순수하며 참되다면, 너희 자신에게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첫째 -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버려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버리리라."

이것을 이같이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면, 그리고 그들에게서 결점과 허물과 연약함과 약점을 제거하고 싶다면, 먼저 여러분의 영과 여러분의 태도 전체가 잘못되었음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판단과 혹평과 비판의 영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미세한 티와 대조해 볼 때 실지로는 들보와 같습니다.

주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너희의 이 판단하는 영보다 더 무서운 형태의 죄는 없다는 것을 알아라. 그것은 들보와 같다. 다른 사람이 불륜과 부도덕과 정욕의 죄에 빠지거나, 여기 저기에서 작은 과실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 속에 있는 마치 들보와 같은 이 영과 비교할 때, 그것은 단지 눈에 있는 작은 티일 뿐이다. 너희 자신의 영에서부터 시작하라."

주님께서 바꾸어서 이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자신을 온전히 정직하게 직시하라. 자신에 관한 진실을 인정하라!"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행해야 합니까?
매일 고린도 전서 13장을 읽으십시오,
매일 우리 주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를 살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진실에 대하여 직시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 관하여 한 말을 앉아서 분석해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의미하는 바가 실지로 무엇인가를 자문해 보십시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괴로운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선언을 정직하고 참되게 살핀다면, 우리는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충분히 겸손해져서 비판과 혹평의 영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논리의 표본입니까!
사람이 진정 참되게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면 결코 누구도 잘못된 방법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정죄하고 자기 손을 씻고 자기를 깨끗케 하고자 애쓰는 일에 모든 시간을 사용합니다.
비평과 혹평의 영을 제거하는 한 가지 길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먼지와 같이 낮추어, 그 결과 우리의 눈에서 들보를 제거하며, 필연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우며 그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빼낼 수 있는 적합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눈에서 티를 빼내는 과정은 매우 어려운 수술입니다.
눈보다 더 민감한 기관은 없습니다.
손가락이 눈에 닿자마자 눈은 닫힙니다.
눈은 너무나 예민합니다.
눈을 치료하는데 무엇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동정과 인내와 침착과 냉정입니다.
이것들이 요구됨은 수술의 섬세함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영적 영역으로 옮기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혼을 다루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 속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손대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작은 티를 빼낼 수 있을까요?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겸손해야 하고, 동정심이 있어야 하며, 자신의 죄와 자신의 가치 없음을 깊이 인식하여, 그 결과 다른 사람 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때 정죄하기는 커녕 슬피 울고 싶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동정과 연민으로 가득합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돕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제거하는 것을 심히 기뻐하여 그도 동일한 기쁨과 즐거움을 갖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맑은 시력을 가진 후에야 비로소 영적 안과의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직시하고, 이 들보를 제거하며,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겸손하고 이해하며 동정적이고 관대하며 사랑이 넘치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바, 다른 이에게"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그를 도울 수 있습니다(엡 4:15).

이 일은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일들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감사하옵게도,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할 때, 여러분은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동일한 진리를 말하지만, 여러분으로 하여금 즉시 자신을 방어하도록 이끌고, 그렇게 하여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도록 이끄는 태도로 말합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야고보서를 인용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각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할지니라."(약 1:19).

이상 말씀드린 세 가지 이유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갈보리와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에 비추어서 이러한 진리를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이생에서 징계를 피하고 싶다면, 그리고 - 이것이 성경의 말씀이거니와 - 오는 세상에서 손실의 괴로움을 피하고 싶다면, 먼저 여러분 자신을 판단하는 것 외에는 판단하지 마십시오

- 마틴 로이드 죤스 구하라!(마7:7-11)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도 같은 기준으로 비판을 받게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부터 바르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자신을 바르게 하지 않고 남을 고치려는 사람은 마치 장님 의사가 환자의 눈에서 미세한 티를 빼려는 것과 같습니다. 눈이 어두운 사람은 남의 눈에서 미세한 티를 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개에게 진주를, 그리고 돼지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보음을 전하면 그는 복음을 멸시하고 전도자를 해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이 멸시받지 않도록 조심해서 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진리와 사람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만일 지혜가 부족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와 분별력을 달라고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자가 얻을 것이요, 찾는 자가 찾을 것이며, 또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7-8)."

 

1.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궁핍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죄에 깊이 감염되어 있는 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죄에 깊이 감염이 되어서 우리의 의지와는 반대로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기 원하면서도 악을 행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만 행한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는자기 안에 강력한 악의 세력이 있어서 자신을 악으로 끌어간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도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죽인 후에야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와 같이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께 달려가서 간절하게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서 그들은 먼저 자신이 얼마나 죄에 깊이 감염되어 있는 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한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고, 또 두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면 우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는 지 알게 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예비된 풍성한 축복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영적 궁핍함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주신 은혜거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 것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은혜를 예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다(마 22: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들을 위해서 혼인 잔치를 연 임금과 같습니다. 왕의 결혼 잔치집은 최상의 것으로 가득 채워진 풍성한 곳입니다. 잔치 집에는 손님들을 위해서 온갖 좋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잔치 집은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천국 백성들을 위해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은혜들을 준비해 주셨습니다(엡 1:3). 하나님은 천국 백성들을 자기 양자와 상속자로 삼으시고(요 1:12), 성령님을 통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자기 자녀들을 진리로 인도해 주시고, 모든 위험과 대적으로부터 지켜 주시며, 죄와 싸워 이길 수 있게 해주십니다(요 16:13, 롬 8:1). 하나님은 천국 백성들이 한 가족이 되어 자신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계서 자기 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축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놀랍고 풍성합니다.

 

3. 그러나 이 은혜는 겸손히 구하는 자가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과 은혜는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은혜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교만하여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이 풍성한 은혜를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자만에 빠져서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들을 불러서 그 자리를 대신 채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난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고, 찾고, 또 두드리는 사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우리는 산상수훈의 교훈을 들으면서 우리가 과연 이렇게 수준 높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국 백성들을 위해서 성령님 안에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고, 또 두드려야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신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4.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그러면 여기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풍성한 은혜를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눅 11장)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한 가지 비유를 해주셨습니다. 어느 날 밤에 한 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밤이 늦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손님에게 줄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급히 자기 친구를 찾아가서 손님을 대접할 떡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일어나서 떡을 빌려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친구에게 떡을 요구했습니다. 친구가 하도 간곡히 부탁을 하게 되자 그 사람은 귀찮지만 일어나서 친구에게 떡을 빌려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과 인내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또 (눅 18장)에도 비슷한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과부가 된 여인입니다. 그 여인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웃에게 크게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재판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판장은 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재판장을 찾아가서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재판관은 귀찮아서 할 수 없이 그녀의 일을 처리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이 믿음과 인내를 갖고 끝까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겸손함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위해서 준비하신 풍성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 되지 않는 긴 시간을 통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잃지 말고 계속해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밤에 친구를 찾아 가서 손님에게 먹일 떡을 빌려달라고 한 사람처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처럼 응답해 주실 때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녀들을 위해 준비하신 풍성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자기 백성들을 위해 준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9)"

예수님은 기도 응답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예수님은 천국 백성을 자녀로, 그리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어떤 부모가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할 때에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고 할 때에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부모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기를 원합니다. 부모는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자녀만큼은 잘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라는 말을 들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그래? 그것쯤은 나도 알아!"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경우는 매우 적습니다. 우리가 풍성한 신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것에서 생겨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부도덕하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일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먹여주시고 또 입혀주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가 단절된 채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또한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그들의 구원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영광뿐 아니라 고난에도 기쁘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면 모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늘 아버지는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10-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10-11)"

아들에게 해로운 것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도 자기 자녀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합니다. 인간의 부모도 이렇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시고 그것을 유지하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돌보시며, 양육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미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시며 돌보아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자신을 닮아을 수 있도록 훈련하고 양육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갈 때에 우리를 징계하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세상의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지만 한계가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 그들은 지식이 부족해서 자녀들에게 해가 되는 것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이 모든 좋은 것으로 자녀들에게 공급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실수로 해로운 것을 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늘 아버지 안에서 정말로 놀랍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는 좋은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좋은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2:13)" 누가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좋은 것이 성령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과 명예와 지식과 미모를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면 재물과 명예와 지식, 그리고 미모를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정말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언제든지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또 우리는 천국으로 인도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준비해 주신 가장 좋은 것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영생의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바로 성령님 안에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 1:3)..."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해서 성령님 안에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살아갈 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고 참된 경건, 즉 신앙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첫째로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해 줍니다. 둘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요 6:13). 셋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해줍니다. 넷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갈 5:22-23). 성령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희락과 기쁨을 주시고, 인내와 자비와 선한 성품을 주이며, 또한 충성되고 온유하며 절제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다섯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사단과 악한 영들과 사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 아에 사는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섯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십니다(행 1:8).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느력을 받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일곱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모든 필요한 것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산상수훈의 교훈을 주신 것도 바로 이러한 성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탁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 안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 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 성령님 안에서 준비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이 모든 축복과 은혜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1.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기 때문에 얼마나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 이야기해보자.

2.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는 일에 대해서 세상의 부모와 하나님이 어떻게 비슷하고 또 다른 지 이야기 해보자.

3.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예비해 주신 좋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최상의 선물을 얻기 위해서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는가?著 [산상설교 연구]에서 발췌 (99.9.28 譯) -

 

 

황금률(마 7:12)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고 남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인간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의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자만심과 우월의식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같은 비판의식에 빠지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비판하면 자신도 같은 원리로 비판을 받게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바로 잡도록 촉구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복음과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진리를 주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복음을 짓밟고 멸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구하는 자가 얻고, 찾는 자가 찾으며, 또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7:12)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에 대한 교훈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우리는 이 가르침을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이 황금률에는 이웃사랑의 원리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이 황금률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그러므로

 

황금률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황금률이 앞에 나왔던 말의 결론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그러므로"가 어떤 말을 결론 짓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 중에 중요한 입장 몇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일부 사람들은(호크마 주석 pp. 297-298) 12절 말씀을 "산상수훈 전체(마 5-7장)의 결론"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신 말씀에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12절에 나오는 '율법과 선지자'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성경에서 구약성경을 둘(율법과 선지서)로 구분하여 부를 때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12절을 산상수훈 전체의 요약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어떤 사람은(로이드 존스) 12절의 말씀을 (마 7:1-11)의 결론으로 보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7:1-11)에 예수님의 세 가지 교훈(비판(1-6), 분별(7), 기도(8-11))이 기록되어 있으며, 12절은 이 세 가지 교훈의 결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어떤 사람은 12절을 (마 7:1-7)의 결론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7:8-11)을 괄호로 묶어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 7:1-7)에서 "비판"과 "영적 분별"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8-11)에서 잠시 주제를 전환해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셨고, 그후에 12절에서 다시 (1-7)에 나오는 비판과 영적 분별에 대한 교훈에 대해 결론을 니리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 가지 입장 중에서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세 가지 입장은 모두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 옳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첫 번째 견해는 12절의 교훈이 "율법과 선지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또 12절의 내용이 성경 전체의 정신을 요약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비해 두 번째와 세 번째 견해는 문맥의 흐름에 자연스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에서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후에. 12절에서 결론으로 "그러므로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는 것은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 가지 견해 중에서 어느 하나만 선택하는 것보다는, 세 가지 견해를 종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즉 우리는 원칙적으로 12절의 교훈을 (마 7:1-7)의 교훈의 결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이 가르침이 구약성경의 이웃 사랑의 정신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은율과 황금율

우리는 12절의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 황금률이 모든 율법의 정신가장 잘 요약해 주고 있는 최상의 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황금률과 대조를 이루는 가르침 중에 "은율"이라는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은율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자신에게 싫은 일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라!" 또 유대 랍비인 힐렐도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너 자신에게 일어나기 원하지 않는 일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 이러한 교훈들은 황금률을 소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교훈을 "은율"이라고 부릅니다. 이 교훈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교훈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로 "은율"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신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황금률"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힘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은율"은 하나님과 관계 없이 인간 상호간의 입장에만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황금률은 하나님과 이웃 모두에게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셋째로 은율은 소극적으로 남이 싫어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반면, 황금률은 적극적으로 남이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고,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홤금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다른 사람들이 네게 해주기를 원하는 모든 것들을...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기적인 계명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계명을 "내가 남에게 좋은 대접을 받기 위해서 남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기적인 계명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자신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이웃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기 원하는 대로 남들도 우리에게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빠져서 이웃도 나와 똑같이 존중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사랑을 받기 원하면서도 우리가 먼저 남을 사랑하려고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황금률은 우리가 남에게 사랑을 받고 싶으면 우리가 먼저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남에게 칭찬듣기 원하면서도 우리가 먼저 남을 칭찬하는 데에는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황금률은 우리가 남에게 칭찬받기 원하면 우리가 먼저 남을 칭찬하고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황금률은 우리 이웃이 나와 똑같이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천하보다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을 천하보다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천하보다 귀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서로 자기 몸처럼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성령님께서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똑같이 너희가 남에게 행하라!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남에게 대접 받기 원하는 일들이 있으면 그 일들을 이웃에게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려면 다음과 같이 하면 됩니다. 우리는 먼저 내가 이웃에게 받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목록들을 작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이웃에게 사랑받고 또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단점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이웃이 우리를 수용하고 용납해 주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웃이 우리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주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구체적인 목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목록이 구체적일수록 우리는 남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남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목록을 만들면, 그 후에 우리는 그 일을 우리 가족과 이웃에게 행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인정하며, 그들의 단점과 실수를 덮어주고, 또 그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 원리는 다른 모든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을 사랑과 정의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의 장애물-인간의 죄성

우리는 대부분 이 원칙이 옳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 원칙을 실천하는 데에는 매우 인색하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가 먼저 남을 사랑하지 않고, 남이 먼저 나를 사랑해 주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남을 대접하지 않으면서 남이 나를 대접해 주지 않았다고 분노하고 서운해 합니다. 우리는 남이 먼저 나를 대접해 주면 나도 남을 대접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에게 대접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신이 남을 대접하는 일에는 매우 인색합니다. 바로 이러한 일로 인해서 세상은 이기적이고 다툼과 분쟁이 가득한 곳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에게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너희가 먼저 남에게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우리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 우리가 남을 먼저 사랑해도 남이 나를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주고 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랑을 주고 받는 일에 매우 어색해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이웃을 사랑해도 이웃이 우리를 사랑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남을 사랑하고 대접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일을 계속하면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주변이 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자기 중심적인 태도, 즉 이기심입니다. 사탄은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을 통해서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은 너무 강력해서 우리는 번번히 결심만 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러한 이기심을 해결해야 다툼과 분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사랑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각 나라의 정부들은 이를 위해서 많은 예산을 교육에 투자해왔고, 또 여러 가지 정치와 경제 제도들을 실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류의 시도들은 부분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정의는 내가 먼저 남을 사랑하고 대접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먼저 이웃을 사랑하고 대접하기 전에는 어떠한 교육이나 제도도 사랑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지식과 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분쟁과, 계급 투쟁, 그리고 수많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왜 현대사회가 수많은 지식과 정보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분쟁과 다툼을 해결하고있지 못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먼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수많은 교육자들과 정치가, 윤리가, 그리고 사상가들이 사랑과 정외에 대해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먼저 남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과 정의로운 사화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이유는 아담 이후로 인간들이 크게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기심의 죄성이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이기적인 죄성은 우리를 자기 중심적이 되게 하여 먼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이웃 사랑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이 맞다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이웃을 대접하라고 하면 거부하고 반발합니다. 그들은 남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데 왜 내가 먼저 남을 사랑해야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들은 먼저 남이 나를 사랑해야 나도 그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아담 이후로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웃 사랑의 타당성은 인정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죄성으로 인해 이웃 사랑을 실천할 힘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 존재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남이 먼저 나를 사랑하고 대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황금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기심을 제거하는 일은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일은 오직 죄보다 더 강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성합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고, 다음 시간에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예수님은 황금률이 "율법과 선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의미합니다. 개역 성경은 구약성경을 4부분으로(모세 오경,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구약성경은 구약성경을 2부분(율법과 선지자), 또는 3부분으로(모세 오경, 선지서, 성문서) 구분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을 둘로 구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률이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황귬률이 구약성경의 요약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황금률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말했을까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의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전체에 걸쳐서 율법학자들의 그릇된 율법관을 바로 잡는 데 큰 관심을 쏟고있습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정신보다 문자에 치우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또 그들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기 보다, 소극적으로 어떤 일을 금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남의 생명을 해치지만 않으면 6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생각했고, 부정한 성관계만 갖지 않으면 7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들은 남의 물건에 손만 대지 않으면 8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생각했고, 법정에서 거짓 증언만 하지 않으면 9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문자보다 그 율법을 주신 정신을 이해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율법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에 모든 율법을 바르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의 정신을 잃어버린 채 율법의 문자에 매달리면 율법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율법 안에는 금령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명령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6계명은 이웃의 생명을 내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고 존중하기 위해 주어진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남의 생명을 해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웃의 생명을 돌보기 위해서 그들의 복지를 위해서도 노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7계명도 이웃의 가정을 내 가정처럼 지키기 위해서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도 부정한 성적 관계를 금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웃의 가정의 복지를 위해서 노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8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명령은 이웃의 재물을 내 재물처럼 보호하기 위해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도 남의 물건에 손대는 것을 금할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요구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남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제 1-4계명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할 것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모독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5-10계명은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부모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공경하며 순종해야 합니다(5계명). 또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보호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이웃의 생명을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6계명).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정이 보호되기를 원하면 우리가 먼저 이웃의 가정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재산이 보호 받기를 원하면 우리도 이웃의 재산에 손대지 말아야 합니다(8계명). 또 우리가 거짓 증언에 의해 해를 받기 원치 않으면 우리 역시 이웃을 해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9계명).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소유를 보호 받고 싶으면 우리 역시 남의 소유를 탐내는 일을 금해야 합니다(10계명). 이와 같이 십계명은 남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주어진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

율법은 모세와 예수님 당시에 모두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현대인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문자에만 치우쳐서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직접 들었지만 자주 율법을 거역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도 율법에 정통했지만,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과 성경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자주 실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황금률을 좋은 법이라고 감탄하지만, 그 법을 실천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황금률은 감탄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천하기 위해서 주어진 법입니다. 우리가 황금률을 실천하기 시작하먄 우리의 삶은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원리대로 살아가면 큰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산상 수훈을 말씀하신 후에 이 교훈에 대한 실천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황금률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축복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 법이 옳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천하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황금률 실천을 거부하는 이유-타락한 본성(죄)

사람들이 황금률의 실천을 거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담의 타락 후에 죄성이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옳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지킬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선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들 안에 있는 강한 죄성이 그들을 악으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부패와 죄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산상수훈의 원리가 옳다는 일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을 실천하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안에는 강력한 타락한 본성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못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7)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을 알아도 그것을 행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황금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실천하라고 하면 난처해 합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되어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웃보다 자신을 더 사랑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도 나와 똑같이 소중하며, 따라서 우리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 생활 현장으로 들어가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부패하여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존재 하는 죄의 세력은 우리를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른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남이 나를 먼저 사랑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남을 사랑하는 것은 거부합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속성은 아담이 사탄을 좇아 하나님을 거역한 결과로 주어진 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죄"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남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면 크게 분노하면서도 너무나 자주 남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을 축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비로 대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은 적게 일하고 많이 받으려고 하고, 고용주는 많이 일하게 하고 적게 주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사회는 자주 파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국가들도 이웃 나라에 대해서 충분한 배려하지 않고 자국의 입장을 상대국에게 강요합니다. 이로 인해 국가 간에 전쟁과 분쟁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류의 마음 안에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죄의 본성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적인 본성이 우리가 황금률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어떻게 황금률을 실천할 수 있는가? - 하나님 중심적인 삶 -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이기적인 본성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문제 해결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율법을 보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순서를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과 이웃을 보기 전에는 자신과 이웃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광스러운 존재인 동시에 부패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이웃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알고 소중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부패한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사신을 발견하게 되면 이웃도 부패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웃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옳습니다.

 

황금률의 완성 - 십자가와 성령 -

황금률의 원리가 가장 분명하게 적용된 곳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부정이웃 사랑의 정신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배신한 인간을 먼저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먼저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타적인 희생으로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역한 인간을 먼저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들을 희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접을 받기 원하는 대로 먼저 우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정신은 이웃을 향해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이웃 사랑의 도이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자기 부정이웃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또 하나님은 천국 백성들을 돕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힘으로 우리 안에 있는 강력한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이 죄의 세력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도와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이기심과 지기 중심적인 죄성을 극복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르는 사람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게 되면 이기적인 마음을 이타적인 마음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사랑의 열매를 맺게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황금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살 때에 사랑과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원리를 따르게 되면 우리가 죄의 세력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황금률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1.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2. 왜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 것이 이웃 사랑을 위해 필수적인지 말해보자.

3. 왜 십자가와 성령을 황금률 실천의 열쇠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최영찬>

 

 


황금률(마 7:12)

 

그러므로 모든 일들에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해 주기를 바라는 것들을, 이처럼 너희도 그들에게 행해 주어라. 이것이 바로 율법과 예언자들(이 말하는 바)이다. (마 7:12)

이 말씀은 “황금률”이라는 별명이 붙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의 산상수훈(마 5-7장)의 결론 부분에 자리하여 다른 모든 명령들을 결합하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황금률은 산상수훈의 다른 모든 명령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게 하는 열쇠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이 황금률의 실천을 통해, 우리가 율법과 예언자들(즉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을 배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부 사항을 좀 더 관찰해 보면, 이 황금률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이 명령은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모든 일에 적용해야 합니다.

둘째로,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해 주었으면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그것을 그 사람들에게 먼저 행해 주라고 하십니다.

하루 종일 직장 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한 그리스도인이 피곤한 몸으로 퇴근을 합니다. 집에 도착하여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고 짧은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제가 지금 정말 피곤한데요, 그렇지만 집에 들어가자마자 주님이 명령하신 황금률을 잘 지킬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제가 들어가자마자 환한 얼굴로 가족들을 환영해 주겠습니다. 가족들이 하루 종일 받은 스트레스를 제가 받아주고 위로해 주겠습니다. 따듯하게 안아주고 격려의 말을 하겠습니다. 수고해 주어 고맙다고 말하겠습니다. 성령님 제게 능력을 주세요.”

퇴근하는 이 사람이나 집에서 그를 맞이하는 가족이나 모두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황금률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다음 장면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요.

 

 

이렇게 일상 속에서 황금률을 실천하려고 하다 보면, 점점 이 황금률이 그저 듣기 좋은 금언이 아니라, 우리의 신념과 세계관을 흔들어 놓는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황금률에 대해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생각들로 나가게 됩니다.

첫째로, 황금률은 “모든 일에” 적용해야 합니다. 즉, 내가 호의를 느끼는 동류 집단에게만 황금률을 적용하지 않고 미워하는 원수들에게도 적용해야 합니다. 성별이나 노소나 빈부,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지식이 있거나 없거나, 출신 국가나 외모 등등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여 달리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 모든 사람에 대해 황금률을 행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황금률을 지키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섬김을 받기보다는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게 됩니다. “너희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시중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 사이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될 것이다”(마 20:26-27). 황금률은 모든 일에서 자기를 높이지 않고 낮추도록 연습하게 하는 명령입니다.

셋째로, 황금률은 나 자신의 본성(옛사람, 엡 4:22)을 이용해서 지혜를 얻는 방법입니다. 사람의 악은 부패하고 병든 속마음에서 솟아 나옵니다(막 7:20-23). 그러므로 우리가 속에서 올라오는 본성의 욕구를 제어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 행하면 반드시 악인이 됩니다. 그러나 나의 오염되고 비뚤어진 본성이라도 그것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본성적인 이기심을 뒤집어 타인의 입장과 필요를 헤아리고, 황금률을 따라 행하여 그를 섬기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지혜로운 자,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로, 황금률은 쌍방향의 호혜적 교환을 기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을 행하며 대접합니다. 먼저 기대하지 않고 먼저 베풉니다. 그리고 내가 베푼 대로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으로 기뻐하고, 사람의 보상이 아닌 하나님의 상을 기대하며 만족합니다.

다섯째로, 황금률은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이 우리 자신의 자원만으로는 실행 불가능한 요구임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의존하게 만듭니다(마 7:7-11). 황금률은 성령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간구하며 믿음으로 실천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모든 일에서 황금률을 진지하게 실천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태도와 생각과 심지어는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가 필요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의 요구는 사실 불편한 감정, 어색한 느낌, 거부감으로 다가옵니다. 황금률은 우리의 기존 습관과 사고와 신념을 흔들며 재고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황금률을 주신 것은, 이런 불편한 변화 과정을 통해서 결국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의 모습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의 다른 장면에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두 가지 명령으로 요약하셨습니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너의 온 마음과 너의 온 영혼과 너의 온 생각으로써.’ 이것이 크고 첫째가 되는 명령이다. 둘째는 그것과 같은 것인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이 두 명령들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이 매달려 있다. (마 22: 37-40)

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요약한 이 두 가지 명령을 묵상해 보면, 구체적 행위로 실천하라는 요구를 넘어서서 우리의 존재 변화를 겨냥하는 명령인 것 같습니다. 이 명령들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생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임을 알려주며, 그런 모습으로 성숙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신자를 변화시켜 나가시는 방향과 목표를 제시합니다.

황금률은 바로 이 목표 지점으로 나가기 위한 좀 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합니다. 황금률을 모든 일에서 진지하게 구체적으로 실행해 나감으로써,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나갑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할 점이 있습니다. 이 황금률의 실천에는 하나님의 선물이신 성령님의 개입과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습니까? 황금률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을까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이름을 빛내라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으로 제시하신 목표와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기독교 신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명령에 구체적으로 초점을 맞추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닌 자기 종교를 옹호하는 ‘종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목자도 잃고 길도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에 다시 초점을 맞추고, 주님의 산상수훈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일에서 황금률을 실천하는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성령님이 기뻐하시며 즉시 능력을 베풀어 도우실 것입니다.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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