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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있습니까?

by 은총가득 2020. 9. 21.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어떻게 먼저 구하고 있습니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야망은

더 좋은 차, 더 큰 집, 더 큰 명성, 더 큰 찬사와 같은 물질적 필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이 소망은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하지 않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주된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른 그 어떤 것, 더욱 고귀한 무엇을 추구해야 한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가치를,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을,

음식이나 옷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명확한 통치를 언급하신 것이다.

그 통치는 우리가 회개하고 순종하며 믿을 떄 우리의 삶 속에서 시작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통치다.

 

먼저 이 나라를 구한다는 것

우리 자신의 삶에서, 우리의 친지들 가운데, 교회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확산되기를 우선적으로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 나라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 공동체 안에서의 의를 바라신다.

 

#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말씀을 품으려면?

모든 사람은 소망을 품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에게는 두 가지만이 있다.

곧 자기중심의 소망과 하나님 중심의 소망이다.

자신을 위한 소망은 수수할 수도 거창할 수도 있지만

모두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위안과 부, 지위, 자신의 영향력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하나님을 위한 소망은 결코 작거나 수수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이 세상에서 조금 더 영광을 받으시는 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일단 하나님이 왕이심을 확신한 사람은

그분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시기 원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시기를 갈망한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을 품는다.

 

우리가 이 소망을 품을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우리의 물질적 필요가 공급된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다.

 

둘째, 이차적 소망을 가져도 해롭지 않다.

이차적 소망이 우리의 첫 번째 소망 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은사를 개발하고, 기회를 넓히고, 영향력을 확장하고 직업에서 성공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단 자신이 자아를 높이거나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6:33)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위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먼저 구해야 하는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상고해보겠습니다.

 

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우리가 기도할 때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대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기도(마6:9-13)를 가르쳐 주신 후에 이 주기도와 연결해서 하신 말씀이므로 주기도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봐야 합니다.

 

마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오시옵소서)

 

이 기도 대목은 예수님께서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신 대로 주기도 중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한 후에 가장 먼저 나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임하여 오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고 언제 어디에 어떻게 오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시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하여 오게 될 하나님 나라 천국에 대해서 알아야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알 수 있는데 이 천국에 대해서 보다 더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치근 차근 알아가야 합니다.

 

먼저 시편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시78:1-4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이 말씀은 시편의 기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예언으로서 하나님의 옛 비밀한 말을 후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언젠가는 비유를 베풀어 발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 비밀한 말은 천국과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그것이 언제 발표되는 가를 알아봐야 하겠지요?

 

마13:31-35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위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말씀들을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첫째, 시편 78편을 기록한 선지자가 옛 비밀한 것을 비유를 베풀어서 말하겠다고 하신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라는 것과,

둘째, 옛 비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감추어 두셨던 천국비밀이었다는 것과,

셋째, 옛 비밀이 발표된 때는 예수님의 초림 때였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기도해야 할 것은 임하여 오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비유로 감춰져 있으니 이 비밀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유로 감추어져 있는 천국에 대한 모든 비밀을 때가 되면 밝히 깨닫게 해서 천국백성이 될 수 있도록 응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요16:25

이것을 비사(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천국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또한 예수님은 천국비밀을 알지 못하면 이방인이요 외인이며 죄 사함과 그로인한 구원도 없다고 합니다.

 

마4:10-12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감추었던 천국비밀을 비유가 아닌 실상으로 보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때를 기다리며 그 비밀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의 의를 구하라’

 

의(義)는 하나님의 옳은 뜻으로서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주기도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상고해 보면 하나님의 뜻은 하늘(영계)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이와 같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 나라처럼 이 땅(육계)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모세 때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대로 하나님이 거하실 성소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어서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출25:8-9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 찌니라.

 

하나님의 명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식양대로 성소(성막)를 짓게 되었고 그것이 완성되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임했던 것입니다(출40장).

 

한 마디로 하늘의 천국이 모세가 지은 성소로 임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형과 그림자로서 참형상이 아니었으며 이제 참 형상으로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히8:5).

 

히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아서 임하여 오는 하나님 나라(영계의 천국)와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육계의 천국)가 하나가 될 때 이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해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 천국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천국비밀에 대한 말씀을 깨닫게 해주실 때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온전히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이 감춰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천국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서 온전히 아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을 알고 그 비밀의 뜻을 알아서 그 뜻대로 행하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천국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3.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위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모든 것이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라 함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봅시다.

 

마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은 무엇을 먹을 까, 마실 까, 입을 까 하는 육적인 세상살이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육신에 필요한 것들을 이미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마6:25-30).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대부분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 보다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세상적인 일에 대한 잡다한 것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도 이방인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열심히 구하면(마7:7-8), 그 기도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고, 그것에 더하여 우리가 구태여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육신을 위한 것들까지도 다 알아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닐까요?

 

* 결론으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진리)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베풀어서 말씀하신 창세로부터 감추어 두신 하나님의 천국비밀 즉, 하나님의 뜻대로 임하여 오는 하나님 나라와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의 참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서 그 뜻대로 행함으로 하나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백성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기 원하시는 성도님은 말씀의 문을 두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마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의 나라''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우리는 매일 수많은 기도를 하고 있다. 교회는 물론이고 방송과 텔레비전에서도 끈질긴 기도로 원하는 결과를 얻은 간증이 때가 찰 때까지 기도하라는 교훈과 함께 우리를 기도하게 한다. 때로는 어느 교회, 어느 목사님의 기도와 안수가 더 영발이 있다고 하여 수소문해서 먼 길을 찾아 가기도 한다.

 

필자는 진정한 기도 응답에 대해 생각하다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일생을 떠올리게 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끔찍한 방법으로 순교하셨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으셨다. 그러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기도가 부족해서 죽음을 당하셨을까, 아니면 끔찍한 죽음을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마태복음 2639절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이 원하신 바는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고 죽음의 고통을 피하는 것이었지만, 본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겠다고 기도하셨다.

 

즉 하나님의 뜻은 때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죽음까지도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사실을 우리가 알고도 예수님과 같은 기도를 할 수 있을까?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은 결국 죽음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아시고 어떤 믿음과 마음으로 기도를 하셨을까?

 

사실 우리는 수많은 기도를 하지만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또 기도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기도의 대상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만능의 주()이시다. 기도하는 우리는, 그러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구원하신 사랑하는 그의 자녀이다.

 

그리고 기도에 앞서서 이미 그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기도하는 우리에게 영생을 먼저 주셨다(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우리는 이미 영생을 가진 존재로서 기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창조자이고 전능자인 하나님께 그의 아들의 목숨과 바꿀 만큼 그의 사랑의 받고, 이미 그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생을 얻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간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는 명백하다. 이미 영생을 얻은 우리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세상 것이 아닌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밖에는 구할 것이 안 남은 것이다. 이미 영생과 천국을 얻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소원, 즉 크고, 많고,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만 구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참으로 답답하고 섭섭한 노릇이 아닐까, 이미 수십억 재산을 주었는데 돈 1,000원을 안 준다고 계속 섭섭해하고 떼를 쓰는 아이를 보는 심정과 같으실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을 아뢰라고 하셨으니, 우리의 어려움과 두려움, 간절한 소원을 아뢰는 것은 주님이 하라고 하신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병원에 와서 의사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자기 생각만 이야기하고 의사의 처방은 받아들이지 않고 환자 스스로 치료방법을 정하여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우리가 범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이루게 해주시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믿음과 깨달음을 달라는 기도, 즉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밖에는 할 것이 없다.

 

빌립보서 46-7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리라하고 하였다. 모든 것을 아뢰면 다 이루어 주신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기간에 이 나라의 국민인 것이 부끄러운 세월호 대참사가 일어났다. 마음이 아파 텔레비전 뉴스를 보기가 힘들고 그럼에도 매일 밥을 목으로 넘기고 있는 내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다. 그들의 생명을 구해 달라는 수많은 기도와 부르짖음이 나라 전체를 기도 소리로 메우고 있지만, 처음 발표한 생존자 숫자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파도를 멈추고 공기를 불어 넣으셔서 그들을 구해 달라는 기도는 당연하고 모두 동참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한 기도 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생명, 정말 얼마 살아보지도 못한 금쪽 같은 우리 자식들의 죽음에는 이 나라의 어른들을 꾸짖으시고, 특별히 이 땅의 기독교인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의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해달라는 기도와 더불어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는 기도가, 그리고 주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침묵이 필요하다.

 

그 동안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선교사를 세계 두 번째로 많이 보내 는 한국 기독교라고 하면서 얼마나 교만했던가. 마치 하나님의 축복과 사명은 한국 기독교가 독차지 하고 있는 양 으스대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들은 각종 형사사건과 세습과 호화 건축시비로 얼룩져 있는데, 그 일을 행한 목사님, 교회 그리고 교인들은 아직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결코 크고 많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세상 가치를 축복으로 삼은 기도 응답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 한국교회의 현실이 너무나 확실하게 보여 준다. 부자가 되어서 하나님 영광을 빛내고자 했던 한국기독교의 목표는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성경(마태복음 19:24)에도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결코 우리의 자그마한 성공이 주를 영광되게 하지는 못한다. 이 우주 만물을 지으신 주님 앞에 50만 명의 교회를 지키는 것이 무엇이 대단하고, 수천 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무엇이 대단한가? 설교할 때마다 입는 신학 박사 가운이, 감독회장이라는 타이들이, 자기 아호를 붙인 건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우리는 회개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 인간은 마땅히 기도할 줄을 모른다. 필자를 포함한 우리가 인간의 마음으로 기도하면 아무리 높은 인격을 가긴 성직자라 하여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기도하기는커녕 결국은 세상의 기준으로, 세상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하고 기도할 수 밖에 없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기도하는 방법은 결국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이 기도하게 하는 것이요, 그렇게 되기 전에는 우리 속에 성령이 우리 대신 기도하게 해 달라는 간구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이진학 장로(분당 서울대병원 안과 교수)/월간지 건강과 생명” 20146월호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 하나님 나라를 이 땅위에 세우는 성령론적 사고 -

 

I. 들어가는 말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일에 귀중하게 쓰임 받고 계신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 이번 강연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의 교제 시간을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21 세기를 열면서 평신도교육대학원이 제 10 회 교육대회의 주제로 내 건 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입니다. 우리는 이 주제에서 네 가지 중요한 어휘를 만나게 됩니다.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첫째는 "구하라"라는 동사이며, 둘째는 "먼저"라는 부사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넷째는 "하나님(그)의 의"로서 "구하라"라는 동사의 목적어입니다. 이를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입니다. 둘째는 "먼저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주제가 오늘의 시대 속에서 어떻게 제시되고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는 것이 곧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이 "세상이 소금과 빛"으로서 지도자적 역할을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시하면서 요구한 명령이십니다(예수님의 산상설교).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더욱이 기독교 지도자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구해야 할 삶의 목표와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질문 받고 있습니다. 본래 지도력이란 공동체와의 관계를 염두에 둔 말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비전을 주고, 그들을 설득하며 이끌어 나가는 힘, 곧 공동체가 지향하는 어떤 목적을 이루도록 만드는 추진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기독교적 지도력은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우리는 그 분 앞에 엎드리고,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의 스승이시고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모형으로 우리를 만나실 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지혜를 배우고 그분의 삶의 태도를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태도의 원형으로 본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곧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시며, 동시에 우리가 뒤따라가야 할 모범이 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분의 뜻대로 이 세상을 통치하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그분의 뜻에 의해서 다스려질 수 있도록 변화시키야 하는 엄청난 책임을 위임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II. 이 시대 속에서 구현해야 할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

1. 하나님 나라의 능동적 주체와 수동적 주체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서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께서 먼저 이 땅위에 세우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뜻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역사의 현장에 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눈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역사 속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눅 11,20)고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들을 내어쫓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표징임을 말씀해 줍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더불어 이 사실을 목격하는 제자들의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3,16=눅 10,23 이하: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로 사용될 때에 수식어로 사용되는 동사는 "가까이 온다/왔다" 또는 "임한다/했다"입니다(마 6,10=눅 11,2; 막 9,1; 참조 눅 17,20; 22,18/ 막 1,15=마 4,17; 마 10,7; 눅 10,9.11; 참조 눅 21,31/ 마 12,28=눅 11,20; 눅 19,11). 또한 하나님이 주어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눅 12,32; 참조 눅 22,29; 막 4,11)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들어간다"와 "받다"(막 10,15; 눅 18,17/ 마 25,34)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행동하고 성취하여 달성하는 그런 자리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친히 세우시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임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근원자이시고 예수님은 그 나라의 주체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역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셨습니다(마 12,28=눅 11,20).


바로 이러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의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곧 하나님의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은 이러한 사실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이유도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마 3,15). 그러므로 진정으로 복있는 자는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마 5,6)이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마 5,10)이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선물로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가 되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마 5,20). 그러나 그 의는 사람들에게 보이며 자랑하기 위한 의가 아니라(마 6,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가 되어야 할 것(마 6,33)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는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천대받던 세리와 창녀들에게도 유효한 의라고 강조하십니다(마 21,32).


여기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입니다(마 11,12 이하=눅 16,16: 율법과 선지자의 때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따라서 하나님의 주도권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노력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됩니다. 인간은 결단해야 하고, 인간은 열심히 추구해야 할 책임을 위탁받고 있습니다. 양자택일의 엄중한 결단과 헌신이 요구됩니다(막 9,47=마 18,9: "한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 10,15 병행: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막 10,23-25 병행: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세우는 능동적 주체자라고 한다면, 인간은 수동적이긴 하나, 또 하나의 주체자입니다. 이에 인간이 수동적 주체자로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주권이 확립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주기도문: 마 6,10=눅 11,2), 그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를 간절히 사모하고 그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 세워지기 위하여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마 6,33).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삶의 가치관의 우선권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시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참조 막 1,12; 마 12,28; 눅 4,14-21)).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오늘에도 우리들이 성령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순종해야 할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왕되심과 주되심을 거부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 곧 그분의 능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 세상을 심판하는 성령의 능력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말에는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이 시대가 하나님이 다스림을 거부하는 사탄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는 역전적인 선언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1장 14-15절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에 등장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낳은 자 중 최고의 인물로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대에 있어서 정치적 악과 불의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았던 예언자적인 인물로서 그것 때문에 헤롯과 헤로디아에게 미움을 받고 결국은 정치적 저항인물로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오실 메시야인 예수님을 준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처한 세계는 불의와 혼돈의 세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예언자인 세례요한이 옥에 갇히는 참담한 현실을 확인하면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의 선포의 대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이 땅에 오지 않은 현실을 가슴아파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그의 선포의 대 중심주제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이는 역전적으로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은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가야 할 운명을 지녔습니다(요 6,14-29다). 세례 요한이 목베임을 당한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 것이라는 예언적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속 사회로부터 저항을 받게 되며, 그러므로 그 길은 고난과 십자가의 길인 것을 예표해 줍니다.


당시의 사회와 종교는 이념과 이념의 대결장으로 보여집니다. 열심당, 바리새파, 에세네파, 사두개파등의 종교적 이념 집단 등이 서로 갈등하며 으르렁 거리고 있었습니다. 열심당은 정치적 독립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저항운동세력이었고, 에세네파는 사회와 종교적 자리를 박차고 그들만의 신비적인 종교에로 매몰된 특수 집단, 역사적 자리를 일탈한 집단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종교적인 교의를 통해서 그들의 종교적인 만족을 취하려 했던 종교교의주의자들이었으며, 사두개파는 종교적 이름으로 사회와 정치세계에서 세력을 행사했던 현실주의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한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그런 면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지금까지의 세상적 삶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은 결코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철저한 현실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자리였습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이 거하지 않는 빈들인 광야에서 세우려 했다면, 예수는 삶의 고난과 아픔이 있는 역사의 현장인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언하며, 세우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길은 치열한 전투장과 같은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과 불의, 그리고 거짓으로 위장된 자기 안정들을 향한 고발과 함께 제시됩니다. 복음서는 예수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 세 가지 방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에 보물을 쌓아두고 경제적인 부와 재물로 자기 삶을 보장받으며, 자기 존재의 근거를 삼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입니다(참조 눅 16 장). 그렇다고 예수님은 부와 재물자체를 거부하며 축소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쿰란 공동체와는 같은 태도를 취하지는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부와 재물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바르게 섬기기 위한 은사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은사를 오히려 삶의 중심적인 가치와 기준으로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비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축복 선언이 가난한 자에게로, 그리고 저주 선언이 부자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눅 6,20-26).


둘째는 하나님의 의와 대비되는 것으로 인간의 자기 의를 자랑하는 교만한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예수님은 예배, 기도와 구제와 금식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경고하십니다("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마 6,1).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과장하게 드러내려고 하는 인간들의 종교적인 허세에 불과한 것입니다("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마 6,2: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마 6a,5). 하나님의 의와 대립되는 인간의 의는 여기서는 단순히 불의라기 보다는 위선이며, 외식하는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꾸민 종교주의자들입니다. 마치 광대모양의 꾸밈으로 자기의 종교성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마6,3-4). 그래서 오히려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 6,6).


셋째는 자기 권세와 폭력으로 민중을 지배하려는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헤롯을 향해 "여우"라고 비난하였으며(눅 13,21; 참조 막 8,15), 백성들을 함부로 다루고 억압하는 자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통치자로서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지도력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길을 역행하는 파쇼적인 인물들로 폄하하셨습니다(막 10,42).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그 의(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인간의 행위)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은 오늘의 시대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입니까? 단지 수동적인 기다림이나, 또한 내적이고 종교적인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의의 행위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그렇게 강조하고 계신 것처럼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조사회("세상의 소금과 빛")로서 그리스도 공동체의 모습이 변모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과제를 이루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먼저 시대를 보는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삶의 태도가 요청됩니다. 저는 이 사고와 태도를 성령론적 사고와 태도라고 명명하고자 합니다. 성령이 다시금 이 시대의 주제가 되는 이유는 성령이란 늘 새롭게 하시며 창조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오늘의 문제와 과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III.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루기 위해 회개를 요청 받고 있는 교회와 사회

많은 사람들이 새 천년,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삶의 포부를 설계하며 경제적인 풍요를 통해 삶의 질이 고급화되고, 과학문명과 예술문화가 한없이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라는 사실이 더욱 실감나게 하고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는 장미빛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판단하는 것이 옳을까요? 오히려 그 반대로 그렇지 않다라고 증언하는 것이 우리 영적인 지도자들의 선언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정신적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 가치관의 부재와 그에 뒤따른 정신적 공허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외적인 풍요로움과 번영 뒤에는 더욱 비인간화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타락되어가며,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의 어리석은 교만과 오만이 더욱 강렬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세계의 풍요로움처럼 사람들이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4 장 17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하신다(벧전 4,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와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는 상황으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근심이 사망을 만들어 내는 세상의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근심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입니다(고후 7,10).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인과 통치자가 되고 있지 않은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1. 세계의 위기적 상황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까?


1) 생태학적 위기입니다.

이는 창조주와 창조의 보존자요 돌보는 분이신 하나님을 망각하는 인간들의 행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 중심적 사고는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정복자의 자리에서 자연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인간 편의를 위해 자연 피조물을 피폐해지도록 착취하는 것도 불사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고에는 기독교 안에 상존하던 과거의 구원론적인 신학도 일조를 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낭 이제 성령을 통해 지금도 일하시고 돌보시는 창조신학적인 사고를 통해 과도하게 인간 중심주의로 몰고간 구원신학의 틀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면서 이제야 말로 환경의 문제, 자연의 생태학적 위기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학적인 회복의 과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분이시며, 그 창조의 보존자요 돌보시는 분임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2) 경제적 풍요로 인한 비인간화의 위기입니다.

이는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데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첫 인간에게 주어진 유혹이며,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한 후에 사탄에게서 받은 유혹의 미끼이기도 합니다. 이 비인간화는 인간을 외모와 업적으로 평가하면서 그 악성을 드러냅니다. 곧 돈과 학벌과 세상적 지위에 의해서 인간이 값이 매겨지는 오늘의 천박한 자본주의의 모습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입니다. 본래적 자본주의는 돈을 사용하고 관장하는 인간의 천부적인 달란트가 강조되나, 오늘의 왜곡된 자본주의는 모든 가치의 척도가 돈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유물론적 인간상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냐 맘몬이냐의 양자택일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 앞에서 "인간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금 주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3) 정신적 도덕 가치관의 위기입니다.

이는 선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오늘의 세계관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새롭게 대두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는 인간이 그동안 절대적 진리로 생각하던 하나의 규범성을 여지없이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 가치이고,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이지, 본래적 진리의 가치라는 개념은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는 정치, 사회, 문화, 음약, 예술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종교적인 영역인 신앙의 문제에까지 그 영향력을 파급시켰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조의 장점이 있습니다. 인간이 지닌 다양성과 개성을 키워주었고,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취약점이 있습니다. 진정한 가치를 향한 열정을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그동안 진리의 규범으로 생각하던 모든 가치관을 상대적인 가치관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그 중에 무엇보다 기독교 복음에 대한 진리마져 상대적인 가치관으로 치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영적인 위기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2. 교회의 위기적 상황
지금까지 언급한 세계의 위기 상황과 견주어 볼 때 교회는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교회 안에 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가 뒤섞여진 것으로 나타납니다.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를 구별하는 기준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이 속한 시대를 보면서 어떤 내용의 예언을 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가 주로 평화를 선언하는 예언자라고 한다면, 참 예언자들은 시대를 보면서 통곡하며 비판하는 심판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의 죄악을 발견하고 자기 민족의 죄악을 발견하고 자기가 이 죄악된 백성 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에 될 수 있는 것입니다(참조 이사야의 부름받음: 사 6 장). 지혜자인 전도서 기자는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시대)와 판단(심판)을 분변하나니(헤아려 안다)"(전 8,5)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지혜 정신이며,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본적 태도인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시대 정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줄 들을 줄 알고 깨달을 줄 아는 모습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정과 부패 뒤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세태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3 장 서두에서 모든 인간의 죄악을 언급한다. 마음의 죄악, 말의 죄악, 행위의 죄악을 언급하며, 마지막으로 결론 맺는 말씀이 바로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8)고 선언하는 것과 상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들은 참다운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다'(잠 1,7)고 반복해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아니 신학자와 목사와 장로 곧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 경외함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도덕적 타락과 무능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파괴시키는 죄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에 언급한 세계적 위기 상황에 덧붙여서 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1) 문자주의적 사고입니다.

이는 편협하고 완고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보수주의가 진정으로 복음적인 신본주의자가 되려면 바리새주의적인 문자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안식일 법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출 20 장: 창조신학적 의미에서의 안식일 준수; 신 5 장" 구속신학적 의미에서의 안식일 준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샬롬을 지향하고 있는 데 반해서, 바리새인들은 문자주의에 얽매어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자기 법률에 제한받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신앙적인 진보주의자가 진정한 복음적인 자유자가 되려면 성경의 문자를 너무 빨리 오늘의 세속적이고 문화적인 틀에서 해석하기 전에 성경의 문자 속에 담겨진 진정한 영적인 뜻을 먼저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문자주의에 얽매이지 않은 영적인 사고와 해석이 열려집니다. 바로 그 때에야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문자주의적인 준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이루어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 영과 육을, 신앙과 삶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의 위험성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포기하는 그리스도인을 양산해 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의 치유와 영혼의 구원을 원하시는 분임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날이 이루어 지기를 원하셔서 그분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3) 종교적 영적인 위기로 나타나는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이는 길과 진리되시며, 생명과 부활이시고, 화해와 용서의 하나님의 모습을 상실한 인간상의 결과입니다. 절대적 가치 규범을 상실한 종교적 영적인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다른 종교의 종교성을 인정하자는 것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지닌 자기 정체성을 여타 종교중의 하나로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제한된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여러 종교적 가치의 하나이지 독보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마치 산에 오르는 등산가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오를 수 있듯이 그 산, 곧 신이라는 정점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인간의 이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인간의 죄악에 대한 통탄과, 유일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필요성이 하나의 일과성과 임시성으로 축소 폐기처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Paul Tillich가 제기한 인간이 가진 세 가지 불안인 존재론적 불안(죽음), 목적론적 불안(길/목표), 도덕적 불안(화해와 용서)을 궁극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시고, 길과 진리로서의 인생의 목적이시고(요 14,6), 인간의 죄와 죄의식을 용서하시며, 세상에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엡 2,14-18)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 복음의 절대적 진리의 가치를 제시하면서 사회적인 관계에서 배타적이지 않은 우주적 그리스도인으로서 태어나야 합니다. 세계의 다원성에 대한 포용력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심어나는 침투와 변혁의 능력을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4) 이러한 위기를 목도하면서도 교회는 회개를 요청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수 있는 저 깊은 곳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그 문제가 얼마나 깊이 곪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만 그들을 끊임없이 위로만 해주고, 그들의 삶에 나타난 악의 뿌리를 제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만 형식적인 윤리적 종교성으로 만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 심판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두려움, 거룩함에 대한 사모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세우는 올바른 사고와 태도는 무엇입니까?


IV.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성령론적 사고와 삶

성령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서 자연을 새롭게 창조하시며(시 104편) 인간을 새롭운 피조물로 만드십니다(고후 5,17). 인간에게 허락한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새롭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하나님 나라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주며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게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진정한 창조성이란 성령의 창조성을 말합니다.
이 성령은 우리에게 성령론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사고의 파라다임을 전환시키는 분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령에 상응해서 사고하며 행동하며, 성령과 더불어 사고하게 만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사고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에 열려 있어야 한다. 창조하시는 성령과 사고하는 내가 더불어 조화되고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론적 사고란 성령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 인간관계를 형성, 시간과 역사를 인식하는 영적인 인식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기독교적 세계관, 곧 기독교 영성이라 할 수 있다. 예배 공동체에서, 그리고 사회적인 삶에서, 자연 피조물을 경험하면서 갖는 기독교인의 삶의 인식과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바로 이러한 성령론적 사고를 통해서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1. 기독론적 사고를 넘어서 성령론적인 사고에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한 지점에, 그리고 공간의 한 자리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영원히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20). 그것은 바로 성령으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뜻합니다. 이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계속될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권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도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피조물인 시간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게 하시는 분은 성령의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론적 사고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1) 성령은 우리에게 구속신학을 넘어 창조신학에로, 그리고 다시 역사신학에로의 확대할 것을 요청합니다.

구속신학이란 인간의 특별한 상황과 시점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했으나, 창조신학이란 우리의 일상적인 세상 경험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는 신학입니다. 우리가 매일 목도하는 자연과 우리의 매일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가르칩니다(시 19편;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라").


2) 성령은 성경의 문자적 사고에서 영적인 사고에로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성경의 문자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를 살리는 사고입니다. 바울이 문자적인 유대인과 영적인 유대인을 구분하는 것이나(롬 2 장), 모세의 율법을 문자로, 예수의 복음을 영으로 이해하는 바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고후 3 장).

이것이 지닌 의미는 무엇입니까?
a. 쓰여진 문자의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본래적 뜻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삶의 열정을 말합니다.
b. 문자는 사람을 죽이나,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 사고를 열어줍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인간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고후 3,17)
c. 역동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합니다. 고정된 사고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관통하는 사고를 열어줍니다. 성령을 통해서 어제와 오늘과 미래를 연결하고, 하늘의 계시와 땅의 현실을 묶어주기 때문입니다.


3) 성령은 종말론적인 시간을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해에서 미래에서 다가오는 시간이해로 바꾸어 줍니다. 성령은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 그리고 과거를 오늘의 사건으로 현재화하고, 미래를 오늘의 사건으로 선취하며 즐거워하게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약 전도서에 나타난 전도자의 "헛되다"라는 탄식은 옛 시간이해 때문이기도 합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으로 반복되는 것이기에 지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간이해는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며, 가까이 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긴박감과 긴장이 감돌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이 바로 "자다가 깰 때"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하루 더 가까이 온 하나님나라와 그분의 의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2. 그렇다면 성령론적 사고는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까?

성령론적 사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적 사고로서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인식하는 사고입니다. 이것은 곧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세우는 사고와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론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성령과 더불어 사고하고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 땅 위에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대상화해서 연구하며 그분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상응해서 사고하며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과 함께 성령이 허락하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사고하는 것입니다.


1) 성령론적 사고는 자기비판적 사고입니다.

성령과 더불어 탄식하며 삶의 고통에 참여합니다(롬 8,26이하). 성령론적 사고는 고뇌하는 사고로서 성령의 탄식과 더불어 고뇌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됨의 영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을 소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이 시대 정신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이 땅 위에 세워진 교회가 성령 안에서 지녀야 할 바른 모습과 교회가 실제로는 성령을 모시고 있지 못한 우울한 현실과의 괴리 사이에서 고뇌합니다.


2) 성령론적 사고는 인격적 사고입니다.

이는 범사에(모든 시간과 사건) 하나님을 인정하면서(잠 3,6) 인간이 살고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고입니다. 따라서 시간의 진행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론적 사고는 우리로 하여금 살아 계시고 인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 가운데 서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3) 성령론적 사고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사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전천후적으로 동참하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전적 새로움을 발견하고 기뻐하게 합니다(행 16,25; 골 3,16-17). 예를 들면,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한밤중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모습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이는 감옥의 상황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상황과 여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경험하면서 감사하고 기뻐하게 합니다.


4) 성령론적 사고는 공동체와 더불어, 그리고 공동체를 위하는 사고입니다.

성령으로 하나됨과 연합을 통해 연대하는 사고(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참조 요 17 장)입니다. 성령은 개인의 개별적인 다양성과 공동체의 통일성을 동시에 존중하는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5) 성령론적 사고는 우리의 가슴과 머리와 손으로 하는 사고입니다.

전인적인 그리스도인(갈 5,22-23)으로서 지적 사고에서, 지정의가 동반된 사고, 가슴(정), 머리(지), 손(의)을 통합시키는 능력을 제공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핵심적인 삶의 모습인 사랑과 섬김을 가능하게 만들고, 이 세상을 품고 용서하는 그리스도인을 창출해 냅니다(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희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6) 성령론적 사고는 인터넷 시대에도 필수적인 사고입니다.

인터넷에 세상의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있으며, 정보의 공유화가 나타납니다. 이런 정보를 하나님 나라와 그 의에 합당하게 가공함으로 internet 문화를 새롭게 만들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성령론적 사고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네트워킹(성령의 사역)을 인터넷상에 구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임재의 개별적인 자리로서의 그리스도인(각자의 컴퓨터)과 이를 연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초고속 광케이블), 그리고 이를 성령의 네트워킹(다른 사람의 pc와 Server이다/ website이기도 하다)에 의해 통합하는 것입니다. 그 목표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뜻/나라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성령의 문화가 만들 자리가 열려집니다.

IV. 나가는 말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위탁명령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이 땅을 변화시키는 책임을 우리는 부여받고 있습니다.

세상이 세속화의 과정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고 한다면, 성령은 이 세상을 거룩함의 과정을 향해 되돌아오도록 요청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한 성령론적 사고를 통해 성령의 사역 구체적으로 이 땅위에서 실체화시켜야 합니다(엡 4,6).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다. 바로 성령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의 충만하하시다. 우리는 이를 성령론적 사고로 이 땅 위에 선언해야 할 책임과 능력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6).

 

김지철(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3,34)

이 두 구절에서 뭔가 부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점이 없습니까?

혹시 두 구절의 순서를 예수님이 잘못 배치한 것 같지 않습니까?

“내일 일보다 오늘 일만 염려하라. 염려는 하나님께 모두 맡긴 다음에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

는 것이 뜻의 흐름이 더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대신에 본문은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전혀 필요 없는 말씀을 사족처럼 덧붙인 것입니까?

그래서 더욱 강조하려는 뜻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 구하는 것보다 염려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까?

놀랍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착각하여 말의 순서를 뒤바꿀 리는 만무합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 뒤에 “염려 말라”를 결론으로 제시했기에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염려와 직접 연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흔히 생각하듯이 하나님 나라와 의가 단순히 세상 염려를 완전히 초월하고 도덕적 종교적으로 경건하며 영적으로 신령한 모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최소한 본문이 속한 문맥 안에서 뜻이 그러합니다. 문맥 안의 뜻이라고 경시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원한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6:19-34의 전체 문맥은 재물에 대한 염려가 그 주제입니다. 당시로선 일용할 양식이 가장 시급한 염려거리였습니다. 말하자면 먹고 마실 것은 365일 내내 그치지 않는 고난의 주제였던 셈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와 의에 관한 가르침은 오직 33절에만, 간접적으로도 24절 한군데만 나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절)

재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 자신의 삶과 인생을 주관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통치 받으면 바로 하나님 나라이고 재물이 왕이 되어 나를 통치하면 돈의 나라가 됩니다. 한 나라에 왕이 둘일 수는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재물에 대한 염려가 없어야 재물의 통치를 받지 않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궁핍해도 자신의 삶과 인생을 궁극적으로, 아니 바로 지금 완벽하게 주관하는 이가 따로 있음을 확신해야만 염려가 되지 않습니다. 나의 주인이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기에 현재 겪는 어떤 환난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능하신 손아래 있다는 철저한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만약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통치하고 계시다면 자연히 그분의 의는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의를 대신 계획해서 이뤄나갈 수는 없습니다. 아니 어림짐작조차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니까 그분을 위한 어떤 구체적인 일을 우리가 결정해서 이루도록 기도하고 희생해서 헌신해야만 한다고 자꾸 착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일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내일 염려는커녕 오늘 염려도 제대로 없애지 못하는 우리 믿음의 수준에 비추면 분수에 넘치는 교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분의 영원하신 경륜에 따라 당신께서 세우고 시행합니다. 우리로선 그분의 의가 우리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당신의 주권대로 드러내주길 소망할 따름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은 그분의 의의 도구가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소원하는지, 또 진정으로 순종하여 실제로 그분에게 쓰임 받고 있는지 여부일 뿐입니다. 이에서 더 나가는 것은 자칫 영적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그분에 대한 의심과 불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한분만 섬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훨씬 이전에 십계명의 첫 계명도 바로 그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가장 먼저 또 일생 동안 마땅히 할 바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인간도 아니라는, 최소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신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고 스스로 인증하는 셈입니다. 요컨대 바로 이 첫 계명이라도 온전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진짜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있다면 그래서 그분의 완전한 통치를 받고 있다면 그분의 의가 들어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진리입니까? 또 다시 하나님이 좋은 일로 북 주시리라 섣불리 기대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분의 의를 이루어드려야 한다는 부담과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은혜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재물로 인한 내일의 염려를 그치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와 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체는 내일의 염려로 어쩔 줄 모르는 것은 내일도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음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만 염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염려만 하라고 해서 종일 걱정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늘 중에 그 문제를 해결하려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내 일생의 단 한 순간도 주님의 의로운 통치를 벋어난 적이 없음을 확신하는 바탕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신 순서는 정확합니다. 내일 일이든 오늘 일이든 염려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며 그분의 의가 드러나는 첫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면 오늘과 내일의 염려 거리를 없애 주실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서도 그분과 주고받을 기대나 계산을 끝까지 버리지 못합니다. 이는 큰 잘못일 뿐 아니라 너무나 어리석은 믿음입니다. 오늘 그분의 통치를 온전히 받지 않고 있으면 내일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또 내일 염려를 하고 있는 자는 오늘 염려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의미를 잘 헤아려야 합니다.

얼마나 우리 믿음이 보잘 것 없습니까? 환난을 없애려는 목적 말고는 거의 무용지물이나 진배없습니다. 어떤 큰 환난 중이라도 그분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통치를 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인데도 그조차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그런 확신에 거하기에 실제로 요동하지 않아야 믿음이 실현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니 그분의 나라는 이미 이뤄졌고 또 그분의 의도 자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어떤 방식으로 추구하고 있습니까? 혹시 종교적 일에 열심을 내면 그분이 염려를 없애 주리라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그럼 예수님 말씀을 진짜로 거꾸로 읽은 것입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주님은 지금의 순서로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대신 감당하시고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1. 그의 나라를 구하라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 및 예수에 의해 이미 시작된 메시야적 왕국에 대한 복음을 듣고 또 순종하며 그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쓰라는 뜻이며 또한 그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뜻이다.

2.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내적인 바른 관계를 지니고 외식을 피하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선(善)을 행할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가장 근본적 의미는 자신이 그분의 거룩한 통치 속에 있음을 확신하고 그 통치 속에 나타나는 그분의 원리와 목적을 알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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