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신약 성경의 처음 네 권의 ‘복음서’(Gospel)라고 불립니다. 이 동아리는 하나의 독특한 문학양식(genre)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학양식은 성경 밖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서, 서술형식은 역사적 기록이나 전기(傳記) 같으나 내용상으로는 그렇지 않은, 특이한 것입니다. 복음서는 내용의 대부분이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 특히 그분의 고난-죽음-부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자
들은 자신들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제시하기 위하여 이처럼 독특한 문학 양식을 택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려는 중심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 성경이 말씀하고 소망하던 바로 그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샘내용의 제시 방법은 복음서마다 약간씩 다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구약 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용 구절들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또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등의 표현들과 더불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록자가 구약 성경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생애 그리고 그 당시의 사건들을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에게 중심 내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구조는 다섯 개의 강화를 중심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사역이 제시된 다음 강화가 소개됩니다. 강화의 끝을 알리는 문구(“그리고 예수님께서...하시기를 마치시니라”-7:28;11:1;13:53;19:1;26:1)에 이어 다시 예수님의 사역이 제시되고 그 다음에는 강화가 나타나는 이런 틀이 반복됩니다. 다섯 강화의 주제는 (1)언약 백성의 삶(5-7), (2)전도(10장), (3)천국(13장), (4)교회(18장), (5)종말(23-25장)입니다. 한편 계시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마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세 단계의 발전이 있습니다. (1)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의 신분(1:1-4:16), (2)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의 선포(4:17-16:20), (3)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의 고난, 죽음, 부활(16:21-28:20)입니다.
마태복음1장
본 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내용을 간추려 주고 있는, 전반부의 끝 구절은 17절입니다. 1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라는 표현 앞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을 둔대서 드러납니다.[우리 말에서는 이 표현들이 도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라는 말은 오해될 여지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직역해 봄이 좋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책이라” 그러나 여기서 책이란 ‘쓰여진 글이나 기록’을 포함하는 말이므로, ‘출생의 책’이라는 말은 ‘출생에 대한 기록’ 또는 간단하게 ‘족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다위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로 이해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에게 약속된 언약대로, 다윗의 왕위에 앉으실(참고:삼하7:13-16) 왕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유독 한 사람에게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칭호가 나타난 곳은 6절입니다. [참고: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는 열 네대이어야 하나 실상 세어 보면, ‘여고냐’를 이중으로 계산하지 않는 한, 열 세대입니다. 이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되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설명은 ‘사본상의 오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태복음의 원본에는 열 네명이 들어 있었는데 그 원본을 베끼는 과정에서 실수로 한 인물이 누락되었고 그 이후에 그 누락 사실을 알았어도 원본이 없어졌으므로 그 누락된 인물을 알아낼 수 없었으며 따라서 17절의 말씀과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열 세명의 인물만을 기록해서 더 이상의 오류 즉, 가필(加筆)의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가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 사본에는 중복 또는 생략 등의 오류가 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이 설명이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차 사람들(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이분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알게 될 것임을 말해 주고 있는 구절은 23절입니다(인용된 말씀 가운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문구는 직연하면,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라’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을 위해 이루시는 구원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구원을 뜻하는지는 21절이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 그리고 다윗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 오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릴 영원한 왕이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왕은 자기 백성을 다스리기 이전에 그들을 먼저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해 내는 구원자가 되실 것입니다. 죄들로부터 인간을 구원해 그들을 가지 백성 삼으시고 그들을 영원히, 의와 진실로 다스리실 왕-그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은 마태복음 1장이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 왕이심은 이방인들에 의해서도 인정된 사실이었습니다(2절). 그리고 예수님은 곧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고 소망해 오던 그 메시야(그리스도)라는 사실이 4절에 나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점성가)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헤롯 왕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묻기를 “그 그리스도(우리 말에서는 ‘그’가 생략됨)가 어디서 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왕=그 그리스도’라는 헤롯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구나 제사들과 서기관들에게 자문을 구한 것은, 그러한 사건이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것이며 구약에 의해서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라는 정도의 사실을 헤롯이 알고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역을 하실 것인지는 6절에 나타납니다. [이 구절은, “왜냐하면 저에게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일(바로 그러한) 다스리는 자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고 직역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실 것을 미리 말씀해 준 것입니다. 이처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헤롯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기에 그 그룹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하고 그분을 죽이기까지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참 왕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마땅히 경배를 받으셔야만 합니다. 동방의 점성가들에게 ‘왕’이 나심을 알려준 별이, 이제 다시 나타나서 그들을 왕께서 누워 계신 곳으로 정확하게 인도합니다. 이로써 그 경축 사절단은 왕되신 예수님을 바로 찾아 그분께 합당한 경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 장에서는 자기 백성의 왕이시며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12, 13, 19-20, 22절 등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기록자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사건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되어 간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문구들을 사용하고 이어서 구체적인 구약 성경 말씀을 5, 15, 17, 23절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본 장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게 되는 시기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장과 3장 사이에는 약 30년 간의 예수님의 생애가 생략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마태복음 기록자는 예수님의 자서전을 쓰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오랜 기간의 생애를 과감히 생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이 이방인들을 통해 증거된 반면에, 본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역자인 세례 요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자로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11-12절).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그 나라에 속하지 아니한 백성들에게 심판을 가져옵니다(2절). [이 구절은 직역하면 “회개하라 왜냐하면 천국이 (이미)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7:12절)의 내용은, 심판이 임박했으므로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천국의 임함은 곧 심판을 가져온다는 사실이 전제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고 있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자신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속하고 안 속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혈연이나 혈통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주권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9절)이며, 이들의 외적 특징은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만이 진정한 그분의 백성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심판자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취한 행동이 14절에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11절에 있는 바대로, 회개할 것이 있는 죄인만이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심판자이시므로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고자 하니 요한으로서는 그분을 만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죄인의 심판자이시므로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회개케 하기 위하여”(11절) 베푸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결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15절)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매우 괄목할 만한 의미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곧 그분 자신이 죄인되심을 - 그러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마1:21) 그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는 관점에서 -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자기 백성들의 왕으로서 즉 언약백성의 중보자로서 담당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서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에 대한 확실한 인증이 눈으로 확인될 수 있도록 분명하게 드러납니다(16-17절).
마태복음 4장
예수님은 언약백성의 중보자로서 그들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죄인이 되셨으며, 이제는 언약백성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영역들에 관한 시험을 치르시게 된 것입니다. 이제껏 옛 언약 하에서 언약백성들과 그들의 중보자들이 실패해 왔던 바로 그 영역들에서, 새로운 그리고 마지막 중보자 - 엄밀히 말하자면, 이 분만이 참 중보이시며 이전의 모든 중보자들은 이 분의 중보자 역할을 부분적으로 감당했던 그림자적인 중보자였던 것입니다 -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공하심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언약관계를 온전히 회복시키시려 하는 것이 이 시험의 목적이며 의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험은, 언약백성의 삶의 존속과 그 유지는 양식에 달려 있음이 아니라 언약의 주님 되신 하나님께 의존되어야 함을 드러내는 ‘돌들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그리고 언약백성의 삶 전체를 언약의 주님께서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신뢰할 것을 요구하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언약백성의 참 주님이시므로 그분에게만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야 함을 알려주는 ‘경배의 시험’ 이 세 가지로 압축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시험의 목적과 의도로 인하여, 예수님을 시험받게 이끈 자는 마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성령님이셨습니다(1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시험의 요구를 온전히 성취하신 후에 이제 자기 백성의 중보자로서 구원의 사역을 17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유대 백성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15-16절)이 되시는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원계획이 온전히 그 성취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니’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23절).
이제 우리가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언약이라는 표현이 아직 한번도 나타난 바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관점에서 신약성경을 이해해야만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주고 있는 글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이 글은 드 그라아프(S.G.De Graaf)의 『약속 그리고 구원』제4권에서 발췌합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꼭 마찬가지로 언약의 책입니다. 물론 신약성경에는 언약이라는 용어가 훨씬 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언약관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에게로만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이방인들이 자기에게 나아 올 때마다, 그분은 먼저(그들에게) 이스라엘과 맺은 주님의 언약을 인정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던 것이 오순절 날이 이르자 그 언약의 문이 활짝 열려서 모든 사람들이 그 언약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많은 나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나라의 믿는 자들은 그 언약공동체에 추가되었습니다. 마치 야생 가지들이 잘 재배된 올리브(감람나무 olive)나무에 접목되듯이 그 이방인들은 구약의 언약백성에게 접붙여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해서 참으로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흘러들어 오게 된 것입니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별히 히브리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마다 그리고 그분을 우리들의 머리(Head)라고 칭할 때마다,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것이 성경 즉, 구약과 신약 둘 모두의 독점적인 내용입니다)을 언급할 때마다, 성경은 그 언약관계로 주의를 끌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용어가 신약성경에서 훨씬 덜 자주 사용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복음서들은 언약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빛은 그분에게로 집중됩니다......그래서 우리는 어느 것에서든지 그리스도 자기 계시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신약성경은 구약성경보다 훨씬 더 많이 믿는 자 개인의 삶(the individual life)에 강조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가, 구약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바와 같은 언약백성들의 친밀한 공동유대관계는 이제 소홀히 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차근차근히 하나씩을 가르쳐 주는) 교육적인 성격 띠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언약백성의 공동유대관계가 충분히 확립된 이후에, 신약성경에 와서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들의 삶의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언약이라는 용어가 신약성경에서 훨씬 덜 나타나는 이유는, 이제 신약성경에서는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선포된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왕국)가 강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왕국을 통해서 미리 바라보았던 그 왕국은 이제 명백하게 그 도래를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래는 새 언약시대와 성령의 강림하심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가 선포되었다고 해서 그 언약이 폐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
본 장부터 7장까지의 세 장은 산상보훈 또는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제껏 마태복음 4장까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언약 백성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왕은 자기의 언약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며 이 나라에 속한 언약백성이 어떠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보훈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 나라에 속한 언약백성들은 마땅히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이지러짐이나 굽어짐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48절).
그리고 언약백성들이 자기가 속한 삶의 모든 터와 영역 속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두 가지에 즉, 빛과 소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함이라는 사실도 17절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자녀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마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비뚤어진 마음의 동기에서 모양만 갖춰 행하는 일들을 하나님은 몹시 싫어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자녀들은 마땅히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큰 원칙으로 1절에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원칙은 18절까지의 내용과 직결되는데 그 내용은 구제, 기도, 금식으로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의 전체 내용을 한 문장으로 응축시켜 표현하고 있는 구절은 33절로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우리 아버지”라고 믿는 구분의 자녀들은 삶의 모든 필요를 그분께 간구하며 또 그분께서 공급해 주심을 믿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삶에 물질이 필요한 것임을 잘 알지만 결코 물질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고 오로지 그분만을 삶의 모든 영역을 책임지시고 돌보시는 주님으로 모시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적인 헌신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24절은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한, 그분의 자녀들은 앞날의 삶에 대해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앞날 역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34절, 우리 말에는 이 구절이 마치 ‘내일의 염려를 미리 당겨서 하지 말고 내일에 가서 하라’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고”라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 구절의 참 의미는 다음의 직역을 보면 잘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일이 그 스스로를 염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7장
본 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습니다. 앞 부분(1-12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를 드러내 주고 있고, 뒷 부분(13-29절)은 이 산상보훈 전체의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대인관계에서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새 언약(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여 그 말씀을 지키도록 하십니다(12절).
여기서 우리는 옛 언약 시대나 새 언약 시대나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모든 행위의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널리 자리잡고 있는 유교적인 체질로 인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는 개혁을 향해 움직이려다가 발목을 붙잡히고 맙니다.아이러니칼하게도 그러한 체질은 교회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깊고 튼튼하게 고착되어 있는 경우가 많이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올바른 말이나 요구 또는 비판을 억누르기 위하여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직분적인 권위와 윗사람됨을 경우에 맞지 않게 내세워 맹종을 강요하며 불의한 제재를 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왕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받들어서, 모든 방해와 핍박을 무릅쓰고, 개혁과 갱신의 일을 힘써 나가야 할 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금하시고 있는 이 ‘비판’이란, 자신을 남보다 의롭다고 생각하고 교만한 마음의 동기에서 남에 대해 가하는 정죄 또한 최종적인 판결을 뜻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어떤 이론이나 행동 또는 견해 등에 관한 장단점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지적하고 비평하는 행위 즉, 올바른 비판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날카롭고 정확할수록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 자체를 부정적인 입장에서만 생각하려는 경향은, 위에서 언급한 아전인수격인 해석에 주로 기인했으며,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죄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성을 지닌 우리는, 표준이 되는 주님의 말씀에 좀더 다가가려는 애씀보다는, 그저 대강 지나가려는 무사안일을 좋아하며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들만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올바른 비판마저 여러가지 이유를 달아서 배척하거나 도외시하고 자신을 고쳐 나가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 왕되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언약백성이라면, 올바른 비판을 수용하며 그 비판이 아무리 예리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비판을 가하는 이웃에게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철저히 비판하며 또 필요한 경우에는 마땅히 이웃에 대해 올바른 비판을 가하는 자세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을 충분히 드러내는 그분의 나라를 왜곡되게 반영하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비판, 올바른 분별과 평가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결여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말씀이 은유적인 표현으로 6절에 나타납니다. [이 구절은 은유적인 표현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져 놓지 말기를 명하십니다. 이 명령을 준수하려면 마땅히 개들과 돼지들, 그리고 거룩한 것과 진주를 구별하는 판단(비판)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비판한다 할지라도 비판하는 자 역시 죄성을 지닌 인간일지라 자신이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최종적인 판결을 내리거나 정죄하는 월권을 방자하게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다라서 올바른 비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나 동시에 신중함과 겸손함을 비판자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백성은 하나님께 지혜를 얻어서 올바른 비판을 사용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도 이루게 하기 위하여 분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왕되신 하나님께 그분의 백성은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양의 옷을 입고 양들을 노략질하러 오는 이리들이 있습니다. 양들은 이런 가짜 양들을 제대로 식별해 낼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식별의 기준은 그들이 맺는 열매가 나쁜 것이냐 좋은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매의 좋고 나쁨을 결정짓는 요소에는 어떤 직분이나 능력을 행사했느냐는 결코 포함되지 않습니다(22-23절). 그 결정적인 요소는 왕되신 하나님의 듯에 전폭적인 순종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열매의 질에 대한 식별력(=비판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양은 그 가짜 양들의 미혹에 빠질 것이고 그 결과 그들에게 노략질 당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자신과 다른 백성들의 공동 유익과 하나님의 뜻에 힘써 따르려는 적극적인 순종을 위해서 반드시 올바른 비판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과 행동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우리의 행동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이론적으로는 타당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많은 오해와 모순을 낳고 있으므로,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신중한 고려를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관념이나 사고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질적인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언약관계’라고 합니다. 이 관계의 성립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와/아버지가 되는 것이며 이 관계에 참여된 사람은 그분의 백성/자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곧 관계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어서 관계의 성립은 자연적으로 백성/자녀된 자가 왕/아버지 되신 분께 순종하는 것으로써 표현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치게 믿음과 행동을 떼어서 생각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 안에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을 수반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행함이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인양 말씀하신 것입니다(21절).
[하나님과는 무관한 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예언도 할 수 있고 귀신을 내쫓을 수도 있으며 여러가지 놀라운 능력을 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신기한 일들에 미혹되어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 분별 있는 자라면, 하나님께 헌신적으로 순종하려고 애쓰는 분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을 격려하며 그들을 닮아 가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왕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숨어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 땅 위에 바닷가의 모래처럼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시기를 힘써 기도해야 하며, 동시에 우리도 그렇게 쓰임 받기를 소원하며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산에서 말씀을 마치시고 내려오시자마자 예수님은 한 문둥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지 예수님께서 어려운 질병을 고치신 훌륭한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훨씬 그 이상인 것입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므로’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 이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의 중보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권위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백부장의 이해는 예수님 자신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10절의 ‘기이히 여겨’라는 말의 뜻은 ‘이상히 여겼다’가 아니라 ‘놀랐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만한(이렇게 큰)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백부장의 믿음은 곧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중풍병마저 말씀만으로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명령권자로서 예수님을 이해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인 백부장을 구별지은 믿음의 크기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두 가지 특성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바대로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들이 이루어진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혈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11-12절).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 온 모든 병자들을 다 고치심은, 자신이 곧 구약시대부터 소망하고 기대해 온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17절). 예수님의 구원이란 단지 ‘영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내세’만 소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구원이란 영혼과 몸 즉,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는 것이며 구원받은 인간의 삶의 모든 환경까지 포함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지금 이 땅위에서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다르리심과 보호하심 아래 놓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또 교회가 예수님의 구원을 전할 때에는 그러한 구원의 본질을 잘 드러내도록 애써야 하는 것이며,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이란 마땅히 구원의 본질을 온전히 누리도록 서로 돕고 살펴 주는 공동체로서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 장의 또 다른 면은 그분을 참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의 자리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음이 27절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참된 신앙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인식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참된 신앙에 자동적으로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자신이 가진 올바른 인식에 따라 자신의 삶 전체를 그분께 내맡기는 신뢰를 그 본질로 하는 것입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았으며 그분이 궁극적으로는 자기들을 멸하실 분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29절).
귀신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가다라지방의 어떤 성읍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볼 기회조차 거절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관심은 온통 물질적인 피해를 더 이상 입지 않으려는데 쏠려 있었기 때문인듯 합니다.
마태복음 9장
예수님께서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깨끗케 하심은 단순히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치료의 사역을 통해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의 본질과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예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하려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계시의 면들을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보아도 그 말씀의 참의미를 깨달을 수 없으며 성경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의 참 맛을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기록한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믿음에 이르도록 의도하셨음을 우리가 알 수 있는데 그러한 예수님의 자기계시가 6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5절에 마태복음의 기록자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과 그가 전하시는 복음의 본질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했습니다. [이런 일은, 성경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교훈이나 종교적 행사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른바 ‘전통’이 되어 맹목적으로 답습되기 때문에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전통’이라는 것이 신앙성장을 위한 지침이 아니라 오히려 올무가 되어 믿는 자들로 하여금 성경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의 전통을 신앙의 유산으로 소중히 여기려는 태도와 동시에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다른 부분은 단호하게 베어 내버리려는 각오를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각오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곧 성경적인 개혁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 급에 속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구원사역과 그가 전하시는 복음의 본질에 대한 그릇된 형편에 있었음을 11절과 14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구원자로서 예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복음과 그분의 나라와 구원의 본질을 충분히 드러낼 만큼 풍성하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앓던 혈루병이 말끔히 치료되고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귀신이 쫓겨나고 심지어는 죽은 자가 잠에서 깨듯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명백하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전통의 수호자들은 그런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사단의 도구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보내신 자를 정면으로 거절하고 도전한 것입니다(34절). 이러한 엄청난 죄악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짐짓 부인하려는 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고:혈루증(20절)이란 신체에서 피가 흘러나오는데(마치 월경과 같은, 그러나 이 혈루증이 이 여인을 정작 괴롭힌 것은 아마도, 그 병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이라기 보다는, 그 병으로 인해 생기는 생활의 격리 문제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구약성경(레15:19-27)과 유대인들의 실제 생활에 심지어 구약성경을 능가하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탈무드’라는 법전에 의하면, 몸에서 피가 나오면 그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사람과 신체적으로 접촉되는 모든 사람도 역시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자신의 부정한 혈루증이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람들을 피하는 격리생활을 해야 하며 그 병이 치유되지 않는한 죽을 때까지 그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 여인을 무엇보다도 괴롭힌 문제라고 성경학자들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는 참으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36절에 잘 드러나는데, 이 구절에서 “민망히 여기시니”란 말의 뜻은 ‘답답하고 딱하게 여기다’라는 의미보다는 ‘불쌍하고 가엽게 여기다’입니다. 그들의 처지는 한 마디로 ‘목자 없는 양떼’와 같았습니다. 목자들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양떼들은 갈 길을 알지 못하여 이리저리 헤매다 피곤하여 지쳐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내어버림을 당한 신세가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여 유리함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계속하여 그러한 불쌍하고 가여운 상태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들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함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하는 역할밖에는 감당하질 못했습니다. 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전통들을 가르치기에 힘썼고, 성경말씀의 글자에만 매인 형식주의를 가르침으로 하나님 말씀의 참 뜻을 무시하거나 왜곡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주님의 백성을 그 말씀의 가르침대로 인도해 나갈 일군이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도 예수님 당시의 형편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할 만큼 부정적인 요소들이 눈에 많이 띄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인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일을 대신 행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하십니다. 이러한 권능은 자신들의 이익이나 명예나 영화를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양들, 길 잃은 양들에게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군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권능을 합당하게 행하실 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바로 드러나며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습니다(7-8절).
본장은 마태복음에서 두 번째 나타나는 강화입니다. ‘강화’는 어떤 한 주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집중적으로 가르치신, 오늘날의 강의 또는 설교와 비슷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다섯 개의 강화가 실려 있는데, 첫 번 것은 5-7장까지에 있는 ‘산상수훈’(산상보훈)이고, 여기 10장이 예수님이 두 번째 강화로서 그 주제는 ‘전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강화(13장)의 주제는 ‘천국’인데 모두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네 번째 강화(18장)의 주제는 ‘교회’이고, 다섯 번째(23-25장)는 ‘종말’입니다. 이 강화들은 모두 “그리고 예수께서....하시기를 마치셨다”(직역)라는 똑같은 문구로 끝납니다(참고:7:28;11:1;13:53;19:1;26:1).
본장은 ‘전도’에 관한 강화이므로 복음전파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들이 자세히 언급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게도 되며 심지어는 죽음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에는 복음전파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반대는 이방인들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형제 심지어는 부모자식간에도 복음으로 인하여 적대관계가 생길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가문이나 혈통 또는 인간적인 의지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위험과 핍박 또는 심지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복음은 반드시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죄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생명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복음)를 전하시고 그 나라의 능력을 보이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그 복음과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는 짓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저가 귀신의 왕으르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마9:34)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까지도 능멸한 자들이 유대의 종교지도자로서 군림하고 있는 그 당시의 상황 속에서는, 동일한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반대와 핍박을 가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겪으신 그 사건(마9:34)을 염두에 두시며 복음전파자에게 당연히 핍박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음이 25절에 나타납니다(유대인들을 귀신의 왕을 ‘바알세불’(마12:24;눅11:15 ‘바알세붑’이라고 하기도 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뜻은 ‘(귀신들의) 처소의 주인’ 또는 ‘배설물의 주인’으로서, 경멸하거나 악담 또는 욕지거리를 할 경우에 그렇게 호칭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거친 위협과 핍박이, 심지어 죽음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임한다 해도, 두려움 때문에 복음전파를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을 주는 실체보다 더 능력이 크시고 위대하신 분께서 명하신 일인 복음전파의 임무(28절)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며, 또한 그 일을 시키신 분께서 자기의 사역자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능력이 크신 하나님은, 그저 저 멀리 앉아 계시다가 큰 일들만 가끔씩 둘러보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29절).
복음을 전파하노라면, 때로는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위험을 당할 수도 있고 반면에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지 않음으로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지게도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시고, 그의 제자들은 마땅히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는지를 간접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32-33절). 복음은 참으로 좋은 것이며 복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막연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다지 아쉽지 않은 것 정도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생명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잘 드러내시기 위하여 구약의 선지자 미가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재앙이 유다 백성에게 임하는 형벌의 날에 대해 미가 7장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6절을 읽으시고 어느 구절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셨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인용된 말씀은 단지 예수님으로 인하여 집안 식구끼리 불화하거나 싸우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오심은 구약의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재앙과 형벌을 성취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로는, 그분의 구원의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절)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전쟁론자라든가 평화를 원치 않는 과격한 혁명투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진리의 한 면을 부각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막연하고 또 피상적으로 ‘화평’(평화)을 이해했습니다. 식민지 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원만한 것, 물질적인 걱정 없이 넉넉한 생활을 하는 것 등등이 곧 화평이며 이것을 예수님께서 이루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적인 기대를 송두리째 깨뜨리신 것입니다. 그런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자면, 예수님은 너무나도 거리가 먼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이 생각하는 ‘화평’이라는 개념과 정반대 되는 ‘검’을 주러 오셨음을 명백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재앙이요, 형벌이요, 심판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진정한 화평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 화평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죄의 장벽을 허물고 끊어진 관계를 연결시켜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킴으로, 하나님께서 창조 때 의도하셨던 상태로 인간과 온 피조계를 회복시켜 놓은 일(즉 구원)로 인해 누리게 되는 모든 축복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화평은 그분의 복음(그분께서 죄인을 구하시러 이 땅에 오셨다는 생명의 소식)과 그 복음의 능력을 믿고 받아들일 때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죄의 값으로 임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성취시키는 사건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갖게 되면, 34-39절의 말씀의 뜻이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대상을 마음으로 신뢰한다는 것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분께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것이며 자신의 삶을 몽땅 내맡기는 것입니다. 마치 죄수가 처형을 받기 위해 형장으로 갈 때 아직 목숨이 붙어 있으나 실상은 자기의 목숨이 자기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삶은 생명에 관한 한 바로 그러한 삶인 것입니다(38절).
마태복음 11장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은, 세례자 요한의 기대와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사역을 행하실 것으로 기대했던 요한의 예상과는 엄청나게 달랐던 것입니다(참고:마3:11-12).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원사역은, 구약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본질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영적인’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삶의 모든 영역과 직결된 포괄적이고 실제적이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의 구원사역 역시 그 본질상 포괄적이고 실제적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5절).
그러나 만일 이러한 구원사역의 성격과 본질을 오해하거나 곡해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섬기는 일에 엄청난 손해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점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영적’ 구원만을 외치며 인간의 삶과 삶의 현장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교회는 사실상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본질을 제멋대로 축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보수주의 계통의 많은 교회들이 바로 그러한 축소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성경적으로 이해하자면 ‘영혼에 관한’ 또는 ‘종교적인 면에 직결된’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이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인 이상, 우리의 말과 행동 및 모든 활동의 전 영역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생활 그자체가 ‘영적’인 것입니다. 놀고 쉬고 일하고 심지어는 배설하느 생리적인 활동까지도 ‘영적’이라는 볌위에서 제외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여 그분을 바로 섬긴다면 그분을 믿는 자의 삶은 참된 복으로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6절).
성경에 나타나는 시대적 구분은, 인류문화발전이나 정치경제의 발전 상태에 따라 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활동과 그 의미의 증폭에 따라 구분되느 ㄴ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활동과 그 의미는 증폭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수립한 그분의 언약들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시대를 크게 구분하자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인데 이것은 곧 옛 언약시대와 새 언약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옛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활동과 그 의미를 드러내신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구약성경이고, 새 언약을 통한 그분의 구원활동과 그 의미를 드러내신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구약성경이고, 새 언약을 통한 그분의 구원활동과 그 의미를 담아 놓은 것이 신약성경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경의 시대를 양분하는 옛 언약시대와 새 언약시대가 서로 구분되는 성격은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나마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두 시대르 ㄹ구원받는 방법에 의해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았던 시대는 구약시대이고,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 구원이 값없이 주어지는 시대가 신약시대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율법과 복음(또는 은혜)을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또한 갈등관게에 있는 것으로 보는데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성경전체의 구조와 그 흐름을 부분즉으로만 이해하거나 구원의 방법론을 필요 이상으로 부각시킨 인위적인 관점으로 두 시대를 파악하려고 한데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의 구원 방법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언제나 어느 시대나 어디서나 오직 그분 자신의 은혜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복음(은혜)을 서로 대칭내지는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매우 진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에는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구원받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구원받기 위해서 또는 구원에서 멀어질까봐 선행을 쌓는 일,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하는 일, 율법을 조목조목 지킴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과시해 보려는 일들입니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구분짓느 기준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시려고 하나님 나라의 주님이신 그분께서 이 땅에 직접 임재하셔서 구원사역을 행하시게 된 바로 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기준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과 세례자 요한이 시간적으로는 동시대에 속해 있으면서도, 요한을 가리켜 이전 시대 즉, 구약시대에 속한 인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구분이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에도 변화가 생겨났습니다(12절). [12절은 두 가지로 변역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한글 개역 성격과 같은 번역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까지의 번역이 문맥상 다소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여 New International Version(NIV)에서 채택한 새로운 번역입니다. 이 두 번역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한글 개역)
.....천국은 힘있게 전진하고 있으며, 힘있게 전진하는 자들은 그것(천국)을 붙잡느니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상징적으로 또는 그림자로서 이 땅에 임했으므로, 그 나라의 실현을 미래에 있을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례자 요한이 하나님의 왕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고 이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심으로써, 구약에서 바라보던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이 땅에 실제로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왕께서 몸소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나라를 확장시키시고 그 나라의 능력을 행사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땅을 주관하고 있으며 죄악을 번성시키는 마귀의 세력이 그분의 능력 앞에 꺾어지고 밀려나고 무너지는 일이 곳곳에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오심을 손포한 이후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힘있게 전진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부합된 믿음을 가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ㅇ생각하자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천국에 자동적으로 속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혈통적 소속을 인정치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인위적인 것들은 모두 내버리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의 주님이신 예수님만을 붙잡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대로 행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붙잡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12절 하반절의 의미를 가까운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형편은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진단하기로는,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그들은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악평하고 정죄하는 자세를 취했던 것입니다(19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주님이심을 알고 믿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복음을 통해서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자신의 지혜와 학문과 탐구 그 자체로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시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신, 유일한 방법인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밝히 알려지는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용을 알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주님을 섬기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그분의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복음을 잘못 이해할 때에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 속에 거하면서도 빈곤하며, 넘치는 기쁨 안에서 오히려 불안해하며, 지극시 자유함 가운데서도 도리어 속박을 느끼게 됩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을 섬기는 삶은, 마치 어린 아이가 자기 부모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부모의 돌보심 아래 자유함을 맘껏 누리는 것에 비유되지만 실상은 그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선생들을 중심으로 한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이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고역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그릇된 구원관을 가르쳤으며, 율법의 참 정신은 무시한 채 늘려놓기만 한 수 많은 세부적인 항목들을 지켜야 한다고 요규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종교지도자들의 삶은 위선과 가식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고 백성들의 삶은 수 많은 요구에 억눌려 찌들이고 억압되고 따라서 참 자유함을 누리기느 커녕 무서운 짐을 짊어진 노옝와 같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그 불쌍한 사람들을 향하여 ‘위로와 소망이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28-30절). [참고: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구원교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죄와 선행을 일일이 기록하신다. 그래서 마지막 합산 때, 죄의 숫자가 선행의 수보다 하나라도 많으면 그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합산의 결과를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될 수 있는 한 선행을 많이 행해서 합산의 결과가 안전하도록 해야한다고 가르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유대인들은 구원에서 탈락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이 일은 너무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 일을 통해서 내적인 평안을 도무지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시 ㄹ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에서는 구원이 인간의 선행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행을 행해 구원을 얻으려는 일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과 같은 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짐으로부터의 쉼을, 그 멍애로부터 자유함을 주겠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제도나 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으 인간이 인간됨을 충분히 누릴수 있도록 돕는 수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도와 법을 세워놓으신 것은, 그분의 백성이고 그분의 은혜로우신 뜻에 따라 그분의 백성이되고 자녀된 삶을 온전히 누리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도나 법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속박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와같은 사실을 무시하고 법과 제도 그 자체를 신성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에 일치할 때에야만 그런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신 참 뜻을 외면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수 많은 세칙들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칙들을 기준삼아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도록 요구하였습니다. 마으로 이것은 백성들이 짊어지기에는 벅찬 멍에이며 너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러한 척도를 가지고 제자들의 행동을 판단하였고 이로써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에게, 자기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하고(6, 8절) 안식일의 근본적인 의미를 알려주심으로써 그들의 비난을 일축하셨습니다. [참고:유대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임재해 계신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임재하신 실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이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임재’의 실체 즉, ‘하나님의 임재하심 그 자체’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성전보다 훨씬 더 큰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상징에 불과하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느라고 안식일에 일을 한 제사장들이 무죄하다면, 하물며 실체이신 예수님을 섬기고 그분의 사역에 수종드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는 일(그 일 자체는 죄가 되지 않으므로 바리새인들이 문제삼지 않고 있습니다)을 안식일에 행한 것이 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근복적인 의미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호세아 6:6에 나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 구약의 문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규정된 여러가지 제사와 그 절차 및 절기들을 철저히 지키지만 실상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형식주의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을 행하기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분이 자기 백성들에게 행하기를 바라시는 것은, 제사나 번제 그 자체가 아니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인애’란 ‘언약적 사랑’을 뜻하는 독특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원한다’는 뜻은 ‘기뻐한다’입니다. 따라서 그 구절의 뜻은,제사나 번제와 같은 어떤 외적인 일들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신실하신 그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한 언약적 사랑을 두 가지 면으로 나타내야 하는데 하나는 언약의 주님되신 하나님께와 다른 하나는, 마찬가지로 언약백성인 자기 이웃사람들에게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신실하게 섬겨야 하며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반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는 율법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안식일도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하나님께와 사람에게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하나의 방편입니다.
호세아 6:6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 알기’를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알기’는 이론적이거나 교리적인 지식을 의미함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앎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된 앎이 없다면 그분을 기쁘시게 할수 없으며 그분의 언약적 사랑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사항들을 문자적으로 잘 지키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율법의 정신을 도저히 알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으려는 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호세아 6:6의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망각하고, 정해 놓은 어떤 규칙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착각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곳에서나 다소 변형된 모습으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성수주일’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을 ‘성수주일’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그 사고 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사고와 많이 닮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새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이러한 새 시대 즉,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의 안식일을 대신하여 그 의미와 정신을 이어갈 새로운 날이 주어졌습니다. 그날을 우리는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잘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몇 가지 정해진 규칙들을 준수하는 것 그 자체를 기준으로 삼아 ‘성수주일’을 했느니 못했느니 남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다라서 우리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성수주일’ 개념을 탈피하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일’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그 의미와 목적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다른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분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언약적 사랑을 베푸신 것을 13절에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단지 안식일에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사역은 그 전체가 그런 성격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눈멀고 벙어리된 자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메시야로서 행하시는 구원사역의 한 부분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역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볼 때, 사람들은 ‘그가 바로 약속된 메시야일 수도 있다’(23절)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올바른 쪽으로 인식해 나가는백성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곧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일반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인도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기는 커녕, 일반 백성들의 희미한 인식의 불씨마저 꺼버릴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24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십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사역을 성취해 나가십니다. 그분은 귀신을 내어 쫓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을 보이시고 그 나라를 튼튼하게 다져가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이신지, 앞으로 이땅에서의 사역이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함으로 언약뱅성들을 위한 구원사역을 성취하게 되는 지도 알고 계셨습니다(40절).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세대는 특별히 하나님 나라와 사단의 나라 간의 싸움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에 의해 밀려난 사단의 나라는 그대로 물러나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힘을 모아 재공격을 시도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단의 나라의 세력도 막강한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예수님께서 비유 형태로 43-45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통이나 인간적인 유대관계에 따라 선택된 구성원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관계의 수립을 전제로 하고 형성되는 언약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언약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은 인종, 혈통, 신분, 직업, 성별 등 그 어떤 인위적 구별 방법에도 구애 받지 않습니다. 서로 지체가 되며 한 아버지를 모신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공동체의 식구가 되는 원리가 50절에 나타납니다. [참고:“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이말을 선행을 하거나 공적을 쌓는 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 문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요나보다 더 큰 이’(41절), ‘솔로몬보다 더 큰 이’(42절), 즉 귀신들을 내쫓으시는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기본적으로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3장
본장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세 번째 강화로서 그 주제는 ‘천국’입니다. 이 강화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것인지를 비유를 통해 이론적으로 가르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실천적으로 가르쳐 오셨습니다. 즉, 아픈자를 고치고 ㅂ어어리로 말하게 하며 눈먼 자로 보게 하며 귀신들을 내어쫓으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어떠함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여러가지 비유를 사용하여7, 세상의 왕국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측면들을 가르치는 ‘교실수업’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얼핏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목적이 바람직하지 못하게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척눈의 비밀을 알고 회개할까봐 염려하셨고 그러기에 그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일종의 암소를 사용하셨ㄲ는데 그것이 곧 비유였다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생각은 그 문맥을 세심히 살펴보면,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선, 14-15절에 있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부분에서 한글개역 성경은 15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15절 하반절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언짢아 하실 뿐더러 그들이 회개하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야 하니까 그런 일이 생길까봐 불안해 하신다‘는 뜼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겠습니까?
이 구절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14-15절의 출처가 되는 이사야 6:9-10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심판의 사역을 맡기십니다. 이사야는 유다 백성에게 그들의 운명을 예고하며, 예고된 바대로 그들의 운명을 확정시키는 사역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깨달을 수 없고 그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없는 운명에 처해게 되었습니다(사6:9). 그들이 그러한 운명에 처하게 됨은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패역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줄곧 어겨왔으므로, 언약의 저주를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하나님께 용서와 긍훌을 바라지 조차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사야의 사역은,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자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하나도 피할 수 없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사야 6:10은,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런 상태에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심판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사야 6:10 하반절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구절에서 밑줄 친 부분에 해당하는 원의 말씀은 ‘....하지 않도록’입니다. 따라서 이 하반절은 “그들이 눈으로.... 고침을 받을 수 없도록”으로서 이사야 선지자의 사역의 목적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직 공의만을 시행하시는 분이신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언약을 어겼다고해서 하나님도 자신의 언약을 어기실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사야 6:11-13에서 발견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심판의 손길을 어느 때에나 멈추시겠는지를 물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다 멸망하고 유다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유다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철저하게 공의의 심판을 행하시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것들은 모두 포기되는 것인가? 13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은 공의의 엄정한 심판 가운데서도 자신의 은혜를 완전히 거두어 들이시지는 않겠다는 시사를 주십니다. ‘그루터기’, 바로 이것을 남겨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약속하신 바를 성취시킬 ‘거룩한 씨’가 계속 이어지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은혜가 지속됨으로 인해, 새 시대가 열리고 이 땅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성취하시고 그의 모든 언약백성의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 다시 마태복음 13:14-15절로 돌아옵니다. 이 말씀은 ‘심판의 말씀’으로 주어진 것임이 이사야 6장의 문맥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여기 14절 앞부부은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모든 내용을 성취시키러 오신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모든 내용을 성취시키러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는 정도를 넘어서서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언약의 저주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풀어서 생각하면 우리의 오해가 사라질 것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들은 귀로 들으려 하지 않으며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눈으로 볼 수 있었고 귀로 들을 수 있었고 돌이켰으리라. 그러면 내가 그들을 고쳤을 것이라”
비유 그 자체는 어려운 진리를 쉽게 전달할 수 있는 표현수단이지만,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에게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동일하게 그분의 비유를 들어도 한 부류는 깨닫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운명임이 드러났고, 다른 한 부류는 천국의 진리를 더욱 많이 깨달아 알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11-12절).
이처럼 비유를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며 그분의 복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들은 값싸게 아무 때나 어디서나 원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심으로써만 밝혀지게 된 새로운 진리들이었습니다(17절).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그분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배우고 깨달은 그분의 제자들은 놀라운 복을 누린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전체 모습과 온전한 진리를 배우고 익힐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복보다 더 큰 복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복을 충분히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여 그분과 그분이 말씀하신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첫 약속(창3:15)대로 ‘그 여인의 후손’ 즉, 하나님께 속한 자들과, ‘뱀의 후손’ 즉,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구별해 나가는 일이 진행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이땅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는 이 땅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셖여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38절).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비유를 깨닫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비유를 다 깨달았을까요?(51절을 읽고 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도록 운명지워졌음은, 비유루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외에 다른 측면에서도 입증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왕을 친히 대하며 그분의 지혜와 능력과 가르침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54절). 예수님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들이 예수님을 아는 일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상적인 지식들 밑에 자리잡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는 불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보화 비유, 진주 장사 비유, 그물 비유로서 일곱가지 입니다. 이 중에서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을 언급하는 내용을 지닌 비유는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4장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거의 모두 예수님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행하심으로, 병을 고치심으로 말씀을 증거하심으로, 배고픈 이들을 먹이심으로, 귀신을 내쫓으심 등등으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계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 본질을 담아놓은 그릇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수없이 많이 나타나 있지만, 특히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4장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정답은 하나뿐이나 틀린 답은 수없이 만을 수 있듯이,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도 그러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훌륭한 의사로, 어떤 이들은 귀신축출자로, 어떤 이들은 훌륭한 선생으로, 어떤 이들은 혁명가로, 어떤 이들은 민중운동가로.....예수님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인식해 주길 바라신 그런 인식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이 상황에서도 심ㄴ지어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인들은 “수님이 원하시는 인식‘ 대신에 ’어떤 허구적인 그러나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의 인기를 얻을 수있는 인식‘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합니다. 교회당의 수는 점점 많아지고 목회자들의 수도 늘어만가는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제공하는 교회는 비율상 줄어가고 있다고 보아도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종교적 열심과 행사로 많은 교인들이 들뜨기도 하고 환희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가라앉고 나면 ’예수님만으로만‘ 감사와 평안을 간직할 만한 ’예수님 인식‘이 그들 안에 남아 있을지 염려될 만한 상황들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럿된 인식을 표현해 주는 구절이 바로 2절입니다.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귀로 들어도 알지 못하고 눈으로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현실적 요구들만을 충족시키려고 열심히 모여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고 예수님은 그러한 요구들을 완전히 묵살해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셨습니다. 이런 일들 역시 메시야로서 행하실 구원사역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이루실 구원은 소위 ‘영적’인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생겨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여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셨던 지고의 목표에 이룰 수 있도록 모든 상황을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모든 인간과 그들의 삶과 모든 환경 즉, 온 세상을 망가뜨렸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망가진 모든 것에 미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도 그분의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요구들을 들러주시는 메시야로서의 심정 또는자세를 드러내 주고 있는 곳은 14절입니다. 왜냐하면 ‘불쌍히 여기사’란 말은 단지 동정심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에수님께서 메시야로서 갖는 연민과 이로 인해 긍휼을 베푸시려는 자비로운 마음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보아도 사람들은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극소수에 속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올바로 인식하고 비로소 그분께 합당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은 그분 앞에 꿇어 엎드려 경배하며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그 제자들은 신앙에서 한 걸음 더 진전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이제 비로소 믿음의 정도에 들어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첫 번 사건입니다. 이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짐작했습니다(8:27). 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느 증거를 듣거나 목격한 적도 이었습니다(마3:17;8:29).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거나 시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배 위에 앉으시자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눈속에는, 예수님이 신적인 능력이나 권세를 부여받은 탁월한 인물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하닌미이셔서 자신의 능력과 권세를 원하시면 언제나 행사하실 수 있는 분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그들의 고백은 사실상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이 점은 그들이 예수님께 보인 경배와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의 의미(요5:17-18,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자 이 말을 유대인들이 어떤 의미로 이해했는지 살펴보십시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15장
본 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세 지역에서 활동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게네사렛’에서의 활동은 14:35-15:20.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의 활동은 15:21-28. ‘갈릴리’ 호수 지역에서의 활동은 15:29-3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에게는 삶의 기준이 모름지기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곧 언약의 주님이신 하나님 자신이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규절들이나 규범들은 부차적이며 일시적인 것으로서, 그분의 말씀과 배치될 경우에는, 마땅히 무시되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옛날 율법선생들이 가르친 내용이 전해 내려온, 일종의 ‘전통’인 셈입니다. 오늘날의 이른바 ‘교회의 전통’이라는 것과 같은 성격의 것입니다. 전통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통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며 가치있고 유익한 거시라 할지라도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라면 폐기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그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은폐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현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도 상당히 많이 퍼져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강요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백성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잘못된 토대 위에 놓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나쁜 요소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십일조르 ㄹ바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거나, 교회당을 구약의 ‘성전’인 양 가르치고, 목사는 제사장이며 목사만이 ‘주님의 종’인 양 가르쳐서 일반 성도들 위에 목사가 군림하려는 일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언약공동체 안에서는, 계급적이거나 수직적인 질서 대신에, 종이나 자유자나 상전이나 하인이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나란히 서있는 수평적 질서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공동체 안에서는이 사람이 저 사람을 누르고 지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하는 수직적 관계의 질서는 더 이상 필요없고, 서로를 떠받들고 섬기려 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아름다운 관게가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관게를 질서라 한다면그것은 수평적인 질서인 것입닏. 그리고 이러한 수평적 질서는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 또는 학자나 사회사업가 등 소위 훌륭한 인물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을 진정 마음으로 존경하여 그분을 섬기는 그분의 백성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일이 우리 전체와 각자의 삶 속에서 만드러내야할 몫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사람의 ‘전통’을 두느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8절과 5절에 나타납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함으로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은 경건하게 보이나 속은 부패할 수 밖에 없없습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위선자들)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몇 백 년 후인 예수님 시대의 ‘위선자들’에게 적용된다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찾으시는 자는, 마음으로 중심으로 그분을 존경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뭇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히 여기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자세를 취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조차 ‘하나님의 말씀’은 억눌리고 사람의 계명이 오히려 높임을 받는 상황이 벌어져도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저 혼자만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려 합니다. 이것이 곧 ‘헛된 경배’에 속합니다. 우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천시되거나 도외시되는 상황이 생기면 반드시 말을 해야 합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며 겉은 평온하게 보일 수 있으나, 교회는 썩어가며, 그리스도인들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하는 위선자로 바뀌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매우 이기적인 내 교회주의, 너무도 비인격적으로 교인을 대하는 목회자들, 축복과 저주의 공싱을 내세워서 교인을 압제하는 목회형태, 교회 본래의 할 일은 제쳐둔 채 건물 및 교세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경향, 교회 진분의 계급화현상, 부유한 자에 대한 특별 대우, 신앙 성장을 위하기보다는 다른 목적을 지닌 부흥회의 속출 등등 교회 안의 수 많은 부정적 요소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푸대접 받는데서 생겨나는 것이며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에 더욱 만연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회도, 목회자도, 우리도 모두 이 땅에 발 붙이고 있는 한 잘못될 수 있고 타락으로 치달릴 수 있습니다. 제동이 걸리지 않는 한, 모르거나 또는 알면서도 멈출 수 있는 힘이 없어서 계속 잘못으로 빠져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들의 연약함을 알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상황이 싱기면 반드시 입을 열어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용기이며 이러한 용기는 우리의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경배하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열심히 믿는 듯, 경배하는 듯하지만, 과연 주님께서 보시기에 ‘헛된 경배’가 아닐는지 우리는 매순간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적인 말씀을 하셨으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비유를 설명해 주시기를 예수님께 요청합니다(11절).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전통’을 더 중하게 여기는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좇는 자들이 결국 맞이 하게 될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는 13-14절에 나타납니다.
유대땅이 아닌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구원역사에서 눈여겨 볼 만한 사건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언약백성만이 그분의 특별한 은총과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타국민이 그분의 은혜를 누리려면 먼저 그분의 언약백성이 되어야 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구태여 이스라엘 백성이 안되더라도 그분의 특별한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곧 이제껏 통용되던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공식이 바뀌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언약백성의 왕이시면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을 믿으면 누구나 그분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새 시대 즉, 새언약(신약)시대가 온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제외되어야만 하는 ‘가나안’ 여인[본문의 기록자는 구약식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실상 그 연인은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이기 때문입니다(막7:26).]까지도 언약백성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과연 ‘천국은 힘있게 전진하고 있으며 힘있게 전진하는 자들은 그것[천국]을 붙잡느니라’(마11:12 직역)는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이러한 믿음을 소유하였었고 22절 참고:“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른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흉악한 귀신들린 자기의 딸을 능히 고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듭거듭 소리외쳐 간청하고 있습니다. 제자들마저 그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 주기를 예수님께 아뢸 정도로 그녀는 간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만일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호칭한 것이 단지 그녀의 인사치례의 말이었다면,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의 딸을 고치실 수 있음을 확신하지 못했다면, 그녀는 그토록 줄기차게 간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줄기차게 간청한 것은 예수님께서 과연 어떠하신 분이심을 인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 자신도 아셨기에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 여인이 예수님의 냉담함과 모욕적인 언사까지 잘 참아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 사람들마저 예수님께서 과연 ‘다윗의 자손’ 즉,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왕이심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호칭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올바른 인식에 근거한 믿음이 얼마나 튼튼한 것인지를 입증하였으므로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즉 바른 인식에 기초한 믿음을 가리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새 언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새 언약백성의 왕이시며 주님되신 예수님의 권능이 얼마나 위대한지는 28절에 나타납니다. 그 여인의 딸은 매우 지독한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마자 ‘그 시로부터’ 즉각 그 귀신은 그녀의 딸에게서 물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 지역에서 다시 메시야이신 자신의 권능과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복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30-31절). 그러나 그와같은 권능을 이미 수없이 목도한 제자들조차도 과연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튼튼히 믿고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하기에는 매우 더디었습니다. 과연 그들은 믿기에 더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비슷한 사건을 얼마 전에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마14:13-21) 여전히 의심을 내보이는 질문을 던졌습니다(33절).
마태복음 16장
마태복음을 게시의 발전에 의해 구분하자면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부분은 각각 (1)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2)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내용, (3)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이 겪으실 수난, 죽음, 부활에 그 초점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수없이 여러 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심으로써, 또한 구약성경의 모든 약속을 이루며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 ㄹ나타내시는 사역을 행하심으로써 그리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종교적 지도자들까지도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이 불신으로 가득찬 그 시대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이러한 세대에게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4절). 이 말씀의 의미에 가까운 것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이미 내가 하늘로서 온 자임을 증거하는 표적들을 수없이 많이 보였는데도 너희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또 표적을 구하니 더 이상 제시할 것이 없고, 다만 요나의 표적을 되새겨보면 내가 누구인지 아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천기는 분별한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3절)고 질책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논리는 이렇게 풀어볼 수 있습니다. (1) 그들은 하늘을 보고 능히 날씨가 어떠할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이는 마치 우리가 저녁에 하늘을 보고 별이 떠있으면 내일은 맑을 것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흐릴 거싱라고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2) 그 시대를 나타내 주는 표적들은 하늘의 상태와 같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에수님께서 행하신 사역들은 구약성경에서 메시야 시대가 이르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 바로 그 일들을 성취시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와같은 예수님의 사역들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3) 그런데도 그들은 그 시대가 메시야 시대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인정하면 에수님이 메시야임을 시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음을 증거하는 표적들을 보고도 예수님의 메시야됨을 부정하고 오히려 에수님께 새로운 표적을 구하는 시험을 했던 것입니다. (4) 결국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불신과 사악함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더 이상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표적을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수 많은 표적들이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욍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4 중간 부분을 직역하면, ‘어떠한 표적도 그[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요나의 표적 이외에는’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후로는 전혀 아무런 표적 또는 이적을 행하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후에도 예수님은 전처럼 이적들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예:마17:14-18;20:29-34). 따라서 위의 말씀을 그 문맥(마16:1-4)에 비추어 생각할 때, ‘표적’이란 일반적 의미의 표적이나 이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시험하기 위해 보여 주기를 요구한, “하늘로서 오는 표적”(1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그런 표적 즉, 그들이 ‘하늘로서 온’ 표적이라고 할만한 것은 전혀 있지 않을 것이라느 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요나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표적은 옛적에 요나가 물고기에게 삼키웠다가 되살아난 과거의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요나의 표적’은 앞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있게 될 그 ‘표적’이 ‘요나의 표적’이라고 호칭된 것은, 과거의 그 사건이 그대로 재현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그러려면 요나 선지자도 다시 살아나야 함), 비록 모양새는 다를지라도 ‘요냐의 표적’의 본질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사건으로서 ‘하늘로서 온’ 표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과거의 어떤 사건과 그 후의 사건 사이에 본질적인 상응관계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예표와 실체라는 관점(typologically)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본질적인 상응관계라는 것은, ‘사건’이라는 비인격체가 지닌 어떤 관계를 말함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만드신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그것들 안에 구현시킨 공통된 본질 - 즉,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리’ - 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 ‘요나의 사건’에서 구현된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요나를 죽은 자 가운세더 다시 살려내셨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표와 실체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앞으로 있을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원리를 반영하고 있는 어떤 표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 자신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은,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이 기대하고 소망하고 기다려온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가장 확실하고 뚜렷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표적마저도 불신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있게 될 뿐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교역자나 교인이 아니라 에수 그리스도이시며, 이와같은 참 교회는 올바른 믿음으르 그 토대로 삼고 있는 교회이어야 하며(18절), 또 ‘올바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16절은 말하고 있습니다.[18절에서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 반석’은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에 따르면 ‘베드로’는 남성이고 ‘반석’은 여성으로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뿐만 안니라 18절 후반절의 직역은 “그리고 음부의 대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인데 여기서 그것은 앞의 ‘반석’을 가리키는 여성 대명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페트로스)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반석’(페트라)을 사용하신 것은 일종의 언어유희로서 인간 베드로가 아니라 그가 고백한 내용(16절)을 지칭하기 위한 의도적인 언급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반석’을 사용하신 것은, ‘반석’으로 상징된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입니다. 16절에서 베드로는 고백하기를, “당신은 그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직역)고 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의 내용을 등식으로 간추리면, ‘예수님=그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입니다(이것은 요20:31에서 말한 ‘생명을 얻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등식은 다시 ‘예수님=그 그리스도=하나님’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예수님도 하니님이시다’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요5:17-18).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우시려는 교회는 ‘예수님을 구약이 소망하고 바라고 가리켜온 그 그리스도이시며, 성자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을 그 토대로 삼고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내 교회”,16절)인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 그의 봉사의 직분이 집사이든 목사이든 장로이든 전도사이든 교사이든지 간에 - 위의 토대에 굳건히 서서 그리스도를 닮기에 이를 때까지 성장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성장을 서로 돕기 위해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봉사의 직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교회 안에서는 신분상 어느 누구도 다른이의 위에 있지 못한 것입니다. ‘교역자는 목자이고 교인은 양이라’는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표현은 엄격히 말해서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믿는 자들의 목자이시며 모든 믿는 이는 누구나 그분의 양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 사이에 어떤 인물이 끼어들어서 자신이 목자인 체하거나 당분간 목자의 권한을 위임받은 체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주인인 그리스도에 대한 도전이며 반역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이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믿는 이들을 그들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튼튼하게 밀착되고 많이 닮아가도록 돕는 조력자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조력자들의 도움과 봉사를 받는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계시적 발전의 세 번째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살아나심이 제시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 인식에 근거한 참된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분이 겪으실 ‘고난 - 죽음 - 부활’은 구속적 의미를 지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얻으려면 먼저 그분에 대한 바른 인식과 믿음, 그리고 그분의 구원사역에 대한 이해라는(적어도 논리적 순서로 보자면)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는 이런 과정의 필요를 느끼고, 첫째와 둘째 단게에서는 각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그분의 사역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계시하였고 그 이후에 비로소 그분의 구원사역의 핵심인 ‘고난 - 죽음 - 부활’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베드로의 올바른 인식과 믿음의 고백 이후에 비로소 예수님께서 앞으로의 일을 가르치시기 시작했다는 21절의 말씀에서도 쉽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고난 - 죽음 - 부활’을 겪으시리라는 것을 분명히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20,21절), 장차 심판주로서 오실 것도 계시하셨습니다(27절). [이 27절은 재림 때의 상황을 말씀하심이 분명하지만, 28절의 상황이 일어날 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견해들을 만들어낸 요소는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라는 문구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재림이 오래지 않아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28절 역시 재림 때의 상황이라는 선입견에 근거한 것입니다.
위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얻으려면 먼저 구약성경에 나타난 메시야 시대의 예언의 특성을 언급해야겠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초림과 재림을 두 사건이 아닌 하나로 묶어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세례자 요한까지도 메시야에 대한 생각의 혼란을 잠시 겪기도 하였습니다(마11:2-3). 이와같은 예언의 특성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앞 일을 계시하는 예언에서도 드러난 것으로 보이며, 이런 관점에서 27-28절을 이해하게 되면 성경 전체의 흐름과도 매우 잘어울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27절은 ‘자기 천사들과 함께’ 또 ‘아버지의 영광 중에 오셔서’, ‘심판을 행하실’ 것을 말하므로 재림 때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28절은 ‘오래지 않아서’ 있을 일로서 ‘그 왕권을 가지고 오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재림 때 오심은 왕으로서 오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자기 백성을 위한 구원사역을 다 완수하실 때까지는 왕으로서의 공적인 직분을 보류하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부활과 승천은 그분께[서 자기 백성의 왕으로서 공식 위임하신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8절은 부활 이후 자기 백성의 왕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게 되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적인 순서로 보면, 부활과 재림 간에는 큰 시간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건처럼 제시된 것은 예수님을 계시하는 예언의 특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 일이 먼저 27절에 제시된 것은 24-26절에 이어지는 논리적 순서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21절에서 ‘고난-죽음-부활’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베드로의 행동 때문에 이 행동에 연관된 말씀들을 하시고(22-27절) 다시 21절의 주제로 돌아가셔서 부활 후의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계시하신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27절)의 심판의 대원칙은 25절에 나타납니다. 물론 재림 때 있을 최후심판에서는 선악간의 모든 일이 다 드러나겠지만 25절의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는 말씀은 24-26절의 논리적 귀결부분이기 때문에 그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합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 문맥에서는 각 사람의 세세한 모든 행위를 다 심판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 사람의 행한 대로” 즉, 제 목숨을 잃었는지에 따라 ‘갚으시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대원칙은 25절입니다.
마태복음 17장
예수님께서 변화하신 사건을 통해 동행한 세 제자들에게 확증된 것은, 그분은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계시하신 내용입니다(5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 주는 상징물은, 불, 구름, 연기, 우뢰 등입니다. 여기서는 “빛난 구름”이 나타남으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상징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림으로써 그분의임재하심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습니다.(참고:출13:21;19:16-20;왕상8:10-11;벧후1:17).]
메시야가 고난을 받고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는 것은, 유대인들로서는(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과거의 찬란했던 다윗과 솔로몬으 ㅣ영화를 누리게 할 민족적 영웅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들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로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이 메시야의 할 일입니다. 이런 기대에 젖어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로소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믿기에 이르렀으나, 메시야의 고난 당함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극구 만류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한 만류는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방해나는 사단의 짓이라고 질책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러한 짓은 “하나님의 일들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23). 그러나 과연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이 하나님의 뜻인가? 바로 이러한 의구심을 씻어버릴, 하나님의 자신의 뜻이 확실히 계시됩니다. 이 계시가 드러난 곳은 바로 앞 단원과 같은 5절에 나타납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예수님의 세례받으실 때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마3:17). 다만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명령의 말씀이 추가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경우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은 제자들의 순종을 받아야 할 권위있는 분 즉,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순종해야 할 사항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그 영광스런 분위기 속에서 살기를(비록 당분간이라 할지라도) 원했습니다. 이것은 메시야로서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셔야 함을 회피(또는 지연) 시키는 결과를 택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베드로가 그런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러나 메시야의 고난은 하나님의 정하신 길이며 그것만이 구원사역을 완성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시는 예수님 자신은 자신의 ‘고난 - 죽은 - 부활’을 가르치시기 시작했으나 초반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이런 반대는 그들의 뿌리깊은, 잘못된 메시야관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예수님이야말로 참 메시야이시며 그가 택하려는 고난의 길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길임을, 하나님 자신이 친히 계시하심으로써 구원사역에 진전이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인하여 그 제자들은 더 이상 메시야의 고난의 길을 막아서려고 할 수 없었으나, 그들 마음 속에 생기는 갈등을 가만히 담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10절).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는 질문을 그 제자들이 예수님께 합니다. 이 질문에서 그들의 갈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관과 자신들의 메시야관의 충돌점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서기관들의 말 자체는 옳지만 문제는 ‘엘리야’가 이미 왔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제자들 역시 서기관들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미 마태복음 11:14에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제껏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예수님의 재설명을 듣고야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14절).]
유대인들도 부활을 믿습니다만 그것은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참고:요11:24).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때에 있을 부활이 아니라 조만간에 있을 자신의 죽음직후의 부활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인 제자들에게 그것은, 믿기는 커녕 이해조차 불가능한 말씀이었습니다 위의 말씀에 제자들은 23절에 근심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 - 죽음 - 부활’을 다시 말씀하십니다(22-23절). 그러나 이 두 번째 언급은 첫 번째 언급(마16:21)과는 약간 다르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강조점은 바로 ‘고난 - 죽음 - 부활’의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첫 번 언급(마16:21)과 두 번째 언급(마17:22-23)을 다음과 같이 비교해 보면 각각의 언급에서 구체적인 내용과 그 강조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항목언급 |
마태복음16:21 |
마태복음17:22-23 |
1.장소 2.가해자 3.고난 - 죽음
4.부활 5.독특한 용어 |
예루살렘 장로들,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들에 의해] 많은 고난과 죽임 당함 제 삼일 ```해야만 한다(δει) “올라 가야만 하고, 만은 고난을 받아야만 하고, 죽임을 당해야만 하고, 살아나야만 한다” |
없음. 사람들(의 손들)
제 삼일 ···하기로 정해져 있다(μελλεω) “넘기워지기로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를 죽일 것이고, 그리고 제 삼일에 그는 살아날 것이다” |
위의 표에서 보시는 대로 첫째, 셋째 항목은 마태복음 16:21에서 더 구체적이거나 강조 되고 있고 넷째 항목은 동등합니다. 그러나 다섯째 항목에서는 각각의 언급이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 16:21은 ‘고난-죽음-부활’의 필연성을 강조한 반면에, 마태복음 17:22-23은 ‘고난-죽음-부활’의 확실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도, “····살아나냐 할 것을”이라는 표현과 “····살아나리라”는 표현을 통해 각각의 강조점을 어느 정도 살려 놓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본장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섯 강화 중 네 번째 것으로서 그 주제는 ‘믿는 자들간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간의 관계는 사실상, 진정한 의미로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이 강화를 ‘교회에 대한 강화’라고도 합니다.
본장의 강화는 마치 ‘교회론’을 가르치고 있다고 할 만큼,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가 어떤 성격의 공동체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몇몇 중요한 원리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첫째,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나 가장 큰 자이므로 경쟁적 서열이 존재하지 않는, 이른바 수평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 이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나 가장 하나님의 보시기에 귀하고 소중합니다.따라서 어떤 구성원도 외적인 요소를 비교의 기준으로 삼아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느 ㄴ다른 구성원을 무시하거나 덜 소중하다고 간주해서는 안됩니다(이와같은 원리를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몸과 그 지체들’에 비유하여 성세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셋째, 이 공동체는 ‘성경(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죄를 범한 구성원을 거듭 권면하여 회개에 이르도록 합니다. 그런데도 회개키를 거절하면 교회의 구성원으로 간주하지 않는 징계를 가하게 됩니다. 이런 징계를 교회 용어로 ’치리‘(治理)라고 하는데, 이것은 교회의 성결성을 유지하고 동시에 그 해당자로 하여금 교회를 더럽혔음을 인식시켜 회개에 이르도록 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와같은 치리의 원리가 실제로는 거의 시행되지 않고 있어서 교회의 오염이 심해져도 이것을 방지할 대책이 없게 된 실정입니다).
넷째, 이 공동체는 용서하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23-24절)에 비추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한 참 감사함으로 인하여 구성원 서로에게 진심으로 베푸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의 용서는 그분의 용서를 반영하는 것이기에 무한히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용서는 값싸고 헤프게 마구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앞에 언급된 셋째 원리와 연관지어볼 때,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용서를 베풀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일 죄지은 자가 겉치레로 죄를 인정한 후에 당당한 자세로 자비를 베풀기를 요구해서 얻어내려하면, 이러한 자에게는 결코 용서를 베풀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고 믿는 자는 늘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지만, 진정으로(용서를 받으면 중심으로 감사할 수 있으며 이 용서를 또한 남에게 베풀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 자에게만 베풀어야 합니다. 한편, ‘회개하면 된다’는 논리로, 피하거나 삼가할 수 있는 죄들을 ㅜ십게 범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속지 않도록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경솔히 용서를 베풀게 되면 죄를 장려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위의 원리 중 첫번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구절은 3절과 4절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구절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 같이 되면, 즉 자기를 낮추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며 동시에 그가 그 나라에서 가장 큰 자(원문상으로는 최상급의 의미임)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은 누구나 가장 큰 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경쟁적 서열이 없는 수평적 구조를 지닌 나라이며 이 나라의 모델인 교회 역시 마땅히 그런 주고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서열이나 계급의 순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능에 의한 봉사직이며 각자 자신의 직분에 성실할 때 수평적 구조가 훨씬 두드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마태복음의 구조적 특징은,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한 다음에 ‘강화’가 나오고 강화의 끝 문장이 나타남으로 한 단위가 마무리된다는 점입니다. 본장 1절에서 강화의 끝 문장(‘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셨다’)이 나옴으로 18장의 ‘교회에 관한 강화’가 끝이 났습니다. 따라서 이제 다시 19:2-22:46까지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행하신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합하여 부부가 되는 결혼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제정하신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거룩하고 복된 제도느 중혼(重婚, 성경상 그 첫 예는 창세기 4:23입니다)과 이혼으로 더럽혀지고 금이 갔습니다. 결혼제도의 오염과 균열이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그절은 8절입니다.[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자신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명문화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얼핏 8절을 보면, 이혼에 관한 한 본래의 하나님의 뜻이 모세 때에 이르러서는 가뀐 것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뀜의 이유는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너희”는 사실상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1500년 전의 모세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이혼을 허락했다는 뜻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모세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이혼을 허락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너희”란 말을 사용하신 것은 모세 때나 지금 예수님 때나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완악하다는 점을 드러낸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이혼을 금하셨으나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모세시대에는 자신의 뜻을 바꾸시고 당분간이나마 이혼을 허용하셨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7,8절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모세가 임의로 이혼을 허락하였다’고 답함으로써 위의 질문을 쉽사리 피하려 하다간 더 큰 난제에 부딪히게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근거로 내세우는, ‘모세의 명령’(또는 ‘모세의 말’, ‘모세의 글’)은 모세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모세의 허락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한다면 결국 모세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빠지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7절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신명기 24:1을 근거로 삼은 것입니다. 이들은, 모세가 이혼증서만 작성하여 주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있다고 명한 것으로 신명기 24:1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24:1-4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들의 이해는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오해였음이 드러납니다. 신명기 24:1-4 문단을 보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3절은 주건절(protasis)이고 4절은 귀결절(apodosis)입니다. 따라서 1-3절은 어떤 상황을 가정한 것이고(한글 개역에서도 “사람이·····죽었다 하자”로 표시함으로 구분을 잘하였음) 4절은 그럴 경우 어떻게 하라(또는 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1절의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라는 모세의 말은 명령이 아니라 상황 설명인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실현될 수 있는 상황으로 제시한 것은 그 당시에는 보편화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금하지 않고 묵인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히 하신 것은 이혼은 모세의 명령이 아니라 허락(묵인)이었을 뿐이고, 이혼을 금하지 않고 그 당시의 상황으로 묵인한 이유는 그들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뜻이 모세시대에는 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함 때문에 그런 일이 행해지고 있음이 드러납니다(인간의 다른 죄들에 대해 오래 참으심 같이 ‘이혼’이라는 죄에 대해서도 그런 태도를 보이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러나 처음부터 이렇지 않았다”(8절 하반절 직역)고 말씀하심으로써 이혼은 태초부터 모세시대에도,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도, 어느 때든지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결혼과 이혼에 대한 에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10절). 그들은 유대인들이라(근본적으로는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를 ‘남편’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심지어는 음식 태운 일을 트집잡아) 이혼을 할권리를 휘두를 수 있는 자는 ‘남편’이고 ‘아내’는 그 권리를 희생물이 되기 일쑤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형편 역시, 젹어도 인식에 있어서는, 아내를 남편과 동등하게 생각치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뿌리깊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과 게다가 아내를 ‘돕는 배필’(창2:18)로서 이해하는 사고로 인하여, 한국 교회가 근대화 과정에서 여권신장에 기여한 면이 많은 듯하면서도 실상 인식의 면에서는 근본적으로 비성경적인 모습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돕는 배필’을 일반적으로, ‘남편을 잘 내조하기에 알맞는 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해에 의하면, ‘아내’는 남편 내조의 능력에 따라 평가될 수 밖에 없고 자연히 남편과 종속적인 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돕는 배필’이라는 성경의 원뜻은 ‘그와 상응하는 조력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내느 남편과 동등한 가치와 위치를 자치한 존재인 것입니다. ‘조력자’라는 용어의 의미도 ‘힘(능력)을 지닌 자’이므로 오늘날 개념으로 말하자면 ‘보조자’가 아니라 ‘동업자’ 또는 ‘분업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력자’라 하는 것은 아내의 대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창설하시고 아담을 그곳으로 데려와 거기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할 임무를 주셨습니다(창2:15,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그리고 아담에게 필요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2:16-17).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맡은 임무를 책임질 대표는 아담 자신인 것입니다.
간추리자면 남편과 아내로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마치 두 눈 또는 두 손이나 두 발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상응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만물들 다스리는’ 임무를 감당하기 위해 공동사역을 합니다.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 그들은 상응한 존재로서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 임무의 책임을 지는 대표의 역할은 아담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아내는 ‘조력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둘의 관계는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받은 충격은 큰 것이었습니다(10절). 이 구절을 직역하면, “제자들이 그에게 말한다. ‘만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이러하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입니다. 이 말을 통해서, 제자들이 이제껏 갖고 있던 결혼관 또는 부부관은 성경과는 거리가 매우 먼 것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제자들이 평범한 유대인임을 고려할 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릇된 결혼관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아내들의 인권 보장은 매우 낮은 수준에 있었음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어째든 제자들이 자신들의 종래 입장과 매우 다르고 훨씬 수준높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렇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반응한 것은 그들이 충격을 받았음을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제도는 하나님이 내신 귀한 제도이지만, 반드시 누구나 결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2:18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 “그에게 상응하는 조력자”를 지으시려 한 것은 ‘아담의 혼자 있음이 좋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좋지 않다’는 말의 의미는 포괄적일 수 있으나 그 초점은 문맥상 아담의 임무에 맞춰져 있습니다. 아담의 임무는 ‘만물을 다스리는’것이고 또한 이것들을 위해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므로 아담과 상응한존재가 필요합니다. 창세기 2:18의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담 혼자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임무를 행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제도는 하나님의 맡기신 임무를 그분의 뜻에 맞게 행할 수 있는 팀(team) 을 형성하는 방편입니다(그러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된 ‘새 하늘과 새땅’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팀의 구성이 필요없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팀사역보다는 개별적인 사역이 임무수행에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례자 요한이나 바울과 같은 인물들은 결혼하지 않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평생 수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는 결혼도 가하고 독신도 가하나 이 둘 중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하든지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에 바탕하여 결정지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미 그런 바탕에서 후자를 선택한 무명의 인물들이 있었음으르 12절에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세 종류의 고자(내시)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날 때부터 신체적 결함을 지닌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타인에 의해 내시가 된 경우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경우는 스스로 내시가 된 경우입니다. 이 마지막 경우는, “천국을 위하여” 자원한 것입니다 .세 경우 모두 ‘내시’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용법상 조금씨 차이가 납니다. 첫 번 ‘내시’는 이른바 나자마자 거세(去勢)당한 것이 아니라 생득적으로 성적 결함을 지닌 사람을 뜻하고, 둘째 ‘내시’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 거세당한 사람을 뜻합니다. 셋째의 경우엔 스스로 거세한 사람이 아니라 결혼을 포기한 사람을 뜻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으로써 차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 자신이 베푸시는 것임을 26절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결단코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선생들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그런 구원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은 그 당시의 구원관을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는 표현은 16절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24절(“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말씀에서 ‘바늘귀’에 대한 설명을 붙이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나 다른 동방의 성읍에는 큰 문들이 닫혔을 때 성 안으로 드나들 수 있는 쪽문과 같은 작은 문이 딸려 있다. 이 쪽문은 사람만이 겨우 걸어서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문인지라 약대는 덩치가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통과할 수 없다. 따라서 약대가 그 쪽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이 그 쪽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솔깃한 해석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다. 그러나 그와같은 쪽문이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바늘귀’라고 불리웠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많은 사람의 죄로 인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하셔야 하는 그리스도는 그 고난과 죽음의 터널을 지나면 어디에 이르실 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구원 사역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온 땅에서 모으실 것이며 그들의 왕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그들을 다스릴 것입니다. 열두 사도에게는 그분의 백성을 다스리는 지위를 주실 것입니다. 이러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기를 좇는 이들에게 주어질 확실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29절).
마태복음 20장
본장의 전반부는 ‘포도원 품군의 비유’입니다.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비유를 말씀하게 된 동기 또는 원인, 비유의 내용. 비유의 결론, 이 세가지 요소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비유의 동기(또는 원인)는 19장 30절에 또 이 비유의 결론이 표현되어 있는 곳은 16절입니다. [‘이와같이’라는 표현이 16절이 결론임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문장구조의 형식상 16절이 결론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비유의 동기와도(마19:30) 그 내용이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비유의 내용’ 안에 비유의 의미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들어있기 마련입니다. 이 열쇠는 13-15절입니다. 그리고 이 열쇠는 비유의 결론인 16절 말씀에 대한 이유를 제공해 줍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일차적으로 12제자들에게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될 수 있다’는 ‘경고’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죽음-부활’에 대해 18절과 19절에 말씀하십니다. ‘고난-죽음-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 계시는 가이사랴 빌립보 근처에서 있었고(마16:21). 둘째 계시는 갈릴에서 있었습니다(마17:22-23). 이번의 세 번째 계시는 요단강 건너 유대지경(마19:1, 요단강 동편, 지금의 Transjordan 지역)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도중(여리고에 이르기 전, 마20:29) 어느 곳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세 번째 계시는 앞의 두 번의 계시보다 더욱 자세합니다. 그 내용은 고난의 구체적인 내용과 죽음의 방식, 그리고 고난의 과정 또는 절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듭거듭 들어왔음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해는 거의 무지에 가까운 실정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예수님께서 천국에서는 누가 큰지도 가르치셨고(마18:1-4),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제자들이 열두 보좌에 앉을 것도 말씀하셨고(마18:28), 이에 앞서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함을 주지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이 예수님께 나아와 높은 지위를 청탁했습니다. 얼핏보면, 그들은 그런 지위를 부탁할 마음이 없는데도 어머니가 단독으로 그리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어머니와 같은 생각이고 따라서 높은 지위를 얻기를 갈망하셨습니다.[22절. 그들의 어머니의 요구에 예수님은, ‘당신’(2인칭 단수)이 아니라 ‘너희’(2인칭 복수)를 계속 사용하시며 대답하십니다. 이는 욕구가 그녀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22절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너희(그녀, 야고보, 요한)는 너희가 요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기로 되어있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들(그녀, 야고보, 요한)이 그에게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선뜻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대답함으로써 높은 지위에 대한 그들이 갈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어머니를 등에 업고 자신들의 욕구를 이루어보려던 야고보와 요한 이 두 제자 뿐만 아니라, 나머지 제자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무지하다시피 하였습니다. 24절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이와같이 열 제자의 태도는 그들 역시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욕망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분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야고보와 요한이 그러한 자세를 안타깝게 여겼을 것입니다.
여기서 드러난 제자들의 태도와 사고는 전적으로 세속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기준과 가치에 근거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니 만라는 이 세상 나라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름지기 그러한 성격을 반영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하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26-28절).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죽음이 어떤 성격의 것이며 그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아셨습니다(28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자기 땅에 오셨으며 따라서 자기 백성에게 섬김을 받으시는 마땅합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히려 자기 백성을 섬기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해 희생하러 오신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대속물’이라는 용어는 매우 독특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속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세례자 요한이 그분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한 것과 그 의미가 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야 함을 아셨습니다. 이 죽음은 많은 사람 대신에 그리고 그들을 위한 것임을 아셨습니다. 자신이 그들 대신 죽으심으로 그들을 사려내는 것이며 또한 그들의 죄값을 모두 담당하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이와같은 대속적 죽음을 통해 그분을 그리스도로 믿는 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려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자원하여 기꺼이 이 땅에 오셨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 죽음에 이르시려고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0장의 상황입니다.
마태복음 21장
예수님은 요단강 건너 유대지방을 지나, 요단 이쪽(서편)의 관문인 여리고 성을 거쳐 이번여행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무리지을 ‘고난-죽음-부활’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거할 장소인 예루살렘에 이제 다윗의 자손으로서 그들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입성하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입성은 왕의 보좌애 앉아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입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백성들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들을 감당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고난을 받고 마침내는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놓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기는 것입니다. 이토록 자기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그분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왕이신 것입니다. 이토록 자기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그분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왕이신 것입니다. 이분은 ‘고난-죽음’의 터널을 지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아 영원히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실 것입니다(5절).
여기 5절에서 “그는 겸손하여····”에서 ‘겸손’의 의미는 ‘비천함’의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자는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 사역이 곧 구약성경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분이 구약이 말하는 메시야이심을 입증하는데 기록자의 관심이 쏠려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21장에서도 기록자는 스가랴 9:9을 인용하여, 예루살렘 입성 때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사건과 연결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5절에 인용된 말씀은, 스가랴 9:9을 글자 그대로 정확하게 옮겨놓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기록자가 스가랴 9:9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다소 틀리게 옮겨 놓은 것이 아닙니다. 기록자는 그 본문의 내용에 정통하고 있어서 다소 자유롭게 인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5절에 인용된 말씀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단순히 스가랴 9:9만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스가랴9:9이 포함되어 있는 최소한의 문단(슥9:9-10)을 전부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단에서는 시온의 왕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로우심, 그원을 베푸심, 겸손하심, 화평을 전하심, 온 세상을 다스리심인데, 이 중에서 ‘겸솜하심’이라는 특성에는 ‘나귀새끼를 타심’이라는 색다른 표현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겸손하심’이라는 특성에는 ‘나귀새끼를 타심’이라는 색다른 표현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학자들은 ‘나귀새끼를 타심’이 곧 그 왕의 ‘겸손하심’의 상징적 행위로 이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의 의미는 ‘나귀새끼를 타는’ 행위가 갖는 의미에 비추어 생각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겸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교만’의 반대적 의미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의배경에 의하면, 나귀를 타는 것은 지위가 낮은, 이른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욍이라면 마땅히 말을 타고 호화롭고 당당한 행렬을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참 왕이신 예수님은 나귀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분명히 왕이시지만,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가난과 억압과 고난으로 가득찬 비천한 종의 삶을 기꺼이 감당하고 계심을 드러내신 것이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남은 고난과 죽음을 통과하시면, 그분은 온 세상에 화평을 전하여 온 천하를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메시야이신 참 왕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결정적인 걸림돌인 것입니다. 그분을 ‘메시야·왕’으로 믿는 자들을 그분의 비천함이 누구 때문인지를 알기에, 더욱 그분께 감하사며 죽도록 그분께 충성할 것을 다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기록자가 예수님의 행동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이 드러난 곳은 4절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그분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메시야-왕’에게 합당한 환호를 보냈지만, 실상 그분에 대한 실제적 인식은 그런 환호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에 있습니다(11절). [9절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는 시편 118:25, 26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실 시편113-118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과 초막절 같ㅇ느 절기 때 부르는 ‘할렐’(לילה, ‘찬송’이라는 뜻) 입니다. 예수님이 옐구살렘에 들어오시는 이 때는 유월절 주간입니다. 예수님도 이 유월절에 맞추어서 예수살렘에 들어오신 것인데, 이것은 구약의 유월절과 유월절 양의 희생의 의미를 성취하시기 위함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무리들은 그분에게 놀라운 환호를 보냈습니다.
마태복음21:9 |
시편 118:25-26 |
호산나 다윗의 자손에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
이제 구원하소서 없음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없음 |
‘호산나’라는 히브리 말의 뜻은 ‘이제 구원하소서(우리를)’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다르게 번역한 것은 사실상 잘한 것입니다. 시편118:25에서는 ‘이제 구원하소서’로 번역된 ‘호산나’는 그 시편이 ‘할렐’로 사용되면서 환호하여 맞이하는의미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할렐루야’라고 상대방에게 손들어 인사할 때 단순히 기쁨과 반가움의 의미로 그리하는 것이지, 그 말의 뜻대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1:9에서 ‘호산나’를 시편 118:25에서 처럼 ‘이제 구원하소서’로 번역하지 않고, 소리나는 그대로 ‘호산나’라고 번역한 것은 그 말의 용도에 맞게 잘 번역한 것입니다. 한편 마태복음 21:9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말씀은 원어상으로는 (시편11826의 칠십인경 번역을 마태복음 21:9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므로) 시편 118:26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와 같은 것인데, 한글 개역에서는 순서와 용어를약간 바꾸어 놓았습니다.
마태복음 21:9에서 무리들의 소리는 결국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는 것 뿐입니다. 그들의 환호는, 풀어 말하자면, “다윗의 자손 만세! 하늘에서도 만세!”라고 하면서 ‘할렐’의 한구절을 삽입하여 그분을 환영한 것입니다. 그들의 실제적 인식은, 예수님을 단지 나사셋 출신의 선지자로 여기는데 그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중요시해야 할 것은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기록한 기록자의 의도, 바꿔 말하자면, 성경적 의도입니다. 기록자가, 그 당시 제자들이 예수님의 나귀타심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며 또한 환영하는 무리들 역시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알지 못한 채 기껏해야 자신들의 메시야 소망을 표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건을 기록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써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왕’이심을 계시하셨으며, 무리들의 환호는 섭리적으로 그분의 ‘메시야-왕’되심을 인정하고 환영한 것이므로 기록자는 이 사실들을 마태복음의 독자들에게 제시하여 과연 예수님이 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환호하는 것은 비록 환호자들이 예수님이 ‘메시야-왕’이심을 믿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분의 ‘메시야-왕’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그런 환호는 구약의 말씀의 성취로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16절). [대제사장들과 율법 선생(서기관)들이 분개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놀라운’(개역 한글에서는 ‘이상한’) 일들을 행하신 것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성전에서(엄밀히 말하자면,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리우는 성전구내의 바깥쪽 뜰에서) 장사군들을 내어쫓으신 일도(직접 목격은 못했다 할지라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님이 자신들의 목전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율법 선생들이 보기에,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 그 자체는 별로 탓할 것이 못된다 할지라도 정작 문제는 그러한 놀라운 일을 공공연하게 행함으로써 생겨날 결과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결과는 즉각적으로 정확히 말해서, 동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이들이 예수님께 소리치는 반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외힘의 내용은 자못 심각한 것이고, 이 내용이 그들을 분개시킨 두 번째 이유입니다.
아이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에게”라고외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외침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을 ‘왕’이며 오리라고 예언된 ‘메시야’로 지칭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질책조로 “이 아이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듣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책은 아이들이 그렇게 말한만한 계기가 된 사건 즉, 병자들을 공공연하게 고친 사실을 탓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그런 기적을 공공연하게 행함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왕’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하지 않았냐고 추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추궁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그들의 말문을 막는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너희가····라는 것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이 말씀은, ‘만일 너희가 읽어보았다면(제대로 이해했다면) 나에게 그런 식의 추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아이들이 그렇게 외치는 것은 구약의 말씀의 성취로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왕’이심을 또 다시 확실하게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은 점점 더 거세업집니다. 이러한 불신의 일면은 23절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이 나와서 질문하는 일에서 입증됩니다.
예수님은 시편 8:2에서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시편 8:2에는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셨음이여”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미티줄 친 부분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시편 8편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크신 은혜를 감사하는 시입니다. 이 시에서 처음(1,2절) 부분과 끝 부분(9절)은 그분 하나님을 찬양하며, 가운데 부분(3-8절)은 만물의 왕으로 인간을 세우신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를 감사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인용 말씀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처음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8:1은 여호와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호와가 창조주이시라는 증거가 온 세상에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의 대적하는 자들을 이와같은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들 때문에 그들(원수와 보수자로 표현됨)이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도록 하시려고 결정적인 방편을 마련하십니다. 그 방편이란 곧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호와께서는 ‘권능’(힘 또는 요새)으로 세우셨습니다. 즉 그분의 대적자들의 공격을 이길 힘(또는 막아낼 요새)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칠십인경에서는 ‘권능을 세우심이여’라는 문구를 ‘찬미를 예비하셨다’고 의역함으로써 2절의 의미를 잘 살려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마태복음 21:16절에서 시편8:2을 70인경의 번역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21:6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친 아이들은 아주 어린 아이들임이 분명하며,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라는 문구는 ‘찬미를 예비하셨나이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 즉, 시편 8편의 경우에는 창조주이심을, 여기 마태복음 21:15-16에서는 ‘메시야-왕’이심을 - 어린 아이들을 통해서 증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예수님의 인용은, 시편 8:2의 개념적(즉, 여호와가 창조주이시라는 의미에서) 성취가 아니라 범주적(즉, 여호와가 어떤 분이시라는 의미에서) 성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죄인으로 지목받는 세리들과 창기들이 오히려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32절에 잘 나타납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라는 표현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대상이 ‘저’ 곧 세례자 요한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다른 측면이 아니라 기능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바꿔 말하자면, ‘저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전파하고 증거한 진리(복음)를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32절에서도 요한과 그들의 관계의 표현하기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등장하게 된 것은 ‘의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를 믿는다’는 것은 요한이 제시하는 ‘의의 길’ 곧 의롭게 되는 길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3:3)고 외쳤는데 이 외침을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노골적인 내용의 비유를 잇달아 두 가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듣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구를 빗대어 그 비유들을 말씀하신 것인지 익히 알 수 있었습니다(45절). 이 구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비유들(원문에서는 복수임)을 듣고나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당시 예수님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는 구절은 46절입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의 비유들을 들은 무리들은 예루살렘은 물론 유대 전역에서 유월절 절기를 맞아 옐구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11절에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예루 살렘에 입성하게 된 무리들의 인식을 알 수 있는 반면에, 46절에서는 일반적인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예수님께서는 앞서 ‘두 아들 비유’(마2:28-32)와 ‘포도원과 농부들 비유’(마21:33-4)를 말씀하신데 이어서, 세 번째로 ‘혼인잔치 비유’(마22:1-14)를 들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이 세 비유에는 주제의 발전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 번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백성으로 채워지는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마21:43). 그리고 본장의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간의 관계를 또 다른 측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유의 결론 부분에 나와있습니다(14절). ‘혼인잔치 비유’에서 잔치 참여에 꼭 필요한 결정적인 조건은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칭찬하는 말을 하지만 실상 그들의 마음에는 악한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와같은 자들의 말은 16절에 나타납니다. 사실 15절과 18절을 보시면 논리적 연결을 아실 수 있습니다. 17절 역시 그들(바리새인들의 제자들과 헤롯당원)의 말이지만 이것은 예수님을 칭찬하는 말이 아니고 단지 질문입니다.
본장에는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평시에는 입장을 달리하던 여러 집단의 사람들이 힘을 합하시고 하고 번갈아가며 예수님을 길레이 식으로 공격하는 장면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리새인들이 헤롯당원들과 힘을 합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두개인들의 교묘한 질문 공세가 시작됩니다. 사두개인들과 예수님의 공방의 결과가 드러난 이후에 다시 바리새인들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사두개인들과 예수님의 공방의 결과가 드러난 이후에 다시 바리새인들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숨돌릴 틈도 없이 퍼붓는 공격을 막아내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먼저 선수를 치십니다(41절). 이와같이 논쟁의 공방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됩니다. 매 회마다 예수님의 승리가 확실히 드러났지만 그 대적자들은 승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완전히 무릎을 꿇고 맙니다(46절).
사두개인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우리도 성경과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이나 질문들을 가질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 까닭은 주로 무엇 때문인지를 시사해 주는 구절은 29절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누구이든지 간에 성경의 내용과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릇된 생각이나 질문들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간추리면 그것은 곧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람입니다(40절). ‘율법과 선지자(들)’라는 문구는 구약성경 전체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 이 두 개명들 안에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걸려 있다”이므로 여기서 예수님은 구약 전체의 가르침의 근본원리가 그 두 계명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3:6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셔서 죽은 자의 부활과 연관시키셨습니다. 이러한 연관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원래의 문맥인 출애굽기 3장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하자면, 출애굽기 3:6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무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실 일과 그 일의 목적과 그 일을 행하시려는 이유를 모세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것들(하시려는 일과 그 일의 목적과 이유)의 토대는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인 것입니다(특히 15:13-21;18:1-8을 읽으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느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이끌어 내어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가시려는 것입니다(출3:8).
이러한 흐름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소개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에 대해 이렇게 계시하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그러나 모세의 계보를 보면, 모세의 아버지는 아므람(출6:20)이고 그 위는 고핫(출6:18)이고, 그 위는 레위(출6:16)이고, 레위의 아버지는 야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명의 조상 중에 단지 세 명만을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것은 그들이 지닌 어떤 의미 즉,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들인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의 내용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 이삭, 그 후에는 야곱에게 동일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땅과 씨와 복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요소로 하는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 내용을 누리는 자들은 그 세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후손들까지입니다. 이와같은 언약의 특성을 ’계대적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원리는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에 의해서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밑줄 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실 때 ‘(그들의)하나님이었다’라는 과거꼴이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이다’라는 현재꼴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꼴로 말씀하셔도 언약의 특성인 계대적 원리와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시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언약하신 바대로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헌재꼴로 말씀하신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현재꼴로 말씀하신 것을 풀어보자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는 어느 한 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들이 지금(모세하고 말씀하시는 그때)도 살아서 하나님과 관계를 예전처럼 유지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세의 조상들로서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현재 그들과 관계를 갖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조상들은 죽은 후에 새로운 형태로 다시 살아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님은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표현하신 것이며 그 증거로서 출애굽기3:6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의미를,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들)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32)고 명확하게 밝혀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말한 것을 인용하여 자신이 ‘그리스도’ 즉, 구약성경이 약속한 메시야이심을 알리십니다. 인용된 말씀에서 “내 주”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지칭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앞의 “주”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가 하면 여호와를 말합니다(시110:1).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그리스도관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순전히 ‘인간적인’관점으로만 이해하였습니다. 그들 역시 사두개인들 처럼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와 그들의 그릇된 이해를 날카롭게 지적한 곳은 45절입니다.
마태복음 23장
이 장은(구약)성경을 존중하는 체 하지만 실상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배척하는 율법 선생(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저주를 받아야 할 이유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본거지로 전락해 버린 예수살렘이 멸망된 것도 언급하고 있습니다(38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빙자하여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오히려 훼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느 자들은 실상 마귀에게 속한 자들인 것입니다(33절:‘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이 부분은 구약에서 나중에 설명하기로 합니다).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입은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났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을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셨습니다(37절: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재림을 간접적으로 39절에 말씀하십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그 거민을 버리실 것을 좀더 강력하게 시사하십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그 시간 이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고, 또한 예수님은 그들을 더 이상 보호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하신 말씀은,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시던 그 순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여러 날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임종이 가까왔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가 되면 예루살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복되도다”(한글 개역:“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그가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 곧 그의 파루시아(Parousia)를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때, 그가 먼저 잠깐 예루살렘에서 환영 받았던 그 동일한 말로 찬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21:9). 왜냐하면 그가 영광으로 오실 때, 일찍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동안 어떤 이들은 큰 소리로 환호한 반면에 관중들은 불신앙과 의심을 가지고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21:10,15,16).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과연 하나님께서 보내신 왕이심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께 구원을 호소한다거나 그의 보호를 바란다면 이미 때가 늦을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되도다”는 말이, 그때가 되면 유대 백성들이 회개를 할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오심이 유대 백성들에게 구원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임을 암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 말은 땅에 계셨던 예수님을 거절하던 자들이 언젠가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찬사를 들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임을 가리킵니다(빌2:10, 11을 보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불신앙과 죄를 자기들(스스로)의 입으로 비난하면서 스스로를 정죄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예수님께서 유대 백성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또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알려주는 곳은 4절입니다(“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은 최고의 수위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한 부분도 위선과 관계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위선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이유는 또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구절은 5절입니다.
마태복음 22:8-10의 말씀에는 오해의 여지가 생길 수 있으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1-12절의 단락에 속해 있으므로, 듣는 이들은 무리와 제자들(1절)입니다. 그러나 8-10절의 말씀은 특히 제자들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랍비’나 ‘아비’ 또는 ‘지도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말 것을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그런 칭호를 듣기 좋아하는 율법 선생(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명예욕을 금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랍비’나 ‘아비’(유대인들은 학자들에 대한 존칭으로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9절 상반절에서는 이런 칭호를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불림을 받음으로써 영광을 받고, 또한 일반 백성과는 격이 다른 존재임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도자’로 자처하며 그런 칭호와 대접을 받기를 즐겼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사고와 명예욕에 대해 예수님은 쐐기를 박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다 형제다”,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다”,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고 하심으로써, 자신을 높이는 것이 얼마나 못되고 악한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8-10절)은, 교회에서는 아무도 지도자적인 직분이나 지위를 가질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 자신도 자기 제자들을 사도로 따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던 것입니다(마16:19;18:18을 보십시오.) 또한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 안에 특별한 직분들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엡4:11 참고).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하게 경고하시는 것은, 지도자적인 직분이나 지위를 사용하여 개인의 영예를 추구하려느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앞 부분(마5:3-12)에서는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 자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긍휼히 여기는 자들, 마음이 청결한 자들, 화평케 하는 자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언약백성의 주님으로서 자신의 언약백성의 특성과 그들이 누릴 복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마태복음 23장에0서는 예수님께서 언약의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그들이 언약의 저주를 받아마땅한 이유들을 제시하시면서 저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의 저주를 경고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신28:15)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분순종은 언약의 저주를 받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훼방자들이며, 지옥의 자식을 만드는 자들이며, 헛된 맹세를 가르치는 자들이며, 율법의 본질을 저버린 자들이며,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찬 자들이며,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일군들을 살해하고 핍박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한 이 옛 언약의 저주 아래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영접함으로써 새 언약 아래 들어서지 않는 한 누구나 예서 언약의 저주를 면할 수 없으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본장부터 마태복음의 끝 부분가지 내용을 먼저 간추려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4,25장 이 두장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섯 강화 중 마지막 것으로서 그 주제는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26장과 27장은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을 말하고 있으며, 마지막 장인 28장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종말론 강화’는 감람산에서 말씀하신 것이므로 흔히 ‘감람산 강화’(the Oliver discourse)라고도 합니다. 24장에서는 세상 끝에 있게 될 징조들과 예수님의 다시오심에 대해서, 25장에서는 천국에 관한 비유들과 예수님의 재림 때 있게 될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말론 강화’를 말씀하시나 목적은 두 가지로 압축될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넓혀서 적용하자면, 새 언약백성이 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그릇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의 미혹 혹은 속임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4절). 다른 하나는 ‘깨어서 예비하도록’하기 위함인 것입니다(42,44절).
종말에 관한 그릇된 가르침은 크게 두 종류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는 거짓 그리스도들이 나타나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 일어날 것이라고 그 시기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잘못된 가르침은 예수님의 승천 이래로 재림 때까지 끊임엇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 나라 교회의 형편을 보면, 많은 교인들이 종말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병들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그 한 예로서, 재림의 년과 월을 예고하는 가르침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고의 논리적 근거 중 하나는, “그러나 그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 날과 때’ 즉, 일(日)과 시(時)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므로 사람이 알 수 없으나 년(年)과 월(月)은 알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얼핏들으면 매우 그럴듯한 논리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솔깃해 합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속임수 논리이거나 무지한 논리입닏. 여기서 ‘날과 때’라는 의미는 년과 월을 제외한 ‘일과 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문구의 뜻은 ‘아무도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말에서 ‘주야로’로 라는 말이 새벽이나 저녁을 제외한 낮과 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또는 ‘쉬지않고’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처럼 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어색하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4:37이하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이 마치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잘까지’ 일상적인 생활을 계속했으며 마침내 ‘홍수가 나서 저희를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은 예측할 수 없는 급작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년과 월은 알 수 있다는 논리는, 언어의 자연적 의미를 무시하는 문맥과 맞지 않는 빗나간 것이므로 비성경적인 논리이며, 예수님의 경고처럼 말세에 나타난 그릇된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 종말론 강화를 잘 이해하기 위해 문단을 나누어 보면, 여덟 문단이 적절한 것입니다. (1)서론(마24:1-2). (2) 세상 종말의 징조(마24:3-14). (3) 대환난(마24:15-28). (4) 인자의 오심(마24:29-31). (5) 주님을 예비하라(마24:32-51). (6) 열 처녀 비유(마25:1-13). (7) 달란트 비유(마25:14-30). (8) 인자께서 심판주로서 오심(마 25:31-46). 이 종말론 강화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의 첫 징조는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입니다(2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징조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점은, 이 징조들과 대응되는 각각의 사건들을 일일이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연대순으로 나열된 것이 아닐 뿐더러 종말레 있을 모든 징조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점은, 이 징조들과 대응되는 각각의 사건들을 일일이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연대순으로 나열된 것이 아닐 뿐더러 종말에 있을 모든 징조들을 빠짐없이 제시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종말이라는 긴 기간 동안에 일어날 일반적 현상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종말론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의 시선을 종말의 일들 그 자체가 아니라 종말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그분께 우선적으로 고정시켜야 할 것입니다. 종말의 징조들은 그것들 스스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는 나팔소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할 것입니다.
성경의 종말론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성경기록자 또는 말씀하는 자의 관점을 갖는 일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이 사건들을 바라보던 위치에 서서 그들이 바라보던 방향과 각도대로 우리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기록자들은 앞으로의 일들을 예언할 때 그것들의 시간적 순서나 간격을 고려하자 않은 채 마치 그것들이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처럼 제시하였습니다. 그 예로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실제상으로 엄청난 시간 간격이 있는데도 마치 그 두 사건이 잇달아서 혹은 함께 일어나는 것처럼 서술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멀리 있는 산들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상에 비유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도 그러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 및 세상의 종말’을 ‘예루사렘과 성전의 멸망’이라는 평면위에 올려 놓으시고 동시대 사건들 처럼 말씀하십니다. 이런 관점은 사실 처음 청중이나 독자들을 크게 고려한 것이며, 그들이 그 말씀들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 마태복음 24장에서 제자들은 유대인들이며 따라서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생ㅅ애하고 확실하게 가르치려면 문화적으로 지리적으로나 종교 및 사상적으로나 어느 모로든지 그들의 이해와 인식의 범위 또는한ㄱ켸를 무시할 수없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리고 성경적 의미에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색칠하시기에 매우 적절한 밑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찐저”)의 말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상한 견해들이 있어서 우리 독자들은 자칫하면 이 구절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상세히 설명한, 믿을만한 주석가의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서 선 것에 관한 선지자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하심으로써 이 [셋째]부분의 강설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느 이 예언이 곧 성취될 것이며 따라서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그런 일을 보거든 자신들이 도망해야할 신호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니엘의 예언에서, ‘가증한 것’ 또는 ‘가증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는 세 구절에서 볼 수 있는데, 각 구절마다(단9:27;11:31;12:11) ‘멸망’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다니엘 9:27절의 번역과 해석에는 문제점이 있지만, 11:31과 12:11은 이 구절(마24:15)처럼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세워질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 구절 중 나중 두 구절의 예언은 예수님 시대 이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몇몇 주석가들은 예수님께서 이 두 구절을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한 예언의 최초의 성취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나중에더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다는 논박이 가능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9:27보다는 11:31과 12:11에 더욱 잘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인용이 다니엘 9:27에서만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증한 것’이란 말은, 우상이나 우상숭배의 대상물을 가리킵니다(왕상11:5,7:왕하23:13,24;사66:3). 그리고 ‘멸망의’라는 말은, 그러한 가증한 것들로 말미암은 결과를 묘사합니다. 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 즉, 성전에 서게 될 성전 출입자들이 갈망하던 하나님께 대한 참 예배는 끝날 것입니다.
다니엘 11:3과 12:11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175-164 B.C.)가 통치하는 동안 성전 뜰에 세워진 제우스 올림피오스(Zeus Olympios)를 위한 제단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나 다니엘 9:27의 의미는 다소 불분명합니다. 어쨌든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더럽혀질 것과 텅비게 될 것을,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이 포위당하여 멸망될 것(눅21:20을 보라)을 언급하시려고 다니엘의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서 말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성전 안에 우상을 세운 일이거나 예루살렘 함락 전에 있었던 열심당원들(the Zealots)의 잔학행위들이 성전 안에서 행한 살해행위라는 제안도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너무 제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좀더 일반적으로 즉, 예루살렘 함락 이전과 함락당할 동안에 발생한 성전에 대한 모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다니엘의 예언의 완전한 성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취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우상을 언급하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다니엘의 표현을 그대로 따오신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단11:31;12:11을 보라).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라는 이 괄호 안의 말씀에 대해서 후기 독자들을 위해서 마태나 아니면 어떤 필사자가 후에 첨가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청중들로 하여금 다니엘의 이 예언이 특별히 주의하도록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봄이 더욱 타당할 것입니다.
몇몇 주석가들은 옳게도 이 구절을 데살로니가후서 2:4에 언급된 적그리스도 곧 ‘친히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 자’와 연관시켰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예수님은 세상의 종말과 세상 끝에 나타날 가증한 일들을 말씀의 범위 안에 넣고 계셨습니다(3절을 보라).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을 말씀함으로써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증스럽고 신성모독적인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말세에 ‘대환난’을 말씀하고 있는 셋째 문단에서 우리는 이 주제의 폭이 젋어짐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 멸망 때에 있게 될 큰 환난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어느새 이 환난은 세상 끝날에 있을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가늠할 수 있게 해 주는 표현이 21절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큰 환난은 ‘창세 이후로 전무후무한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이것은 세상 끝날에 있을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에 심판의 고삐를 바짝 당기시면 어느 누구도 그 대환난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끝까지 자기의 언약백성을 위한 은혜와 긍휼의 손길을 거두시지 아니하십니다(22절).
세상 끝날에 있을 대환난 때에는 단순히 물리적인 환난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권능을 지닌 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의 권능은 너무도 강력하여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조차 그들의 권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착각하고 그들을 추종할 수 있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와같은 큰 미혹이 있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곳은 24절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처음 오실 때와는 괄목할만하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분의 다시 오심은 이 땅의 어느 한 구석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은 세사으이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분명하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2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기 혹은 저기에 계시다는 말들은 미혹하는 소리입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종말론 강화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목적에 따라 여덟 문단을 분류해 본다면, 넷째 문단까지는 그릇된 가르침에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인 반면에 다섯째 문단부터 25장 끝까지 계속되는 여덟째 문단까지는 깨어서 예비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세상의 종말)을 깨어서 예비해야 할 까닭은 말씀하신 모든 일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34-35절)이며 그분의 재림은 갑작스럽게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2절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44절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깨어서 예비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쉽게 가르쳐 주시려고 두 개의 짧은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깨어 예비함이란 아무 일도 안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도록 신실하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삶은 주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삶은 자기의 판단에 따라 하고픈 대로 사는 삶입니다. 이 반대의 삶을 비유에서는 48절과 49절에 잘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종말론 강화의 여섯째 문단인, ‘열 처녀 비유’에서 말씀하시고자 한 결론은 13절에 나타납니다. 이 ‘열 처녀 비유’는 앞 장의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의 비유(마24:45-51)와 짝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열 처녀 비유’에서 처녀들은 혼인식 전날 밤에 실랑집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들러리 처녀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근동지역의 혼인은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이미 신랑집에 도착해 있지만 신랑은 혼인식 전 며칠 동안은 그가 꼭 처리해야 할 일들과 참석해야 할 잔치 등을로 몹시 분주합니다. 그리고 혼인식 전날 저녁에는 예식과 잔치를 치룰 자기 집으로 신랑이 돌아올 때 들러리 처녀들이 뛰어나가 그와 그의 일행을 맞이해야 하는데 예상 외로 돌아오는 시간이 늦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이 비유의 배경인 셈입니다.
다섯째 문단과 여섯째 문단에서 예수님은 ‘주의 오심’을 예비하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신 후에 여기 일곱째 문단인 ‘달란트 비유’에서는 ‘예비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단순히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재능을 활용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비유의 의미는 특히 종교적이고 종말론적인데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 비유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자신의 삶을 계산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일 분명히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처럼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비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미래에 대한 예비와 현재의 도덕적인 삶과의 연관성을 열 처녀 비유에서보다 훨씬 더 강조하십니다. 사실 ’복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윤리도덕과 종말론은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종말론은 윤리도덕적 요구의 시급함을 고조시킵니다. 따라서 미래에 있게 될 ’많은 것‘(21절) - 즉, 만물의 전적으로 새롭게 됨 - 으로 인하여 현재의 ’작은 일‘이 무의미해지지 않습니다. 이는 사람이 작은 일에 신실하였다면 그 많은 것도 맡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다시 말하자면 이 비유의 핵심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름지기 모든 일을 그분의 다시 오심에 비추어서 생각하여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으르 바라볼 때라야 그들은 진실로 하나님께 헌신된 생동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종말을 대망하는 것과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은 서로 부딪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자는 후자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강화의 마지막 문단에서는, 이제껏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시 오심’ 그 자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꿔 말하자면 마태복음 24:31에 이어서 세상의 종말에 관한 설명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다시 오실 때 어떠한 분으로 오실는지 그리고 어떠한 사역을 하실는지를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전세계적인 심판이 있게 될 것이며 ‘그 여인의 후손’인 그분의 백성과 ‘뱀의 후손’인 사단의 추종자들이 분리되어, 전자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삶을 누릴 것(32절과 46절)이며 후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땅 위의 모든 사람을 심파하러 다시 오심은 단지 일개 재판관으로서 자기 직임을 다라허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온 천하의 왕으로서 오시는 것입니다(34,40,45절).
‘ 른 편으로 분리된 자들’ 대해서는 여러가지 용어를 사용하여 그들을 지칭하고 있는데 양, 의인, 복받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왼편으로 분리된 자들’은 염소들에 비유됩니다. 그들은 분명히 ‘뱀의 후손’인 것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영원한 기업으로 받게 되는 반면에, 이 염소들은 그들의 주인의 운명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41절). 그들은 영원히 언약의 저주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여덟째 문단은 마치 선행을 많이 행한 자가 영생에 이르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수차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이 문단에서 착한 일이란 믿음의 표현으로서 나타난 일인 것입니다. 그분의 언약백성으로서 언약의 의무를 다하는 것, 곧 그분의 언약적 사랑을 자신의 삶에서 반영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는 윤리라는 모습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그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약속된 영원한 기업을 누리기를 사모하는, 그분의 진정한 언약백성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자신의 언약의의무들을 행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왕이신 그분께 대한 우리의 헌신과 사랑을 증명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실한 삶,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본장과 다음 장은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을 서술합니다. 본장은 예수님의 ‘종말론 강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공식적인 문구에 이어,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알리는 네 번째 계시(2절)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앞에서 세 차례에 걸쳐(마16:21;17:22-23;20:1-19) 자신의 ‘고난-죽음-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한편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예수님살해 계획은 한치의 빈틈도 없도록 엮어지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15에서 언급한, ‘그 여인의 후손’과 ‘뱀’의 마지막 결전이 눈 앞에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려 주는 구절은 28절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언약백성의 관계는 여러가지로 묘사됩니다. 그 가운데 구약성경의 표현을 따서 묘사한 것이 31절에 나타납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당할 ‘고난-죽음’ 사건에 적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백성)간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임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4절)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의해 집행되었지만, 이 사건의 배후에는 창세 때부터 마련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백하게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 즉, 구약성경을 통하여 계시 하신 바대로 이루어지도록 자원하여(54절) 그 ‘고난-죽음’의 길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모든 과정은 사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계시하신 바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밤 중에 사로잡힘도 역시 구약성경의 계시대로 된 것입니다(56절). 이 점을 예수님 자신께서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미리 말씀하신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들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자 신이 곧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예고하셨습니다(31절). 이 예고가 그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56절). 이 외에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예고가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본장의 마지막 부분(69-75절)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 선생(서기관)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산헤드린(Sanhedrin)공회에서 한 밤 중에 재판을 받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64절).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잡아 처형하려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3-4절). 그러다가 유월절 밤에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을 무사히 체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그들은 이튿날 아침 까지 기다렸다가 정식으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기에는 너무 마음이 바빴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임시비상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57절). 비록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애이므로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가 다소 위축되었다 손치더라도, 이 공회는 여전히 유대 나라의 대표기관으로서 이른바 삼권을 장악하고 있는 최고의 권력기구였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그의 주제로 특별재판을 열었습니다. 피고인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각본에 다라거짓 증인들을 많이 세웠습니다(59-60절).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 대제사장이 직접 심문합니다. 그의 관심은 과연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에 있는 듯합니다(64절). 이제껏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확실한 답변을 하십니다(64절).
64절에서 예수님은 먼저, 가야바의 질문에 대해 긍정의 답을 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야)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받아들이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건져낼 뿐만 아니라 이방 모든 나라들 위에 세우시는 반면에 이방 나라들에게는 심판을 행하실 메시야 즉, 권능과 위엄으로 가득찬 화려한 메0시야를 대망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들 앞에서 죄인으로 잡혀와 심문받고 있는 초라한 인간 예수가 ‘자신이 메시야’임을 시인하니,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자칭 메시야라 하며 백성들을 미혹하는 사이비 메시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 유대 지도자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엄천난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공회의재판을 주재하던 대제사장은 자신의 옷을 찢으며 분개하고 마침내 공회원들의 전폭적인 동의를 얻어 사형을 선고하게 됩니다(65-66절).
위의 밑줄 친 말씀은 각각 시편110:1과 다니엘 7:13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확실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분으로 자신을 묘사하십니다. 시편 110편은 다윗의 시인데, 그는 1절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편에 따르면,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주(“내 주”)께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주’는 누구입니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먼저 이 시편에 나타나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하나 더 뽑아서,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이 신약성경에서 누구에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주’에게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너무도 확실하게 오직 한 분께만 적용되고 있는데 그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4-10장의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아주 분명하게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고 선포합니다(히4:14). 이어서 그는 위의 시편 110:4말씀을 인용하고(히5:6), 예수님은 “하나님께 멜시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신 분‘이고 못박아 말합니다(히5:10).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이심과 이 대제사장의 독특성을 역사적 논증을 통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다른 영원한 제사장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분이 ’다윗의 주‘ 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10:1에서 다윗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도다”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시편 110:1을 인용하여 다윗이 ‘내 주’라고 언급한 분은 곧 예수님이심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의 설교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내용을 간추리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가 곧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다’입니다.이 결론에 이르는 논증과정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1을 인용하고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붙이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히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다윗이 주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누구이심을 분명히 알고 계셨으며 따라서 시편 110:1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신분을 설득력있게 그리고 성경적으로 정당하게 유일한 그리스도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속의 사역을 담당하시는 그리스도이신 것만은 아닙니다.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시기에 그분은 장차 자신의 주님되심을 만인이 알 수 있도록 영광스러운 현현으로써 드러내실 것인데, 이 사실을 그분께서느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는 말씀은 다니엘 7:13에서 그 개념을 따온 것입니다. 다니엘 7장은 선지자 다니엘이 본 이상을 기록한 것인데, 하나님의 계시로서 주어진 이 이상은 다니엘 시대 이후에 있을 일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특히 9절 이후에는 “엣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등장하는데 이분은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신, 위엄이 가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13,14절에는 어떤 분이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위임하시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망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나를 다스리시는 왕으로 즉위하시는 것입니다. 이분은 “인자같은 이”인데,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공식 명칭을 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人子)과 같은 이’ 즉, ‘인간의 모습을 지닌 어떤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단순히 인간과 비슷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방법으로 그곳에 오셨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오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그분은 신성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 7:13-14은, 인간의 모습을 지니신 동시에 신이신 어떤 분께서 영원한 나나님 나라의 왕이 되심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시편 110:1과 다니엘 7:13을 인용하심으로써 구약성경이 말씀하고 소망해온 그리스도가 바로 자신이심을 확실하게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장차 하나님 나라의왕으로 영광스럽게 다시 나타나실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른바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과 같은 종류의 희생이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며 따라서 여러 가지 모양과 방법으로 예시되고 예고된 것이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죽음인 것입니다. 이 죽음은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구원역사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이며 이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인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그리고 심판과 은혜가 온전히 구현되는 사건입니다.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말하자면, 이 죽음은 언약적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옛 언약을 대치하는, 새로운 영원한 언약을 맺는 언약의식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를, 언약의 중보자로서, 홀로 받으시고 한편으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새 언약의 복을 확보하시려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은 죽음의 언약적 성격을 말씀하신 구절은 28절입니다.
[해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주간을 좀더 뜻있게 보내려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여 그분의 고난에 동참해 보려고 금식을 하거나 그 밖에 다른 육체적 고통을 스스로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값진 일들을 행하기 이전에 우리가 그렇게 하려는 마음의 자세 또는 근본적인 사고를 진단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실상 우리가 동참하거나 나눠가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고난은 그분만이 담당하실 수 있고 그러셔야만 했던, 구세주로서 당하신 고난인 것입닏.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고통, 아픔과 고뇌를 되뇌어 보며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며 행하는 감상적인 일들만으로는 오히려 그분의 고난을 욕되게 하며 무의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설사 이제 다시 우리가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혀 본다고 한들 그것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기는 커녕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모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하실 수 있었던 구원사역에는 우리가 끼어들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현재 나 자신의 고통을 통해 그분의 고난에 동참해 보려 한다는 것은, 사실상 본의는 결코 아니라 할지라도, 스스로를 구세주로 높이려는 망령된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도 구세주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결과를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 누리는 자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고난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이 이해에 근거하여 진심으로 감격 감사하며 이 감사함의 표현으로서 그분이 원하시는 새로운 고난을 기꺼이 짊어져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이 고난을 마감짓는 죽으심은, 언약적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그분은 옛 언약을 대신한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언약백성들이 받아야 할 언약의 저주를 그분께서 대신 받으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그분을 언약의 중보자로 믿고 따르는 그분의 새 언약백성들은 성경에 약속된 언약의 모든 복들을 누리게 되었으며 그 대신 언약의 모든 저주에서는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크나큰 은혜는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올바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고난주간에 어떤 마음가짐을 우선 가져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한 마디로, 우리 마음은 초상집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처럼 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잔치집의 분위기에 젖어야 할 것입니다. 고난주간의 잔치집 분위기라는 것은 다소 어색한 듯 싶어도 우리나라의 호상(好喪)난 초상집 분위기를 떠올리신다면 넉넉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그 당시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못해서 슬퍼해야 했던 그런 종류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부활의 서곡인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과 부활을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은 그분의 죽으심의 의미를 깊이 바르게 생각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주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남을 전제한 죽음, 바로 이러한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며 기버하며 그러기에 그분이 원하시는 고난 -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기에 세상으로부터 받는 핍박, 그분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 대접함으로 인해 입게 되는 손해, 공의를 외면하지 않으므로 인해 당하는 박해, 남의 짐을 나눠짐으로써 생기는 피해, 쉬지 않고 선한 일에 힘씀으로 인하여 생기는 어려움 등등 - 을 기꺼이 받겠다는 각오로 실천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계기로 삼는 기간이 곧 고난주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본장에는 예수님게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받으시고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실 사명을 완수하신 것입니다. 그분께 일어난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일치되는 것이며 그분의 삶 그 자체가 구원계획의 진행이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심으로써 영원 전부터 계획된 구원을 완성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죽음을 자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처형을 요구하는 외침과 처형을 시키려는 악의로 가득찬 고소가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그분은 목숨을 구하려 애원은 커녕 아무 변명조차 아니하십니다. 이와같은 그분의 자원적인 자세를 잘 보여주는 장면을 기록자는 빠뜨리지 않고 분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1-14절).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기록자는 여기저기에서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인간-그것도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자처하는 민족, 더욱이 그들의 종교지도자들-의 악의에 의해서 죽으시게 된 것입니다. 이분의 무죄함에 대해서는 빌라도의 아내와 그분을 팔아 넘긴 유다까지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한 지도자들과 귿들의 부추김을 받은 백성들은 그와같이 무죄한 분을 죽이는 죄의 댓가를 전혀 두려워하거나 그분을 죽어야 할 합당한 이유도 대지 못하고 그대신 막무가내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분의 무죄함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에게 사형을 선고할 법적 근거도 전혀 찾을 수 없었으나, 빌라도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분을 처형하기로 작심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선고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떠맡기려는 교활함을 공개적으로 내보입니다(24절).
사실 예수님은 언약백성 모두의 왕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자처하는 이들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하시게 된 것입니다. 왕으로서 합당한 영광과 존귀를 누리기는 커녕 자기 백성들에게조차 따돌림과 배반을 당하시고 마침내는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몰리게 되신 그분에게 이제는 로마의 군병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모욕이 쏟아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희롱하기 위하여 그분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으며, 찬란한 왕관 대신에 가시로 엮은 왕관을 그분의 머리에 씌웠고,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홀 대신에 갈대를 들게 한 후에 그분 앞에 무릎꿇어 경배하는 시늉을 하셨습니다. 그러고나서는 그분에게 노골적인 모욕을 가하였습니다. 그분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고 그분의 머리를 쳤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수모를 잠자코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골고다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분은 그 곳에서 남은 고난과 고통을 마지막 한 방울 까지 남김없이 다 마시려 했습니다. 그래서 육체적 고통을 다소 진정시켜 주는 방편까지도 거절하셨습니다(34절).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왕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분의 죽음이 자신들을 위한 대속적인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분을 구원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도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자기 백성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들의 악한 죄로 인해 처형당하는 자들까지도 주님에게 모욕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수욕을 끝까지 감내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안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수도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 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반된 징조들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54절). [성소 휘장이 찢어짐 - 흔히 이 휘장을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짓는 휘장으로 생각하시지만, 이러한 생각이 올바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다음 설명을 들어 봅시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강력한 징조들이 동반되었는데, 그 중 첫째 징조는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십중팔구 헤롯 성전의 성소(the Holy Place) 입구에 있던 호화로운 휘장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성전의 뒷쪽 부분만을 가리키지 않고 성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휘장은 지성소(the Most Holy Place) 앞에 있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진으로 인해서 발생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휘장의 찢어짐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는 징조로 보이는 그 밖의 사건들이 일어났다(예를 들면, 잠겨있던 문들이 저절로 열렸음). 이러한 표징을 예수님의 죽음에 동반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였으므로 자신의 거처인 성전을 곧 저버리시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그러나 휘장의 찢어짐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이상이다. 그 휘장이 찢어졌다. 따라서 상징적으로, 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열린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 그분의 처소로 나아가는 것은 제사장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히브리서 10:19-20은 성전의 휘장을 그리스도의 육체에 비유할 수 있었다. 그분은 자신의 죽으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이제 그분이 다시 살아나실 수 없도록 인간적인 수단을 강구하여 실행합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부활은 인간의 힘으로 방해를 받을 성질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이미 부활 사건의 전조가 나타났습니다. 이 전조는 또한 세상 끝날에 있을 부활의 맛보기 사건이기도 합니다(52절).
마태복음 28장
기록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과 그 의미를 이 복음서의 첫머리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임마누엘’로 표현하였습니다(마1:23). 그분은 과연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임마누엘의 원리를 표현하신 곳은 20절입니다.
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백성들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마1:21)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권한과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시고 참 사람으로서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중보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대부분 그분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분은 단지 초라한 인간으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올바로 인식하는 유일한 길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는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게로 몰려왔지만,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는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 주위에서 맴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소수의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뵈옵자 그분에게 합당항 예우를 취하였습니다(9,17절). [참고:‘경배하다’는 말은 신약에서 동사꼴로 59회 사용되고 있는데 거의 전적으로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과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신이나 신의 대리자인 왕앞에 엎드려 경의를 표하며 동시에 복종할 것을 다짐하는 행위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이미 전에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지 그분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알고 경배한 적이 있었습니다(마14:33). 그 이후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죽음-부활에 대해 여러 차례 계시하셨고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은 그 계시와 가르침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뵙게 되자 그들은 이제껏 알지 못했던 계시의 의미를 확실히 붙잡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하나님으로서 누리셔야 할 영광을 마다하시고 낮아지시고 스스로 미천해지신 예수님, 온갖 고난과 수모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받으시고 끝내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신 구원주 예수님, 그러나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구원계획을 성취하시고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확실하게 드러내신 예수님을 뵈옵자, 계시의 의미를 올바로 붙잡은 제자들은 그분 앞에 합당한 경의를 존경을 표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초라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그분은 단순히 인간에 불과한 분이 아니시라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이신 줄을, 그분의 부활을 통해서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마침내 마태복음 1:23 상반절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셈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6:32의 말씀이 글자 그대로 성취됨을 알려 주고 있는 구절은 7,10절입니다
마태복음 첫머리에서 기록자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혈통적으로만 그리하실 뿐 아니라 진정한 성경적 의미에서도 에수님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다윗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왕이 아닙니다. 이분은 다윗의 완성자이신 왕이십니다. 다윗을 이분에게 비교하여 표현한다면, 이분은 참 왕이시고 다윗은 참 왕의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한 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제 참 왕의 권위를 드러내시게 된 것입니다. 이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십니다(18절).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다니엘 7:14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대위임 명령’ 또는 ‘대분부’(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불리는 19-20절 말씀은, 교회의 원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위임된 이 명령이 준행됨으로써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명령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집으라고 하면 ‘제자를 삼아’가 됩니다. [참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언약백성의 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지엄한 분부를 내리십니다. 이것은 곧 한마디로 간추린다면, 자신에게 속한 모든 언약백성들을 온 땅에서 불러모으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명령은 일차적으로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분명하지만, 명령의 성격상, 왕이신 주님게서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지켜져야 할 분부인 것입니다. 즉 이것은 단지 사도들의 순종만으로 온전히 이루어질 분부가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지켜야만 하는 계대적 성격의 명령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세상 끝날까지 존재해야 할 교회의 원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이 그러한 성격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계대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역 한글판 성경에서는 이 명령의 말씀이 네 개의 동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말씀을 보면 19-20절 상반절은 한 개의 명령형과 세 개의 분사로 구성된 한 문장입니다. 따라서 문장의 구조에 따르면, 이 문장에서 가장 중심되는단어는 ‘제자 만들라’하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문장의 구조에 따르면, 이 문장에서 가장 중심되는 단어는 ‘제자 만들라’하는 명령형 동사인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제자를 삼아”로 부드럽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에 해당하는 세 개의 분사는 이 문장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제자 만들다’의 의미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게서는사도들에게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셨는데 누구의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제자가 될 대상의 범위와 ‘제자’의 의미를 알게 되면 곧 결정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가 될 대상의 범위는 ‘땅 위의 모든 족속’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몇몇 사도들의 제자가 될 수 없을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사도들의 제자를 삼으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의 내용을 살펴볼 때 예수님께서 ‘제자’의 의미를 단순히 가르침을 받는 학생과 가르침을 주는 ‘선생’의 관계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매우 독특한 관계 즉, 자신의 소유와 심지어는 가족의 관계까지도 뛰어넘고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다 내맡긴 그런 관계로서 ‘제자’의 의미를 풀이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런 관계라면, 사람들이 사도들의 제자가 되기 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분부는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라는 것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사실 사도들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라면, “아버지와 아들(예수님)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레를 주고 내(예수님)가 너희(사도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해야 할 임무는, 세상 모든 족속들에게로 나아가 그들 중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시며 왕이심을 확실히 믿고 그분께 자신의 삶 전체와 목숨을 내맡기고 충성하려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그분의 제자된 표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며, 그분의 제자의 도리로서 ‘예수님의 말씀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임무는 계대성을 띠고 교회에게 위임되었으므로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그리고 새 언약백성의 모임인 교회의 주인이시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칭찬받으려면 그분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그분의 제자들을 만드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창12:1-3)의 성취가 시사되어 있는 구절은 19절입니다. 마태복음 첫머리에서 기록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세 가지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그것들은 사실상, 마태복음의 내용 전체를 압축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 명칭은,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스도’입니다. 이 명칭이 의미하는 바대로, 예수님은 자기 백서을 죄에거 건져내시는 구원자(=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시고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가져다 주시는 분(=아브라함의 자손)이시며,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시며 그들을 은혜와 진리로 다스리시며 또한 온 우주를 다스리실 왕(=다윗의 자손)이십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사실은 마태복음의 마지막 세 구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그분과 그분의 행하시는 사역에 초점을 맞춰 전개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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