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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변화산 사건(마 17:1-8) 및 마태복음 17장 연구

by 은총가득 2020. 9. 24.

 

변화산 사건(마 17:1-8)

 

[마 17장 요약 강해] 믿음에 관한 교훈 [내용개요]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신다. 거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하시어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신다(1-8절).

 

산을 내려오시면서 구약에서 예언한 엘리야가 세례 요한임을 가르쳐 주신다(9-13절).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예수의 제자들이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시고 그 아이를 고쳐 주신다. 자신들이 왜 고치지 못했는가를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믿음이 적은 까닭이라고 답변하셨다(14-21절).

 

이즈음에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메시야의 수난 예고를 하신다(22- 23절).

가버나움에 이르러 성전세의 문제가 발생하자 예수께서는 성전세를 지불하신다(24-27절).

 

[강 해] 본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장입니다. 본장은 변화산 사건을 중심으로 믿음이 없어 병을 고치지 못한 제자들의 나약함과 예수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 및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구분해서 드려야 한다는 성도의 생활에 대한 교훈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1. 예수의 영광

1) 신성이 드러남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때로부터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한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거룩하시고 영광된 모습을 세 제자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장차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갈 기둥 되는 세 제자에게 자신의 신성을 오이심으로 그들에게 확신을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a. 아버지와 하나 됨(요10:30) b. 하나님의 본체(빌2:6) 2) 하나님의 인정 앞장의 기록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을 보았습니다. 본장에서 베드로는 그가 고백한 내용이 사실이라 는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변화하신 예수를 통해 그의 신성, 곧 그리스도 되심을 보았고 그와 아울러 하늘에서 들려오는 성부 하나님의 소리, 곧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a. 내 사랑하는 아들(마3:17)  b.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눅1:32)

 

3) 세상에서는 영광보다 고난에 동참해야 함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보자 또다시 인간적인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가 이 땅에서는 영광 가운데 계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참조, 마16:21-28), 예수가 변화산에서 영광을 입은 채로 계실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배후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며 안위할 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가 인류를 위해 죽고 그의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그 뜻은 동일합니다.

 

a. 좁은 문(마7:14)  b. 당연한 핍박(요일3:13)

 

2. 제자들의 무능

1) 믿음이 없었기 때문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자신의 신성을 세 제자에게 보이시며 자신이 죽을 것과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시므로 자신이 의심할 여지없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리신 뒤 다시 사람들에게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로 내려가자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의 제자들이 아들의 간질병을 고치지 못하니 친히 고쳐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아마도 병을 고치지 못했던 이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산에 올라가지 아니하고 마을에 남았던 제자들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능력을 날마다 보면서도 병을 고치지 못하는 그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왜냐하면 병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 많은 이적과 표징들을 보고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못했습니다.

 

a. 믿는 자만이 능함(막9:23)b. 믿는 자가 가진 표적(막16:17)c. 믿지 아니하면 꺾임(롬11:20)

 

2) 패역한 세대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행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가지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아직도 육체를 섬기는 패역한 세대로부터 떠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면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참되다는 것을 보고서도 이 세상 것을 의뢰하는 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육신이 먹을 것과 입을 것, 잘 곳, 즐길 것 을 추구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을 정결케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a.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함(마6:24) b. 청년의 근심(마19:22)c.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12:2)

 

3. 세금을 통한 교훈

1)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들 유대인들은 누구나 성전 관리비로 일 년 동안 반 세겔을 내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이르자 성전 세리가 성전 관리비를 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성전은 하나님의 것이고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성전 관리비를 낼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도 이제는 자신을 통해 양자 되었으므로 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과 및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 이제 모두 하나님의 아들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a. 자녀 되는 권세(요1:12). b. 양자 됨(롬8:14-15).

 

2)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용납받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양자 되어 이제 더 이상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성전 관리를 위한 세금을 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예수의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정죄받지 아니하고 용납받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교훈해 줍니다.

 

a. 완전한 용서(사1:18)b. 상속자(롬8:17)

 

3)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세금을 내야 함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본질적으로는 세금을 낼 필요가 없었으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세금을 내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말고 필요할 때에는 세상 법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주님은 로마의 가이사에게도 세금을 바치셨습니다(참조, 마22:21).

 

a.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마22:21)

b. 세상 속에서 행하여야 함(고전5:10) 결론 예수는 끊임없이 자신의 메시야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도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건의 능력을 아직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겠습니다. [단어해설]

 

7절. 손을 대시며. 이것은 최대한 동정과 사랑을 나타내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23절. 심히 근심하더라.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시사한다.

 

[신학주제] 변화산 사건.

예수의 왕국에서 어떻게 고난과 영광이 서로 깊은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은 변화산상의 놀라운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신적 주권과 광채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 이제 고난을 당하려 하실 즈음에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위대한 사자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 남은 일은 율법과 예언의 성취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으셨고, 또 그가 세례받으실 때와 거의 같은 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포를 들으셨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 중 몇 사람도 이것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이때 베드로는 조급한 말을 하고 말았다. 그는 이 영광을 빨리 얻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하늘 보좌의 영광을 잠시 동안만 보도록 허락되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예수께서 친히 그들을 진정시켜 현실 세계로 데려오셔야 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침묵을 지킬 것을 엄숙히 명령하셨다. 부활하신 후에라야만 그의 영광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다.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자들은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그들은 서기관들의 가르침대로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비천한 상태를 높이기 위해 먼저 와야 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만 골몰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왕이 오기 전에 이미 그의 사자가 왔으나 이스라엘은 그를 거절했으며 인자가 왔어도 역시 거절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고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의 고귀한 영광이 어떻게 조화되는 것인가를 모르는 상태에서도 다른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하여서는 증인이 되어야 했다.

 

[영적교훈]

가버나움에서 성전세를 받는 사람이 예수께서 성전세를 내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신분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의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약간의 이적을 행하셔서 성전세를 마련하셨다. 성전세를 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한 행동이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하셨던 것이다. 내 형제를 실족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바울의 고백도 동일한 차원에 속한다. 교회의 건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변화산 사건과 그 의미

 

복음서의 전반부는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이 부분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절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후반부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제자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기 원하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로 계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자신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에야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산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변화산 사건의 의미

변화산 사건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인자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예고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적인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때에 세 제자들은 갑자기 모세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때에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함께 장차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모세와 장로들을 산 위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장로들은 산 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서 식사를 했습니다(출 24:9-11). 그 후에 모세는 다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산 위에서 40일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막 제작에 대해 지시를 받았습니다(출 24:12-18).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을 선언하시고, 세 제자들을 산 위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적인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2. 변형된 주님의 모습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6:1-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막 9:2-3)."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8-29)."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함께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 일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살아서 인자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예고하신 날부터 엿새가 지난 때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때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날부터 여덟 째 날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복음서 기자들이 날짜를 서로 다르게 소개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누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날과 변화산에 오르신 날까지 포함해서 8일로 계산한 반면에, 마태와 누가는 그 사이에 있는 6일만을 계산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 24:16)을 보면 모세도 시내산에서 계시를 받기 전에 6일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6일하나님의 중요한 계시를 받기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 때에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올라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변화산에서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적인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시적인 면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특별하게 대우하셨습니다(5:37, 13:3, 14:33).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 이 세 제자들을 자신의 특별한 증인으로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을 데리고 간 산이 어떤 산이었는 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산이 갈릴리에 있는 다볼산이나, 또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북쪽으로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헬몬산(약 9,300피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가는 이 때에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다."

 

그러나 누가는 간단하게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변화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때에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다"고 말하고 있으며, 세 복음서 기자들 모두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서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희어지고 해처럼 빛이 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거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을 대면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서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에 있던 빛은 곧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몸에서 비취는 광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신적인 빛을 숨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잠시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적인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3. 고난을 받기 전에 먼저 영광의 비젼을 보여주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후에, 그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에게 자신이 장차 입을 신적인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세 제자들에게 자신이 입으실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얻기 전에 먼저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후에 다시 살아나시고 다시 신적인 영광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미래에 임할 영광을 보여주실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일은 성도들이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장차 그가 왕이 될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왕이 될 것을 바라보면서 온갖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가 된 에스겔과 다니엘에게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셨고,

밧모섬에 귀양가 있던 사도 요한에게도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래의 비전은 그들이 현재에 당한 고난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성도들이 고난 후에 얻을 영광을 미리 보여주심으로, 그들이 현재에 임한 고난을 늫히 이길 수 있게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 살아 있을 때에 하나님 나라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지 6일 후에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기 위해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갑자기 예수님의 몸이 변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이 났고, 예수님의 옷은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간 세 제자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세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 두려워 하면서 동시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산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남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마 17:3)..."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막 9:4)"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눅 9:30)..."

 

그 때에 세 제자들은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약 1,500년 전에 느보산에서 세상을 떠났고, 엘리야도 약 900년 전에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 제자들은 이 두 사람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옛 언약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율법(옛 언약)의 중보자였고, 엘리야옛 언약의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자로 나타나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장면은 세상을 떠난 성도들이 소멸되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죽으면 매우 슬퍼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영원히 이별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성도들은 소멸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 장면은 부활과 영생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멸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 너머에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세상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림 때에 모든 성도들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2. 계시의 중심인 그리스도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쌔(31),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눅 9:31-32)..."

 

누가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교회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 즉 옛 언약의 중보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의논한 것은, 옛 언약(율법)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엘리야구약의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의논한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구약의 성도들이 예수님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대표인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수님과 함께 이 일에 대해서 의논을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받으실 고난과 구원에 대해서 깊이 상고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천사들도 살펴보기 원하는 놀라운 일입니다. 물론 구약의 성도들은 신약의 성도들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밝히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을 보았지만, 그들은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먼 발치에서 메시아를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도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상징하는 모형이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러한 모형들을 통해서 구속의 진리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됩니다.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우리는 우리가 지었던 수많은 불의와 죄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머리털보다 더 많은 우리의 죄를 보고 경악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쉴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절박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잡는 사람은 무죄 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인류의 생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의논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묵상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세 제자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의 몸과 옷이 찬란한 빛과 광채를 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세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즉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대표자로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함께 의논을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옛 언약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옛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인류의 구속에 대해서 심도 있는 논의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중심이시며, 인류 구속 사역의 핵심이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막 9:5-6)."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눅 9:33)."

 

세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그 곳에 세 사람을 위해서 천막 3개를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지막 추수를 마친 후에 초막을 짓고 7일 동안 그 안에서 살면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이 초막은 옛 조상들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일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러나 이 절기는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상징하는 절기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지막 추수를 마치고, 장차 이 세상에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을 고대했습니다.

베드로는 산 위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곳에 천막을 짓고, 그 곳에서 살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미래에 임할 영원한 초막절을 잠시 체험하고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2.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막 9:7)."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34),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눅 9:34-35)..."

 

그러나 그 때에 갑자기 구름이 나타나서 세 사람을 덮었습니다. 그러므로 세 제자들은 구름 때문에 더 이상 세 사람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구름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때에 구름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가리우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에 구름으로 산을 덮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실 때에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 구름을 두르시고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에게 자신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가서 말씀을 듣고 전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변화산에서도 구름으로 자신의 영광을 덮으셨습니다. 구름이 세 사람을 덮게 되자, 제자들도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옛 언약의 중보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전하는 말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의 중보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전하는 말을 듣고 순종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직접 예수님이 새 언약을 위해 세움 받은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음성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세 제자들에게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독생자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구약)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보다 더 강력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성부와 성령 하나님의 증거는 어떤 증거보다 더 강력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세움 받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증거는 세상의 어떤 증거보다 더 강력한 증거입니다.

<수난 예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이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해 주시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증거들은 모두 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인류를 위해 고난을 받게 될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3. 오직 예수만 남음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6-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를 뿐이었더라(막 9:8)."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눅 9:36(상))."

 

세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려서 크게 두려워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을 대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세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는 것을 보았고, 또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셔서 그들을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자 모세와 엘리야는 사리지고 예수님만 남아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의논한 후에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는 인류의 구속을 담당하실 예수님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인류의 구속 사역은 예수님의 어깨 위에 올려졌습니다.

이제 모세와 엘리야의 시대는 지나가고 예수님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엘리야 논쟁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모세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일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 의논을 한 것은, 구약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갑자기 구름이 와서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을 덮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고 증거해 주신 후에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제자들이 눈을 들어보았을 때에는,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남아 있었습니다.

 

1. 너희 본 것을 말하지 말라.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마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그 후에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세 제자들은 산에서 찬란한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의 눈에는 아직도 산 위에서 보았던 영광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흥분해서 빨리 내려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을 내려가시면서 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너희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예수님은 세 제자들에게 그들이 산에서 본 장면을 자신이 부활할 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지시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자신들이 산 위에서 본 놀라운 장면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부활 때까지 자신의 신적인 영광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제자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고백했고 또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후에, 예수님의 고난을 만류하다가 예수님의 책망을 듣게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성급하게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세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아직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메시아에 대해서 충분히 알게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전한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더 기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메시아의 모든 사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 제자들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보게될 때까지 그들이 본 사실을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성령 강림

또한 제자들이 온전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했습니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능력과 권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령님께서 오실 때까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보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제자들은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위해서 먼저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 후에 일어날 것입니다. 후에 제자들은 오순절에 오신 성령님을 힘입어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행 2장). 그리고 그 때에 베드로의 셜교를 듣고 3,000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후에 그는 자신이 변화산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영광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벧후 1:16-18).

2. 이해할 수 없는 제자들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묻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막 9:10)..."

그러나 세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세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을 보고,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때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산에서 내려가시면 얼마 있지 않아서 로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습니다. 제자들은 "인자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또 "인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당분간 그들이 본 장면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도록 금하셨습니다. 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말씀대로 입을 닫았습니다. 메시아의 구속 사역은 사람들에게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모든 구속 사역을 목격하게 될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적인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 후에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너희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무슨 말인 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에 대해서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복음의 증인이 되기기 위해서 성령님께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 강림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세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날 때까지 그들이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1. 엘리야 논쟁

"제자들이 묻어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마 17:10-12(상),13)."

"예수께 물어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나이까?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막 9:11-12(하),13)."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오면서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왜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산 위에서 모세엘리야를 보았습니다. 말라기는 오래 전에 "엘리야가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말 3:23). 그러므로 이 예언에 의하면 메시아보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그들은 아직 엘리야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엘리야를 본 것은 오늘 산 위에였고, 그것도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세 제자들은 엘리야가 어찌해서 아직도 오지 않는 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산에서 내려오면서 예수님께 "그러면 왜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로부터 이 질문을 받으시고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과연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할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이미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그를 임의로 대우했도다!" 예수님은 말라기의 예언대로 "이미 엘리야가 세상에 와서 모든 일을 회복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엘리야는 제자들이 산 위에서 본 엘리야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엘리야는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엘리야의 사역과 비슷했습니다.

1) 엘리야는 낙타털 옷을 입고 산과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세례 요한 역시 광야에 살면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백성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2) 엘리야는 온 백성들의 마음이 우상(바알)을 향해있을 때에,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켰습니다. 세례 요한 역시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백성들에게 회개를 요구했으며, 회개한사람들에게 물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3) 엘리야는 왕후 이세벨의 위협을 받고 낙심해서 시내산으로 도망쳤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만나서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세례 요한 역시 헤롯의 아내인 헤로디아의 계략에 빠져서 죽음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에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질문을 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세례 요한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의 사역은 여러 가지 점에서 엘리야의 사역과 비슷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세례 요한은 성경에 예고된 엘리야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과연 엘리야가 세상에 와서 성경의 예언을 성취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마음대로 대접했습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예수님의 설명을 들은 후에, 비로소 성경에 예언된 엘리야의 사역을 성취한 사람이 세례 요한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2. 인자의 고난도 성취될 것이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12(하))..."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12(하))"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눅 9:36(하))."

 

그러나 제자들은 궁금한 것이 또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막 9:10). 세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을 보고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가시면 세계적인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인자가 죽었다가 그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당황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왜 죽어야 하는 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인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엘리야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진 것처럼, 자신의 고난에 대한 예언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대로 세례 요한은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이제 예수님도 이사야의 예언대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이사야는 메시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그 후에 다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사 53장). 예수님은 이 예언이 모두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서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 제자들은 이러한 설명을 듣고도, 여전히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 일을 이해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후였습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겨자씨만한 믿음

(마17:14-20)

 

어느 날 한 아버지가 간질로 고통당하는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 무릎을 꿇고 치유를 부탁하였다. 그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전에 제자들에게 데려왔어도 고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노하셔서 “믿음이 없고 패악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함께 있어야 하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오!”라 하시며 제자들을 질타하신다. 야단맞은 제자들은 아이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나아와 조용하게 묻는다. "우리는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죠?"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에게 치유와 귀신추출의 권세를 부여 받았다(마 10:1, 8). 그러나 막상 귀신들려 간질 증상이 있는 아이를 치유하지 못한다(모든 간질이 귀신들린 현상은 아니다!).

 

도대체 왜? 여기서 시사하는 바는 예수님에게 사명과 권세를 받은 이라도 스스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적은 것이 아니라 아예 없다고 하신다("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마 17:19. 물론 이 말은 아주 작다는 것에 대한 과장법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중에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하기시 때문이다). 예수님이 보시기엔 제자들이 당시 예수님을 의심하고 대적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 23:39)와 다를바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구원에 필요한 믿음이기 보다 치유와 이적을 일으키는 은사적 믿음이다. 왜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을까? 믿음은 지적 동의나 자기확신이 아니다. 믿음은 전적인 신뢰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는 자신의 전적인 무능함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고 하나 믿음에 관한 한 이는 한 치의 오차 없는 사실이다. 믿는다고 말해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변에 말로만 지식으로만 믿음, 믿음하지 실제로 현실에서는 불신자와 똑같은 사역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산을 옮기기 위해서는 겨자씨 한 알 정도의 믿음이면 된다. 겨자씨란 당시 분량에서 가장 작은 것을 상징한다. 반대로 산을 옮기는 것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일을 상징한다(사 54:10; 고전 13:2),

그렇다면 산을 옮길 수 있는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무슨 뜻일까?

예수님은 여기서 과장법을 쓰신 것은 틀림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작은 믿음으로는 실제로 산을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다 크다는 늘 상대적인 개념이다. 예수님이 보실 때 작은 믿음은 사실 실제로 작은 믿음이 아닐 수도 있다.

 

믿음으로 산을 옮긴 이들은 늘 말한다. 결코, 내 믿음이 커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내 믿음은 오히려 부끄러운 수준으로 작았다고. 나의 작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큰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작은 믿음이란 뒤돌아서 자신을 평가할 때 쓰는 표현이다. 산을 옮기는 믿음은 작은 믿음일 수가 없다. 고린도 전서에서도 믿음이 가장 큰 경우를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라 하지 않았는가!(고전 13:2). 그러나 늘 돌이켜보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믿음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임이 틀림없다. 이는 믿음이 큰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진실한 고백이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란 고백이 나오는 믿음, 겨자씨같이 작은 믿음만이 산을 옮기는 믿음이다. 위대함은 늘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믿음으로 역사하는 기적을 체험하는 자들은 자신의 초라함과 작은 믿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정말 큰 믿음이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부럽다. 진실로 자신이 작아지고 작아져야고 겸손한 이에게만 나타나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릴 때 나타나는 은사다.

 

예수님께 사명과 권세를 받은 사역자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나를 포함하여 말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적인 신뢰다. 우리의 "믿음없음"을 고백하고 간절하고 간절하게 매달리자! 자신의 무능함, 무가치함에 대한 거짓없는 체험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만날 때 불가능해 보이는 "산"이 옮겨진다.

 

겨자씨 한알같이 가장 작은 믿음이 가장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 이 말씀이 현실이 될 때까지 우리 믿고 또 믿자.  이제 한국 교회란 산을 옮겨야 할 때다. 오늘도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 앞에 선다. <이민규>


성전 세금을 내신 예수님(17:24-27)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어서 다시 한 번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될 메시아가 이방인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메시아 운동의 실패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크게 두려하면서,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조차 금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무슨 말인 지 도무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실제로 목격한 후에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좀 더 기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1.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마 17:24)"

 

예루살렘으로 가던 예수님 일행은 가버나움에 도착했습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집이 있는 곳으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본부였습니다. 그 때에 성전세를 받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지 않느냐?" 반 세겔의 성전세는 로마 당국이 이스라엘에 부과한 세금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금은 유대인들이 성전 유지를 위해서 의무적으로 내는 성전세였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각 가족의 장자들이 성전에 와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각 지파들이 생업을 하는 데 지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선택해서 성전 일에 전념하게 하시고, 다른 지파들은 생업에 종사하게 하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각 지파들에게 성전세를 내게 하여 그 돈으로 성전을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전세는 정당한 세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 세금은 거의 반 강제적으로 거두는 매년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에 내는 세금에 대해서는 불평했지만, 성전세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은 특정한 거처가 없이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에 예수님은 매년 내는 성전세를 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세를 걷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에 온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가서 어찌해서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지 않는 지 항의했습니다.

 


로마의 은전 데나리온(Denarius

 



로마의 은전 데나리온(Denarius

 

 

 

기원전 211년 제2차 포에니 전쟁로마 원로원에 의해 발행되기 시작된 데나리우스는 이후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며 우수한 은화로 교역을 비롯해 돈이 사용되는 모든 분야에서 인기있는 화폐가 되었고,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순도 100퍼센트의 화폐가 되었고, 네로 황제의 개혁으로 순도가 92퍼센트로 낮아졌으나 한동안 기존의 상업적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3세기의 위기로 인한 혼란상으로 순도가 무려 5퍼센트까지 떨어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개혁을 단행했으나 오히려 아르겐테우스라고 불린 새 화폐는 곧 사라졌고,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가격 통제령의 원인이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물러난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개혁을 단행, 솔리두스 금화로 데나리우스 은화를 대신한다.

 

 

성서의 데나리우스



 

신약성서에서 데나리우스는 데나리온으로 불리는데, 이는 데나리우스의 헬라어 표기이다. 신약성서는 그레코 로만 문명의 영향으로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성서에서 1데나리우스는 노동자의 하루 임금으로 묘사되며,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비유 이야기중 그 이름이 여러 번 언급된다. 데나리온이 등장하는 비유로는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일용직 노동자 이야기가 있다.

 

 

2.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세금을 받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마 17:25-26)."

 

베드로 역시 유대인이 성전세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전세를 걷는 사람에게 "예수님도 성전세를 내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가룟 유다가 관리하고 있는 재정 중에서 성전세를 낼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께 성전세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를 걷는 사람들이 베드로와 나눈 대화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을 가는 도중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집으로 들어가신 후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한 집(아마도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후에,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셨습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상의 왕들이 아들에게 세금을 받는 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는 지 물어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상의 왕들은 아들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세금을 받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러면 아들들은 세금을 내는 일을 면제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이 무슨 말인 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그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세금은 아들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아버지께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성전세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으시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세금을 걷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도 성전세를 내실 것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베드로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베드로와 같이 행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 속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매사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3.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주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 17:27)."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금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세금을 내신 것은 "성전세를 요구하는 자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전세금을 걷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님께서 성전세금을 내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된 종교 의무를 거부하고 성전을 모독한다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지혜롭게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익숙한 어부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잡은 물고기를 꺼내서 그 입을 열어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면 그 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한 세겔을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해서 성전세를 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놀라운 방법으로 베드로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서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첫 번째로 잡은 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돈으로 성전세를 내면서 예수님의 신성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종교지도자들의 오해를 피하고, 베드로에게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세상에 대한 의무와 교회에 대한 의무를 동시에 이행해야 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세상과 교회에 대한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져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