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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마18:12-14)

by 은총가득 2020. 9. 25.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마18:12-14)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잃은 양’ 비유를 알고 계십니까? 대체로 사람들은 누가복음 15장에 실려 있는 잃은 양 비유는 잘 알지만 마태복음에 실려 있는 잃은 양 비유는 잘 모릅니다. 마태복음에 잃은 양 비유가 등장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2-14절을 읽어 보십시오.

누가복음 15장 3-7절에 기록된 것과 거의 같은 잃은 양 비유가 등장합니다. 두 비유를 비교하면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가 더 짧고, 두 비유 사이에 한, 두 가지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복음서에 기록된 잃은 양 비유의 기본 내용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두 비유의 내용이 같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두 비유를 같은 관점에서 읽고 같은 교훈을 끌어냅니다.

그들은 아주 태연하게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읽는 관점으로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읽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이 마태복음의 비유에서 끌어내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므로 우리도 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이렇게 읽고 해석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식으로든지 본문을 통해 은혜를 받고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깨우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성경 본문을 읽을 때 그 본문을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나 성경 기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성경해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본문을 말씀하신 주님이나 성경 기자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나 성경 기자의 의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소위 은혜를 받기 위해 독자 중심적으로, 또는 청중 중심적으로 본문을 읽는 것이 한국교회 강단의 가장 큰 병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문맥 관찰을 통해 비유의 상황과 대상, 그리고 비유의 요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는,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와 비교할 때, 비유의 상황과 청중이 다릅니다.

누가복음에서 비유의 청중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인데 비해,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비유의 청중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15:1, 2).

반면에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질문합니다(18:1).

그러자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대답하십니다(4절).

 

이어서 예수님은 누가 큰 자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믿는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믿음을 저버리게 만드는 것)으로 화제를 바꾸십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자 한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6절). 또 소자를 실족케 하는 범죄의 심각성을 경고하기 위해 손이나 발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고 엄히 말씀하십니다(8, 9절). 그러면서 “삼가 이 소자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10절). 저희에게 천사들이 있고, 그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문맥 안에서 잃은 양 비유가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의 요점은 14절에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것은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의 결론과 확연히 다릅니다(15:7).

누가복음에서는 죄인의 회개에 관해 말씀하시는데, ‘죄인’이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서는 소자를 잃는 것에 관해 말씀하시는데, ‘소자’란 예수를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의 요점은, 믿음의 공동체에 속한 소자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소자의 중요성과 함께 소자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에서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3년 가까이 예수님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적 가치관과 관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높은 자리를 탐하고 자리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들은 자신들보다 부족한 사람들, 여자들, 어린아이들을 의연 중에 무시하였습니다.

무시당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마음에 상처를 입고 제자 공동체를 떠나거나 믿음을 포기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서로 높은 자가 되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낮추는 자가 바로 큰 자라는 천국의 원리를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동시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 어린아이들이라도 결단코 무시하지 말고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임을 분명히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교훈을 주시는 것이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현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소자들을 업신여기거나 그들을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지 말고 도리어 자기를 낮추고, 소자들을 소중히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낮추는 자가 곧 높은 자라는 천국의 원리를 내팽개치고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이전투구하는 지도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무시를 당합니다. 많은 소자들이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소자들이 실족할 때 날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그들의 천사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소자들을 돌아보지 않고 힘 있고 재력 있는 이들을 가까이하면서, 자리다툼에 골몰하는 지도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곧 천국에서 큰 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회복하고, 교회 안에서 소자들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소자들을 배려하고 잘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읽는 관점으로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를 잃으면 이런 교훈이 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누가복음의 의미를 마태복음의 비유에 주입하여 읽는 것은

주님의 의도를 무시하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비유가 선포되는 상황과 비유의 청중, 그리고 비유의 요점을 꼼꼼하게 살핌으로써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비유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본문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을 말씀하신 주님이나 성경 기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은혜 중심적으로 본문을 읽으면 생각과 가치관의 변화, 더 나아가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본문을 말씀하신 주님이나 본문을 기록한 성경 기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에 비추어 본문을 읽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길성남>

 

 

잃은 양 비유(마 18:10-14)

 

요한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예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중에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배타적인 행동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실족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은 목에 연자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뜨리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실족케 만드는 죄에 대해서 단호하게 싸울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일 우리의 지체들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면 그것을 제거할 각오를 가지고 죄와 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장애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소자 중에 하나를 업신여기지 말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에 대해 경고하신 후에, 이야기의 초점을 다시 어린 아이에게 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보시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예수님은 배타의식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을 인정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연약한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말은 제자들에게 높아지려고 다투지 말고, 연약한 형제들을 잘 섬기라는 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말은 천국에서는 어린 아이를 섬길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제자들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예수님의 일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우월 의식에 빠져서 예수님을 믿는 다른 성도들을 평가절하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타적인 태도는 연약한 성도들을 실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의 한 영혼이 얼마나 귀중한 지 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를 위해서 천사를 보내주셨으며, 그 천사들이 어린 영혼을 돌보고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보고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천사들이 하늘 궁정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그 영혼을 업신여기면, 그 천사가 하나님께 보고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들이 어린 영혼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

2. 소자를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2-14)."

 

예수님은 한 영혼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더해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잃은 양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셨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과 어린 영혼의 관계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목자가 들에서 100마리의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 목자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목자는 양이 한 마리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영이 광야나 산에서 길을 잃으면, 헤메다가 탈진하거나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양을 사랑하는 목자는 양이 상하거나 죽기 전에 그 양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그 목자는 99마리의 양을 동료에게 맡기고 급히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영혼을 잃으면 간절한 마음으로 그 영혼을 찾아다니십니다. 만일 제자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면 연약한 형제를 업신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잃은 양을 찾게 되면, "길잃지 않은 99마리의 양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에만 마음이 있었고, 또 우월의식에 빠져서 영혼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한 영혼이 얼마나 귀중한 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제자들은 높아지려고 싸웠고, 또 우월 의식에 빠져서 다른 성도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한 영혼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선한 목자가 최선을 다해서 양을 돌보는 것처럼 성도들을 섬기고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과 우월의식에 빠져서 영혼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겸손한 마음과 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을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3.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제자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다투었으며, 또 우월의식에 빠져서 다른 성도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겸손한 마음과 영혼에 대한 사랑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소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문에 나오는 소금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을 부패로부터 막는 소금과 같이 소중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소금은 모든 물건 중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당시에 소금은 매우 귀중했기 때문에 현금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소금은 매우 소중합니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아무 데도 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부패를 막을 대안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에 제자들은 맛잃은 소금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여 교만한 마음으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웠고, 우월 의식에 빠져서 연약한 성도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의 열매를 맺으면서 맛잃은 소금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소금은 성도들을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따라 행할 때에 비로소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겸손과 화평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성령님을 따라 살면 서로 사랑하고 겸손하며 또 화평하게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의 열매인 교만과 다툼과 분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안에 꼐신 성령님을 따라 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령님을 따라 살게 되면, 겸손과 사랑과 화평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성령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다투고 또 우월의식으로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이러한 사람들에게 "너희는 맛잃은 소금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맛잃은 소금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겸손과 사랑과 화평의 열매를 맺게될 것입니다.

 

영혼을 지키는 6가지의 길(마18:7-10)

< 마술봉을 찾는 신앙 >

지난 3월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미국 펜실바니아의 웨스트 이스톤(West Easton) 지역에 살고 있는 조앤 잰스키(Joanne Zansky)라고 하는 한 여성이 피치스 밀러(Peaches Miller)라고 하는 점술사에게 갔습니다. 그때 밀러는 자기가 만든 마술봉을 사면 각종 저주가 풀린다고 해서, 잰스키는 1800불(200만원)을 주고 그 마술봉을 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조카를 위해 마술봉을 하나 더 샀고, 다시 얼마 후에 죽은 어머니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마술봉을 하나 더 샀습니다.

세 번째 마술봉을 산 후에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잰스키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상황을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여동생은 즉시 경찰을 불렀고, 경찰은 언론에 알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밀러를 잡아넣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밀러가 법을 어긴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잰스키가 상식의 법칙을 어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잰스키를 "참 어리석다! 어떻게 그런 말에 속나?"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외로 그렇게 속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속습니까? 자기 속에 있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3가지만 버리면 사기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일확천금, 불로소득, 만사형통'입니다. 이 3가지의 아비가 기복주의이고, 기복주의의 반대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마술봉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교만과 고집, 우리의 욕심과 의지를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려고 하는 삶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에 진정한 축복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아더 핑크(Arthur Pink)라고 하는 신학자는 "오늘날 신앙의 가장 큰 문제를 예수님을 '죄로부터 구원해준 구세주(Savior from sin)'로 알기보다는 '지옥으로부터 구원해준 구세주(Savior from hell)'로 아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지옥은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죄는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로부터 우리 영혼을 지키는 노력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죄에서 돌아서고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내어드릴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우리 영혼을 죄로부터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 죄와 유혹으로부터 영혼을 지키는 길 >

오늘 본문에는 "실족케 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쉽게 말하면 "남을 넘어지게 한다"는 말인데, 더 정확한 의미로는 "남에게 죄를 짓게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남에게 죄를 짓게 하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4가지 무기가 나옵니다. 그 4가지 무기를 잘 지키면 우리는 남의 영혼도 지킬 수 있고, 나의 영혼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8절에는 손과 발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9절에는 눈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10절에는 입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4가지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귀와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을 각종 죄와 유혹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이 6가지를 잘 지켜야 합니다.

1. 눈을 지켜야 합니다.

눈은 영혼의 창문입니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오지만 죄는 대개 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의 믿음을 가장 약화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눈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우리를 유혹할 때 가장 많이 활용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왜 하와가 사단의 꾀임에 넘어갔습니까? 사단의 달콤한 말 때문만은 아닙니다. 창세기 3장 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가 죄를 짓게 된 것은 선악과를 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1900년대 평양에 이승은 목사님이라고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설교에 은혜를 받아 교회로 가니까 기생집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기생 연합회에서 이 목사님을 넘어뜨리기로 작정하고 최고로 예쁜 기생을 뽑아 교회로 파송했습니다.

이 기생은 사명을 받고 장기 작전을 폈습니다. 교회도 열심히 출석하고 최선을 다해 헌신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아름다운 신앙에 감동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 이 기생은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그날 밤, 이 목사님은 기생의 유혹에 넘어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한번 죄를 짓고 나니 점차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고, 동시에 설교는 점차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그 모든 사실이 들통나서 목사님은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후 그분은 평양 서문 밖의 안경점 주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지금도 미인계를 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 뒤에 감추어진 마귀의 전략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어떤 사람과 갈등이 생길 때 마귀의 작전을 눈치채고, 마귀는 미워하되 원수는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입술을 지켜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자기 입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항상 "내가 이런 말을 조심해야지"라고 다짐해보지만, 어느새 그 말이 나와서 남의 가슴에 못을 박고, 절망을 심어주고,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탈무드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거짓말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친구에게 "아내 하나는 잘 얻었어!" 하는 말과 물건을 비싸게 산 친구에게 "물건 잘 샀어!"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남이 물건을 사면 꼭 그 물건을 비싸게 샀다고 얘기를 해서 남의 기분을 망칩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는데, 남이 물건을 비싸게 샀다고 하는 말도 "당신 어리석다"고 업신여기는 말입니다. 이미 산 물건입니다. 그의 기분을 생각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더 싸게 사는 방법을 알고 있어도 "잘 샀다!"고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어 한 마디라도 남을 배려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할 때에는 항상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제가 가끔 말하지만 "남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혀놓고 나는 뒤끝이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한 말을 하고 나서 집에 가서는 "내가 참을 걸!"하고 후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의 마음을 뒤집는 데에는 1초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는 데에는 1달 이상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1초만 참으면 되는데 그것을 참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오랜 고통의 시간을 부여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우리는 항상 온유한 신사와 숙녀가 되어야 합니다. 온유란 뜻을 가진 헬라어 프라우스는 '열이 내린 상태'를 뜻합니다. 열이 오른 사람에게 의사 선생님이 약을 먹인 후에 열이 내리면 쓰는 말이 "프라우스"라는 말입니다. "열이 내렸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불은 받아야 하지만 열은 받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열 받지 말고 항상 온유한 입술이 되도록 지켜야 합니다.

3. 귀를 지켜야 합니다.

잘못된 말은 물에 떨어진 잉크와 같습니다. 한번 잘못된 말을 들으면 영혼에 쫙 퍼져서 다시 맑게 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인생의 수많은 고난은 대개 말 한 마디 잘못 들어서 생긴 영혼의 질병을 하나님께서 정화시켜 나아가는 과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도 잘 들어야 합니다. 좋은 말을 들으면 우리 영혼도 좋아지고, 나쁜 말을 들으면 우리의 영혼도 나빠집니다. 영혼의 건강은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지금 우리 영혼을 오염시키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 가지 예로, 요새 영성을 강조하는 어떤 분의 말을 들어보면 '기독교 영성'과 '기독교 윤리'가 아주 반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성과 윤리는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성을 강조하면서 윤리를 무시하는 영적 허영심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영성과 윤리는 결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구원은 순간적으로 받지만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요새는 말씀 듣는 사람의 90% 이상이 이미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매일 구원만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더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 1-2절은 "초보 신앙을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들려지는 말씀은 대부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삶'에 관한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축복에 관한 말씀을 많이 듣고 싶어하지만 사실 진정한 축복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능력과 기적에 관한 말씀도 많이 듣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능력과 기적도 삶의 변화라는 전제 속에서 대부분 주어지고, 그리고 능력과 기적 후에는 다시 삶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변화된 삶'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실질적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능력이고, 기적이고, 축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관한 도전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이 구원을 주는 것이지만, 실제로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서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려는 노력은 우리의 평생 과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설교는 자연히 '삶에 대한 도전'을 하는 설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기본적으로 윤리성을 띌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이단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윤리적인 설교를 한다"고 하며 믿음과 윤리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과 기적이 상관이 있는 것 이상으로 믿음과 윤리는 더 상관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즉 상식의 기반 위에 '상식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 상식 자체를 무시하는 비상식과 몰상식은 믿음이 아니라 영적인 허영심입니다.

영적 허영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대가가 따릅니다. 그 첫 번째 징계가 '순수하고 물들지 않은 성도와의 분리'입니다. 그래서 영적 허영을 가진 사람은 꼭 공동체에서 분리되는 길로 갑니다. 자신은 더 깊은 영성을 찾아간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공동체를 위해서 도려내야 하는 환부로 보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믿음은 몰상식이 아닙니다. 상식이란 양식 있는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삶의 자세인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상식이 요구하는 기준'보다 더 소중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상식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설교에는 '성도답게'를 도전하는 말씀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를 도전하는 말씀을 '도덕적인 설교, 윤리적인 설교'라고 비하시키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래서 "영성! 영성!" 하며 내용과 실체와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말을 하면서 영적 허영심에 젖은 사람은 결국 자기 영혼도 죽고, 남의 영혼도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그처럼 애매 모호한 말 한 마디가 영혼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듣는 것을 잘 들어야 합니다.

유혹자의 말은 독약과도 같습니다. 그런 말은 아예 듣지 말아야 합니다. 상식을 내세워 비판하는 말보다 더 위험한 것이 정의를 내세워 비판하는 말이고, 정의를 내세워 비판하는 말보다 더 위험한 것이 영성을 내세워 비판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말에 영적 교만과 우월의식이 느껴지거든 속히 귀를 닫고 다리 아래 물처럼 그 말을 떠내려보내야 할 것입니다.

4.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귀를 잘 지켜도 유혹자의 말을 듣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그 다음에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즉 어떤 비판의 소리가 들린다면 바로 그 비판에 쏠리지 말고, 먼저 "나는 옳고 그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교만하게 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 영혼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교만한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교만과 180도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지금 신앙에 심각한 위기가 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가끔 첫 사랑에 빠진 분들을 보면 예배도 새벽예배까지 100% 참석하고, 기도도 매일 2시간 이상 하고, 교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일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에 교만한 마음이 싹터서 "왜 교회 중직이라는 분들이 저렇게 기도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은 절대 버려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우리의 어떤 헌신도 무효로 만들어버립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인생에서 실패의 장벽보다 더 무서운 장벽이 자존심의 장벽이고, 자존심의 장벽보다 더 무서운 장벽이 교만의 장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자존심의 장벽을 넘고,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 교만의 장벽을 넘을 수 있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5. 손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손을 움켜쥐고 삽니다. 그 손을 펼 수 있어야 우리의 영혼이 복된 영혼이 됩니다.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많이 받았지만 손을 펴는데 인색한 삶은 결코 축복 받은 삶이 아닙니다. 열심히 벌고, 열심히 좋은 일에 쓰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항상 남을 돕고 살겠다는 구제의 비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미래에 돈을 벌어서 돕겠다"고 하기 전에 현재의 처지에서 힘써 손을 펴야 합니다. 도울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제가 주는 사람에게는 간증거리가 될 수 있어도 받는 사람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인터넷을 통해 어떤 집사님이 쓴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집이 없는 착한 할머니 10분을 식구처럼 모시고 사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대로 저는 지금 10분의 할머니를 우리 집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저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사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어려운 사람에게 손을 펴는 손이 크고 통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에는 죄와 저주의 이끼가 끼는 법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몽고의 임준호 선교사님이 성경학교 공사를 하는데 약 3만 불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계속해서 목찬수 군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지금 백혈병이 재발되어 다시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치료비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현재까지 약 400만원 가까이 도움을 드렸지만 전체 치료비에 비해서는 많이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의 정성스런 손길이 있기를 바랍니다.< 후원계좌 : 신한은행 642-12-079560 이승연(요삼일육선교회) >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한 소년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바쳐서 생겼습니다. 그 기적 후에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35). 예수님은 떡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는 그 떡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은 예수님이 떡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떡이 되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 손의 떡을 나눠주고, 내 몸을 떡으로 삼아 나눠줄 때 무엇인가 기적은 시작될 것입니다.

6. 발을 지켜야 합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 말고, 들어서지 말아야 할 영역에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들어선 후에 발을 빼려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컴퓨터 게임도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지 한번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거기에서 빠져 나오기 힘듭니다. 모든 죄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예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저는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저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한번 거기에 빠진 사람은 그 재미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맛은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마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마약을 하면 쾌락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압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기 때문에 마약을 하지 않는 것이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 마약을 맞고 그 쾌락을 맛보면 그 다음에는 마약을 끊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고, 결국 폐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들여놓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 사람들이 죄에 빠집니까? "그 정도쯤이야! 한번쯤이야!"라고 생각하고 죄에 발을 들여놓기 때문입니다. 작은 죄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죄에 민감해야 합니다. 술 좋아하는 분들은 항상 "딱 한잔만!" 하다가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딱 한번만!"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둘째 딸 한나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나가 참을성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신발에 흙이 들어가는 것만은 조금만 들어가도 얼마나 짜증을 내는지 모릅니다. 걸음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행군할 때 제일 행군을 방해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군화에 이물질이 들어갈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조그만 죄가 우리 인생 행로에 제일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그 작은 죄 때문에 기도가 막히고, 축복이 막힙니다. 자신의 작은 죄 때문에 영혼이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그 작은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어느 때보다 죄의 유혹이 많은 이 시대에 오늘 말씀드린 6가지를 잘 지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영혼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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