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복음
(마18:21-35)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입니다. 세계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성경의 하나님만이 용서하시는 신으로 등장합니다. 기독교를 약탕에 넣어 끓여 한 방울 떨어뜨리면 “용서”하고 떨어질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용서요 복음의 내용이 용서이며, 십자가의 의미가 용서입니다. 기독교에서 용서를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용서로 시작해서 용서로 마쳐지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함으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땅에 생이 마감되고 천국 문이 열려질 때에 용서의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또 다른 용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다 쫓겨 난 인간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범죄 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한 가지 계획하신 일이 있습니다. 용서의 드라마를 이 땅에 펼쳐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용서 드라마 제1막은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용서 드라마 제2막은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용서의 복음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용서 드라마 제3막은 예수님은 우리가 당해야 될 냉대와 멸시와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감당하시며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어주신 것입니다. 용서 드라마 제4막은 예수님은 용서를 완성하시기 위해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용서의 역사를 펼쳐 가십니다. 교회의 강단은 용서의 선포장이요 목사는 용서의 대언자요 교회는 용서를 파는 슈퍼마켓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찾아 나올 때마다 용서를 사 가지고 가야 합니다. 성경은 용서의 알림장이요 십자가는 용서의 영수증이요 성령은 용서의 전파자요 선교는 용서의 전달식입니다.
존 브로크만이라는 사람이 쓴 <지난 2000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란 책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지성인 110명이 선정한 위대한 발명품 121가지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많은 가운데 관심을 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우개입니다. 지우개가 없었다고 한다면 데생이나 스케치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많은 작곡이 어려워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과거를 지워주는 용서의 지우개가 없었다고 한다면 성경의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세도 베드로도 바울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5개의 예수님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은 네 번째 설교입니다. 이 네 번째 설교는 교회생활에 관련된 설교인데 오늘 말씀은 교회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용서의 의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21절입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어디까지 얼마만큼 용서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상상 밖이었습니다. 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이 말은 70 더하기 7도 되고, 70 곱하기 7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은 이러한 숫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용서의 횟수 제한을 철폐하고 계십니다. 무제한적인 용서, 이것이 천국의 용서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실천해야 될 용서의 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지금 용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고 계십니다. 용서의 유일한 조건은 회개입니다. 회개하고 공동체로 돌아오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이방인이든 창녀든 세리든 어떤 죄인이라도 교회 공동체는 그들을 용납하여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용서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할 만큼 진정한 용서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할 만큼 용서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될 고통을 한 몸에 걸머지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자신에게 못질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땅에 용서를 선언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평소 선포하셨던 용서의 메시지의 실천의 자리이고, 용서의 절정이며, 용서를 완성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상처를 남기고 떠난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 땅에는 용서받지 못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실 용서는 사람이 실천하기가 힘든 덕목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움은 사탄의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사탄의 영향권에 있습니다. 용서는 내 힘으로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용서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기도하는 자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생활을 위한 설교입니다. 특히 세상에서 말하는 상대적인 용서가 아니라 천국윤리로서의 “용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천국의 모델입니다. 교회를 통해 천국의 윤리인 용서가 소개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천국의 용서윤리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천국의 용서윤리는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23~25절입니다. “천국은 그 종과 결산하려 했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어떤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으라는 명을 받고 임금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빚을 갚지 못하면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아야 합니다. 사실 일만 달란트라는 빚은 인간이 갚을 수 있는 빚의 크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 다 팔아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영적인 파산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임금 앞에 엎드려서 조금만 참아 주시면 갚겠다고 애걸을 합니다. 그러나 애걸로 갚아지는 분량이 아닙니다. 인간이 지은 죄는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종교나 도덕이나 선행으로 갚기가 불가능합니다. 27절입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래서 주인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한순간에 빚을 탕감해 주고 날려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엄청난 부채를 탕감 받고 기뻐하며 나오던 이 사람이 길거리에서 자기 돈 떼어 먹고 도망간 친구를 만납니다. 멱살 잡고 빚 갚으라고 소리치자 친구는 조금만 말미를 달라고 빕니다. 그러나 결국은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입니다. 이게 내 모습이요 너의 모습일 수 잇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지은 일만 달란트 분량의 엄청난 죄, 모두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에서 받은 상처, 미움, 손해, 분노는 일백 데나리온에 불과한데, 그것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태산처럼 느껴지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준 것은 티끌처럼 느껴지는 게 죄악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와 용서의 자비는 얼마나 큰 것인데 그것은 다 잊어버리고 내가 받은 손해만 기억하고 살아가는 게 인간의 죄성이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보면 내가 용서하게 되면 내 인격과 자존심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또 용서할 수 없다는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기 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못된 인간을 용서하면 사회질서가 파괴된다. 저런 인간이 용서받고 세상에 버젓이 살아간다면 세상의 정의는 누가 세우나?’ 라며 자기가 처단하겠다고 덤빕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너에게 심판의 권세를 준 적 없다. 공의는 내가 세우는 것이지 너에게 맡긴 적이 없다. 한때 나와 원수 되었던 너를 용서하고 내 자녀 삼지 않았니?’우리는 남을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두 번째, 천국의 용서윤리는 용서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할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도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너를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용서윤리입니다. 에베소서 4:32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13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내가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나도 너를 용서해야 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도 너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시고 우리 죄를 담당해 주셨듯이 때로는 내 자존심이 도려내어 지는 아픔과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너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천국의 용서윤리입니다. 용서의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천국의 용서윤리는 너를 용서하기 전에 먼저 나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았을 때 엎드려 조금만 참아주면 반드시 갚겠다고 쩔쩔 매고 있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인 앞에서 당황하며 쩔쩔매며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던 자화상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결국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이 먼저 서야 하고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천국의 용서윤리는 내가 누구보다도 가장 큰 은혜의 수혜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내가 누구보다도 큰 용서를 받았다는 감사가 용서의 핵심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를 아십니까?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1달란트는 1만 데나리온입니다. 1만 달란트는 1억 데나리온입니다. 일꾼 1천명이 274년을 벌어서 한 푼도 안 쓰고 모으면 1만 달란트가 됩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다는 것은 과장법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하나님께 순종하고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며 살아가야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과제였고,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배신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마귀의 땅으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죄 값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입니까? 이 세상에 어떤 방법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하나님께 갚을 길이 없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의 모든 죄가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받았습니다. 내가 용서받은 그 용서의 덩어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덩어리가 아닙니다. 그 용서의 신비는 우리의 지혜로 능히 깨달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일만 달란트가 가지고 있는 양입니다. 이처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마어마한 은혜를 입었는데도 억울하다고요? 아프다고요? 분통이 터진다고요? 하나님께서 받은 용서의 덩어리를 생각헤 보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천국의 용서윤리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조건적인 저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졌다가 탕감 받은 사람이 자지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주인이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32~34절입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내가 너에게 탕감해 준 것은 네가 다른 사람들을 탕감해 주어야 된다는 조건을 붙여서 탕감해 준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네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조건을 걸어 용서할 수 없다면, 이제는 그것이 조건으로 바뀌어져서 용서가 저주로 바뀌어 진다는 것을 왜 몰랐더냐?’ 무조건적인 용서가 조건적인 저주로 바뀌어 지게 된다는 지혜를 본문이 말해 줍니다.
24절에 나오는 “결산”이란 단어는 마태가 사용하는 독특한 용어입니다. 마태가 “결산”이란 단어를 쓸 때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장면을 연상하고 사용하는 단어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큰 사역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세상에서 큰 봉사의 흔적과 헌신했던 열매들을 안고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나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 받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확신을 안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둘째, 나는 내게 아픔을 주었던 모든 사람을 용서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게 부담을 주었던 모든 사람을 용서했다. 내게 손해를 끼쳤던 모든 사람을 나는 용서했다. 하나님 앞에 용서의 흔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게 건강이 필요해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네게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는 네게 치료하는 능력이 될 것이다.” “하나님, 제게 친구가 필요해요.” “아니다. 진정 네게 필요한 것은 현재 있는 친구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 친구로부터 용서받는 것이다.” 발이 없다면 신발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맹인에게 안경이 소용이 있습니까? 용서하지 못하고 우리가 교육을 받으면 더 큰 상처를 남길 뿐입니다. 용서받지 못하고 돈을 벌면 악한 영향을 남길 뿐입니다. 용서를 체험하지 못하고 친구를 얻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길 뿐입니다. 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유와 변명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했습니다. 용서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일주일동안 기도하고 다음 주일부터 “용서하겠다.”가 아닙니다. 설교 끝나고 집에 가서 “용서하겠다.”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지금 당장 용서해야 합니다. Now and here!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 마음속에 생각나는 얼굴들을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아니하는 것은 모기 한 마리 잡겠다고 온 집을 태우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시인 에무센)
용서와 사랑에 대한 교훈 (마 18:21-3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범죄한 형제를 권면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범죄한 형제를 발견하면 먼저 그를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권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람이 그 권면을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과 함께 가서 한 번 더 그를 권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 형제가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으면 그 사실을 교회에 알려서, 교회의 이름으로 그를 권면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범죄한 형제가 그 권면을 들으면 그 영혼을 얻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일 그 형제가 교회의 권면마저 거부하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절차를 따라서 교회가 내린 결정은 하늘에서도 인정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이루실 것"이며,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은 교회의 권한에 대한 위대한 헌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범죄한 형제를 권면하는 법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당시에 랍비들이 가르쳤던 용서의 방법이 생각났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랍비들은 용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한 번 용서하라! 그리고 두 번째도 용서하라!, 그러나 세 번째의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아마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범죄한 형제를 권면하는 법에 대해 들으면서, 이러한 랍비들의 가르침이 생각났던 것 같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용서하는 범위를 세 번으로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관대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께 범죄한 형제를 "7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일곱 번까지는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재안은 매우 관대한 제안이었습니다. 우리는 형제가 잘못한 경우에 한 번도 용서하려고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관대한 사람이라도 한 두 번 용서한 후에 또 죄를 범하면 그를 외면하기 쉽습니다. 아마 범죄한 형제를 일곱 번이나 용서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인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대부분 동서 고금의 위인들도 두 세번으로 용서의 범죄를 제한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일곱 번까지 용서하겠다고 한 베드로의 제안은 매우 관대한 것이었습니다.
2.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 18:21-22)."
그러면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아마 이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관대함에 대해서 칭찬하실 것으로 기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기대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22)" 예수님은 완전 수인 7을 10으로 곱한 후에, 그 숫자에 또 다시 7을 곱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은 "완전히 용서하라",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잘못하고 용서를 빌면, 끝까지 그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죄는 너무 커서 유한한 자비로 덮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한한 자비로 형제의 허물을 덮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자비로 형제의 죄를 덮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이 말을 듣는 제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계속해서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3. 큰 빚을 탕감 받은 종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마 18:23-27)..."
예수님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자기 종들과 회계하려고 하던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왕이 회계를 하기 위해서 자기 신하들(종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종"은 고대 근동의 전제 군주가 자기 신하를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그 때에 한 신하가 왕에게 10,000달란트라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10,000"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달란트는 당시에 가장 큰 단위의 화폐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롯 대왕이 왕궁에서 거두어 들인 세금의 총수가 900달란트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10,000달란트는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은으로 된 한 달란트는 3000세겔이었고(한 세겔은 일반 노동자의 4일 임금에 해당했다), 금으로 된 달란트는 은으로 된 달란트의 15배 가치가 있었습니다. 왕의 신하는 이렇게 큰 빚을 왕에게 지고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그가 왕의 재정을 맏아 담당하는 신하였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빚을 진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왕의 재정을 담당하던 신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은 그 신하에게 "너와 너의 처와 자식들, 그리고 네 모든 재산을 팔아서 그 빚을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그 빚을 갚을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빚을 갚으라고 명했습니다. 이제 그 신하는 모든 재상을 잃고, 또 온 가족이 노예가 되어 뿔뿔히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가족이 노예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급하게 왕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에게 간절하게 자비를 구하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꼭 빚을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왕은 그가 그 많은 빚을 갚을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왕은 그의 모든 가족과 재산을 처분해서 그 빚의 일부라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왕은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신하의 모습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침내 그 왕은 그가 진 빚을 모두 탕감해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은 그가 더 이상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마도 이 말을 들은 신하는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인지 의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 신하는 왕의 자비로 인해 모든 빚을 탕감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신하는 온 가족이 노예가 되어 흩어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하여 실수가 많기 때문에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형제를 무한한 사랑으로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 신하가 왕에게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졌습니다. 계산할 날이 되게 되자, 왕은 그 신하에게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빚을 갚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그 많은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왕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시면 꼭 빚을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왕은 그 신하가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것을 알고, 그를 불씽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이 비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무한한 죄와 조건 없는 용서
왕이 신하의 막대한 빚을 탕감해 준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이야기는 우리의 죄가 수 없이 많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일만 달란트처럼 많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하나님 앞에서 10가지 죄를 짓는 경우에, 우리는 1년에 3,650번의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80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일평생 292,000번의 죄를 짓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전과 29만 2000범이라는 흉악범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 때에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전과 10범이 넘는 사람을 만나면 위협을 느끼고 도망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전과 292,000범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남을 정죄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 지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는 수 없이 많습니다.
둘째로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그 많은 죄를 무한한 자비로 덮어 주셨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값을 지불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죄는 너무 커서 무한한 하나님의 자비로만 덮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 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구태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너무 커서 아무도 자신의 죄 값을 지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 비유에 나오는 왕도 아무 조건 없이 막대한 신하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덮을 수 있는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자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용서받고 용서하지 않는 종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마 18:29-31)..."
이제 이 비유는 제 2막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제 2막에서 왕의 신하는 1막과 정 반대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는 이제 남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신하는 막대한 빚을 탕감 받고 크게 기뻐하면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 때에 그 신하는 집으로 돌아가다가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그 신하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가 하루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므로 100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나 이 돈은 그 신하가 왕에게 탕감 받은 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신하는 막대한 빚을 탕감받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아마도 그 신하는 지금까지 그 기쁨이 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에 신하가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빚을 탕감 받은 것처럼 친구의 빚도 탕감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혀 금방 큰 돈을 탕감받은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무자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길에서 친구의 멱살을 잡고 당장에 빌려간 돈을 갚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당장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친구는 그의 발 앞에 엎드려서 조금만 참아주면 꼭 빚을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 돈은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만 주면 그 친구는 그 돈을 갚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친구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제로 친구를 감옥으로 끌고가서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친구가 모든 빚을 갚기 전에는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큰 자비에 비해 우리가 이웃에게 얼마나 무자비한 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와 같이 어마어마한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의 공로로 모두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용서 받은 사람처럼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조그만 죄를 지은 친구조차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대할 수가 있느냐?"고 따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내가 손해 입은대로 돌려받기 전에는 절대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무자비한 태도는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사람에게 전혀 합당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렇게 무자비한 삶을 살아가고 있있습니다.
3.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1-35)."
이제 이야기는 제 3막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제 3막에서는 2막의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신하의 무자비한 행동은 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왕은 그 신하가 한 일을 듣고 크게 노했습니다. 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즉시 군사를 보내서 그 신하를 잡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보낸 군사들이 즉시 가서 그 신하를 왕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러자 그 왕은 그 신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왕은 그 신하를 불쌍히 여기고 그가 진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은 그 종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빚 진 친구를 용서하지 않고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왕은 그가 행한대로 그 신하도 감옥에 가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은 그 종이 그가 진 모든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그 곳에서 나오지 못할 곳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결론을 지으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은 성도들이 다른 형제들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용서 받은 후에 중심으로 다른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은 사람들이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범죄한 형제를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연약해서 일평생 실수하고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와 허물은 유한한 자비로는 덮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범죄한 형제를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 덮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막대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용서를 받은 우리들도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가 죄를 범한 후에 용서를 구하면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해서 우리 힘으로 범죄한 형제를 무한히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용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움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하기 어려운 형제를 만날 때에, 성령님께 그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그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넓고 자비로운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까?
(마18:21-25)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인격적인 공격, 악한 말들과 뒤에서 귓속말들을 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성도는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여호와가 어떻게 하실가를 생각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어떤 성도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피해를 당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성도로서 올바른 삶이나 행동이 아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한다면 어떠한 피해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본문을 통해 몇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자.
1. 성도는 여호와로부터 용서 받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다른 성도의 허물을 용서해야하는 첫째 이유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히 지옥에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공로와 여호와의 한량없는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우리를 여호와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천국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과 같다. 일만 달란트는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무거운 죄 값을 모두 갚아 주셨다. 우리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다. 그저 여호와의 사랑으로 용서 받는 것이다.(엡 2:8).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죄수 중에서도 괴수(魁首) 라고 고백하였다.(딤전 1:15). 이것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중에 누가 죄가 없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하루에도 우리는 쉴새없이 많은 죄를 짓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님께서 어떠한 죄라도 모두 용서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2.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예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
본문에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을 안 왕이 그의 빚을 무조건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관을 만나자 갚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그 동관이 나중에 갚겠다고 말했으나 그 종은 동관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 때 그 소식을 들은 왕은 탕감해 준 것을 취소하고 그 종을 옥에 가두었다.
우리가 여호와께 엄청난 죄를 용서함 받고도 다른 사람의 조그마한 잘못을 용서해 주지 못한다면,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죄 값을 도로 받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롭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過失)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저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못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시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고 말씀 하셨다. 성도는 남을 용서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용서는 성도들에게 부과된 여호와의 절대적인 명령으로서 꼭 실천해야 한다.
3. 용서를 통하여 예수님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화평을 누리는데 힘을 쏟으셨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용서해 주셨으며(요 8:1-11),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에게 용서를 베풀어 낙원에 있을 복을 허락하셨고(눅 22:43), 정죄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용서하셨던 분이시다.(눅 23;34).
성도들이 추구해야 되는 목표가 있다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 하지 않는 사람은 평화의 왕(사 9:6) 예수님을 닮을 수가 없다. 용서하기를 힘쓰는 자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온유와 겸손의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될까? 그것은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든 죄를 여호와께서 무조건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는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사실 우리들은 입과 건성으로는 형제들의 허물과 잘못을 덮어 주기도 하고 위로도 한다. 그러나 실제 생활을 통해서 용서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용서는 위선적이거나 겉으로만 화해가 아닌 온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다. - 그랜드종합주석 마태복음 18장 pp490-491.
우리가 7번씩 70번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기독교 인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산다는 것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그 중 제일 어려운 두가지는 사랑과 용서 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중 용서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라. <마태복음 18:22>
나에게 잘못을 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인것 같습니다. 특히 살기가 각박해진 요즘 세상에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실수를 이용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 상대방의 작은 실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용서에 대해 질문을 하며, 자신에게 잘못한 누군가를 7번 용서하면 충분한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7번이나 용서를 하려는 자신을 기특히 여기며 예수님의 칭찬을 바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외의 대답을 하시는데, 그것은 7번이 아니라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억지로라도 용서하면 될까?
예전에 어느 집회에서 이 구절에 대한 설교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좋은 말씀을 전하시는 훌륭한 목사님이셨는데, 그 분은 용서에 대해 설교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억지로 라도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겉으로만 용서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가식이 아니냐고 하지만,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침에 일어나기 싫고 학교가기 싫은데 억지로 학교에 갔다고 그것을 가식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굉장히 논리적이었고, 정말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잠이 많고 게으른 편이여서 (혹은 저녁형 인간이라...) 아침에 학교가는 시간에 맞춰서 일어나는 것이 정말 싫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싫지만 학교에 간다고 그것을 가식이라고 얘기하지는 않죠. 너무나도 감동적인 설교였습니다.
하지만 몇년이 지나고 그 말씀을 더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원하시는건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아니하면
그러므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자기 형제에게 그들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8:35>
(Photo : )
기독교인이던 기독교인이 아니던 많은 분들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의를 쌓으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봉사를 통해서, 혹은 성금을 내서, 자신이 나쁜 놈이 아니며 사회를 밝게 만들려고 하는 선한 구성원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또 신을 믿는 종교인이라면 내가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멋진 종교인임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던 당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바리새인들은 그런면에서 완벽한 종교인들 이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여 절약한 돈으로 구제를 하고, 또 자기 번돈을 헌금하고, 율법이 요구한 바를 정확하게 지키려고 하고, 심지어 다른 집에 놀러가도 그 집에서 나오는 음식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음식이 아닐까봐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기 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시면서 그들의 마음이 비춰지자 그들의 행위 뒤에 감춰진 외식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부터 하는 용서는 불가능해요
우리에겐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사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방황하는 청소년이라도 사랑하는 친구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돈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가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없애 버렸다면, 예를들어 나의 아들을 죽였다면, 내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냥 용서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터 용서 할 수 있을까요?
답은 너무 간단하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는 그것이 불가능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나 행위를 보는 분이 아니시고 인간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내가 어떤 여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도 한마디 안했더라도 내 마음이 그 여자와 간음을 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이미 그 여자와 실제로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가 겉으로는 용서한다고 말하고 실제로 어떠한 복수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있더라도 나의 마음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용서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7번씩 70번이라도 즉 아무리 많은 잘못을 하고 계속적으로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용서를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기독교인들
예수님은 이 명령 바로 다음에 한 예화를 주십니다.
어떤 왕 앞에 10,000 달란트(약 4.7조원)빚진 자가 끌려 왔는데, 그가 갚을 것이 없자 그의 주인이 그의 아내와 자녀와 가진것을 다 팔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10,000 달란트 빚진 자는 엎드려져 다 갚겠다고 빌고 주인은 빚진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10,000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 빚진 자기의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고 빚을 못갚자, 감옥에 가둡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이 자신이 받은 용서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 종을 형벌 주는 사람들에게 넘겼다는 비유였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죄보다 내가 더 커다란 죄를 저질렀으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하는 용서보다 내가 더 커다란 용서를 받았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얘기하면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으로 인해 어떤 은혜를 입었고 얼마나 커다란 죄를 용서 받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이 용서 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자기가 받은 용서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50만원 주고 어제 산 스마트 폰을 떨어뜨려 부서 뜨렸습니다. 그렇다면 대 부분의 사람들은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 하겠죠? 그런데 만약 1년 전에 내가 그 사람의 3000만원 짜리 차를 사고 내어 폐차를 시켰는데, 그 사람이 용서했다면, 50만원 짜리 스마트 폰을 부쉈다고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요?
정말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3000만원 짜리 피해를 입히고 용서를 받고나서 50만원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며, 은혜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나의 성적, 나의 돈, 나의 행복, 나의 명예, 나의 소원, 나의 꿈 나의... 나의.... 나의.... 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날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하기 힘듭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뜻도 알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지만 말이죠.
우리가 얼마를 가지면 부자라고 생각할까요? 주위에 아는 사람들 중에 돈을 제일 많이 가진 사람의 재산이 얼마정도 되나요? 1,000억원 이상 갖고 있는 사람 찾기 힘들죠? 아마 여러분에게 1,000억원이 주어지면 떵떵 거리면서 살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만약 여러분들이 우리나라에 삼성, 현대, LG 등 10대 대기업 회장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들 앞에서 여러분이 부자라고 떵떵 거리면서 돈자랑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재산 얘기만 나오면 부끄러워 제발 내 재산에 대해 묻지 말았으면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대기업 회장들이 빌게이츠 같은 세계적인 부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들도 기가 죽어 아무 말도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아주 더러운 죄인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이 나름 착한 인생을 살고 계신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 정도 살면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테레사 수녀라도 예수님 앞에 서면 그의 선하심에 자신의 더러움을 깨닫게 될 것이고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을 이뤄낼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였고 율법에 있는 의에 관하여는 흠이 없는 자로다.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 3:6 & 8>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 <디모데 전서 1:15>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을 흠이 없이 지켰다고 스스로 얘기를 하지만 그 모든 자신의 의를 배설물 즉 똥처럼 생각을 하며 죽기전에 자신의 제자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는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바친 자신을 죄인중에 최고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알아가면 알아 갈 수록 인간 기준의 의로운 행위가 얼마나 초라한 것이며, 자신은 예수님을 도저히 닮을수 없는 죄인 중의 최고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의 도덕 기준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점점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도덕 기준은 참 높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마음으로 미워하는 사람없이 한평생을 살 수 있으며, 다른 이성을 마음으로 간음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분명히 나는 수도 없이 질투하며 나의 것이 아닌 것을 갖고 싶어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나는 나의 주인인 하나님을 배신하고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나를 위해 살아 왔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이 세상 선악의 기준인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이며,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그 은혜를 이해할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우리의 행위를 말씀하시는게 아닙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에 용서를 못하는 것임을 그러므로 용서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둠 가운데 있느니라...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해 용서되었기 때문이라.<요한 일서 2:9 & 12>
예수님과 그분의 은혜를 더욱 더 알기 힘쓰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예수님을 알아가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너를 거부하여 네가 나를 위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은즉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 <호세아 4:6>
여호와를 알자.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데 전력하자. 날마다 새벽이 오듯이 주도 틀림없이 오실 것이다. 소나기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주께서 오실 것이다. <호세아 6:3>[출처: http://fingerofthomas.org]
[마 18장 요약 강해] 다툼과 용서에 관한 교훈
[내용개요]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의 문제로 논쟁이 일어나자 예수께서는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자라고 답변하셨다. 그리고 연이어 이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자를 실족케 하지 말 것과 어린아이와 같은 자를 하나님께서 길 잃은 한 마리 앙같이 사랑하심을 강한 어조로 선언하신다(1-14절). 또 형제가 범죄하면 세 번까지 권고하고 그래도 안 되면 출교하라고 명령하셨고, 기도에 관한 가르침도 주셨다(15-20절). 베드로가 형제에 대한 용서에 관하여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시면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베푸셨다(21-35절).
[강 해]
이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서기를 좋아하고, 힘없는 사람을 멸시하며, 용서할 줄을 모릅니다. 본장은 인간이 그러한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힘없는 사람들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의미
1) 순전
제자들은 천국에 가게 되면 누가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다투다가 도저히 해결점을 찾지 못하자 스승인 예수께 가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이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답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천국에 가는 것을 기정 사실화 한 뒤 누가 더 크냐에 대해 다투었으나 예수께서는 그처럼 크고자 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고 답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의 첫번째 의미는 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원죄의 영향이 있어 아기들에게도 악한 면이 없지는 않으나 보편적으로 어른에 비하면 아이들은 천진난만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엔 고의적인 악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a. 순전한 욥(욥1:1)
b. 성도의 순전(빌2:15)
c. 아이들같이 순전하고(벧전2:2)
2) 전적인 의뢰
아이들은 힘도 없고 몸도 작고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철저하게 부모를 믿고 부모를 의존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a. 여호와 의뢰(시125:1)
b. 의뢰하는 자에게 복이 있음(렘17:7)
2. 화를 면하기 위하여
1) 아무리 작은 자라도 실족지 않게 해야 함
흔히 사람들은 가진 것 없고, 권력도 없으며,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익을 가져다 주지도 못할 뿐더러 징벌을 할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하대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결코 하찮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본문을 통해 교훈해 줍니다. 실로 모든 인간은 저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 자체에 있어서는 우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다른 인간을 평등하게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반드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릅니다.
a. 소자에게 한 것이 주께 한 것(마25:40)
b. 나그네 접대(히13:3)
2) 범죄하게 하는 것을 과감하게 완전히 제거해야 함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찮게 보이는 사람을 하찮게 여기지 말 것을 교훈하셨을 뿐만 아니라 만일 어떤 것이 그러한 죄를 범하게 만들거든 그것을 과감하고도 완전하게 제거해 버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는 것까지 교훈해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예수께서는 어떠한 인간일지라도 그 인간 자체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으므로 모든 인간은 가진 것과 관계없이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a. 찍어 버림(마5:29-30)
b. 배설물(빌3:8)
c.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
3. 용서에 관하여
1) 용서의 대상은 모든 사람
베드로가 예수께 잘못을 행한 형제에게 어느 정도까지 용서를 베풀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예를 들어 답하셨습니다. 그 예에서 나타나는 용서의 대상은 한 사람이 대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말하는 빛이란 죄를 말하는데, 인간은 하나님께만 아니라 모든 타인에 대해서도 상호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의 대상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a. 누구든지 용서(막11:25)
b. 모든 사람을 용서함(눅11:4)
2) 용서의 이유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예에서 나타나는 것 중,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기자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어 있어 영원한 사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을 때 우리 죄를 도말시켜 주셨습니다(참조, 롬5:8). 따라서 모든 죄의 근본을 용서받은 우리가 사소한 죄를 짓는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a. 사하여 준 것같이(마6:12)
b. 용서 없이 용서 없음(눅6:37)
3) 용서의 한계
예수께서는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 형제의 죄를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용서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교훈이며, 온전한 용서를 암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a. 중심으로 용서해야(마18:35)
b. 하루 일곱 번이라도(눅17:4)
결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구원은 값없이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값없음은 은혜의 측면에서 언급되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은혜의 측면과 아울러 열매의 측면이 있습니다. 열매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구원에 합당한 행실을 하여야 합니다. 본문에서 교훈하는 행실은 겸손과 인간 존중, 용서입니다. 우리는 천국 입성을 위해 그러한 행실의 열매를 충실히 맺어야 하겠습니다.
[신학주제]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본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만 달란트란 돈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고대의 역사가에 의하면 유대 정부의 일 년 총 예산이 일천 달란트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돈의 액수로 따져 보도록 하자. 웨인하우스의 화폐 단위에 의하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다. 일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오만 원으로 잡고 계산하면, 일만 달란트는 삼조 원이다. 그러므로 종 된 신분 으로서 일만 달란트나 되는 고액의 돈을 빚지고 있었다는 상황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누가 그만한 액수의 돈을 빌려 주겠는가? 그리고 그 종이 무슨 일로 그만한 돈이 필요했겠는가? 본 비유는 그 종이 이미 갚을 능력이 없을 만큼의 빚을 지고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빚은 일만 달란트 보다 더 크다. 인간은 그 빚을 같을 능력이 없다. 다른 이들을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용서해 주어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l빚을 갚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영적교훈]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자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 세상에서 천국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에서는 가장 낮은 자가 가장 큰 자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교회의 현실은 정반대이다. 진실로 작은 자의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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