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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태복음 23장 -화 선언

by 은총가득 2020. 9. 25.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심(마 23:1-22)

 

주님은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먼저 성전으로 가셔서 장사꾼들을 쫒아내셨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행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무리들이 주님을 메시아로 알고 민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민란이 일어나서 로마 군대가 개입하게 되면 예루살렘을 관할하던 자신들이 문책당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자들은 예수를 올무에 걸어 처벌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계획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자신의 신적인 신분을 제시하면서 자신을 믿기를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주님을 거부하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안왁한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과 남아 있는 무리들에게 유대지도자들에게 엄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 모세의 자리에 앉은 종교 지도자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마 23:1-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의 마지막 권고마저 거부하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들과,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제자들과 순례자들을 향해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끝내 진실을 외면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밝히 드러내시고 엄중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거짓된 종교의 정체에 대해서 밝힐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주님은 거짓 스승들의 위선을 지적하여 그들이 경계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이 거짓 스승을 분별하고 그들을 좆지 않도록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전한 위대한 선지자이며, 또한 위대한 영적 스승이었습니다.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쓴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매 주일마다 백성들에게 모세가 쓴 율법을 가르쳤으며, 그 율법을 준행할 수 있도록 다른 법들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거짓 교사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쳐야 했지만, 그릇된 해석과 가르침으로 인해 백성들을 방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고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도 그들의 위선을 좆다가 올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 23:3)...."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위선된 행동을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르친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거짓된 해석과 행동을 반대하신 것이지, 결코 진리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진리를 가르치는 한 반드시 그 가르침을 행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행위는 결코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참된 종교는 반드시 말씀에 대한 순종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은 잘했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행동을 분리해서 생각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이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행위를 올바르게 분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이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참된 영인지 시험해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참된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도자는 삶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좋은 나무가 못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무리들도 삶에 나타난 열매를 통해서 거짓 교사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 무거운 짐을 지우는 종교 지도자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 23:3-4)...."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무거운 짐을 묶어서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그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거짓 스승들은 백성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참된 교사는 백성들을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해줍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백성들이 지기 어려운 의무를 부과하여 부담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법들을 만들어서 백성들의 책임을 무겁게 만듭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 일부를 제거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필요 없는 전통과 의식을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강제로 그것을 지키게 만듭니다. 이러한 일들은 백성들을 피곤하고 무거운 중압감에 시달리게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고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사들은 진리로 백성들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릇된 율법 해석과, 인위적으로 만든 법을 가지고 백성들을 피곤하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는 무거운 의무를 부여하고 나서, 자기들은 그 짐을 지려고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를 싫어했습니다. 참된 스승은 백성들의 짐은 가볍게 하되,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남에게는 무거운 의무를 부여하고, 자기는 그 의무를 하나도 담당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정한 지도자였다면,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고 자유롭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의 짐을 무겁게 하고, 자기는 그 의무에서 교묘하게 빠져 나갔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율법의 주인이 되어 백성들을 압박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강제로 말씀을 지키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가르침은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동은 결코 본받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돌아간 후에 제자들과 순례객들만이 주님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 있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거짓 지도자들의 외식과 위선을 드러내고, 그들을 조심하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그대로 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순례객들과 제자들에게 그들의 말은 행하고 지키되, 그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백성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자기는 그것을 지려고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셨습니다.


* 겉 모습을 꾸미는 거짓 교사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마 23:5)...."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막 12:38(상))"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45),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눅 20:45-46(상))...."

이제 주님은 구체적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 지적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은 거짓 교사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거짓 교사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경문을 넓게 만들어서 차고 다녔습니다. 경문은 가죽으로 된 성구함으로서, 그 안에는 중요한 성경 구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성구함을 지니고 다닌 것은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라는 명령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넓은 성구함을 만들어서 달고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분명하게 구별되었으며, 그들은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자신들의 경건함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옷술을 크게 하고, 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서기관들은 보통 세마포로 된 통옷과 백색으로 된 긴 두루마기를 입었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보통 물감을 들인 옷을 입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의 옷은 금방 구별이 되었습니다. 그 두루마기는 발까지 닿았으며, 그들은 그 옷 끝에 넓은 옷 술을 달아서 다른 사람들의 옷과 구별되게 만들었습니다.

 

서기관들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 주로 백색 세마포를 입고 다녔습니다. 이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주로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이런 옷을 입은 사람들을 매우 존경했고 또한 두려워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들의 말을 귄위 있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좋은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비난하신 것은 그들이 진정한 경건의 능력은 갖추지 않고, 겉 모습을 통해서 존경을 이끌어내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외모를 꾸며서 존경을 이끌어 내려 하는 그들의 형식적인 신앙 태도를 가증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진정한 교사는 외모보다 속 사람을 단장하는 법입니다(딤전 2:9-10, 벧전 3:3-5). 그러나 실속이 없는 사람일수록 겉모습을 꾸며서 자신의 부족함을 가리워 보려고 시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역시 내실보다는 겉모습에 치중하는 전형적인 거짓교사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명예욕에 사로잡힌 거짓 교사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6),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6-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38(하)),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막 12:38(하)-39)."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눅 20:46(하))."

또한 서기관들은 매우 교만했으며 사람들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회당과 잔치에서 상석에 앉기르 좋아했으며, 시장에서 인사 받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랍비"라고 불러 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서기관들이 거리나 장터를 지나가면 백성들은 존경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상인들이 거래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일어나서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서기관들은 남에게 주목받기 쉬운 장터나 거리에서 흰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서기관들의 외식적인 태도를 증오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유지나 세력가들은 잔치를 배설하였을 때에 명성있는 서기관이나 그의 문하생들을 초대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잔치가 벌어지면 으례히 서기관들을 초청하곤 했습니다.

 

그 잔치에 초대된 서기관은 연장자나 그 집안의 부모들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또 화당에서도 서기관들은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들이 앉는 자리는 율법이 놓인 맨 앞자리에 있는 긴 의자였습니다. 그 자리는 온 회중이 바라볼 수 있는 자리였으기 때문에, 서기관들은 그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와 같이 세상의 명예욕에 사로잡힌 서기관들을 가증하게 여기셨습니다. 또한 서기관들은 자신들을 높이는 칭호를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당시에 일반 사람들은 서기관들에게 말을 할 때에 존경을 표시하는 "랍비", "아버지", "선생"과 같은 칭호를 사용했습니다(주후 1세기에 와서는 "랍비"라는 칭호는 안수 받은 율법학자들에게만 적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이러한 칭호로 불러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대리인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외식적인 서기관들의 태도를 크게 비난하셨습니다.

* 탐욕과 외식으로 기도하는 거짓 교사들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막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눅 20:47)."

또한 서기관들은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삼키고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탐심에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1세기의 서기관들은 보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보조금으로 생활을 했습니다. 구걸하는 서기관은 없었지만, 예루살렘에 사는 서기관들은 주로 영세민에 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은 서기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경건한 일로 권장했습니다. 특히 어느 서기관이 생활고로 고통을 당할 때에 그를 도와주는 일은 백성들 사이에서 큰 공로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재산이 많은 유대인들 중에 일부는 자기 재산을 서기관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로 인해서 여러 가지 부작용도 발생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재물을 뜯어내기 위해서 과부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강제로 헌신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법으로 얻은 재물로 자기 욕심을 채우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과부의 재산을 삼킨다"는 말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경건하게 보이려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짧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기도를 고의로 길게하여 영적인 우월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들은 남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서 장시간 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서기관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이 끝까지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 앞에서 그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모든 행위를 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큰 성구함을 차고 다녔으며, 옷술을 크게 한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또한 그들은 잔치에서 상석에, 그리고 회당에서는 상좌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 인사를 받기를 원했으며,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우기를 좋아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탐욕에 빠져서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탈취했으며, 기도할 때에는 남에게 보이려고 외식으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장차 그들이 받는 판결이 백성들보다 더욱 중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 지도자라 침함을 받지 말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8).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9).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8-10)."

 

바리새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높임을 받기를 원했으며, 랍비, 아버지, 또는 지도자라로 불리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랍비나, 아버지, 그리고 지도자라고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남들보다 더 큰 자로 인정 받으려는 바리새인들을 정죄하셨습니다. 주님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도들의 선생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아버지가 되시고, 자신만이 그들의 지도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연구하여 가르치는 사람들을 "랍비(선생)"라고 불렀고, 그들을 크게 존경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아버지"로 불렀습니다(행 7:2). 또한 백성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지도자", 또는 "인도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칭호들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존경을 표시하는 매력적인 칭호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이러한 인간적인 칭호나 명예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직 모든 찬양과 영광과 존경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바울 역시 자신을 고린도인들의 "아버지"라고 부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고전 4:15). 또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디모데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딤전 1:2). 그러나 이러한 칭호는 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으로부터 나온 칭호였습니다. 이러한 칭호는 바울과 디모데가 마치 사랑하는 아버지와 자녀과 같이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정죄하신 것은 이러한 사랑의 관계로 맺어진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정죄하신 것은 스스로 자신을 남보다 높이려고 교만한 마음으로 이러한 칭호를 사용하는 태도였습니다. 사실 성도들이 경건한 지도자들을 존경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라도 영적 지도자들은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낮추어서 자신을 성도들과 동등한 형제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주님은 "너희는 모두 다 한 형제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선생과, 아버지와 지도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야 합니다.

* 위대함의 비결은 겸손이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 23:11)."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는 길은 섬김에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으로 높은 사람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가 아니라,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존경과 명예를 얻으려는 사람은 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주님과 같이 모든 것을 드려 성도들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사람이 위대한 자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섬김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섬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으며, 수건으로 그 발에 묻은 물을 닦아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높임을 받으려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그들이 거짓 교사라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지도자는 종이 되어 성도들을 섬기려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친히 이러한 일에 모범을 보이셨으며, 또한 제자들에게도 그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교만과 겸손의 결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주님은 계속해서"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은 성경 전체에서 계속해서 가르쳐 진 가르침이었습니다(욥 22:29, 잠 29:23, 눅 14:11, 18:14, 약 4:6, 벧전 5:5 등). 성경은 "교만을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했으며, 또한 "거만함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잠 16:18). 이러한 일은 앗수르 왕 산헤립이 체험했고(참고 대하 32:14,21), 느부갓세네살도 체험했습니다(참고 단 4:30-33). 성경은 하나님께서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들과 함께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사 57:15). 성경을 읽어보면 겸손한 태도로 인해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겸손한 태도로 주님을 찾아왔던 백부장(마 8:8,10,13)과, 겸손하게 주님께 간구했던 가나안 여인(마 15:27-28), 그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구한 세리(눅 18:13-14)들이 이러한 예에 속합니다.

주님은 겸손과 온유에 있어서 친히 제자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빌 1:6, 4:13,19, 마 20:25-28, 눅 22:27, 요 13:1-15, 빌 2:5-8 등). 성경을 보면 겸손한 곳에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겸손하게 자기 죄를 고백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성숙한 성도일수록 더욱 더 겸손한 성품을 나타냅니다. 진정한 영광은 겸손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진정한 위대함의 기준도 겸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신약 성경은 겸손에 대해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겸손하고 온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항상 자기를 높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 지도자는 남보다 자신을 더 낮추고, 그들을 섬기려고 할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자신을 숨기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을 높일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겸손은 참된 지도자와 거짓 교사를 구별하는 명확한 표시가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는 참된 지도자이며, 교만한 자는 거짓 교사님이 분명합니다.


화 있을찐저(마 23:13-22)

 

주님은 끝내 믿기를 거부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엄중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잔치와 회당에서 상좌에 앉기를 좋아했고, 사람들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 선생은 하나이며, 너희는 다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지도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천국에서는 누구든지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며,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교만은 거짓 교사에게 나타나는 성품이며, 겸손은 참된 지도자에게 나타나는 성품입니다.

* 거짓 종교에 대한 경고와 권면


(마 23:13-36)에는 주님의 생애에서 가장 준엄하고 격렬한 고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끝까지 믿기를 거부하고 백성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거짓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주님의 경고는 경건의 모습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린 거짓 교사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외식적인 거짓 교사들에게 크게 노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외침은 본노와 함께 슬픔의 외침이었습니다. 주님은 거짓 교사들을 책망하는 동시에, 그들의 심판을 바라보며 슬퍼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정죄하셨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거짓 교사들을 고발하셨지만, 동시에 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아직도 돌아설 기회가 남아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를 위해 그들의 위선과 외식을 숨김없이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의사가 환자의 상처를 드러내듯이 그들의 부패한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참담한 모습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영접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돌아왔다면 그들은 심판을 피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1.  화있을진저! 천국문을 닫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여!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14)."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천국 문을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고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 인도자로서 천국 문을 열고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대로 천국 문을 닫고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를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구원의 기회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세상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만 천국에 들어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막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해석과 가르침으로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은혜보다 행위를 의지하게 하여 백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함으로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려 하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주님을 믿기를 주저했으며, 천국의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백성들도 예수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백성들은 모두 천국 문 박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뜻 대신 자기의 생각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거짓 교사들은 후에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거짓 교사들에게 암중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2. 화있을진저! 교인을 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자여!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주님은 두 번째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교인이 생기면 그들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든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거짓 종교인들은 열심히 새 신자를 구한 후에 그들을 배로 타락시켰습니다. 첫째로 거짓 종교인들은 새로운 교인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니다. 그들은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온 바다와 육지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감언이설로 유혹해서 자기를 좆는 추종자로 만들었습니다. 거짓 종교인일수록 선교에 더욱 열정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신 자기의 사상을 주입시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거짓 지도자들에게 미혹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이러한 자들은 은밀하고 친절하게 접근하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미혹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거짓 종교인들은 자기가 얻은 교인들을 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일단 거짓 종교에 빠진 사람은 그 곳에서 빠져 나오기 어려우며, 다시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은 은혜보다 행위를 의지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은혜보다 율법을 크게 의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 개종된 사람은 율법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더욱 더 복음을 믿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추종자를 얻고 나면 그들을 전보다 배나 더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거짓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 대신에 자기 사상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보다 더욱 복음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장차 이러한 거짓 교사들이 저저른 만행에 대해서 엄한 책임을 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거짓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 엄중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행위를 의지하는 그릇된 교리로서 은혜의 교리를 막아버렸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엄중하게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그들이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돌아다니다가, 교인 하나가 생기면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든다고 탄식하셨습니다. 거짓 지도자들은 자기들을 좆는 추종자를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추종자를 얻으면 그들을 전보다 더 완고한 율법주의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백성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거짓 지도자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성전이 큰가? 아니면 금이 큰가?


3.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16). 어리석은 자와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23:16 -17)"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소경된 인도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 소경과도 같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처럼 백성들을 잘못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혼동했으며, 더 중요한 것은 버리고, 덜 중요한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보다 성전에 있는 금을 더 중요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성전으로 맹세를 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금을 가리켜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거짓 교사들을 가리켜서 우맹(어리석은 자)이요, 소경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금과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크냐?고 물으셨습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성전의 금보다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지도자들은 성전으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고, 성전의 금으로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어리석고 한 치의 앞도 보지 못하는 소경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오직 재물(성전의 금)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전보다 성전의 금을 가리켜 한 맹세를 더 중요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탐심으로 인해 어두워졌으며, 그들의 마음은 탐욕을 인해 닫혀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백성들은 심각한 어둠과 혼란 속에 빠져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 제단이 큰가? 아니면 예물이 큰가?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18).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 23:17-19)"

주님은 계속해서 그들의 어리석은 가르침에 대한 예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제단을 가리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고, 제단 위의 예물을 가리켜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소경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예물과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고 물으셨습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제물보다, 그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 더 중요하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제단을 가리켜 한 맹세는 지킬 필요가 없고, 예물을 가리켜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미련하고 눈이 먼 소경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물질에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제단보다 사람들이 드린 제물만을 중요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제단은 가치를 깍아내리고, 그들에게 돌아오는 제물에 대해서는 가치를 높였습니다. 그들은 예물이 눈이 어두워서 본질을 전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예물과 헌금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옳게 판단하지 못하고, 진리를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처럼, 백성들을 구덩이에 빠뜨리고 있었습니다.

* 맹세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20)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21).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마 23:16-22)."

 

주님은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제단으로 맹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되고, 제단에 드린 예물을 가리켜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단으로 맹세하는 것은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예물을 포함하여)을 가리켜 맹세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당연히 제단을 가리켜 한 맹세가 유효하며,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거짓 교사들은 성전으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고, 성전의 금으로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전을 가리켜서 맹세하는 것은 성전뿐 아니라,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져야 했습니다. 또한 거짓 교사들은 하늘이나 예루살렘, 또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늘을 가리켜 한 맹세는, 곧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가리켜 한 맹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가리켜 한 맹세도 꼭 지켜져야 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맹세를 할때에 하나님께서 그 맹세를 듣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단이나. 성전, 또는 하늘이나 땅에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맹세를 하든지, 그들이 한 맹세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느 것을 가리켜서 맹세를 하든지 그 맹세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입을 열어 맹세를 하면 그것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맹세를 한 후에 그것을 신실하게 이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능한 맹세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 예루살렘, 그리고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며, 또한 사람은 자기 생명을 어떻게 할 아무 권리도 없습니다(마 5:34-36). 주님은 제자들에게 맹세를 하지 말고 그 대신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에서 지나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함부로 맹세하는 일을 금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한 맹세는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섣불리 맹세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릇된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화 있을찐저(마 23:23-26)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소경된 인도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가리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고,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전보다 금을 더 귀중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어리석은 자요 소경들이라고 한탄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은 제단을 가리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고, 그 위에 있는 제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보다 그 위에 놓인 제물을 더 귀중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눈먼 소경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제단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이며, 성전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성전과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맹세는 지켜져야 하며, 따라서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맹세하지 말고 그 대신에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릇 것은 아니라고만 말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4.  화있을진저! 중요한 것은 버리고 경한 것은 강조하는 자여!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23).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 23:23-24)."

 

이제 거짓 지도자들에 대한 네 번째 저주 선언문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저주의 대상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네 번째 저주에서 주님은 그들이 사소한 규정과 전통에 민감하면서, 더 중요한 율법 정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박하(헤뒤오스몬)는 독특한 향내를 지닌 채소(mint)였습니다. 이 채소는 유월절에 쓴나물의 양념과(출 12:8), 회당의 방향제로 사용되었습니다. 회향(안네돈)은 미나리과의 식물로서 양념과(anise, dill) 약품과 향료로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근채(퀴미논)도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향기로운 열매를 맺었으며, 그 열매는 양념이나 약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식물들은 이스라엘의 곡식이나 포도와 또는 감람유에 비해서 매우 수확이 적은 채소였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사소한 채소까지 철저하게 십일조를 구별해서 드렸습니다. 그들은 십엘조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준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서 가르치는 더 중요한 것들, 즉 의와 인과 신은 버렸습니다. 의와 인과 신은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습니다. 의(크리시스)는 재판, 옮음(right), 공의(justice), 의(righteousness)를 나타는 말로서, 본문에서의 '정당하고 공정한 행위", 또는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인(엘레오스)은 공동번역에서는 '자비'(mercy)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비'는 이웃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피스티스)은 믿음, 신실함, 충성을 의미하는 말로서, 본문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믿음과 신뢰, 또는 신실과 충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의와 자비와 신실함으로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십일조와 같은 문제는 사소한 점까지 준수하면서도, 더 중요한 의와 자비와 신실함에 대해서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버렸다"고 번역된 말은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십일조도 행해야 하지마, 의와 인과 신도 버리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십일조 규례를 비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사소한 것에 치우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무시하는 태도를 비판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공동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주님은 또 다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소경된 인도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고 있다"고 비난하셨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하루살이는 팔레스타인에서 흔한 곤충으로 가장 작은 것을 상징했습니다. 하루살이는 때로 포도주 통에 빠져죽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채를 가지고 포도주를 걸러서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살이를 부정한 곤충으로 취급했습니다. 반면에 약대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몸집이 큰 짐승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약대 역시 먹을 수 없는 부정한 동물로 취급했습니다(레 11: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루살이처럼 사소한 십일조 문제는 세밀하게 준수했지만, 약대처럼 크고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행하기 쉬운 일에 대해서만 생색을 내고, 지키기 어려운 일은 모른 척하면서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5. 화있을진저! 겉만 깨끗게 하고 안은 더러운 자여!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25).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5-26)."

이제 25절에 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주님의 다섯 번째 저주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주님은 당시의 랍비들에 의해 제정된 정결 예식에 대한 문제를 취급하셨니다. 주님은 거짓 지도자들이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면서, 그 안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채우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잔과 대접'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그릇'을 의미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식사 전에 그릇을 정결하게 씻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을 정결케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정말로 정결하게 해야 할 것, 즉 그들의 마음에는 정결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마음에는 온갖 탐욕과 방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정결한 척 했지만, 그 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탐욕'(하르파게)은 '강탈', '약탈', '도둑질'을 말하며, 주로 물질적인 면에서의 죄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탕'(아크라시아)은 '자제력 상실', 또는 '무절제'라는 뜻을 가진 말로서 윤리적인 면의 범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약자를 강탈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무절제한 정욕으로 가득했습니다.

주님은 또 다시 그들을 가리켜 "소경된 바리새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안을 깨끗하게 하면 " 겉도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겉 모습만 꾸미지 말고, 마음 안을 의와 인과 신으로 채우기를 촉구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남에게 보이려는 외식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정결하게 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이렇게 하면 겉도 정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먼저 할 것을 나중에 하고, 나중에 할 것을 먼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외식적인 태도를 파헤치면서, 그들이 진정한 경건을 회복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마 23:27-36)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사소한 것까지 구별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서 더 중요하게 가르치는 명령인 의와 자비와 신실함은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러믈 주님은 그들에게 십일조를 뿐 아니라, 의와 자비와 신실함을 행하는 일도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소경된 인도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또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면서,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안을 깨끗하게 하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 화있을진저! 회칠한 무덤이여!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27).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

 

주님은 여섯 번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여섯 번째 선언에서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드러나지 않은 악한 영향력을 집중적으로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깨끗하게 보였지만 그 속에는 시체와 온갖 썩은 것들이 가득한 무덤과 같았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무덤은 들판이나 길 옆에 있던 가난한 자들의 무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무덤들들 우기가 지나 유월절이 되기 전, 즉 아달월 15일에 회가루로 하얗게 칠했습니다(겔 39:15).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무덤을 치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그 무덤을 피할 수 있게 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시체나 무덤을 만진 사람은 7일동안 부정하게 되었습니다(민 19:16). 그러므로 그들은 순례자들이 무덤에 접촉하여 부정해지지 않게 하려고 무덤을 하얗게 표시해 두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모든 율법에 완전한 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경건하게 보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는 탐욕과 교만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처럼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체가 놓인 무덤은 겉으로는 하얗게 회칠이 되어 깨끗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시체의 뼈와 섞은 악취와 진동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에 시골에서 아파트를 짓기 위해서 공동묘제지 포크레인으로 파헤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지역은 시체 썩는 냄새로 코를 찔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곳으 피해 돌아갔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이와 같이 겉으로는 경건한 척했지만, 그 속은 썪어 악취가 나는 무덤처럼 부패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외식과 가증함을 드러냐시고, 그들이 전정으로 바로 서기를 촉구하셨습니다.

7. 화있을진저! 거짓된 전통을 자랑하는 자여!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29),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마 23:29-30)"

 

주님은 일곱 번째로 외식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저주의 대상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그릇된 율법주의에 심취해 있는 모든 유대인을 포함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추앙받는 사람이나, 영웅을 위해서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재정 중에 일부분을 이러한 일을 위해 지출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사회는 무덤 예술이 많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주변에는 수많은 기념비와 무덤들(스가랴, 압살롬, 여호사밧, 야고보 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일은 근본적인 동기를 잃어버리고, 점차로 자신들의 신앙을 나타내려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덤과 비석을 세우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다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조상이 살았던 시대에 살았으면 결코 선지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조상들보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지자들의 시대에 살았으면 선지자를 용납하고 그 가르침을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이 선지자들의 무덤과 묘비를 세우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인들의 무덤과 묘비를 세움으로 자신들이 의로운 사람임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31).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마 23:31-32)."

그들은 선지자를 죽인 조상들을 가리켜 '우리 조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셈족 언어에서 누구의 '자손'이라는 말은 그 사람과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그 조상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습니다(출 20:5). 죄는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영향력을 후손에게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를 죽이고 박해한 자들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자숙하며 올바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위선으로 가득찬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고 장담했지만, 여전히 의인들을 거부하고 박해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도 패역한 조상들의 뒤를 좆고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조상을 좆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모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조상의 행위를 좆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들보다 더 악한 일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행위로서 패역한 조상들의 후손임을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너희가 너희 조상이 행한 죄의 양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조상들이 채우기 시작했던 죄의 잔을 마지막까지 가득하게 채우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조상들이 저질러 온 죄악을 그들이 물려받아서 그 일을 완성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들이 행할 마지막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선지자를 죽였던 자의 자손들이 조상들과 같이 행하는 것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리 권면해도 그들이 듣지않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이 채운 죄의 잔을 마저 채울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요구에는 그들이 돌이키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호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반역하는 무리들에게 마지막까지 연민의 정을 가지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사랑에 바탕이 되지 못한 비판과 저주는 분쟁만 낳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바탕을 둔 비판은 회개를 촉구하게 되고 양심에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시체의 뼈와 모든 부패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주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이와 같이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탐욕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외식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엄중하게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무덤과 비석을 꾸미면서 자신들이 조상 때에 살았다면, 결코 선지자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말과는 달리 선지자를 죽인 조상들의 행위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행해서 "조상들이 하던 일을 마저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메시아를 거부하고 죽임으로서 선지자를 죽인 조상들의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 33)"

 

주님은 조상의 행위를 따라 주님을 죽이려는 자들을 "뱀들과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그들이 결단코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러한 선포는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퍼부었던 내용과 비슷했습니다(마 3:7). 여기에서 뱀은 타락하고 저주받은 자를, 그리고 독사는 사단의 기질과 본성을 가진 악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뱀들과 독사의 새끼들"은 둘 다 죄의 본성을 지닌 사악한 존재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서닞자를 죽인 조상들의 행위를 비난하면서도, 사실은 그들의 뒤를 좆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행동으로 직접 그들이 선지자를 죽인 조상의 자손임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결코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지옥의 판결"은 '지옥에 떨어질 심판'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게엔나'에 떨어질 심판은 영원한 멸망의 판결(마 5:22), 즉 최후의 멸망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거짓 지도자들의 운명은 이미 게엔나, 즉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기로 작정되어 있었습니다.

* 너희가 복음의 일꾼들을 핍박 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마 23:34)."

 

주님은 장차 그들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선지자'는 영적 권위를 가진 복음의 전파자들을 의미하고(엡 4:11), '지혜있는 자들'은 지혜의 은사를 받고 성도들을 가르치는 자를 말하며, 또한 '서기관들'이란 복음을 가르칠 교사들을 의미합니다(마 13:52). 이러한 사람들은 후에 복음을 전파할 베드로, 야고보, 스데반, 바울과 같은 증인들과, 성령의 은사를 받고 복음을 전파할 일꾼들을 말합니다. 주님은 장차 이러한 일꾼들을 유대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보내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낸다'는 말(에포스텔로)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서, 이는 단회적 파송이 아닌 지속적이고도 끈질긴 파송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끝내 주님을 거부하고 복음의 일꾼 중에서 일부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은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추방할 것입니다(34).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후에 이 예고대로 "스데반(행 7:59)과 야고보(행 12:2)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후에 베드로(요 21:18-19; 벧후 1:14)와 시므온과 안드레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였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도들이 '회당에서 채찍질을 당했습니다(행 5:40; 22:19; 26:11; 고후 11:24,25).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조상들의 뒤를 좆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조상들과 같이 의인을 해치는 악을 저지를 것이라고 예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주님을 거부하고 죽일 것이며, 그 조상들이 하던 행위를 마무리 지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일을 미리 예고함므로, 그들이 그 일을 하지 않도록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 의인을 죽은 피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3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마 23:35-36)."

 

주님은 거짓 교사들이 주님께서 보내실 일꾼들을 박해하고 죽일 것이며, 이로 인해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음을 당한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모두 다 유대인들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해 주셨습니다. 아벨은 의인으로 악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첫 번째 희생자였습니다(창 4:8). 그러나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 견해들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1) 그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였다. 그러나 그가 순교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2) 그는 바리스의 아들로서 성전에서 열심당원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가랴였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였거나 순교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비록 그가 성전 경내에서 죽임을 당했지만, 그가 제사장이 아니었다면 지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3) 그는 베레갸의 아들인 선지자 스가랴였다(슥 1:1) 그러나 구약 성경에 그가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4)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가랴였다. 이 견해는 가능하긴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5) 그는 (대하 24:20-22)에 나오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였다. 그는 성전 뜰 안에서 죽음을 당했으며, 이 일은 히브리 정경에서 끝 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마지막 5)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벨과 사가랴 선지자는 히브리 성경에서 첫 책(창 4:8)에서 마지막 책(대하 24:20-22)에 기록된 순교자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아벨부터 사가랴까지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순교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피"는 '의인의 피', '무죄한 자의 피'와 같은 뜻으로, 의인의 죽음이나 피흘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히 11:4).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아벨부터 마지막 순교자인 스가랴까지 그들이 흘린 모든 피값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땅에서 흘린 무죄한 피값'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동안 유대인들이 저지른 불의한 일과 종교 지도자들이 지은 모든 죄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후에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인정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책임이 없다는 표시로 무리들 앞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 유대인들은 그 피값을 자신과 자기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스스로 주님을 죽인 일에 대한 책임을 떠맡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흘린 모든 피값이 이 세대에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처음에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오면 의인의 피 값을 담당해야 할 대상들이 이 세대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는 문자 그대로 "그 시대에 살던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주님을 거부하고 죽이는 일에 직간접으로 동조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은 공동체적으로 그 책임을 져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역사 속에서 조상들이 지은 죄를 오늘 이 세대가 바로잡지 못하면, 그 모든 형벌이 현 시대에 내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예언대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의 발에 의해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과거의 죄악을 오늘 청산하지 못하면, 현 세대가 과거의 죄악에 참여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현 시대가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의 선언은 일곱 가지 저주문의 최종적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마 23:37-39)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뱀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결코 지옥에 떨어지는 판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완고한 유대이들을 위해서 장차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중 일부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일부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추방하여 유리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를 죽인 조상들의 행위를 좆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조상의 행위를 그대로 좆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인 사가랴의 피까지 모든 의인이 흘린 피 값을 그들이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무고하게 의인을 쳐서 흐르게 한 피값이 그 세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엄중한 저주를 선언하신 후에,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두 번 반복하여 부름으로 애절하고도 격한 감정을 표현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적 중심지로서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탄식은 회개치 않는 종교 지도자와 모든 유대인을 향한 애절한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은 거짓 지도자들로 인해 의인을 죽이고 돌로 치는 살인과 반역의 도시로 변해버렸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다음과 같이 탄식하셨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은다는 표현은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사 31:5; 36:7). 아마도 이 표현은 당시에 대중들이 잘 알고 있던 격언이었을 것입니다. 이 격언은 사랑과 애정과 보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역 기간 중에 암탉이 독수리의 공격을 예상하고 새끼를 모으듯이 예루살렘을 모으려고 하셨습니다(신 32:11; 렘 48:40). 주님은 유대지도자들을 책망하며 심판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그들을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적극적으로 주님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깊은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너희 집이 활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 23:38)."

주님은 끝까지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심판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여기에서 "집"이라는 말(오이코스)은 일반적인 '집'이나 '거처' 외에도,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인 기독교인(딤전 3:15; 벧전 2:5; 4:17), 또는 '나라'나 '가문'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집'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이 집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전을 마지막으로 떠나실 때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24:1). 또한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렘 12:9). 2) 또한 이 집은 이스라엘 '국가'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성겨에서 집은 종종 국가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국가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로 인해 성전과 이스라엘 국가가 "황폐하여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몇몇 고대 사본에는 '황폐하여'라는 구절이 없습니다. 그러나 권위있는 몇 사본들(시내,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이 말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한편 '황폐하다'(에레모스)는 말은 '한적한', `사막', '버림받은' 등의 뜻으로서, 뒤에 나오는 `버린 바 된다'(아피에타이)는 말과 비슷한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회개치 않는 유대인들로 인해 성전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 곳은 생명력을 잃고 영원히 '황폐'될 것이 작정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예언은 일차적으로 주후 70년에 성취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인 로마의 군대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 성전과 성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멸망은 그들이 끝까지 주님의 요청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습니다.


* 너희가 마지막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9)."

 

이제 주님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말은 (시 118:26)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무리들이 '호산나'라는 말과 함께 소리친 말이었습니다(21:9). 원래 시 118편에서 언급된 이 말은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온 순례자들에게 제사장이 인사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이 말은 성전의 주체이시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으로 사탄을 정복하실 승리자이신 주님을 환영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에 다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 성도들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여!"라고 외치면서 주님을 환영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불신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심판주로 오실 것이며, 따라서 주님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크게 당황하며 두려워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주님의 재림은 성도들에게는 기쁨의 날이며,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날에 올 때까지 유대인들이 다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성령을 통해서 주님과 교제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전에 주님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주님을 볼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되어서야, 주님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에서 깨어 일어나서 성도들이 주님을 환영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때에 주님께서 진정한 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때에 자신이 믿지 않았던 일을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때가 늦을 것이며, 그들은 심판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팔화와 팔복(마23:13-38)

마태복음 5장에는 여덟 가지 복이 있고 23장에는 여덟 가지 화가 있습니다. 이것들이 서로 상관 관계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 글은 이러한 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눅6장에도 마5-7장의 산상보훈의 설교와 병행이 되는 축복과 저주의 설교가 있음을 봅니다. 만약 이것이 같은 것이라면, 마태나 누가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같은 마음으로 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충분히 상세하게 설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이라면, 마태나 누가가 각기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23장의 화가 마5장의 복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마태가 누가와 같은 점을 말하면서 방식을 달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마태나 누가가 모두 축복과 저주를 말하는데, 마태는 복음서의 앞뒤에 나누어서 말하고 누가는 한꺼번에 말하는 것입니다1).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둘째 저주 부분인 마23:14이 어떤 사본에는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2).

 

마23장의

첫째 화사람들로부터 천국문을 닫는다”고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것입니다(13절). 이는 첫째 복인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것과 일치합니다3).

둘째 화는 “과부의 집을 삼킨다”고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것입니다(14절). 이는 둘째 복인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와 일치합니다4).

 

셋째 화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라고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것입니다(15절). 이는 셋째 복인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와 일치합니다5).

 

넷째 화는 “성전이나 제단을 성전의 금이나 제단의 희생 제물보다도 경히 여기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것입니다(16-22절). 이는 넷째 복인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와 일치합니다6).

다섯째 화는 “의와 인과 신 즉 공의와 긍휼과 신실함을 무시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것입니다(23-24절). 이는 다섯째 복인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와 일치합니다7).

 

여섯째 화는 “마음보다도 외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것입니다(25-26절). 이는 여섯째 복인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와 일치합니다8).

일곱째 화는 “겉으로는 고상하게 보이나, 속은 죽어서,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것입니다(27-8절). 이는 일곱째 복인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와 일치합니다9).

 

끝으로 여덟째 화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것입니다(29-36절). 이는 여덟째 복인 마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와 일치합니다10).

여덟째 복의 보상은 천국을 받는 것입니다(마5:10-12). 이와 반대로 바리새인들에 대한 심판은 예루살렘의 파괴입니다(마23:35-24:34)

 

 

각 주

 

1) 아마 그 이유가 마태는 유대문학적인 표현법을 사용했고, 누가는 역사가로서 순서대로 기록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특징은 족보 기록상의 차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족보를 가져와서 예수님이 왕통임을 강조하고, 누가는 역사적인 사실대로 솔로몬이 아니라 나단 계열인 것을 기록합니다. 마태는 14대씩 대수를 맞추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생략했고, 누가는 누락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마태복음은 유대문학적인 표현 방법을 많이 사용했는데, Lohr에 의하면 마태복음은 교차대칭구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경 전체에 번번히 사용되는 문학 기법으로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1-4장 예수님의 탄생기사 (설명문)

5-7장 산상보훈 (강화)

8-9장 예수님의 이적 (설명문)

10장 선교강화 (강화)

11-12장 이 세대에 의한 배척 (설명문)

13장 천국비유 (강화)

14-17장 제자들에 의한 환영 (설명문)

18장 교회강화 (강화)

19-22장 예수님의 권위와 초대 (설명문)

23-25장 종말론 강화 (강화)

26-28장 수난,죽으심,부활 (설명문)

이상을 보면 5장과 23장은 대칭이 되며 팔복과 팔화가 대칭이 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1장의 임마누엘 주제가 28장의 임마누엘 주제와 대칭이 되며, 7장의 강화 끝에 심판(7:22-27)과 25장 강화 끝의 심판(25:42-46)이 대칭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한글 개역성경에는 “14절(없음)”이라고 되어 있으며, 난하주에 어떤 사본에는 14절에 마1:40과 눅20:47과 유사한 구절이 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표준 새번역 성경에는 난하주에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14.이 위선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과부의 집을 삼켜 버리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러므로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가 첨부되어 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KJV과 일치합니다

3) 천국문이 닫히는 것과 열리는 것의 대조가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천국문이 닫히지만, 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천국문이 열립니다

4) 과부나 고아는 애통하는 자의 상징입니다. 저주받은 바리새인들이 과부의 집을 삼킨다면 반대로 복이 있는 사람들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5) 바다와 육지는 이방세계와 신앙세계의 상징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바다와 육지를 다녀 지옥의 자식을 만들지만, 복 있는 사람들은 땅 즉 믿음의 영역을 차지합니다.

6) 바리새인들의 물질을 추구하는 것과 복 있는 사람들이 의를 추구하는 것이 비교됩니다

7) 긍휼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8) 외식하는 것과 깨끗한 마음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9)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의 대조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10)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공통점이 있습니다.<by James B. Jordan /trans. by 이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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