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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형제를 실족케 하는 죄(마 18:6-9)

by 은총가득 2020. 9. 25.

 

 

형제를 실족케 하는 죄(마 18:6-9)

 

요한은 한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사람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한은 그 일을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들으신 후에, 요한에게 그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 나를 비방할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더라도 자신의 편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있든지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인정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다양한 형제들을 인정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1.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가 받을 상급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능력 행하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권위를 평가절하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권위를 확실하게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사람은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과 같이 더운 나라에서 전도자에게 시원한 냉수를 대접하는 일은 매우 친절한 행위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찾아갈 때에 무관심하게 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제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그들에게 시원한 냉수를 대접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경우에 그들이 자신을 대접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대접한 것을 자신을 대접한 것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2. 실족케 하는 자에게 임할 저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막 9:42)."

 

그러나 예수님은 동시에 자신을 믿는 평범한 성도들의 권위도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중한 형벌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깊은 바다에 빠드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연자 맷돌은 여인들이 손으로 곡식을 가는 작은 맷돌이 아닙니다. 이 맷돌은 짐을 나르는 짐승들이 돌리는 큰 맷돌입니다. 이렇게 큰 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던지면 그는 다시는 살아나올 수가 없습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로마 군인들이 반역한 지도자를 처형할 때에 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던진 경우도 있습니다(행 5:37 참조). 이러한 일은 매우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본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아이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목에 연자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중한 범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실족헤 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살인죄처럼 잔인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만심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이 말씀은 제자들의 교만교정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교만을 교정하기 위해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서는 이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아이 하나실족하게 하는 일은 사람의 목에 연자 맷돌을 매달고 깊은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악한 일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히 마음을 낮추고 어린 영혼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을 보면 이 말씀은 요한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했을 때에 주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은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천국 일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믿음으로 귀신을 쫓으면서 더욱 더 예수님을 신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를 천국 일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은 것은 성령님께서 그와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를 천국 일꾼으로 인정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천국 일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태도는 신실한 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만일 이로 인해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떠난다면, 요한은 그 형제를 실족하게 한 죄를 짓게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은 사람의 목에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잔인한 일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3. 실족케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7)."

예수님은 제자의 범위를 열 두 제자로 제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천국 백성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들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요한의 그릇된 생각을 교정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교단과 자기 교회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다른 교파나 다른 교회 사람들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는 악한 일입니다. 이러한 실수는 예수님을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사람들이 더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기 쉽습니다. 특히 이러한 실수는 전통적인 교단이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예수님을 섬기는 모든 형제들을 인정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만심에 빠져서 자신과 다른 교파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과 같은 방법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로 인해 신실한 형제들이 시험에 들거나 실족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한 영혼이라도 잃어 버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너무나 쉽게 거부합니다. 물론 세상에서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타적이고 편협한 마음으로 남을 무시하고 이로 인해 형제를 실족하게 만드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월 의식에 빠져서 형제를 무시하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빠져서 다른 민족을 정죄하고 멀리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만심에 빠져서 다른 민족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후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만심과 특권 의식에 빠져서 다른 형제를 배척함으로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형제를 용납하고 섬길 수 있는 넓은 마음을 달라고 성령님께 기도합시다.

 

요한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권위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도 결코 그 상을 잃지않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을 자신을 영접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더라도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는 어린 영혼 하나를 실족케 하는 일은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깊은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악한 일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형제를 실족케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1.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43). (44-없음)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45).(46-없음)(막 9:43-46)"

 

예수님은 앞에서 남을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해서 경계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예수님은 자신을 실족하게 하는 죄와 싸우기 위해서는 단호한 결단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손과 발, 또 우리의 눈이 우리를 실족하게 만든다면, 손과 발, 그리고 눈을 제거할 만큼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도 실족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죄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죄에 대해서 수족을 잘라낼 만큼 단호하게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지체들이 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이 죄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죄와 단호하게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죄와 적당히 타협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단호하게 대처해야합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해서 강력한 죄의 세력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얼마든지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중한 우리의 지체들이 죄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한 자들이 당할 형벌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47).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48).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7-49)."

 

예수님은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고, 한 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죄에 대해 전심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죄의 세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간교하고 또 강하기 때문에 전심을 다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죄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적당히 대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계심을 늦추고 방심하게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죄에게 점령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을 유혹하는 죄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죄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있는 사람은 큰 낭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인을 보고 음욕이 생겼을 때 과감하게 절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간음죄에 이어 살인죄까지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죄는 우리가 방심하고 있을 때에 한 순간에 우리를 무너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로 인해서 일평생 뼈 아픈 경험을 해야합니다. 다윗은 후에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지은 죄로 인해 남은 생애를 눈물과 고통 속에 살아야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집에서 간음과 살인과 반역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녀들이 간음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자기 아들이 반역하고 자기 아내들을 범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일순간의 방심은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고, 이로인해 일생 동안 엄청난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교훈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본문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장애자가 되거나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찾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당시에 로마교회의 기독교인들은 박해와 순교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에게 로마 황제를 "주"(Lord)라고 부를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를 주로 고백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로마 당국은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했습니다. 때로 로마 당국은 기독교인들을 굶주린 야수의 먹이로 던지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의 손과 발은 야수의 발톱에 찢겨졌고 또 그들의 눈이 뽑혀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불구자가 될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를 주로 고백하면 평안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기꺼이 안전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생명을 위해서 로마 황제를 주로 고백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본문의 교훈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본문이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장애자가 되는 것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본문이 배교자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배교자들이 갈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최악의 장소입니다. 살아 있는 생선에게 소금을 치면 그 생선은 고통으로 미친 듯이 날뜁니다. 이와 같이 배교자도 지옥에서 불로 소금치듯 함을 받게될 것입니다. 이러한 형벌은 로마 당국이 성도들에게 가한 형벌보다 더 가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육신을 죽이는 로마보다 몸과 영혼을 함께 멸하시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이러한 사례들이 자주 나옵니다. 마카비서를 보면(7:2-41), 영생을 얻기 위해서 지체를 절단하거나 생명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교회사에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고문을 받거나 생명을 포기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수족이 절단되고 눈이 뽑히는 형벌을 기쁘게 감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셨습니다.

 

(마18:21,22) 주님 안에서 서로 형제가 되려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

 

삼진 아웃의 법칙

 

세상 법정에는 야구의 규칙을 빌려서 삼진아웃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같은 죄를 연속해서 범하면 세 번째는 몇 배의 중형을 내리는 것입니다. 사람들끼리도 삼 세 번까지는 용서해도 그 이상 넘어가면 절대 용서 못하고 아예 상종도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잘못을 세 번이나 참아주는 것도 피해자로선 참으로 대단한 인내요 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르는 남이라면 당장 물적 정신적 피해보상부터 요구할 것이며 그런 보상이 없다면 원수가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아파트의 층간 소음으로 심하면 살인까지 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바로 위층 사람이면 이웃인데도 그러합니다. 설령 피해 보상을 받아도 그것으로 끝이지 그들 사이에 어떤 인간적 교류도 생성되지 않고 다시 생판 남으로 돌아갑니다.

 

이는 어느 세대 어느 나라에나 동일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세태가 그렇게 무정 잔혹하게 변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성정은 항상 동일하기에 항상 있어온 일입니다. 요컨대 세 번이 인간이 남의 잘못을, 그것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이웃에게 용서해줄 수 있는 일반적인 한계인 셈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주 자신 있게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면 신자로써 책임을 다하는 것 아니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알다시피 일곱을 유대인들은 완전한 숫자로 여기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의에 도달하지 않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베드로는 참으로 우리와, 특별히 성질 급하고 감정적인 한국 사람들과 많이 닮았다고 여겨집니다. 때로는 귀엽고 우리 대신 주님께 물어보고는 야단까지 대신 맞아주니 고마울 정도입니다.

 

주님은 그 질문에 대해 아주 놀라운 답을 주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완전 숫자 7 하나로 족할 줄 알았는데, 주님은 (7X10)X7=490번으로 완전 숫자를 세 번, 그것도 곱하여서 대답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회수를 듣자 틀림없이 베드로의 코는 납작해졌을 것이며 함께 있던 제자들도 한참 동안 멍해졌을 것입니다.

 

그 의미가 490번까지 용서하고 491번째는 큰 벌을 주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습니까? 매일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도 490번까지 용서를 못합니다. 베드로처럼 7번까지는 될지언정 그것을 넘어가면 아예 포기하고 자식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 자식이라도 교도소를 490번 들락거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용서가 아니라 그냥 부모 된 의무로 사식과 영치금이나 넣어주고 치울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주님 안에서 형제 된 사람들끼리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490번까지 용서했다가 491번째에 용서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고 따지고 보면 용서를 안 한 것이 됩니다. 어떤 면에선 처음부터 벌이라도 주었으면 회개할 기회가 더 빨라졌을 수 있습니다. 본의는 아니지만 회개할 기회가 늦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그의 머리에 더 쌓게 만든 결과가 됩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와 인간에게 지은 죄

 

주님의 대답은 사실상 인간으로서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용서입니다. 거기다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차원마저 훨씬 넘어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이어서 천국에 관해서 어떤 임금이 종들과 회계하는 비유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23-35절) 그 비유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주었더니 그 자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도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임금이 그 자를 다시 잡아다가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일 품삯이며,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맞먹습니다. 일만 달란트면 육천만 데나리온입니다. 일백 달란트의 빚에 비하면 60만 배나 큰 빚입니다. 그것을 365일로 나누면 16만년이 넘고 80평생으로 치면 이천 번을 살아야만 겨우 갚을 돈입니다. 한마디로 일만 달란트는 인간으로선 영원히 갚을 수 없고 갚으려는 꿈도 아예 꿀 수 없는 금액입니다

 

주님은 그만한 빚을 탕감해준 임금이 바로 천국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아 구원 얻은 것은 인간이 평생을 갚아도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이 비유와 연결시키면 예수님의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됩니까? 첫째로 베드로와 그에게 죄를 범하는 형제는 똑같이 하나님에게 일만 달란트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으나 십자가 은혜로 탕감 받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 안에서 형제들끼리 범하는 죄는 서로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진 것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아예 무시해도 되며 용서해줄 것도 없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길가다 서로 어깨가 잘못 스친 정도의 죄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만난 형제끼리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도덕적 종교적 의미와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우선 베드로의 질문 의도처럼 신자니까 일반인보다 더 용서해야 한다는, 세 번은 물론 일곱 번도 훨씬 넘어서 아주 많이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끝까지 용서하려면 제가 이미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그 사람이 행한 일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끝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 사람을 끝까지 받아들이려면 나부터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절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일만 달란트만큼 엄청나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위의 계산대로 하자면 80번을 죽었다 살아도 못 갚을 죄였다고 철저히 고백 회개해야 합니다.

 

그 위에 다른 모든 신자들도 똑같이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점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범해도 백 데나리온도 안 된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잘못을 범하면 외적 모습은 분명 죄이지만 만약에 다 같은 사형수끼리라면 전혀 문제 삼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나부터 너무나 죄 많고 불쌍한 자이고 저도 그러하며 내가 더 그러하므로 네가 몇 번 나에게 잘못을 범해도 다 같이 불쌍한 자들끼리 문제 삼을 것이 없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들어야 합니다. 문제 삼아봐야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서로가 아니 나부터 너무나 부끄럽고 비겁하고 완악해질 뿐 아니라, 그분이 십자가 은혜로 무상으로 용서해준 뜻에 비추면 큰 죄악이 된다고 절감해야 합니다.

 

실제로도 진정으로 나도 불쌍하고 너도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면 그 사람 자체를 불쌍히 여기므로 그가 행한 일 한두 가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게 됩니다. 비유컨대 아직도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기가 똥오줌을 싼다면 야단치지 않고 오히려 더 보살펴 주는 것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나도 기저귀에 똥오줌을 싼다는 사실을 확신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주님의 이 말씀은 주님 안에서의 형제들끼리는 아예 용서라는 말이 필요 없는 사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오직 사랑으로만 그 관계가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성도들끼리 용서 받아야만 할 죄를 일곱 번이 아니라 삼 세 번이라도 범하면 서로 형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을 역으로 따지면 같은 신자에게 동일한 잘못을 일곱 번이나 범했다는 뜻인데 그 사람은 형제는커녕 심지어 신자라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

 

그런 맥락에서 이 말씀은 주님 안에서의 형제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이 질문을 할 때만 해도 성령이 간섭하기 전으로 아직은 예수 십자가 은혜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형제들도 신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단순히 유대 동족만 형제라고 호칭했습니다. 같은 유대인인 그가 말하는 형제에는 당연히 바리새 사두개인처럼 예수님을 거역 대적하는 자들도 포함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불신자입니다.

 

그럼 베드로의 질문은 불신자가 신자에게 여러 번 죄를 범해놓고 피해 보상은커녕 사죄도 않을 때에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심지어 비방 멸시 핍박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주라고 명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랬듯이 말입니다. 주님은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셨고 그 전에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신자도 불신자의 잘못에 대해 똑같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로서의 소명이자 행할 바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끼리는 죄를 범해서도 안 되지만 죄를 범해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이 이 땅에 살아갈 동안에는 반드시 서로 돕는 자로서 오직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그러지 못해도 신자라면 최소한 그들에게 용서받아야 할 일은 아예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불신자가 잘못하면 불신자의 행위를 용서하기에 앞서서 그 사람 자체를 끝까지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수십 배의 결실을 맺는 성육신의 원리로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그것을 탕감 받는 일이 더 급하지 너희끼리 일백 데나리온 빚 가지고 아웅다웅 다투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 큰 빚을 단지 먼저 탕감 받은 것뿐입니다. 그 다음에 신자가 행할 일는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아직도 그 큰 빚을 탕감 받지 못한 자에게 주님을 소개해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일을 제대로 하려면 서로 용서 자체가 필요 없는 사이가 되는 것,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로선 신자로써 정말로 궁금했었고 또 정말로 용서를 잘하는 의로운 신자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에는 잘하고 못하고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하려면 용서만 하면 되는 것이지 491번째에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 안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의 질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고 엄밀히 말하면 신자에겐 성립이 안 되는 질문이라는 것이 바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따지자면 아무리 극악한 불신자라도 또 그런 자가 아무리 핍박해도 490번까지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주님은 우리로선 선뜻 이해하기 힘든 아래와 같은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의로운 행위를 해야 구원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다른 이의 과실을 끝까지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로 임금과 종이 회계하는 이 비유의 결론으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마 18:18-20)

믿는 자가 예수님의 능력과 임재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장 18-20절)

 

우리가 이 본문을 읽었을 때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구절이 영적 전쟁이나 결혼생활에서의 연합, 그리고 당신의 기도 모임을 풍성하게 해주는 말씀은 아니라는 점이다. 반대로, 15절에서 17절은 명확하게 교회의 권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매이고 풀고, 그다음 구절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이 모든 예수님의 지침은 교회의 권징이라는 것이 문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마태복음 18장 18-20절의 의미는 교회 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 대한 일로 모였을 때, 천국이 그들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이 문맥에 관한 그의 주석에서 얼마나 많은 인기 있는 해석들이 문맥과 떨어져서 잘못 해석됐는지 설명한다 :

“18절, 19절에서 예수님의 약속은 교회 역사 가운에서 심각하게 잘못 해석되어 왔다. 많은 은사 주의자들을 마태복음 7장 7절 그리고 21장 22절들과 같이 우리가 구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축복과 특권들을 주신다고 잘못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문맥에 비추어 보거나, 이 당시 통상적인 랍비들의 표현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리고 문맥의 일반적인 문법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의지 때문에 좌지우지된다고 가르치시는 게 아님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천국에게 무엇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고 명령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예수님의 약속은 그분의 백성들이 그들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시고 그들의 순종에 힘을 더해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교회의 권징에 대한 지침들에 대하여 이어서 말씀하시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특별한 축복이나 특권을 간청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또한,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회가 성도의 죄를 용서할 궁극적인 권한이 있다고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은 교회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성도들을 권징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이고 푸는 것이 영적인 영역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맥아더 목사는 잘못된 해석을 신중하게 꼬집는다:

“랍비들이 때때로 하늘에서 매이거나 하늘에서 풀리는 행동이나 원리를 말하는 목적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금지되었는지 허용되었는지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말씀에 기초해서 죄들이 용서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선언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다면, 교회는 그 사람에게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그 사람의 죄들이 이제는 풀렸고, 즉 용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용서를 위한 하나님이 기록하신 조건을 만족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분의 아들을 믿는 것이다. 만일, 반면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교회는 그 사람에게 같은 확신을 가지고 그의 죄는 매였고, 즉 용서 받지 못했다고 선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정하신 죄의 용서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교회의 권징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설명하신 구절이다. 18-20절의 말씀은 그분의 지침이 더욱더 확장되어, 이제는 교회의 권징에 책임이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어마어마한 천국의 지지를 받는다고 알려 주고 있다. 존 맥아더가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분의 백성들에게 확증하신다. 그들이 교회의 성결을 위해 함께 일할 때 예수님께서 직접 같이 일하시겠다고 말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말씀에 따라 교회의 권징을 확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다시 한번 더 확정해 주셨다. 이 구절을 소수가 모인 예배나 기도 모임에 적용하는 것은 교회 권징에 대해서 말씀하는 본문과 일치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신다.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하지않을 때, 또는 심지어 감옥에 혼자 고립되어 있을 때, 다른 성도와 수백 킬로 떨어져 있을 때도 함께 하신다.

본문은 교회의 권징의 과정에서 두세 사람 증인의 필요성을 말씀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씀은 그분의 이름을 입으로 말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의 신령한 뜻과 성품에 따라 구하고 일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증인들은 주님을 대신해서 그들의 형제자매의 회개나 혹은 회개치 않는 죄를 확증하는 신실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교회가 주님의 이름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모일 때는, 분명히 그분의 능력과 권위 아래 스스로 교회 안의 죄를 심각하게 다루는 성결의 사역에 참여해야 하며, 천국의 확증과 믿는 자들 간의 교제가 동반되어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 명시된 성경적인 교회 권징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바로 다음 구절인 18장 18-20절의 말씀과 불협화음을 내는 잘못된 해석들과 적용들을 허용하게 된다. 말씀의 원래 문맥과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은 온갖 종류의 거짓된 교리를 낳는 빌미가 된다.

말씀 해석은 우리 실제의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지닌다. 우리는 모두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디모데후서 2장 15절)

 

먼저 된 자가 나중됨(마19:27-30)

 

 

부자 청년은 재물을 사랑했기 때문에 영생의 길을 포기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놀랐으며, 주님은 놀라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자를 하나님의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에게는 이 일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좆았나이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좆았나이다(막 10:28, 눅 18:28)."

베드로는 부자 청년이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변해서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좆았나이다." 베드로는 부자 청년은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지 못했지만, 자신과 다른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좆았다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한 후에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부자 청년과는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좆은 자신과 동료 제자들이 어떤 상급을 받게 되는 지 알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얻을 상급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우쭐해져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웠습니다.


* 주님을 위해 세상을 포기한 사람이 받을 축복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28).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8-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29), 금생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29),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복음서마다 약간씩 다르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에 제자들이 누릴 축복이 언급되어 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은 지금 하는 말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을 확증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재림 후에 이 세상에 새롭게 될 것이며, 그 때에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좆았던 12제자들도 그들을 위해 준비된 12보좌에 앉아서 함께 이스라엘의 열 두지파를 관장하고 감독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좆은 제자들이 함께 보좌에 앉아서 주님의 통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은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열 두 제자들은 주님의 나라에서 특별한 위치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뿐 아니라,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모친이나 자식이나 땅을 버린 사람들은 모두 다 주님과 함께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이 앞으로 올 세상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게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주니을 위해 포기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되, 핍박을 함께 겸해서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 중에서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포기한 것의 백 배를 받을 것이며, 또한 내세에서도 영생의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 기록 당시의 성도들 중에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가족과 재산과 재물을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의 독자인 로마 교회 성도들은 큰 박해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 위해서 가족과 인연을 끊어야 했으며,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직업과 명예를 박탈당했습니다. 그들은 발각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현실에서 모든 것을 잃은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세상에서 그들이 포기한 것의 백 배를 보상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보상과 함께 박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의롭게 사는 사람은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도들을 연단하실 때에 시련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박해와 시련이 찾아오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들은 내세에서 반드시 영생의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은 그 행동을 통해서 자기의 믿음을 보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막 10:31)."

주님은 제자들이 받을 보상과 축복을 확실하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이 일로 인해 교만해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근심하며 돌아가는 부자 청년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과 내세에서 큰 상급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우쭐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자만하지 않도록 한 가지 경고를 해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러나 먼저 믿은 사람 중에서 나중이 될 사람이 많고, 반대로 나중 믿은 사람들 중에서 먼저 될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늦게 믿은 사람이 먼저 믿은 사람을 추월하는 일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자만해지지 말고 계속해서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만한 사람은 언제든지 은혜를 거두어 뒤쳐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우쭐해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겸손히 그 뜻을 행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교만하지 않도록 성령님께 겸손과 온유의 영을 구해야 합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세상을 포기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백 배나 보상을 받되, 박해도 함께 받게될 것이다.
2.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세상을 포기한 사람은 내세에서 반드시 영생을 받는다.
3. 성도를 부르시고 높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기에 자만할 수 없다.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

(마19:16-22)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나라를 소개하려는 고상한 목적을 지닌 관원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관원은 부자였으며 청년이었다.(눅 18:18-30).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모세가 전해 준 계명들을 모두 지킨 듯하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나까?’ 라는 물음 속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면에서 스스로를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청년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이 청년에게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을 하셨다. 이 청년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이 청년에게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본받을 점이 있음과 동시에 오히려 그에게 천국 백성의 자격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천국 백성의 자격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1. 천국 백성은 계명을 잘 지킨다.(17, 20절).

 

만일 우리가 율법의 영적인 면을 깨닫지 못하고 자구(字句)적으로만 지킨다면 그것은 부자 청년과 동일한 모습에 불과할 것이다.

 

1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지키라’(테레오) 는 명령은 적의 침입에 대해 ‘파수하다’ (마 28:4), 귀중한 물건을 ‘보존하다’(요 2:10), 그리고 무엇인가 쓸모없이 되거나 무의미하게 되지 않도록 힘써 ‘붙들다’ 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리고 모든 지혜도 사용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강요하신 ‘지킨다’ 는 의미에는 능동적인 자세로 온 힘을 다하여 계명을 이행하려는 자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20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지키었사오니’(퓔랏소) 라는 대답은 ‘수호하다’, ‘피하다’, ‘감시하다‘ 는 의미가 있다. 즉 이것은 율법에 어긋나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자세가 엿보이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예수님은 율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그 정신을 지키라고 하는 반면, 청년은 이 율법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여 자구적으로만 지켜왔음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앞의 것은 천국 시민으로 적합하나, 뒤의 것은 율법의 무거운 멍에만을 지는 고행주의자일 뿐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마 22:37)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되겠으며, 또 율법의 내적 교훈을 실천함으로 천국 시민이 되기를 힘써야 하겠다.

 

2. 천국 백성은 온전하게 되도록 힘을 쓴다.(21절)

 

예수님은 부자에게 자기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 ‘온전하게 되라’ 하고 말씀 하셨다. 여기에서 ;온전하다‘(텔레이오스)는 ’끝‘, ’목표‘, ’결과‘(마 26:58) 를 뜻하는 ’텔로스‘ 에서 유래되었다. 이것은 정해진 목표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표현하며, 자신에게 요구되는 모든 사항들을 해 낼 수 있는 능력과 태세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온전하게 하다'는 말은 부족함이 없이 모든 부분이 모두 갖추어 졌다는 뜻이다. 시계를 예로 들면, 그 바늘과 태엽, 그리고 모든 부속품들이 제자리에 놓여 져 있어 정해진 목표대로 움직일 때 온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이는 불완전한 것이다.

 

여기에서 부자 청년에게는 천국 시민으로서의 부족한 것이 있었다. (막 10:21). 오늘 나에게 무슨 부족함이 없는지 자문하여 보자. 그리고 이것을 모든 것을 후하게 주시는 여호와께 기도함으로 (약 1:5), 온전함을 이루는 성도가 되어야 되겠다.

 

3. 천국 백성은 이 세상의 것으로 근심하지 않는다.

 

부자 청년은 재물의 우상과 그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이와 같이 영적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대한 유혹을 끊어버리려는 엄청난 노력과 투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루지 못할 때에는 본문처럼 금심하게 된다. 여기에서 ‘근심하다’(뤼페오)는 ‘매우 슬퍼하다’, ‘마음 아프게 하다’, ‘고민스럽다’(마 14:9), ’고통을 주다‘(고후 2:5) 라는 뜻이다.

이것은 양자택일을 위하여 괴롭게 애를 쓰는 마음을 뜻하며, 인간이 추위와 더위, 그리고 목마름과 배 고품으로 고통을 당하듯이 마음이 극심한 비탄에 잠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처럼 이 세상에 대해 집착한다면 영생을 떠나서 재물로 인하여 망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같이 되며(행 5:5), 없어질 재물과 함께 영원히 망하고 마는 것이다. (딤전 6:10).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것으로 근심하기 보다는 여호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근심하는 성도들이 도이어야 하겠다.(고후 7:10).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목소리로 젊은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라고 말씀 하셨다. 즉 예수님은 그 청년의 약점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자기의 부족함을 느끼고 최선을 다하여 온전한데 이르도록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말로만 그리스도인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온전하게 되도록 힘쓰며, 이 세상의 것으로 근심하기 보다는 하늘의 것을 더 소망함으로 참된 천국 백성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되겠다.  - 그랜드종합주석 마태복음 19장 pp506-507 .


천국에서 위대한 자(마20:20-28)

 


주님은 제자들의 앞에 서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주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가셨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제자들을 따로 세우시고,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예고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자신이 산헤드린 공회에 넘겨질 것이며, 그들은 주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주님을 이방인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방인들이 자신을 능욕하고,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며, 주님은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로마를 물리치고 유대인 중심의 세계적인 국가를 세울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메시아가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주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감취어진 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제자들이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영광의 자리를 요구하는 두 제자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20),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0-21)"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35).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36)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5-37)."

 

주님께서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동안, 제자들은 주님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곧 로마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가까워짐에 따라 제자들은 주님께서 세우실 나라에 대해 나름대로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세우실 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눈치 작전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가장 먼저 선수 친 사람은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들은 기회를 틈타서 다른 제자들이 모르게 주님께 접근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이때에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의 모친과 함께 주님을 찾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로서 주님의 모친인 마리아의 언니였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과 이종 사촌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모를 앞세워서 주님의나라에서 자신들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해달라고 청탁을 했습니다.

 

사실 야고보와 요한은 지금도 주님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제자들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더 신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은밀하게 주님의 이모인 자기 모친을 앞세워서 이종 사촌인 자기들을 주님의 우편(첫째 자리)과 좌편(둘째 자리)에 앉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베드로로 주님께서 십자가를지지 못하도록 만류하다가 책망을 들은 사건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모친을 앞세워 청탁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주님과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전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마 20: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주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번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이 세우실 왕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장차 다가 올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주님의 좌우편에 앉혀달라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희가 알지 못하고 있도다!"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의 좌우 편에 앉는 자는 주님에 버금가는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좌우 편에 앉혀 달라는 요청은 결국 주님에 버금가는 고난을 겪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감히 주님께 와서 이런 요구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계속해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피의 잔을 마실 것입니다. 이 잔은 원래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들에게 내려진 심판의 잔이었습니다(시 75:8, 사 51:17-23, 렘 25:15-28, 겔 23:31-34, 합 2:16, 슥 12:2 참조). 그러나 주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신 이 "진노의 잔"을 마실 것입니다. 또한 "세례"는 주님께서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장차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진노의 잔과 죽음의 세례를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장차 주님의 좌우 편에 앉을 사람도 이러한 진노의 잔과 순교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마실 잔과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 20:23)."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39),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막 10:39-40)."

야보고와 요한은 주님께 자신들도 "주님의 잔과 세례에 참여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하신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주님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많은 고난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희생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좌우편에 앉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과 죽음을 감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에 참여할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은 후에 얻을 명예와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실패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은 주님께서 반드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때에 주님과 함께 최고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고난에 기꺼이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야고보와 요한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은 전혀 무력으로 로마를 뒤집고 유대인 중심의 정부를 세우려고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계획한 것은 반대로 로마인에게 넘겨져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이 장차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것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후에 야고보는 주님을 위해 순교했으며, 요한 역시 밧모섬에 귀양갔다가 후에 돌아와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전혀 요한과 야고보가 기대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와 섭리로 인해 그들의 뜻과는 달리 순교와 고난의 잔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야고보와 제자들에게 자신의 좌우 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좌우 편에 앉는 일은 청탁이나 인간의 요청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부름을 받고, 중요한 직책을 맡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사람을 불러 주시고, 그들을 훈련시켜서 자신이 원하시는 직분을 맡겨주실 것입니다. 주님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일군을 부르시고 선택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들의 청탁이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시는 일에 충성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메시아 왕국을 권세를 잡고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혀 주님의 뜻과는 다른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오해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교정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로마를 물리치고 유대인 중심의 세계적인 국가를 세울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곧 이 나라가 세워질 것으로 기대했으며, 그 나라에서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모친을 앞세워서 자신들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을 넣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좌우 편에 않는 사람은 주님의 고난과 순교에 참여해야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 일을 알았더라면 이러한 요구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장차 수난과 순교의 잔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좌우 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직분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 나머지 열 제자들의 반응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마 20:24)..."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막 10:41)..."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좌우편에 앉기 위해서 은밀히 로비했다는 소식은 곧 다른 제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 일을 은밀하게 추진했지만, 그 일은 다른 열 제자들에게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열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들 역시 같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곧 오게 될 주님의 나라에서 서로 높은 자리를 얻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 나라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다가 주님께서 나라를 세우시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아서 권세를 누리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주님께 잘 보일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와 요한이 인척 관계를 앞세워서 은밀하게 청탁을 넣었다는 사실은 열 제자들을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날에도 교회 안에는 서로 존경을 받고 높아지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 천국 지도자의 조건: 봉사와 섬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25),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26),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5-27)."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42),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4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

 

주님은 열 제자가 노한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한 지도자가 되는 길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속 사회에서는 세력을 가진 사람이 쉽게 부패하여 폭군이나 압제자로 변하곤 합니다. 세상은 이러한 권력자들을 가리켜서 위대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마음대로 주관하고, 그 귀족들도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립니다. 그들은 권력을 가지고 백성을 섬기지 않고 백성들을 착취하고 남용할 때가 많습니다. 열 두 제자들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도 세상 나라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통해서 권력을 얻으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길이 어딴 것인 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한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리더십과 위대함의 기준은 세상 나라와 전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크게 되려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종"(디아코노스)이 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높고 낮음의 관계를 "봉사의 관계"로 설명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봉사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에게 봉사를 받는 사람이 위대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많은 사람을 봉사하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만일 제자들이 이런 질서를 알았다면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 중에서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둘로스)이 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지도자가 되는 일을 "섬김의 관계"로 설명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종이 되는 것이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되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천국의 리더십의 근원봉사와 섬김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섬김의 모범(예수 그리스도)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주님은 이 일에 있어서 자신을 예로 드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에게 봉사와 섬김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봉사 받기보다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섬김을 받기보다 종이 되어 죄인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봉사와 섬김을 요구하지 않고 먼저 자기 목숨을 사람들을 위해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대속물"(리트론)은 "노예나 포로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 지불하는 돈"입니다. 주님은 죄로 인해 사망의 노예가 된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속전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일은 바로 이러한 봉사와 섬김을 행동으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미 오래 전에 메시아께서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릴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사 53:10). 사도 요한은 후에 이러한 사랑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남에게 봉사와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작고 낮은 사람이다.
2. 천국에서는 남에게 봉사하고 섬기려는 사람이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3.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으려는 사람은 당연히 고난에도 함께 참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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