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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누가복음 14:1-24의 문학-역사비평적 연구

by 은총가득 2020. 8. 26.

누가복음 14:1-24의 문학-역사비평적 연구

 

오덕호

 

I. 들어가는 말

 

1. 연구의 동기

 

신약성서 해석에 있어 역사비평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최근에 발달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학비평적 방법들은 이제 우리들에게도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서라는 독특한 글을 해석하는데는 역사비평만으로도 한계가 있겠지만, 문학비평만으로도 역시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두 방법을 적절히 결합시킨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그런 방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문학비평 방법에 속하는 독자반응비평을 수정하여 역사비평의 장점이 포함되도록 한 문학-역사비평 방법이다. 본 연구는 이 방법을 이용하여 누가복음의 한 문단을 해석해 봄으로써, 이 방법론을 검증해보고, 아울러 그 문단이 보여주는 의미와 그 메시지의 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특별히 누가복음 14:1-24를 선택한 것은, 한편으로는 이 문단이 누가복음의 독특한 모습들이 -- 예컨대, 식탁대화,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 재물의 이용 문제, 하나님의 은혜, -- 잘 나타나 있는 매력적인 본문이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네 개의 작은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문단이 각각의 작은 문단들은 많이 연구되어 왔으나, 연결된 하나의 큰 문단으로서는 많이 연구된 것 같지 않고, 더욱이 보다 넓은 문맥에서의 의미와 역할은 별로 연구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2. 연구 방법

 

우리가 채택한 문학-역사비평 방법인 수정된 독자반응비평의 주요 원리는 독자가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를 파악하는 것이 본문의 적절한 해석이라고 보는 독자반응비평을 기본 방법으로 하여 본문을 해석하는데, 그 독자를 원래의 실제 저자(real author)가 그 글을 쓸 때 염두에 둔 독자인 저자적 독자”(authorial reader)로 보고 그 저자적 독자의 입장에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저자적 독자의 독서과정을 통해 본문을 해석하고자 하므로 저자의 기록 의도도 무시하지 않게 되고, 아울러 독자가 누가복음을 통전성이 있는 이야기글로 이해하고 읽을 것이므로 본문 중심 해석법(특히, 이야기비평[narrative criticism])의 주요 장점도 포함하게 된다.

 

이 방법에서는 독서과정의 주요 요소로 틈 메우기예상과 회상이 있다고 본다. 틈 메우기라는 것은 독자가 본문을 읽어 나가면서 본문에 나타난 모호한 부분들을 독자 나름대로 이어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적 독자는 자신의 사전 지식을 통해 본문의 틈을 메우며 읽는데, 그 사전 지식에는 본문 밖에서 얻은 사전 지식(외부 지식; extratextual repertoire)과 본문 안에서 얻은 사전 지식(내부 지식; intratextual repertoire)이 있다. 예상과 회상이라는 독서 과정은 독자가 글을 읽을 때 앞으로 일어날 것을 예상하며 읽고 또 뒷부분에 가서는 그 예상을 확인하여 그 예상이 맞았으면 자신의 이해에 확신을 가지고 계속 읽게 되고, 혹 그 예상이 틀렸으면 전에 읽었던 부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수정해 가며 계속 읽어 나가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저자적 독자는 처음 읽는 독자이다. 그것은 누가복음이 읽는 문화가 아니라 듣는 문화에서 기록된 것으로서 독자가 누가복음을 들을 때 글의 순서대로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고, 아울러 저자는 독자가 자신의 글을 처음 한 번 들음으로써 이해하기를 바라므로 저자적 독자는 처음 읽는 독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란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생전 처음으로 듣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독자는 예수에 대해 여러 가지를 듣고 알고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1:1-4). 처음 읽는 독자라는 뜻은 누가복음이 말하고 있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그 독특한 구성 속에서 누가복음의 예수 이야기로는 처음 듣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러 저자적 독자는 자신의 문학적 지식을 통해 저자가 누가복음을 이야기글로 기록하였다는 것을 알고 누가복음을 이야기글로 읽을 것이다. 저자적 독자가 누가복음을 이야기글로 읽을 것이기 때문에, 독자는 누가복음의 구성(plot)과 본문의 위치, 본문의 배경(setting), 본문에 나타나는 인물 이해(characterization), 본문에 나타나는 문학적 기법(rhetorical devices) 등을 이해하며 본문을 해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연구에 있어, 우리는 먼저 누가복음 14:1-24가 누가복음에서 가지는 위치를 간략히 살펴보고, 본문의 구조를 살펴본 후, 본문을 해석하고자 한다. 이 본문의 해석 부분에서 우리는 독자의 입장에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의 배경, 인물 이해, 그리고 문학적 기법 등을 살펴보고 그에 맞춰 본문을 해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끝으로 본문의 전후 문맥과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본문의 의미와 역할을 보다 명확히 하고 아울러 누가복음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한다.

 

 

II. 누가복음 14:1-24의 위치

 

1. 누가복음의 구조와 14:1-24의 위치

 

대부분의 학자들은 누가복음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본다: 누가복음의 내용은 예수의 사역에 대한 예비적 기사들이 나온 다음에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나오고, 그 다음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 기사가 나온 후, 예루살렘에서의 사역과 고난, 그리고 부활과 승천으로 되어 있다. 본문은 이 중에서도 특히 여행 기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면, 누가복음의 저자적 독자는 누가복음을 처음 읽는 독자로서 누가복음의 구성을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인데, 그는 본문을 어떤 입장에서 읽을 것인가? 우선 저자적 독자는 누가복음의 독특한 구성으로서의 예수 이야기는 처음으로 접하지만, 그는 이미 예수의 생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다(누가복음 1:1-4). 그렇다면, 그는 최소한 예수가 갈릴리에서 사역하다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독자는 먼저 외부 지식으로부터 예수의 이 예루살렘 여행기는 예수가 고난을 받으러 가는 길인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 속에 독자는 본문을 읽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 대한 독자의 이러한 이해는 본문의 위치까지 읽어 내려온 독자의 내부적 지식에 의해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독자는 예수의 탄생 기사(2:34)에서부터 예수의 고난에 대해 예상을 하며 읽어오고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사도행전의 표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4:16-30에서도 예수의 고난이 예측된다. 더욱이 예수는 9:22에서 자신의 고난을 직접적으로 예고해 주며, 9:31에서는 변화산 기사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알려준다. 누가복음 9:229:31의 고난 예고는 가장 믿을만한 인물들의(예수와 천상의 존재인 모세와 엘리야) 예언이므로 독자는 그대로 믿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독자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서 죽으리라는 누가복음 이야기의 구성 안에서 누가복음을 읽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이어 나오는 9:51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기 시작한다. 누가복음 9:51은 단순히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하지 않고, 승천할 기약이 차서 올라간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의 예루살렘 고난은 아주 나중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지금 예루살렘에 가는 것과 직결된 일인 것이다. 이렇게 진행되는 누가복음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누가복음은 계속해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언급한다(9:51; 10:38; 13:22; 그리고 14:25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회상을 통해 독자가 본문[14:1-24]을 이해하는데 영향을 끼친다).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대립도(11:37-54) 예수의 고난을 암시해 준다. 게다가, 우리의 본문이 시작되기 직전에 예수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임을 다시 한번 강하게 암시해 준다(13:31-35). 그러므로, 독자의 눈에 본문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한 후, 갈릴리 사역은 마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고난받으러 가는 도중에 일어난 일인 것이다. 그 밖에 보다 자세한 전후 문맥과의 관계는 다음에 나오는 내부 지식에 대한 연구나 본문의 해석 혹은 문맥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2. 단위의 확정

 

본문(14:1-24)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과연 우리 본문이 한 단위인지를 살펴보자. 우리는 몇 가지 근거로 누가복음 14:1-24를 하나의 단위로 볼 수 있다. 첫째, 이 문단은 예수가 바리새인 두령의 집에 식사하러 가서 생긴 일들로 구성되어 있어 한 장면에 들어 있다. 둘째, 이 장면은 당대의 심포지움이라는 장르에 잘 맞아 이 문단 전체가 하나의 장르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청하다(καλέω)라는 동사와 만찬혹은 잔치”(δεπνον)라는 명사가 핵심 단어로서 14:1-24를 하나의 문단으로 연결시켜주고 있다. 넷째, 이 문단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이라는 공통된 모습을 가지고 있고, 아울러 7-11, 12-14, 15-24절은 종말론적인 반전이라는 공통된 주제도 가지고 있다. 그밖에도 이 문단 안에 있는 작은 단위들이 서로 연결되는 모습들이 있는데, 이것은 본문의 구조를 살펴볼 때 좀더 자세히 관찰할 것이다.

 

 

III. 누가복음 14:1-24의 구조

 

누가복음 14:1-24의 구조를 살펴봄에 있어, 이 본문에 포함된 작은 문단들의 구조는 본문을 해석할 때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1-24절 전체의 구조만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 문단은 예수가 바리새인 두령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가서, 그 식탁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몇 가지 삽화로 구성되어 있는 문단이다. 그 삽화들을 보면, 안식일 치유 기사, 두 가지 교훈들, 그리고 하나의 비유로 끝나게 된다. 이 문단이 비유로 끝나는 모습을 보면서, 일부 학자들은 비유를 이용하여 삽화들을 주제에 맞게 만드는 것은 누가의 기법이라고 한다. 이런 해석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채택한 해석 방법의 용어로 표현하면, 누가의 저자적 독자는 이 비유를 읽을 때 앞의 삽화들을 비유가 보여주는 메시지의 영향하에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자는 삽화를 읽을 때 나름대로 해석하고 넘어가지만, 비유를 읽을 때 회상의 과정을 통해 삽화들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를 읽을 때 다시 해석하게 되는 이유는 삽화들과 비유의 연관성 때문에 강력한 회상 작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제 각 삽화들간의 연결성과 삽화들이 비유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잠시 살펴보자. 먼저, 첫 기사(14:1-6)는 대화가 일어나게 될 배경을 먼저 보여주고 다음의 작은 세 문단은 대화를 보여주는데, 14:1-6에서 그 식탁 배경에 초대된 손님과 초대받지 못한 불행한 자가 등장하는 모습은 14:1-24 전체의 주제를 암시한다 -- , 14:1-24가 잘못된 가치 기준, 차별, 반전, 등의 주제를 보여줄 것임을 암시한다. 둘째, 14:7-1114:12-14는 문장 구조에 있어 평행을 이루어 독자들이 어떤 연결성을 가지고 읽게 될 뿐 아니라, 14:7-11은 낮은데 처하라는 교훈을 주는 것으로서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14:12-14에서 가르치는 대로 실제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자들을 초청하게끔 준비를 시켜주기 때문에 이 두 문단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셋째, 14:15-24에서 나중에 초대되는 자는 14:12-14에서 예수가 초대하라고 하는 자들과 같으므로 독자는 이 두 문단을 쉽게 연결하게 될 뿐 아니라, 15-24절에서 그런 자들을 초대하는 모습은 12-14절에서 그런 자들을 초대하라는 명령을 강화시켜 준다. 한편, 14절에서 의인의 부활을 말한 것은 15절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다는 주제와 잘 연결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네 개의 작은 문단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IV. 저자적 독자의 지식

 

저자적 독자는 본문을 해석할 때, 자기의 지식에 비추어 본문을 해석하게 된다. 따라서, 저자적 독자의 지식을 확정하는 것은 본문 해석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저자적 독자의 지식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독자의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누가복음 저자적 독자의 기본적인 상황은 대체로 그 독자가 주후 1 세기 말,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팔레스틴 밖)에 산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저자적 독자의 지식은 외부 지식(extratextual repertoire)과 내부 지식(intratextual repertoire)으로 나뉘어질 수 있으나, 특정한 주제에 대한 독자의 지식이 이 두 가지 지식의 결합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주제별로 이 두 지식이 결합되어 독자에게 어떤 지식을 제공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외부 지식과 내부 지식을 별개로 고찰하지 않고 몇 가지 주요 부분에 대한 독자의 종합적인 지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자세한 연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지식은 여기서 다루지 않고 본문을 해석할 때 간략히 검토할 것이다.

 

 

1. 심포지움

 

본문은 그 배경이나 장르에 있어 당대에 널리 퍼진 심포지움과 유사성을 많이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심포지움에 대한 독자의 지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심포지움이란 헬라 세계에 흔한 관습으로서, 여러 사람들이 같이 식사를 한 후에 이부 순서로서 술을 마시며 대화를 하는 것인데 이때 주로 철학적인 대화를 한다. 그리고 그 대화의 주제로는 잔치에 참석하는 자들의 좌석, 예의, 음식, 혹은 친구 만들기 등이 많이 등장한다. 참석 인원들은 잔치의 주인, 지혜로 잘 알려진 주요 손님, 그리고 초대된 손님들로 구성되는데, 손님들은 물론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서 대체로 상류층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보고 듣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초대받지 않은 자들이 참관하는 것에 대한 독자의 외부 지식은 정확히 알기가 어려우므로, 우리는 내부 지식으로부터 독자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알아봄으로써, 독자가 이 식탁 대화의 청중이 어떤 사람들이라고 이해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심포지움과 관련된 세 본문이 있으니, 7:36-50; 11:37-54; 14:1-24이다. 그런데 이 세 본문의 초청주가 다 바리새인이고 주요 손님은 다 예수이다. 그리고, 초대받은 손님들이 누군 지는 분명치 않으나, 11:37-54의 손님들은 명백히 주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그리고 율법사들이다(11:53). 한편, 7:36-5014:1-24의 손님도 대체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임이 암시되어 있다(7:49; 14:1). 더욱이 11:37-54의 손님들이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인들이라는 사실은 독자로 하여금 회상과 내부 지식을 통해, 7:36-5014:1-24에서도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손님들일 것으로 생각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는 14:1-24의 배경을 7:36-5011:37-54의 식탁 대화 모습으로부터 추측해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7:36-50에서는 초대받지 않은 한 죄인 여자가 식탁 대화 장면에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7:39 참조). 그렇다면, 독자는 14장의 식탁 장면에도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참관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14:1에서 부정한 자인 고창병자가 식탁 부근에서 발견된 데서도 지지된다. 더욱 특이한 것은, 11:37-54의 식탁 대화 중에 그 부근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사실이다(12:1). 독자는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누가복음이 지금까지 보여준바 청중이 예수 주위에 모여든 이유는 두 가지이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 또 병이 낫기 위해서(5:15; 6:17; cf. 4:15, 32, 36, 40; 5:1; 7:1; ). 그렇다면, 독자는 12:1에서 무리가 많이 모인 이유 중 하나가 예수의 놀라운 가르침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결국 11:37-54에서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꾸짖으며 교훈한 것을 듣고 혹은 그 소문을 듣고 무리가 모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12:1에서 예수가 무리에게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경계하라고 가르친 내용과도 잘 조화된다. 그래서, 독자는 11:37-54의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식탁 대화가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그 식탁 대화에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참관했을 것으로 보게 할 것이다.

 

누가복음 14:1-24의 식탁 대화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식탁 대화가 끝난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동행하는 모습은(14:25) 역시 이 식탁 대화가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것 같은 인상을 주며, 이런 모습 속에서 독자는 이 식탁 대화에도 초대받지 않은 참관자들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14:25-35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각오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예수를 쉽게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함으로써, 14:15-24의 내용 -- 즉 아무나 하나님 나라에 초대되고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 -- 을 보완해 주는 것을 볼 때, 14:15-24의 청중에는 바리새인들이 아닌 부류의 사람들 특히 14:15-24의 비유에서 마구 초대되는 사람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이므로 더욱 그럴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14:1-24의 배경이 심포지움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그 청중으로는 초청자인 바리새인 두령, 주요 손님 역인 예수, 초대받은 사람들로서 바리새파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로서 바리새인들이 무시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2. 안식일 규정

 

바리새인들은 치명적인 병이 아닌 한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을 금하였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나 가축을 구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당대에도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었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한 사람을 구덩이에서 꺼낼 수 있고, 사람이 물구덩이나 불구덩이에 빠지면 도구를 사용하여서라도 구할 수 있지만, 동물은 구할 수 없다고

한다(CD 11:13-17). 그러나, 탈무드에는 동물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 꺼낼 수 있다는 교훈도 있고, 꺼낼 수는 없고 여물만 줄 수 있다는 교훈도 있다(Shab. 128b). 이런 것들에 대해, 독자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여기서 우리가 독자의 외부 지식을 정확히 규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독자는 내부 지식을 통해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을 금하면서도(6:6-11; 13:10-17),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된다는 예수의 논증에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13:10-17; 14:3-6). 그들이 이렇게 모순된 자세를 가진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탐욕 때문에(11:39) 그들이

자신의 동물을 돌보는데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치는데는 관대하지 못한데 있을 것이다.

 

 

3. 식탁에 관한 규범

 

안식일에 회당의 예배가 끝난 후에 외부 설교자와 다른 손님들을 식사로 초대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된 모습에 잘 맞는다. 독자가 이것을 유대 관습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이해하든지 혹은 내부 지식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이해하든지, 독자는 이것을 아마도 심포지움에 대한 관습과 관련하여 이해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식사의 주요 목적은 사회적 관계를 굳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면 사회적 지위에 손상을 입는다. 그래서, 사회의 지위 수준을 깨뜨리고 같이 식탁을 나눈다는 것은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으나 드문 일이었다. 식사에 있어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은 다른 방에 앉혀지거나 심지어 다른 음식과 술이 제공되기도 했다. 좌석은 차별적으로 준비되고, 사람들은 상좌를 선호하였는데, 이것은 팔레스틴 지역이나, 그레코-로만 세계에서나 다 마찬가지였다. 또한, 자기에게 적합한 좌석 이상의 위치를 요구하는 자는 오히려 모욕을 당하였다. 이러한 사회 관습 속에서 어떤 사람을 식탁에 초대한다는 것은 그를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자기를 그와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보다 비천한 자들을 식탁에 초대함은 그들을 영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그 비천한 자와 동일시함으로써 자기의 동류 즉 친척이나 친구로부터는 소외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대체로 식사에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지혜로운 자들이 초대되었고, 유대 관습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초대되었다. 식사 초대는 대체로 상호 대접의 관습을 가지고 있어, 한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 초대자를 다시 초대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만든다. 이러한 관습 때문에 다시 초대할 책임을 감당키 어려워 초대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초대에 있어서 유대나 로마 사회에서는(특히 상류 계급에서는) 일차로 먼저 초대하고, 나중에 식사 준비가 된 후에 일차 초대를 받아들인 자들을 다시 부른다. 이러한 두 번째 초대를 하지 않는 것은 초대를 받아들인 손님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며 아울러 초대를 취소하는 것과 같고, 또한 두 번째 초대를 거절하는 것도 일차 초대를 받아들여 주인이 다 준비를 하게 한 후에 거절하는 것으로서 주인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한편, 근동에서는 초대받을 때 처음에는 거절하는 것이 예의이다. 이것은 예기치 않은 초대일 때는 더욱 그렇고, 높은 사람의 초대인 경우 낮은 사람들은 더욱더 거절한다. 누가복음의 저자적 독자가 근동 지방의 관습을 잘 알고 있었을 지는 알기 어려우나, 헬라 세계에서도 사회적 지위가 다른 사람들이 같이 식사하는 것은 흔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회적 격차가 클 때에는 초대에 선뜻 응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독자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헬라적 관습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이웃 관계에 있어 상호 교환적 자세이다. , 초대를 받으면 그 응답으로 다시 초대를 해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되는데, 그 부담 때문에 초대를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 또 하나는, 후견인-피보호인(patron-client) 관계로서 예컨대 한 쪽이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면 다른 쪽은 다른 방법으로 그 은혜를 갚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식사를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초대를 응답의 초대로 갚지는 못하더라도, 시장이나 극장에서 그를 높여주는 것으로 갚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근동 지방의 관습이나 헬라 세계의 식사 관습 혹은 상호교환적 자세는 14:23강권하여라는 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밭을 사거나 결혼하였을 때에 대한 관습은 다음에 나오는 인물 이해부분에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4. 인물 이해

 

본문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모든 모습을 다 살펴볼 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인물들의 모습 중 본문 이해에 많은 영향을 미칠 부분을 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본문의 주요 모습으로는 예수와 바리새인의 관계, 안식일 규정에 대한 내용,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문제, 반전(reversal)의 주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어떤 인물들은 관습에 대한 연구만으로 그 인물 이해가 가능하므로, 별도로 연구하지 않기로 한다.

 

. 예수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관계는 대체로 대립과 갈등의 관계이다. 독자는 이것을 외부 지식을 통해서도 알고 있겠지만, 내부 지식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누가복음 6:1-6, 6-11에서는 안식일 논쟁을 통해 그 대립이 심각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무턱대고 배척한 것은 아니다. 그는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7:36-50; 11:37-54). 그러나, 이 장면에서도 예수와 바리새인은 가까운 모습보다는 갈등을 보여주거나(7:44-49), 심지어 그 대립이 더욱 심해진다(11:37-54). 그리고, 본문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헤롯이 해치려 한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며 주의를 환기시켜 준다(13:31-35). 이 마지막 기사는 어떤 모습인가? 이것이 예수 사역을 방해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본문에는 그런 암시가 전혀 없다. 오히려 예수가 바리새인들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바리새인들의 말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방해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했는데, 그들이 그런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예수를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 다른 데로 가게 하는 것이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려는 것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염려해 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충고를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자신의 길을 간다는 말씀과 예루살렘 전체를 꾸짖는 말씀으로 대답한다. 이는 간접적으로 종교지도자들까지 꾸짖는 것이며, 결국 이 삽화는 호의적인 바리새인들에 대해 예수가 비우호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앞에서의 바리새인들의 초대도 반드시 악의의 초대라고 볼 필요는 없다. 일부 호의적인 바리새인이 있었고 예수는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였으나,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교훈이나 관습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으로 그들을 가르쳤으며 그 결과 비우호적이거나 적대감이 증가되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예수는 죄인들과도 가깝게 지냈고 물론 그들의 초대에도 응했다(5:27-29; 7:31-35). 특히, 예수가 죄인의 친구로 불린다는 표현 다음에 바로 예수가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은 기사가 있는 것은(7:31-50), 예수는 누구의 초대도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며 안식일에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할 수 있음을 암시해 주었고(6:5), 또한 안식일에 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며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다(6:6-10; 13:10-17). 예수는 가난한 자와 밀접히 관련된 메시야이고(1:51-53; 4:18-19; 6:20-26; 7:22; 12:32-34; ) 그의 가르침에는 구제의 중요성에 대한 많은 교훈이 있을 뿐 아니라(10:25-37; 11:37-44; 12:13-34), 반전의 주제가 많이 나타난다(1:51-53; 6:20-26; 13:28-30). 그리고, 예수는 죄인들의 초대를 받아들인 정도가 아니라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가깝게 지냈다(5:27-32; 7:31-35, 36-50). 이런 모습들은 14장에서 예수가 어떻게 행동할지 독자가 예측하는 근거가 되며, 과연 예수는 14장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14장은 앞부분에서(1-13) 보여준 예수의 이런 모습을 더욱 확증해주는 역할을 한다.

 

 

. 바리새인의 두령(초대자)

 

독자는 이 사람에 대해 외부 지식으로부터는 이 사람이 바리새인의 지도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백성 중 상류층에 속할 것이고 바리새파의 교훈에 철저한 사람이리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내부 지식으로부터(7:36-50; 13:31-35) 독자는 예수에게 호의적인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므로 이 두령도 예수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독자는 두령이라는 호칭과 내부 지식으로부터(14:12-14) 이 두령이 그 마을에서 유명하고 부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이 식탁이 상류층 사람들의 식사임을 보여준다.

 

 

. 바리새인들(초청받은 사람들)

 

물론 이 초청받은 사람들 중에는 바리새인들 외의 종교적 지도자들이 있었을 것이나, 여기서는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부류의 사람들로 취급되기 때문에(14:3)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그 모든 사람들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하고 살펴보기로 한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준수에 관심이 많은 자들로서(특히 정결법 준수에 관심이 많다[6:2, 7; 7:39; 11:39; 14:13) 그들의 눈에는 예수가 율법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므로 예수를 반대하고 있었다(6:1-11; 11:37-38을 보고, 14:1도 참조하라). 그들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자들이며(11:39) 명예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다(11:43; 14:7). 그들의 탐욕 때문에 그들은 어리석은 자로 불리는데(11:39-40),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것과 아울러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는 것을 암시한다(11:52).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은 악하면서도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고 하는 위선자들이다(11:39). 그들이 자기들의 가축은 안식일에라도 돌보려고 하면서 이웃의 고통은 안식일에 돌보려고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이기적임을 보여준다(14:4-5).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들 중에는 예수에 대해 호의적인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호의적인 자들도 예수와의 대화에서는 결국 우호적인 결과를 얻지 못한다(7:36-50; 13:31-35). 한편, 14:1-24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같은 식탁에 앉지만, 예수의 말에 전혀 답변하지 못하고 훈계만 듣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대적자이면서도 무력하고 부족한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심포지움의 관습을 알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더욱 그렇게 보일 것이다.

 

 

. 구경꾼들

 

이 문단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 장면에는 초대받지 않은 자들(구경꾼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식탁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그 대화를 참관하며 여러 가지를 배우는 자들이다. 그러면, 이 구경꾼들은 어떤 인물이겠는가? 이들 중 하나인 고창병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이 구경꾼들이 바리새인들에게서 소외된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더욱이, 14:25-35에서 이 식탁 대화가 끝난 후에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는 것은 이 무리가 14:1-24의 구경꾼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구경꾼들과 무리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무리란 대체로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의 치유 사역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6:17-18; 11:14), 특히 안식일의 치유도 찬양하는 것을 볼 때(13:17), 무리는 바리새인들과는 대조되는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천한 인물로 보인다. 따라서, 본문의 구경꾼들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또한, 이 문맥의 흐름에서 14:12-14가 무자격한 자들의 초대를 명하고, 14:15-24도 역시 무자격한 자들의 초대를 보여주므로, 하나님 나라의 열려 있음을 보여주는데 반해, 14:25-35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과 아울러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므로, 14:25-35의 역할 중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하여 무자격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쉬운 것으로 오해할까봐 보완을 해주는 것이다. 이 경우, 14:25-35의 청중은 주로 14:12-1414:15-24가 초대하고 있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식탁 대화의 구경꾼들은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누가복음에서 계속하여 복음을 약속받고(4:18-19; 7:22), 또한 위로와 축복을 약속받던 자들이며(1:51-53; 6:20-26을 보고, 16:19-31의 회상을 참고하라), 아울러 예수의 가르침과 이적을 받아들이고 찬양하면서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다(5:3, 15; 6:17-18; 11:14; 12:1; 13:17).

 

. 고창병자

 

고창병은 몸의 공동이나 조직에 물이 차서 부어오르는 병인데, 이 병은 부정하게 여겨졌고 심지어 죄 때문에 징계받은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병자의 인격이나 병의 정도보다 본문 해석에 중요한 것은 이 병자가 어떻게 이 자리에 들어왔느냐일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가 이 병자를 치유한 후에 보냈다는 점에서, 또한 이 병자가 부정하다는 점에서, 그는 초대된 자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 초대되지 않은 이 사람이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덫을 놓기 위해 이 사람을 데려다 놓았을 것이라는 견해와 그가 임의로 들어왔으리라는 견해. 이 중에 그가 임의로 들어왔으리라는 견해가 더욱 그럴듯하다. 이 병자가 부정한 자이기 때문에 초대받지 않았을 것이라면, 바리새인들이 덫을 놓으려고 부정한 자를 데려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이 엿보았다는 것이 그 병자가 덫으로 놓인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겠으나, 그 자리에 초대받지 않은 병자들이 들어와 있었다면, 일부러 데려다 놓지 않아도 바리새인들이 엿볼 상황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독자는 심포지움의 배경이나 혹은 팔레스틴 지역의 배경으로부터, 그리고 또한 내부 지식으로부터 이런 식사 자리에는 초대받지 않은 자들이 들어와서 참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예수를 따라다닌 무리에 대한 내부 지식으로부터(4:40; 6:17; 13:14) 독자는 초대받지 않은 자들 중에 병자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엿보았다는 것이 그 고창병자가 덫으로 그 자리에 와 있게 된 것을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11:37-54에서는 예수가 병을 고쳤기 때문이 아니라, 씻지 않고 식사를 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엿본 것을 꼭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과 연결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만일, 그 자리에 이 고창병자 외에도 병자들이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면, 예수는 왜 이 고창병자만 고쳐주었을까? 먼저, 항상 예수가 따르는 무리들 중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었다고 볼 수는 없다. 무리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도 받으려고 나아왔는데(6:17), 예수는 무리를 고쳐주는 데만이 아니라 가르침에 열중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6:19-49; 8:4-21; 12:1-59). 본문에서 예수가 고창병자를 고친 것은 고창병자가 예수와 맞닥뜨렸기 때문이고, 아울러 예수가 참석자들을 잠잠케 하신 후 계속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주도록 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심포지움의 장르에 잘 맞는다. 그런 의미에서 고창병자는 이 본문에서 안식일 규정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한 역할 외에, 대적을 미리 잠잠케 하고 또한 이 자리에 초대받지 않은 자들이 참관하고 있다는 배경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 잔치 비유의 주인

 

큰 잔치를 배설하였다는 것, 손님들을 두 번 초청한 것, 특히 종을 통해 초청한 것, 손님 중에 부자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초청한 자들이 오지 않자 종을 시켜 많은 사람을 한 차례 데려왔는데도 잔치 자리가 차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주인이 부유한 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 밭을 샀다고 초대를 거부한 자

 

밭을 샀다는 것은 부유한 자임을 암시한다. 아울러 주인이 여러 가지 면에서 부유한 자임에 틀림없으므로 그런 사람에게 초대받은 이 자는 부자이다. 이 자의 관심은 자기 사업에 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밭을 사는 관습에 있어 미리 밭에 대해서는 다 조사를 하고 사는 것이므로 이 변명은 비합리적인 변명이다. 혹시, 이미 거래한 것을 마무리하기 위해 나갈 필요가 있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으나, 부동산 거래란 오랜 시일이 걸리는 것이고 또한 잔치는 오후에 벌어지는 것으로서 굳이 잔치의 참석을 취소하고 지금 부동산 거래의 일을 보러 가야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것이 포도원을 만들고 과실을 먹지 못한 자는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구약의 교훈(신명기 20:6)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독자가 이러한 유대 관습을 알았다 하더라도 전쟁에 나가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 그가 전사할까봐 그러는 것으로서 본 비유처럼 잔치에 가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 사람의 잔치 초대 거부는 초대자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

 

 

. 소를 샀다고 초대를 거부한 자

 

소 다섯 겨리로 그 사람의 경작지 규모를 유추해본다면 이 사람은 상당히 부자임에 틀림없다. 소를 사는 경우에도 철저하게 소의 능력을 알아본 후에 사기 때문에, 이미 소를 사놓은 지금 소를 시험하기 위해 나간다고 하며 두 번째 초대를 거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앞에서 밭을 샀기 때문에 나가는 것은 부동산 거래에 따라 남아 있는 일을 처리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소를 시험하기 위해 나간다고 명시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래서, 이 사람의 거부는 잔치와 초대자의 중요성을 무시한 것이며 초대자에 대한 보다 심각한 모욕이라고 볼 수 있다.

 

 

. 결혼했다고 초대를 거부한 자

 

이 사람의 사회적 위치는 단지 초대자의 지위에 비추어 유추할 수 있는바, 부유한 주인의 초대를 받은 이 사람도 역시 부유한 계층의 사람일 것이다. 당대의 풍습으로 볼 때, 한 마을에서 결혼이라고 하는 큰 잔치가 있는 날 또 다른 큰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이날 결혼한 것이 아니고, 그는 단지 신혼의 시기에 있는 사람일뿐이다. 신명기 20:724:5에 나오는바 남자가 약혼하고 결혼하지 않았으면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나, 결혼하면 1년간 병역 의무가 면제된다는 것도 이 경우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전사의 위험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요, 병역을 이행하러 멀리 여러 날 떠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첫 번째의 초대를 받아들인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잔치 초대 거부도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단지 초대자에 대한 모욕일 뿐이다.

 

 

. 잔치를 채우기 위해 첫 번째로 초대된 자들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인데, 이 명단이 14:12-14의 명단과 같다. 이 명단에 나오는 사람들은 14:12-14에서 부자들이나 사회적 유력자들과 대조되는 사람들이므로 이들은 가난하고 무력한 자들이며,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그러나, 한편 이들은 시내에 거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이들이 완전히 소외된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시내에 거하는 이들은 부자의 초대에 대해 다시 초대하여 갚지는 못한다 해도 다른 방법으로 보답할 가능성이 많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본문이 이들은 되갚지 못할 자이기 때문에 대접받을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갚음을 받느냐 아니냐 보다 대접하는 자의 자세가 보상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이어야 함과, 구제의 대상으로서 되갚지 못할 만큼 어려운 자들을 돕는 것이 참 구제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잔치를 채우기 위해 두 번째로 초대된 자들

 

길과 울타리를 따라 도시벽 밖에 있는 자들은 시내의 가난한 자들보다도 더욱 소외되고 분리된 자들이었다. 사회적 격차 때문에 이들을 부자의 집에 초대하는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강권하여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주요 주제들

 

. 구제

 

독자는 누가복음에서 구제에 대한 많은 교훈을 들어오고 있다. 누가복음 1:51-53은 메시야의 사역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며,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요한도 구제에 대한 과격한 교훈을 줌으로써(3:7-17) 메시야 사역이 어떨 것인지를 예측하게 해 준다. 그리고 예수 자신의 사역에 대한 예고라고 볼 수 있는 4:18-19에서도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 예고는 곧 예수의 다양한 가르침에서(6:20-26; 10:25-37; 11:37-44; 12:13-34) 현실로 나타난다. 특히 내부 지식은 구제가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려준다(3:7-17; 10:25-37; 12:32-34; 그리고 18:18-30은 회상을 통해 이것을 확증해 준다). 더욱이, 부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의무를 일깨워 주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교훈에 있어 예수의 반복되는 주제였다(11:37-41; 그리고 16:14-31에서의 회상을 보라). 그래서, 본문을 읽을 때 독자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는 가운데 읽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부 지식 대문에 본문의 교훈은 축적된 힘을 가지고 독자에게 나타나게 되고, 독자로서는 본문에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를 배우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4:1-4는 가난한 자를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것은 아님을 암시해줌으로써 예수의 가르침을 물질적 가난을 해소하는 주제로 편중되게 인식하려는 오해를 막아주기도 한다.

 

 

. 반전(reversal)

 

누가복음에는 반전의 주제도 계속하여 나타난다. 누가복음 1:51-53은 메시야 사역을 통해 반전이 일어날 것을 보이며, 6:20-26에서는 예수 자신이 반전에 대한 교훈을 준다. 그런데, 예수는 그 사역에서 이 반전을 현세적으로 완성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가르침을 통해 종말론적인 반전을 말하기 때문에(6:20-26; 그리고 16:19-31도 회상을 통해 이런 이해를 지지한다) 독자가 14장을 읽을 때는 현세적인 반전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반전을 염두에 두고 읽게 될 것이다.

 

 

V. 본문 해석

 

우리는 편의상 본문을 네 개의 작은 문단에 따라 해석하기로 한다. 그러나, 각 문단간의 관계와 서로간에 미치는 영향과 역할을 고려함으로써 본문의 통일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본문을 살펴볼 것이다.

 

1. 누가복음 14:1-6

 

이 본문은 새로운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이제 새로운 문단이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장면의 배경을 보면, 바리새인 두령의 집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안식일이라는 시간적 배경에다가 예수가 바리새인들과 식사를 한다는 식탁의 배경이 나타난다. 이러한 배경은 독자로 하여금 어떤 논쟁이 있을 것임을 쉽게 예측하게 만들 것이다. 먼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독자는 이전에도 바리새인의 집에 갔을 때에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7:36-50; 11:37-53) 기억하고 어떤 논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게 된다. 더욱이, 시간이 안식일이라고 하는데 이전에도 안식일에 병을 고침으로써 일어났던 논쟁들을(6:6-11; 13:10-17) 기억하는 독자는 이제 또다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아마도 논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그 배경이 식탁이기 때문에 독자의 내부 지식과(7:36-50; 11:37-54) 외부 지식(심포지움)은 독자로 하여금 본문에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잠잠케하며 어떤 진리를 가르쳐 주는 논쟁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게 할 것이다. 이런 기대는 저희가 엿본다는 표현을 통해 더욱 박진감을 준다.

과연, 예수는 들어가며 곧바로 고창병자를 정면으로 만나게 된다(2). 독자는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예측에 잘 부합되므로 이제 거의 틀림없이 예수가 이 병자를 고칠 것이며 계속하여 어떤 논쟁과 가르침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이 글을 읽게 된다(듣게 된다). 여기까지에서 본문은 독자를 충분히 준비시키며 이제 본문에 나타나는 안식일의 치유 사건과 식탁 논쟁을 독자가 이해하며 따라오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된다. 예수는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여 말한다. 대답하여라는 표현은 예수가 그들이 자기를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역으로 질문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수가 인간(대적자)의 생각을 알고 말하는 것은 7:36-50에 이미 나왔었으므로 독자는 이런 모습을 잘 이해하며 이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한편, 여기서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질문에 자신들이 엿보던 것이 발각된 것을 느끼며 놀라움과 두려움을 경험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그르다고 생각할 것인가? 바리새인들은 원래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데(6:6-11), 13:10-17에서는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을 반대하던 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14장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13장의 사건을 통해 안식일에 병고치는 문제에 대해 인식을 바꾸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14:1에서 그들이 엿본다는 표현과 이어서 예수가 고창병자를 만나고 또한 고쳐주는 것은 그들이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을 여전히 반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병을 고쳐준 후 그들에게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이라고 건져내지 않겠느냐고 질문할 때 그들이 아무 대답도 못하는 모습은 이 사건에서도 바리새인들은 결국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예수의 통찰력에 놀라고 또한 예수의 합리적 질문에 억눌려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 이렇게 이 기사에서 대적자들이 예수의 질문에 두 번이나 답변을 못하고 잠잠했다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이제 예수의 본격적인 가르침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게 해주며, 과연 이 예상은 그대로 이루어진다(14:7이하를 보라).

 

그러면, 고창병든 자를 고쳐주는 것이 우물에 사람이나 동물이 빠진 것에 대응되는 것인가? 만일 독자의 눈에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예수의 비유는 설득력이 없을 것이므로, 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유사성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면, 어떤 유사성인가? 우선, 병을 고쳐준다는 것은 어려움에 빠진 자를 도와준다는 것과 같으므로 우물에 빠진 자를 구해주는 것과 유사성을 가진다. 아울러, 당대의 사회적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병으로 일을 하지 못할 경우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며 아울러 남에게 의존함으로써 사회적 지위에 큰 손상을 입어 인간다운 권위를 상실하기 쉽다. 독자가 이 고창병자의 경제적 형편은 모르나, 그에 대한 아무 기록이 없으므로 일상적인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게 될 때, 이 고창병자는 질병으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경우, 그의 병을 고쳐주는 것은 질병의 고통 뿐 아니라 그의 (아마도 그의 가족까지 포함하여) 경제적 어려움에서 그를 구해주는 것이며 그를 사회적으로 회복시켜주는 의미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더욱이, 고창병은 부정한 것이므로 그 병을 고쳐주는 것은 사회에서 소외된 이 병자를 공동체 안에 회복시켜주는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보면, 비록 고창병이 당장 죽을 병은 아니라 하더라도, 고창병자의 병을 고쳐주는 것은 당장 구해줘야 할 어려움에 빠진 사람이나 동물을 구해주는 것과 비슷한 긴급성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병자에게 있어서는 병이 낫는 것이 오늘 일어나도 되고 내일 일어나도 되는 느긋한 일이 아니라 몹시도 긴급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논증은 바리새인들이 반박할 수 없는 합리적인 것이며, 독자도 이것을 잘 인지하는 가운데 이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준 사건 자체는 바리새인들이 중시하는 안식일 규례를 깨뜨린 것인데, 독자는 여기에서 세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6:1-5에서 이미 알고 있는대로 예수가 안식일에도 주인이라는 기독론적인 교훈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고; 두 번째 것은 6:6-11에서 본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안식일을 지키는 바른 자세를 다시 배우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이 고창병자를 고치는 것에 반대한 것은 바리새인들의 사랑 결핍이 함축되어 있다. 예수가 사람들이 자기의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구할 것이라고 한 말은 고창병자를 자기와 관련된 존재로 받아들이고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사랑 결핍에 대한 경책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론적 교훈과 안식일에 선을 행하라는 이 두 가지는 누가복음을 통해 반복되는 것으로서 앞에서 익혔던 내용을 재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메시지를 주는 데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이미 배운 메시지를 반복이라는 문학 기법을 통해 독자에게 더욱 강하게 심어주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반복 기법은 이야기글을 읽어나가는 중에 독자를 설득시키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편, 바리새인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지키려 하고 또 그것을 어기는 자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는 것과(6:1-5, 6-11을 보고, 13:10-17을 참조하라) 부정한 자들이나 죄인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려고 하는 것은(7:31-35, 36-50) 그들이 이런 것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고 또 배타적으로 자신들의 결속을 도모하는 것을 보여준다. 본문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본문에서 예수가 안식일임에도 고창병자를 고쳐준 것은 바리새인들의 배타적인 결속 자체를 파괴시킨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이 독자가 본문에서 느낄 수 있는 세 번째 의미인 것이다. 이 세 번째 의미는 이런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다음 문단들을(14:7-11, 12-14, 15-24) 위해 독자를 예비시켜 주며, 한편 다음 문단들은 이 문단(14:1-6)에 암시된 이런 내용을 회상을 통해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는다.

 

 

2. 누가복음 14:7-11

 

이제 본문에는 독자의 예상대로 예수의 교훈이 나타난다. 독자는 내부 지식을 통한 인물 이해로부터 초청된 자들이 탐욕스럽고 명예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라는 것을 아는데(11:37-44), 과연 명예에 관심이 많은 그들은 식탁의 좌석이 신분을 드러낸다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서로 상석을 차지하려고 한다. 메시야의 사역이 교만한 자를 내려뜨리는 것이며(1:52) 많은 사람을 패하게 하는 것이기(2:34) 때문에, 그리고 예수가 바로 앞에서도 바리새인들이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에(11:42-44) 독자는 예수가 이들에 대해 어떤 교훈을 줄지 짐작할 수 있으며, 과연 예수는 명예를 추구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경책한다. 그런데, 이 문단에 나오는 비유적 성격은 명예 추구를 꾸짖는 이 교훈이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에 대한 교훈임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은 종말론적인 보상을 보임으로써 예수가 가르치는 겸손의 삶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항상 견지해야할 태도로서 세상의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아울러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낮은 좌석으로 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더 높아지려는 목적으로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낮은 자리로 간다는 것은 낮은 부류의 사람과 동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교훈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세상 명예에 대한 욕구를 극복하고 낮은 자리로 가라는 혹은 낮은 사람들과 교제하는 삶을 살으라는 교훈인 것이다.

 

이 교훈은 하나님이 낮은 자들을 높여준다는 내부 지식과(1:51-53; 6:20-26) 잘 부합되므로 독자는 이런 메시지를 이 본문에서 잘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본문의 메시지는 16:19-31에서 회상을 통해 다시 확증된다. 이런 반복기법과 회상을 통해 본문의 이 메시지는 독자에게 강한 교훈이 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자기가 높아지려고 하는 이기적인 자세는 낮은 자를 무시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므로 그렇게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자는 결코 비천한 자와 같이 앉을 수 없고, 물론 그런 자들을 식탁에 초대할 수도 없다. , 사람은 스스로를 낮출 수 있을 때, 낮은 자들을 초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14:7-11의 교훈은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만 상종하지 말고 더 낮은 자들을 초대하고 사귀고 돌보라는 14:12-14의 교훈을 예비해 주는 역할도 한다. 또한 14:7-11에 함축되어 있는 종말론적인 보상에 대한 주제도 14:7-1114:12-14와 연결시켜 주고 있다.

 

 

3. 누가복음 14:12-14

 

독자는 앞 문단(14:7-11)의 세상 높은 자리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교훈과 가난하고 어려운 자를 도와줘야 한다는 반복적인 교훈(3:7-17; 4:18-19; 10:25-37; 12:13-34)을 통해 14:12-14의 교훈을 잘 이해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 초대해야 하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과 부정한 자들로서 소외된 자들이다. 앞 문단에서 낮은 부류의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해야 한다는 교훈을 알고 있으므로, 이 문단의 교훈도 우선 그런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은 비천한 자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경제적인 장벽도 넘어야 하고 정결법의 장벽도 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 정결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아는 독자는 이 교훈이 결국 사람은 자기의 신조를 버리면서까지 소외된 자를 영접하여야 한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본문이 되갚지 못할 자를 초대하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본문이 더욱 강조하는 것은 신조나 관습의 차이보다 경제적인 차이에서 나오는 계층의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대인들은 주로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 식사를 하고 초대를 하는데, 그 목적은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끼리의 결속을 강화하고 자기들의 지배적 지위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결국, 본문의 교훈은 세상에서의 모든 이기적 욕심을 극복하고 자기에게 아무런 보상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자리를 같이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보상이란, 단순히 식사를 다시 대접받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 종교적 지위, 종교적 신조 등을 지켜나가거나 강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독자는 누가복음을 읽어오면서 구제에 대한 많은 내부 지식을 축적하고 있다. 이러한 독자에게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잔치에 초대하라고 하는 교훈은 본문이 구제에 대한 교훈임을 쉽게 느끼게 해줄 것이다. 이것은 내세에서의 보상 약속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독자는 내세에서의 보상이 구제와 관련된 내부 지식을 가지고 있고(12:32-34) 또한 회상을 통해 구제와 내세의 보상과의 관계가 다시 확증되기 때문이다(16:1-31).

 

여기서 독자가 이 장면의 배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본문을 읽겠는지 잠깐 살펴보자. 앞에서 본대로 이 장면에는 초대받지 못한 자들이 있다. 이 주인이 상류층의 사람들만 있는 자리에서 이런 교훈을 받는 것과 초대받지 못한 가난하고 장애인인 이들이 많이 주위에 있는 자리에서 이런 교훈을 받는 것과는 주인이 경험하는 교훈의 힘이 다를 것이다. 독자는 이것을 느끼며 이 교훈의 내용만이 아니라 힘도 아울러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식탁 주위에 상류층의 사람만 있기 때문에 주인이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지 않은 것이 드러나서 이런 교훈을 듣는 것과,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이 초대받지 못해 식탁에는 앉지 못한 채 주위에서 이 식탁 대화를 듣고 있는 중에 이런 교훈을 받는 것과는 그 상황이 너무 다른 것이다. 이런 배경은 이 교훈을 더욱 강하고 과격하게 만든다.

 

여기에 초대된 손님들도 주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교훈은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손님들에게도 같은 메시지를 전해준다. 한편, 이 교훈을 듣고 있는 초대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 교훈이 그대로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되는 복음이 되는 것이다(4:18-197:22 참조). 이렇게 바리새인들에게는 경책의 교훈을 주고 비천한 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해주는 것은 나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모습의(14:25) 준비가 된다 -- 독자는 내부 지식을(7:36-8:3; 11:17-12:1) 통해 14:12-14의 이러한 요소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게 한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이 교훈은 종말론적인 보상을 약속함으로써 이 문단(12-14)의 교훈을 강화시켜줄 뿐 아니라, 이 문단으로 하여금 종말론적인 색채를 띠게 해준다. 이 문단이 가지고 있는 종말론적인 주제는 다음 문단(14:15-24)의 첫 발의를(14:15) 야기시키며, 따라서 12-14절 문단은 부드럽게 15-24절 문단과 이어진다.

 

 

4. 누가복음 14:15-24

 

이 문단을 해석하기 전에 결정해야 될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이 문단에 나오는 비유의 범위이다. 비유의 범위는 24절의 가 누구이냐에 결정적으로 달려있다. 그러면, 24절의 는 누구인가, 비유의 주인인가, 예수인가? 어떤 학자들은 이 를 예수로 보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비유에서 주인의 말을 듣고 일을 해오던 자는 한 명의 종으로서 만일 주인이 종에게 말하는 것이라면 이 말을 듣는 자가 단수(“”)여야 하는데, 본문에서는 복수(“너희”)이므로 는 비유의 주인이 아니다; 2) 주인이 오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어색하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24절의 가 비유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 주인의 말을 듣는 자들이 복수인 것은 주인의 말을 듣는 자들은 종만이 아니라 종과 종이 불러 모은 첫 번째 무리 즉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이들이 종과 함께 있을 것이다)이기 때문이며, 또 초대를 거절한 자들이 음식을 맛보지 못하리라는 것은 당대에 초대받았으나 오지 못한 자들에게 주인이 잔치 음식을 보내는 관습이 있으므로 주인이 그들에게 그런 음식을 보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면 이야기 흐름에 맞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자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우선, 15절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 그는 그 말을 예수에게 한다. 그리고 16절에서 예수는 그에게(단수) 이 비유를 말해 준다. 그러다가 24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할 때에는 그 청중이 복수가 된다. 여기서, 이 청중(“너희”)은 주인의 청중이어도 부자연스럽지만, 예수의 청중이어도 똑같이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주인의 종도 처음에는 단수였고, 예수가 비유를 말해주는 자도 처음에는 단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라는 단어가 예수의 청중에게나 주인의 청중에게나 다 잘 맞지 않으면, 독자는 틈 메우기를 통해 어느 하나에 더 맞게 해석해야 하는데, 독자는 너희라는 단어 이외의 다른 모습에서는 어느 견해가 더 타당한지를 판단하여 거기에 맞게 너희가 누구인지를 해석할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가 자기 청중에게 비유의 등장인물들이 예수의 잔치를 맛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야기 등급에 잘 맞지 않는다. 이야기 등급을 보면, 예수와 예수의 청중은 두 번째 등급에 속해 있고, 잔치 초대를 거부한 자들과 주인은 세 번째 등급에 속해 있으므로, 그 잔치 초대 거부자들이 주인의 잔치를 맛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이어야 이야기 등급에 잘 맞는다. 따라서, 이것은 주인이 그 종(과 어떤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면 주인이 초대 거부자들이 그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 베일리는 비유의 주인이 초대 거부자들에게서 모욕을 당했기 때문에 음식을 보내지 않을 것이므로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아무리 초대를 거부당하고 화가 났어도 주인의 입장에서 그들과의 계속적인 사귐이 필요하여 저자세로 그들을 대해야 할 입장이라면 음식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주인의 입장을 분명히 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주인은 이제 그들과의 친교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는 그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오겠다고 하여도 기회가 없다. 24절로 인하여 이 비유는 그들이 주인의 초대를 거부하였기에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해 잔치에 참여하지 않게 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주인의 입장에서 그들을 잔치에서 완전히 제외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자유의지로 오지 않는 자가 아니라 주인에 의해 배척되어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24절은 비유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독자가 비유를 이렇게 이해할 경우 너희라는 말은 종과 그와 함께 있는 어떤 무리를 가리킬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처음 불려온 사람들을(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 주인이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만일 주인이 그들을 보고 있다면 주인은 잔치 자리가 남은 것을 알 것이고 종이 주인에게 그런 보고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주인은 잔치 자리에서 떨어진 어떤 위치에 종과 함께 있는 것 같다. 더욱이 주인이 처음 보는 사람들(처음 불러온 사람들)을 자기 종과 한 무리로 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따라서, 독자는 아마도 너희를 종과 같이 심부름 다니던 종의 사역자들 혹은 동역자들로 볼 것 같다.

이제 이 문단의 내용을 살펴보면, 잔치 참여자 중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은 그 앞에 나오는 의인들의 부활이라는 내용에서 영감을 받은 말로 보인다. 그래서 이 문단은 앞 문단과 아주 잘 연결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것은 13:28-29의 내용을 알고 있는 독자로서는 내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에게 예수는 한 비유로 답변해 준다.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그 초대를 거부하는 자가 있고, 오히려 무자격한 자들로서 부름을 받아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초대를 거부하는 자는 그 잔치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을 위해 혹은 비합리적인 핑계를 대며 이 잔치를 거부한다. 그래서, 주인은 초대를 거부한 자들을 완전히 배척하고, 그 잔치에 무자격한 자들을 초청하게 될 것이다. 특히, 무자격한 자들의 초청에 있어 근방의 소외된 자들을 일차로 하고(14:21) 다음으로는 여러 모로 더욱 먼 자들을 불러오게 함으로써(14:23) 독자가 이 비유를 하나님 나라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도 열려 있는 것이고 아울러 완전히 격리된 듯한 자들도 불러모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가 근방의 소외된 자들을 일차로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예수가(4:18-19; 11:20) 계속하여 이스라엘 내의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을 부른 모습을(5:27-32; 7:31-35) 암시하는 것으로 독자에게 보일 것이고, 많이 격리된 자들을 강권한다는 것은(14:23) 이미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알고 있을 독자에게는 이방인 선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더욱이 독자는 이방인 구원의 주제를 내부 지식으로부터 알고 있으므로(13:28-30) 이 비유에서 그런 주제를 쉽게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원래 초대된 자들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소외된 자들이 나중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복되다고 말하였던 사람에게는 큰 충격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자로서 비유의 초대를 받은 자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교훈은 초청자를 비롯하여 다른 모든 손님들에게도 거북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독자는 내부 지식을 통해 부유한 자들이 부에 만족하여서(6:24-26) 혹은 재물의 문제에 얽매여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8:14; 12:13-34)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도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3:7-17), 독자는 이 비유가 이 비유의 청중인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지금 그들이 누리고 있는 세속적인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며 동시에 그들이 먼저 초대된 특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만일 그들이 이 초대를 거절하면 그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권리를 박탈당할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독자는 예수가 계속하여 복음을 선포해 왔다는 것과(4:18-19; 6:20-23; 7:22) 이 비유에서 비천한 자들이 초대받는 모습을 통해 이 비유가 이 식탁에 초대받지 못한 참관자들에게 또 하나의 복음 선포가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비유의 이런 모습은 수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가는 다음 구절의 모습과 연결될 때, 그들이 예수를 따른 이유를 짐작케 해준다 -- , 예수가 소외된 자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기 때문에 소외된 자들은 예수를 즐겨 좇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임하는 복음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주는 경고가 14:15-24의 주요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초대라고 볼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소외된 자들을 초대하는 것은 회상을 통해 14:12-14의 교훈을 강화시켜 준다. 하나님께서도 소외된 인간들을 초대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소외된 자들, 특히 갚을 능력이 없는 어려운 자들을 초대하도록 격려 받는 것이다. 동시에 이 비유는 하나님의 구원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은혜임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자기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본받아 어떻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초대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14:1-6에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중에 자기들의 분리된 삶과 배타적인 결속력을 추구하는 것은 그들의 높은 지위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것은 14:7-11에서 바리새인들이 높은 자리를 찾는 것과 상통한다. 그래서, 14:1-6에서 예수가 바리새인들의 배타적 결속력과 자기들의 권위 유지의 한 근거를(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규정) 파괴시킨 것은 14:7-11에서 낮은데 처하게끔 교훈하는 것을 예비하게 만들고, 14:7-11에서 낮은데 처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14:12-14에서 낮은 자들을 청하도록 교훈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결국, 14:1-14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높은 것을 추구하는데서 벗어나, 낮은데 처하고 낮은 자들과 함께 하라는 교훈을 강화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은 14:15-24에서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던 자들이 초대를 거절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천국 잔치의 초대가 이루어지며 그들은 그 초대를 받아들인다는 교훈과 연결되어, 14:1-14에서 낮은데 처하고 낮은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배운 자들이 실제로 하나님 나라에 초대되고 또한 그들만이 그 초청을 (겸손히)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14:1-14는 이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이면서 동시에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시켜주는 교훈도 된다.

 

 

VI. 문맥과의 관계

 

우리가 연구하는 본문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문맥이 본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와 또한 본문이 그 문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해석할 때 독자의 독서과정에 나타나는 내부 지식이나 회상의 역할을 고려하면서 이미 여러 문맥들이 본문에 미치는 역할을 살펴봤기 때문에, 여기서는 특별히 영향을 많이 미칠 수밖에 없는 인접 문맥이 본문 이해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고, 본문이 계속되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그 문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또 발전해나아가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인접 문맥

 

. 누가복음 13:22-35

 

이 문단은 그 첫 부분에 예수의 예루살렘 여행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있어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문단의 시작임을 보여줄 뿐 아니라, 14:1에서 장면이 바뀌기 직전의 장면이다. 그래서 이 문단은 우리가 연구하는 본문의 직전 문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단에는 몇 가지 주제가 등장한다. 1) 구원 얻으려는 자들이 많지만 실제로 구원 얻는 자는 적을 것이라고 하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2) 문이 한 번 닫히면 다시는 열어주지 않는다. 3) 주님과 같이 먹고 마셨고 주님으로부터 배웠다고 하는 자들이 행악하는 자라고하여 배척된다. 4) 사람들이 동서로부터 와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나 유대인들은 배척당할 것이며, 따라서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될 자가 많을 것이다. 5) 바리새인들의 호의와 예수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 있다. 6) 예루살렘의 죄악과 그로 인한 징계를 보여주는데, 특히 예루살렘이 주의 이름으로 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죄가 언급되어 있다.

이 문단은 14:1-24와 거리적으로 가까운 것 말고도 주제에 있어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연구할 본문 이해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 들어가기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14:12-14에서 사회 관습을 어기고 자기를 자기의 동료로부터는 소외시키며 아울러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초청해야 하는 그 어려운 교훈을 따르도록 독자를 준비시킨다. 문이 한 번 닫히면 다시는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14:15-24에서 처음 초대를 거부하였던 자들에게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내용을 예상하게 하며 또한 그런 내용이 실제로 나올 때(14:24) 그것을 강화시켜 준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으며 배웠는데도 행악한다고 하여 배척되는 것은 14:1-24에서 주님과 같이 먹고 마시고 배운 바리새인들이 악을 행한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경우 바리새인들은 무슨 악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인가? 그들이 자기를 높이려 하고 높은 자들만 상대하려 하는 것이(14:1-14)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멀게 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초청을 거부하는 것이(14:15-24) 주인을 모독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하는 것이니, 이런 모습이 우선 심각한 악이라 할 것이다. 한편, 다른 문단들에서는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 특히 죄인들도 예수와 같이 먹고 마셨으며 예수로부터 배웠다. 그렇다면, 그들도 만일 행악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14:15-24의 비유에서 비천한 자들이 쉽게 구원을 얻으리라고 생각할 것에 대해 미리 주는 경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것이고 유대인들은 배척당할 것이라는 구절은(13:28-30) 14:15-24에서 처음 초청받은 자들이 구원에서 제외되고 나중에 초청받는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될 때, 이 나중에 초청 받는 자들 중에는 이방인들이 있을 것임을 예상하게 해준다. 이 경우, 더 많이 격리된 데서 강권함을 받는 자들은(14:23) 이방인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누가복음 13:22-35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호의는 바리새인 두령의 초대를(14:1)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게 만들어 준다. 아울러, 예수의 고난에 대한 예언은 예수를 죽이려 하는 바리새인들과의 어떤 대립을 예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14:1-24에는 과히 심각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 같으며, 오히려 예수의 고난에 대한 내용은 14:25-35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예루살렘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심각한 잘못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14:15-24의 하나님 나라 초대에 함축된 예수의 부름에 응답치 않는 문제점을 독자가 바르게 이해하도록 예비시켜 준다. 이와 같이 13:22-3514:1-24의 인접 문맥으로서 14:1-24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14:25-35

 

이 문단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주로 가르친다. 이 교훈은 아무나 와도 좋다는 것을 보여주는 14:15-24의 교훈을 수정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의 초청은 소외된 자들을 비롯하여 모두에게 주어지지만, 일단 예수를 따르려는 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 고난의 길인 것을 알고(14:27) 자신을 돌아보아 정말 예수를 계속하여 따를 수 있을 것인지를 확인하고 결단한 후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점에서 이 문단은 예수를 따라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부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14:15-24를 보완하여, 비록 예수가 누구든지 -- 특히 죄인들과 소외된 자들 -- 은혜로 초청하여 구원을 얻게 해주지만, 예수를 따라 구원에 이르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노력의 신앙생활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나, 14:15-24는 은혜의 부름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부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에, 14:25-35는 세상에서 자기 주변 인물들을 미워하고 재물을 버리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 가난하고 소외되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14:25-35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은 결과적으로 14:15-24에서 초대받는 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된다. 이 경우, 14:25-3514:15-24의 교훈을 한편으로는 구원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도록 수정 보완해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겸손하고 낮은데 처해야 한다는 주제를 강화시켜주기도 한다. 이렇게 14:25-35소외된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주제가 나타난다고 보는 해석은, 이야기의 흐름에서 14:25-35의 결단을 촉구하는 교훈이 있은 다음에 실제로 세상에서 소외받는 자들이 예수에게 가까이 나아오는 모습에서(15:1)도 지지된다. 결국, 14:1-24가 한편으로는, 부유하고 높아지려는 자들에 대해서 낮아져야 하며 낮은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교훈하는데 -- 특히 낮은 자세로 하나님 나라의 초청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데 -- 14:25-35는 이 교훈을 강화시켜주는 것이다. , 부유하고 높은 자들, 그리고 동류들과의 결속에서 안전을 찾으려 하는 자들에게 이웃으로부터 소외당할 각오를 하고 모든 재물을 버릴 각오를 하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고 계속적으로 교훈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4:15-24에서 초청을 거부하는 자는 자기의 이권을 사랑하는 자로서 14;25-35의 결단을 하지 않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4:15-24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은혜로 초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렇게 초대받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14:25-35는 예수를 따르는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어떤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은혜로 초청 받아도 구원을 쉽게 생각하지 말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4:25-3514:12-14의 교훈을 아주 강화시켜 준다. 왜냐하면, 14:12-14가 자기 친척들로부터의 소외를 각오하라는 것과 재정적인 유익을 포기하고 재물을 사용하라는 것을 가르쳐주는데, 14:25-35도 바로 소외를 당하고 재물을 포기하여야 예수를 따를 수 있다고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결국, 14:25-35의 문맥에서 14:12-14는 독자에게 자기 가족의 안일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이웃의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게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14:25-3514:7-11의 교훈 즉 낮고 겸손한 삶의 필요성에 대한 교훈과 14:1-6에서 자기들의 규례나 신조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도 강화시켜 준다. 어떻게 보면 14:1-24의 주요 메시지는 이기심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인데 14:25-35는 그 교훈을 강화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2. 누가복음 14:1-24의 주제가 누가복음 이야기의 흐름에서 어떻게 발전되는가?

 

누가복음 15:1-2는 영적 소외자에 대한 관심도 보여줌으로써 육체적 소외자를 대접해야 함을 가르치는 14:12-14의 주제를 보완해 준다. 사실, 영적 소외자에 대한 것은 14:1-614:15-24에 암시되어 있는 주제인데 15:1-2에서 보다 명백하게 다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5:1-2는 예수가 소외된 자들을 대접한다는 점에서 14:1-24가 가르쳐주는바 제자들이 소외된 자들을 대접해야 한다는 교훈과(14:1-14) 예수가 소외된 자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한다는 내용을(14:15-24) 강화해주고 확증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 15:3-7, 8-10은 독자가 14:12-14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친구는 잔치에 초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15:30도 소외된 자를 받아들이는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14:12-14, 15-24의 내용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누가복음 16장은 인간의 책임 문제를 특히 재물 사용과 관련하여 가르쳐 주고 있다. 독자는 14:1-24에 나오는 낮아지는 주제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주제가 16장을 통해 더욱 강화되고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6:19-31)14:12-14의 보다 구체적인 예시라고 볼 수 있다. 땅의 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초대를 거절한 모습은(14:15-24) 누가복음 17:26-30에서 땅의 일로 하늘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못하고 망하게 되는 인간의 모습에서 다시 드러나는데, 그 교훈이 보다 구체적이며 위협적으로 나타나고 아울러 반복됨으로써 강조된다. 누가복음 14:12-14에서 강조되었던 구제의 중요성은 부자 관원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18:18-30)에서 더욱 강한 어조로 반복되며 나타나고, 이것은 다시 삭개오 기사(19:1-10)에서 보완 발전된다. 그 이후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의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은 14:1-6에 함축된 긴장과 대립이 현실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야기 흐름을 통해 14:1-24의 주제들은 현실화되거나 강화되며 발전되고 또한 가끔은 잘못 해석되지 않도록 보완되면서 독자가 누가복음을 다 읽었을 때, 14:1-24의 메시지는 더욱 보완되고 강화된 메시지로 독자의 뇌리에 남게 되는 것이다.

 

 

VII. 맺는 말

 

우리는 누가복음의 저자가 누가복음을 쓸 때 염두에 둔 독자가 누가복음을 읽으며 이해하는 것이 누가복음의 가장 적절한 해석이라는 전제하에, 누가복음 14:1-24를 저자적 독자의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누가복음 14:1-24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14:1-24는 네 개의 작은 문단들이 결합되어 하나의 큰 단위를 형성하고 있는데, 14:1-24 전체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있은 식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독자는 아마도 이것을 심포지움의 배경 속에 읽을 것으로 생각된다. 독자는 이러한 배경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사회 관습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본문을 읽을 것이다. 또한, 독자는 누가복음을 하나의 통일된 글로 볼 것이므로 본문을 누가복음의 구성, 인물이해, 문학적 기법, 등을 고려하며 해석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14:1-6에서 먼저 안식일 규정에 대한 교훈을 줄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파괴하고 오히려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암시를 준다. 아울러 14:1-6은 바리새인들을 잠잠케 함으로써 독자가 심포지움 장르에 따라 예수의 본격적인 교훈이 나오기를 고대하게 한다.

 

누가복음 14:7-11에서 예수는 본격적으로 식탁에 앉은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는데, 여기서는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자세를 꾸짖고 낮은데 처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이는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바리새인들을 꾸짖은 14:1-6에 함축된 교훈을 보다 구체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며, 아울러 이 교훈은 다음에 나오는 교훈, 즉 비천한 자들을 초대하라는 교훈을(14:12-14) 받아들일 준비를 시켜 준다. 왜냐하면, 자기가 낮은데 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는 낮은 자들을 초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낮은 자들과 함께 하라는 교훈인 14:12-14는 낮은데 처하라는 14:7-11의 교훈을 강화시켜주는 동시에, 14:7-11에 함축된 종말론적인 모습을 명백하게 드러냄으로써 14:7-11, 12-14에 나오는 교훈들을 강화시켜 주고 있다. 누가복음 14:12-14에 나타난 종말론적인 모습은 식탁에 앉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을 하게 함으로써 14:15-24의 교훈을 유발시키며, 아울러 14:12-1414:15-24의 연관성을 독자가 이해하게 돕는다. 누가복음 14:15-24는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자기의 세상적 목표를 추구하는 중에 하나님 나라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을 경고함으로써, 사람들이 14:1-14에 나오는바 낮은 자들과 함께 하라는 교훈을 반대하여 높아지려 하고 세상적 목표를 추구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를 주게 된다. 사실, 이것은 14:12-14에서 낮은 자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이 없다는 교훈에도 함축되어 있으므로 독자는 14:15-24에서 이런 교훈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4:15-24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초대받아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14:1-14가 가르쳐준바 사람들은 낮은 자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같아져야 한다는 교훈을 강화시켜 준다. , 자신이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과 같이 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초대도 받게 되지만, 아울러 그런 자들이 그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여 결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4:1-24는 네 개의 작은 문단 각각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주기도 하지만, 이 네 문단은 통일성 있는 하나의 문단으로서 세상적 지위를 추구하거나 그 지위를 유지 강화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낮은데 처하며, 낮은 자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을 영접하고 대접하며, 그런 겸손한 자세로 예수의 초청을 받아들여야 종말론적인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주요 메시지로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들은 그 전 문단인 13:22-35에서 암시되며 준비된 것이고, 아울러 바로 다음 문단인 14:25-35에서도 강화된다. , 14:25-35는 사람들이 14:15-24의 교훈을 죄지으면서도 쉽게 구원을 얻는다는 교훈으로 오해할 가능성에 대비해 그런 오해를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14:1-24에 나오는 여러 가지 주요 메시지들은 누가복음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모습으로 반복되며 발전되어 누가복음 전체를 통해 그 가르침들이 독자에게 바르게 이해될 뿐 아니라 힘있는 메시지로 독자에게 전달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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