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예수의 제자들인가 / 이한수
제1장 예수를 좇는 사람들
제자라는 헬라어는 상거래 방법이나 수공업 기술을 익히는 사람, 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문자적인 순교 행위를 뜻하지 않는다. 날마다 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십자가를 지는 일은 제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늘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모든 영역을 말한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재다. 하나님 나라는 처음에는 작은 겨자씨와 같다. 아무도 그것의 존재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눈에 보이는 실재로 경험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예수께서 고난당하는 인자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일아야 하고,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여 죄를 짓느니 차라리 자신의 눈이라도 뺄 것처럼 굳은 결심을 내려야 한다.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고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지 않아야 하며 필요할 때 자신의 부와 옛 인간관계를 끊어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남들보다 높아져 그들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도리어 섬기는 종의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자들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나라이기 때문에 천국의 구성원이 되려면 예수의 인격과 교훈에 헌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나라는 회개하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그가 은총의 선물로 주신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회개와 구원의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다.
열두 제자들은 역사적인 예수와 후대의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소유할 수 없는 독특하고 유일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예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그와 함께 팔레스틴 지방의 이곳저곳으로 전도 여행을 하였으며, 마침내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형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사실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마가는 분명히 그들이 예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증인들로서 역사적으로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 자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 독특한 역할 때문에 열두 제자들은 교회의 복음 선포와 신앙의 터를 닦아 놓은 자들이 되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없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의 제자들도 아니고 예수를 좇지도 않으면서 그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이상한 사람이 있다. 에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사람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근거를 다음의 세 구절을 통해 말씀하셨다. 첫 번째로 예수께서는 관용해야 할 실천적 이유를 인간들의 일반적인 경험에서 끌어온다. 두 번째로는 관용해야 할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제시된다.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그를 위하는 사람이다. 더욱이 예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 더 적극적으로 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권면하신다.
겉으로는 예수를 따르면서도 아무런 영적 권세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귀신의 세력을 제어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을 맛보는 자들이 제자들임에도 그들에게 본래 주어져 있는 권세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오늘 우리 시대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복음의 말씀이 힘있게 전파될 때 거기에 하나님나라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날 것이다.
2장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는 삼 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자신이 누구며 또 어떤 일을 하러 왔는지 보여 주었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과 행위들은 모두 그의 인격과 사역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창문과도 같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있는 특권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많은 기적을 직접 목격했고 계시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제자들의 반응은 참으로 놀랍다. 그들은 한결같이 무지했다.
예수는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내가 메시아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하시는 말은 메시아가 아니라 인자 였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유대 백성이 생각하는 그런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는 명백한 메시아 칭호인 그리스도를 사용하기보다 인자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메시아 칭호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부정하기 보다는 메시아 개념과 관련하여 그의 청중들과 제자들을 재교육 하려고 하셨다. 예수께서 현재 담당하신 메시아직, 즉 고난당하는 여호와 종의 역할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영광의 직책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 대부분은 군중 가운데 사람의 아들로 계실 뿐인 예수를 도데체 메시아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섬기는 종의 형상을 지닌 예수께서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식할 수 있다. 영적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은 여러 기적을 베푸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없다. 오직 분별력을 가진 자들만이 기적들 배후에 계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요단강에서 나오실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라"는 음성이 들렸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마귀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이후 돌아오셔서 두루 다니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로 부르시면서도 자신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셨고 실제로 그 권세들을 나타내셨다. 그 첫 번째가 죄를 사하는 권세이고 두 번째는 안식의 주인으로서의 권세이다. 세 번째 권세는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주도 되신다. 주라는 말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한 칭호다. 마가복음에서는 이처럼 구약적인 배경을 지닌 칭호를 예수 자신에게 적용한 구절이 있다. 예수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주셨다. 그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주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논증하셨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채고 고백한 경우는 세 번 나온다. 두 번은 귀신이 예수의 신분을 알아채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른 일이고, 나머지 한 번은 이방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고 운명하시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라고 고백한 일이다.
과연 예수는 어떤 분인가? 그는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인자로 계셨지만, 사실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굶주려 찾아오는 이들에게 언제나 푸근한 사람으로 대하시는 예수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유의 주이시다. 하나님 자신의 권세를 지니신 분이 지금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먹고 마시며 대화하신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스스로 낮아지셔서 죄인들과 함께 앉아 계신다.
3. 표적인가 신앙인가
복음서에는 예수의 이적이 많이 나온다. 이런 이적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기적이나 표적을 행하신 목적은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신의 인격의 참됨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표적을 통하여 하나 알 수 있는 교훈이 있다. 이는 곧 신앙이 있을 때만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표적 자체가 아니라 기적들 배후에 있는 예수의 인격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믿음을 가지고 접근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기꺼이 증거를 주시고자 하셨음을 알 수 있다. 마가는 청중들이 예수의 인격과 메시지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반대하려는 불신의 자세가 보이는 자리에서 표적과 기적들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를 보여 주고자 한다.
마가는 기사와 능력을 예수의 신적인 권위를 논증하는 객관적인 증거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능력을 행하신 것이 아니었다. 능력은 먼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믿음은 기적을 가능케 하도록 선행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기적을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의 기적으로 불 수 있도록 먼저 되어야 한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예수의 기적을 단지 놀라운 일로 치부하거나, 그를 단순히 귀신의 능력을 힘입어 기적을 행하는 마술사 정도로 생각한다. 믿음이 있는 자만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그가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오히려 그 기적이 심판이 되고 만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부터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셨다. 가까이 도래한 하나님나라는 본질적으로 예수 자신의 말씀 그리고 행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의 말씀과 행위 속에는 귀신들까지도 두려워 떨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가 함께하고 있었다. 마가복음 4장 이후로 마가는 계속 바로 듣고 보고 이해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분별하는 눈과 귀는 성실한 제자가 되는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외적인 현상들에 끌려 다니지 않고 거짓된 말과 행위들에 속지 않으며, 대신 분별하는 믿음의 눈과 귀를 가지고 앞서 가시는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마가가 말하는 제자도의 출발점이다.
제4장 깨어있으라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수난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특징이 있다. 예수의 죽음은 마가복음의 끝 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주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예견되고 발전하는 주제이다. 마가는 작은 묵시록이라 할 수 있는 예수의 종말론 담화를 기록하였다. 이 부분에서는 예수의 임박한 수난을 지칭하는 구절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수난 당하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신 말씀이 종말론 담화의 결론 부분에 나오는 문지기 비유에서 발견된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잠에서 깨어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성실한 삶을 사는 것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마가복음 13장에 예수께서 들을 귀와 보는 눈을 통해 깨어 있으라는 권면을 자주 하심으로써 성실한 삶을 강조하셨다. 이것은 수난이 전에는 주로 배움의 시기였지만 그 이후에는 배운 것을 성실하게 실행하는 시기라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수난의 밤을 맛아 제자들에게 더 이상의 가르침을 주시지 않고 이미 주어진 교훈을 성실하게 실행하라고 요청하셨다.
마가복음 13장의 문지기 비유에서 문지기가 특별히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집주인이 언제쯤 돌아올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문지기 비유에는 집주인의 귀환 시기에 관해 아무런 암시도 없다. 따라서 교훈하는 요지는 그것은 아마도 주인이 지금 떠나 있고 또 그의 귀환 시기도 알 수 없어서 종들은 주인을 대신 하여 성실하라고 요청하는 점일 것이다.
위기는 시대마다 여러 다른 모양으로 찾아올 수 있다. 어떤 시대는 그것이 고난과 핍박일 수 있고, 어떤 시대는 그것이 세속화의 물결일 수 있다. 세상의 영광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도 제자들에게는 위기의 때일 수 있고, 다른 사람들보다 크고자 하고 그들 위에 권세를 부리려는 것도 위기의 때며, 세상적인 인기에 영합하거나 세상적 가치관에 동화되어 제자 된 사람들로서 영적 시야와 전망이 흐려지는 것도 위기의 때고, 자신들은 아무 능력도 영적 분별력도 없으면서 자기들만의 특권 의식과 집단적인 배타주의에 빠지는 것도 분명히 제자들에게는 위기의 때다. 마가는 13장의 종말론 담화에서 묵시적인 열광주의를 칭찬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시기가 짧을지 길지는 모르지만 기다리는 동안 성실한 제자의 삶을 살며, 비록 핍박과 유혹이 닥쳐와도 섬김과 봉사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예수의 참 제자 된 사람이다.
제5장 성전이 무너지다
마가복음 13장 외에 성전에 초점을 맞추는 본문들은 세 곳이 있다. 첫 번째는 성전 청결 사건이고 두 번째는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고 세 번째는 예수께서 운명하시던 순간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 졌다는 보도이다. 이 사건들은 매우 간단하면서 의미 파악이 어려운 구절들이다.
성전청결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속에 들어 있는 사건이다. 성전 파괴의 일차적인 의미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 행위라는 것이다. 포도원 농부 비유는 성전 청결 사건과 관련이 있다. 성전 청결 사건은 성전 안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지만, 하나님의 것을 도덕 질하는 일은 거리나 시장, 회당, 연회, 상거래, 기도 시간 등에 언제 어디서나 일어난다. 따라서 마가복은 11장과 12장은 성전 파괴를 미리 예언한다기보다 왜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지도자들은 왜 그들의 자격을 박탈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것은 열매를 매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고 생각되어 왔으나 그 일차적인 지칭 대상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통해 백성을 마땅히 영적으로 지도해야 할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 주려고 하셨다. 그들이 행하는 종교 행위는 사실 열매를 맺지도 못한 채 잎만 무성한 것에 불과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백성의 영적인 미래를 책임진 지도자들로서 합당한 열매를 보여 주기를 기대하셨지만, 그들의 삶과 행위는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과 백성의 중간에 서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영광과 부와 권세를 도둑질하였고, 그들의 종교생활의 중심이었던 성전을 강도들의 굴혈로 만들었다.
마가는 지도자들의 위선이나 비행과 크게 대조되는 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성전 청결 사건 이후에 기록한다. 과부의 사산을 삼키는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한 과부가 가난한 중에서 두 렙돈을 험금한 것이다. 그녀가 연보궤에 넣은 두 렙돈은 사실 그녀의 모든 소유였다. 생활비 전부였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사랑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러한 자기희생적 연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실 때 성소 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찢어진 성소의 휘장과 백부장의 신앙고백은 아무런 관련도 없이 그저 연결된 것은 아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심판하신 이후 나타난 첫 열매이다. 그리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백부장은 성소가 찢어진 뒤에 이방인이 회심한 첫 열매며, 예수의 죽으심으로 새로 지어지게 된 새 성전의 첫 열매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사랑과 믿음과 겸손으로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을 찾고 계시며 그들을 자신의 참 제자들로 여기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앞에 내걸고 다니면서 속으로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사람들은 사악한 농부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옛 종교의 하수인들에게 선한 삶의 열매들을 찾고 계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자신을 예수의 제자라고 외치며 다니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겸손과 자기희생의 선한 열매들을 요구하신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의 것을 중간에서 도둑질하는 사람은 결코 사악한 농부들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6장 고난을 넘어 영광으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는 자신에게 닥친 죽음을 피하지 않고 줄기차게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발을 옮기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한 소경 거지의 눈을 고쳐 주셨다. 이 사건은 겉보기에 한 소경 거지의 눈을 뜨게 한 평범한 기적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다. 예수께서는 그 소리를 듣고 멈추어 서서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는데, 예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그는 자신의 겉옷을 내어버리고 예수께로 달려 나갔다. 이런 행동은 그가 믿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던 길은 십자자의 길이었다. 그러나 제자달은 그것이 왜 십자가의 길이 되는지 바로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제자의 길은 무엇보다 먼저 버리는 길이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다. 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세상의 지혜와 세속적인 가치관이 그가 가는 길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그의 길은 세속적인 영광의 길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권세의 길도 아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기로 한 뒤에도 여전히 그와 같은 길을 가고자 했다.
제7장 종말은 언제 오는가?
종말은 이 시대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특별히 종말은 그 이전에 일어나는 사건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종말이 오기까지 어떤 시간표가 전개될까? 첫째로 마가복음 13장은 종말의 때를 알아내려는 잘못된 질문으로 시작되고 그것을 수정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둘째로 마가보음 13장은 종말의 때와 관련된 매우 다양한 표현들을 담고 있다. 즉 어느 때에 이루려 할 때에, 들을 때에 끝은 아직 아니니라, 재난의 시작이니라,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그날에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그 때에 등등이 그것이다. 마가는 종말의 때에 관해 무언가 말할 것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만일 세계 선교와 성실한 제자도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면, 다음 네 가지 대안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첫째, 전후후무한 대환난이 성전 파괴 사건과 깊이 연결되어 있지만, 종말의 때와는 분리되어 있다면 세계 선교와 성실한 제자도를 실천해야 할 기간은 대환난과 종말의 중간 시기가 된다. 둘째, 대환난이 종말의 때와 깊이 연관되지만, 성전 파괴와는 분리되어 있다면 세계 선교와 성실한 제자도를 실천해야 할 기간은 성전 파괴와 대환난의 중간 시기가 된다. 셋째, 전무후한 대환난이 성전 파괴로부터 종말까지 전체 기간에 걸쳐 있다면, 세계 선교와 성실한 제자도를 실천해야 할 기간은 대환난 기간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마가복음 13장 15-23절의 묘사가 성취된 두 다른 사건을 지시한다면 예배적인 사건은 성전의 몰락이고 최종적인 사건은 종말과 관련된다.
마가복음 13장28~32절에서 마가는 직접적으로 종말의 때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첫째로 30절에서 말하는 처음 세대는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진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그는 재림이 처음 세대에 임한다는 것을 확신 있게 긍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부정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가 확신 있게 주장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래의 세대들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 자신도 종말이 언제든지 올 수 있기 때문에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절은 마지막 때가 언제 있을는지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할 뿐만 아니라, 성실한 제자도가 필요한 근거를 바로 이 불가지성 내지 미지성 에 두고 있다. 성실한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당위성은 제자들이 그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실한 제자의 삶을 사는 결과는 어쨌든 선교이고, 선교는 또한 인자가 재림하기 전에 완성되어야 할 사건이기도 하다. 분별력이 있는 독자라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건강한 무화과나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새로운 무화과나무의 역할을 성실하게 담당하게 될 제자들의 일차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제자들은 먼저 길을 가셨던 예수를 성실하게 따라감으로써 그분과 같이 섬김과 고난의 삶을 살아갈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렇게 범세계적인 제자들의 공동체가 완성될 때, 재림의 시기는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cafe.daum.net/correcttheo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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