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푸스의 예수 보도의 진위 (眞僞) 문제
박 찬 웅
A. 서 론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신약성서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요세푸스의 작품이 갖는 중요성에 관한 마틴 헹엘(Martin Hengel)의 언급에 의하면,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보존되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신약성서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어떤 윤곽을 그리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따라서 요세푸스는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이와 같은 진술을 과장된 말이라고 반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 (De bello Judaicae), 「유대고대사」 (Antiquitates Judaicae), 「자서전」 (Vita Josephi), 「아피온 반박문」 (Contra Apionem), 이렇게 네 개의 작품을 남겼다. 이 중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는 각각 일곱 권과 스무 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진 요세푸스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주후 66-70 년 사이의 유대-로마 전쟁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는 「유대전쟁사」의 기록 연대는 베스파시안 (Vespasian) 통치 말기에 완결되었으므로, 늦게 잡아도 베스파시안이 사망한 주후 79 년 이전으로 잡을 수 있다. 또한 「유대전쟁사」는 주후 75 년까지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주후 75 년에서 79 년 사이로 기록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요세푸스는 구약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유대 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유대고대사」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집필 연대는 요세푸스가 밝히고 있듯이 도미티안 (Domitianus) 통치 제 13 년, 즉 주후 93/94 년이다 (ant 20,267). 한 권으로 된 「자서전」과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아피온 반박문」(反-유대주의에 대한 논박을 내용으로 함)은 「유대고대사」 이후에 발간된 것으로 여겨진다. 본 연구에서는 요세푸스의 작품들을 인용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약어를 사용함을 밝혀 둔다: bell (유대전쟁사), ant (유대고대사), vita (자서전), c. ap (아피온 반박문).
요세푸스가 아니면, 우리는 유대-로마전쟁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알 길이 없을 것이며, 예를 들어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아니면 현재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신약성서 연구의 폭은 현저하게 좁아질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이유들에서 T. Keim, Aus dem Urchristentum I (Zürich 1978), p. 1은 요세푸스의 작품들을 가리켜 “제 5 복음서”라 일컫기도 한다.
신약성서를 다루는 연구자들은 대개 요세푸스의 기록을 신약성서의 배후 역사를 밝히기 위한 일차적인 참고서나 보충자료로 사용한다.
본문비평 장치가 포함된 요세푸스의 희랍어 전집 가운데 가장 애용되는 것은, 베네딕투스 니이제(Benedictus Niese)가 편찬한 Flavii Josephi opera edidit et apparatu critico instruxit Benedictus Niese, 7 Bde. (Berlin 1885-1895; Nachdruck: Berlin 1955)이다. 또한 희랍어 본문과 영어 번역을 함께 수록한 H. St. J. Thackeray, L. H. Feldman 등의 Josephus, 10 Bde., Loeb Classical Library (Cambridge 1926-1965)와 함께 「유대전쟁사」의 희랍어 본문과 독일어 번역을 담은 O. Michel und O. Bauernfield (Hgg.), Flavius Josephus. De bello Judaico; Der jüdische Krieg. Griechisch und Deutsch, 4 Bde. (Darmstadt 1959-1969) 역시 요세푸스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일차 자료이다. 번역서들 가운데 먼저 <독일어 번역>을 보면, 앞서 언급한 오토 미셸(O. Michel)과 바우언필드(O. Bauernfield)의 「유대전쟁사」와 함께 H. Clementz, Des Flavius Josephus Jüdische Altertümer, 2 Bde. (Halle 1899); Geschichte des Jüdischen Krieges (Halle 1900); Kleinere Schriften (Halle 1900)은 상당히 오래 전의 번역이긴 하지만 널리 읽히는 번역서이다. 요세푸스 작품들에 대한 <영어 번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약 40 년 동안 진행된 (위에 언급된) Loeb Classical Library의 희랍어-영어판이라고 할 수 있다. 윌리암 휘스턴(William Whiston)의 The Genuine Works of Flavius Josephus (London 1737)은 지금까지 평균 1 년에 한 번 꼴로 재판(再版)되는 기록을 남기고 있을 정도로 널리 읽히고 있지만, 휘스턴의 영역(英譯)은 상당수의 문제점을 내포한 희랍어 본문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Haverkamp 1726), 전문적 연구자들이 이용하기에는 다소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신약성서 문서들이 당시의 세속 사건에 대한 역사적 보도를 목적한 글들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의 신앙적 문서로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또한 신약성서 기자들과 해당 독자들은 당대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관한 공통적 이해가 이미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독자들은 신약 시대의 배경 역사를 대부분 신약성서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요세푸스의 기록은 신약 문서들의 본문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폭넓은 이해를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정보의 보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요세푸스가 제공하는 정보들은 간혹 순전한 객관적 사료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선입관은 요세푸스의 기록이 신약성서 연구를 위한 거의 유일한 성서외적 (聖書外的) 정보의 소재지라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물론 요세푸스를 비롯한 거의 모든 역사가들은 자신의 작품은 매우 중립적이며 순수하고 표준적인 역사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들이라면 그러한 선언을 그대로 이행하는 역사가들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된다. 어떤 기록자든지 나름대로의 관점과 목적의식을 갖고 사건을 기록하며, 때로는 동일한 시대 사건들을 놓고 다른 사가들과 논쟁을 목적하기도 한다. 특히 논쟁이 주목적인 경우에는 상이한 입장에 따라서 상반된 해석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요세푸스의 작품을 순수한 객관적 사료라고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의 작품 역시 “요세푸스에 의해 해석된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그가 「유대고대사」 제 1 권에서부터 제 13 권에 이르기까지 구약 시대의 역사를 재해석해 놓은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구약 정경과 외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의 사건들을 단순 나열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구약의 인물들을 헬라적 구미에 맞는 자들로 묘사해놓기도 하고, 때로는 부가적인 대화문들을 창작하기도 하고 과장법을 동원하여 역사를 기록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는 기존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자이며, 구약 시대 이후의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해석이 가미된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곧 요세푸스의 기록은 신약성서 연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참고자료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 그 집필 동기를 충분히 염두에 두면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B. 본론: 요세푸스의 예수 단락의 진위 (眞僞) 문제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기독교인들에 의해 전수되어 온 이유는, 상술한 바와 같이 초기 기독교 역사에 대한 중요한 배경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는 일찍부터 성서의 역사성을 밝히거나 혹은 보충하기 위해 요세푸스의 기록을 자주 이용해 왔다. 이런 점과 함께 기독교인들이 요세푸스의 기록을 잘 보존해 온 보다 구체적인 이유를 든다면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에서 예수 (그리스도), 세례 요한, 주의 형제 야고보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ant 18,116-119. 요세푸스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에 대한 서술 도중에 세례 요한을 언급한다. 요세푸스는 헤롯 안티파스와 나바태(Nabatäer)의 아레타스 4 세(Aretas IV)와의 전쟁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헤롯 안티파스는 나바태의 공주와의 정략 결혼을 통해 아레타스 4 세의 나바태 왕국과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는데, 헤로디아(Herodias)와의 비윤리적인 결혼 소식을 들은 나바태 공주는 부친인 아레타스 4 세에게로 돌아가고 만다. 이 헤로디아가 안티파스의 “친형제인 빌립의 아내”였다는 막 6,18과 마 14,3의 언급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헤롯 가문의 친족 관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갖고 있었던 요세푸스는 ant 18,110에서 이 헤로디아가 “이복 형제 헤롯의 아내”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또 다른 헤롯”이 누구인지는 소상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요세푸스의 보도에 비추어 볼 때 마가 기자와 마태 기자의 보도는 정확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오직 누가 기자만이 이런 부정확한 진술과 차이점을 보인다. 즉 눅 3,19은 헤로디아의 정체를 “자기 [= 안티파스] 형제의 아내”라고 보도한다. 아무튼 이러한 이중 결혼을 통해 안티파스와 나바태 왕국 사이에 맺어졌던 잠시 동안의 우호 관계는 깨지고, 이 계기를 통해 아레타스 4 세는 가말라 (Gamala) 지역의 영토권을 문제 삼아 전쟁을 일으켰다 (주후 36 년). 안티파스는 이 전쟁에서 대패하였고, 유대인들은 이 전쟁에서 패배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세례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여겼고, 요세푸스 역시 이러한 여론에 공감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Chanwoong Park, Johannes der Täufer und Jesus von Nazareth: Eine sozio-redaktionelle Untersuchung zu ihrem Bild bei Josephus und Lukas, Dissertation (Ruprecht-Karls-Universität Heidelberg 1997), pp. 64-66을 보라. 또한 J. Gnilka, “Das Matyrium Johannes des Täufers (Mk 6,17-29)", in: P. Hoffmann (Hg.), Orientierung an Jesus: Zur Theologie des Synoptiker für Josef Schmid (Freiburg 1973), pp. 78-93, 특히 pp. 89f.; J. P. Meier, A Marginal Jew: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II, Anchor Bible Reference Library (New York u.a. 1995), p. 227, n. 243 등을 참조하라.
여기서 “증언”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요세푸스에 나타나는 기독교적 인물들에 관한 보도들이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증언”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요세푸스의 작품을 보존하고 전수했던 과거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권 외부의 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도 역시 기독교 운동의 핵심적 인물들의 존재와 그들의 고상함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이러한 단정은 다소 주관적이고 성급한 기독교 신앙적 감정이입 작용의 결과이다. 이 인물들에 관한 요세푸스 본문에 대한 비평적 연구들은 이러한 기독교 교회의 요세푸스 이해에 부분적으로만 동의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의 경우, 신약성서와는 달리 요세푸스의 보도는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다. 세례 요한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세례 요한이 예수보다도 더 칭송되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 단락은 예수 단락보다도 거의 두 배나 길게 보도되어 있고, 예수 보도에는 긍정적으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모호한 구절들을 포함되어 있는 반면에 세례 요한은 시종일관 높게 평가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을 증언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의 형제 야고보의 경우에는 야고보에 대한 중점적인 묘사를 주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아나누스 (Ananus) 2 세의 불법적 형집행에 대한 비판을 위해 야고보의 이름만이 간략히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요세푸스의 예수 보도 역시 재고의 여지가 많다.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기독교 독자층 내에서 잘 보존되어 온 이유가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인물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보도는 그 중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초기 신앙인들은 요세푸스의 예수 증언을 실로 가치 있다고 여기고 이를 부각시켰던 것이다.
물론 주후 1-2 세기에 예수를 언급하고 있는 기독교 외부의 기록들이 극히 드물게 발견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랍비문서 (b Sanhedrin 43a), 시리아의 스토아 철학자 마라 바 사라피온(Mara bar Sarapion)의 서신, 타키투스의 기록 (Tacitus, Annalen 15,38-44), 수에톤의 황제 전기문 (Sueton, Vita Claudii 25,4) 등 신약성서와 근접한 시기에 기록된 적지 않은 수의 비기독교 문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지극히 단편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요세푸스는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예수의 삶을 보다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 유일한 자료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문서에 대한 역사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양분되어 있다. 가령 J. Maier, Jesus von Nazareth in der talmudischen Überlieferung, EdF 82 (Darmstadt 1978, 21992), p. 268은 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반면, J. Klausner, Jesus von Nazareth (Jerusalem 31952), pp. 17-57은 이 본문에 일정 정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초기의 전승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본문은 L. Goldschmidt (Hg. und übers.), Der babylonische Talmud, Bd. 7 (Berlin 1929-1936), p. 186을 보라.
시리아의 한 스토아주의자가 감옥에서 아들에게 쓴 편지로 예수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현명한 왕”(a wise king)으로 예수를 지칭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말하면서, 이를 각각 아테네인들, 사미르인들, 유대인들의 잘못이요 이에 따른 불운의 사건이 해당 민족에게 잇따라왔음을 말하면서, 자신의 아들에게 철학하기를 계속할 것을 고무하고 있다. J. Blinzer, Der Prozeß Jesu (Regensburg 41969), pp. 53f.에 따르면, 이 편지의 집필 연대는 주후 73 년이 이후의 가까운 시기로 추정된다. 본문 내용은 F. Schulthess, Der Brief des Mara bar Sarapion.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r syrischen Literatur, ZDMG 51 (1897), pp. 371f.를 보라.
주후 116/117 년경에 작성된 이 기록에서 타키투스는 주후 64 년 네로 집권기에 발생한 대화재 사건을 보도하면서 기독교인들에 관해 언급한다. 여기서 타키투스는 “그리스도”를 예수의 고유명사로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수에톤은 케사르(Caesar)부터 도미티안에 이르는 열 두 명의 황제들의 전기를 주후 117-122 년 사이에 기록하였다. 이 중 클라우디우스 (Claudius) 황제의 생애 가운데, 수에톤은 소위 주후 49 년에 공포된 클라우디우스 칙령(Claudiusedikt)을 언급하였는데, 이 칙령은 기독교적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다는 내용이다. 행 18,2 역시 이 칙령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데, 사도행전 기자는 수에톤의 설명과는 달리 “모든 유대인들”이 추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세푸스는 예수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요세푸스의 보도는 그 진위 (眞僞) 문제에 있어서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고, 또 그 문제점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요세푸스의 작품에서 예수는 「유대고대사」에서 두 차례 언급되고 있다 (ant 18,63-64; 20,200). 각각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요세푸스의 예수 보도 A (ant 20,200)
우선 예수의 이름만이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는 ant 20,200은 주의 형제 야고보의 죽음에 대한 보도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야고보의 정체를 “그리스도라고 불리운 예수의 형제(toVn ajdelfoVn jIhsou' tou' legomevnou Cristou')”라고 적고 있다. 이 단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베스도가 죽고 알비누스가 부임하는 노상에 있었으므로, 아나누스는 이를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회를 소집하고 그리스도라고 불리던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몇몇 다른 사람들을 그들 앞에서 고발했다. 아나누스는 율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넘겨주고 돌로 쳐죽이게 하였다. 그 도시[=예루살렘, 필자]에서 존경받고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로 알려진 자들은 이 일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 본문은 당시 대제사장 아나누스 (Ananus) 2 세가 야고보와 그 밖의 사람들을 처형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아나누스 2 세는 베스도(Festus)가 죽은 후 새로운 총독 알비누스(Albinus)가 유대 지역으로 파견되기 전까지의 공백기를 이용하여 야고보에 대한 투석형을 실행했는데, 이 행위는 불법적 행위로 간주되어 아나누스 2 세의 대제사장직은 박탈당하고 만다. 이 대목에서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의 마지막 권 끝 부분에 처음 소개되고 있는 이 야고보를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불리던 예수의 형제 야고보”라고 부르고 있다. 간혹 “그리스도라고 불리던”이라는 구절이 후대 기독교 필사가의 삽입이라는 추측도 있어왔지만, 이 본문 전체는 후대의 조작이 아니라 요세푸스 자신의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 본문은 유대고대사의 희랍어 필사본들에서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며, 또한 교회사가 유세비우스 역시 이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Hist. Eccl. 2,23,22).
둘째, “야고보”는 평범한 유대적 이름이었고, 따라서 이런 흔한 이름에 대해서는 “누구의 아들” 내지는 “어느 출신” 등이 반드시 첨가되어 소개되었다. 요세푸스의 작품에서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모두 다섯 명이나 된다. 요세푸스는 이 야고보가 “요셉의 아들 야고보”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고, 따라서 앞서 ant 18,63f.에서 한 차례 언급되었던 예수의 형제라고 소개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셋째, 요세푸스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형제 야고보”라는 표현 방식은 기독교 문헌에서 낯선 것이다. 기독교 문헌들은 대개 “주의 형제 야고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cf. 고전 9,5; 갈 1,19). 따라서 후대 기독교인이 이 구절을 삽입했다면,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아니라,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기록했어야 할 것이다.
넷째, 요세푸스 본문에 나타난 야고보의 죽음 이야기는 기독교적 전승과 어긋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야고보는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주후 62 년 투석형에 의해 처형되었다. 반면 유세비우스가 인용하고 있는 헤게시푸스(Hegesippus)의 보도는 이와 다르다. 헤게시푸스에 의하면, 야고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 탑에서 떨어뜨려졌고, 돌에 맞고 몽둥이에 맞아 숨을 거두게 된다 (유세비우스, Hist. Eccl. 2,23.12-18). 또한 헤게시푸스는 야고보의 순교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주후 70 년 베스파시안이 예루살렘 정복하기 직전이라고 말한다. 유세비우스는 헤게시푸스의 이 보도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말하고 (Hist. Eccl. 2,23; 3,19), 이는 곧 야고보의 순교에 대한 교회의 표준적인 이야기로 여겨진다. 따라서 요세푸스의 야고보 본문은 기독교인에 의해 후대에 삽입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로마 총독 지배하에서 산헤드린은 사형과 같은 중대사안에 대해서는 재판도 열 수 없었고, 물론 사형 집행권도 없었다. 이는 오직 로마 총독의 고유 권한이었다. 따라서 야고보의 처형이 불법적 행위로 간주된 것은 당시의 이러한 사법적 관행에 대한 위반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로마 총독 지배하의 유대 지역에서의 중대사안에 관련된 사법적 이해에 관한 중요한 연구 논문은 K. Müller, “Möglichkeit und Vollzug jüdischer Kapitalgerichtsbarkeit im Prozeß gegen Jesus von Nazareth”, in: K. Kertelege (Hg.), Der Prozeß gegen Jesus. Historische Rückfrage und theologische Deutung, QD 112 (Freiburg u.a. 1988), pp. 41-83를 보라.
마지막으로, 본문은 야고보의 신앙, 야고보의 선행 등에 대한 칭송을 담고 있지 않다. 본문에는 야고보의 순교를 기리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지 않고, 야고보는 단지 관심 밖의 인물인 양 가볍게 처리되고 있다. 즉 야고보는 대제사장 아나누스 2 세의 법오용을 묘사하기 위해 언급된 한 사람의 희생자일 뿐이다. 위와 같은 논의들에 비추어 볼 때 이 본문이 기독교인의 삽입이 아닌 요세푸스 자신의 기록임을 의심할 근거는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2. 요세푸스의 예수 보도 B (ant 18,63-64): 소위 Testimonium Flavianum
야고보 처형 단락에서는 예수의 이름만이 잠시 언급된 것에 반해서, ant 18,63f.에서 요세푸스는 예수의 삶에 대한 보다 자세한 요약적 보도를 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63) 이 즈음에 예수라고 하는 한 현자(a wise man)가 있었다, 만일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는 놀라운 일들(기적)을 행하는 자였으며,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선생이었다. 다수의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헬라인들 중 많은 이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이는 그리스도였다.
(64) 우리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고소하였고,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처음에 그를 사랑하던 자들은 멈추질 않았다. 그는 삼일 째 되는 날 다시 살아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다른 많은 놀라운 일들이 그에 관해 선포했던 일이었다.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명명된 이 종족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단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이 본문은, 마치 신약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쌍을 이룰만한 고백적 진술을 담고 있는 듯하다. 혹은 예수의 십자가 밑에서 “이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는 백부장의 증언(마 27,54; 막 15,39; cf. 눅 23,47 “의인”)과 짝을 이룰만한 한 유대인의 증언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ant 18,63f.의 예수 단락을 일컬어 “요세푸스의 증언”(Testimonum Flavianum)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17 세기 이후) 비평적인 요세푸스 연구자들은, 이러한 단언적인 그리스도 증언은 요세푸스 자신의 필적이 담긴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 예수 보도 전체가 위조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따라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요세푸스의 예수 보도를 가리켜 “증언”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될 수 있지만 “Testimonium Flavianum”(이하 TestFlav)이라는 이 단락에 대한 전통적 명칭은 오늘날 비평적인 학계에서도 편의상 널리 사용되고 있다.
TestFlav의 진위 문제에 대한 논의는 크게 세 입장으로 분류된다.
첫째, TestFlav 전체가 요세푸스 자신의 것임을 옹호하는 입장 (요세푸스 저작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본문은 요세푸스 자신의 기록이 분명하며, 결국 요세푸스는 예수의 그리스도됨을 인정하는 기독교인과 다름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입장은 “TestFlav”이라는 제목과 의미를 일치시켜 이해한다. 그러나 전적인 순수성에 대한 주장은 매우 드물게 제기된다. 요세푸스 저작설을 지지하는 자들 역시 전적인 순수성을 말하기보다는 대개 “전반적인 순수성”을 주장한다.
둘째, 요세푸스는 예수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고, 후대의 기독교인이 조작하여 현재의 위치에 삽입했다는 “위조설” (혹은 “삽입설”). 앞의 순수 저작설과 마찬가지로 이 입장의 학자들은 대체로 “전반적인 위조설”을 주장한다.
셋째, 요세푸스는 예수 단락을 기록했지만,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본문과는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으로, 현재의 소위 표준본문(standard text)은 후대의 기독교인의 첨가 혹은 수정이 가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변형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완전한 진정성을 주장하거나, 혹은 완전한 조작설을 말하는 학자들은 극소수이다. TestFlav의 진위성에 관한 현대의 요세푸스 연구의 동향은 대부분 “부분적 첨가설”, 혹은 “부분적 변형설”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문체의 특징만을 보더라도 TestFlav은, 후대의 첨가로 여겨지는 소수의 부분을 제외한다면 요세푸스 자신의 희랍어 구사 방식에서 이탈해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세푸스가 예수에 관해 무언가를 기록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을 전제로, 현재 본문은 후대에 변형이 가해진 것이라는 입장이 주를 이룬다. 어떤 본문이 삽입되었고 어느 정도 변형되었는지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가설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아이슬러 (R. Eisler), 비너트 (W. Bienert), 브랜든 (S. G. F. Brandon) 등은, 요세푸스는 예수를 대중적 저항 운동가로 묘사했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후대의 기독교인이 매우 교묘한 어휘 변경 방법으로 예수라는 선동적 인물을 비정치적인 사람으로 탈색시켜 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요세푸스 자신은 예수에 대해 어떤 보도를 하였을까? 이하에서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TestFlav의 원문 형태를 가정하여 원문을 재구성하는 시도 방식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양한 원문 재구성 방식들 중 가장 설득력 있는 두 가지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3. 원문 재구성 시도 방식들
(1) 소거 방식
어떤 이들은 몇몇 구절만을 후대인이 삽입하였고, 이를 제거하기만 하면 TestFlav의 원문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입장에 의하면 후대의 기독교인에 의해 삽입된 부분은 다음 세 부분이다: (1) “만일 그를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2) “그는 그리스도였다”, (3) 부활과 예언 성취에 관한 진술.
이러한 원칙에 따라 본문을 재구성한 마이어(J. P. Meier)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At this time there appeared Jesus, a wise man. For he was a doer of startling deeds, a teacher of people who receive the truth with pleasure. And he gained a following both among many Jews and among many of Greek origin. And when [or better: although] Pilate, because of an accusation made by the leading men among us, condemned him to the cross, those who loved him previously did not cease to do so. And up until this very day the tribe of Christians (named after him) has not died out.
이렇게 단순하게 세 부분을 삭제하는 방식에 따라 재구성된 본문은 그리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위 세 부분들 중 “마지막 부활과 예언 성취에 관한 진술” 부분은 종종 요세푸스 자신의 기록이라는 의견도 제기되어 왔다.
(2) 소거, 변형, 부가를 절충한 방식
마찬가지로 설득력 있는 또 다른 방식은 앞의 마이어가 취한 방법과는 달리 삭제와 변형, 그리고 부가 방식을 함께 적용한다.
(1) 삭제: 예수의 “사람됨”을 황송하게 언급하는 구절인, “만일 그를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은 요세푸스 자신의 어투로 보기 힘들기 때문에 소거되어야 한다.
(2) 변형: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단정하는 진술, “그는 그리스도였다”를 “그는 그리스도라고 일컬어졌다”로 변형한다.
(3) 첨가: 예수의 부활을 확언하는 진술 앞에 간접화법을 이끄는 새로운 주문장을 첨가한다. 즉 예수의 추종자들의 주장을 간접 인용한 것으로 변형하는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밤멜(E. Bammel)은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favskonte" o{ti)라는 분사구문을 후대의 기독교인이 제거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이 문장을 다시 첨가하여 원문을 재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물론 어떤 부분을 삭제하고 어떻게 변형하느냐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요세푸스의 원문을 재구성하는 시도들은 대개 위와 같은 세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에 가장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원문 재구성 시도들과는 별도로 최근 TestFlav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영역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아랍어판 TestFlav에 대한 발견이었다. 이 아랍어판 TestFlav의 본문은 주후 10세기 경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의 주교였던 아가피우스(Agapius)의 기록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아가피우스 본문”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아가피우스 본문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소위 희랍어판 표준 본문과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다. 이 본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시에 예수라는 현자가 있었다. 그는 선한 삶을 영위했고 고결했던 자로 알려졌었다. 그는 유대인과 또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많은 제자들을 거느렸다.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형에 처했으나, 그의 제자가 되었던 자들은 그의 제자됨(또는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가 십자가형 삼일 후에 그들에게 나타났고, 살아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들은 말하기를,] 예언자들의 놀라운 말씀처럼, 그는 아마도 메시아였을 것이라고 말이다 (아가피우스의 아랍어 본문).
이 본문에는 TestFlav의 진위 문제에 있어서 논란이 되는 세 부분이 모두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즉 예수의 사람됨에 대한 부연 설명의 누락 (“만일 그를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예수의 메시아됨에 대한 진술이 간접 인용으로 나옴 (또한 이 진술은 본문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다), 그리고 예수 부활에 대한 진술 역시 간접 인용으로 소개되고 있다.
또한 예수의 삶을 기적수행가와 진리의 교사로 묘사하는 희랍어판 TestFlav과는 달리 예수의 “선행”만이 부각되어 있다. 예수 처형 보도에 있어서도 차이점을 보이는데, 예수 죽음에 대한 유대인 지도층의 책임이 나타나 있지 않고 오직 빌라도의 십자가형 집행이 언급되고 있다.
또한 예수의 삶을 기적수행가와 진리의 교사로 묘사하는 희랍어판 TestFlav과는 달리 예수의 “선행”만이 부각되어 있다. 예수 처형 보도에 있어서도 차이점을 보이는데, 예수 죽음에 대한 유대인 지도층의 책임이 나타나 있지 않고 오직 빌라도의 십자가형 집행이 언급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앞서 제기한 원문재구성 방법에 의거해 희랍어판 TestFlav을 재구성한다면 몇 개의 차이점을 제외하곤 이 아가피우스 본문과 상당히 일치하는 원문이 재구성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준다. 즉 아가피우스 본문은 TestFlav의 전승이 주후 10 세기경에도 단일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며 현재 사용하고 있는 희랍어판 본문은 요세푸스 자신의 기록에 변형이 가해진 본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뒷받침해준다.
4. 초기 기독교 저자들에 나타난 증거들
요세푸스의 작품을 담고 있는 희랍어 사본들은 주후 9 세기 이후인 늦은 시기의 것들이다. 물론 이 점이 사본들의 신빙성을 반감시키는 것은 아니다. TestFlav을 인용하고 있는 최초의 사가는 주후 300년대 초 유세비우스인데 (Hist. Eccl. 11,7f.), 그가 인용하는 본문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희랍어 본문과 거의 일치한다. 또한 이후 제롬(Jerome, 342-420)의 인용 역시 단 한 곳을 제외하곤 일치한다 (“그는 그리스도로 믿어졌다”, Of Illustrious Men 13).
유세비우스가 첫 인용자라는 이유를 근거로 혹자는 유세비우스 자신이 TestFlav을 작성한 자라고 여기기도 한다. 물론 유세비우스 이전에 많은 기독교 기록자들이 요세푸스의 작품들을 이용하면서도 TestFlav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일견 의아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엔 TestFlav에 관련된 증거가 전무한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보다 이른 시대의 오리겐(Origen, 185-254)은 유세비우스 이전의 TestFlav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유대고대사」, 「아피온 반박문」 등을 매우 정확하게 인용하고 있는 오리겐은, 요세푸스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고 두 번에 걸쳐서 말하고 있다 (Contra Celsum 1,47; Commentary on Matthew 10,17). 이러한 오리겐의 진술은, 한 편으론 그가 참조했던 「유대고대사」 본문에는 어떤 형태로든 예수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는 점, 즉 요세푸스는 무언가 예수에 대한 언급을 했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또 다른 한 편으론 그 본문에는 “그는 그리스도였다”라는 단정적 진술은 빠져 있었거나 혹은 다른 간접 인용 형식으로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증거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유세비우스와 오리겐 이전에 기독교 문헌들이 요세푸스의 예수 단락을 언급하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5. 전후 문맥상에 따른 이해
Ant 18,63-64은 빌라도가 유대 지역의 총독직을 맡고 있던 시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단락 (ant 18,35-89) 가운데 위치해 있다. 그런데 위조설을 주장하는 견해들 중에는 TestFlav의 위치가 전후 맥락에 잘 맞지 않는다는 근거가 제기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류의 견해에 의하면, TestFlav의 전후 문맥은 주로 유대 지역에서 발생했던 소요 사건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데, 예수 보도 단락은 전혀 이런 사건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애초에 요세푸스는 예수를 기록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빌라도 재임 중에 처형당한 예수에 관한 본문을 조작하여 누군가가 대충 이 단락에 삽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추정이 가능한지는 TestFlav의 전후 문맥을 직접 고찰해야 알 수 있다. TestFlav이 속해 있는 ant 18,35-89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빌라도 총독의 부임 (ant 18,35).
(2) 빌라도의 첫 번째 실정 (ant 18,55-59): 빌라도는 한밤중에 황제의 상을 예루살렘에 몰래 갖고 들어온 최초의 인물로, 이에 분노한 유대 백성들은 이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으며, 심각한 소요 사태가 발생할 뻔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폭동 사태가 없이 무사히 위기를 넘기게 된다.
(3) 빌라도의 두 번째 실정 (ant 18,60-62): 빌라도는 성전 재산을 팔아 수로 공사에 함부로 사용하였는데, 이번에는 백성들의 심각한 소요 사태가 빚어졌고, 이에 빌라도는 무자비한 강제 진압을 감행한다.
(4) 예수 보도 (TestFlav): 빌라도의 세 번째 실정? (ant 18,63-64).
(5) 로마에서 이시스 (Isis) 신전과 관련된 에피소드 (ant 18,65-80): 이 이야기는 사실 빌라도와 관련 없고, 유대 지역과도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다.
(6) 로마에서 발생한 한 악덕한 유대인의 사기극으로 인해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ant 18,81-84): 이 본문 역시 빌라도와 관련 없이 로마에서 일어난 일이다.
(7) 빌라도의 마지막 실정 (ant 18,85-87): 사마리아 지역에서 어떤 인물이 나타나 사마리아인들을 그리심 산으로 이끄는 대중적 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빌라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하는 무자비한 진압 방식을 취했다.
(8) 빌라도 총독이 소환됨 (ant 88-89): 앞 사건에 대해 분노한 사마리아인들은 사절단을 파송하고 그 결과 빌라도는 총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위 내용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빌라도 재임 기간 동안(주후 26-36 년)을 기록하고 있는 ant 18,35-89에는 여러 다양한 전승들이 묶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이들 중 두 개의 에피소드들(ant 18,65-80. 81-84)은 로마에서 발생한 일로 빌라도의 재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 단락을 대중적 소요사건과 관련 없는 것으로 본다고 해도, 예수 단락만이 아니라 이어 나오는 두 개의 단락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이것은 조작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
또한 요세푸스의 예수 단락이 대중적 운동과 무관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식의 판단도 적절하지 않다. 요세푸스가 예수를 마치 철학적 교사처럼 묘사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요세푸스는 예수의 “대중적 인기”와 “예수 추종자 집단”에 대한 언급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많은 자들이 예수 주변에 모여들었다는 점, 또한 예수의 추종자들이 멈춤 없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점은 요세푸스의 묘사가 예수 운동의 대중성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요세푸스에게 있어서 “집단적 운동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대중적 메시아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예수의 삶을 기적수행가와 진리의 교사로 묘사하는 희랍어판 TestFlav과는 달리 예수의 “선행”만이 부각되어 있다. 예수 처형 보도에 있어서도 차이점을 보이는데, 예수 죽음에 대한 유대인 지도층의 책임이 나타나 있지 않고 오직 빌라도의 십자가형 집행이 언급되고 있다.
또한 예수는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에 의해 죽었다는 보도 역시, TestFlav이 전후의 다른 사건들에 비해 이질적인 것이 아님을 암시해주는 증거이다. 따라서 전후 맥락 관계를 근거로 TestFlav의 위조-삽입설을 주장하는 것은 문맥 파악의 오류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C. 결 론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1. 요세푸스 자신이 ant 18,63-64에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2. 그러나 요세푸스가 작성했던 TestFlav의 원문은 오늘날의 본문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그리고 요세푸스의 예수 단락의 중요한 부분들은 원래적 형태가 많이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가장 단순한 근거 곧 요세푸스가 기독교적 신앙고백을 공유한 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토대로 우리는 현재의 TestFlav에 대한 원문 재구성 시도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요세푸스에 나타난 예수상 역시 추정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재구성이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는 양식사 연구가 헛되이 시도했던 신약 본문 전승의 원래적 형태를 재구성하려는 작업과는 별개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세푸스가 어떤 경로를 통해 예수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지에 대한 것은 보다 긴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가 기독교인들을 통해 받은 정보를 가공하여 자신의 관점을 통해 기독교적 시각과는 상이한 중립적 묘사를 했던 것인지, 혹은 그가 가졌던 정보 자체가 중립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한 해답도 역시 짧은 지면에서 주어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요세푸스의 예수 보도는 복음서들이 기록된 주후 1 세기말에 기독교권 외부에서 예수를 바라보았던 하나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것의 토대가 되고 있는 전승들과 그 전달 경로, 그리고 이러한 전과정의 사회적 배경을 밝히려는 시도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다양한 예수상과 전승들을 연구하는 값진 작업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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