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사회정의
(마가복음 11:15-17)
I. 서론
예수님의 성전 정화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2)또한 마가복음을 보면 이 사건 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시작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가 시작된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에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까지 했을까?
예수님의 성전사건에 대한 의미에 대하여는 아직도 학자들 중에 통일된 의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적인 학자로부터 보수적인 학자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의견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인 성전을 거룩하게 하려 했다는 설부터 구약의 예배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시도라는 설까지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중에서 어떻게 더 설득력 있는 견해를 분별해 낼 수 있을까? 그것은 그 당시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엄밀한 이해와 성경 각 구절에 대한 엄밀한 해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복음서중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간주되는 마가복음에 대한 철저한 주석적 분석과 1세기 팔레스타인 농촌에 관한 원자료(Primary Source)와 경제인류학적 모델 분석(Economic Anthropological Model)을 바탕으로 가능한 그 시대상에 접근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그 의미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3)
그래서 제 II장에서는 지금까지 제시된 성전사건에 대한 견해를 비판적으로 분석 정리하고 제 III장에서는 마가복음 11:15-17 까지를 주석하여 그 의미를 밝힌 다음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성전사건은 유대교의 타락과 그로 인한 백성에 대한 경제적 억압 즉 부정의에 대한 선지자와 메시아로서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즉 메시아의 두 가지 사명중 하나인 정의의 예언자의 사명을 수행하신 사건이 바로 이 성전사건인 것이다.
II. 성전사건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
아마도 신약의 여러 구절 중 마가복음 11:15-17 만큼 해석이 복잡하고 대립되는 구절을 없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진영의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해석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7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1. 메시아의 성전 청결
R. Hiers, M. Hengel, C. Cranfield, B. Witherington III, M. Hooker, J.Fitzmeyer, R. T. France, and R. Gundry는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동이 성전을 정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4) 이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예수님은 성전의 바깥뜰에 있는 상업적 행위가 예배의 내적이고 영적인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분노하신 것이다.5)
그러나 이 해석의 문제는 성전 뜰에서의 상업적 활동이 성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허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많은 다른 경건한 유대인들이 침묵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 왜 유독 예수님만이 분노하셨는가가 의문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것에 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V. Eppstein은 자신의 1964년 논문에서 예수님이 분노하신 것은 30년경 대 산헤드린(Great Sanhedrin)이 올리브산으로 이동하고 나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성전 뜰에 동물시장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6) 이러한 Eppstein의 견해를 따라서 B. Chilton은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동은 희생 짐승을 어떻게 조달하는가에 관련된 정결에 관한 이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7) B. Chilton은 예수님을 바리새 유대주의의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8) 그는 가야바가 30년 봄에 성전에 상인들이 들어가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바리새주의에 의하면 말도 안 되는 행위였다. 왜냐하면 힐렐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제물을 가지고 오고 그것에 자신이 자신의 죄를 위해 스스로 안수하여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9)
H. Betz도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위는 헤롯성전의 이방화와 상업화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석한다.10) 헤롯의 계획은 고대 유대종교를 헬레니즘 형태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데,11) 예수님의 관심은 의식적인 정결이 아니라 성전이 헤롯의 왕권을 찬양하는데 쓰이는 것에 대한 반대였다.12)
P. M. Casey는 예수님의 행동을 아람어 판본분석을 통하여 해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어떤 물건을 들고 지나는 것을 금지한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상인과 환전상을 내몬 것과도 일치하는 행동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집의 거룩함을 보장하기 위하여 행하여진 것이다. 예수님은 이사야 56장과 예레미아 7장에 대한 카리스마적인 설교를 통하여 그의 할라킥한 판단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동은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부와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고 결과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마지막 행동 즉 죽이려는 음모에 도달하게 하였다.13)
최근에 Adella Collins는 헤롯의 성전을 다시 디자인한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한다.14)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티리안 동전에 새겨져있는 헤라클레스나 시리아의 신인 멜카트의 이미지가 문제였다.15) 그러므로 그녀는 결론을 짓기를 "예수의 목적은 성전에 관련된 상업적 활동을 폐지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정의를 확립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성소의 거룩함이 전체 성전에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의 성전에서의 행동은 그의 성전의 거룩성에 대한 비전과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지에 대한 그의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16)
C. Evans는 예수님의 성전행동에 대하여 가장 광범위하게 연구한 학자인데 그는 이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한다. 그는 마가복음의 성전에 관한 구절들은 오래된 전승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C. Evans는 요한복음전승의 성전정화의 동기가 공관복음의 성전정화의 동기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제 4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성전행동을 성전의 파괴와 연결시키지만 이 사건의 예고적인 성격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저자는 그의 행동을 성전 회랑안에서의 진행된 활동에 대한 분노로서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17) C. Evans는 주장하기를 많은 유대 문헌들이 메시아가 성전을 정화할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말한다.18)
P. Richardson은 예수님이 반세겔의 성전세에 반대한 것이 그의 성전행동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성전정결에 대한 엄격한 견해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환전상의 테이블을 뒤엎게 만든 것이다.19) 이 행동은 다른 신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개혁자의 분노였다.20) D. M. Derrett은 아주 재미있는 해석을 제시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님의 성전행동은 율법과 예언서를 뒷받침으로 하여 부정한 상인들과 부정한 물건들을 흩어버린 것이다. 그는 레위기 14:36절을 비유적으로 응용하여 하나님의 집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치워버린 것이다.21)
그러나 이러한 성전정화의 견해에는 적어도 8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 번째 문제점은 성전에서의 상행위는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있는 것이고 심지어 환전상은 성전의 관리였다.22) 사실상 환전상은 죄 사함과 속죄의 체제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었다.23) 어떤 성전이건 간에 성전의 주요기능은 희생을 위한 장소로 기능하는 것이고 희생은 적절한 동물의 공급을 필요로 한다.24)
그러면 왜 그 당시 사람들이 환전하는 것 과 비둘기파는 것이 성전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을까?
두 번째로 성전의 의식적인 정결이 예수님에게 중요했는가가 의문이다. 마음의 내적인 순수함의 중요성이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25) 하지만 E. P. Sanders는 성전의 정결성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주장하는 신약학자들의 시대착오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친숙한 프로테스탄트 아이디어인 말씀으로 구성된 순수한 예배를 염두에 두고 모든 외적인 의식은 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1 세기의 유대교에서 정결을 확대하는 것은 예를 들어 물로 정결하게 하는 것 같은 의식을 확대하는 것이었다.26) 바리새인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정결이 었다.27)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성전의 정결에 관심을 가졌는지가 잘 설명이 안 된다.28) 게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거룩함과 정결함은 근본적으로 재정의가 된 개념이다.29)
셋째로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정화라고 볼수 있는가이다. 성전의 정결을 유지하는 것은 제사장들의 임무이고 이것은 매일 매일 정결례를 통하여 행하여지고 있었다.30) 마카비 1서 4:36-58절에 나오는 성전의 정결이 정결의 예가 될 수 있다면 성전은 이미 정결화되고 정화되고 있는 것이다.31)
네 번째로 학자들은 말라기 3:1-4, 쥬빌리 4:26, 솔로몬의 시편 17:30을 정결주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제시한다. 그러나 말라기 3:1-4은 성전이 아니라 레위인의 정결을 이야기하고 있고, Jubilees 4:26은 시온의 정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고 메시야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솔로몬 시편 17:30에서는32) 예루살렘이 정화되는 것이지 성전이 정화되는 것이 아니다.33)
다섯 번째로 만약 성전이 예수님에 의하여 정화되었다면 왜 나중에 성전이 파괴되어야 하는가도 의문이다. D. Garland는 또한 성전의 앞뜰이 거룩한 장소라는 견해에도 원 자료적인 증거가 없다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34)
여섯 번째로 M. Borg는 예수님의 행동이 성전정화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입장에서 입장을 바꾸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성전행동은 종말론적인 회복의 기원이 아니고 또한 성전을 정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그것은 정결에 대하여 찬성하는 입장이 아니라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성전이 경제적 정치적 억압의 중심으로 있으면서 정결시스템의 중심으로 작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다."35)
일곱 번째로 N. T. Wright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무화과나무 사건, 누가의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우는 장면, 요한복음의 파괴와 재건축의 말, 공관복음의 거짓 증인과 그들의 고발, 십자가 아래서의 조롱, 토마스의 비밀스러운 말 ( 내가 이 집을 파괴하면 누구도 다시 세울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을 파괴할 것이라는 사도행전의 고발내용 등은 분명하게 정결이나 개혁이 아니라 성전의 파괴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36)
마지막으로 그 당시의 종교가 정치적 종교였다는 것으로 볼 때, 순수하게 종교적인 동기라는 말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표현이다. 그 당시는 종교가 정치와 가족의 영역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2. 브랜든의 혁명적 행동견해
S.G.F. Brandon은 예수는 성전행동을 통해 실제로 종교적 귀족계급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환전상이나 상인들은 성전을 통제하는 대제사장의 허가아래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37) 이 행동은 대 제사장들이 로마제국으로부터 그 직위와 권위를 받았기 때문에 지배계층에 대한 혁명적인 도전이었다.38)
Brandon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군중들과 함께 성전을 공격했다고 믿는다.39) 그는 말한다, "그러나 성전경찰이 개입하지도 않고 방관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과 그 동조자들의 위세가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40) 브랜든에 따르면 마가복음의 저자는 고의적으로 이 사실을 감추었는데 그 이유는 예수가 로마에 의하여 혁명가로 보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41)
그러나 이 주장은 적어도 3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열심당 운동자체가 그 당시의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이념적으로 만들어 낸 운동이라는 것이 문제이다.42) 둘째로, 만약 예수의 행동이 군사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면 아마도 안토니아 요새에 있던 로마군이 개입을 했을 것이다.43) 셋째로, 성전에서의 많은 소란을 기록했던 요세푸스가 이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의 행동은 조그마한, 그리고 상징적이고 비폭력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44)
3. 이방인을 배제한 것에 대한 비판
E. Lohmeyer는 예수님의 성전사건은 이스라엘의 배타성에 대하여 반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예수님은 이방인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성결하게 하였다.”라고 말한다.45) 그는 생각하기를 그 지역은 새롭게 단장한 이방인의 뜰이었다.46) 그러나 이 해석의 문제점은 이방인의 뜰이라는 개념은 현대에 생긴 개념이라는 것이다.47) E. P. Sanders도 또한, "예수님은 비록 종말에는 이방인을 포함시키려 했을지 모르지만 아마 그 당시에 이방인에게 호의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48)
4. 성전의 파괴를 의미하는 상징적 행동.
여기에는 3가지 견해가 있다. 종말론적 메시아적 행동, 선지자적 행동, 그리고 비 메시아적 종말론적 행동의 견해가 있다. .
1) 비 메시아적 종말론적 견해
성전정화라는 전통적 견해를 비판하고 E. P. Sanders는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동이 십자가에서의 처형을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그는 성전행동이 선지자적 상징적 사건으로 성전을 파괴하거나 정화하려는 노력으로 보지 않는다.49) 예수는 유대회복의 신학에 근거하여 옛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측한 것이다.50)
그러나 이 견해도 3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도대체 왜 성전이 파괴되고 다시 건축되어야 하는가가 문제이다.51) Horsley는 "70년 이전에 성전이 재건축된다는 아이디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한 옛 성전이 무너지고 새로운 성전이 건축되는 것 사이의 연결에 대한 문헌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52) 게다가 성전제도의 타락이 없었다는 Sander’s의 주장은 많은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다.53) E. P. Sanders는 그리고 마가복음 11:15-16 절의 4가지 행동 중 환전상의 테이블을 엎는 것 하나만을 고려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 행동을 그렇게 쉽게 파괴의 상징으로 연결시킬 수 가 있는가라고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54)
2) 종말론적 메시아적 행위
J. D. G. Dunn과55) Ben Witherington III은 성전정화는 그 성격상 종말론적이라고 주장한다. 새롭게 된 시온에서 종말론적인 기능을 담당하도록 성전을 만들기위해 행하여진 행동인 것이다. 이 회복은 땅과 성전을 오염으로부터 회복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전이 파괴되고 대체되는 것을 의미한다.56) N. T.Wright는 이 성전에서의 행동은 정화가 아니라 다가오는 심판의 상징적인 묘사하고 생각한다. 그는 상징적인 행동과 선지자적 예언에 나타나 있는 성전의 파괴는 선지자로서 또한 메시아로서 예수의 임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57)
M. Bockmuehl은 매우 포괄적인 주장을 한다.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동은 부분적으로는 종교적인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이다.58) 종교적인 이유는 헤롯성전의 불완전성이고,59) 경제적인 이유는 성전당국에 의한 정의롭지 못한 일들 때문이다.60) 그래서 Bockmuehl은 결론을 내리기를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동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그 당시의 상태에 대한 심판을 나타내고 또한 새로운 시대의 회복의 표현으로 임박한 성전의 파괴를 재확인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61)
이 해석의 문제점은 메시아가 성전을 파괴하고 다시 세운다는 확실한 문헌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62) 탈굼 텍스트는 단지 메시아를 통하여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만을 이야기하고 있다.63) 성경이나 다른 어떤 문서에서도 메시아가 성전을 파괴할 것이라는 구절은 없다는 것이다.
3) 성전의 정의롭지 못함에 대한 예언자적 행동
이 견해는 예수의 행동이 성전체제와 대 제사장에 의한 억압과 부정의에 대한 선지자적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V. Taylor, R. Horsley, D. Kaylor, D.Crossan, W. Herzog, C. Myers, R. Bauckham, and M. Borg 모두가 이 견해를 지지한다.64)
그들의 주요한 주장은 예수가 이사야나 예레미야로 대표되는 히브리 선지자적 전통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던 성전체제와 대 제사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65) Horsley는 예수님의 성전행동은 성전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상징하는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로마사람들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위험한 지도자로서 처형된다는 것이다.66)
David Kaylor도 또한 Horsley의 견해에 동의한다. Kaylor에 의하면 예수님이 처형을 당하신 것은 성전행동때문이 아니라 예루살렘 입성때문이지만, 예수님의 처형은 그의 메시지가 당시 지배계급을 전복하려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7)
D. Crossan도 또한 Horsley에게 동의한다. 그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그가 갈릴리에서 가르친 영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평등주의가 폭발하여 불평등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심지어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억압적인 성전체제에 대한 분노로 나타난 것이 성전행동이라고 생각한다.68)
W. Herzog는 성전의 경제적 역할이 예수님의 성전행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가복음 2:1-12에서 보면, 예수는 그가 환자를 치료할 때 성전을 무시해 버린다. 예수님은 성전에 반대하고 공식적인 채널 밖의 용서를 선포한다. 성전의 권력독점을 지키기 위한 것이 이러한 충돌의 원인일 것이다.69)
예수님은 성전체제와 충돌했고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의 경제적 부정의를 선지자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70)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동은 성전의 정화가 아니라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나는 선지자적인 표적이고 결국은 임박한 파괴의 상징이었다.71)
Ched Myers는 예수님은 성전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성전을 공격했다고 생각한다.72) R. Bauckham도 또한 이 견해를 지지한다. 그는 성전세와 비둘기 판매의 독점등에 나타난 성전의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에 대한 예수님의 저항을 나타내는 것이 성전행동으로 해석한다.73)
M. Borg 도 또한 이 견해를 지지한다. 그는 예수님의 성전행동은 성전의 역할에 대한 고발이다. 성전이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시스템이 되고 또한 그것이 정결이라는 이데올르기에 의해 뒷받침되는 상황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단순히 비양심적인 상인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지배계급 자체에 대한 고발이었다.74)
그러나 Adela Collins는 Horsley의 사회정의에 입각한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75)
5. 성전 제사제도의 종말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성전행동은 성전제사제도의 종말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G. Bornkamm은 주장하기를, 예수님의 행동은 단순히 성전제사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제사를 중지시키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성전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76) E. Chavez도 또한 예수님의 그의 죽음으로 성전제사제도를 폐하였다고 주장한다.77) Chavez는 예수님의 인자로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것과 그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것과 성전행동을 결합해볼 때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78)
W. Stegemann도 또한 이 견해를 지지하며, J. Heil도 마가복음에 나타난 성전주제를 고찰하고 나서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으로서 마가복음의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도의 집으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성전을 대체하도록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79)
J. Neusner도 또한 재미있는 해석을 한다. 그는 유대의 반세겔 성전세는 성전에서 드리는 매일 매일 제사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인데 이것을 뒤엎어버리는 것은 다른 속죄를 위한 테이블 즉 성찬 테이블을 세우는 것으로 해석한다.80) 즉 성전에 의한 속죄 제도를 예수님이 폐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의 문제는 Eppstein이 주장하듯이 사실상 바울을 포함한 초대 크리스천들이 성전에 희생제물을 봉헌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행21:26).81) 성전에서 제사가 폐해졌는데 왜 제자들이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갔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성전사건을 다루는 문헌들을 검토해 보았는데 문제는 학자들 간에 하나의 확립된 견해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전정화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 구절을 자세하게 살펴봄으로서 그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마가복음 11:15-16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4가지 행동과 17절에 나와 있는 2가지 말씀을 분석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건과 말씀을 1세기의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해석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을 대입하는 시대착오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를 연구한 문헌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성전체제에 의하여 운영되는 억압적인 경제제도가 존재했다. 성전이 경제활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유대 팔레스틴의 경제를 지배하였는데 그 체제는 가난한 자들에게 불리한 제도였다.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에 시달렸고 빚더미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체제의 중심에 대제사장과 그 가문이 존재했다.
대 제사장들은 성전 내에 상점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성전경제제체의 직접적인 수혜자였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여러 번의 대중적 메시아 운동과 대중적 선지자운동이 일어났었다. 이 운동들의 목표는 선지자적인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었다.82)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4가지 행동과 2가지 말씀은 선지자적인 정의의 개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더군다나 이 행동이 유월절전야에 일어난 것도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날이 유월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을 보는 가장 그럴듯한 시각은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이 전체적인 성전체제의 부정의와 이것을 희생제사로 덮으려는 것에 대한 선지자적이고 메시아적인 상징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III. 선지자적 정의를 위한 주장
1. 예수님의 행동
1) 매매자를 쫓아냄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매매하는 자를 몰아내셨다. 그런데 이러한 희생제물을 사고파는 것은 모세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요한복음 2장에 비추어 볼 때 이 동물 등은 양과 소들인데 성전 뜰에서 양과 소를 매매한 것은 전례도 가지고 있다.83) 따라서 문제는 상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거래를 통한 정의롭지 못한 이득이었다. 성전의 상점들을 대제사장과 그 가문에 속해있었던 것이다.84)
따라서 C. Myers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성전의 시장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지배계층의 이익을 공격하신 것이다.85) 이것은 독점과 정의롭지 못한 이득에 대한 공격이었고 따라서 선지자적인 정의중 하나의 모티브인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으로 생각할 수 있다.
2) 환전상의 테이블 뒤집어 엎기
유월절이면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성전세를 내었다. 따라서 각지에서 온 유대인들 때문에 환전상이 필요로 했다.86) 이 환전상의 테이블은 1년 내내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니라 아달월 25일부터 유월절 까지만 존재하였다.87)
E. P. Sanders는 이 테이블을 엎은 것을 성전파괴의 상징으로 보려하고 J.Neusner는 이 사건을 성전제사의 폐지로 보려고 하지만 P. Richardson 또한 흥미있는 해석을 제시한다. 율법이 명하는 성전세를 내는 돈인 세겔화에 새겨져 있는 독수리의 모습이 문제가 되어 예수님이 환전상의 테이블을 엎으셨다는 것이다.88)
이것은 나중에 세겔을 주조한 것이 성전당국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이다.89)
P. M. Casey는 환전상의 테이블을 뒤엎은 것은 성전파괴의 상징이 아니라 성전에서의 상행위를 금지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90) W. Horbury는 이 사건을 성전세에 대한 예수님의 거부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91) 예수님은 마태복음 17:25-26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으로부터 성전세를 거부하는 것이다.92)
또한 성전세에도 부정한 이득이나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이 들어있다.93) 가난한 자에게 2
데나리라는 성전세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94) 이 모든 사실들이 예수님의 행동이 또한 선지자적 정의의 개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환전상이 개인의 사업이 아니라 성전자체의 조직된 행위라는 측면을 볼 때 더 그러한 것이다.95)
3) 비둘기 판매상의 의자를 뒤집어 엎기
이것에 대하여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그 의미를 한가지로 하고 있다. 비둘기는 율법에 의하면 가난한 자의 제물이다.96) 율법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은 비싼 양이나 소 대신에 덜 비싼 비둘기를 바칠 수 있다.97) 문제는 비둘기를 제물로 받아들이는 검사가 까다로 왔다는 것이다.98) 따라서 성전 안에서 파는 비둘기의 가격은 시중 보다 높았다.99) 이것은 예수의 행동이 또한 선지자적인 정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Kelber가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여기서 단순히 상거래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성전체제가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다.100)
4) 손에 무엇을 들고 다니는 것을 금함
이 행동은 매우 해석하기 힘들다. 심지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도 이 기사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이 구절에 관하여는 7개의 해석이 있다. R. Gundry는 성전을 지름길로 이용하는 것을 막은 것이라고 생각하고,101) B. Chilton은 이 구절을 스가랴서 14:20-21에 비추어 생각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성전에는 더 이상 장사꾼이 없을 것이라고 예언한 예언을 상기하라는 것이다.102) J. Massyngberd Ford도 또한 흥미 있는 해석을 제시한다. 예수님이 성전세를 담은 돈 가방을 들고 지나가는 것을 금하였다는 것이다.103) E. Chavez, W. Kelber, and C. Meyers 모두는 예수님이 무엇을 들고 다니는 것을 금하였다는 것은 성전의 운영을 중지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104)
P. M. Casey는 예수님이 금지하신 것은 모든 사고팔고 들고 다니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105) 이 문제에 관하여는 R. Bauckham 이 가장 신뢰가 가는 설명을 제시한다. skeuos 에 대하여 가능한 설명은 이것이 성전제사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담는 그릇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성전당국은 밀가루나 기름 포도주를 사들이고 팔았는데 이 과정에 이윤을 보았다.106) 따라서 이 경우도 비둘기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성전당국이 제사시스템을 운용하면서 부당한 이득을 보는 것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107)
이것은 Philo와 Josephus가 skeuos 를 성전의 그릇이라고 사용하는 것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108) 게다가 성경을 장절로 나누는 것은 현대의 습관이지 과거에는 장절구분이 없었다. 따라서 15절 16절로 나누어 해석하는 것도 현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행동 또한 성전당국이 부당한 이득을 보면서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역시 선지자적 정의의 개념에서 촉발된 사건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4가지 행동이 모두 선지자적인 정의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예수님은 어떤 행동을 하신 후에 성경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설명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 후에 말씀하신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2. 예수님의 말씀들
네 가지 행동을 하신 후에 예수님은 이사야 56:7과 예레미아 7:11의 말씀을 하셨는데 복음서에서 흔히 말씀은 방금 하신 행동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흔히 이 말씀들을 별도로 해석해서 이사야 56장은 기도와 이방인을 강조하고 예레미야 7:11은 성전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두 구절은 공통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지자적 정의의 개념— Mispat U Sdqh 이다. 이사야 56:1-8 과 예레미아 7:1-15은 선지자적인 정의의 개념 —Mispat U Sdqh에 관한 것이다. 이사야 56:1에는 Mispat U Sdqh 단어 자체가 나오고 예레미야 7:5-7은 주장하기를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거할 곳을 주는데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와 무죄한 자에게 정의를 행하는 한 그렇게 하신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109) Mispat U Sdqh의 내용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성전 행동후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선지자적인 정의에 관한 것이다.
1) 이사야 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은 기도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구절은 선지자적 정의 Mispat U Sdqh에 관한 것이다. 이사야 56:1은 Mispat USdqh로 시작한다. NRSV은 이 문장을 정의를 행하고 옳은 것을 하라라고 번역하지만 Weinfeld에 의하면 이것은 선지자적 정의를 의미한다.110) 따라서 이 구절은 억압당하는 이방인에 대한 왕적인 돌봄을 의미한다.111) Leclerc은 이 선지자적 정의가 하나님의 하늘의 통치의 특징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다윗계통의 왕의 임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사회정의는 이사야서에서 제사가 효과 있게 하는 기본전제인 것이다.112)
J. Blenkinsopp도 이 구절은 종말론적 윤리라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때 이방인을 향한 정의가 나타남으로 성전이 모든 민족에게 열리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결국이 구절은 이방인을 향한 정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113)
Brueggemann도 이 구절은 멤버쉽에 관한 정의를 나타내는 구절이라고 해석하고 있다.114)
2) 예레미야서
예레미야 7:1-15은 성경에 있는 가장 신랄한 성전에 대한 공격이다. 에레미야 7장의 맥락은 하나님이 성전을 저주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전관리들이 모세의 언약을 어기고 사람들로부터 재물을 갈취하여 성전에 숨겨놓았다는 것이다.115)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과 대제사장들을 하나님께서 멸하시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레미아 7:5-7은 선지자적인 정의의 개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예레미아 7:11절에 나타나는 도적의 굴혈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하여 논쟁이 치열하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가 요세푸스가 이 단어를 쓴 것과 같이 강도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C. Roth는 이 단어가 범법자나 게릴라를 의미한다 고 생각한다.116)
그러나 이것은 예레미아서의 원래 맥락을 무시한 해석이다. 우리가 칠십인역을 보면 이 단어는 예레미아 7:11, 18:22, 에스겔 22:9, 호세아 7:1, 오바댜 1:5에 사용되었는데 모두 대 제사장을 포함하여 잘못되고 타락한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특히 7:11절을 인용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개인적인 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체제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117) 그리고 요한복음 10장 에서도 이 단어는 거짓되고 타락한 지도자에게 쓰인다.118) 따라서 이 구절도 예수님의 선지자적인 정의의 개념을 나타낸다.
IV. 결론
지금까지 예수님의 성전행동에 관한 기존의 문헌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았고 또한 구절에 대한 주해를 통하여 예수님의 성전정화의 동기가 바로 선지자적인 정의의 개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성전체제가 선지자적인 정의를 실현하지 않고 그것을 종교적인 행위로 덮으려 한 것을 비판하는 상징적 행위로서 성전행동을 하신 것이다. 그 당시 사회적인 상황은 억압적인 농업중심의 사회경제 체제가 있었다. 무거운 세금과 십일조 그래서 지게 되는 빚, 또한 타락한 대제사장과 그들이 누리던 성전운영으로부터 얻는 부당한 이익등이 바로 문제였고 예수님은 이러한 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성전행동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행동을 하신 때가 바로 유월절 전야라는 것도 또한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의 동기를 보여 준다. 따라서 예수님이 보여준 선지자적인 정의의 개념, 즉 가난한자에 대한 돌봄과 억압에 대한 저항, 비폭력적 행위 그리고 집단으로부터 배제됨에 대한 저항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를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교회가 과연 예수의 가르침을 올바로 따르고 있는 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최근 한국에서는 정의론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그것은 그 만큼 한국사회가 정의에 대하여 목마르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는 반증이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정의를 주장하며 정의를 위하여 사신 분이다. 이러한 예수님을 따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정의의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마가복음 11:15-17 가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각 주
1) 이 논문은 이 태호의 박사학위 논문 중 일부를 수정 보완 발전시킨 것임. Cf Tae Ho Lee, "Jesus, Social Justice, and the Reform of Chaebul." Ph. D. Dissertation: Fuller Theological Seminary, 2006.
2) 어떤 학자들은 이 성전 사건이 두 번 일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동일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Cf Norman L. Geisler, Baker Encyclopedia of Christian Apologetics, Baker reference library (Grand Rapids, Mich.: Baker Books, 1999), 393.
3) 물론 포스트 모던 해석학적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작업은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비판일 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전통적인 주석학적 입장을 따라 사건을 분석하였다.
4) Richard H. Hiers, "Purification of the Temple: Preparation for the Kingdom of God,"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XC (1971), 83; Ben Witherington III, The Christology of Jesus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0), 115; Fitzme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1260-1264: Martin Hengel, Studies in Early Christology (Edinburgh: T & T Clark, 1995), 56; R.T. France, The Gospel of Mark (Carlisle: Paternoster Press, 2002), 437; Robert Gundry, Mark (Grand Rapids: Eerdmans, 1993), 641; C. E. B. Cranfield,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9), 357.
5) J. Fitzme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New York; Double Day, 1985), 1260-1264.
6) Victor Eppstein, "The Historicity of the Gospel Account of the Cleansing of the Temple," ZNW (1963), 58.
7) Bruce Chilton, The Temple of Jesus (University Park: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2), 103.
8) Ibid., 111.
9) Ibid., 108. 에반스는 이 견해를 두 가지 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에센파와 동일한 주장
을 하는 선생에 불과한 예수에게 그런 공격적 행위를 했는가? 또 왜 로마인들이 그러한 종교 지도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 Casey도 이 견해를 비판하고 산헤드린이 이동하였다는 원 자료를 찾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Casey, 323 참조. R. Gundry 도 이 견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Gundry, Mark, 645 참조..
10) H. D. Betz, "Jesus and the Purity of the Temple,"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16, no. 3 (1997), 470. 11) Ibid., 464.
12) Ibid., 472.
13) Casey, 332.
14) A. Y. Collins, "Jesus' Action in Herod's Temple," in Antiquity and Humanity, ed. Adela Yabro Collins and Margaret M Mitchell (Tubingen: Mohr Siebeck, 2001), 57.
15) Ibid., 60.
16) Ibid., 61.
17) C. A. Evans, "Jesus' Action in the Temple: Cleansing or Portent of Destruction?" CBQ 51 (1989), 243.
18) Ibid., 256.
19) P. Richardson, "Why Turn the Tables? Jesus' Protest in the Temple Precincts," 523.
20) Ibid.
21) J. D. M. Derrett, "No Stone Upon Another: Leprosy and the Temple,"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30 (1987), 12.
22) Hanson and Oakman, Palestine in the Time of Jesus: Social Structures and Social Conflicts, 141.
23) Jacob Neusner, "Money-Changers in the Temple: The Mishinah's Explanation," New Testament Study 35 (1989), 25.
24) E.P. Sanders, Jesus and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63.
25) H. Betz, "Jesus and the Purity of the Temple," 470. Stegemann은 "만약 마가복음 7:15이 오래된 전승에 속해야 한다면, 의식적인 정결이라는 원칙에 기초해 볼 때 윤리적인 마음의 정결도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Stegemann, The Jesus Movement, 209 참조. Malina도 또한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데올르기에에 따르면 하나님의 메시야는 하나님이 주신 정결의 도구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온다” 라고 주장한다. Malina, The New Testament World, 187 참조. 그러나 예수를 이방인을 위한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정결규칙에 해당되지 않은 메시아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심지어 안식일에도 정결하지 못한 사람을 치료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정결례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Malina, The New Testament World, 188, and Mark 2:27; 7:14-23 참조..
26) E.P. Sanders, Jesus and Judaism, 68.
27) J. Neyrey, "Clean/Unclean, Pure/Polluted, and Holy/Profane," in The Social Sciences and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ed. Richard Rohrbaugh (Peabody: Hendrickson, 1996), 93.
28) 예를 들어 바리새인은 정결에 대한 엄격한 준수를 실행하면서도 성전에서의 거래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Cf. Stegemann, The Jesus Movement, 154.
29) C. A. Evans and B. Chilton, Studying the Historical Jesus (Leiden: E. J. Brill, 1994), 335. D. Seeley도 관련되는 코맨트를 한다. Cf. D. Seeley, "Jesus' Temple Act Revisited: A Response to P.M. Casey," 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 62 (2000), 60. "예수님이 주장한 거룩함은 어떤 사람이 바리새인이나 제사장같이 공식적으로 거룩하다는 사실에 기초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엄격하게 음식과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 가에도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고 외부적인 것은 내면적인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 마음의 성실성이 없는 의식적인 행위는 소용이 없다. Mark 7:1-23 참조. 게다가 예수님은 정결례를 파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Mark 2:15-23 참조.“
30) H. Betz, "Jesus and the Purity of the Temple," 459.
31) E. Chavez,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Jesus' Temple Action in Mark's Gospel (Lewiston: The Edwin Mellen Press, 2002), 107. 게다가 Chavez는 그의 책에서 마카비 때의 성전정화와 예수님의 성전 행동의 차이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M. Borg 또한 성전정화라는 용어자체가 본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마가복음 11:15-17). M. Borg, Jesus in Contemporary Scholarship (Valley Forge, Pennsylvania: Trinity International, 1994), 116.
32) Chavez는 또한 Pss. Sol. 17:21-40은 성전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Cf. Chavez,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Jesus' Temple Action in Mark's Gospel, 106.
33) Tan, The Zion Traditions and the Aims of Jesus, 173.
34) David. E. Garland, Mark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6), 435.
35) Borg, Jesus in Contemporary Scholarship, 116.
36)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416.
37) S.G.F Brandon, Jesus and the Zealot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7), 331.
38) Ibid., 332.
39) Ibid., 333.
40) Ibid., 334.
41) Ibid., 323, Bammel 도 또한 예수의 성전행동은 열심당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Cf. Ernst Bammel, "The `Poor and the Zealots," in Jesus and the Politics of His Day, ed. Ernst Bammel and C.F.D. Moul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42) Chilton, The Temple of Jesus, 95
43) James D. G. Dunn, Jesus Remembered (Grand Rapids: Eerdmans, 2003), 639. M. Hengel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Cf. Martin Hengel, Was Jesus a Revolutionist? trans. William Klasse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1), 16-17.
44) Davies and Allison, Matthew, 137.
45) E. Lohmeyer, Lord of the Temple (Richmond: John Knox, 1961), 41.
46) Ibid., 43. E. Schweitzer는 이 사건의 중심부에는 이스라엘의 배타성과 하나님의 포괄성의 충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Cf. E. Schweitzer, The Good News According to Mark, trans. Donald Madvig (Richmond: John Knox, 1970), 233. W. D. Davies 또한 중요한 것은 이방인의 지위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사실은 거래가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Cf. W.D. Davies, Gospel and Land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4), 350 n. 46 (2).
47) Horsley,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297. L. Gaston은 "그러나 Lohmeyer는 예수님의 행동이 이른바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난 것에 너무 많은 강조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뜰이라는 명칭은 고대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Cf. L. Gaston, No Stone on Another (Leiden: E. J. Brill, 1970), 87.
48) Sanders, Jesus and Judaism, 68.
49) Ibid., 84.
50) Ibid., 75. P. Fredriksen도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이 견해에 동조한다. “국가적 해방의 명절 즈음해서 테이블을 엎는 예수님의 행동은 그의 사명에 비추어 볼 때 다른 유대인들이 볼 때 지금의 성전이 (하나님에 의해, 인간의 군대나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파괴되라는 메시지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질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의하여 대체되라는 메시지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P. Fredriksen, "Jesus and Temple," SBL 1990 Seminar Papers (1990), 299 참조. G. Theissen도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Cf. G. Theissen and A. Merz, The Historical Jesus (Minneapolis: Fortress, 1996), 432.
51) M. Hooker,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 (London: A & C Black, 1991), 266.
52) Horsley,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299.
53) C. Evans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 견해를 비판한다. "Sanders (Jesus and Judaism, 66–67, 364 n. 1)가 vv 16–17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은 그가 예수님이 타락에 대하여 선지자적인 저항을 하였다는 것 자체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Sanders의 주장이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동시대인이 유대 대제사장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그들을 타락했다고 간주하는 증거가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는 그러한 것의 증거를 사해사본에서 발견한다. 대제사장이 Wicked Priest"(1QpHab 1:13; 8:9; 9:9; 11:4)라고 불리우고, 또한 가난한 자를 강탈하는 자며 (1QpHab 8:12; 9:5; 10:1; 12:10), 부를 축적하고 (1QpHab 8:8–12; 9:4–5),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는자이다 (1QpHab 12:8–9). Testament of Moses 또한 대제사장을 저주하고 있다 (T. Mos. 7:6–10; tr. J. Priest in OTP ). Cf Evans, Mark 8:27-16:20, 168. K. H. Tan 도 또한 Sanders 주장이 타락이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취약해 졌다고 한다. Sanders도 또한 나중에 자신의 잘을 인정한다. Cf. E.P. Sanders, Judaism Practice and Belief(London: SCM Press, 1992), 323.
54) Tan, The Zion Traditions and the Aims of Jesus, 168.
55) 그의 최근 저서인 Jesus Remembered에서 Dunn은 그의 견해를 조금 수정한다. 그는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동이 어떤 의미에서 메시아적인 지 불분명하다고 주장한다. Cf. Dunn, Jesus Remembered, 639.
56) Ben Witherington III, The Gospel of Mark(Grand Rapids: Eerdmans, 2001), 245.
57)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511.
58) M. Bockmuehl, This Jesus (Downers Glove: InterVarsity Press, 1994), 68.
59) Tobit 13:16-18, 14.5 ; The Book of Daniel 9.17, 26f; Psalms of Solomon 8, 17.
60) m. sheqal 5:1-4, 6:5, 7:7, t.sheqalim 3:2-4, 9 bt. menahot 21 참조.
61) Bockmuehl, This Jesus, 92..
62) Chavez,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Jesus' Temple Action in Mark's Gospel, 100.
63) Evans, "Jesus' Action in the Temple: Cleansing or Portent of Destruction?" 249-250. Tg. Isa 53:5.
64) V.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London: Macmillan, 1966); Horsley, Jesus and Empire; D. Kaylor, Jesus the Prophet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4); J. D. Crossan, Historical Jesus (San Francisco: HaperSanFrancisco, 1991); Herzog, Jesus, Justice, and the Reign of God: A Ministry of Liberation ;Borg, Jesus in Contemporary Scholarship.
65) Horsley,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285.
66) Ibid., 285.
67) Kaylor, 61.
68) Crossan, Historical Jesus, 360.
69) Herzog, Jesus, Justice, and the Reign of God: A Ministry of Liberation, 127.
70) Ibid., 143.
71) Ibid.
72) Myers, Binding the Strong Man, 299.
73) Bauckham, "Jesus' Demonstration in the Temple," 74.
74) Borg, Jesus in Contemporary Scholarship, 114. M. Borg는 그의 초기 저작, Conflict, Holiness and Politics in the Teachings of Jesus. 에서의 견해를 바꾼다. 그의 변화된 견해는 Borg, Jesus in Contemporary Scholarship, 125n.72.에 나타나는 데 그는 정결을 지배계층의 이데올르기로 본다. Malina는 예수님의 성전행동이 성전의 지배층에 대한 심각한 Honor challenge로 본다. Cf. Malina and Rohrbaugh, Social-Science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 250. 그러나 그 당시 honor challenge는 사회적으로 동등한 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다.
Cf. Malina, The New Testament World, 35.
75) Collins, "Jesus' Action in Herod's Temple," 53. 하지만 W. Brueggemann은 거룩함과 정의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사상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Cf. Brueggemann, The Covenanted Self, 50.
76) G. Bornkamm, Jesus of Nazareth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60), 158-159.
77) Chavez,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Jesus' Temple Action in Mark's Gospel, 30.
78) Ibid., 161
79) J. P. Heil, "The Narrative Strategy and Pragmatics of the Temple Theme in Mark," Catholic Biblical Quarterly 59 (1997), 100.
80) Neusner, "Money-Changers in the Temple: The Mishinah's Explanation," 288.
81) Eppstein, "The Historicity of the Gospel Account of the Cleansing of the Temple,"
44.
82) 선지자적 정의, 언약적 정의, 사회정의가 거의 유사한 뜻으로 사용되는 데 그 개념은 가난, 억압, 폭력,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는 Tae Ho Lee, "Jesus, Social Justice, and the Reform of Chaebul", Ph.D. dissertation, Fuller Theological Seminary와 G. Stassen and D. Gushee. Kingdom Ethics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2003을 참조하라.
83) b Besah 20a–b; t. Hag. 2.2–3; y. Hag. 2.3; y. Besah 2.4를 참조하라.
84) J. Jeremias, Jerusalem in the Time of Jesus , 49.; J. Adna, Jerusalemer Tempel Und Tempelmarket Im 1. Jahrhundert N. Chr. (Wiesbaden: Harrassowitz Verlag, 1999), 94. Chavez는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Annas 와 그의 가족들은 마가복음 11:15절에 나오는 것과 같은 성전에서의 시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Cf Chavez,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Jesus' Temple Action in Mark's Gospel, 73. 그는 S.E. Jonhson A Commentary on Mark, 109.으로부터 이 글을 인용하고 있다. Hanson and Oakman 또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심지어 대제사장도 상업에 관련되어 있었는데, Eleazar는 명백하게 Phoenician glass-makers와 계약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성전의 이미지가 새겨진 유리그릇을 순례자에게 파는 것을 통제하고 있었다." Hanson and Oakman, Palestine in the Time of Jesus: Social Structures and Social Conflicts, 111. 그들은 Anita Engle, "An Amphorisk of the Second Temple Period," PEQ 109 (1977) 로부터 이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85) Myers, Binding the Strong Man, 300.
86) 심지어 쿰란공동체도 성전세를 거두는 세 개의 단지를 가지고 있었다. Jodi Magness, The Archaeology of Qumran and the Dead Sea Scrolls (Grand Rapids: Eerdmans, 2002), 193.
87) m. Shek. 1.3.
88) Richardson, "Why Turn the Tables? Jesus' Protest in the Temple Precincts," 520. Tyrian 동전은 고고학적인 발견에 따르면 갈릴리에서 보조적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Cf. Esler, ed., Modeling Early Christianity, 40.
89) Broshi, "The Role of the Temple in the Herodian Economy," 33.
90) Casey, 319.
91) W. Horbury, "The Temple Tax," in Jesus and the Politics of His Day, ed. Ernst Bammel and C.F.D. Moul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285.
92) Tan, The Zion Traditions and the Aims of Jesus, 176.
93) Chavez는 "화폐교환과 비둘기 판매에 있어서 사기가 있었는 지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그러한 상행위를 통제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 말하고 있다. Cf Chavez,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Jesus' Temple Action in Mark's Gospel, 72-73. Stegemann은 "성전당국이 화폐교환하는 자들을 고용하였는데 그들은 반세겔당 8 퍼센트의 보수를 받고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Cf. Stegemann, The Jesus Movement, 122. E. P. Sanders and D. Crossan는 사기나 도둑질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독점은 정상이윤이상의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Cf. Sanders, Jesus and Judaism , 367. n.39 and Crossan, Historical Jesus, 357.
94) Stegemann, The Jesus Movement , 121; Horbury, "The Temple Tax," 272; Bauckham, "Jesus' Demonstration in the Temple," 73.
95) Tan, The Zion Traditions and the Aims of Jesus, 177.
96) 가난한 자의 정의도 우리와 다르다. 가난한 자란 자신과 가족에게 부여된 빚, 외국에 살게 됨, 질병, 배우자의 죽음, 물리적인 사고 등으로 인하여 발생한 열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Cf. Malina, The New Testament World, 100.
97) 출산 (cf. Lev 5:7; 12:6–8; Luke 2:24)과 문둥병 (cf. Lev 14:22; Mark 1:44)등이 그러한 경우이다.
98) Tan, The Zion Traditions and the Aims of Jesus, 178; E. P. Sanders also supports this point. Cf. Sanders, Jesus and Judaism, 64.
99) 미쉬나에 보면 5배나 높은 경우도 있었다. Evans, Mark 8:27-16:20, 172-173.
100) W. Kelber, The Kingdom in Mark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4), 100.
101) Gundry, Mark , 643.
102) Chilton, The Temple of Jesus, 136. B. Chilton은 스가랴서 14:9절의 탈굼 버전이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와 스가랴 전통간의 중요한 연결고리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요한복음 2:16절에서 예수님이 하신말씀도 스가랴서 14:21절의 내용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마가복음 본문에 스가랴서 14장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103) J. Massyngberd Ford, "Money "Bags" in the Temple (Mk 11, 16)," Biblica 57 (1976), 253.
104) E. Chavez는 성전도구는 피를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Cf. Chavez,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Jesus' Temple Action in Mark's Gospel, 142. Kelber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도구의 통행을 막은 것은 성전의 제사기능을 정지시킨 것이다. 마가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성전의 비즈니스적인 운영뿐만 아니라 제사와 의식적 기능까지 정지시킨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전은 더 이상 운영되지 않는다. 모든 기능서 정지된 것이다. Cf Kelber, The Kingdom in Mark, 100-101. C. Meyers도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의 목표는 성전의 기능을 모두 정지시키기 위한 것이다 라고 주장함으로써 Kelber에 동조한다. cf Meyers, Binding the Strong Man, 301.
105) Casey, 311.
106) m. Seqalim 4:3; 5:; cf. 4:8.
107) Bauckham, "Jesus' Demonstration in the Temple," 78.
108)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ited by Gerhard Friedrich. Vol. 10 compiled by Ronald Pitkin. Edited by Kittel, Gerhard, Geoffrey William Bromiley, and Gerhard Friedrich, Vol. 7, Page 360.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1976.
109) Myers, Binding the Strong Man, 303.
110) Weinfeld, Moshe. "Justice and Righteousness." In Justice and Righteousness, ed. Henning Graf Reventlow and Yair Hoffman.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2. Blenkinsopp는 이 용어가 예언서 전체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Cf. Joseph Blenkinsopp, Isiah 56-66 (New York: Doubleday, 2003), 143. W. Brueggemann도 또한 "이 단어 두 개가 합쳐져서 강한 자와 약한 자 그리고 부자와 가난한 자를 서로 하나가 되게 해주도록 하는 언약 공동체적에 대한 율법의 의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W. Brueggemann, Isaiah 40-66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8), 169. 참조
111) Borg, Jesus in Contemporary Scholarship, 115. Borg는 이 구절이 이사야서에서 가장 포괄적인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112) Leclerc, Thomas. Yahweh Is Exalted in Justice. Minneapolis: Fortress, 2001, 137.
113) Blenkinsopp, Isiah 56-66, 133.
114) Brueggemann, Isaiah 40-66, 171.
115) Horsley, Jesus and Empire, 92.
116) Roth, Cecil. "The Cleansing of the Temple and Zechariah 14:21." Novum Testamentum 4, no. No.3 (1960): 174-181.
117) Walter Brueggemann, A Commentary on Jeremiah (Grand Rapids: Eerdmans, 1998), 80. Josephus가 성전을 자신의 거점으로 만든 반군 지도자를 bandits라고 부르기는 하나 그것은 70년의 일에 관한 것이지 30년에 관한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 서의 이 표현은 타락한 지도자에 관한 것이다.
118) E. Chavez Chavez,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Jesus' Temple Action in Mark's Gospel, 157. Cf. P.J. Harland, "Robber or Violent Man?" Vetus Testamentum 46 (1996), 532. W.L. Holladay, Jeremiah 1, Hermenia (Philadelphia: Fortess, 1986), 246, Evans, Mark 8:27-16:20, 175, Borg, Jesus in Contemporary Scholarship, 115, and Bauckham, "Jesus' Demonstration in the Temple," 84 모두 이 해석을 지지한다. Malina & Rohrbaugh은 이 표현을 사회과학적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강도의 굴혈이란 강도들이 불법적으로 탈취한 재물을 쌓아두는 곳이라고 해석하는데 이 구절은 예레미야 서 7:11로부터 온 것이다. 성전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부른 것은 성전이라는 기관이 탐욕과 강탈과 연결된 기관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Malina and Rohrbaugh, Social-Science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 250 참조.
예수와 사회정의 마가복음 11:15-17
논평 김형원 하.나.의. 교회
본 논문은 막 11:15-17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주해하면서 예수님의 행동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저자가 밝혔듯이,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게 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일치된 합의에 이르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는 바로 이 난해한 본문에 대한 과감한 해석의 시도를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학자들 사이에 논의된 것을 하나씩 비판적으로 분석한 후에 “마가복음에 대한 철저한 주석적 분석과 1세기 팔레스타인 농촌에 관한 원자료(Primary Source)와 경제인류학적 모델 분석(Economic Anthropological Model)을 바탕으로 가능한 그 시대상에 접근하는 것을 통해” 그 의미를 밝히려고 한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저자는 예수님의 성전 사건이 “유대교의 타락과 그로 인한 백성에 대한 경제적 억압 즉 부정의에 대한 선지자와 메시아로서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결론 내린다. (1쪽)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예수님의 네 개의 행동과 두 개의 구약 인용 말씀을분석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러한 시도는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좀 더 밝혀져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고 생각되어 언급하고자 한다.
(1) 저자는 11쪽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를 연구한 문헌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성전체제에 의하여 운영되는 억압적인 경제제도가 존재했다. 성전이 경제활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유대 팔레스틴의 경제를 지배하였는데 그 체제는 가난한 자들에게 불리한 제도였다.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에 시달렸고 빚더미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체제의중심에 대제사장과 그 가문이 존재했다. 대 제사장들은 성전 내에 상점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성전경제제체의 직접적인 수혜자였다.”
이 주장은 본 논문의 핵심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자료를 제시하는 것이필요하다. 그러나 충분한 자료나 문헌이 언급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2) 12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C. Myers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성전의 시장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지배계층의 이익을 공격하신 것이다. 이것은 독점과 정의롭지 못한 이득에대한 공격이었고 따라서 선지자적인 정의중 하나의 모티브인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성전의 상점들은 대제사장과 그 가문에 속해있었던 것이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서 입증될 수 있지만, 그 상점들이 독점이었는지, 정의롭지 못한 이득을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자료로 입증할 수 있는가?
(3) 13쪽에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P. M. Casey는 환전상의 테이블을 뒤엎은 것은 성전파괴의 상징이 아니라 성전에서의 상행위를 금지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W. Horbury는 이 사건을 성전세에 대한 예수님의 거부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17:25-26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으로부터 성전세를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성전세에도 부정한 이득이나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이 들어있다. 가난한 자에게 2 데나리라는성전세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예수님의 행동이 또한 선지자적 정의의 개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환전상이 개인의 사업이 아니라 성전자체의 조직된 행위라는 측면을 볼 때 더 그러한 것이다.”
이것은, Horbury의 주장을 따라 성전세가 과도하고 부정한 이득이 들어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성전세를 거부했다는 것인가? 14쪽에서 비둘기 판매상의 의자를 뒤엎는 행동은 각주 99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시중가의 5배나 높은 폭리를 취했다는 것이 분명한 증거로 남아있지만, 성전세에 대해서는 이러한 분명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예수님이 성전세 2데나리가 과도해서 성전세를 거부한 것인가? 아니면 성전세에 부당한 이득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거부한 것인가? 둘 중 하나인가 아니면 둘 다 해당되는 가? 또한 왜 성전세에 대한 예수님의 거부가 환전상에 대한 분노로 나타나는지 그 연관관계도 분명치 않다. 환전상이 성전세를 받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회경제적인 증거들이 더 제시될 필요가 있다.
(4) 14쪽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문제는 비둘기를 제물로 받아들이는 검사가 까다로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전 안에서 파는 비둘기의 가격은 시중보다 높았다. 이것은 예수의 행동이 또한 선지자적인 정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이 “예수님은 여기서 단순히 상거래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성전체제가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자동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수님의 행동의 동기가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연적인 가능성, 상황적
인 추정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위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좀 더 분명한 문헌적이고 상황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않으면“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4가지 행동이 모두 선지자적인 정의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15쪽)는 결론적인 주장은 지나친 주장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본 논문의 적용과 관련해서도 몇 가지 언급을 하려고 한다.
(1) 17쪽에서 “예수님은 성전체제가 선지자적인 정의를 실현하지 않고 그것을 종교적인 행위로 덮으려 한 것을 비판하는 상징적 행위로서 성전행동을 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국교회라는 세팅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한국교회도 모든 것을 종교적이라는 이름으로 덮으려고 하지 않는가?
(2) 예수님의 이런 행동이 종교 집단에게 주는 경고인가? 아니면 당시 정교일치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결국 사회 전체에 주는 경고인가? 양자를 모두 포함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내부적인 측면에서 회복되어야 할 정의는 무엇인가? 또한 사회적인 측면에서 회복되어야 할 정의는 무엇인가?
(3) 마지막으로, 17쪽에서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위를 “비폭력적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행동이 비폭력적이라는 것인가? 어떤 점에서 그런가? 이것은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태호 숙명여자대학교
논평 김형원 하.나.의. 교회/http://blog.daum.net/hopeyard/7504
나도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막 11:33; 마 21:27; 눅 20:8)
본문은 예수님께서 고난주간 예루살렘 성전 경내를 거니실 때 산헤드린의 대표들이 와서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의 정치와 종교 재판소였다. 저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여기서 이런 일은 성전 밖에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포함해서 바로 전날에 있었던 성전 청결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성전 경내에서 짐승을 사고파는 것을 금하셨고 이런 저런 물건들을 들고 성전 안을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다.
산헤드린에서는 이런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받고 사실을 알아볼 생각으로 대표를 파송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권세를 네게 주었느냐고 물었다. 그 당시 성전은 성전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 성전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니질 않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셨다. 다만 그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심으로 간접적인 대답을 꾀하셨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게로서냐고 물으신 것이다. 산헤드린 대표들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가 부끄럽게도 진퇴유곡에 빠진 셈이었다. 그들은 참으로 그들이 나갈 수 없는 한 출구를 발견한 격이었다. 그래서 가장 수치스러운 굴복을 하고야 말았다.1) 왜냐하면 그들이 만일 요한의 행적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라고 대답한다면 그를 선지자로 믿지 않은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사람에게로 온 것이라고 말한다면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알기 때문에 돌로 침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들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우리가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직접 질문에 대답해 주시지 않고 "나도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대적하여 자신들을 강퍅하게 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나 크리스천의 삶의 기쁨에 대해서 조금밖에 모르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예수님의 뜻에 복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2) 여기서 문제의 뿌리는 그들의 능에 있지 않고 그들의 완고한 의지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정죄하였다. 예수님의 질문은 함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직도 그들의 눈 먼 것을 깨닫고 자복하며 눈을 떠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구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였다. 그들의 완고한 의지는 성령을 대적하고 그 성령을 끊임없이 계획적으로 반대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3)
결국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가 선지자 세례요한의 내 메시아직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한 증거를 거절하였으므로 나도 내 권위에 대한 너희의 요구에 어떤 다른 만족할만한 대답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누가복음 16:31에 나오는 지옥에 간 부자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면서 살아 있는 그의 형제들에게 그곳에 오지 않도록 죽었던 나사로를 보내 전도하게 해 달라는 그 부자의 소청이 거절된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의 증거가 족하다고 하였다. 만일 저들에게서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해도 듣지 않으리라 하였다.4)
오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의문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진리를 추구할 때만 대답해 주신다. 하나님께 나와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시 143:10)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주
1. R.C.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Mark's Gospel. p.504
2. W. Hendriksen, The Gospel of Mark. p.467
3. R.A. Cole, Mark. p.183
4. J.A. Alexander, The Gospel of Mark. p.315
cafe.daum.net/correcttheo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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