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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회당(Synagogue, 시나고게)

by 은총가득 2020. 9. 8.

 

회당(Synagogue), 시나고게

회당의 전통적인 기능은 그것이 갖고 있는 3가지 히브리어 이름인 베트 하테필라(기도하는 집), 베트 하크네세트(집회하는 집), 베트 하미드라시(학습하는 집)에 반영되어 있다. 회당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함께 모이다'라는 뜻의 synagein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집회 장소를 뜻한다. 오늘날 일부 개혁파와 보수파 회중들은 성전이란 말을 쓴다.
회당의 기원은 BC 3세기 이전이 틀림없지만 AD 70년 티투스가 제2성전을 파괴하자 회당의 중요성은 훨씬 더 커져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회당은 자율적으로 움직이므로 회당을 세우고 유지할 때 랍비와 직원들은 지역공동체의 요구들을 반영한다. 회당 건물에는 일정한 표준이 없다. 전형적인 회당에는 궤(율법 두루마리들을 보관한 상자), 궤 앞에서 타오르는 '영원한 빛', 즉 2개의 촛대, 교도들이 앉는 자리, 성서를 낭독하고 종종 사회자가 예배를 인도할 때 올라서는 조금 올라간 강단(bimah)이 있다.

 

가버나움은 나사렛을 떠난 예수님께서 근거지로 삼은 갈릴리 선교 중심지 역할을 한 곳으로

그 곳의 회당(시나고그)에서 가르치시고 설교를 하셨다.

회당(Synagogue)의 이해

회당은‘베트 암’(µ[ tyb = 백성의 집)으로 불렸고, 그에 합당하게 공동체 모임이나 축제와 법정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인이나 아이들을 위한 교육 기관의 역할도 하였고 도서관 혹은 자료실 등의 목적에도 기여하였다. 그래서 미쉬나는 도시를 구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로 회당을 언급한다(mNed 5:5).

 

이스라엘의 성전은 하나 뿐이다.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종교적 구심점이었다. 그런데 이 성전이 바벨론의 침입으로 완전히 무너졌고,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605-432B.C.) 성전도 무너졌고, 낯선 이방땅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이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회당이다. 회당(synagogue)이란 말은 syn(함께)과 ago(인도하다. 데려가다)의 합성어이다. 회당은 가장(家長) 10명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설립할 수 있었다.

 

회당에서는 주로 예배와 교육을 하였다. 예배는 우리 시간으로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전에 드렸다.

어린아이들은 주간에 회당에서 읽고 쓰기를 배웠는데, 교과서는 주로 구약성서였다. 6살에 모세오경, 쓰기, 수학을 배웠고, 10살에 미쉬나를, 15살에 가마라를 배웠다.

회당은 또한 지방법정으로도 사용됐다. 구전에 의하면, 예루살렘(혹은 팔레스타인)에 약 480여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회당의 구조

회당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 방은 기도, 설교, 공중예배의 사무실, 그리고 다른 방은 배운 사람들의 모임, 종교와 훈련에 관한 질의응답, 교육의 목적 등으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의 예배 장소를 벹하크네셑(Bet-ha-Cneset/회당, 집회소), 강의를 하던 곳은 벹하미드라쉬(Bet-ha-Midrash/서재)라고 부른다. 번창하는 지역에 있던 회당들은 시기와 장소에 따라 훌륭한 건축양식과 장식을 갖추었다. 필수적인 기구는 성경궤, 휘장막, 단, 강단, 등, 촛대, 회중석) 등이였다.

 

회당 공동체가 설립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명의 종교적 성인이 필요한데, 이들을 가리켜‘민얀’(Minjan)이라고 부른다(Meg IV, 3). 경우에 따라서는 기도를 위한 최소한의 수인 10명을 보장할 수 있도록 직업을 갖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예속되지 않은 성인 남자 10명을 요구한다. 이들을 가리켜서는‘바트라님’(Batlanim)이라고 부른다.

 

민얀에 속하지 않는 여성은 회당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는 아니었으나, 여러모로 동참하였다.

사도행전에 드러나듯이 디아스포라 여성들은 회당예배에 즐겨 참여하였다.

 

회당 봉사자의 직책과 하는 일

가장 중요한 직책은‘회당장’(ajrcisunavgwgo" archisynagogos 혹은 tsnkh var rosch ha-knesset)이고, 세 명으로 구성된 회장단이 회당 공동체의 외적 사무를 관할한다(jMeg III,2,74a).

 

회당장은 회당 관련 제반 업무(재정, 제의, 행정, 정치)를 책임진다.

누가복음 13장 14절은 예배를 책임지며 집회의 과정이 율법에 따라 수행되는지를 감독하는 회당장에 대해 언급한다.

 

회당장 외에도 중요한 직책으로서 ‘회당 봉사자’(uJphrevth"hyperetes 혹은 diavkono" diakonos, 히브리어로 ˆzj hazzan)가 있다. 이들은 예배 때 토라 두루마리를 낭독자에게 나르며 낭독이 끝나면 다시 원위치로 가져가며(Joma VII,1; 눅 4:20), 율법을 범한 회원에게 태형을 집행하기도 했으며(참조 고후 11:24), 나팔소리로 안식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일도 맡았고(Schab 35b), 회당 청소도 하였다.

회당의 역할과 중요성

성전과 더불어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제도라고 말할 수 있는 회당의 역할과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율법을 가르치고 전하여 유대 공동체가 율법에 친숙하도록 한다. 이런 의미에서 회당은 토라를읽고 가르치며 듣고 배우는 토라의장이다.

② 회당은 디아스포라의 경우 성전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성전 멸망 후에는 성전을 대신하는 기능을 맡았다. 이러한 사실은 본래 성전에 있었던 일곱 촛대(Menora)가 회당에 세워졌고, 성전 예배의 여러 제의적 관행이 회당 예배의 관행과 동일하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③ 회당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기도처이다. 요세푸스(Ap 1:209)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회당에서“저녁 때 까지”기도했다고 한다.

④ 회당은 동시에 교육 기관이다. 율법에 관한지식및 성경 읽기를 중개함으로써 일종의 초등학교(rpsh tyb)의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미쉬나 연구소(vrdmh tyb)의 역할도하였다.

⑤ 지역 모임을 위한회합 장소의 역할을 한다.

⑥ 타지 유대인들을 위한숙소의 기능도수행하였다

 

양측으로 기둥이 있어 세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오른쪽의 키가 큰 열대식물이 종려나무(대추야자)로 중간에 조금 노랗게 보이는게 꽃이다.

 

검은돌의 집터들...옆 건물은 베드로 기념교회

유배 시절 성전 대신 생겨난 공공장소

 

예수님과 사도들은 유다인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때 주로 ‘회당’에서 하셨다. 회당은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던 기도의 집일 뿐 아니라 주민의 물질적 생활을 감독하고, 지방 재판관을 임명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유다인 사회의 중요한 공공장소였다.

회당은 기원전 6세기 유다인의 바빌론 유배 시절에 성전의 역할을 대신해 생겨났다는 것이 통설이다. 유다인들은 3차례에 걸쳐 바빌론으로 유배됐다. 기원전 597년 신바빌로니아왕국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에제키엘 예언자를 비롯한 유다인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켰다.

이후 이집트군의 개입으로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티나의 몇몇 도시가 바빌로니아에 항거해 독립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고 말았다. 바빌로니아 군은 기원전 587년 18개월간 항거하던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성전을 파괴하고 사제와 관리, 귀족들을 처형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다시 강제이주시켰다. 이것이 제2차 바빌론 유배이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신바빌로니아왕국은 점령지인 팔레스티나 지역에 자국민을 이주시키고 지역의 가난한 이들에게 땅을 나눠줬다(2열왕 25,12; 예레 39,10). 또 유다인을 다스릴 총독으로 그달야를 임명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달야는 매국노로 간주돼 이스마엘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기원전 582년 신바빌로니아왕국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반란자들을 처단하고 유다인들을 다시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켰다(예레 52,30).

이방인의 땅 바빌론으로 끌려온 유다인들은 당장 부정한 곳에서 어떻게 하느님께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을지를 모색해야 했다. 그래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민족들 사이로 쫓아 버리고 여러 나라로 흩어 버렸지만,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얼마간 그들에게 성전이 되어 주겠다”(에제 11,16)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경신례를 바칠 ‘민가’(예레 39,8)를 정했다.

그리고 예언자들과 랍비들은 이 시기부터 ‘기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일부 랍비들은 성전이 없는 곳에서도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도가 모든 희생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탄후마 레위」)고 가르치기까지 했다.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는 기원전 538년 키루스 칙령을 통해 바빌론에서 유배 중이던 유다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시켰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은 제단을 다시 세우고 희생 제사를 바쳤다. 하까이 예언자는 성전을 빨리 재건할 것을 유다인들에게 독촉했고, 기원전 446년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복구를 마무리하고 종교ㆍ사회 개혁을 단행했다(느헤 1-6장 참조).

유다인들이 고향으로 귀환했음에도 회당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수가 늘었다.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고 도시에는 여러 개가 있었다. 유다인이면 누구나 자신의 집을 회당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 서기 1세기 로마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79년) 시대 예루살렘에는 480개의 회당이 있었고 팔레스타인 지역 밖으로 흩어져 있던 유다인 거주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에는 1000개가 넘는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복음서에는 나자렛(루카 4,16)과 카파르나움(마르 1,21) 회당이, 사도행전에는 다마스쿠스(9,2)와 살라미스(13,5),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13,14), 이코니온(14,1), 테살로니카(17,1), 베로이아(사도 17,10), 아테네(17,17), 코린토(18,4), 에페소(18,19)의 회당이 등장한다.

회당은 주택지대보다 높은 데 세워졌다. 랍비들은 “아무도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집을 지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동시에 정결례를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시냇물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그 좋은 예가 ‘성문 밖 강가’(사도 16,13)에 있던 필리피 회당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곳에서 티아티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와 그의 온 집안 식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회당 건물은 소박했다. 양식은 지방에 따라 달랐으나 통상 3개의 입구가 있고 정면에 계단이 있었다. 카파르나움에서 발굴된 회당은 주랑에 둘러싸인 뜰이 있고 중앙에는 정결례용 수반이 있고, 바깥벽에 작은 방들이 딸려 있었다. 이 회당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르치셨던 회당(마르 1,21)을 기초로 200년 후에 증축된 건물이다. 이 회당의 맨 아랫단에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회당의 검정 현무암이 남아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유다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때 주로 ‘회당’에서 하셨다. 회당은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던 기도의 집일 뿐 아니라 주민의 물질적 생활을 감독하고, 지방 재판관을 임명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유다인 사회의 중요한 공공장소였다.

회당은 기원전 6세기 유다인의 바빌론 유배 시절에 성전의 역할을 대신해 생겨났다는 것이 통설이다. 유다인들은 3차례에 걸쳐 바빌론으로 유배됐다. 기원전 597년 신바빌로니아왕국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에제키엘 예언자를 비롯한 유다인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켰다.

이후 이집트군의 개입으로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티나의 몇몇 도시가 바빌로니아에 항거해 독립 반란을 일으켰으나패하고 말았다. 바빌로니아 군은 기원전 587년 18개월간 항거하던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성전을 파괴하고 사제와 관리, 귀족들을 처형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다시 강제이주시켰다. 이것이 제2차 바빌론 유배이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신바빌로니아왕국은 점령지인 팔레스티나 지역에 자국민을 이주시키고 지역의 가난한 이들에게 땅을 나눠줬다(2열왕 25,12; 예레 39,10). 또 유다인을 다스릴 총독으로 그달야를 임명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달야는 매국노로 간주돼 이스마엘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기원전 582년 신바빌로니아왕국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반란자들을 처단하고 유다인들을 다시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켰다(예레 52,30).

이방인의 땅 바빌론으로 끌려온 유다인들은 당장 부정한 곳에서 어떻게 하느님께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을지를 모색해야 했다. 그래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민족들 사이로 쫓아 버리고 여러 나라로 흩어 버렸지만,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얼마간 그들에게 성전이 되어 주겠다”(에제 11,16)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경신례를 바칠 ‘민가’(예레 39,8)를 정했다.

그리고 예언자들과 랍비들은 이 시기부터 ‘기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일부 랍비들은 성전이 없는 곳에서도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도가 모든 희생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탄후마 레위」)고 가르치기까지 했다.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는 기원전 538년 키루스 칙령을 통해 바빌론에서 유배 중이던 유다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시켰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은 제단을 다시 세우고 희생 제사를 바쳤다. 하까이 예언자는 성전을 빨리 재건할 것을 유다인들에게 독촉했고, 기원전 446년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복구를 마무리하고 종교ㆍ사회 개혁을 단행했다(느헤 1-6장 참조).

유다인들이 고향으로 귀환했음에도 회당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수가 늘었다.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고 도시에는 여러 개가 있었다. 유다인이면 누구나 자신의 집을 회당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 서기 1세기 로마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79년) 시대 예루살렘에는 480개의 회당이 있었고 팔레스타인 지역 밖으로 흩어져 있던 유다인 거주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에는 1000개가 넘는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복음서에는 나자렛(루카 4,16)과 카파르나움(마르 1,21) 회당이, 사도행전에는 다마스쿠스(9,2)와 살라미스(13,5),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13,14), 이코니온(14,1), 테살로니카(17,1), 베로이아(사도 17,10), 아테네(17,17), 코린토(18,4), 에페소(18,19)의 회당이 등장한다.

회당은 주택지대보다 높은 데 세워졌다. 랍비들은 “아무도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집을 지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동시에 정결례를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시냇물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그 좋은 예가 ‘성문 밖 강가’(사도 16,13)에 있던 필리피 회당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곳에서 티아티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와 그의 온 집안 식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회당 건물은 소박했다. 양식은 지방에 따라 달랐으나 통상 3개의 입구가 있고 정면에 계단이 있었다. 카파르나움에서 발굴된 회당은 주랑에 둘러싸인 뜰이 있고 중앙에는 정결례용 수반이 있고, 바깥벽에 작은 방들이 딸려 있었다. 이 회당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르치셨던 회당(마르 1,21)을 기초로 200년 후에 증축된 건물이다. 이 회당의 맨 아랫단에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회당의 검정 현무암이 남아 있다

 

가버나움의 시나고그

 

갈릴리 호수 북쪽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으로, 가버나움은 나사렛을 떠난 예수님께서 근거지로 삼은 갈릴리 선교 중심지 역할을 한 곳으로 그 곳의 시나고그(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설교를 하셨다.

이 지역은 예수님 시대 전부터 이스라엘 남쪽에서 예루살렘을 지나 북쪽 다마스쿠스를 거쳐 바빌론으로 통하는 길이며

주요 중계지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회당은 예수님에게 하인의 치료를 부탁한 백부장이 검은 현무암으로 크게 지었다 하며(누가 7:1~5),

그후 2세기 말에 많은 유대인 들이 이주해 와서 예수님시대의 회당을 증축했다가,

4세기경에는 예수님 시대에 건설한 현지의 검은 돌인 현무암(예수님 시대 건물) 건물을 완전히 부수고 그 기초석 위에,

하얀 돌인 석회암(비잔틴시대)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재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회당이다

그 지역의 돌이 검은색인데 회당의 돌은 하얀색이어서 White Synagogue라고 하며 구별하였다고 한다.

하얀 돌은 현지의 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많은 자금과 인력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갈릴리지역에서는 가장 큰 2층 시나고그였으며, 1층은 남자, 2층은 여자들의 예배소였다고 한다.

출입문이 3개인데 가운데로는 랍비, 지도자들의 출입문이었고 옆의 양쪽 문은 일반인들의 출입문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문으로 들어서면 돌기둥이 늘어서 있는데, 이 가버나움 회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지어저서 양측으로 두 줄로 기둥이 서 있어서 내부는 세 구역으로 나누어저 있다.

바실리카 양식이란 고대 로마의 공공건물의 건축양식을 말하는데 시장과 법정을 겸비하였으며,

정방형의 내부를 두줄 혹은 네줄의 기둥으로 나누어 약간 넓은 중앙 공간과 양측 공간으로 나누는 건축양식을 말한다.

기둥은 고린도양식으로 포도덩굴이나 독수리등으로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회당에서는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것, 기도하는 것, 그리고 토론하고 구제하는 것 등의 일을 하였다고 하며,

부속 건물이 있어 밤이 되면 나그네들을 재워주었다고 한다.

 

이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 기적 후에 생명의 떡(요한 6:35)에 대하여 설교 하셨다.

마가 1: 21 안식일에...요한 6 : 35, 6 : 53~59

 

가버나움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는 한 도시로 가버나움은 4복음서에 만 등장한다.

예수님 당시에는 제법 번화한 도시로 인구는 약 15,000~20,000명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세관이 있었고(마태9:9, 마가2:14),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마태8:5~13, 마가 1:21), 가죽, 고기, 향료등이 많았다고 한다.

(마태 4:13-16; 누가 4:31; 요한 6:17-24).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배척받으신 나사렛을 떠나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전도를 시작하시었고 전도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으로, 따라서 가버나움은 본 동네’(own city)라고 불리기도 했다(마태 9:1; 마가 2:1).

이곳에는 세관의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곳도 이곳이었다(마태 9:9).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교훈과 이적을 행하였으며, 12 제자를 정하셨고 많은 설교를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하지도 믿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언대로 6세기에는 성읍이 몰락하여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가버나움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시다.(마태 8:5-13)

 

Sinagoge 시나고게 : 회당

 

시나고그(히브리어: בית כנסת 베트 크네세트) 또는 유대교 회당 은 유대인교회, 유대인의 예배장소이며 유대교의 사원이다. 즉 유대교는 모세5경을 위주로 하며 신약은 인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이다.

모임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시나고게(συναγωγή, synagogē)'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히브리어로 '베트 크네세트'라고 불리며 시나고그 대신 예배의 집을 뜻하는 '베트 테필라(히브리어: בית תפילה)'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회당은 제1차 유대 독립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종교적 구심점이던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무너저 소멸되고 나서,

흩어진 유대교 모임의 지역적 중심이 되어 유대교 회당이 그 위치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전통식으로 지어진 시나고그는 출애굽기당시 사막을 헤매던 유대인들이 만든 이동 신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의 시나고그의 모습은 건물이 있는 나라의 문화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보수적인 정통파 유대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개혁파 유대교 운동이

1800년쯤 독일에서 시작되면서 나라의 문화와 유대교 문화가 절충된 형태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초로 설립된 개혁파 유대교 시나고그는 1811년 함부르크에서 열렸는데, 예배를 위하여 오르간을 설치하고, 비마를 앞으로 옮기는 등, 전통적 시나고그보다 교회와 흡사해 젔으며, 남녀가 같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등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회당(Synagogue)은 각 지역 질서의 중심이었습니다. 예수는 중앙정부의 공권력이 직접적으로는 미치지 않는 촌락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기적을 일으킬 때는 소문을 내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설교는 수수께끼에 가까운 비유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대중을 상대하고 나면 어김없이 집회 장소를 벗어나 제자들을 데리고 외딴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당시 엘리트 집단 가운데 사두가이파는 로마 정권과 친밀했고 바리사이파는 지방자치의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애초에 요한이나 예수와는 섞일 수 없는 집단이었고, 바리사이파는 처음에는 예수에 우호적이었으나 죄를 용서하는 권한, 안식일, 정결예법 등에서 보인 그의 파격적인 선포를 도발로 받아들이면서 결국 적대적으로 돌아섰습니다.

‘저 자는 누구인데 감히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가 2:7, 누가 5:21)

 

현대인의 합리적 관점으로 보자면, 죄의 용서는 하느님도 구세주도 국가 기관도 아닌 오직 그 범죄로 피해를 입은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예수 본인도 갈등 당사자끼리의 화해를 무엇보다 중시했습니다. “일어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다툰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마가 11:25). 예수는 질병을 치료하거나 악령을 쫓아낼 때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는 말로 죄책감을 함께 지웠습니다. 민중의 죄의식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는 암시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고대의 여러 국가에서 질병과 광기는 죄의 소산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나병, 중풍, 하혈, 간질 등 숱한 질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은 육체로 겪는 고통으로도 모자라 죄의식에도 시달려야 했으며 사회적으로도 죄인으로 낙인을 찍히는 삼중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용서받기 위해 바칠 속죄를 위한 제물을 제대로 마련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수의 시선은 가난한 사람들의 저런 고통을 꿰뚫어보고 있었으며, 그의 언사는 심리 치료의 효력을 지녔습니다.

“너의 죄가 용서받았다.” 이를 바꿔 말하면 이렇습니다. “나는나 하님의 대리자이다.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하였으니 하나님도 그리하실 것이다. 앞으로는 마음 편히 지내도록 하여라.”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는 예수의 저러한 언사를 신성모독이라 비난했지만 사실은 트집이며 억지에 불과합니다. 신의 대리자로서 민중이 저지른 죄의 용서를 비는 행위는 이미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줄곧 해오던 일입니다. 가까이는 요한의 물세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예수는 민중의 죄책감을 씻어주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진 자’의 위치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크리스천 공동체는 훗날 그의 죽음을 구세주 스스로 제물로 바친 행위로 받아들임으로써 죄를 용서하는 구세주의 권한과 지위를 교리적으로 완성시킵니다. 한편, 이 부분에서 주의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는 악의를 벗어버릴 의지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해지게 돕는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잘못을 후회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가해자와 증오와 복수심에 시달리는 피해자를 중재하는 지점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이 놓여 있습니다. 그 지점을 우리는 인간의 양심이라 부릅니다.

예수의 파격적인 행동은 실로 거침이 없었습니다. 몸을 팔았던 여성들과 로마 제국의 부역자인 세리들과도 거리낌 없이 음식과 술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병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법이오.”(마르크 2:17, 루가 5:31)

혁신적인 사람이 형식보다 본질을 중시하는 건 당연했습니다. 안식일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 예수의 제자들이 이삭을 뜯어 비벼 먹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점을 비난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자중시키기보다 안식일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말을 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가 2:27, 28)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이 발생하자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이 일을 크게 문제 삼고 저들끼리 예수의 처리를 두고 의논하기에 이릅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다. 이날을 범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날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겨레에서 추방당해 목숨을 잃을 것이다.”(출애굽 31:14)

이런 일들이 있던 무렵에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골라 사도로 세웠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크 1:17) 못 고치는 병이 없고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당당하기 그지없는 예수. 그의 소문을 듣고 유다와 예루살렘은 물론 인근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전국적이었으며 심지어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하지도 않았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되 권위적이거나 탐욕스럽지 않았고 언제고 어디에서고 차별 없는 사랑의 도리를 설파했습니다.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한 부분은 아마도 그런 예수 때문에 자신들의 밥그릇이 위협받는 일이었을 겁니다.

 

예수의 명성을 듣고 제자가 된 사람들 중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민중은 그를 다양하게 평가했습니다. 어떤 이는 오시기로 한 그리스도라 하고, 어떤 이는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는 예언자라 하고, 어떤 이는 부활한 요한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헤로데조차 자신이 죽인 요한이 부활했다고 말할 지경이었습니다.(마르크 6:14-16)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민중 속으로 들어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물로 세례를 베풀지도 않고 그냥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예수의 방식은 금욕과 물세례로 대표되는 요한의 방식과는 확실히 크게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좀처럼 종교적 의미의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제자가 그 이유를 묻자 예수는 스스로를 혼인 잔치에 나와 있는 신랑으로 비유하며 아리송하게 대답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훗날 예수의 제자들은 저 말씀처럼 기성의 유대 교회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교회를 이룩합니다.

예수가 저항하는 방식은 다른 민중지도자들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비폭력 저항. 마태와 루가는 그의 가르침에 자신들의 해석을 가미해 복음서를 기록했는데, 둘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 당신의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시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시오.”(마태)

“당신 뺨을 때리는 자에게는 다른 뺨을 내밀고, 당신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 가게 내버려 두시오.”(루가)

먼저 마태의 서술을 들여다봅시다. 오른뺨을 친다는 건 상대의 얼굴을 손등으로 침으로써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모욕을 동시에 안긴다는 뜻입니다. 이때 왼뺨을 돌려대는 행위는 '치려면 제대로 치라. 나도 당신과 동등한 인간이다.' 하는 선언을 품습니다. 속옷을 가지겠다는 요구에는 상대를 수치스럽게 하겠다는 모욕이 담겨 있습니다. 벌거벗은 몸은 고대사회에서 금기입니다. 겉옷까지 내어주어 아예 벌거벗은 채로 다니는 행위는 분명 저항이며 고발입니다. 반면, 루가의 서술은 마태의 것과 달리 무저항에 가깝습니다. 마태의 기억이 실제에 더 가까울 거라 추측합니다.

예수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권위는 떨어졌습니다. 중산층의 지지를 받고 일반 계층과 하층민들에 군림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 악의에 가득 차 급기야 예수가 악마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다른 악마들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모함하는 이가 나오기에 이릅니다. 이때 예수는 성령 모독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하는 유일한 죄악이라고 받아칩니다. 회심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뚤어진 영혼은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 하기 마련입니다. 예수가 베풀고 있는 선량한 가르침과 행위를 악마의 소행으로 볼 정도라면 이미 영원히 회복 불가능한 영혼일 겁니다. (마가 3:20-30; 마태 12:22-32, 누가 11: 14-23)

 

규정보다 본질을 우선으로 하는 예수는 종교적 겉치레를 강조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상류층을 대변하는 사두가이파나 중산층을 대변하는 바리사이파는 평소 반목했지만 예수를 헐뜯고 시험하는 데에서만큼은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들이 혹시 무슨 흠잡을 게 없나 하고 예수에게 기적적인 표징을 구했을 때, 예수는 요나의 표징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며 그들을 떠나버렸습니다. 요나의 표징이란 두 가지를 뜻합니다. 하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여 다가올 징벌을 면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요나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고 살아난 일.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갈릴래아 지방과 유다 지방을 오가며 설교하던 예수는 더 이상은 권력의 눈과 귀와 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그 세력을 규합해 물리적인 행동을 해도 좋을 정도였을 테니 로마 정권에서도 보고받은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군중 속에서 지낸 지 3년이 되던 해에는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갑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참으로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예수의 생각을 알 리 없는 군중은 성전 입구부터 열광하며 그를 환영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를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예수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쫓아내며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었습니다. 물건들을 나르느라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도 금했습니다.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구나!” 이 일은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모두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두 세력 모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상거래의 가장 큰 수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애버리기 위해 본격적으로 모의합니다.

 

 

예수는 로마 정권과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책잡힐 일은 가급적 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세를 비롯한 세금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파격적인 가르침을 어리석고 무식한 군중이 자칫 율법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으로 오해할까 꺼려했는지 율법의 실천을 강조하는 일도 매우 잦았습니다. 율법을 잘 준수한다고 자부하는 어떤 부자 청년에게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라. 그래야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예수의 이해는 감동적입니다. 부자들 여럿이 와서 보란 듯이 많은 돈을 넣을 때, 가난한 과부가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돈을 헌금하는 모습을 본 예수는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 상자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사무엘에게 한 말씀이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훼는 중심을 본다.”(사무엘 16:7) 이 감동적인 일화를 헌금 강요의 근거로 악용하는 종교인은 모두 사기꾼이고 악당입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복음서에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했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사랑과 그들의 존경이 커지면 커질수록 기득권층인 로마와 유대 지도층의 불안도 커지고, 이는 곧 예수의 목숨이 위험해짐을 뜻했습니다.< 유용선>

 

 

회당

 

회당의 전통적인 기능은 그것이 갖고 있는 3가지 히브리어 이름인 베트 하테필라(기도하는 집), 베트 하크네세트(집회하는 집), 베트 하미드라시(학습하는 집)에 반영되어 있다.

회당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함께 모이다'라는 뜻의 synagein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집회 장소를 뜻한다. 이디시어 '슐'('학교'라는 뜻의 독일어 Schule에서 유래)도 회당을 가리키는 말로 쓰며, 오늘날 일부 개혁파와 보수파 회중들은 성전이란 말을 쓴다. 회당의 기원은 남아 있는 증거로 볼 때 BC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제 역사는 그것보다 오래된 것이 틀림없다. 일부 학자는 BC 586년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후 임시로 개인의 집들이 공공예배와 종교교육 장소로 쓰이다가 회당이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다른 학자들의 추측에 따르면 예루살렘 밖의 공동체 대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 의식에 참석할 때 그 의식을 직접 집행시킬 수 없으므로 성전 경내에서 2주 동안 함께 모여 기도하도록 정했는데, 이러한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회당이 유래했다고 한다.

 

그 기원이 무엇이든 간에 회당은 AD 70년 티투스가 제2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의 제의와 제사장 제도를 종식시킬 때까지 고대 성전 의식과 나란히 존재하면서 점점 늘어났다. 성전이 파괴되자 회당의 중요성은 훨씬 더 커져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1세기 문헌에 따르면 회당들은 팔레스타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로마·그리스·이집트·바빌로니아·소아시아 등지에도 많았다.

1세기 중반까지 대부분 유대인 공동체은 회당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매일 아침·점심·저녁에 예배를 드렸으며, 안식일과 종교 절기들에는 특별한 의식을 행했다.

오늘날 회당은 기본적으로는 고대의 회당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만, 형편에 따라 교제·휴식·자선행사들도 한다. 회당은 기도와 경전 공부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유대인 공동체가 세운 본질상 민주적인 제도이다. 예배 때는 제사를 드리지 않으므로 공중 예배에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

 

회당은 자율적으로 움직이므로 회당을 세우고 유지할 때 랍비와 직원들은 지역공동체의 요구들을 반영한다. 회당 건물에는 일정한 표준이 없다. 전형적인 회당에는 궤(율법 두루마리들을 보관한 상자), 궤 앞에서 타오르는 '영원한 빛', 즉 2개의 촛대, 교도들이 앉는 자리, 성서를 낭독하고 종종 사회자가 예배를 인도할 때 올라서는 조금 올라간 강단(bimah)이 있다. 오랫동안 내려오던 남녀 차별의 관습이 정통파 회당들에서는 아직도 존속되고 있지만, 개혁파와 보수파 회당들에서는 폐지되었다. 어떤 회당 건물에는 몸을 씻는 의식을 행하는 목욕탕(mikvah)이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