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
(8:1-13)
a. 더 좋은 언약의 필요성 1-6
b.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근거 7-10
c. 새 언약의 특징 11-13
제 8 장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사역의 우월성을 논하는데, 여기서는 그의 제사가 새 성소에서 새 언약에 의해 드려지는 것을 밝히고 있다.
a. 새 언약의 필요성 1-6
저자는 지금까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논술했는데, 8:1-10:18에서는 언약, 성소, 제사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중 8장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직무와 새 언약의 필요성을 서로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 제사장과 달리 하늘에서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면서 하늘의 참장막에서 거룩한 일을 다스리는 자로 좌정해 계신다. 또한 인간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피흘린 제물을 바치는 대신 그리스도는 죄를 근절시키기 위한 완전하고도 확정적인 제물로 자신을 단번에 드리셨다. 6-9절에서는 새 언약이 옛 언약의 한계를 뛰어넘는 완전하고도 충족된 언약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v.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 "중요한 것 Kefavlaion 케팔라이온, the sum"은 "머리 kefavle, 케팔레"에서 유래한 단어로 '요점', '핵심'을 의미한다. 저자는 먼저 그리스도에 관한 핵심적인 사실을 설명해 나아가기 위해서 '케팔라이온'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such'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앞에서 지금까지 한 언급을 가리킨다. (2) 다음에 이어지는 말, 곧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언급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중 본절에서는 후자가 타당하다.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 저자는 7:28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하나님의 아들됨의 개념을 함께 묶어 설명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의 제사장직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을 연결하였다. 본문은 시 110:1의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에 대한 인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70인역(LXX) 슥 6:13의 '그리고 그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라'를 의식하고 반영하였을 것이다. 본문에서 '하늘에서 위엄의 the throne of the Majesty in the heavens'는 하나님을 존대히 여기는 표현 방법으로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위대한 분이심을 시사한다.
v.2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 '성소와 참 장막'은 문자적으로 '참 장막인 성소'(the sanctuary, the true tabernacle, NIV)를 의미하는 것으로 '성소'와 '참 장막'은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을 행하시는 하늘 처소를 가리킨다(롬 8:34). "성소 tw'n aJgivwn 톤 하기온, of the sanctuary"은 70인역에서 종종 성소의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지 않고(9:2,3) 사용된 일반적인 용어이다. 또한 "장막 th'" skhnh'" 테스 스케네스, of the tabernacle"은 문자적으로 '천막'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예배드리는 장소로 사용했던 천막(출27:21)을 암시한다. '장막'을 수식하는 형용사 “참 ajlhqinh'" 알레디네스, true”은 '원형' 혹은 '영원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거짓'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 혹은 '불완전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하늘 처소를 시사한다. 한편 “부리는 자 leitourgo;" 레이투르고스, A minister”는 공식적인 일을 수행하는 자로서 '사역자' 혹은 '종'을 뜻하는 것으로 본절에서 그 실재적인 의미는 '대제사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지상의 장막과는 다른(9:11,24) 주께서 직접 이루신 하늘 처소에서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중보 사역을 행하신다.
v.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일'을 그들은 소제물과 수소, 수염소, 수양, 비둘기 같은 번제물로써 1년에 한 번씩 속죄 제사를 드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도 드려야 할 제물이 있어야 한다. 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드려야 할 제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렇게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것은 저자의 독특한 표현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드려야 할 것은 '흠 없는 자신'이었다(7:27; 9:14).
v.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if He were on earth, He would not be a priest'라는 말은 반어적(反語的)인 표현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늘로 승천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제사장이 되셨다는 의미가 된다. 예수께서는 지상의 어느 성소에서도 제사장직을 수행한 적이 없다. 이 땅의 성소에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아론 계통의 레위 제사장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막 밖에서 잡은 짐승의 피를 기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렸다(레 4:4,5). 그와 같이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대속의 피를 흘린 몸을 가지시고 하늘에 있는 참된 성소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중보 사역을 수행하신다(7:25; 9:12,24).
v.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지상의 성소에서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성소는 하늘에 있는 참 성소의 ‘모형과 그림자 the example and shadow'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상은 플라톤(Platon)의 이데아 사상 곧 지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하늘에 있는 '이데아'들의 모형이라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 쉬우나 본절은 저자가 출 25:40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으며, 유대인들에게 지상의 것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라는 뿌리깊은 사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플라톤의 사상보다는 구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 본문은 출 25:40의 인용이다. 이외에도 동일한 문구가 출애굽기의 다른 곳에서도 언급되어 있다(출 25:9; 26:30; 27:8). “본 tuvpon 튀폰, pattern”은 출 25:40에서 사용된 '탑니트'(식양)와 동일한 표현으로 구두적(口頭的)인 지시보다는 가시적(可視的)인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혹자는 모세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지상에 있던 성소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식양(式樣)대로 지어진 것이었으며 이같은 식양을 따라 세워진 성소와 성소의 각종 기구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상징적 의미를 지닌 모형에 불과하다(출 25-40장). 이러한 상징적인 모형들은 언젠가 실체에 의해 대체(代替)될 수 밖에 없었으며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대체되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바쳤을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마 27:51)은 더 이상 이 땅의 성소가 필요 없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심으로 지상의 성소는 하늘의 성소로, 인간의 제사장 사역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v.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행하시는 곳은 지상의 성소가 아니라 하늘처소이다. "직분 leitourgiva" 레이투르기아스, ministry"은 헬라 고전에서 종교적인 용어로 사용된 예가 없는 단어이다. 그러나 70인역(LXX)에서는 제의적인 어감(nuance)을 지닌 말로서 성스러운 직임(職任)을 나타낼 때에만 사용되었으며, “아름다운 diaforwtevra" 디아포로테라스, a more excellent”은 '우월한' 이라는 의미를 지닌다(superior, NIV, Rovertson). 예수께서 얻으신 직분이 아름다운 이유는 대제사장의 가장 본질적인 임무인 속죄 사역에 있어서 예수께서 이루신 것이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한편 “얻으셨으니 tevteucen 테튀켄, he has obtained”는 '달성하다', '얻다'의 뜻을 지닌 동사 'tugcavnw 튕카노'의 완료형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러한 직분을 얻으셨으며 현재에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 “중보 mesivth" 메시테스, the mediator”는 본서에서 언제나 '더 좋은 언약' 혹은 언약이 새 중재자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더 좋은 약속으로 ejpi; kreivttosin ejpaggelivai" 에피 크레이트토신 에팡겔리아이스, upon better promises”에서 'ejpi; 에피'는 '...의 근거 위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과 맺은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이 더 좋은 약속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약속'의 내용은 10-12절에서 인용되고 있는 렘 31:31-34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완전한 순종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렘 31:31-34에 예언된 새로운 언약의 시대를 여셨다. 새 언약은 과거에 맺었던 옛 언약과는 비교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언약으로 예수께서 지상에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원 사역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b.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근거 7-10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새 장소에서 시행된다는 것을 말한 후 여기서는 새 언약에 관해 거론한다. 그리고 그 새 언약을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직을 수행하시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v.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 저자는 '첫 언약'과 '둘째 언약'의 비교를 통해서 '첫 언약의 불완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둘째 언약'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제시한다. '저 첫 언약 that first covenant'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었던 계약, 즉 유대인들의 율법과 규례와 계명을 가리킨다(출 19:3-8; 24:7; 신 6:1-3). 그리고 '둘째 것'이란 '새 언약'(8절),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더불어 세우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완전한 언약을 가리킨다(막 14:24; 요 19:30). 새로운 언약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옛 언약이 불완전하였음을 시사한다. 모세의 중재로 주어진 율법은 외적인 면만을 정결케 할 수 있었을 뿐 인간의 내면 즉 양심을 깨끗게 할 수 없었으며(9:9,10) 인간이 온전히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좋은 새 언약으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v.8 본절에서 12절까지는 렘 31:31-34의 인용이다. 저자는 이 인용을 통해서 첫 언약을 대체한 새 언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 본절의 '날이 이르리니 the days are coming' 나 10절의 '그 날 후에 after those days'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주 사용한 표현으로(렘 30:3; 31:27,31,38) 미래에 도래할 메시야 시대를 가리킨다. 한편 '내가...새 언약을 세우리라 I will make a new covenant'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것은 옛 언약 즉 모세의 율법을 폐하심을 암시한다. (2) "세우리라 suntelevsw 쉰텔레소, when I will make"는 "이룩하다 suntelevw 쉰텔레오"의 미래 능동태이다. 이는 새 언약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서 성취됨을 시사한다. 이러한 새 언약의 상대자는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되어 있다(렘 31:31). 예레미야 당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한 국가로 존속하지 못하고 두 왕국으로 나뉘어져 이미 북 이스라엘은 망하고 남유다만이 남아 있던 때였다(렘 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나타나는 것은 장래에 두 나라가 하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기도 하다.
v.9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 본문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 즉 옛 언약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을 잡고 즉 부모가 어린 자녀를 안전한 장소로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호 11:1-4)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난의 땅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서 언약을 세우셨다. 이때 맺은 언약은 첫 언약으로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 이 언약은 불완전하였다(7절; 9:9,1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 언약을 미래에 주시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였다. '같지 아니하도다 not according to'는 새 언약이 모세 율법을 수정한 정도의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나타낸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they did not continue in My covenant'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지 않았음을 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노예와 같은 처지에 있던 이스라엘 열조(列祖)들을 구원해 주신 후 그들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언약을 맺었으나(출 19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 언약을 준행치 아니하였다. 그결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간에 맺어졌던 옛 언약의 효력은 상실되었으며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지 못하고 진노의 심판을 선고받았다(렘 22:5). 여기서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hjmevlhsa 에멜레사, disregarded"는 '무시하다' 혹은 '등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셨음을 나타내는 강한 표현이다.
v.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 저자는 예레미야서를 인용하는 가운데 '주께서 가라사대 says the Lord'라는 문구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과 새로운 언약을 세우는 일이 사람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그 날 후에'가 언제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으로 with the house of Israel'라는 말로 보아서 예레미야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었던 이스라엘 왕국이 다시 하나가 될 그 어느 미래를 내다보며 예언한 표현일 것이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새롭게 세울 언약은 '첫 언약'(7절) 즉 모세에게 주신 율법과는 다른 것이었다. 후자가 외적인 것으로서 돌판에 새겨진 것이었다면(출 32:15,16), 전자는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으로서 돌판이 아닌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한 I will put My laws in their mind and write them on their hearts' 것이었다. 여기서의 '생각과 마음'은 인간의 내적 본성인 지성(至誠)과 감성(感性)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법을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은 옛 언약이 할 수 없었던 양심의 정결(9:9,10) 곧 인격적인 변화를 시사한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의문(儀文)에 의해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기를 원하지 아니하신다. 반대로 하나님의 법을 자기 백성의 심비에 새겨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법과 명령에 순종하는 새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c. 새 언약의 특징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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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새 언약의 특징이 언급된다. 그것은 첫째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까지 미치는 보편성이요, 둘째는 사죄의 확실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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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니 아니 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 10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새 언약의 특성이 열거되고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모세를 통하여 내리신 계시로 하나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세대가 다 죽은 이후의 세대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셨던 일도 알지 못하였다(삿 2:10; 호 4:1,6). 그러나 새로운 언약 안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는 개개인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새 언약은 10절에서 언급된 대로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진리를 먼저 받아들인 자가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여 줄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도 사역은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는 주된 사역 가운데 하나이다(눅 10;1-16; 고전 1:21). 전도 사역을 통해서 전해진 지식은 객관적이며 피상적인 지식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인용된 예레미야 선지자의 '나를 앎이니라 all shall know me'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실제적인 지식으로서 개인이 하나님과 교제할 때 비로소 아는 지식을 가리킨다. 새 언약의 백성들은 타인이 전해준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법을 생각과 마음으로 알게 되며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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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새 언약 안에는 하나님이 백성들의 죄를 용서한다는 약속이 들어있다. 옛 언약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범죄할 때마다 제사장에게 가서 속죄 제사를 드려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새 언약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6절)께서 단번에 신자들의 모든 죄를 속해 버리는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이다(7:27; 10:10). 따라서 하나님은 새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구약 시대의 제사와 같은 일을 반복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필요한 것은 범죄할 때마다 겸손히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그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뿐이다(요 5:14; 갈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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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 저자는 이제 새 언약의 내용에서 관심을 돌려 '새 언약'의 "새 kainhvn 카이넨, new"에 초점을 맞춘다(8절).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선포하셨다는 것은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주셨던 옛 언약 즉 율법의 효력을 폐기시키셨음을 암시한다. 옛 언약은 불완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통해서 옛 언약을 폐기시키고(7:11,12) 불완전한 구약 시대의 율법을 온전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완전히 대체(代替)시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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