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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아론보다 탁월하신 예수 그리스도(5:1-10)

by 은총가득 2020. 7. 4.

 

 

아론보다 뛰어난 그리스도

(5:1-10)

 

a. 대제사장의 자격 1-4

b.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5-10

 

제 5 장

 

a. 대제사장의 자격 1-4

 

본문에서는 먼저 논하고 있다.

 

v.1 저자는 본절에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 직무가지 특징을 언급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된 자여야 한다. 그래야만 백성들의 입장과 처지를 잘 이해하고 그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 대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중재하는 중보자(中保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 대제사장은 중보자적 역할을 이루기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 gifts and sacrifices for sins'를 드리게 된다.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는 대속죄일과 연관된 것으로서, 대제사장은 1년에 한차례씩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가 자신을 포함한 온 백성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렸다(레 16장). 본절의 “예물 dw'rav 도라, gifts”은 대속죄일에 드렸던 '소제물'을 뜻하는 말로서 하나님께 감사와 충성을 나타내는 밀가루, 감람유, 유향, 무교병(無교餠)등의 감사 제물을 가리킨다(레 2:1-16). 또한 “속죄하는 제사 qusiva" uJpe;r aJmartiw'n 두시아스 후페르 하말르티온, sacrifices for sins”는 번제물을 가리킨다. 번제에 드리는 제물은 흠 없는 수소, 수염소, 수양, 비둘기 등으로서(레 1:3-17) 화제를 통하여 이런 번제물을 드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대속 받으며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다짐하였다(레 1:3-17).

 

v. 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 본절은 대제사장에 대한 설명이다. 대제사장은 타인의 무지와 미혹을 용납할 수 있는 자이다. "무식하고 ajgnoou'sin 아그노우신, on the ignorant"는 '알지 못하다' 혹은 '모르고 죄를 짓다'라는 의미이며 “미혹한 planwmevnoi" 플라노메노이스, on them that are out of the way”은 '잘못 인도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10:26의 “짐짓 JEkousivw" 헤쿠시오스, wilfully” 즉 의도적으로 범죄하는 것과 반대되는 의미로 모르고 짓는 우발적인 죄를 시사한다.

 

한편 “용납 할 수 있는 metriopaqei'n 메트리오파데인, compassion Who can have”은 신약에서 단 한번 나오는 말이다. 이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특성인 “체휼하지 아니하시는 mh; dunavmenon sumpaqh'sai 메 뒤나메논 쉼파데사이, annot be touched with the feeling of our infirmities”와는 다르다(4:15).

 

'메트리오파데인'은 철학적인 용어로 ‘감정을 조절함’이라는 뜻이다. 즉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거나 자제하여 다른 사람을 친절하고 사려 깊게 대하는 것을 뜻한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 인간을 포용함을 말한다(마 8:17). 대제사장은 이러한 성품으로 무지나 실수로 죄를 범한 자들에게는 동정을 베풀어 용납하였으나(9:7; 레 4:2,13,22,27; 5:2-4), 의도적으로 범죄한 자는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제외시켰다(민15:30,31).

 

대제사장이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동정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 속에서 범죄할 수 있는 '연약에 싸여 also is compassed with infirmity'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말은 ‘동정함’ ‘부드럽게 대함’ 등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래서 스토아 철학에서의 ‘부동’ ‘무정념’(아파테이아)과 걱정 염려의 중간으로서의 ‘절도 있는 감정’을 나타낸다.

 

v.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했으며, 또한 일반 제사장들보다 더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으나(출 28: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죄지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율법은 대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 대비하여 속죄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해 놓았다(레 4:3-12;9:7).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일반 회중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직계 권속을 위하여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행하는 제사 중에 드리는 기도는 세 가지이다.

(1)자신과 자기 가족의 죄를 위하여(m.Yoma 3:8). (2)아론계통의 제사장들의 죄를 위하여(m.Yoma 4:2). (3)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위하여(m.Yoma 6:2). 구약시대 대제사장에 대하여는 4:15에서 예수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죄는 없으시니라 cwri;" aJmartiva"코리스 하마르티아스, yet without sin"고 주장할 수 없었다. 구약시대 대제사장과 그리스도의 차이는 바로 '죄 있음'과 '죄 없음'에 있었다.

 

v.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 대제사장의 직분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직분이 세습되었다(출 28:1; 민 3:10; 18:1). 아론 집안 외의 사람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될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직접 부르셨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직분을 업적이나 성품 혹은 물질에 의해서 획득할 수 없는, 타인과 동등한 연약한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임명(任命)된 존재이다.

 

b.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5-10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구약의 아론의 계통의 제사장처럼 하나님의 임명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이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시편의 두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특히 시 110:4을 인용한 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영원하며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아론의 대제사장직과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v.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 저자는 앞에서 모세와 예수의 유사성을 비교하여 모세와 예수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서 유사성이 있었으나(3:1-2), 우월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음을 논증하였다(3:3-6).

 

같은 방법으로 본절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아론과 그리스도가 비교되고 있다. 양자는 스스로 대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우월하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증거하기 위해 시 2:7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하늘의 특권을 지닌 자이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존재임을 제시한다. 한편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라는 이름 대신에 "그리스도 oJ Cristo;" 호 크리스토스, Christ" 즉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v.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 저자는 앞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대제사장이심을 논증하기 위해 시110:4을 인용하고 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ata; th;n tavxin Melcisevdek 카타 텐 탁신 멜키세덱, after the order of Melchisedec"는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멜기세덱과 같은 유형 계열의 제사장이시라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신적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에게는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은 다음과 같은 유사성을 지닌다.

 

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유사성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신 존재임을 논증하고 있다. 아론계통의 대제사장은 오로지 제사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며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로서 훨씬 더 우월하시다.기세덱과 같은 유형 계열의 제사장이시라는 의미로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신적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에게는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은 다음과 같은 유사성을 지닌다.

 

그 리 스 도

멜 기 세 덱

존재의 시작과 끝이 없음

(요 8:58; 계 1:4)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음(7:3)

대제사장이시며 만왕의 왕이심

(계 19:1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면서

살렘의 왕임(7:1; 창 14:18)

생명의 떡과 포도주로 예표되는 자신의

몸과 피를 인류의 대속물로 주심

(마 26:26-29)

아브라함에서 떡과 포도주를 줌

(창 14:18)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레위 지파를 좇 는 제사장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 으로 제사장이 되심(5)

레위 지파 이전의 인물로 지극히 높으 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됨(7:1)

 

v.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 본절은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음을 시사한다(2:14-18). "육체 sarko;" 사르코스, of His flesh"는 '살'을 뜻하는 말로서 '영'과 반대되는 물질적인 육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연약성을 지니셨으며 인간이 느끼고 당하는 감정이나 어려움을 똑같이 느끼시는 대제사장이심을 시사한다(4:15).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 본 구절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 중 겟세마네에서 드린 고뇌에 찬 기도 장면에 대한 묘사일 것이라고 주장하나(눅22:39-46) 예수의 지상 사역 중 어느 특정한 순간에 적용시키기보다는 그의 대제사장적인 사역 전체에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에서 “올렸고 prosenevgka" 프로세넹카스, when he had offered up”는 희생 제물을 '바치다'라는 의미의 제의적(祭儀的) 용어이다. 이것은 1절에서 언급된 대제사장의 제사와 평행을 이룬다. 대제사장이 속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물'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올린 '간구와 소원'을 의미한다.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 “경외하심 eujlabeiva" 율라베이아스, he feared”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혹자는 '두려움'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기도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예수는 죽음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을 느끼셨으나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복하셨다. (2)혹자는 '율라베이아스'가 '잘'에 해당하는 접두사 '유'와 '붙들다'는 뜻의 헬라어 '람바노'의 합성어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본문은 시 22:24의 '부르짖을 때 들으셨도다'와 상응된다. 이것의 일례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을 들 때의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라는 예수의 기도가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사실상 예수의 기도의 목적은 고난의 잔을 옮기는 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었으므로(막 14:32-36) 그의 기도는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하나님은 예수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 이 사실을 저자가 본절에서 밝히는 이유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의 제사가 항상 받아들여진 것은 아닌 반면에 예수의 기도는 받아들여졌음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본문은 앞에서 언급된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과 연결된다. “죽음에서 ejk qanavtou 에크 다나투, from death”는 예수께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예수를 지배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활을 통해 죽음의 영역을 극복하셨음을 시사한다.

 

v.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고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e[maqen ajf j w|n e[paqen 에마덴 아프 혼 에파덴, yet He learned obedience by the things which He suffered"는 헬라문학에서 오랫동안 쓰어진 관용구로서 ‘배우다’의 헬라어 동사어근 '마드'와 '고난받다'의 동사어근 '파드'는 음성학적으로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수사학적인 효과를 위해 자주 함께 사용되었다. 수사학적 관용구가 적용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며 순종의 과정 속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본절에서 사용된 “고난받다 에파덴'는 '파스코'의 부정 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본서에서 오직 '예수의 수난'에만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한다.

 

v.9 온전하게 되었은즉 - 본절은 고난받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본질이 불완전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해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서 온전케 되셨음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통해 구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그의 백성의 대제사장으로 완전하다는 인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이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그리스도께서는 온전케 되신 결과로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본절의 '순종'은 앞절에 언급된 예수 자신이 행하신 '순종' 즉 죽음의 고난을 받기까지 행한 철저한 복종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한 것과 같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도 그러한 순종을 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 aijwnivou 아이오니우, of eternal"은 '끝없는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시간의 차를 뛰어넘는 참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참 하늘에 속한 것임을 암시한다.

 

v.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순종으로 온전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칭하심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 as High Priest 'according to the order of Melchizedek'"이라는 것은 멜기세덱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6절) 그리스도께서 율법 하에 있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과는 다른 약속의 은혜에 의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