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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믿음의 진보에 대한 호소

by 은총가득 2020. 7. 4.

믿음의 진보에 대한 호소

(5:11-6:20)

 

a. 믿음의 진보에 대한 호소 5:11-6:12

b.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6:13-6:20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에 대하여 상세히 말하려고 하나, 독자들의 지각이 둔하므로 먼저 영적으로 성장할 것을 권면하고 그 후에 다시 그에 대해서 논하려는 것이다.

여기서는 히브리서의 주제를 잠시 떠나 실제적인 권면을 하고 있으며, 7장 이후에 다시 주제로 돌아온다. 먼저 영적 발전의 필요성에 대하여 논하고(5:11-14), 그 의무를 밝힌 후 인내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을 지켜 나갈 것을 권하고 있다(6:1--20).

 

a. 믿음의 진보에 대한 호소 5:11-6:12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멜기세덱과의 관계를 통해 진술하던 기자는 유대인들의 영적 미성숙 때문에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설명을 잠시 중단하고 유대인들에게 영적인 지식에 대해서 자라갈 것과 그 지식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호소하고 있다.

 

v.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Peri; ou| 페리 후, Of whom"은 헬라어 '멜기세덱'이라는 명칭이 직접 거명되지 않고 관계대명사 '후'로 나타난다. '후'의 성(性)에 따라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후'는 남성으로 10절의 멜기세덱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2)'후'는 중성으로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대제사장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멜기세덱에 관하여 일반적인 유대 개념과 는 다른 관점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저자가 7:1-28에서 그것을 논하기에 앞서 본절을 통해 수신자들을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저자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납득할 만한 이해력이 수신자들에게 결핍되어 있음을 수신자들에게 주지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할 말이 많으나 polu;" oJ lovgo" 폴뤼스 호 로고스, have many things to say”는 헬라 문학의 관용구로서, 다루고 있는 주제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 “둔하므로 nwqroi 노드로이, dull”는 부정어 '네'와 “멀다 호데오”의 합성어로서 '듣는 것에 무관심한' 혹은 '이해력이 부족한'을 뜻한다. 혹자는 본절을 앞 문단의 결말로 보아 '듣는 것이 둔하다'는 말은 9절에서 언급된 '자기를 순종하는' 즉 그리스도께 대한 철저한 복종을 요구하는 저자의 말을 수신자들이 충분히 깨닫지 못함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v.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 '때가 오래므로 for the time'는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오래되었음을 의미한다. 본절은 수신자들의 신앙이 성숙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만큼(롬 2:2; 벧전 3:15) 신앙의 연조(年條)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암시한다.

말씀의 초보 - 이 말의 "th'" ajrch'" tw'n logivwn 테스 아르케스 톤 로기온, the first principles of the oracles"에서 '로기온'은 '로고스'의 지소어(指小語)로 정확히는 ‘신탁’을 뜻하는데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을 가리킨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기초적인 진리를 시사하는 것으로, 본절은 수신자들이 이러한 기초적인 지식도 결핍되어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야 함을 나타낸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 “젖 gavlakto" 갈라크토스, milk”과 “단단한 식물 sterea'" trofh'" 스테레아스 트로페스, of strong meat”은 헬라 윤리학(倫理學)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비유로서, 헬라 윤리학에서는 아직 기초 단계에 있는 자들을 '우유를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에 비유하며 성숙한 단계에 이른 자들을 '단단한 음식을 즐기는 어른'에 비유한다(고전 3:1-3). 저자는 본 비유를 통해서 수신자들이 오랜 신앙의 연륜에 걸맞는 성장을 이루지 못한 사실을 안타까이 여겨 그들을 책망하며 권면하고 있다.

 

v.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경험하지 못한 자요 - 저자는 본절에서 '젖을 먹는 자'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한다.

 

어린아이 - 이에 해당하는 "nhvpio" 네피오스, a babe"는 '유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올바른 언어를 구사하거나 정상적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 결핍된 상태나 옳은 것을 분별하는 도덕적인 기준이나 '의'에 관한 원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 '의의 말씀 in the word of righteousness'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신자들의 올바른 삶으로서의 '의'를 의미하며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의'가 된다는 측면에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의미한다. 젖을 먹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위해야 하는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

 

v.14 단단한 식물은...분변하는 자들이니라 - '단단한 식물'은 문맥상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말씀으로(7:1-10:18) 초신자들과 같이 어린아이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진리를 가리킨다.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는 자에 대해 저자는 본절에서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장성한 자 - 'to them that are of full age' 이는 앞절에서 언급된 '어린아이'에 비해(고전 3:1; 13:11) 상대적으로 온전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단단한 식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를 시사한다.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 "지각 aijsqhthvria 아이스데테리아, senses"은 스토아 학파(Stoics)에서 '감각 기관'을 가리키던 말로 본절에서는 도덕적인 분별력을 넘어 영적인 분별 기능을 뜻한다. 한편 “연단을 받아 gegumnasmevna 게귐나스메나, exercised”는 '귐나조'(훈련하다)의 완료 수동 분사로 끊임없이 훈련을 받는 상태를 나타낸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는 훈련과 진리를 통해 성숙한 영적 분별력을 소유하게 되며 그 분별력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여 범죄치 않으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

 

 

제 6 장

 

1-2 기독교의 초보적인 교리들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발전하라’는 뜻이다. 이미 믿은 지 오래 된 신자들이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처지인데도 아직 초보적인 교리에 머뭇거려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4-6. 위에서 강력하게 권고한 기자는 이제 전진하지 않을 경우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가를 경고하고 있다. 신자의 영적 생활은 정지 상태에 있을 수 없다. 7-8. 앞 절의 내용을 토지에 비유하여 다시 한번 설명하고 있다. 9-20. 어조를 바꾸어 부드럽게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또한 구원의 약속에 대한 소망을 그대로 지켜 나가라는 내용(9-12)과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함을 증명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13-20).

 

v.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저자는 5:11-14에서 언급한 신앙상의 권면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을 계속 권고한다. 그는 본절에서 더 이상 독자들을 젖을 먹는 어린아이(5:13)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of Christ'의 내용은 본절 하반절과 2절에 세개의 쌍으로 된 6가지 항목으로 상술되고 있다. 본서의 수신자들이 유대인 공동체였기에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유대교 관습과 연관된 것이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죽은 행실 from dead works'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생명을 주지 못하는 구약 시대 율법의 제사 의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9:10). (2)혹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의 실제적인 모든 악행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나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타당하다. 또한 죽을 수 밖에 없던 지난날의 행실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인 '회개'는 세례 요한이나(마 3:2), 예수 그리스도(막 1:15) 그리고 그의 제자들(행 2:38)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이상의 것으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믿음은 참된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창 15:6; 합 2:4).

 

v.2 세례들과 안수와 - "세례들 baptismw'n 밥티스몬 baptisms"은 기독교의 '세례'(밥티스마)를 의미하지 않고(롬 6:4; 엡 4:5; 골 2:12) 유대교의 일반적인 정결 예식을 의미한다(레 11-15장).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죄 씻음을 받은 표징(表徵)을 세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으며(요 3:25; 행 19:1-5) 처음 믿는 개종자들은 이 '세례들'에 관한 교훈에 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안수 laying on hands'는 구약시대부터 널리 시행되던 관습이었다(민 8:10; 신 34:9).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개종자(행 8:17)나 전도 사역자(딤전 4:14)에게 종종 안수를 시행하기도 하였다(행 8:17-19). 본절의 '안수'는 주로 개종자들에게 행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 이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관한 마지막 세번째 쌍으로서 미래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중대 관심사인 종말론적 교리이다(사 26:19; 단 7:9,10; 12:2; 눅 20:37,38; 행 23:8; 마카비 2서 7장). 이러한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존재로서 마지막 때에 회계해야 함을 시사한다.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 "완전 teleiovthta 텔레이오테타, perfection"은 '성숙'이라는 의미로 공동체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개종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그러한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권한에 순종하기를 권면한다.

 

v.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ejavnper ejpitrevph/ oJ qeov" 에안페르 에피트레페 호 데오스, if God permits"에서 "...하시면 에안페르"은 'per 페르'(참으로)를 접미어로 취한 형태로 '참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조건문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 가능함을 시사한다. 한편 '이것'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혹자는 '완전한 데 나아가는 것'(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것은 이미 버리라고 저자가 권면했기 때문이다(1절). 그리스도인들이 완전 곧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1,7절).

 

v.4 한번 비췸을 얻고 - 저자는 4-8절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헛된 교훈에 미혹된 배도자(背道者)의 결말에 대해 경고한다. 본절과 다음절은 개종자들의 첫 신앙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그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해석하기에 다소 난점이 있다. "비췸을 얻고 fwtisqevnta" 포티스덴타스, who were once enlightened"는 "비추다 fwtivzw 포티조"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이다. 혹자는 이 단어가 2세기경에는 '세례를 베풀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포티스덴타스'가 '개종자들이 세례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용례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단어가 세례 베푸는 것을 뜻한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도리어 '포티스덴타스'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하는 '세상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으며(요 1:9; 고후 4:4,6; 벧후 1:19)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세상의 빛'(마 5:14; 요 8:12)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 '하늘의 은사 the heavenly gift'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성찬'(聖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맛보고 geusamevnou" 규사메누스,have tasted"가 문자적으로 '음식을 맛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혹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의 '하나님의 은사'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렵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 "참예한 metovcou" 메토쿠스, partakers"은 '참여하다', '교제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을 가리킨다.

 

v.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 have tasted the good word of God'는 말은 하나님 말씀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의미인 듯하다. 한편 '내세의 능력 the powers of the world to come'은 미래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장차 올 세계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에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 이와 같이 4-5절에 걸쳐 진술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恩賜)이다.

 

v.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 "타락한 자들 parapesovnta" 파라페손타스, they shall fall away"은 '한쪽으로 떨어져 나가다'라는 의미의 동사 'parapivptw 파라피프토'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파라페손타스'는 4,5절에서 언급한 영적 체험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좋은 은사를 체험하였다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를 가리킨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1)본절은 다시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든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가 뜻하는 바는 '다시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회개하는 자가 자신의 삶 전체의 방향을 전환시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코 반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타락한 자들이 일회적인 회개를 다시 반복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2)저자는 구약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알고 지은 고의적으로 배도한 본절의 '타락한 자들'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하여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자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ajnastaurou'nta" 아나스타우룬타스, they crucify again”에서 '다시'로 번역된 접두사 'ajna 아나'는 '다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위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타락한 자들이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십자가 위에 못박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던 자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시사한다.

 

v.7 개역 성경에는 'ga;r 가르, For'(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절과 다음절이 앞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받고 -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장성함에 대한 비유로 사 5:1 이하의 '포도원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유사하다. '땅 the earth'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이며(마 13:18-23) '비 the rain'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등을 비유한 것이다(사 44:3; 55:10). 밭을 가는 자가 열심을 다해 밭을 갈았을 때 밭이 그에 맞는 소출을 내면 밭을 가는 농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하지 아니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

 

v.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 본절은 배교자에 대한 비유이다. '가시와 엉겅퀴 thorns and briars'는 창 3:17,18의 내용과 연관된다. 창세기에서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산물이었다. 본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배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의 '마지막 end' 즉 결과는 불사름을 당하는 것이다. "불사름 kau'sin 카우신, end is to be burned"은 마지막 심판 때의 엄격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도구가 된다(10:27; 12:29).

 

v.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 저자는 4-8절에서 배도자들의 결국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엄숙한 경고를 하였으나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자신이 말한 그러한 배도자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아가페토이"는 본서에서 오직 본절에서만 사용된 표현으로 수신자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어린 호칭이다.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 "이보다 나은 것 ta; kreivssona 타 크레잇소나, of better things"은 저자가 4-8절에서 언급한 배도자의 상태와 관련된 것으로 수신자들을 배도자와 비교할 때 훨씬 좋은 상태 즉 배도자들이 받는 저주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상태에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구원에 가까운 것 ejcovmena swthriva" 에코메나 소테리아스, things that accompany salvation”에서 'ejcovmena 에코메나'는 '소유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e[cw 에코'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수신자들이 구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수신자들은 배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결코 배도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구원받은 것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선행의 열매가 있었다(10절).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시키고 있다.

 

v.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 여기서 “행위 e[rgou 에르구 work”은 ‘노동’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 행위와 사랑은 성도들의 생활 요소이다. '그의 이름 His name'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이름'이 그 이름을 소유한 자의 전인격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본서의 수신자들은 선행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즉 그의 전인격을 나타내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계속적으로 섬겼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수신자들의 행위를 기억하신다.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수신자들의 행위를 근거로 앞절에 언급된 확신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수신자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선행은 자신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고백되어지는 진실한 것임을 나타내준다.

 

v.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 "간절히 원하는 ejpiqumou'men 에피뒤무멘, we desire that"는 '열렬히 바라다'라는 의미로 저자의 간절한 염원을 나타낸다. 저자는 '너희 각 사람' 즉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관심을 보이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 부지런하여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끄럼 없는 삶 즉 믿음에서 난 선행을 행하며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고 있다.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끝까지 a[cri tevlou" 아크리 텔루스, until the end”는 3:14의 반복으로 종말론적인 면을 강조한다. 즉 이것은 '파루시아'(parousia, '그리스도의 재림')로 말미암아 그들의 소망이 완전히 실현(實現)될 때까지라는 의미이다(9:28). 한편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to the full assurance of hope'는 '온전한 소망을 지니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풍성함 plhroforivan 플레로포리안 full assurance”는 ‘가득 체우다’라는 뜻으로서 10:22에서는 ‘확신’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참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롬 8:24,25). 본절에서 소망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앞절에서는 '사랑' 그리고 12절에서는 믿음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세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종종 함께 쓰여졌다(10:22-24; 롬 5:2-5; 고전 13:13; 갈 5:5,6; 골 1:4,5; 살전 1:3; 5:8; 벧전 1:21,22).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에 위의 세 요소가 필수불가결함을 암시한다.

 

v.12 게으르지 아니하고 - 이에 해당하는 "i{na mh; nwqroi; nwqroi; 히나 메 도드로이 게네스데, you do not become sluggish"에서 "게으르지 nwqroi 노드로이"는 5:11의 '둔하므로'와 같은 단어로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5:11의 내용을 기능적으로 보완하고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즉 그리스도 도에 대한 초보자들은 말씀을 듣기에 게으르고 둔하여서 해석하기 어려웠다(5:11). 그러나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앞절에서 부지런하라고 권면하며 동시에 본절에서는 게으르지 아니하여 말씀을 잘 이해하고 계속 성장하여 나아가기를 권면한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 but imitate those who through faith and patience inherit the promises'이란 13절의 아브라함과 같은 자들을 말한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려 기업을 받은 자들이다. '기업으로 받는'이란 '확실히 소유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 즉 구원을 온전히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구약시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인내한 것을 예로 들어 수신자들에게 아브라함과 같이 주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믿고 인내하여 소유하는 자가 되기를 권면한다. <joyinsong>

 

b.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6:13-6:20

 

당시 신자들 가운데는 극심한 박해를 견디다 못해 신앙을 배반하는 자들이 생긱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로 인하여 활짝 열린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나가라고 격려하고 있다.

 

v.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할 때 대부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으며(행 3:25; 7:17; 롬 4:13; 갈 3:8,14,16,18) 본서에서도 아브라함을 예로 제시하는 경우가 자주 등장한다(13-15절; 2:16; 7:4-5; 11:8-19). 13-15절의 아브라함에 관한 서술은 믿음의 모범으로서 12절의 '본받으라'는 권면에 대한 내용이다.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 본절은 창 22:16의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를 저자가 논리적인 부연 설명을 덧붙여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맹세'에는 약속에 대한 지연(遲延)이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즉시 약속을 이행하신다면 맹세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세워 스스로 맹세하셨다(출 32:13; 사 45:23; 렘 22:5; 49:13).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에 대한 확실한 이행을 보증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가장 큰 보증이 되신다.

 

v.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 본절은 70인역의 창 22:17을 다소 변형시킨 인용구이다.

 

창 22:17

(LXX)

h mh;n eujlogw'n eujloghvsw se kai; plhquvnwn plhqunw' to; spevrma sou

에 멘 율로곤 율로게소 세 카이 플레뒤논 플레뒤노 토 스페르마 수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본 문

Eij mh;n eujlogw'n eujloghvsw se kai; plhquvnwn plhqunw' se:

에이 멘 율로곤 율로게소 세 카이 플레뒤논 플레뒤노 세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70인역에는 '플레뒤노 토 스페르마 수'(내가 너의 씨를 번성케 하리라)로 되어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플레뒤노 세'(내가 너를 번성케 하고)로 되어 있다. 두 구절의 의미는 동일한 것이나, 이렇게 저자가 '너의 씨'를 '너'로 변경시켜 인용한 것은 이야기의 초점을 아브라함에게 집중시키기 위함이다. 또한 창 22:17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자손의 번성뿐만 아니라 땅에 대한 소유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자손에 대한 약속만을 언급한다. 이는 11:17-19의 내용 즉 약속을 성취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이삭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까지 인내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v.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과 인내에 대해 엄격한 시험을 거친 후에 약속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창 22:1,15-18). 약속의 성취는 이삭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마저도 제물로 바치려 하였다. 이것은 어떠한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그와 같은 믿음은 약속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였다. '약속을 받았느니라 he obtained the promise'는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손자인 에서와 야곱의 출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것은 약속의 완전한 성취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보다 깊은 의미를 내다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v.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최후 확정이니라 - 저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17절) 당시 일반 사람들이 하던 맹세와 비교하여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맹세는 발언한 것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구속력이 있는 확증이었다. 구약성경에서 맹세는 맹세하는 사람보다 더 크고 위대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되어졌으며(신 6:13; 10:20) 만일 맹세를 하고서 이를 어기면 그것은 십계명 중 제 3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었다(출 20:7; 신 5:11; 슥 5:3,4). 실제로 맹세는 약속한 것의 명백한 진실성을 비준해 달라고 하나님을 엄숙히 부르는 행위를 수반하였다. 저자는 아마도 아브라함이 이방인들과 다툼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 사실과 이러한 맹세는 최후 결정으로 더 이상 변개(變改)할 수 없음을(창 14:22; 21:23-24; 24:3) 염두에 두고 본절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v.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 본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창 22:16-17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는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의미한다. 특히 "보증하셨나니 ejmesivteusen 에메시튜센, confirmed it"은 '중재자'란 뜻의 'mesiteuvw 메시튜오'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재자가 되다', '보증인이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맹세가 필요 없으나 자신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다. 한편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 to the heirs of promise'은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그의 후손들을 시사하는 것으로 육체적인 후손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후손 즉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을 고무(鼓舞)시켜 주는 말씀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까지 확장되어 적용된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맹세는 자신의 약속이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증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v.18 본절은 '히나'(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 하나님께 맹세하신 목적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 본문에 해당하는 'dia; duvo pragmavtwn ajmetaqevtwn, ejn oi|" ajduvnaton yeuvsasqai qeovn 디아 뒤오 프라그마톤 아메타데톤 엔 호이스 아뒤나톤 프슈사스다이 데온'은 '이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으므로'(by two unchangeable things in which it is impossible for God to lie, NIV)라는 의미로 이 두 가지 사실 즉 '약속'과 '맹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13절과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가리킨다. '약속'은 모든 날 마지막에 나타난 말씀인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1:2), 하나님께서 '맹세'하여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다(20절; 히 5:6,10; 7:17,21,28; 시 110:4). 이것은 성경의 단편적인 한 두 구절에서 유추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다(민 23:19; 삼상 15:29; 시 89:35; 사 31:2).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소망'은 본서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 이룩되었으며 앞으로 완성되어질 구원을 나타낸다. 저자는 '앞에 있는 소망 the hope set before us' 즉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구속의 소망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으로 인해 이중의 보장을 받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소망을 바라보고 삶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죄악을 피해가야 한다. 한편 '큰 안위 strong consolation'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오는 '용기' 혹은 '위로'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 즉 자신이 행하신 약속과 맹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재 구원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인해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고 현재 지상의 삶 가운데서 위로를 받게 된다.

 

v.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 본절에서 닻의 비유가 사용되는 것과 같이 '삶'을 '항해'에 비유하는 것은 고대 문학에 있어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와 같은 비유는 오직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 '닻 an anchor of the soul'의 비유는 헬라문학에서도 그러했듯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저자는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가 확고한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의 "영혼 yuch'" 프쉬케스, soul"은 인간을 '육'과 '영혼'으로 분리하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本質的)인 생명을 나타낸다.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 '휘장 veil'은 구약 시대의 성막 안에 있던 두 개의 방 즉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천을 가리킨다. 이 휘장 너머 즉 안쪽은 지성소를 의미한다(출 26:31-35; 레 16:2,12,15; 21:23; 24:3).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16: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들어가심으로(20절) 휘장은 찢어졌고(마 27:51; 막 15:38)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 자유롭게 지성소 즉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를 통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한편 “들어가나니 ijsercomevnhn 에이세르코메넨, enter”는 '에이세르코마이'(들어가다)의 현재분사로서 '닻'(앙퀴란)을 수식한다. 따라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닻'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닻'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 '닻'은 다시 소망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결국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소망'이다.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소망'이라는 사실은 7:19의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는 말씀으로 더욱 확증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소망은 닻과 같이 튼튼하고 안전하여 세상의 어떠한 시련이나 유혹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v.20 그리고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 "앞서 가신 provdromo" 프로드로모스, the forerunner is"은 본절에서와 같이 단수로 사용된 용례가 고전에서나 헬라 문헌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어의 복수 형태인 '프로드로모이'는 주력 부대 앞에 나가있는 '첨병'이나, '주력 함대를 앞서 인도하는 배들'(Alciphron), '처음 익은 열매'(민 13:20; 사 28:4), 혹은 '전령'(Herodotus)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용례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프로드로모스'는 '선구자', 혹은 '선두주자'라는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누군가가 '프로드로모스'의 뒤를 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선구자(先驅者)로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직 수행을 위해 먼저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5:7-10).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셨으며 그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씻어 백성들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10:14).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구속을 힘입어 뒤따라 하나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확증이 된다.  <joyin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