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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멜기세덱의 제사장직(히 7:1-28)

by 은총가득 2020. 7. 4.

멜기세덱의 제사장직

(7:1-28)

 

a. 그리스도의 모형인 멜기세덱 1-3

b. 멜기세덱의 우월성 4-22

c.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우월성 23-28

 

7

 

a. 그리스도의 모형인 멜기세덱 1-3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축복권과 십일조 수납 사실을 들어 밝히고 있다. 멜기세덱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요 예표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왕적 권인와 영원한 제사장직에 모아지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인격인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의 구속의 역사를 이룬 의의 왕(3:25-26), 평강의 왕(5:1)으로서의 근거가 되고 있다.

 

v.1 이 멜기세덱은...복을 빈 자라 - 본절은 창 14:17-20에 대한 언급으로,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해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살렘 왕이요 - '살렘 Salem'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세겜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XX, 33:18). (3) 혹자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76:2).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 제정(祭政)이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에 왕이 제사장 직책을 수행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the Most High God''최고의 하나님'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초월적인 신성을 암시한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고 이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제사장으로 인식하여 십일조를 그에게 바친다(14:19,20).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 14:17-20 (LXX)에서는 '아브람'으로 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아브라함'으로 되어 있다. 이런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저자는 본절의 내용을 70인역에서 인용한 듯하다. 한편 저자는 인용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연합한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에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한 부분은 삭제하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사건과 아브라함이 얻은 것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준 사건(2)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변개를 통해서 저자는 4-10절에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탁월함을 강조한다.

 

v.2 저자는 본절에서 멜기세덱의 두 가지 칭호를 제시한다.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 'Melcisevdek 멜기세덱'은 문자적인 의미는 '나의 왕은 의롭도다'이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미래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여호와 우리의 의'(23:6)로 부른 것과 연결된다.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 '살렘'이라는 지명(地名)'평강'을 의미하는 '샬롬'과 동일한 어근에서 비롯된 단어로 '평화'로 번역될 수 있다. 장차 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평강의 왕'(9:6)이라 칭한 것과 연결된다. 저자는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참된 평강을 주러 오셨으며(11:28), 자신의 의를 통하여 공의가 넘치는 나라를 완성하며 다스리신다(9:7; 11:1-5).

 

v.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ajpavtwr, ajmhvtwr 아파토르 아메토르, Without father, without mother"는 사생아나 천한 신분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경우에 따라 성적(性的)인 것을 초월하여 태어난 신적인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저자가 멜기세덱을 천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에 멜기세덱의 부모에 대한 언급이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없음을 나타낸다. 멜기세덱의 부모와 족보가 없다는 사실은 그의 탄생이 기적적으로 되어졌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제사장적인 특질을 설명하려는 것으로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탄생이나 족보와 같은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확립된 것이거나 레위M 통의 제사장직의 승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나타낸다(5:5,6).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 저자는 멜기세덱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언급이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에 착안하여 그의 제사장직이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것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임을 나타낸다. 저자는 이러한 예표와 강조를 통해서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는 다른 제사장임을 진술한다. "방불하여 ajfwmoiwmevno" 아포모이오메노스, made like"'유사하여'라는 의미로 멜기세덱과 하나님의 아들이 외형적인 형태에 있어서 유사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 본문은 창 14:18-20의 내용에 대한 해석인 시 110:4 (LXX)'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You are a priest forever According to the order of Melchizedek.'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저자는 시 110:4(LLX)"영원한 eij" to;n aijw'na 에이스 톤 아이오나 forever"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항상 eij" to; dihnekev" 에이스 토 디에네케스, continually”으로 변형시켰다. 이런 변형은 저자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b. 멜기세덱의 우월성 4-22

 

본문에서는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함을 논증한 진술이다.

특히 네 가지 근거를 들어서 아론보다 멜기세덱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아론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림(4-7, 9-10). 그러나 아론이 실제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아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아브라함 안에서 십일조를 바친 것이다. 아론의 일시적인 제사장직과 멜기세덱의 영원한 제사장직(8), 제한된 아론의 제사장직(11-14),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은 최종적임(15-22).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본질적으로 우월하며(15), 육체의 계명이 아닌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며(16),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증거한 직분이고(17),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 최종적이 되었기 때문에(20-21) 확정적이고 완전한 것이다.

 

v.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 "어떻게 높은 것을 phlivko" 펠리코스, how great this man was"은 영탄법(詠嘆法)으로 멜기세덱의 위대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일체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략물 중 좋은 것 ajkroqinivwn 아크로디니온, spoils”은 문자적으로 '쌓인 것들 중에 가장 높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주었다는 표현으로 전리품 중 가장 좋은 것을 받은 멜기세덱의 권위를 시사한다. 아브라함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존재이다. 이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주었다는 사실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멜기세덱에게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십일조를 드렸음을 나타내며,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위대하고 우월함을 암시한다.

 

v.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 저자는 본절과 6절에서 십일조에 관한 문제를 놓고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 멜기세덱을 비교하여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논증한다. 율법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바칠 것을 명시하고 있으며(18:21,24), 레위인들은 다시 그들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주도록 의무화하고 있었다(18:26). 이런 제도는 바벨론 유수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10:38,39). 이와 같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모두가 백성에게서 십일조를 받아 기업으로 삼았다. 한편 '허리에서 난 자'에서 "허리 ojsfuvo" 오스퓌오스, lions"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활동을 위한 준비 태세'(왕상 18:46) '힘의 근원'(2:1)을 의미하기도 하나 본절에서는 잉태와 출산에 관련된 생식 기능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라 할지라도 제사장들은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일조를 취했음을 나타낸다. 즉 제사장들이 백성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형제로서 본질적으로 동등한 존재이며 그들이 십일조를 걷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율법이 그렇게 명시하고 있기 때문임을 나타낸다.

 

v.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십분의 일을 취하고 -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율법에 의해 십일조를 거두었으나 멜기세덱은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 하였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2; 14:18-20). 저자는 앞절과 본절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과 멜기세덱을 십일조를 받는 문제로 비교하여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멜기세덱이 훨씬 우월한 존재임을 진술하고 있다.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 '그 약속 얻은 자 him who had the promises'는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을 빌어주었다(1; 14:19,20). 고대 사회에서 축복의 행위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신분상(身分上)으로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사실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v.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 - "폐일언하고 cwri;" de; pavsh" ajntilogiva"" 코리스 데 파세스 안틸로기아스, without all contradiction"는 파피리(Papyri)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관용구로서 저자가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바의 확실성을 강조할 때 사용된 표현이다. 한편 "높은 kreivttono" 크레이트토노스, better"은 비교급으로서 '더 나은', '더욱 탁월한' 혹은 '더욱 위대한'이란 의미로 본서에 자주 사용된 용어이다(19,22; 8:6; 9;23; 11:40). 본절의 이런 '비교급' 표현은 창 14:18-20의 내용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1)이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보다 더욱 위대한 존재였음을 암시한다.

 

v.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 6,7절에서 멜기세덱을 아브라함과 비교하여 멜기세덱이 더 위대함을 논증한 저자는 본절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을 가리키는 "여기는 w|de 호데, here"과 멜기세덱을 가리키는 "저기는 ejkei' 에케이, there"을 통해서 표현된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십일조를 백성에게서 받았으나 멜기세덱은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로서 십일조를 받았다. 여기서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는 저자가 3절에서 언급한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성경은 멜기세덱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죽을 수 밖에 없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을 비교하여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v.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 레위인들은 십일조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멜기세덱 제사장에게는 아브라함을 통해 십일조를 바쳤다. "할 수 있나니 wJ" e[po" eijpei'n 호스 에포스 에이페인, as I may so say"는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등장하는 저자 특유의 표현이다. 본서의 저자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길게 다루지 않고 주위를 환기시켜 간결하게 끝맺고자 할 때 이런 표현을 주로 사용하였다.

 

v.10 개역성경에는 'ga;r 가르, For'(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언급된 '레위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진술에 대한 이유임을 시사한다.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때 레위는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그러기에 레위가 직접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할 수는 없으나 레위를 대표하는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으므로 그것은 곧 레위가 바친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는 레위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동시에 아브람함의 후손(後孫)임을 암시한다. 비록 레위는 태어나지 않았고 직접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조상을 말할 때 그의 후손까지 포함하였기 때문에(25:23; 고전 15:22) 레위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레위가 바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저자는 그리스도의 모형인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결국에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시사하고 있다.

 

v.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 본절은 "Eij 에이, If"로 시작하는 가정법으로 율법과 연관된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불완전함을 나타낸다. "온전함 teleivwsi" 텔레이오시스, perfection"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혹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온전한 행위를 뜻한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게 하는 데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레위 제사장들의 제사 행위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9:9; 10:1)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받은 율법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해줄 뿐 그것을 완전히 준수해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5:20). 그래서 아론을 좇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 대신에 멜기세덱을 좇는 별다른 제사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별다른 e{teron 헤테론, another”'전혀 다른 종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새 제사장이 과거 아론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며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이 할 수 없었던 '온전케 함'을 하시는 분이심을 암시한다.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 “그 아래서 ejp j aujth'" 에프 아우테스, under it”에서 그 아우테스는 본절 상반절의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을 가리키는 말이며 아래서 에프'...을 근거로 하여'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을 근거로 하여 율법을 받았으니'라는 의미로 제사장직과 율법이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v.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 제사장 직분과 율법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를 맺고 있다(11).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이 불완전하여 백성을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제사장 즉 멜기세덱 계통의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제사장직과 관련된 율법도 불완전하여 바뀌어야 함을 시사한다.

 

v.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본절은 12절에서 언급된 '율법의 변역'에 대한 내용이다. 율법은 오직 레위 지파만 제사장직을 감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새로운 제사장은 율법에 규정된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 곧 유다 지파에 속한 제사장이었다. 이 유다 지파는 제사장 지파가 아닌 왕족 지파였기에 저자는 이 지파 사람 중 어느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유다 지파에 속했던 다윗과 솔로몬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음이 나타난다(삼하 6:13,17,18; 24:25; 왕상 3:4; 8:62). 이러한 경우 다윗과 솔로몬이 직접 제사 의식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희생제물을 준비하고 제사장이 제사를 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v.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 본절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아닌 다른 지파의 제사장임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셨음을 계속 증거하고 있다(1:2,3; 2:6; 3;33; 2:29-36; 1:3; 딤후 2;8; 5;5; 22:16). 예수께서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고 유다 지파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의 대제사장직이 혈통적인 것에 의존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질서(秩序)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좇아 나신 ajnatevtalken 아나테탈켄, sprang”70인역이나 헬라 고전에서도 어떤 가문의 후손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아나테탈겐'70인역에서 새로운 별이 나타나거나 가지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옴을 의미하는 말도 아마도 저자는 메시야를 예언한 구약의 예언들을 상기하면서 본 단어를 사용한 듯하다(24:17; 23:5).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 오직 제사장은 레위 지파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파에 속한 예수께서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심을 암시한다.

 

v.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 in the likeness of Melchizedek, there arises another priest'은 시 110:4의 인용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11). '더욱 분명하도다' 에서 그 분명한 내용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11절에서 말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그 효능을 상실하게 된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2) 혹자는 모세 율법이 폐지되었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는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를 지닌다.

 

v.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 본문은 11절의 부정적인 표현 곧'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와 동일한 의미로 11절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 the law of a carnal commandment'은 포괄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뜻하는 것으로 레위 계통의 합법적인 후손, 혹은 어떤 신체적 자격 요건 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되신 것은 율법에 나타난 바대로 레위 자손의 혈통이나 외적 조건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다.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 본문은 11절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과 연관된다. 저자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대조시켜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썩거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제한된 육체의 계명 즉 율법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된 것임을 강조한다(110:4, Lane). 그리스도는 성경이 증거하는대로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만세의 왕'으로서(딤전 1:17) 그의 제사장직은 영원한 생명를 부여하는 영원한 것이다.

 

v.17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 본절은 시 110:4의 인용으로서 16절에서 저자가 말한 것 곧 그리스도가 무궁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이다. 저자가 본절에서 "증거하기를 marturei'tai 마르튀레이타이, He testifies"을 사용한 것은 저자 자신이 시 110:4을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이 불완전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과 무관하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직임을 나타내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완전함을 암시한다.

 

v.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 본절과 다음절은 저자가 11절부터 언급한 내용의 결론이다. '계명'은 문맥상 제사장직에 관련된 율법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으나, 1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세의 모든 율법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한편 연약하며 ajsqene;" 아스데네스, weakness”는 율법 자체가 연약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무익하므로 ajnwfelev" 아노펠레스, unprofitableness thereof”는 율법이 단지 사람의 외형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 뿐 그 내적인 양심(良心)을 깨끗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음을 시사한다(9:9,10,14,23; 10:14).

 

v.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 "온전케 ejteleivwsen 에델레이오센, perfect"은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는 온전한 관계를 의미한다(11). 율법은 단지 외형적인 것만 깨끗하게 하고 내적인 양심은 깨끗께 할 수 없어서(9:9,14)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다. 즉 사람들은 제사장직이나 성결 의식과 같은 율법적인 제도에 의해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한 관계를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리라 - “더 좋은 kreivttono" 크레이트토노스, of a better”이란 표현은 히브리서 저자의 독특한 표현이다(19, 22; 8:6; 9:23). '더 좋은 소망' 즉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으며, 레위적인 율법 제도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v.20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 본절과 다음절은 새로운 제사장이신 예수와 레위 계통의 제사장 사이의 비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엄숙하신 맹세로 말미암아 제사장으로 지목된 반면에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맹세없이 율법에 근거하여 제사장직을 부여받았다(28). "맹세없이 된 것이 아니니 ouj cwri;" oJrkwmosiva" 우 코리스 호르코모시아스, not without an oath"는 시 110:4의 추론으로 하나님의 맹세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확고한 보증이됨으로 신자들은 그의 제사장직에 소망의 닻을 드리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6:18-20).

 

v.21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는 시 110:4의 인용이다(17).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하나님께서 맹세하심으로 부여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맹세하신 약속의 신실성으로 인해 보증된 것이다. 반면에 율법 하에서 이루어진 레위인의 제사장직은 하나님의 맹세나 약속 혹은 보증이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다만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16)을 좇아 이루어진 직분에 불과하다. 이러한 두 제사장직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보다 우월하며, 완전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언약에 대한 보증임을 암시한다(22).

 

v.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 저자는 "언약 diaqhvkh" 디아데케스, testament"을 본서에서 17회나 사용하여 중시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처음 나타난다. '디아데케','유언', '서약', '의지'라는 의미로 70인역(LXX)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은혜로운 '의지'를 가리킨다. 동시에 그 단어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가 함축되어 있다. 문맥상 본절의 언약은 제의적(祭儀的)인 것으로 옛 언약 즉 구약의 제의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었으나 외형적인 것만 정결케 하고 내적인 양심은 정결케 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었다(1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언약을 수립하시고(8:8-10; 9:15-20), 새 언약을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온전히 나아올 수 있도록 하셨다(25; 9;14,15). 새 언약은 구약의 옛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 a better testament'이다. 한편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에 대한 '보증'은 영원한 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9; 13:20). “보증 e[gguo" 엥귀오스, a surety”'보증인'이라는 의미로 이 보증인은 중재자 the mediator”와는 달리(8:6; 9:15; 12:24) 보증인 자신의 인격과 생명을 담보로 자신이 행한 말에 대해 보증한다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들의 구원에 대한 담보로 구원의 영원한 보증이 되신다.

 

c.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우월성 23-28

 

구약의 제사장들은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에 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고, 계속 다른 사람이 승계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에 승계될 필요가 없다. 이 영원성 때문에 그의 제사장직은 뛰어난 효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25-28).

 

v.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 저자는 새 언약의 제사장은 예수 한 분뿐인 반면에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그 수효가 많음에 주목한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아론부터 시작해서 A.D. 70년 예루살렘 멸망에 이르기까지 83명의 대제사장들이 취임했었다고 한다(Antiq. 20,227).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의 수효가 많다는 것은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그들이 행하는 제의가 불완전함을 반영한다(1:1; 10:1-4).

 

v.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을 인하여 제사장직을 감당할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였던 반면 예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시므로 뒤를 이을 다른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뒤이을 제사장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 행하신 사역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나타내는 "갈라지 아니 하나니 ajparavbaton 아파라바톤, an unchangeable'70인역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단어로 제사장이 그의 의무를 계속한다는 의미이다(Josephus). 예수의 영원성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의 일시성과는 달리 그의 제사장직이 영구적임과 동시에 최종적(最終的)인 것임을 시사한다.

 

v.25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o{qen 호덴, Wherefore’은 본절이 23,24절의 논리적 귀결임을 나타낸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 "온전히 eij" to pantele;" 에이스 토 판텔레스, to the uttermost"'완전히', '절대적으로'라는 의미로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구원의 완전성을 뜻한다. 한편 "구원하실 swv/zein 소제인, to save"은 현재시상이다. 본서에 나타나는 '구원'이 미래에 있을 종말론적인 유업을 가리키는 반면(1:14; 5:9; 9:28) 본절의 '소제인'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 그리고 승천으로 말미암아 현재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구원'을 시사한다(2:3,4; 6:4,5,9). 그리스도는 옛 언약의 제의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새 언약인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에게 현재 구원에 참여케 하며 동시에 종말론적 구원에의 참여를 보증하신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간구하심이니라 ejntugcavnein 엔튕카네인, make intercession"'중재하다'라는 의미로 예수께서 하나님께 특별한 복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심을 가리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v.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 '이러한 대제사장 such a High Priest'이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원하시며(24),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25), 항상 살아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 중재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새 언약에 합당한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모든 길을 마련해 놓으신 분이다. 저자는 영원한 구원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신 대제사장 그리스도에 대해 다섯 가지로 묘사한다. 이 다섯 가지는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지녀야 할 성품과 지위를 나타낸다.

 

거룩하고 - 이에 해당하는 "o{sio" 호시오스, who is holy"70인역에서 '충실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12: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서 보여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나타낸다(5:7,8).

 

악이 없고 - 이에 해당하는 "a[kako" 아카코스, harmless"'교활하지 않은', '순수한'이라는 의미로 예수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순수하셨으며 어떠한 악과도 접촉하지 않으셨음을 시사한다.

 

더러움이 없고 - 이의 "ajmivanto" 아미안토스, undefiled"'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이라는 뜻으로 제의적 순결성을 나타낸다(마카비 215:34).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제의 의식을 통해서 외적으로 더럽혀진 자신을 깨끗이 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더럽혀지지 않은 온전한 도덕적 순결성을 소유하셨다.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 이것은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성품과 연결된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도덕적으로 죄인들과 분리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죄인인 인류와는 다른 존재이시다.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 “하늘보다 높이 uJyhlovtero" tw'n oujranw'n 휩셀로테로스 톤 우라논, higher than the heavens”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과는 달리 승천하셔서(4:14) 곧 바로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신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중재자가 되신다.

 

v.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속죄일에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항상 자기 죄를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린다(5:3; 4;3-12;16:6-10). 왜냐하면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도 역시 불안전한 인간으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번자신과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렸으나 저자는 본절에서 '날마다 daily'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 자신도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드리는 것으로 표현한 이유는(9:7,25; 10;1) 대제사장이 제사를 매일 드렸다는 의미보다는 그가 부주의로 죄를 범했을 때 매일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므로 자신의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4:15)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리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드린 한 번의 제사는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친 완전한 제사였기 때문이다.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 저자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을 그의 대제사장직의 핵심적인 기능으로 제사한다. 죄 없으신 완전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완전한 자신을 제물로 드린 그의 속죄사역은 일시적인 레위 계통 제사장들의 속제 사역과는 달리 한 번으로 영구화(永久化) 될 수 있었다. 저자는 본절을 통해서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의 불완전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설명하고 있다.

 

v.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 저자는 본장을 결론지으면서 사람인 제사장과 온전하신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와 세 가지 차이점을 제시한다. (1) 율법과 맹세의 말씀. 옛 언약에 속한 레위 제사장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제사장직을 물려받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셔서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맹세의 약속을 성취하였으며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 (2) 사람과 아들. 옛 언약의 제사장들은 유한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반복적이고 일시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 살아계셔서 온전한 중재 사역을 행하셨다. (3) 약점을 가진 자와 온전케 되신 자. 옛 언약의 제사장은 약점을 가져서 불완전한 사역을 행할 수 밖에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하셔서 지상 생활의 고난 가운데서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믿는 사람의 구원의 근거가 되셨다(2:10; 5:8,9). <joyin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