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6 - 28
b. 구약의 속죄 제물 6-10
구약의 속죄 제물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세상적이며 형식적인 제사법인 이 ‘육체의 예법’은 곧 성소가 불완전함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사역이 미칠 영적인 실제들에 대한 상징이며 모형에 불과하다.
v.6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 '첫 장막 the first tabernacle'은 '성소'를 가리킨다.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섬기는 예(禮)는 세 가지였다. (1) 아침마다 금향단에 분향하였다(출 30:7-8). (2) 저녁마다 등대에 불을 밝혔다(출 27:20,21). (3) 매 안식일마다 떡상에 열 두개의 진설병을 교체하였다(레 24:8,9).
v.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 '둘째 장막'은 '지성소'를 가리킨다. 이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이년 중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 16:11-16). '일차씩'은 횟수로 한 번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루씩'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 최소한 두 번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이다(레 16:12,15). 한 번은 대제사장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들어갔다. 이렇게 두번 외에도 수송아지의 피를 뿌리기 위해서 들어갔을 가는 가능성이 있으며(레 16:14), 랍비 전승에 의하면 앞서 언급한 세 번의 경우 외에도 번제를 드리고 나서 놓아둔 기구와 불 담는 그릇을 제자리에 갖다 놓기 위해서 들어갔다.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 "허물 ajgnohmavtwn 아그노에마톤, errors"은 대제사장 자신과 백성들이 모르고 범한 죄로서 무지를 가리킨다. 이러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대제사장은 '피'를 드려야만 했다. 저자는 본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매개체로서 '피 blood'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이후에 언급될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v.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 저자는 성령께서 옛 언약의 성막이 주는 의미를 가르쳐 주신다고 진술한다. 옛 언약의 성막이 주는 의미는 새 언약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구속 사역을 이루시기 전까지는 7절에서 언급한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제의적인 규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첫 장막'은 6절에서와 같은 '성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세워진 '성막'을 가리키며, '성소에 들어가는 길 the way into the Holiest of All'은 곧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시사한다.
v.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 ‘이 장막’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비유 a figure, it was symbolic’하는 예표가 되는 것이다. '현재까지 for the present time'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장막이 있던 때까지를 가리킨다. 이렇게 해석할 때 본절은 구역 시대에는 아직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이 열리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2) 바로 지금까지를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본절은 당시의 성막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대조로 성막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없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함을 시사한다. 이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 본문은 구약 시대의 성막이 불완전한 이유를 나타낸다. 그것은 구약 시대의 성막과 제사로는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의식(儀式)인 '예물과 제사'는 외형적이어서 내면적이며 영적인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다. "양심 suneivdhsin 쉬네이데신, conscience"은 하나님과의 전인적 관계를 의미하며, "온전케 teleiw'sai 텔레이오사이, perfect"는 몸뿐만 아니라 양심까지 죄의 오염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의 의식은 일년에 한번씩 행해지는 속죄 제사를 통해서(7,25절; 10:1-3) 영원한 정화를 할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과 섬기는 자 사이의 전인적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을 위해 참 장막인(8:2) 그리스도의 희생과 언약이 성취되어야 했다.
v.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 장막에 관련된 규정들은 물론 구약성경에 나타난 모든 규례들 즉 '먹는 것'(레 11장)과 '마시는 것'(레 10:8,9; 11:33-38; 민 6:2,3), 그리고 '씻는 것'(출 30:20; 레 15:4-27; 17:15,16; 민 19:7-13)에 관한 규례들은 모두 육체와 관련된 외형적인 예법이다. '육체의 예법 fleshly ordinances'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으로 새 언약으로 대체될 때까지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옛 언약이다. 옛 언약의 제의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양심이 깨끗해지고(11-14절) 하는 성소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10:19, 20) 새 언약이 성취될 때까지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새 언약이 성취됨으로 그것의 지위와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c. 신약의 제사와 완전한 제물 11-14
그리스도의 오심은 아론 계통의 제사장직에 대한 완전한 실현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해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v.11 개역 성경에는 "de; 데, But"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1-10절에 언급된 불완전하고 제한된 첫 언약으로부터 새 언약으로 주제가 바뀜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 '장래 좋은 일 the good things to come'은 옛 언약이 제공해주지 못한 온전한 죄의 씻음과 하나님께로 자유롭게 나아가게 해주는 새 언약의 구속을 의미한다. 이러한 영적 축복은 구약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이 속죄 일에 행한 제사와는 달리 영원한 새 언약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종말론적 특성을 반영한다. 한편 "오사 paragenovmeno" 파라게노메스, to come "는 부정 과거로서 새 언약의 좋은 일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 "말미암아 dia 디아, by"는 도구격으로 그리스도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 with the greater and more perfect tabernacle'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기에 혹자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천국이라고 주장하나 '그리스도 자신의 몸'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해서 새 언약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었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24절; 10:20).
v.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 구약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속죄일에 동물의 피를 통해서 구속 사역을 행하였다(레 16:3,5-11,15,16). 염소는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었으며 송아지는 대제사장 자신과 가족을 위한 희생 제물이었으나 그 효력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이었기에 매년 속죄일마다 희생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온전한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즉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희생 제사는 영원하며 완전한 것이었다. "단번에 ejfavpax 에파팍스, once"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속죄 사역의 특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매년 반복되는 옛 언약의 구속 사역과는 달리 반복의 가능성이나 필요성이 없음을 시사한다. 한편 '성소'는 '지성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절에서는 지상의 장막이 아닌 하나님의 존전인 하늘 성소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을 성취하셔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전한 성취를 시사한다.
v.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 본문은 옛 언약 하에서 드려진 동물의 피의 효력에 대한 언급이다. '염소와 황소의 피 the blood of bulls and goats'는 일반 제사에 드려진 제물이었음은 물론 속죄일에 대제사장과 가족, 그리고 백성의 속죄를 위한 피였으며(12절), '암송아지의 재 the ashes of a heifer'는 정결케 하는 의식에 사용되었으며, '재'는 부정한 것을 깨끗케 하는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민 19:1-10). 이러한 희생 제물의 피와 재는 효과가 있는 것이나 단지 외형적이며 상징적으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에 불과하였다.
v.14 하물며...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 본문은 새 언약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 사역의 효과에 대한 언급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옛 언약의 제사보다 질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옛 언약의 제사가 성취할 수 없는 것 즉 양심을 깨끗이 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막던 죄를 제거하는 구속 사역을 성취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새 언약의 목적이다. 새 언약을 통해서 양심이 깨끗해진 그리스도인들은 옛 언약 하에서 불완전한 속죄로 인하여 제대로 섬길 수 없었던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dia; pneuvmato" aijwnivou 디아 프뉴마토스 아이오니우, through the eternal Spirit" - '프뉴마토스'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 자신의 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과 영을 통해서 구속 사역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프뉴마토스'는 성령을 통해서 주어진 임무를 성취하는 이사야서의 '주의 종' 사상을 암시하는 것으로 성령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사 42:1; 61:1).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과는 달리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속죄 사역을 이루신 대제사장이심을 시사한다.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 - "흠 없는 a[mwmon 아모몬, without spot"은 70인역에서 결점이 하나도 없는 희생 제물을 가리킬 때 사용된 희생 제사 용어이다(민 6:14; 19:2).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완전한 순종의 성취를 시사한다(5:8,9; 10:5-10).
d. 희생 제물의 완성자 그리스도 15-28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죽여야 할 필연성(必然性)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15-22). 그의 죽으심이 없이는 어떤 언약도 있을 수 없고, 하나님과 죄인들을 화해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8:6, 딤전 2:5). 또한 율법은 피를 통한 정결을 선포하고 지켜 왔는데,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요구하는 예표이다(22, 마 26:28). 즉 동물의 제물로 정결케 되었던 모세의 장막은 더 좋은 제물로 정결케 되는 하늘의 장막에 대한 예표이며(23-24),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최종적으로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25-28).
v.15 이를 인하여 드는 새 언약의 중보니 - '이를 인하여 for this reason'는 본문이 11-14절에서 언급한 내용의 결과임을 나타내다. 특히 이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피가 양심을 깨끗이 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한 것을 가리킨다. 한편 "중보 mesivth" 메시테스, the mediator"는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죽음의 효과를 시사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종말론적 구속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기로 약속하신 새 언약을 실현시키셨다(8:8-12; 10;16,17; 렘 31:31-34). 따라서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이시다.
이는 첫 언약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새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첫 언약 하에서 외형적인 면만 속죄한 불완전한 요소를 해결하여 온전한 속죄를 이루었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율법의 불완전성을 해결하여 양심까지 깨끗하게 속죄시킴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기업을 얻게 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녀들에게 주어질 '기업 inheritance'은 죽은 사람의 유언에 따라 얻는 재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영원한 구원을 시사한다(1:14; 5:9).
v.16,17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 "유언 diaqhvkh 디아데케, a testament"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언약. (2) 유언. '디아데케'는 신약성경에서 보통 '언약'을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유언'을 의미한다. 유언은 언약과는 달리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죽어야만 하셨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죽음의 필요성은 언약의 절차에서 비롯된다 구약에서 언약의 비준(批准)은 희생 제물에 의해서 보증된다(창 15:9-21; 출 24:3-8; 시 50:5; 렘 34:17-21). 그리스도는 이러한 새 언약의 비준을 위한 희생 제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고자 하시는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으며(요 4:34; 6:38,39) 아들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새 언약의 효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죽으셔야만 했다(8:9-12; 요6:40).
v.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 "이러므로 o{qen 호덴, Whereupon"는 본절의 결론이 16,17절에서 언급된 법적 원리에서 유래된 것임을 시사한다. 제사의식에서 희생 제물이 대표하여 피를 흘림으로 언약의 효력이 발생한 것처럼 새 언약에서도 대리자의 죽음을 통해 언약의 효력이 발생하였다. 새 언약에서는 구속 사역이 한 사람의 대리적인 죽음을 통해 성취되었으나 첫 언약 즉 옛 언약에서는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의 죽음을 통해서 외형적인 구속 사역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옛 언약이든 새 언약이든 간에 '디아데케'('유언')의 효력이 발생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v.19 저자는 본절에서 구약 시대에 언약 체결을 위해 희생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출애굽기 말씀을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다(출 24:3-8).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 구약시대에 언약을 맺는 과정은 세 가지 단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중 본절은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계명을 백성들에게 선포함으로 언약을 맺기 위한 항목과 조건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언약의 조건들을 선포하면 백성들은 받아들일는지에 대한 가부(可否)를 결정해야만 한다. 조건의 선포 후에 두번째 과정은 언약의 내용들을 책에 기록하는 것이나 본절에서는 이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 본문은 언약 체결의 세번째 과정이다. 피뿌림의 과정을 통해서 언약의 비준이 결정된다. 출 24장에는 피를 백성에게 뿌렸다는 사실은 기록되어 있으나 '물과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였다 with water, scarlet wool, and hyssop'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물과 양털 그리고 우슬초'는 대개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자나(민 19:1-22) 문둥병자(레 14:4-6, 49-51)를 정결케 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책 the book'에 뿌렸다는 사실 역시 나타나지 않으나 이것은 사람의 손이 닿은 책이 부정할 수 있기 때문에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v.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 본문은 출 24:8(LXX)의 인용이다. 저자는 70인역 출 24:8을 본절에 인용하면서 두 가지를 변경하였다. (1) 70인역의 "보라 eiijdou; 이두, Behold"가 본절에서 “이는 Tou'to 투토, This is”으로 변용(變用)되고 있다. 이 사실은 저자가 본절에 인용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성만찬 말씀과 일치시키기 위해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주의 만찬'을 암시하며(마 26:28; 막 14:24). 희생된 동물의 피에 의해서 옛 언약의 효력이 발생됨을 시사한다. (2) 70인역의 "위탁하였다 dievqeto 디에데토, has made with you"가 본절에서는 '명하신 ejneteivlato 에네테일라토, has commanded“로 바뀌었다. '디에데토'는 하나님께서 첫 언약을 제정하셨음을 암시하는 반면에, '에네테일라토'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기 위해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이 비준해 함을 시사한다.
v.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 본절은 후대에 이루어진 장막의 정결 과정과 연결된다. 장막의 봉헌은 첫 언약과의 연속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첫 언약이 보다 구체적이고 제도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막의 봉헌 후 모세는 아론 집안의 제사장들을 피와 기름으로 거룩하게 하였으며(레 8:23,24,30) 또한 장막과 그에 필요한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하였다. 구약성경에는 장막과 모든 기구에 기름만 바른 것으로 나타나나 본절에서는 피를 뿌렸던 것처럼 장막과 기구에도 피를 뿌린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v.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 "거의 scedo;n 스케돈, almost"는 정결케함에 있어서 피를 제외한 다른 예외적인 방법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 예외의 방법은 네 가지이다. (1) 전쟁터에서 노략한 전리품은 '물'로 정결케 하였다(민 31:23). (2) 속죄제에서 비둘기조차도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자는 '곡물'을 제물로 드려 정결케 되었다(레 5;11-13). (3) '향'을 속죄제로 드리기도 하였다(민 16:46). 그러나 이러한 정결 방법은 예외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경우 희생 제물이 피를 통해서 정결케 되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피 흘림 aiJmatekcusiva" 하이마텍퀴시아스, shedding of blood”은 피를 통한 속죄를 묘사하기 위해서 저자가 만든 조어인 듯하다. 사람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타락하였고 그 결과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죽을 죄인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이 있는 피흘림이 필요하였다(레 17:11). 첫 언약에서는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해서 죄 사함을 얻고 생명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온전한 사함과 생명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피흘림은 죄사함을 얻기 위한 절대적(絶對的)인 조건이다.
v.23 저자는 본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들'과 그 모형인 '지상에 있는 것들'을 비교하여 희생 제물의 피와 그리스도의 피를 대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 “그러므로 ou 우, therefore”는 본절이 19-22절에서 논한 내용에서 비롯된 추론임을 시사한다. 한편 구약에서 모세를 통해 허락하신 첫 언약과 장막을 통한 희생 제사는 '하늘에 있는 것들 things in the heavens'의 모형이다. 이러한 모형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이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라 정결케 하는 것은 피흘림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22절).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 '하늘에 있는 것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1) 혹자는 사람들의 죄로 인해 더렵혀진 '하늘 성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하늘 성소에 들어갈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후자가 타당하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인 지상에 있는 것들은 피로써 정결케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외형적인 정결케 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더 좋은 제물 with the better sacrifices' 즉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영적이고 내적인 양심의 정결을 필요로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이다(엡2:22). 한편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는 “제물 qusivai" 뒤시아이스, sacrifices”은 복수이다. 이것은 한번의 제사로서 속죄 사역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총칭적 용법으로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제사가 단번에 행한 영원한 제사임을 시사한다.
v.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통해 들어가신 곳은 지상의 성소가 아니다. 지상의 성소는 단지 외형적(外形的)인 것만을 속죄하는 불완전한 것으로 하늘의 실체를 보여주는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지상 성소의 실체인 하늘이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거하는 성소인 참하늘에 들어가신 것은 이미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지상의 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들처럼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위함이었다.
v.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일년에 한번씩 속죄일에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다(레 16장). 이러한 속죄 행위는 매년 반복되었으며 이 속죄 행위를 위해 매년 다른 희생 제물의 피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구속 사역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은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다. "드리려고 prosfevrh/ 프로스페레, he should offer"는 제사 행위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드린 사역과 속죄일의 제사 행위를 비교하고 있다.
v.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 "그리하면 ejpei 에페이, For then"은 문자적으로 '만일 달랐다면'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저자가 설정한 가정(假定)으로 옛 언약의 대제사장들이 행한 것처럼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주 자신을 드렸다면'이란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옛 언약의 대제사장처럼 자주 자신을 드렸다면 여러 번 죽음을 당하셔야 했을 것이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 본문은 앞서 언급한 사정에 대한 대답이다. 저자는 그 대답으로 '단번에 once'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단번에'는 앞서 언급한 '자주 often'와 대조되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죄를 완전히 제거 하셨음을 나타낸다. 한편 '세상 끝 at the end of the ages'은 구속사역의 성취의 때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구속 사역을 성취함으로써 개인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을 도래(到來)케 하셨다.
v.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의 최종적인 완전성을 증명하는 예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며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 죽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최종적인 것이다.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v.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 본절은 사 53:12(LXX)에 나타난 주의 종의 사역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앞서 언급한 모든 인생에게 적용된 죽음의 원리가 적용되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으셨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 인생의 최종성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목적 또한 최종적(最終的)인 것이다. 그가 자신을 '단번에' 드린 것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온전히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 본절은 구약의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간 것과 연결된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백성들은 근심 가운데 대제사장이 직무를 마치고 지성소에서 나오기를 밖에서 기다린다. 대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왔을 때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대신 드린 속죄제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가(24절) 자신을 기대하는 자를 위하여 두번째 "나타나시는 ojfqhvsetai 옵데세타이, shall he appear"과 대비된다. 옛 언약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제의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초림과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통해 백성들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시고 하나님 존전에서 중보 사역을 행하시며(24절), 또한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제를 드리고 성소에서 나올 때 밖에서 기다리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속죄제를 드리고 성소에서 나올 때 밖에서 기다리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속죄제를 받으셨음을 확신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그리스도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들은 구원의 상소자로서(1:14; 2:3,10; 5:9) 영원한 기업을 누리며 완전한 구원을 소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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