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이스라엘 예수(2:1-11) - 가나의 혼인 잔치
요한복음 2장은 가나의 표적(2:1-11)과 연결 구절(2:12)과 성전 정화(2:13-22)와 연결구절(2:23-25)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두 주요 기사는 예수가 가나에서 행한 표적 사건과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어떤 학자는 이것을 정결이라는 관점으로 연결시킨다. 전자에서 예수는 정결례 항아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고, 후자에서 예수는 성전을 청결케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을 이러한 설정으로 보는 것도 의미 있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더 중요한 모티브는 예수 이전의 중요한 예식(정결례)이나 예식 장소(성전)를 예수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결혼식에서 중요한 것이 포도주라면 예수는 이제 새 포도주이고, 성전에서 예배가 중요하다면 이제 예수는 새 성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가 구약의 주요 개념을 대체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주요 신학적 모티브이다.
1. 새 포도주 예수(1-11절)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혼인 잔치를 빛나게 한다(1-11절). 여기에서 저자는 먼저 예수가 행한 기적 사건을 기록한 다음(1-10절)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한다(11절). 요한의 해석에 의하면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의 여러 “표적” 중 하나이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 도래의 표식으로서 혹은 단순히 병자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기적을 행하는 경우가 많다(마 14:14; 20:34).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기적을 표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가 행한 기적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기 보다는 기적이 지칭하는 바에 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은 예수가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표적은 예수가 하나님과 같은 영광 받을 존재라는 것을 계시해준다(1:14; 12:41). 이러한 예수의 계시는 표적을 보는 이들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즉 표적을 목도한 이들은 각자가 예수에 대한 신앙 혹은 불신앙으로 자신의 입장을 결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나에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대해서는 제자들이 신앙으로 응답했다(11절).
요한은 이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 예수의 앞의 사역과 연결하여 “셋째 날”에 라는 시간 설정과 갈릴리 가나라는 지역을 언급함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셋째”라는 숫자를 예수 부활에 대한 암시(cf. 고전 15:4)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본문에 대한 지나친 알레고리적 해석이다. 이 숫자는 바로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자신과 관계된 큰 사건이 발생할 것(1:50-51)에 대해서 말했는데, 이것이 오랜 시간이 아니라 곧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면 된다. 또 요한복음에서 1:19부터 사건을 연결할 때 시간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1:29, 35, 43) 이 구절에서 시간을 언급한 것도 이러한 방식의 연속이다.
가나에서 있은 결혼 축제에서 행한 예수의 첫 번째 표적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결혼식 초청자가 아니라 예수의 어머니가-그것도 가장 먼저- 소개된 것은 의외이다. 이것은 예수의 어머니가 이 결혼식 초청자와 어떤 친척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에서 예수의 어머니가 담당할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 다른 복음서를 통해서 마리아로 알려진 이 인물이 이름으로 소개되지 않고 예수의 어머니로 언급되는 것은 요한이 이 인물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사회에서 어떤 사람의 어머니라고 불리 우는 것은 성공한 자녀를 둔 사람에게 부여되는 것으로서 영광스런 호칭이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모델 제자인 “예수의 사랑 받는 제자”도 익명으로 나온다는 것과, 예수의 어머니와 이 제자가 예수의 십자가 밑에 같이 서 있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볼 때(19:25-27),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의 사랑 받는 제자와 같이 어떤 모델 제자 혹은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이 혼인 잔치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청받는다. 공관복음서를 통해서 볼 때 예수가 혼인 잔치에 초청받고 참석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cf. 마 5:6; 8:11-12; 막 2:19; 눅 22:15-18, 29-30a). 거기서 예수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 cf. 눅 7:34)으로 언급된다. 어쨌든 예수는 영적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들과 함께 혼인 잔치에 초대 받는다. 그런데 갑자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께 “그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을 한다(1-2절). 이러한 말은 앞 구절들을 읽은 사람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내용이다. 설혹 예수의 어머니가 결혼 잔치 집과 어떤 친척 관계라 해도 예수의 어머니가 이 말을 주인 혹은 그 집 집사가 아닌 예수께 말한 것은 전혀 예기치 못할 일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말에 대해서 예수는 또 상당히 의외의 말을 한다. “여인(부인)이여(gu,nai), 이 일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4a절). 예수의 이 말은 백번 옳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예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가 어머니를 “어머니”가 아니라 “여인”으로 호칭한 것은 마리아에 대한 존칭의 언어이긴 하지만 당시의 유대 문헌 혹은 헬라 문헌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모자간의 호칭 언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3) 또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표현하는 셈어적 표현으로(삿 11:12; 삼하 16:10; 19:23; 왕상 17:18) 예수는 이 표현을 귀신과 자신이 상관없다고 할 때도 사용했다(cf. 막 1:24; 마 8:29; 눅 4:34; 8:28). 그렇다면 예수의 이런 표현은 과연 적절한 것인가? 만약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를 혈통에 의한 어머니로 대했다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인(gu,nai)이라는 말을 예수가 그의 여성 제자들에게 사용한 것(요 4:21; 20:13, 15)을 통해서 볼 때, 여기서 예수는 그의 어머니를 예수를 따르는 하나의 제자로서 대하고 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나아가 예수는 지금은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4b절). 요한복음에서 “때”는 주로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다 포함하는 영광의 때를 말한다(7:30; 8:20; 12:23, 27; 13:1). 하지만 여기서의 때는 그 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통해 예수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때를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께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했을 때 예수가 동생들에게 한 말과 같은 것이다(요 7:3-6). 즉 이 말 속에는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의 사역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암시가 들어있다.
자신의 말에 대해 거절을 표시한 예수의 말씀이 있은 후 예수의 어머니는 잔치 집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그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고 말한다. 본 기사에서 이 말이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말이다. 이 말을 할 때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큰 기적을 행할 걸로 믿은 것인가? 아니면 마리아는 단지 예수가 기적 행할 것을 예견했지만, 그 기적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11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어머니는 앞에서 말한 예수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마리아론적 해석을 하는 이들은 여기서 마리아는 잔치 집 사람들을 대신해서 예수께 무엇을 요청했는데,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께 무엇을 요청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구절을 통해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에게로”(per Mariam ad Jesum)라는 교리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가 흔히 자신의 여 제자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인 “여인”으로 불리는 것과,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것임을 볼 때 이 구절에서 마리아는 전형적인 제자로서 예수의 말씀을 오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리아는 후에 예수의 십자가까지 따라간 여 제자로서 이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한 사람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요 19:25-27).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방금 말한 예수가 유대인의 정결예식에 쓸 물 항아리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시중드는 사람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하고 그들이 이를 “아구까지 채웠다”는 것은 또한 상당히 의외다. 또 예수는 그것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까지 한다. 그리고 결국 연회장은 물로 만든 포도주를 맛본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곧 예수가 처음에는 어머니의 말을 거절했지만 결국에는 그녀의 말을 들은 것이라 하여 이것을 통해서 예수는 참 효자였다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문에서 저자의 의도를 캐낸 것이라기보다는 해석자의 관점을 본문 내에 끌어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요한복음 전체에서 볼 때도 예수와 어머니는 모자의 관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 제자라는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는데 물과 포도주라는 단어는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물은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서 상징적 의미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물이 말씀(혹은 율법)이고 포도주가 성령이라고 하는 종류의 상징적 해석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매우 낯선 것이다. 여기서 물은 유대인의 정결 예식에 쓰였던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옛 질서에 속하는 어떤 물질로 보이고, 포도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포도주를 옛 포도주와 새 포도주로 구별하며 후에 주어진 것이 더 좋은 포도주라고 말한 것을 볼 때(10절), 새 포도주는 예수가 전하는 복음이 가져올 것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말하면 아마도 예수가 새 포도주일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기사에서 예수가 옛 성전을 대체하는 (새) 성전이라는 모티브가 작동하는 것을 볼 때 여기에서도 예수는 새 포도주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구약의 정결 예식이나 이전의 어떤 예식에서 맛볼 수 없는 것을 제공해 주는 분이며, 나아가 이것을 변화시켜 그 자신이 대체하는 분인 것이다. 예수의 말에 의해 물로 만든 포도주를 맛보고 연회장은 “사람이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낸다”(10절)는 말을 하는데 이러한 관습은 당시의 문헌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보편적으로 어떤 문화에서건 약삭빠른 인간의 본성과는 잘 부합되는 말이다.
요한은 가나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기록한 후 이것에 대한 해석으로 끝맺는데, 이렇게 어떤 사건에 대해서 기독론적으로 해석하고 그 기사를 끝맺는 것은 전형적인 요한문헌의 문학적 특징이다(cf. 2:21-22). 요한복의 해석을 따르면, 이 사건의 의미는 혼인 잔치 자체나, 마리아론이나, 마리아와 예수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통해서 자신의 신적인 본질(영광)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요한이 쓰는 용어인 ‘표적’은 구약성서에서 친숙한 언어와 개념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때 흔히 사용하는 것이다(출 16:7; 민 14:22). 요한은 본 기사를 통해서 프롤로그(1:1-18)와 예수에 대한 소개(1:19-51)에 나와 있는 예수상이 옳다는 것을 예수가 표적을 행해서 이를 증명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적을 통해서 표적을 본 모든 사람이 그 내용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12절) 혹은 결혼 축하연에 참석했던 어떤 사람들도 예수의 표적에 대해서 믿음으로 응답했다는 말은 없다. 요한은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만을 기록하고 있다(11절).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사는 설교자들의 영감의 원천으로써 오랫동안 자리매김 해왔다. 하지만 이 기사는 이른바 영해라는 알레고리적 해석에 의해 곡해되어 온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에 있어 본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삼일, 돌 항아리 여섯 통)혹은 상징 언어(물과 포도주)이다. 성서에서 3 이라는 숫자가 예수 부활의 숫자이고, 6 이라는 숫자가 불완전을 상징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본문에서 저자가 그것을 의도 혹은 암시 했는가는 별도의 답변을 요한다. 필자는 저자가 본문에서 그러한 의도 혹은 암시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기독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예수가 옛 질서의 변화자라는 것이 주안점이기 때문에 숫자나 상징이 어떤 구체적인 의미를 표시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가 새 질서의 창시자라는 면에서 예수는 새 포도주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 대한 마리아론적 해석도 전형적인 본문에 대한 의미투여이다. 본문에서 마리아는 전형적인 예수의 여성 제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예수와 사람을 중재하는 이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나의 혼인잔치 Marriage at Cana
가나(Cana)의 혼인잔치는 신약성경 요한복음 2장 1~11절에 나오는 예수의 첫 이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혼인잔치에 초대 받아 참석하였는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는 돌 항아리 여섯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한다. 물을 채운 후 연회장에 갖다 주었더니 맛이 좋은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가나의 정확한 위치는 성경학자들과 고고학자들 사이에 분분한데, 갈릴리 안의 마을 몇 군데가 그 후보 지역들이다.
Marriage at Cana, 1407~1423, fresco, 칼레닉 수도원(Kalenić Monastery)
Giotto (1266–1337), Marriage at Cana, fresco
Giusto de' Menabuoi (c. 1320–1391), Marriage at Cana, 1376-78, Fresco, Baptistry, Cathedral, Padua
Maerten de Vos (1532–1603), Marriage at Cana, c. 1596
Gerard Davidcirca (1450/1460–1523) Marriage at Cana, c. 1500, oil on panel, 100 x 128 cm
Jan Cornelisz Vermeyen (c. 1504–1559), Marriage at Cana, c. 1530-1532, oil on panel, 66.5 x 85 cm
Jacopo Tintoretto (1518–1594), Marriage at Cana, 1561, oil on canvas, 435 x 535 cm
Giorgio Vasari (1511–1574), Marriage at Cana, 1566, oil on panel, 40 x 28 cm
Hieronymus Bosch (c, 1450~1516) Marriage Feast at Cana
Carl Heinrich Bloch (1834–1890), Wedding at Cana, 1870
Paolo Veronese (1528–1588), The Wedding at Cana, oil on canvas, 660 × 990 cm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794–1872), The Wedding at Cana, 1820, oil on canvas, 138.5 × 208 cm
Master of the Catholic Kings, The Marriage at Cana, c. 1495/1497, Oil on panel, 137 x 93 cm
A stained glass window in the Cathedral of Our Lady in Chartres.
The window is the central part of a section depicting the Marriage at Cana
The Marriage at Cana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1450~1516년)
Bosch, The Marriage at Cana.
Rotterdam, Boymans-van Beuningen Museum.
요한복음 2장1-12절 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이야기다.
성경의 기자는 이 첫 번째 기적이후 결혼식의 주인공들과 하객들이 어떠한 표현을 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고, 이 일로 제자들이 확실하게 믿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잔치, 이곳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이 혼인에 청함을 받은 것으로보아 예수님과 친척이 되거나 아주 가까운 신분의 사람의 혼인일 것이라한다.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1450~1516년) 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첫번째 기적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The Marriage at Cana) ,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것일까?
결혼식 잔치 사람들속의 예수님은 평범한 연약하게 보인다 .뒷배경에 밝은 빛의 천 배경이 아니면 한참 찾아야 한다.
그림 아래부분을 보면 빈포도주 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채우는 듯 보이는 하인만 열심이고 아무도 그일에 관심은 없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이그림에서 하인이 들고 있는것은 항아리가 아닌 특별한 가죽용기로 보이며, 이 가죽부대에 담겨진 것은 이미 물이 아니고 포도주를 새항아리에 이미 붓고 있는것이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는다. (마태 9:17 )의 말씀을 상기시키려 했으며 당연한 듯 이것이 더이상 기적이 아닌 사실로 나타내고 있으며 연회를 계속되면서 예수님은 맞은편의 사람과 손짓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계신다.
포도주잔을 들고 있는 아이는 거울에 비친 예수님의 이미지로써 . 아이의 왼손은 예수님의 오른손과 같이 들려져있고 아이의 오른손에는 포도주잔이 , 탁자에 놓인 예수님의 왼손은, 빵자체와 같이 그렸다." 빵 과 포도주"이다. 마가복음 14:22절에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사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 이것이 내몸이니라" 하시는것처럼 .....
잔치를 베플며 음식을 내는 하인들은 유대인의 결혼 잔치에 금지하고 있는 음식들 , 돼지고기 ,백조를 접시에 가득 담아내고있다. 이젠 더이상 금기가 아니다. 화면하단에 이슬람 내지 이교도의 모자를 쓴 사람들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아마도 화면 안의사람들의 모습과 광경을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막힌담을 모두 헐어버리시고 화평케하시는 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보쉬는 초신자들에게 설교용으로 그림을 많이그렸다하는데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보쉬의 섬세함에 놀라지 않을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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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기적 묘사한 ‘가나의 혼인 잔치’
성대한 결혼 잔치를 그린 작품이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 잔치’다. 이 작품은 신약성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한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베로네세는 종교적인 장면을 세속적이고 호사스러운 의식으로 바꿔놓았다.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사도들이 가나의 한 혼인잔치에 초대되었다. 흥겨운 잔치가 절정에 이르자 포도주가 떨어졌다.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물 항아리에 모두 물을 가득 부어라’라고 말씀하셨고 물을 가득 채운 항아리는 어느새 포도주로 바뀌었다.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포도주 맛에 감탄했다. 이렇게 예수는 첫 번째 기적을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는 구절이다.
파올로 베로네세는 이 작품에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않고 실제의 사건처럼 화려하게 구성했다. 등장인물이 100여명이 넘는 이 작품은 베네치아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인 산 조르지오 마조레 식당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웅장한 고전주의 건축물 사이 넓은 공간에 결혼식 하객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있다. 하인들은 그들의 시중을 들고 있다. 화면 중앙 하단에서는 음악가들이 흥을 돋우기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이 작품은 사실 평범한 결혼잔치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이를 반영하듯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는 화면 왼쪽에 앉아 있고,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가 성모 마리아 및 제자들과 함께 앉아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단순한 옷차림은 화려한 복장의 하객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화려한 장식이 달려 있는 긴 옷을 입은 남자들은 베네치아 상류층을 나타낸다. 또한 터번을 쓴 사람, 동양인 등 다양한 사람들은 상업이 발달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당시 베네치아를 묘사한 것이며, 자수가 놓인 식탁보, 진귀한 도자기 등은 거래됐던 무역상품들을 의미한다. 인물들 사이에 있는 하인, 광대, 동물들은 결혼식의 호화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 있는 4중주 음악가들은 당시 베네치아의 유명한 화가들이다. 음악가들 사이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는 ‘물질적인 쾌락은 순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작품에서 눈여겨 볼 것이 화면 오른쪽 맨 앞에 있는 노란 옷의 노예다. 그는 손님을 위해 물병을 따르고 있는데, 물병에서 나오는 것은 물이 아닌 포도주다. 옆의 남자가 물병에서 포도주가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고 있는 이 장면이 가나의 기적을 상징하는 것이다.
파올로 베로네세는 이 작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식탁 중앙에 그려 넣으면서 최후의 만찬을 암시했다. 예수 그리스도 머리 위로 하인들이 잔치에 쓸 고기를 자르고 있는 모습 역시 후에 있을 예수의 고난을 암시하는 것이다.<가져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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