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 (4:1-42)
4.1. 만남과 대화(1-30절)
유대 지역에서 사역하던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갈릴리로 떠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와 세례 요한을 경쟁상대로 몰아 갈등을 조장하려 한다. 이들은 예수의 제자 삼는 사역과 세례 주는 사역-요한복음 저자는 이것이 예수의 사역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한 것이라고 함-이 세례 요한의 그것보다 많다는 소문에 주목한다(1-3절). 이제 예수는 이들과 충돌을 피하려고 갈릴리로 떠나는데 그 중간 지역에 사마리아가 있었고 그곳을 통과해야만 했다(4절).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과의 반목으로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멀리 돌아갔는데 반해 예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마리아로 들어간 것이다. 이제 예수는 수가라고 불리는 사마리아의 한 도시에 들어섰는데 거기에는 야곱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준 우물이 있었고 예수는 그 우물곁에 앉게 되었고 그 때가 정오 쯤 되었다(5-6절).
그 때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오게 되고 여기서 그녀는 예수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사실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여러 가지 장벽이 있었다. 우선, 이 여인과 예수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벽이 있었다. 당시에 양 민족은 서로 상종을 하지 않을 정도로 반목이 심했는데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포로에서 귀환해서 사마리아에 정착해서 이방인들과 결혼해서 생긴 족속이 사마리아인들이었다. 남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해 순수한 혈통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던 차에 남 유다가 귀환 후 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돕겠다고 했으나 유대 사람들은 이것을 이를 단호히 거절했고, 이에서 관계가 악화되어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이라는 곳에 따로 성전을 세우고 예배를 드렸다. 또 한 가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것은 당시 내외를 하는 남녀라는 문화적인 벽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가 물 좀 달라고 하자 유대인 남자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여인에게 먼저 “물을 달라”고 하는 말을 함으로써 양자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예수: 나에게 마실 물 좀 주시오(7절).
여인: 아니 당신이 유대인 남자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9절)
예수: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이 어떤 것이고, 지금 당신에게 “물을 좀 주시오”하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당신이 나에게 청한다면, 나는 생명수를 당신에게 주었을 것이오(10절).
여인: 아니 선생님, 선생님은 물 긷는 바가지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생명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선생님이 이 이물을 우리에게 준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란 말은 아니시겠지요?(11-12절)
예수: 이 우물의 물을 길어 마시는 모든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주는 물은 그것을 마시는 사람 자신 속에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오(13-14절).
여인: 선생님, 내가 다시는 목마르지 않아 여기에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도록 이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15절).
여기서 예수와 여인의 대화 주제는 물이다. 그런데 두 사람 대화의 톱니바퀴의 아귀가 서로 맞아 돌아가지 않는다.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을 물리적으로,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해해서 그 심연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과 같이, 여기에 나오는 여인도 예수가 말하는 물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여인은 마실 물을, 예수는 생명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대화가 예수가 여인에게 물을 청한 것으로 시작되었으나(7절) 결국에는 여인이 예수에게 물을 청한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15절).
* 요한복음은 특이하게 물과 관련된 사건들이 많다: 2장 혼인잔치, 3장-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4장 - 생수, 5장 - 베데스다 연못, 6장 -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7장 -생수의 강(7:38-39), 9장 - 실로암, 13장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는 예수 등.
즉 요한은 이 기사를 통해 육체적으로 목마른 분은 예수였지만, 내면 세계의 문제에 있어 진정으로 생명수가 필요한 사람은 이 여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 여인은 예수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인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후의 대화의 주제는 급변한다. 예수는 문맥에서 전혀 예상되지 않았던 말을 함으로 다른 차원에서 이 여인과의 대화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예수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분으로 이미 소개되었고(2:23-25), 나다나엘과 니고데모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었다는 기사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1:48; 3:3) 예수가 여인의 개인적인 문제를 터치하면서 새로운 주제로 대화가 옮겨가는 것은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예수: 가서 당신의 남편을 데리고 이리로 오시오(16절).
여인: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17a절).
예수: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옳게 말한 것이오. 남편이 다섯 있었지만 지금 있는 그 분도 당신의 남편이 아니지 않소. 그래서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잘 말한 것이라고 한 것이오(17a-18절).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이 여인이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정말로 올바로 대답한 것인지, 아니면 이 여인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고 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도 여인의 대답을 옳은 말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전자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여인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고 일종의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발동한 것이고, 예수도 이 여인의 말을 형식적으로는 인정하지만 그 여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여인에게 자신의 말이 자신을 감추기 위한 임기응변식 대답이라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수의 말씀에 여인은 그를 선지자라고 인정하게 된다. “선생님, 당신이 선지자라는 것을 내가 알았습니다.”(19절) 하지만 이 순간까지도 이 여인은 예수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하면서도 예배할 장소에 대한 논쟁적인 주제를 꺼냄으로써 유대인인 예수를 못 믿겠다는 투의 말을 던진다. 사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예배의 장소에 대한 문제는 당시의 ‘뜨거운 감자’로서 서로 건드리면 안 되는 문제였다.
여인: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는데, 당신들은 마땅히 예배할 장소가 예루살렘에 있는 그곳 만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20절)
예수: 여인이여, 내 말을 신뢰하고 들어보시오. 때가 오면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니라 아버지께 예배하게 될 것이오.-당신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들은 아는 것을 예배하지요. 왜냐하면 구원은 유대인들에게서 나기 때문입니다.-이제 그 때가 오고 있고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즉 진실로 예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를 예배하는 이들은 마땅히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만 합니다(21-24절).
예배의 장소 문제를 건드리면 결국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대화는 단절될 수밖에 없는데 예수가 예배의 문제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영과 진리의 문제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대화의 소통이 계속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 “당신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들은 아는 것을 예배하지요. 왜냐하면 구원은 유대인들에게서 나기 때문입니다.”(22절) 라는 말을 할 때는 양자의 대화가 단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예수는 곧바로 예배의 중요성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는 것을 재천명함으로 여인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논박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여인은 여기에도 굴복하지 않고 이제는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참 예배가 이루어질 시간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메시아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신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25절) 하지만 이러한 말에 대해 예수는 “네가 말하고 있는 자가 바로 그 분이다.”(26절)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이 여인에게 계시한다. 결국 이 여인은 나중에 자신의 동네에 들어가서 “와서 이 사람을 보시오. 이분은 내가 과거에 행한 모든 것을 나에게 말한 분이오.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30절)라고 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인정하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요한복음에서 모델 제자의 하나로 자리매김 한다. 처음에는 예수의 말씀을 오해했지만 결국 예수의 집요한 선교 전략에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고 예수를 유대인 남자, 선지자로 인식하던 것에서 그리스도로까지 고백하게 되는 것으로 발전한다. 앞 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오해로 시작해서 그 오해가 오해로 끝났는데 반해, 사마리아인이 그것도 여성이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되는 상황에 이른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4.2. 여인의 증언(31-42절)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돌아오는 사이에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가 있었고 예수의 가르침이 이어진다.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물에 관한 대화를 하는 동안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에 들어갔던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 가지고 돌아 와서 예수께 먹기를 청하자 예수는 음식을 먹는 대신 먹을 빵을 매개로 해서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는 말을 한다.
예수: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빵을 가지고 있다(32절).
제자들: 누가 선생님께 빵을 갖다 드렸습니까?(33절)
예수: 내 빵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완성하는 일이다(34절).
이 대화에서도 빵이 주제인데 예수와 제자들 각각이 생각하는 빵의 의미가 달랐다. 제자들은 사람의 입으로 먹는 빵을, 예수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에너지원을 의미했다. 이러한 의미에 대한 오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와 어떤 사람과 대화할 때 전형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물에 관해서 있었던 일이다.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면 곧이어 이에 대한 예수의 설명이 뒤따른다. 여기에서는 사마리아 선교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이고 지금 바로 여기가 바로 그 선교의 현장이라는 것을 예수는 추수의 비유를 통해 설명 한다(35-38절).
이러한 대화 중에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듣고 예수를 믿은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이 사는 곳에 머무르기를 청하고 예수는 거기서 이틀을 묵으면서 이들에게 직접 말씀을 한다(39-42절). 이제 사마리아인들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는데 그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께서 직접 가르치는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미래 교회에서 이들의 말을 통해서 선교를 하도록 기도하는데 이러한 기도가 이미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통해 예수 부활 이전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고백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 그 자체이시며 생명의 수여자이시다. 사마리아 여인은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를 만났고 그녀의 신앙은 놀랍도록 성장하고 진보하였다. 처음에는 "유대인 남자", "선자자" "그리스도"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상의 구주"로 ... 3장의 니고네모와 비교 할때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의 신앙을 통해 참된 제자도를 발견할 수 있다. 메시야를 만난 그녀는 이전와 다른 모습, 물동이를 버려두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마을로 달려 간것이다. 그로 인해 인간이하의 취급받던 그곳에 기쁜소식, 즉 복음이 전파 된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요 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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