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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에필로그(21장)

by 은총가득 2020. 6. 20.

 

 

에필로그(21장)

 

1. 내용 구성

 

보수와 진보, 서구와 동양, 남녀를 막론하여 신약성서학을 하는 학자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이론은 어떤 것이 있을까? 모든 학자들이 네슬-알란트 27판을 사용하여 학문을 함에도 불구하고-물론 본문비평에 의해서 그 정확한 본문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신약 성서학자들이 공통으로 동의하는 이론적 토대는 갈수록 희박해져 간다. 역사비평적 주석 방법과 (신)문학비평적 주석방법 같은 주석 방법론적 상이함에서부터 여성신학적 읽기과 민중신학적 읽기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성서해석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의 성서 연구 방법론의 차이는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수년 전 헹엘(M. Hengel)이 신약학회(SNTS) 회장 취임 연설에서 우리의 공통된 토대는 마가 우선설(Markan Priority) 밖에 없다는 말로 발제를 시작하려 하자 뒷좌석에 앉아있던 어떤 학자가 손들 들어 “나는 아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러한 학문적인 방법론이나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21장의 성격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대체적으로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 요한복음 21장은 20장으로 이미 완성된 복음서의 부록 혹은 저자가 아닌 후대 편집자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21장이 20장으로 완성된 복음서의 부록인 증거로서는 20:28의 도마의 고백은 인간으로서 예수께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이며 이어지는 축복선언은 복음서의 종결을 예고하고 있고, 이어서 30-31절에 분명한 종결이 있다는 것이다. 21장이 복음서 저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후대의 편집이라는 주장은 21장에 이르러 이전과는 다르게 베드로와 애제자의 관계가 갈등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동반자의 관계로 변화되었고, 21장은 복음서 저자인 애제자의 사후에 공동체에 일어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요한복음 21장의 성격은 부록이나 후대의 편집이라는 단어 보다는 에필로그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 앞의 견해대로라면 21장은 요한복음 저자의 본래 저술의도와 구성과는 별도로 쓰여진 부분이 되는데 그러면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여러 가지 난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선, 21장은 부록이나 후대의 편집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인정하듯이 현존하는 사본 중에서 21장이 빠진 사본이 없는데, 이 사실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 물론, 이들은 21장의 편집이 20장이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편의적인 발상이다. 둘째, 21장에 나오는 단어나 문법을 분석해보면 이것이 그 이전 본문에 나오는 단어나 문체나 문법과 다르지 않다. 소위 바울의 친서와 제 2 바울서신에 있는 문체의 차이와 비교해 보면 이러한 일치는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이 21장이 없이 끝나면 요한복음 안에 있는 몇 가지 문제가 모순 혹은 미해결 과제로 남는다. 먼저,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제자는 베드로와 애제자, 그 중에서도 애제자인데 20장에서 복음서가 끝나게 되면 요한복음의 최고의 신앙 고백자는 애제자가 아닌 도마가 된다. 또한 13장부터 시작된 요한복음의 주요 모티브 중의 하나는 베드로와 애제자의 협동 혹은 갈등의 관계인데 이것이 21장 없이 끝나면 이들이 마지막 등장한 장면(20:1-10)에서 그 관계에 대한 결말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나 이들이 마치 배교자로 묘사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이 시점까지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이 두 제자상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제자의 관계에 대한 결말이 나는 것이 예상되어 있고 이것은 21장의 핵심 모티브 중의 하나다. 나아가, 애제자가 누구인가는 21장에서 끝까지 익명으로 남아있지만 그가 저자라는 것이 명시되는데 이것이 없이는 애제자의 본질에 대해서 알기 어렵다. 예수에 관한 중요한 사건에 증인인 애제자가 요한복음 저술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기대되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21장이 부록이라는 견해는 20:30-31이 복음서 전체의 명확한 결론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데 마이니어(Paul S. Minear)에 의하면 이것은 얼마든지 20장 자체의 결론으로 볼 수 있고 복음서 자체에 대한 결론은 21장 마지막 절에 있다고 할 수 있다.38) 특히 요한복음이 시적 문구인 프롤로그(1:1-18)로 시작되고 거기에 “우리”라는 신앙 공동체 일원이 등장하는데 21장을 에필로그로 인정하면 에필로그의 마지막 부분(21:24)에 “우리”가 재등장하여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잘 어울리게 된다.

 

요한복음 21장의 구성은 비교적 명확하다. 21장은 복음서 전체의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절(25절)을 제외하고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 되어있다. 하지만 내용 구성상 21장은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에 대한 부분(1-14절)과 베드로와 애제자의 사명에 대한 부분(15-23절)과 복음서 전체의 결론(25절)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중간부분은 다시 베드로에게 준 목양의 사명(15-17절)과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예언(18-19절)과 베드로와 애제자의 서로 다른 사명(20-23절)에 대한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의 디베랴 바닷가의 부활 현현 기사를 보면 이때 예수가 제자들을 부활 후 처음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는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세 번째 부활 현현 기사라고 하여 20장의 제자들-저자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로 분류되지 않음-에게 나타난 예수의 부활 현현 기사와 이것을 연결시킨다. 요한복음의 내용이 반드시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부활현현 기사가 다른 기사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것으로 보아도 문제가 없다. 즉 베드로와 애제자에 대한 사명으로 연결시키는 긴 기사를 별도로 취급하기 위해 21장에 이 마지막 부활현현 기사를 위치시켜 놓았을 수도 있다.

 

2.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난 예수(1-14절)

 

요한복음 21장 1-14절은 예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에 대한 기사이다. 이 기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말로 시작해서(1절에 2번) 같은 단어를 재차 사용하면서 끝맺는다(14절). 저자는 “그 후에”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 기사를 바로 앞 장에 나와 있는 예수의 부활 현현 기사와 연결시키려 한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의 무리에게 이미 두 번 나타났던 것처럼 다시 한번 디베랴 바닷가(갈릴리 바닷가; cf. 6:1)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사를 통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가? 앞 장에서 언급되었던 두 번에 걸친 예수 부활 현현 사건으로는 부활에 대한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에 또 하나의 증거가 필요해서 이 기사를 포함시킨 것인가? 아니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물고기와 빵으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가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더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인가? 아니면 빈 무덤 사건(20:1-10)에서 끝나지 않은 베드로와 애제자의 경쟁 모티브를 되살려 저자가 이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아마도 두 번째와 세 번째 답이 복합된 것이 저자가 의도했던 점일 것이다.

 

요한복음 내용 전체에서 예수 부활 전후를 막론하고 제자들의 리더였던 베드로는 이 기사에서도 제자들의 리더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는 디베랴 바닷가에 있던 제자들의 명단에서 제일 앞에 나올 뿐만 아니라 이들을 이끌고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권하고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의 인도를 따른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익명의 두 제자들이 어떤 성격의 사람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은 공관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십이 제자의 일원이 아니었으며 여기에 모인 제자들이 총 7명이기 때문에 이들을 십이 제자의 무리로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7명의 제자들이 있었지만 여기서 부각되는 인물은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애제자) 뿐이다. 요한복음의 다른 구절에서처럼 여기서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요 리더이며 성격이 급한 사람이요(7절), 애제자는 예수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예수를 알아보는 사람으로 나온다(7절).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물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의 행동이 비 신앙적, 나아가서는 배교적 행동인가 하는 것이다. 20장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 후 이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20:19-23) 선교의 현장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 바닷가에 물고기 잡으러 간 것은 부활 신앙을 저버린 행동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들이 그곳에 가서 “이 밤에” 아무 것도 낚지 못했다는 것은 이러한 주장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 해주는 것 같다. 특히 “밤”이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서 상징하는 바를 생각하면(cf. 3:2; 13:30) 이들이 물고기 잡으러 간 행동은 배교의 행동으로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 자체에는 이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이 기사에서 제자들이 물고기 잡으러 간 일을 배교와 연결시키는 것은 본문이 의도하고 있는 바를 벗어난 해석이다. 이들이 물고기 잡으러 간 것은 인간으로서의 생업의 일환이었을 것이고 예수는 그 생업의 현장에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난 것이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애쓰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새벽녘에 해변에 나타나지만 제자들은 아무도 그가 예수인줄 알아보지 못한다. 물론 새벽녘의 바닷가는 안개도 있을 수 있고,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슴푸레하기 때문에 사람을 정확히 식별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그러한 물리적인 조건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부활한 예수의 얼굴을 보았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마리아와 같이(요 20:15) 제자들도 마음이 어두워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일 것이다. 마리아에게 예수께서 그 이름을 부르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셨듯이 고기잡이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6절)고 말하심으로써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다른 장면에서와 마찬가지로(cf. 20:1-10) 이 때에도 역시 예수를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애제자였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애제자는 예수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예수의 뜻을 잘 알아차리는 인물로 나온다(13:23; 19:35). 그리고 이러한 그의 통찰은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즉시 보고 된다. 벌거벗고 고기잡이를 하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나타났다는 애제자에 말에 옷을 걸치고 성급히 물에 뛰어든다. 베드로와는 달리 다른 제자들은 배를 끌고 해변에 다다른다.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베드로만이 그물을 끌어올려 큰 물고기를 153마리나 건저내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물고기로 조반을 드시고 이 때 제자들은 모두 부활한 예수를 알아본다.

 

이 기사에서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의 흥미를 가장 많이 자아냈던 것은 물고기 숫자에 대한 것일 것이다. 왜 153 마리인가? 단순히 많은 물고기라고만 하면 될 것을, 아니면 대략 백여 마리나 된다고 해도 될 것을 왜 구체적으로 153 마리라고 했을까? 어거스틴을 비롯해서 수 많은 신학자들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 난제를 풀어보려고 시도 했다. 하지만 모든 제안들이 그야말로 제안일 뿐 그 어느 것도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숫자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예수가 바닷가에 나타난 사건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이며 이것에 대한 증언이 확실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 기사에서는 베드로와 애제자가 주요 인물로 나타나지만 이들에게 어떤 특수한 임무는 부여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어지는 기사에서 나올 것이고, 이 부분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애제자의 사명을 언급하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부활 후 나타나셨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3. 부활한 예수를 목도한 자의 사명(15-24절)

 

3.1. 목양의 사명(15-19절)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부활한 몸을 보여주고 그들과 아침 식사를 한 후 예수는 이제 이들 중 베드로와만 상대하여 의미심장한 대화를 한다. 그 대화는 다름 아닌 목양의 사명에 관한 것이다(21:15-19). 첫 번째 대화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예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와 베드로는 첫 번째 대화 후에 비슷한 요지의 대화를 두 번 더 계속한다. 세 번의 대화는 정확하게 언어적으로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 내용의 요지는 동일한 것이다. 약간의 다른 점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첫째, 예수의 질문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 대화에서는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이 빠진다. 둘째, 예수가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는 문장 혹은 단어가 각각 “내 양을 치라”와 “내 양을 먹이라”로 바뀐다. 셋째, 세 번째 대화에서 질문을 받은 베드로가 “근심했다”(혹은 “마음이 아파”)는 내용이 첨가된다. 먼저, “이 사람들보다”라는 구절은 한 번 사용하고 난 다음에는 굳이 반복해서 포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양”/“어린양”과 “먹이라”/“치라”라는 단어는 저자가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셋째, 베드로가 “마음이 아파”한 것은 자신이 예수를 세 번이니 부인했는데 예수가 세 번째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자 이것이 생각나 마음이 아파한 것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화의 진전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다. 이상을 통해서 세 번의 대화는 그 요지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 예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 예수는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베드로는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마지막 질문에서 예수는 ‘필레오’ 동사를 사용하고 베드로는 ‘필레오’ 동사로 대답한다. 그 동안 학자들은 여기에서 사용된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두 동사가 각각 동의어로 쓰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인지에 대해서 논란을 벌여왔다. 만약 ‘아가파오’가 신적인 사랑을 의미하고, ‘필레오’가 친구로서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 가운데 이것이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이 대화는 이런 것이 된다. 처음 두 번의 대화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전적인 헌신을 의미하는 신적인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 하느냐고 묻고 베드로는 그렇지 못하고 단순히 친구로서 사랑한다고-예수의 말을 부정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예수를 부정한 자로서 겸손한 태도로- 대답하는 것이 된다. 마지막 대화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입장을 이해하여 자신을 신적인 사랑이 아닌 친구로서의 사랑을 하느냐고 묻게 되고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요한복음 전체와 본문에서의 위 두 동사의 쓰임새와 문맥에서 볼 때 적절한 해석이 아니다. 우선,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다”라는 동사는 주로 ‘아가파오’ 동사가 쓰였는데 이것은 ‘필레오’ 동사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다(cf. 20:2; 21:7). 둘째, 본문 자체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기 위해 이 질문을 함으로써 베드로의 위상을 높여 주려는 의도에서 “사랑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지 사랑의 종류를 물어보려고 베드로에게 질문한 것은 아니다. 만약 베드로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희생적인 사랑(‘아가파오’)이 아니라 친구로서의 사랑(‘필레오’)이 본문에서 의도된 것이라면 세 번째 대화에서 예수가 자신을 친구로서의 사랑을 하느냐고 질문을 했을 때 근심하거나 마음이 아파하기보다는 예수가 자신을 이해해 준 것에 기뻐했어야 했을 것이다. 이 장면의 핵심은 예수가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의 위상을 높여주고 그에게 목양의 사명을 준 것에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베드로는 어떤 자격으로 이 사명을 받은 것인가? 여기서 베드로는 최초의 교황이며 이 목양의 사명은 교황에게 승계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 목양의 사명은 사도로서의 베드로의 사명을 이어받은 안수 받은 목사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여기서 베드로가 받은 사명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늘 그랬듯이 제자들의 대표로서 받은 것이라면, 이 목양의 사명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성직자와 평신도를 본질상 구분하는 것은 신약성서 자체에서는 낯선 개념이다. 독점적 성직자인 “감독” 혹은 “장로”의 직분이 현재의 성직자와 평신도 개념으로 발달한 것은 이단의 득세에 따라 이것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강력한 지도자 개념을 도입한 이 세기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신약성서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목사와 평신도는 본질이 아니라 그 기능에 의해서만 구분될 뿐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예수 부활 혹은 승천 기사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선교명령을 하는 것으로 끝맺는데(마 28:16-20; 막 16:15-18; 요 20:19-23; 행 1:8) 이 명령이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듯이 베드로에게 주어진 목양의 사명 또한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어서 예수는 베드로가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때의 태도와 그가 이 사명을 감당하게 될 때에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인가를 예언의 형태도 알려준다. 목양의 사명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며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예수는 말한다(19절). 또한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는 자신의 길을 갔지만 그 이후에는 여러 가지 핍박을 받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18절). 예수는 실제로 베드로가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다가 순교할 것에 대해서 여기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구문을 사용하여 예언을 한 것을 보면 예수가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준 것이 얼마나 중차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를 대표로 해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목양을 사명을 주었다면 예수를 따르는 후대의 모든 제자들에게도 이 사명은 그대로 주어진 것이다.

 

3.2. 베드로와 애제자 각각의 사명(20-24절)

 

목양의 사명을 받고 예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은 베드로는 애제자가 그들을 따라오는 것을 목도한다. 요한복음 내내 선의의 경쟁 관계로 묘사된 이 두 인물은 이곳에 마지막으로 다시 등장한다. 베드로는 자신이 순교할 사명이 있음을 예수께로부터 들은 후 애제자는 어떻게 되겠는지를 예수께 묻는다. 예수는 애제자의 사명과 운명에 대해서는 베드로가 상관할 바가 아니며 베드로는 예수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가운데 예수의 말 중 “자신이 재림할 때까지 애제자를 이 땅에 머물게 할지라도”라는 내용의 말이 공동체 안에서 오해되어 그가 죽지 않는다는 소문이 생기게 된다.

이 구절에서 베드로와 애제자가 죽음의 종류에 관해서 비교되어 나타나며 이것은 어떤 죽음이 더 고귀한 것인가에 대해서 요한 공동체 내에서 논쟁이 이러났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베드로의 순교적 죽음과 애제자의 장수 중 어떤 것이 더 우월한 죽음인가? 초기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사보다 순교가 더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cf. 계 20:4). 하지만 요한 공동체 내에서는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애제자가 장수(長壽)한 것이 예수의 재림과 연관하여 이에 못지않은 것으로 여겨졌다(22절).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애제자의 운명에 대한 오해가 생겼고 23절은 그것을 교정하는 내용이다. 두 제자의 죽음의 종류에 대한 논쟁은 아마도 애제자 사후에 발생했을 것이다(23-24절). 여기서 애제자의 증언을 기록한 사람들은(24절) 애제자가 장수한 것이 베드로의 순교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 같다. 이것을 통해 13장부터 이 본문까지 계속된 베드로와 애제자의 경쟁 모티브가 대단원을 맞게 된다. 이들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각각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길을 올바로 가고 있는 것이다.

 

24절에 보면 이 애제자가 바로 요한복음 내용에 있는 예수 행적과 말씀에 대한 증인이며 동시에 저자라고 한다. 여기서 “그의 증거가 참이라”는 것이 강조된다. 그래서 애제자는 증인으로서의 특별한 위치를 향유한다. 그래서 이 구절 기저에는 애제자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은 베드로의 목회자로서의 역할과 동등 혹은 우월하다는 암시가 깔려있다. 그래서 요한복음 앞 부분에서처럼 여기서 애제자는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이며 동시에 예수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는 사람으로 소개된다. 결국 요한복음에서 이상적인 제자로 설정된 애제자에 대한 언급으로 요한복음 본문이 끝나게 되는데 이것은 도마의 신앙고백과 그것에 대한 찬사로 마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4. 결말(25절)

 

마지막으로 저자는 요한복음이 어떻게 저술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이 책은 예수의 행적에 관한 것이다. 둘째, 저자가 알고 있는 예수의 행적은 여기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많아서 만약 그것을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도 그 책을 수용하기에 부족할 정도다. 이러한 표현은 문학적 과장법으로서 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한 전승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가를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이 말을 통해서 자신이 자료를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저자가 20:30에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관해서 말했던 것이다. 거기에서는 자료를 선택한 기준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계속] 믿게 하는데 있다고 한다(20:31). 21:25에서는 저자의 자료 선택 기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기준에 의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복음서 저술이 어떻게 구전 혹은 문서 자료를 사용하고 자신이 이것을 어떻게 기술했는지를 기록하는 것은 요한복음만의 특징은 아니다. 요한복음이 이것을 복음서 말미에 기록하였다면 누가복음은 복음서 서문으로서 보다 명확하게 이것을 표현하고 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 기록이 역사상 이루어진 예수 사건에 대한 것이며, 그 사건에 대해서 목격자들이 구전한대로 기록한 여러 저술들을 참고하여, 자신의 입장에서 논리정연하게, 이미 예수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 사건에 관한 것을 보다 명확하게 가르치기 위해, 즉 목회적 목적으로 이 책을 저술하고 있다고 말한다(눅 1:1-4). 요한복음은 목회적 혹은 선교적 목적으로-20:31의 본문의 선택 혹은 이것의 해석에 따라- 비슷한 과정을 거쳐 기록된 것이다.39) 다만, 누가는 자신이 구전과 문서 전승을 사용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했지만, 요한은 문서 전승을 사용하고 있다고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요한복음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비록 구전 혹은 문서 전승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요한은 자신의 언어로 이것을 철저하게 신학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자료를 말할 때 공관복음의 그것에 비해 어려운 부분이다.

 

5. 해석과 적용

 

요한복음 저자는 마지막 장을 에필로그의 성격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에필로그를 통해서 저자는 크게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하려고 한 것 같다. 첫째, 예수의 육체적 부활은 확실히 일어난 것으로서 예수가 디베랴 바닷가에 부활 현현 시 제자들과 함께 조반으로 물고기를 먹었는데 거기에 있던 제자들은 그 물고기의 정확한 숫자(153 마리)까지 기억하고 있는 정도다. 둘째, 예수의 부활현현은 제자들에게 교회 시대에 사명을 주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 사명을 한마디로 말하면 목양의 사명이다. 셋째,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모든 사람이 똑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순교자의 길도 있고, 장수하면서 증인의 사명을 다 하는 것도 있다. 저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 이 사명의 종류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논란을 종식시키려 한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사명이 각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복음서 전체의 결론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복음서를 기록했는지를 언급한다.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단순히 예수 어록의 수집물이나 흥미로운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복음서 저자가 생각하기에 독자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도 혹은 목회적 권면을 하기위해 선택적으로 자신의 신학에 입각해서 기록한 것이다. 이 에필로그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사역의 결말인 부활과 그 의미와 부활을 믿는 자의 사명을 다시금 되새겨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