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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최후의 만찬과 고별 설교(요 13-16)

by 은총가득 2020. 6. 3.

 

최후의 만찬과 고별 설교(요 13-16)

                                                             

1. 구조와 장르

 

1.1. 문학적 구조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제자들과 고별하는 장면은 13장에서 17장까지이다. 이것은 최후의 만찬 장면(13:1-30)과 고별 설교(13:31-16:33)로 대별된다. 그런데 14장 마지막 절에서 “일어나자 여기를 떠나자”라고 말하고 18:1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편으로 나가시니”라고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볼 때 15-17장은 초고가 완성된 후에 첨가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추후에 보충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흔히 고별 설교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13:31-14:31; 15:1-16:4a; 16:4b-33) 세 층의 고별 설교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각에서 보혜사 본문 등 반복되는 것이 많음을 볼 때 각각은 예수의 고별 설교에 대한 여러 층이 합쳐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러 층으로 구성된 것이라 해도 최종 형태의 본문을 편집자가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은 편집자는 최종 형태의 본문이 문학적으로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고별 설교는 여러 층이 있다는 가정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본문 자체가 저자의 본래 의도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 있는 생각이다.

 

사실 요한복음 저자는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반복이 생소한 것이 아니라 고별 설교에서는 요한복음의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반복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또 보혜사에 대한 본문에서도 내용상 반복적인 것이 있지만 각각이 개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설혹 고별 설교가 처음에 14장까지 완성되어 나중에 다른 것이 추가되었다 하더라도 현재 형태의 본문도 그 안에서 통일성 있는 문학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1.2. 고별 설교의 문학적 장르

 

예수의 고별 설교(13:31-16:33)는 문학적 장르로 볼 때 유대교 문헌과 그레꼬-로마 문헌 모두에서 죽어가는 영웅의 이별 장면을 기록한 유언 문학에 속한다. 다만 이것이 그레꼬-로마 문헌에 나오는 유언문학에 더 가까운지, 아니면 구약-유대교 문헌에 나오는 유언 문학에 가까운지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어왔다. 그레꼬-로마 문헌 중에는 죽어가는 영웅적 인물로서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것이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 제자들과의 대화한 것이다. 구약 성서의 예로는 죽음을 앞둔 야곱이 제자들에게 유언을 한 것(창 49장), 모세가 백성들에게 행한 유언으로서의 연설(신명기)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신약 동시대의 유대교 문헌에는 이러한 유언 장르의 문헌이 많이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열 두 족장 각자가 후손들에게 유언을 하는 형식의 ‘열두 족장의 예언’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신약 성서 자체에도 이런 문학 장르의 글로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고별 가르침(22:14-38)과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연설(행 20:17-38)을 들 수 있다.

 

요한복음 저자가 위의 내용 중 어떤 것을 얼마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문학에 얼마나 활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요한복음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 유대 문헌에 더 익숙해 있었고 최소한 구약적 배경에는 친숙해 있었다고 생각해왔다. 최근에는 여기에 제자들을 위로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이것이 구약-유대교 전통보다는 그레꼬-로마 전통의 유언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어쨌든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고별 설교는 기본적으로 구약-유대교의 유언 문학에 속하면서도 축복보다는 ‘위로’에 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고별 설교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보혜사를 보내 줄 것에 대한 약속은 예수가 떠나간다는 것에 대해서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것에 그 초점이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가 위의 문학 장르와 유사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2. 최후의 만찬(13:1-30)

 

2.1 세족식과 그 의미(1-20절)

 

2.1.1 세족식(1-11절)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공히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만(마 26:17-29; 막 14:19-25; 눅 22:7-38; 요 13:1-30) 요한복음은 예수의 성만찬 제정 본문을 포함하고 있지 않고 대신 세족식을 기록하고 있다는 면에서 특이하다. 세족식에 앞서 요한복음의 예수는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것을 예수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1절)로 표현한다(cf. 3절). 즉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죽음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며(19:30)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서 한 번도 혼동하거나 잊어버린 적이 없으며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인가를 언제나 인식하고 있다(1, 3절).

예수는 자신의 본질과 사명을 인식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의식을 행한다(4-5절). 그런데 예수가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인식하고 있는 것과 세족식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가 언뜻 명확하지 않다. 이것은 당시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예수가 베드로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그에게 다가가자 베드로는 “주여, 당신께서 나의 발을 씻긴단 말입니까?”(6절)라고 의아해 한다. 이러한 베드로의 반응은 당시의 문화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고대 유대나 그레꼬-로마 사회에서 공히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 대해서 행하는 섬김의 예식이었던 것이다. 사실 유대 사회에서는 노예조차도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이 일상적인 의무 사항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는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려 했고, 이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베드로의 반응은 문화적으로 정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의 세족 행위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위와 같이 반응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7절)고 말한다.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행위와 말씀에 대해서 부활절 이전에 잘 깨닫지 못한다(cf. 2:17, 22; 7:39; 12:16). 이 장면에서도 예수 부활 이전의 베드로는 예수의 행위에 대해서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계속해서 말한다.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8a절).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전형적인 오해의 말과 행동의 일종이다. 세족식이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예수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b절)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세족식이 구원의 방편이 되는 성례전적 예식이란 말인가? 아니면 이것이 예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상징적 행위라는 말인가? 아마도 여기서 예수가 말한 뜻은 후자일 것이다. 세족식이 성례전으로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신약 성서 안에는 없고 후대의 증거도 빈약하다. 그러므로 예수가 세족식을 행한 것은 그의 죽음에 앞서 자신의 갈 길을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으로서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시하는 것이고 제자들로서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믿음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의 말을 오해하여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 등 전신을 씻겨달라고 한다(9절). 세족 자체가 죄를 씻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예시하는 상징적 행동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온 몸을 씻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이 때 예수가 한 말, 즉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10절)가 문제가 된다. 문제는 여기서 목욕한 자는 세족을 한 것을 의미하는 가하는 것과 “발 밖에”라는 말이 원문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예수는 세족식을 통해서 씻는 메타포를 사용하는데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죽음을 앞둔 예수의 행위를 이미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을 재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족식을 성례전적 예식으로 사용하고 있던 일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예식을 정당화하고 이 본문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석하도록 하기 위해 “발 밖에”라는 문구를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2.1.2 세족식 의미 해석(12-20절)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는 이미 세족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세족식을 마치면서 예수는 자신의 행동의 신학적 의미를 넘어 윤리적 중요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가르친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이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절)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크지 못한 것이 분명한데 이렇게 예수처럼 선생이 제자가 되고 주인이 종이 되어 상대방을 섬기는 것은 훌륭한 일이고 그렇게 행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16-17절).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는 이 세족식을 성만찬처럼 하나의 성례전으로 행하라는 것인가? 아마도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가 공관복음과 바울서신에(고전 11:23-26) 나오는 예수의 성만찬 제정 사건을 모르지 않았다고 볼 때, 그가 이것을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아마도 실제로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도 그 예식 자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요한복음 저자가 이러한 예식을 의도적으로 반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이러한 성례전적 예식을 명시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상징화해서 기록한 것은 예식 자체보다도 실제 형제간의 사랑을 중요시 여겼던 저자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세족식과 그것에 대한 해설을 마친 다음 예수는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로 돌아가 이 모든 자신의 행위와 말씀이 결국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임을 믿게 하려는데 있다고 한다. 요한복음의 예수가 이미 반복해서 말한 대로 예수를 영접하는 것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19-20절). 예수는 바로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고 이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2.2. 가룟 유다의 배반(21-30절)

 

요한복음 저자는 최후의 만찬 장면에 세족식과 가룟 유다의 배반 장면을 포함시키면서 양자를 긴밀하게 연결한다. 세족식에서 저자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할 것임을 계속해서 언급하거나 아니면 복선으로 깐다. 예수가 세족식을 하는 장면에 앞서 저자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는 언급을 하고 있으며(2절), 모든 제자들은 깨끗하지만 그렇지 않은 제자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10b-11절), 시편 구절 인용을 통하여 자신을 배반할 자가 있을 것임을 예시한다(18절).

 

이제 이러한 예시와 복선을 넘어 배반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줄 시간이 왔다. 예수는 자신을 배반할 사람이 자신의 제자라는 것에 마음이 몹시 괴로워한다(21절). 여기서 “괴로워하다”라는 동사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 사용했던 단어인데(12:27) 자신의 제자 중 배반자가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 예수의 심정을 묘사하는데도 사용되었다. 예수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한다. 이에 제자들은 그가 누가일까를 궁굼해 하면서 어쩔 줄 몰라한다(22절). 여기까지의 장면은 공관복음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배반자가 누구인가 제자들이 서로 확인하는 장면에서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이후 애제자)가 등장하고, 그가 예수와 베드로의 중재자로서 등장하는 것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23-26절). 베드로와 애제자의 우정과 경쟁 모티브는 이후의 내러티브에서도 계속된다(18:15-16; 20:1-10; 21:1-7, 20-23).

 

어쨌든 애제자가 베드로의 부탁을 받고 배반자가 누구인가를 묻고 예수는 한 조각의 빵을 자기가 주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이어 예수는 가룟 유다에게 빵 한 조각을 줌으로써 누가 배반자인지를 애제자에게 확인시켜준다. 이 때 사단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고 예수는 그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한다(27절).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늘 그렇듯이 예수 부활 이전의 제자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유다는 예수가 건네 준 빵 한 조각을 받고 배반의 행위를 하기 위해 즉시 밖으로 나간다. 여기서 유다의 배반의 동인의 무엇이었는가가 본문 해석자들의 영원한 관심사였다. 공관복음에서는 유다가 돈 때문에 예수를 배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마 26:15; 막 14:11; 눅 22:5; cf. 행 1:18; 마 27 :3-10) 요한복음에서는 그 배반의 원인자가 사탄이라고 말한다(2, 27절). 즉 요한복음은 예수가 유다의 사소한 물욕 때문에 십자가에 내몰렸다기보다는 더 근원적인 원인자인 사탄에 궤계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유다가 최후의 만찬석을 떠난 시각이 “밤”이었다고 기록한다. 물론 시간적으로 이것이 밤이었겠지만 여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유다의 행동이 정당하지 못했고 악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cf. 3:2; 9:7). 하지만 요한은 그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조그만 상징으로 이미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3. 예수의 고별설교(13:31-16:33)

 

3.1. 고별설교 1(13:31-14:31)

 

3.1.2. 문제와 정황

 

본문은 예수가 제자들을 떠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제자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위로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베드로에 대한 위로로 시작해서(13:31-38), 제자들 일반에게 주어진 위로(14:1-14), 보혜사를 보내 줄 것을 약속한 것에 대한 위로(14:15-26), 평안의 약속을 통한 위로(14:27-31)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바울서신의 논리 전개 방법과는 달리 요한 서신은 문단이 사상 단위 별로 명확히 끊어지지 않는데, 요한복음 14장도 요한서신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러 주제가 반복되면서도 모두가 다 예수의 떠나감으로 생긴 문제를 위로로서 푼다는 주제로 묶여 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기 위해 최후의 만찬장을 떠난 때에 예수는 자신이 떠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영광이라는 말로 풀어 제자들에게 설명한다(13:31-33절). 물론 베드로, 도마, 빌립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이에 대해 엉뚱한 질문과 반응을 한다(13:36-37; 14:5, 8). 이 질문들의 잘못된 점들을 교정하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떠나감에 즈음하여 몇 가지 명령과 대책을 제시한다. 먼저, 예수는 반복적으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주문하고 자신을 사랑하면 자신의 계명을 지킬 것을 요청한다(13:34-35; 14:16, 21). 둘째, 예수는 자신과 하나님이 하나된 것을 믿으라고 한다(14:1, 9-11). 예수는 자신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천명한다(14:6). 셋째, 예수는 자신이 갔다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14:18-20)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겠다는 것을 약속한다(14:27).

 

위 대책 중에서 예수가 떠나는 것에 대한 제자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예수가 이들에게 부활 후 다시 나타날 것을 약속한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 예수는 자기가 죽으면 부활해서 다시 나타날 것인데 세상은 부활한 예수를 볼 수 없지만 제자 무리는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19a절).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 14장 19절의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evgw. zw/ kai. u`mei/j zh,sete)가 문제된다. 우선, 이것이 예수가 부활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내가 살았고”라는 현재형 보다 “내가 살겠고”라는 미래형이 더 어울려 보인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미래형 대신 현재형으로 이것을 표현한 것인가? 둘째, 만약 예수의 말로 “내가 살았고”라고 표현한 것이 정당하다면, 그 뒤의 제자들에 대한 것도 “너희가 살았고”라고 표현해도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지금까지 강조되어 온 것은 생명이 현재에도 벌써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렇게 현재형(zw/)과 미래형(zh,sete)을 병렬시켰을까? 우선, 이렇게 현재형과 미래형이 병렬되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앞 구절에서도 나타난 것으로서 요한 문헌에서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다(me,nei와 e;stai). 요한복음 저자에게 있어 영생은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때로 한 문장에서 같이 표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가 생명을 얻는 것은 현재적으로 표현하고 제자들이 생명을 얻는 것을 미래형으로 표현한 것은 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예수는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에 현재로부터 시작하여 미래에까지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제자들은 생명의 원천인 예수에게 생명을 부여받아 영생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에 성령의 오심을 통해 그것을 완전히 부여하는 사건인 예수의 성령 수여 사건(20:22)이 미래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살아날 것(영생을 얻을 것)을 미래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본 절의 문맥이 보혜사 성령의 오심을 약속한 것임을 통해서 이러한 것을 더 명확히 확인 할 수 있다.

 

3.1.2. 해결책

 

자신이 제자들을 떠난다는 것에 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위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위로와 해결책을 주었지만 이들의 근심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은 바로 보혜사를 보내 주겠다는 예수의 약속이다(14:16-17). 이 구절은 예수가 떠난다고 말함으로써 일어난 불안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주어진 것이다(13:33). 우선 예수는 제자들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함을 강조한다(13:34-35). 그들이 더 이상 예수를 따를 수 없다고 한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은 당황한다. 베드로조차도 그를 따를 수 없다고 예언하자 그들의 불안은 증가한다. 예수와 제자들이 영원히 거할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약속한 것도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14:1-3). 제자들과 부활 후의 요한 공동체에게 급박하게 요구된 것은 죽은 후 하늘의 어떤 장소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재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와 같은 한 인격체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여기서 예수가 보내줄 것을 약속한 것은 “제 2의 보혜사”(a;llon para,klhton)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보혜사는 누구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여기서 본래의 보혜사는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요한복음에서 이 시점까지 예수가 제자들의 보혜사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요한일서 2:1에서 예수를 보혜사로 호칭한 것도 이곳에서 예수가 본래의 보혜사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지해 주는 것이다. 나아가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보혜사의 기능들-제자들과 함께함, 가르침, 증거 등-이 주로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기능이었음을 볼 때 여기서 본래의 보혜사는 예수라는 것이 더 명확해 진다.

 

본래 보혜사인 예수의 역할이 제자들과 함께 걸어 다니는 것(6:66), 즉 제자들과 삶을 같이하면서 제자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듯이 이제 새로운 보혜사의 역할도 예수가 떠나간 상황에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는”(meqV u`mw/n eivj to.n aivw/na h=|)것이다(16절). 보혜사가 제자들과 함께함은 다음 구절에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parV u`mi/n me,nei kai. evn u`mi/n e;stai). 고별 강화에 나오는 여러 가지 보혜사의 기능은 이러한 제자들과 함께함이라는 기본적인 기능에서 근원한 것이다. 함께함에 의해 보혜사는 제자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14:17), 예수의 본질을 계시하고, 제자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14:25-26), 예수를 증거하고(15:26), 세상을 책망하고(16:8-11) 이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다(16:13).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과 “잠시 동안”(13:13) 머무르는 반면, 보혜사는 이들과 “영원히” 머무를 것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여기서 “영원히”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영원히”라기보다는(cf. 4:38; 8:35; 12:34; 13:8) 보혜사가 제자들과 머무르는 시간이 예수의 지상 사역의 기간보다 더 오래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시간은 다름 아닌 교회 시대인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떠날 것을 예고하면서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보혜사는 제자들을 떠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들과 함께 있을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보내 주기로 약속한 보혜사란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 존재인가? 우선, 신약성서에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para,klhtoj)라는 단어는 요한문헌에서만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 어원적, 종교사적으로 그 정확한 뜻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우리말로 “보혜사”로 번역된 파라클레토스(para,klhtoj)는 신약 성서이외의 문헌에서는 주로 법정에서 피고를 도와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16:7-11에서는 이것이 법정에서의 역할과 연관되어 쓰인 것이 분명하지만-비록 피고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피고를 고소하는 역할이기는 하지만-다른 구절에서는 이것이 분명치 않다. 어형론으로 볼 때 이 단어가 수동형 부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어떤 일을 돕기 위해 옆에 불리워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 단어의 뜻이 수동적인 역할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역할로서 조언자, 위로하는 자, 중보자, 대변자의 뜻으로도 쓰인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쓰인 보혜사는 위의 어느 뜻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세상을 고소하는 검사의 역할로 쓰였지만(16:7-11) 제자들의 변호사라는 의미로는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보혜사가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 인격체인가 하는 것은 그 어원이나 명확하지 않은 종교사적 기원에서보다는 요한 문헌에 나타나는 각 구절에서 그 쓰임새를 통해서 밝혀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보혜사 본문에서 보혜사는 “진리의 영”(14:17; 15:26; 16:13)이며 “성령”(14:26)으로 소개된다. 보혜사가 “진리의 영”으로 소개된 것은 예수가 진리(14:6)라는 요한복음 예수의 자기 천명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의 다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명칭을 기독론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14:17에서 보혜사가 처음으로 “진리의 영”으로 소개된 것은 세상은 근본적으로 거짓이기 때문에 진리의 영인 보혜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상황에서 말해진 것이다. 이 언어는 거짓의 영의 지배를 받는 세상과 대조하기 위해서 쓰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세상은 보혜사를 영접할 수 없다. 여기서 쓰인 “영접하다”(labei/n)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믿다”(pisteu,w)와 상응하는 용어이다(cf. 1:12). 세상은 보혜사를 받아들이지도 어떤 인격적 관계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여기에서는 세상이 보혜사를 볼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이 보혜사를 볼 수 없는 것은 보혜사가 영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은 보혜사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cf. 9: 39-41; 12:45).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여기에서 쓰인 “본다”(qewrei/)가 “안다”(ginw,skei)라는 말과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임을 볼 때, 세상과는 달리 제자 무리는 보혜사를 알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17절).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제자들이 세상과는 달리 보혜사를 알고 있는 것은 보혜사가 제자들 가운데 머무르고 함께 있다는데 있다고 한 것이다. 즉 제자들은 제자 무리 속에 거하는 보혜사를 체험함을 통해서 보혜사를 알게 된 반면, 세상은 보혜사를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보혜사를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도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들이 공통적으로 체험한 성령이 바로 구원의 보증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1:22; 5:5).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이 구절은 요한복음을 현재 읽고 있는 요한 공동체가 현재 체험하고 있는 성령 체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임을 볼 수 있다. 보혜사가 제자 무리 속에 현존하겠다는 약속에 해당하는 동사인 me,nw와 e;imi가 사본에 따라 현재형과 미래형이 각각 다 나타나는 것도 이것이 요한 공동체의 현재적 성령체험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는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3.2. 고별설교 2(15:1-16:4a)

 

예수는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14:31)라는 말을 한 이후에 새로운 주제로 설교를 시작한다(15:1). 물론, 서로 사랑이라는 주제라든가 예수와 신자 간의 상호 내주 등의 공통된 주제로 앞뒤가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예수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3.2.1. 참 포도나무 예수(15:1-17)

 

요한복음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나는...이다”(6:35, 51; 8:12; 10:7-14; 11:25; 14:6)라는 신적 자기 계시 문구를 통해 이제 예수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소개한다. 타락한 포도나무와 대조적으로(cf. 렘 2:21) 예수는 참 포도나무인 것이다. 유대교에서 포도원은 흔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상징했는데(cf. 호 10:1; 사 5:1-2; 막 12:1-11), 여기에서는 예수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여 예수가 이스라엘을 대치하게 된다. 이렇게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던 것을 예수로 대치시키는 것은 전형적으로 요한적인 것이다(cf. 요 2:13-22; 10:1-18).

 

예수는 포도나무 메타포를 계속 발전시켜 자신의 본질과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한다. 자신은 포도나무이고 제자들은 가지라는 것이다. 먼저, 가지가 생존을 유지하는 방법은 포도나무에 거해야 하는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 안에 계속 거해야 한다. 제자들은 사실상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5절). 만약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 죽은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6절). 또 한 가지 여기서 사용한 주요 메타포는 가지치기이다. 포도나무에 열매를 더 풍성히 열게 하기 위해서는 가지치기가 필수적이듯이, 제자들도 과실을 맺지 않으면 가지치기가 된다는 것이다(2절). 여기서 요체는 열매 맺기이다. 이 열매 맺기는 흔히 전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지곤 하는데, 문맥에서 이것은 제자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설명된다(8-9절).

 

포도나무 비유의 전반부(1-8절)가 비유 자체라면, 후반부(9-17절)는 그에 대한 윤리적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거하라”는 동사로 깊이 연관되어 있지만 후반부에서는 제자들 간의 “서로 사랑하라”는 내용이 더 부각된다. 이 부분은 사랑에 대한 명령으로 시작하여(9절) 서로 사랑에 대한 명령으로 끝난다(17절). 포도나무 비유에 대한 이러한 적용은 이 비유에는 포도나무만 있고, 가지 상호 간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 없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분명히 요한복음의 포도나무 비유가 그리스도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수평적 관계를 무시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런데 제자들 상호 간에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한 후(9-12절) 예수는 다시 한번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새로운 개념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곧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친구관계라는 것이다(13-15절). 예수는 이제 제자들을 종이라 여기지 않고 친구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로서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달해준다고 한다(15절). 또한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로서 사랑하는 증거로서 자신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것을 예시한다(13절).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에서처럼 절대적이고 종속적인 관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친구관계로서 상호적인 관계이기도 하다는 것을 예수는 천명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친구 관계로 묘사하다가 다시 포도나무 메타포로 돌아가 결국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 속에서 풍성한 열매 맺기를 요청한다. 그렇게 될 때 제자들은 기도 응답의 특권을 갖게 된다는 것도 언급한다(16절; cf. 7절). 여기서도 예수는 결국 열매 맺는 것은 제자 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결론 맺는다(17절).

 

3.2.2. 세상과 교회의 대립(15:18-16:4a)

 

제자들 간에 서로 사랑할 것을 계속해서 권고하던 예수는 이제 미움에 대해서 말한다. 물론 그것은 제자들 상호 간의 미움이 아니라 세상의 제자들에 대한 미움이다.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하게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15:19). 요한복음의 이원론적 사고에 따르면 사람은 예수에 속하거나 아니면 세상에 속하거나 둘 중에 하나밖에 될 수 없는데 제자들은 예수께 속한 것이다. 본래 세상은 예수를 미워하는데 결국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대한 미움으로 연결된 것이다(15:18).

 

그렇다면 여기서 명시적으로 지칭되지 않은 세상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세상이 믿는 것과 그 행동으로 볼 때 여기서 세상은 다름 아닌 믿지 않는 유대인 무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예수를 거부하여 하나님과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15:21; 16:3). 이들이 어떻게 예수를 거부한 것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내러티브에 [특히 5-12장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예수와 하나님을 미워한 자들로 자신들의 죄를 피할 수 없는 자들이다(15:22, 24). 이렇게 이들이 죄인이라는 것은 성령과 제자들이 동시에 증거하는 것이다(15:26-27).

 

그런데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에 대해서 예수가 이렇게 미리 언급하는 것은 예수가 떠나간 상황에서 제자들이 회당에서 축출당하는 것을 포함하여(16:2)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텐데 그 때 제자들이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올바로 대처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16:4). 결국 이러한 모든 행동 배후에는 세상이 하나님과 예수를 모른다는 한 가지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세상과 교회의 대립을 묘사한 것으로 이것은 예수 시대에 그것을 대표하는 불신앙의 유대인 무리와 제자들 간의 대립이고, 이어지는 교회 시대에 있어서는 세상과 교회의 대립이다. 이것은 초기 교회 시대의 박해 현장에서 계속 이어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신앙과 불신앙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이고, 여기에는 반드시 대립이 생긴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우리에게 이러한 대립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고,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에 대처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결국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를 핍박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3.3. 고별설교 3(16:4b-33)

 

3.3.1. 보혜사 성령(4b-12절)

 

자신이 떠나가는 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예수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을 하지만 여전히 제자들을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넘어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6절). 이에 예수는 첫 번째 고별설교에서처럼 보혜사를 소개함으로써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여기서 제자들의 근심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예수의 해결책이 보혜사에 대한 약속으로 앞의 내용과 같기 때문에 흔히들 이 부분을 제 3판 고별설교로 불러왔다. 하지만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은 동일한 내용을 계속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전형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제 3판의 고별설교로 반드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보혜사에 대한 예수의 약속은 하나는 세상에 관계된 것이고(7-11절), 다른 하나는 신자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12-15절).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보혜사의 기능이다. 앞서 예수는 분명히 세상과 보혜사는 상극으로서 세상을 보혜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14:17). 그렇다면 세상에 대한 보혜사의 기능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보혜사의 역할이 직접 세상에게 향해 있다기보다는 다름 아닌 신자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보혜사는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세상이 갖고 있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관념이 틀렸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보혜사의 세상에 대한 기능을 말하면서 갑자기 제자들, 즉 신자 공동체에게로 그 인칭을 바꾸어 말하는 것을 통해 증명된다(16:10). 즉 예수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는 신자 공동체에서 역사하는 보혜사의 역할을 보다 상세히 소개한다(12-15절). 이 부분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섯 묶음의 보혜사 본문 가운데 최종적인 것이고 보혜사 본문 중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보혜사를 “진리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다(13절). 예수가 진리(14:6)이기 때문에 여기서 진리는 기독론적으로 사용되어 이것은 “예수의 영”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특별히 여기서 보혜사를 “진리의 영”으로 소개한 것은 보혜사의 역할로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본문 비평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지린”라는 단어 앞에 있는 전치사가 evn(in)이냐 혹은 eivj(into)냐 하는 것이다. 사실 외증으로 볼 때 어느 것으로 결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증거가 비슷하다. 하지만 어느 것으로 결정하든지 간에 그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다. 혹자는 이것을 eivj로 결정하면 본문의 의미가 계시되지 않은 앞으로 계시될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것은 본문을 지나치게 현미경적으로 보아 확대해석한 것이다. 어떤 것을 취하든지 간에 이것은 성령이 신자들을 예수가 계시한 진리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왜 “모든 진리 가운데로”라는 표현을 썼을까? 아마도 이것은 이전의 보혜사 본문에서 예수가 계속해서 강조해온 대로 예수 시대보다 보혜사의 시대가 제자들이 예수가 설파한 진리를 깨닫는데 있어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예수 시대에는 예수의 가르침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보혜사 시대에는 제자들 각자가 보혜사의 도움으로 예수 가르침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cf. 2:22; 7:39).

 

예수는 보혜사의 역할로서 신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설명한다. 먼저, 보혜사는 자신의 독립된 권위로 어떤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듣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13b절). 이것은 요한복음의 두 번째 보혜사 본문이 말하는 보혜사의 역할에 대한 내용과 상응하는 것이다(14:26). 즉 보혜사의 역할은 신자들을 가르치는 것인데 그 내용은 다름 아닌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했던 내용이며, 보혜사가 하는 역할은 예수의 말씀이 어떤 뜻인지를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2:22 참조).

 

다음으로, 여기서 소개된 중요한 보혜사의 역할은 “장래 일”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13c절). 다른 역할과는 달리 이것에 대해서 많은 주석가들이 당혹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보혜사의 역할은 철저히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미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고 그것을 올바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보혜사의 역할로서 생소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역할을 예수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고난과 부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보혜사의 역할은 예수가 떠난 뒤 교회 시대의 역할이기 때문에 여기서 “장래 일”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가 말한 것 이외의 새로운 계시를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언급한 예언 사역을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러한 질문들은 이와 같은 질문의 전제는 보혜사의 역할이 단순히 예수의 말씀에 대한 재생이라고 보는데서 출발한 것이다. 이전 보혜사 본문들에게 보혜사의 역할은 예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올바로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다만 여기서 보혜사의 역할은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장래 일”을 알려주는 보혜사의 역할은 보혜사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예수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이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부합되는 것이지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소개된 보혜사의 또 하나의 역할은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14절).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영광은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포함하는 구속사적 일을 말한다(12:23, 27-28; 13:31-32; 17:1, 5).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보혜사의 역할은 예수가 이루어 놓은 구원의 과업을 사람들 속에서 실제화시키는 것이다. 또 예수의 역할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보혜사의 역할은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은 상호 구별되면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아버지의 것을 갖고 있고, 보혜사는 이것을 제자들에게 알린다. 결국 보혜사의 역할은 아버지의 것을 알리는 것이 된다(14-15절).

 

3.3.2. 예수의 고난과 귀환 예고(16-33절)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귀환을 언급함으로 제자들을 위로한다. 물론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절)는 예수의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17-18절).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에 오는 부활을 각각 언급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 앞에 제자들이 곡하고 애통하겠지만 그 후에 오는 예수의 부활에 그 고통이 오히려 기쁨이 되리라는 것이다. 예수는 여인의 산고를 예로 들면서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을 설명한다(20-22절).

 

예수는 이제 예수의 부활에 때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 때에는 제자들이 예수의 뜻을 깨달아 더 이상 예수의 말을 오해는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23a절). 또 그 때에는 제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특권을 갖게 될 것이고, 제자들의 간구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다(23b-24절). 그리고 그 때에는 예수가 현재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한 것을 알아듣는 말로 하게 될 것이다(25절). 이러한 말을 한 후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부활 이전인데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29-30절). 어쨌든 예수는 이러한 제자들의 믿음의 응답에도 불구하고 곧 제자들이 자신을 버려두고 도망갈 것을 예고한다(32절). 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을 경고하게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후에 이것을 깨닫고, 세상의 시험을 이기어 예수 안에서 새롭게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33절).

 

4. 해석과 적용

 

4.1. 요한복음 최후 만찬 장면(세족)의 교훈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 장면에는 공관복음의 성만찬 예식 장면 대신 세족식 장면이 나온다. 세족식은 예수의 죽음에 앞서 제자들의 죄를 씻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동시에 사랑의 본을 보이는 의미가 있다. 바울서신에서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도 신자들의 윤리는 신학적, 혹은 기독론적 토대위에 서 있다. 즉 예수의 본을 따라서 신자는 서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만찬이 성례전으로서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세족식은 그 성례적적 의미뿐만 아니라 윤리적 함의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가 성만찬 예식에 대한 전승을 알고 있었다고 볼 때 그가 이것을 성만찬 장면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신학적 의미가 실천적 윤리로 화하지 않는 것을 경계한 것 같다. 예수의 대속적 죽음은 제자들의 “서로 사랑”이라는 윤리로 육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4.2. 예수 고별설교의 교훈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 장면을 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떠나야 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제자들은 그의 부재로 인한 상황에 대해서 심한 두려움에 싸이게 된다. 이 때 예수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준 핵심 사항은 그가 제자들과 계속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두 가지로 주어진다. 하나는 그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이다. 다른 하나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어 그가 자신이 제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제자 공동체에 현존하여 그들을 지도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약속은 예수 부활 이후에 신자가 된 우리 모두에게도 그대로 유효하다.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의 약속을 기다렸다면 우리는 그의 재림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며, 제자들이 예수의 약속을 따라 보혜사를 경험했듯이(20:19-23) 우리도 여전히 보혜사를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고별설교를 통해서 볼 때 바른 교회의 표지는 바로 예수의 재림에 대한 약속과 보혜사에 대한 약속을 얼마나 고대하고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가 이다. 요한복음 고별설교에 이러한 약속이 기록된 것을 보면 요한 공동체는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이 예수의 약속을 실제로 깊이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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