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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새 이스라엘 2 - 새 성전

by 은총가득 2020. 6. 23.

 

2. 새 성전 예수(12-22절)

 

요한은 예수가 가나에서 행한 첫 번째 표적과 이어서 일어난 성전 정화 기사를 예수와 제자들과 그 가족이 가나를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서 잠시 머무르는 것으로 연결시킨다(2:12). 예수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유월절을 맞아 유대인의 관습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13절) 거기서 예수는 성전 정화사건을 일으킨다. 예수가 성전을 정화한 사건(2:13-22)은 크게 두 부분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첫 부분(13-17절)은 배경 설정(13절)과 예수의 성전 정화(14-16절)와 그것에 대한 해석(17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분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성전 정화 기사(막 11:15-17; 마 21:12-13; 눅 19:45-46)와 병행을 이룬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첫째, 공관복음 성전 청결 기사는 예수 사역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한데 반해 요한복음에서 이 사건은 예수 초기 사역에 위치한다. 둘째, 요한복음에는 황소와 양과 회초리 등 공관복음에 없는 내용을 싣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을 하기 위해 공관복음에서는 이사야 56:7과 예레미아 7:11을 인용하고 있는데 반해 요한복음 기사는 스가랴 14:21과 시편 69:10을 인용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18-22절)은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성전에 대한 대화(18-20절)와 그 대화에 대한 설명과 해석(21-22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공관복음 병행 기사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우선, 공관복음 성전 정화 기사의 병행 기사인 첫 번째 부분(13-17절)의 내용을 보면, 예수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cf. 6:4; 11:55). 여기서 유월절이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표현된 것에는 이것을 기록할 당시에 이 명절은 교회가 더 이상 지키지 않는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어쨌든 예수는 유대인 남성으로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당시의 풍습대로 예루살렘에 간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수는 성전에서 사람들이 돈을 바꾸고 양과 소와 비둘기를 파는 것을 보고 분노가 일어난다. 유월절에는 유대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성전에 와서 제물과 성전 세를 드렸기 때문에 제물을 사고파는 것과 환전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다만 이것이 성전 안(여기서는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예수는 스가랴 14:21과 연관하여 성전(예수의 입으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예수의 행동에 대해서 요한은 예수의 행동이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요한은 이것을 예수의 말로 설명하지 않고 제자들이 예수의 행동을 보고 이 말씀이 생각났다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생각이 예수의 행동 당시인지 부활 후인지는 본문에서 명확하지 않지만 그 이후에 나오는 예수의 행동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과 연관시켜 볼 때 이러한 기억은 부활 후 신앙에 의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건에 대한 해석 다음에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에 없는 부분이 나오는데(18-22절) 이것은 그 내용과 신학에 있어서 전형적으로 요한적인 것이다. 예수의 성전 정화 행동에 대해 유대인들은 예수의 행동이 정당한 것을 어떤 표적을 통해서 보여줄 것인가를 묻는다(18절). 이 말에 대해 예수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이것을 일으킬 것이다(evgerw/).”(19절)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 성전”을 건물로 이해한 유대인들은 “이 성전이 46년 동안 지어지고 있는데 네가 사흘 만에 그것을 일으키겠다고(oivkodomh,qh)?”(20절)라고 말한다. 이 말에 대해서 요한복음 저자의 설명이 뒤따르는데 여기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의 몸인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 때는 유대인들도 제자들도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는데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hvge,rqh) 후에야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가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22절). 여기에는 “건축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언어유희가 있다. 성전 건물을 건설하는 것을 공관복음에서는 실제건축을 나타내는 용어닌 “오이코도메오”(oivkodome,w)라는 동사를 사용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에게이로”(evgei,rw)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이 단어가 건물 건축과 아울러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어쨌든 성전파멸에 대한 말씀을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켜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것으로 말한 예수의 말씀을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했다. 예수의 행동과 말씀에 대해서 피상적 이해를 하여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은 전형적으로 요한적인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오해에 대해 무엇이 바른 이해인지를 덧붙인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것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성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올 것이다. 이전에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예배를 위해서 중요했다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에는 예수가 새 성전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를 통해서 예배하게 된다(요 4:20-24; 14:6).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것을 깨닫는 것은 자연인으로 갖고 있는 인간의 이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부활 한 후, 보혜사가 와서 제자들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 줄 때 가능한 것이다(cf. 요 14:16-17; 25-26; 15:26-27; 16:7-15).

 

예수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로서의 성전을 대체하다는 의미에서 요한은 성전을 “그의 몸”이라고 말한다(21절). 여기서 “그의 몸”이라는 어구는 바울 서신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몸”(고전 12장)과 같이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어왔다. 예수가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마가복음 14:58에 나오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의미하며 그것은 예수 부활 후에 곧 건설된 것인데, 결국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신자들의 집(벧전 2:5)이요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 엡 1:23)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단순히 그의 몸이라는 같은 단어에서 착안하여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으로 요한의 의도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만약 요한복음 본문에서 성전이 교회라면, 그것은 교회가 되기 위해 먼저 파괴되는 과정을 거쳐 부활해야 하는데, 이러한 내용을 교회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론적 어구는 바울적 어구이지(롬 12:5; 고전 12:27; 골 1:18) 요한적 어구는 아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성전 정화기사는 기독론에 주 의미가 있다. 요한은 본 기사에서 첫 부분 끝과 두 번째 부분 끝에 기독론적 의미를 지닌 코멘트를 포함한다(17절; 21-22절). 각 각의 코멘트는 각 부분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지침을 주고 있는 것인데, 각 지침이 모두 기독론적 의미에 관한 것이다. 먼저, 17절은 예수의 성전 정화 행동이 단순히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고자 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한은 예수의 성전 청결 행위를 시편 69:9과 연관시켜 해석하는데 부정과거형 단어를 미래형으로 고쳐(katafa,getai) 이 구절이 예수의 죽음과 연관되도록 한다. 예수의 성전 청결 행위는 단순한 의분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구원사적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 이 구절에 예견되어 있다.

 

다음으로, 21-22절은 성전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말하는 성전을 건물로 해석하여 예수의 말씀을 오해했다. 여기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오이코도메오’(oivkodome,w)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에게이로’(evgei,rw)라는 예수 부활과 성전 건설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이것을 예수 부활과 연관시킨다. 한마디로 말해,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서 요한은 이 사건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시하는 것이며, 결국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전은 예수로 대체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 결론>

1. 프롤로그를 포함하여 요한복음 1장의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는 증인으로서의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1장 후반부이다(19-51절).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의 최 정점에 있을 때 자기가 메시아 혹은 종말론적 중요성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 예수 사역의 증인이라고 선언한다. 대중들의 인기가 있었고 예루살렘 당국자들로부터도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었지만,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호불호(好不好)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끝까지 알고 지킨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사역의 최고점에 서서 이제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께 대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9)고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세례 요한에 대한 묘사는 물론 요한의 인물 설정에 대한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세례 요한을 포함하여 예수 이외의 어떤 인물도 독립적으로 신학적 중요성이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요한의 시각이다. 어떤 인간도 예수와의 관계 밖에서는 자신의 본질을 깨달을 수 없으며, 그를 통해서만 삶이 의미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2. 1장 첫 부분인 프롤로그(1-18절)에서는 요한복음 전체의 기록 목적과 부합되는 정신을 말한다. 그 다음으로 여러 가지 기독론적 용어로 예수를 소개하는 부분이 이어진다(19-51절).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 성령으로 세례 주은 이(1:33), 랍비(1:38), 메시아(1:41), 하나님의 아들(1:49), 이스라엘의 왕(1:49), 인자(1:51)로 소개된다. 특히 마지막에 소개된 인자는 이전에 언급된 모든 기독론적 호칭의 정점을 이루는 것인데,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주는 분으로써 성육하신 예수를 가리킨다. 마지막 부분의 인자로서 소개된 예수는 요한복음 2장에서 하늘로부터 와서 이 땅을 새롭게 하는 예수의 사역을 준비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3.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는 이전에 유대교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던 중요한 정결례와 성전을 대체하는 분으로 소개된다. 예수는 새 포도주이며, 또한 새 성전이다. 이러한 기독론적 천명은 앞으로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격렬한 기독론적 논쟁을 예고한다. 예수는 자신을 단순히 이스라엘 종교를 갱신시키려고 온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가진 하나님으로써 이 세상에 왔으며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영생을 얻고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예수는 이들을 향해 마귀의 자식이라고까지 한다(요 8:38). 요한복음은 영생과 심판을 예수의 입을 통해 단순한 메시지로 선포하고 결단을 요구한다. 이 복음서를 읽는 자들에게도 같은 결단이 요구된다. 요한복음 2장은 바로 그러한 결단을 촉구를 위한 부분으로써 큰 의미가 있다.

 

 

성전에서 상인을 내쫓는 예수 그리스도 - 엘 그레코 -106 x 129 cm / 캔버스, 유화 / 1600년(런던 국립미술관)

 

성전정화, 예수와 환전상 Jesus & the money-changers

 

  칼 브로흐(Carl Heinrich Bloch, 1834-1890) 성화

성전을 정화하는 그리스도(Christ Cleansing the Temple, 1875년

 

제임스 에드윈 맥코넬(James edwin McConnell, 1903-1995) 성화

Christ and the Money Lenders(그리스도와 사채업자)

 

베르나르도 카발리노(Bernardo Cavallino, 1616-1656) 성화

성전에서 상인을 쫓아내는 그리스도(Christ driving the Traders from the Temple)

 

이폴리토 스카르셀리노(Ippolito Scarsellino 또는 Scarsella, 1550/1551-1620) 성화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냄(Driving of the merchants from the temple)

 

테오도르 롬보위츠(Theodoor Rombouts, 1597-1637) 성화

성전에서 환전상을 쫓아내는 그리스도(Christ Driving the Money-changers from the Temple)

 

작자미상의 성화

그리스도의 성전정화(Cleansing of the Temple)

 

얀 산데르스 반 헤메센(Jan Sanders van Hemessen, 1500년경-1566년경)

성전정화하는 그리스도(Christ driving the money changers from the temple)

 

니콜라스 콜롱벨(Nicolas Colombel, 1644-1717) 성화

성전에서 환전상을 추방하는 그리스도(Christ Expelling the Money-Changers from the Temple)

 

베르나르도 메이(Bernardino Mei, 1612/1615-1676) 성화

성전정화하는 그리스도(Christ Cleansing the Temple)

 

조반니 베네데토 카스틸리오네(Giovanni Benedetto Castiglione, 1609-1664) 성화

성전정화하는 그리스도(Christ Chasing the Moneylenders from the Temple), 1645-1655년 사이

 

성전정화, 예수와 환전상 Jesus & the money-changers Part1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 성화

성전에서 환전상을 쫓아냄(Expulsion of the Money-changers from the Temple), 1304-1306년

 

발랭탱 드 블로냐(Valentin de Boulogne, 1591-1632) 성화

사원 밖으로 환전상을 쫓아내는 그리스도(Christ Driving the Money Changers out of the Temple), 1620-1625년경

 

발랭탱 드 블로냐(Valentin de Boulogne, 1591-1632) 성화

사원 밖으로 환전상을 쫓아내는 그리스도(Christ Driving the Money Changers out of the Temple), 1618년경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5-1669) 성화, 에칭

사원 밖으로 환전상을 쫓아내는 그리스도(Christ Driving the Money Changers out of the Temple), 1635년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5-1669) 성화
사원에서 환전상을 쫓아내는 그리스도(Christ Driving The Money Changers From The Temple), 1626년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 1613-1699) 성화

사원에서 환전상을 쫓아냄(Expulsion of the Moneychangers from the Temple), 1675년경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성화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는 그리스도(Christ Driving the Traders from the Temple), 1600년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 1613-1699) 성화
성전정화하는 그리스도(Christ Cleansing the Temple)

 

야코프 요르단스(Jacob Jordaens, 1593-1678) 성화

사원에서 상인들을 쫓아내는 그리스도(Christ Driving the Merchants from the Temple), 1650년경

 

자메 티쇼트(James Tissot, 1836-1902) 성화

사원에서 쫓겨난 상인들(The Merchants chased from the Temple)

 

성전정화,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다(The Cleansing of the Temple)

 

요한복음 2장 13-17절

 

유대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버리며 그 상을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꾸짖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