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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루브르 박물관 꼭 봐야할 작품] 가나의 혼인잔치

by 은총가득 2020. 6. 23.

루브르 TMI/루브르 작품

 

 

요한복음 2장

 

[1절]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절]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절] 그가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절]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절]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절]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2절]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요한복음 2장 1절~12절 말씀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관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등지고 있는 작품이 있다. 한걸음뒤에 항상 내가있었는데 그대 노랫말이 떠오를정도로 사람들은 모나리자 사진만 찍고 이 관을 나선다. 한 번만 고개를 돌리면 그 크기와 위용에 압도당할땐데 홀연히 사라지고 마는 관람객들이 무심할 뿐이다.

 

흡사 풍속화 느낌이 나는 이 호화로운 잔치의 풍경은 무려 베네치아 산 조르조 마조레 수도원에 걸려있던 종교화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첫번째 기적을 그리고 있다. 특이한건 그림의 배경이 작가가 살았던 배네치아라는 것이다.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함께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라 불리우는 파울로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1588)는 1562년 6월 6일, 수도원 식당을 장식할 그림을 주문받는다. 이 수도원은 당대 최고였던, 그리고 현재까지 서양건축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손꼽히는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년-1580년)가 설계한 건물로 베로네제는 단순히 벽면 장식을 넘어 그의 건축의 일부가 되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성모 마리아와 초대된 결혼식은 갈리리의 가나라는 시골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배경은 고대 그리스/로마 양식의 화려한 건축물이다. 이는 건축가가 추구하던 양식임과 동시에 수도원이 설계된 양식으로, 베로네제는 식당 벽면 너머에 마치 이 잔치가 실제로 열리고 있는 듯한 환상을 그려넣었다. 지금 여기, 베네치아에서 말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이에도 불구하고 베로네제는 화려한 색과 역동적인 인물 표현으로 종교화에 성스러움을 베제하곤 했다. 그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 발랄한 분위기로 종교재판에까지 회부되어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을 정도다. 예술적 감성이 종교적 신념을 이긴것일 수도 있고, 베네치아가 당시 권위적이고 다소 무거웠던 종교적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일수도 있다.

 

작품은 높이 6.77m, 너비 9.94m로 꽤 오랬동안 서양회화에서 가장 큰 작품이었다. 무려 130명의 인물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조금 나눠서 감상해볼 수 있다.

 

 

작품을 가로로 나누고 윗부분을 보면, 그리스식 기둥의 나열로 공간감을 넣어 수도원의 건물을 벽 너머로 확장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원근법으로 이 앞에 서면 정말 저 안에 공간이 있는듯한 느낌이다. 상단의 사람들은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 구경꾼이나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는 하인들이다. 정 가운데 하인들이 어린 양을 도축하고 있는데, 하단의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식탁엔 이미 디저트가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음식을 하는 장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곧 희생당하시고 피를 흘리실것이란 걸 상징하는 장면이다.

 

 

하단은 본격적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일듯 말듯한 후광을 두르고 있는 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그 왼편에 성모 마리아, 그리고 그 주위로 그의 제자들이 앉아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와 신랑임에도 정 가운데 성모자를 배치하고,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여느 초대객들과는 달리 단순하게 표현함으로 경건한 분위기를 부여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의 약간은 고뇌에 찬 표정과 그녀의 손에 든 빈 유리잔이 잔치를 위한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암시한다.

잔치의 흥을 붇돋기 위해 정 가운데 악사들이 연주하고 있는데, 왼쪽부터 비올라를 연주하고 있는 흰옷은 베로네제, 터번쓰고 피리를 불고 있는 인물은 바사노,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푸른옷은 틴토레토,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붉은 옷의 인물은 티치아노로 당대 베로네제와 어울렸던 화가들을 그렸다고 추측된다. 그들 앞에 악보와 함께 모래시계가 놓여져 있는데 어떤 이는 세속의 즐거움은 유한하다는 것을, 어떤 학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기적을 행하기엔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앞, 그림의 맨 앞엔 개 두 마리가 있다. 예로부터 강아지는 충성을 상징하는 도상이었다. 충성과 충성이 끈으로 연결되어있으니 이것은 이 작품의 배경이 결혼식임을 알려주고 있는 알레고리이다.

 

 

작품의 왼쪽에 오늘의 주인공 신락와 신부가 그려져 있다. 신부의 만족스러운 표정과 대비되는 신랑의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표정은 결혼식이라는 제도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것 같은 느낌이다. 이탈리아인이 아닌 인물들이 보이는데 터번을 쓴 인물들은 오스만제국, 지금의 터키에서 초대되어 온 사람들로 보이고, 신랑에게 와인을 권하는 하인은 흑인이다. 여러 인종과 문화가 혼합되었던 베네치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부 옆에 수염이 난 인물이 노골적으로 신부의 목걸이를 쳐다보고 있는데,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도취되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예술가들과 작품을 프랑스로 가져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비꼰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오른편엔 이 잔치의 소믈리에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으로 여섯 물동이에 물을 채우고 따랐더니 와인이 나왔는데, 그 맛이 이전에 준비했던 와인맛보다 훌륭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일이! 영롱한 와인빛을 바라보는 소믈리에의 표정에서 놀라움과 맛에 대한 감탄을 느낄 수 있다.

 

신과 함께하는,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하신 식사 자리라니! 당시 많은 왕들과 귀족들이 이 작품을 탐냈다. 모두가 생각만 하던것을 실행에 옮긴 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나폴레옹. 이탈리아를 정복하러 온 나폴레옹은 작품을 떼어 프랑스로 가져갈것을 명했다. 너무나도 컷던 탓에 작품을 반으로 갈라 카펫처럼 굴러서 가져간 후 프랑스에서 봉합했다. 나폴레옹 실각 후 당연히 이탈리아에서 돌려달라고 했으나, 그림의 크기와 상태때문에 돌려줄 수 없다하고 대신 프랑스 화가 샤를 르 브랭의 [시몬의 집에서의 만찬]을 줬다.... 이후 1989년 시스티나 성당 복원에 버금갈정도의 재원을 들여 복원하여 현재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관에서 모나리자를 찍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보고 있다.

<루브르 TMI >

 

 

가나의 혼인잔치

 

가나의 혼인잔치

 

예수가 처음으로 이적을 베푼 것은 가나(Cana)의 혼인잔치에서였다. 이처럼 중요한 혼인잔치인데 성경은 신랑과 신부가 누구인지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 성경을 썼던 사람들이 신랑의 이름만 간단히 적어 놓았어도 아무런 혼란이 없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문제는 예수가 마치 신랑처럼 행동했다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예수는 하인들을 시켜서 손님들에게 대접할 포도주를 만들게 했다. 물론 어머니 마리아의 지시에 따라 그런 이적을 베풀었지만 마치 신랑처럼 행동했다는 것은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당시 예수는 삼십세 쯤 되었으니 결혼할 나이는 충분히 지났다. 또한 그렇다면 어머니 마리아의 위치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마리아는 마치 혼주(婚主)인 것처럼 행동하였다는 것도 일리 있는 이야기이다.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하인들을 시켜 신랑인 예수의 지시를 따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만일 마리아가 단순히 혼인 집의 친척 중의 하나이거나 하객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그런 지시를 내릴 처지가 아닌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이지만 이런저런 궁리 끝에 가나의 혼인잔치는 바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혼인잔치라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가나의 혼인잔치. 파올로 베로네세(1528-1588) 작품. 한 가운데에 예수께서 마치 신랑처럼 앉아 있다.

 

거듭 말하는 것이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장소에까지 따라갔다. 평소에 예수를 그렇게도 따르던 베드로 등 제자들은 요한만 빼고 모두 어디로 잠적한 마당에 막달라 마리아는 용기 있게 십자가의 아래에 까지 가서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있는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안식일 지난 다음날 새벽에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을 찾아감으로서 부활한 예수를 가장 처음 먼저 만났다. 부인만이 그렇게 애통할수 있으며 장사를 지낼 때에 향류를 바를수 있고 남편을 잃은 여인만이 새벽에 무덤을 다시 찾아갈수 있었다는 것이다.

 

갈릴리 지방의 카프르 카나에 있는 '가나의 혼인잔치 기념 교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무덤에 장사 지낸 후 무덤을 지켰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다. 예수는 부활한 후에 어찌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것일까? 예수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가장 우선 만났다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의 죽음을 깊이 애통하였다. 예수에 대한 사랑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으며 계속 애통하였다.<정중극>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내 보이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1835년 러시아 알렉산더 안드레예비치 이바노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