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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시대의 유물

파라오 고향 돌아가기 -

by 은총가득 2020. 6. 2.

 

그 미이라가 된 이집트인이 정말로 탄소측정법이 알려준 시대에 파라오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 이름을 찾는 문제만 남게 된다. 몇몇 자취는 투탄카문의 사후에 왕좌에 다가간 파라오 호렘헵을 가리키고 있었다.

호렘헵은 오랜 시간 동안 장군으로서의 커리어를 쌓았고, 자신의 부하 중 한 사람을 후계자로 길렀다. 파-라메수(Pa-Ramessu), 평범한 집안 출신의 남자였다. 그는 아마도 이집트 북부, 나일 델타의 아와리스 출신으로 생각된다. 그의 경력은 눈부셨다.

군대 선봉장, 요새의 수비대장, 그리고 전차부대 대장의 지위를 두루 거쳤다. 파라오의 명을 받아 파-라메수는 외국에서 외교적 임무도 수행했다. 정부의 고위 장관(vizier)의 자격으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에 걸쳐 왕을 대행하기도 했다. 호렘헵은 이 유능한 부하에게 호화로운 관을 만들게 했다. 절대적인 신임이었다. 군인에서 단번에 vizier가 된다는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파격이었다.






룩소르의 북동부에 거대한 아문 신전이 서있다. 지배자들은 몇 대에 걸쳐 그 터를 만들게 했고, 각 왕들은 그 곳에 자신의 기념비를 세워 후세까지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했다. 호렘헵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전의 남쪽에 큰 규모의, 아홉번째의 탑문(塔門) 세우게 했다. 그 공사의 책임자는 그의 신뢰하는 신하, 파-라메수였다. 파-라메수는 모든 행정을 지휘했으며 신관을 임명하는 권한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거의 모든 것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캐나다의 그 주검이 호렘헵의 뒤를 이어 람세스 1세가 된, 그리하여 이집트의 영광스런 19왕조를 열었던 그 파-라메수일까? 아무튼 고고학자들은 그 때까지 그의 미이라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캐나다의 그 주검은 람세스 1세의 아들인 세티 1세나 손자인 람세스 2세, 증손자인 메렌프타의 미이라와 놀라울 정도로 많은 유사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힌트가 있었다. 나이아가라 폭포 박물관의 그 남자는 젊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 주검은 다 자란 어른의 것이었다. 파-라메수가 파라오가 되었을 때 그는 50대 중반이었다.

기원전 1292년, 람세스 1세가 나일 왕국의 왕이 되었다. 이 람세스 왕가의 시조에게는 자신의 업적을 남길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파라오로서 나라를 다스린 시간은 16개월이었다.

선왕(先王)인 호렘헵의 뜻과도 같이 그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오랜 전통을 이어나갈 것임을 명백히 했다. 에크나톤에서 투탄카문으로 이어지는, (유일신 아톤을 섬기던) 혼란의 시대가 지나간지 30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절, 그는 이렇게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녕을 선물했다.

죽은 람세스 1세는 여느 왕과도 같이 평범하게(?) 왕가의 계곡에 장사지내졌다. 그의 무덤터는 오늘날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의 기념비적인 석관 주위의 벽은 '사자의 서'에서 모티브를 따온 형형색색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죽은 파라오는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와 자칼의 모습을 한 아누비스에게 이끌리어 저승으로 간다.

19세기 중반, 고고학자들이 왕의 무덤을 열었을 때 관은 비어있었다. 캐시(Cache)라 불리우는 왕의 은닉처에서도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람세스 1세라고 씌여진 목관만이 어두운 동굴에 덩그라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고고학자들은 한 때 왕이었던 사람의 육신을 찾아 전세계를 뒤졌다. 캐나다로의, 나이아가라 폭포 박물관에로의 자취는 이렇게 얼마 전에야 발견되었다. 전문가들은 파라오였을지도 모르는 그를 두 번에 걸쳐 조사했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박물관이 적자를 기록하고 주인이 폐쇄를 생각하면서 그 곳에서의 그 사건은 그 뒤 완전히 잊혀져 갈 위험에 빠졌다. 터론토의 빌 제이미슨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인류학 예술품의 수집가이자 중간상인이기도 한 그는 몇 년 전부터 그 박물관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기회가 찾아왔다.

1998년 가을 제이미슨은 박물관을 인수했다. 전시물 중 많은 부분, 그 중에서도 특히 이집트 관련 전시물들을 그는 가능한 한 빨리 팔아치우고 싶어했다. 그의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그도 가슴 위로 팔을 어긋나게 구부리고 있는 남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고고학계에 2백만 달러를 요구했고 애틀란타에서 구입자를 발견했다. 이모리 대학(Emory-University)의 카를로스 박물관, 이집트 예술품 담당 큐레이터인 피터 라코바라였다. 그 미국인은 전문가들을 보내 사전조사를 하게한 후 구입 의사를 밝혔다. 전문가들로 팀이 구성되어 관 및 미이라들을 새로운 집으로 운반할 준비를 시작했다.

*****

죽은 남자는 다시 한 번 여행을 하게 되었다. 물론 '사자의 서'에 기록된 방식은 아니었다. 애틀란타의 박물관에서 최후의 의문이 풀릴 터였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 남자는 과연 람세스 1세일 것인가? DNA 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미이라의 치아에서 샘플을 채취해 분석을 시도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이집트의 미이라에게는 흔한 경우였다. 더욱이 비교를 하자면 중요한 것이 있었다. 람세스 1세와 가까운 친척의 DNA 샘플이 없었다.


이집트학 학자가 애틀란타에서 카이로로 날아갔다. 그 곳에서 의문의 수입품(?)을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결론을 내리려 했다.

 

제임스 해리슨 박사는 왕실의 환자(?)들을 잘 알았다. 카이로의 그 구강정형의는 60년대에 뢴트겐 조사를 담당했었고 수 백 개의 사진들을 정리해서 보유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 발견된 왕들의 두개골에 대한 정보였다.

의문의 남자와 신왕조의 왕들과의 관계를 조사하기 위해서 해리스 박사는 두개골을 비교했다. 두개골의 모양 및 크기는 유전되기 때문이다. 나온 데이터들을 정리해서 그 '캐나다인' 데이터를 죽은 람세스 가(家) 사람들의 데이터와 비교하고 정렬했다. 결과는 그가 세티 1세, 람세스 2세 및 메렌프타와 매우 가까운 친족관계임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세티 1세는 아비도스의 신전을 지었다. 람세스 1세의 아들은 기원전 1291년 파라오가 되었고, 오랜 혼란의 시대 끝에 직계 권력 승계 체제를 다시 구축했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세티 1세는 장엄한 성소에 유명한 왕의 인장을 새기게 했다. 자신의 전에 통치했던 76명의 이름, 몇몇은 일부러 누락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바로 전의 왕은 람세스 왕가의 시조, 람세스 1세였다.

그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왕들의 작은 신전이 있다. 예술적인 음각들이 새겨진 벽에서 희귀한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세티와 그의 부모, 아버지 람세스와 어머니 사트라가 함께 있는 모습이다.


세티는 자신의 아버지를 찬양하는 비를 세웠다. "보라, 그는 백성들의 가슴에 우리 가족의 이름을 각인시키고 나를 창조하셨도다. 그는 내게 충고하시고 나를 보호하신다. 그의 가르침은 내 가슴에 성채와도 같도다." 테베 서쪽에 있는 자신의 무덤, 영원의 집에도 19왕조의 2대 왕은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는 방을 만들게 했다.

*****

그 미이라가 정말로 행방불명된 그 파라오인지 아무도 알 수는 없었다. 3000년 전 남자에 대한 조사는 계속되었다. 컴퓨터 단층 촬영(CT, computer tomography)으로 몸 내부가 투시되었다. 그리고... 센세이션이 다가왔다.

뇌는 코를 통해 제거되었을 것이었다. 신왕조 시대에 퍼졌던 방법이었다. 두개골은 많은 부분 수지로 채워져 있었는데, 당시 이 물질은 매우 귀하고 비쌌으므로 일반인들보다는 왕들의 장례에 이용되었을 터였다.

학자들은 흉부에서도 귀한 물질을 발견했다. 여러 둥근 형태의 이물질이 나온 것이다. 15년전 볼프강 팔이 장기 포장이라 생각했었던 것이었다. CT는 더 정확한 결과물을 내주었으나 결론은 같았다.

3차원 애니메이션은 학자들에게 마지막 의심까지도 해소시켜 주었다. 그들은 미이라가 람세스 1세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 결과를 공증받기 위해서는 이집트의 최고 권위자인 자히 하와스(Zahi Hawass)의 판정이 필요했다. 그의 판정이 그가 파라오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것이었다. 경험 많은 고고학자는 자신의 책임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조국에 있어서도 그것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거의 4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드디어 옛 이집트인의 비밀이 풀리는 셈이었다. 주검은 공식적으로 '파라오 람세스 1세'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최후의 의심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150년 동안 내팽겨쳐졌던, 나이아가라 폭포 박물관에서 무명인으로 설움을 당했던 그는 이제 중요 인물이 되었다.

2003년 10월, 람세스는 이집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사자의 서에 기록된 것처럼 하늘로 떠올랐다. "나는 무덤에서 일어나 날아가리라. 매처럼 날아오르리라. 신들이 나의 이름을 들으셨도다."


한 때 팔려갔던 불운한 왕의 귀환 모습은 인기 스타를 영접하는 것 만큼 성대했다. 이집트 박물관의 공식적인 영접은 국가적 행사로 치뤄졌다. 박물관은 미국 동료의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애틀란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람세스 1세는 대략 60세 쯤이었다. 최후에는 관절염과 (아마도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심한 귀 염증을 앓고 있었다. 1미터 65 센티미터 키의, 군인에서 장관으로, 그리고 파라오의 자리에 올랐던 남자는 역사상에는 그다지 중요한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람세스 가(家) 최초의 파라오로 아문신에 대한 신앙을 견고하게 했고, 나라를 안정시켰으며, 자신의 유산을 장자이자 유능하고 성실한 장관이었던 세티에게 물려주었다. 세티 1세는 이집트의 경계를 시리아까지 넓히고 누비아인과 히타이트인들을 굴복시켰다.

더 강대하고 더 중요한 이는 그러나 그의 아들일 것이다. 람세스 2세는 고대의 모든 기록을 깨뜨린 빛나는 존재였다. 누구도 그만큼 오랜 시간 통치하지 못했다. 66년 왕위에 있는 동안 그 왕은 온 나라를 거대한 건축물로 채웠다. 돌로 된 그의 석상은 그를 나라 밖에까지 유명하게 했다.

아부심벨 신전은 그의 신적인 권위를 나타내 준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네페르타리를 위해서도 화려한 기념비를 남기게 했다. 후세가 그에게 '위대한'이란 형용사를 붙여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람세스 2세는 왕국을 부흥시켰고 (항상 승리한 것은 아니지만) 전사로서도 이름을 남겼다. 카데쉬 전투에서 그는 히타이트인들과 싸웠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에 비해 람세스 1세는 수천년이 지난 후, 새로운 세계로의 뜻하지 않은 여행으로 인해 유명해진 셈이다. 장사 지내졌고, 팔려갔으며, 행방불명되었다가 다시 나일강으로 귀환하는, 이 파란만장한 파라오의 운명... 왕가의 계곡 맞은 편 룩소르의 박물관 내, 그가 예전에 묻혔던 곳이 보이는 그 장소. 그 곳에서 파라오는 드디어 영원한 안식을 찾는가...    ayasofy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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