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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시대의 유물

바빌로니아(Babylonia): 바벨론 제국

by 은총가득 2020. 6. 2.

 

바빌로니아(Babylonia):바벨론 제국

 

●바빌로니아(Babylonia):바벨론 제국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고대 왕국으로, 이전 시대의 수메르 지방과 아카드 지방을 아우르며,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메소포타미아 남동쪽의 지명이다.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은 수도였던 바벨론(Babylon)에서 유래하였다. 한글 구약성서에서는 ‘바빌론’, ‘바벨론’ 등으로 음역하고 있다. 바벨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23세기경 아카드의 사르곤(Sargon) 왕의 지배에 대한 점토판에서 찾을 수 있다. 바빌로니아는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이 차례로 통치하였다. 경작이 용이하고, 상업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형이어서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바벨론의 위치 :

고대 도시 바벨론의 폐허들은 유브라데 강을 끼고 현대 이라크 바그다드의 남쪽 80km 정도 떨어진 곳에 남아 있다. 바벨론은 9-15㎢에 걸쳐 있었는데, BC 5세기경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높이가 90m, 가로 길이가 26m 되는 벽들로 96km 정도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바빌로니아의 역사:

고대 바빌로니아카사이트(Kassite)왕조 그리고 신 바빌로니아 제국(Chaldean Era(갈대아 期)로 분류된다. 바빌로니아의 잘 훈련된 군대는 이신, 엘람, 우루크 등의 도시국가와 강력한 마리 왕국을 무너트렸다. 바빌론의 지배는 지중해까지 미쳤다.

 

1. 고대 바빌로니아

기원전 20세기경, 우르 제3 왕조에 의한 수메르의 부흥 이후에, 유프라테스 강 서쪽으로부터 온 셈어족의 아모리인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지배하게 된다. 이후 약 100년간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고, 이신(Isin)이 가장 강력한 도시였으나, 아모리인의 도시인 바빌론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여 결국 첫 번째 바빌로니아 제국을 이루게 된다. 이후 약 300년간을 고대 바빌로니아로 분류한다.

 

바벨론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일 것이다. 대를 쌓았던(창 11:1-9) 바벨론은 니므롯이 세웠던 여러 도시들 중에 하나였다(창 10:10). 바빌론에 사람들이 정착했던 시기는 B.C.3,000년 이전이었고, 바빌론은 아카드(Akard)의 사르곤 (Sargon)에 의해 B.C.2400년경에 파괴되었다. B.C.2000년대 말엽에 아모리(Amorite)왕조가 바빌론을 수도로 만들었고 이 왕조는 옛 바빌론으로 BC 1595년에 히타이트(Hittites)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 존속하였다.

 

엘람인을 추방하고 왕국이 정착한 뒤 함무라비(Hammurabi; BC 1792-1750)의 지시로 만들어진 이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으로 불린다. 함무라비 법전의 사본이 수사(Susa)에서 1901년에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시리아와 가나안 등지의 여러 서부 도시들과 정기적인 무역을 하였고, 바빌로니아에도 무역을 위한 아모리인의 이주지가 건설되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왕을 신 마르둑(Marduk)의 대행자로 믿었고, 바빌론은 "신성한 도시"로서, 모든 왕은 그곳에서 왕권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료 제도와, 세금 제도, 중앙 정부 체제가 갖추어졌다.

 

▶바빌론 제1왕조: 고 바빌로니아(B.C.18~16세기경)는 함무라비 왕의 통치와 보복주의가 담긴 법전이 유명. 인도,유럽의 히타이트인과 카시트인에게 멸망
1.니므롯(B.C.2300년경):
바벨론제국과 앗수르제국의 창시자. 그는 특이한 사냥꾼. 노아-함-구스-니므롯의(노아의 4대손)
7.함무라비(B.C.1792~1750):법전으로 유명
2.수무-아붐(B.C.1894~1881):이삭(B.C.1952~1772)-야곱(B.C.1892~1745)과 동시대 8.삼수일루나(B.C.1749~1712)
3.수무-라-엘(B.C.1885~1845) 9.아비-에슈(B.C.1711~1684)
4.사비움(B.C.1844~1831) 10.암미-디타나(B.C.1683~1647):야곱 애굽 종살이 기간
5.아필-신(B.C.1830~1813) 11.암미-사두카(B.C.1646~1626): “
6.신-무발리트(B.C.1812~1793):야곱-요셉(B.C.1801~1691)과 동시대 12.삼수-디타나(B.C.1625~1595): “

 

2. 카사이트 왕조

다음 4세기 동안(BC 1570-1150)은 카사이트(Kassite) 왕조가 도시를 통제하였는데, 이때는 애굽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14번째 왕은 샘수-다이타나(Samsu-Ditana)였다. 기원전 1595년에, 히타이트왕 무르실리 1세(Mursili I)에 의해 약탈당한 이후에, 그의 치세는 카사이트 왕조로 넘어가게 된다. 카사이트 왕조는 바빌론의 이름을 "카르-두니아쉬"(Kar-Duniash)로 바꾸고, 576년간 지배했다. 외세의 지배는 비슷한 시기 힉소스인이 이집트를 지배한 것과 아주 유사하며, 이러한 지배 하에서 바빌로니아는 서부 아시아 지역에 대한 패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때 아슈르의 고위 성직자들은 스스로를 아시리아의 왕으로 옹립한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신성한 왕권을 부여받은 셈족 왕들은 바빌로니아에서 사라지고, 카사이트 군주들에게는 신의 지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바벨론은 여전히 제국의 수도이자 서아시아의 신성한 도시로서 기능을 잃지 않았고, 성직자들은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였다.

 

▶카사이트 왕조: 이들 지배자들은 바빌론을 다스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대수체계가 후에 바빌론의 카사이트 왕들에 의해 계속되었기에 목록화되었다.
1.간다쉬(B.C.1730) 6.카쉬틸리아쉬2세
2.아굼1세 7.우르지구루마쉬
3.카쉬틸리아쉬1세 8.하르바시후
4.우쉬쉬 9.팁탁지
5.아비라타쉬  

 

▶바벨론 제2왕조: 씨랜드 왕조는 바빌론을 실제로 지배하지 않았지만 그 남쪽 수메르지역을 지배했다.
그럼에도 바빌론 제2왕조에 의해 전통적으로 목록화되었다.
1.일루마-일룸(B.C.1732):요셉((B.C.)1801~1691)과 동시대 7.페쉬갈다라마쉬
2.이티-이리-니비 8.아다라칼람마
3.다미크-일리슈 9.에쿠르두안나
4.이쉬키빌 10.멜람쿠르쿡카
5.슈슈쉬 11.에아-가밀(B.C.1460)
6.굴키샤르  
▶바빌론 제3왕조: 연대기는 일반적으로 각 왕조를 위해 약10년에서 20년 이른 연대를 준다. 그러나 이것은 이집트 신왕국의 보통 사용되는 연대기와 일치하지 않는다.
1.아굼2세(B.C.1570) 14.나지마루타스(B.C.1306~1280):에훗B.C.1316()과 동시대
2.부르나-부리아스1세 15.카다스만-투르구(B.C.1280~1262)
3.카스틸리아스3세 16.카다스만-엔릴2세(B.C.1262~1254)
4.울람-부리아스 17.쿠두르-엔릴(B.C.1254~1245)
5.아굼3세 18.사가락티-수리아스(B.C.1245~1232):삼갈(B.C.1236)과 동시대
6.카다스만-하르베1세 19.스틸리아4세(B.C.1232~1224)
7.카라인다스 20.엔릴-나딘-수미(B.C.1224~1221)
8.쿠리갈주1세(B.C.1377):여호수아(B.C.1500~1390)와 동시대 21.아마드-수마-우수르(B.C.1224~1221)
9.카다스만-엔릴1세(B.C.1377~1361) 22.아다드-수마-우수르(B.C.1215~1185)
10.부르나-부리아스2세(B.C.1361~1333) 23.멜리시팍(B.C.1185~1170)
11.카라하르다스(B.C.1333~1331) 24.마르둑-아팔-이디나1세(B.C.1170~1157):기드온B.C.1169()과 동시대
12.나지부가스(B.C.1331) 25.자바바-수마-이디나(B.C.1157~1156)
13.쿠리갈주2세(B.C.1331~1306):옷니엘(B.C.1384~1344)과 동시대 26.엔릴-나딘-아헤(B.C.1156~1153)
▶바벨론 제4왕조:
1.마르둑-카비트-아헤수(B.C.1155~1146) 7.마르둑-사픽-제리(B.C.1085~1069):입산(B.C.1079)-엘론-압돈 동시대,삼손(B.C.1075)과 동시대
2.이티-마르둑-발라투(B.C.1146~1132) 8.아다드-아플라-이디나(B.C.1069~1046):사울왕(B.C.1050~1010)과 동시대
3.닌우르타-나딘-수미(B.C.1132~1126) 9.마르둑-아헤-에리나(B.C.1046)
4.나부-쿠두리-우수르(느부갓네살1세,B.C.1126~1103):돌라(B.C.1120)-야일(B.C.1120)과 동시대,룻과나오미(B.C.1117)동시대 10.마르둑-제르-*(B.C.1046~1033)
5.엔릴-나딘-아플리(B.C.1100~1082) 11.나부-숨-리부르(B.C.1033~1025)
6.엔릴-나딘-아헤(B.C.1100~1082):입다(B.C.1085)와 동시대  
바벨론 제5왕조:
1.심바-시팍(B.C.1025~1008):다윗왕(B.C.1025~1008)과 동시대  
2.에아-무스킨-수미(B.C.1008)
3.카수-나딘(B.C.1008~1004)
?▶바벨론 제6왕조:
1.에울마-사킨-수미(B.C.1004~987)  
2.닌우르타-쿠두리-우수르(B.C.987~985)
3.시리크티-수카무누(B.C.985)
바벨론 제7왕조:
1.마르-비티-아플라-우수르(B.C.985~979)  
2.나부-무스킨-아플리(B.C.979~943):솔로몬(B.C.970~930)과 동시대
바벨론 제8왕조:
1.닌우르타-쿠두리-우수르(B.C.943) 8.바나-아하-이디나(B.C.813~811)
2.마르-비티-아헤-이디나(B.C.943~920):르호보암(B.C.930~915)과 동시대 9.5왕(B.C.811~800)
3.사마스-무담미크(B.C.920~900) 10.닌우르타-아플라-*(B.C.800~790)
4.나부-수마-우킨(B.C.900~888) 11.마르둑-벨-제리(B.C.790~780)
5.나부-아플라-이디나(B.C.888~855) 12.마르둑-아플라-우수르(B.C.780769):제1회 올림픽 개최(B.C.776)
6.마르둑-자키르-수미1세(B.C.855~819) 13.에리바-말둑(B.C.769~761)
7.마르둑-발라수-이크비(B.C.819~813) 14.나부-수마-이스쿤(B.C.761~748)
바빌론 제9왕조: 이“때부터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프톨레미 경전과 다른 문헌에서 잘 알려져 있다.
1.나보나사르(나부-나시르, B.C.748~734)  
2.나부-나딘-제리(B.C.734~732)
3.나부-수마-우킨2세(B.C.732)
?▶바벨론 제10왕조: 아사리아와 갈대아인
1.나부-무스킨-제리(B.C.732~729) 10.아수르-나딘-수미(B.C.700~694)
2.디글랏빌레셀(B.C.729~727) 11.네르갈-우세집(B.C.694~693)
3.살만에셀5세(B.C.727~722) 12.무세집-마르둑
4.마르둑-아팔-이디나2세(성경의 므로닥-발라단, B.C.722) 13.신-아헤-에리바(산헤립.B.C.681~669), 아시리아 왕
5.사르곤2세(아시리아, B.C.722~705):북이스라엘은 호세아(B.C.731~722)때 멸망. 14.아수르-아하-이디나(에살하돈,B.C.681~669):아시리아 왕, B.C.689년 아시리아의 바빌론 약탈, B.C.670년대 앗시리아의 엘살하돈에 의해 재건됨
6.신-아헤-에리바(산헤립,아시리아,B.C.705~703) 15.사마스-숨-우킨(엘살하돈의 왕자, B.C.668~648)
7.마르둑-자키르-수미2세 16.칸달라누(B.C.648~627)
8.마르둑-아팔-이디나2세(B.C.703,복위) 17.신-슈무-리쉬르(B.C.626)
9.벨-이브니(B.C.703~700) 18.신샤리쉬쿤(B.C.627~620)
바벨론 제11왕조: 신바빌로니아 또는 갈대아인, 바빌론은 B.C.539년 고레스 왕이 이끈 메대와 파사의 연합국에 의해 멸망했다.
1.나부-아플라-우수루(나보폴라살,B.C.626~605):신바벨론제국의 초대 왕. 5.라바시-마르둑(B.C.556)
2.나부-쿠두리-우수루(느부갓네살2세,B.C.605~562):남유다의시드기야(B.C.597~586)때 멸망 6.나부-나이드(나보니두스,B.C.556~539)
3.아멜-마르둑(B.C.562~560) 7.캄비세스2세(B.C.538~522)
4.네르갈-사르-우수르(네리글리살,B.C.560~556)  

 

 

3. 신 바빌로니아 제국(갈대아 제국, B.C.625~539): 바벨론 남부 거주의 갈대아인이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세운 왕국, 나보폴라살(B.C.625~605)이 바벨론을 수도로 정하고 그 후 메대와 연합하여 앗수르를 멸망시키고(B.C.612) 신바빌로니아(갈대아 제국)을 건국. 왕자인 느부갓네살2세(B.C.605~562)가 이집트 군을 갈그미스에서 격파하고 즉위 후 시리아,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획득하고(B.C.597) 이집트측에 가담한 유다왕국에서 포로를 끌고 옴.

 

 

아시리아가 지배권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도, 바빌로니아는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고,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대하여 나갔다. 아시리아는 때로는 더 많은 특권을 부여하고, 때로는 군사적으로 제압하면서 지배력을 유지하였으나, 결국은 B.C.627년, 아시리아의 마지막 통치자인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이 죽고 다음 해에 바벨론의 갈대아인 나보폴라살(Nabopolassar,B.C.626~605, 신바벨론 제국의 초대 왕) 메대 등과 동맹을 맺고 앗수르 제국을 침공해 B.C.612년에 니느웨를 함락시켰다.앗수르를 돕기 위해 온 애굽왕 느고는 유다왕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죽였다.한편 나보폴라살은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 2세가 갈그미스 전투에 참여하고 있을 때 사망했다(역대하35:20∼27;스바냐2:13∼15)이 반란을 일으킨다. 기원전 612년에 메디아(Medes)인과 함께, 니네베(니느웨)를 파괴하고 제국의 패권은 바빌로니아로 돌아온다.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의 뒤를 이은 느부갓네살2세(B.C.605~562)는 기원전 585년에 페니키아를 정복하는 등, 다시 한 번 바벨론을 문명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의 연대기는 기원전 567년 이집트 공략 등 일부만이 발견되었다.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Nabu-na'id)와, 고레스(Cyrus)에 의한 바빌로니아 정복에 대해서는 많은 사료가 존재한다. 이것은 주로 나보니두스의 연대기를 기록한 석판과, 하란의 달의 신전 복원에 관련된 석판, 키루스의 선전포고 등이다.

기원전 549년, 나보니두스 6년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안샨의 왕이라고 불리웠던 엘람의 고레스는 그의 영주이자 만다의 왕이었던 메데스의 아스티아게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아스티아게스의 군대는 왕을 배신하였고, 고레스가 엑바타나(Ecbatana)에서 왕을 자처하면서 메데스의 왕국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3년 뒤 고레스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원정한다. 이 때, 나보니두스는 그의 왕국의 국경 남쪽 근처의 사막에 진을 치고, 그의 아들 벨사살에게 군권을 맡겼다.

 

나보폴라살( B.C.626~605)-느부갓네살2세(B.C.605~562)-에윌므로닥( B.C.562~560)-네르글리살( B.C.560~556)-
나보니두스( B.C.556~539)-벨사살( B.C.553~539). 바벨론의 멸망(B.C.539년)

 

B.C.539년 고레스 2세는 바빌로니아를 공격한다. 전쟁은 오피스(Optis)에서 6월에 시작되었고, 바빌로니아는 곧 패하고, 뒤어서 시파라(Sippara)가 항복한다.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으로 도망쳤으나, 고브리야스(Gobryas)에 계속해서 쫓기어 시파라(Sippara)가 항복한 지 이틀 뒤에, "고레스의 병사들이 싸우지 않고 바빌론으로 입성"하게 된다. 나보니두스는 은신처에서 나와 왕위를 유지하였다.

 

고레스는 10월(Marchesvan) 3일까지 도착하지 않았고, 고브리야스(Gobryas)가 그를 대신하다가, 바빌론의 총독이 되었다. 며칠 뒤 나보니두스의 아들이 죽었을 때 6일 동안의 장례식이 치러졌고 키루스(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Cambyses II)가 무덤까지 그를 따랐다.

 

고레스가 죽기 1년 전인 기원전 529년, 그는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Cambyses)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후 다리우스 1세(Darius Hystaspis)가 페르시아 왕권을 장악하고, 페르시아를 조로아스터의 대리인으로 다스리게 될 때까지, 바빌론은 서아시아의 지배자로서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다리우스는 정복자로서 바빌론에 입성하였다.

 

다리우스가 죽은 뒤, 바빌로니아는 니딘타-벨 왕 (네부카드네자르 3세) 때에 잠시 동안 독립을 회복했다가(기원전 521년 10월 ~ 520년 8월) 페르시아에 공격으로 다시 점령된다.

 

몇 년 뒤(B.C.514년추정) 바빌론의 아라카(Arakha)가 다시 봉기하지만, 이때 방벽 일부가 파괴된다. 거대 사원인 에-사길라는 계속해서 보수되면서 바빌로니아의 상징으로 유지되지만, 마침내 바빌로니아의 새 수도 셀레우키아가 건설되면서 많은 인구들이 이동하게 되고, 바빌론 성은 석재로 이용되기 위해 손상되고 말았다.

 

 

▶바벨론 제국 영토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게 멸망하고, 이어서 남유다도 바빌론 제국에게 멸망하여 이스라엘의 분열왕국시대도 끝이 났다. 바벨론에 유다왕국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 살던 70년을 ‘바벨론 포로시대’라고 분류한다. 유다왕국의 사람들은 바벨론에 세 번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는데, B.C. 605년에 1차 포로, B.C. 597년에 2차 포로, B.C. 586년에 3차 포로가 끌려갔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던 가나안지역은 바빌론제국의 총독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다. 그 기간에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부름받은 선지자 다니엘과 에스겔이 있었다.

 

 

 

 

주전 612년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의 공격 앞에서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의외로 힘없이 무너졌다. 이로써 앗수르 제국 시대는 끝이 나고 말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한 것이 바빌론 제국이었다. 이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축도 북부의 니느웨에서 남부의 바빌론으로 옮겨졌다. 사실 바빌론이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보다 약 1100년전에 바벨론에 유명한 왕이 등장했는데, ‘함무라비 법전’으로 인류 역사에서 유명한 ‘함무라비’ 왕이었다(B.C.1792~1750). 함무라비 왕을 전후한 시대의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를 장악했던 권력의 핵심부였다. 그러나 그 세력은 오래 가지 못했고 B.C. 1600년보다 약간 후에 헷왕국(힛타이트)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그 자리를 앗수르 제국이 차지해 오랜 기간 메소포타미아의 맹주가 되었다. 함무라비 왕 시대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후 바빌론의 영광의 날은 다시 찾아왔다. 역사가들은 과거 함무라비 왕 시대와 1000년 뒤에 일어난 제국시대를 구별하기 위해서, 후자를 ‘신바빌론 제국’(Neo-Babylonian Empire)시대라고 부른다.

 

이 신바빌론 제국의 역사는 그리 길지 못해 100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단명했다(B.C. 626∼539년). 그러나 이 제국은 고대 어느 제국보다도 더 큰 권세와 영화를 자랑했다. 나보폴라살(Nabopolassar)왕에 이어서 등장한 느부갓네살2세(네부카드네자르 2세, B.C.605∼562년)는 제국 역사의 중심인물로서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제국 역사의 절반이나 되는 40년이 넘는 기간에 메소포타미아의 절대적 제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그 바벨론 제국은 B.C. 539년 벨사살 왕 때에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게 망하였다.

 

▶앗수르 제국, 바벨론 제국 등 영어로 제국을 엠파이어(empire)라 하는데 그 기원은 라틴어의 임페리움(imperium) ‘권력’이나 ‘권한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말에서 최고사령관을 의미하는 ’임페라토르(imperator)‘가 나왔다.

그 말이 황제 ’엠퍼러(emperor)‘가 되었고, 그 황제가 지배하는 영역을 empire(제국)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영어의 황제가 엠퍼러(emperor), 독일에서는 황제를 ‘카이저’, 러시아에서는 ‘차르’로 불렀다. 카이저나 차르라는 말도 로마시대의 말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시대에 율리어스 카이사르(시이저) 이후 카이사르는 황제를 뜻하는 호칭이 되었다.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이 존엄자라는 존칭인 ‘아우구스투스’라는 말을 쓰면서 그 후 황제를 칭할 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한글 성경에 ‘가이사 아구스도’로 표현됨)로 부르기도 하였다.

 

느부갓네살 1세(BC 1124-1103)는 바벨론을 수도로 삼았으며, 그가 세웠던 왕조는 약 100년 동안 존속하였다. 바벨론은 BC 1000년경 앗수르 제국에 병합되었고, 앗수르인들과 북동의 아라비아에서 온 바이키와 같은 공격적인 침략자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기도 했다. 그 후 이곳은 BC 698년에 앗수르 통치자 산헤립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후계자인 앗수르바니팔에 의해 재건되었다. 신바빌론 제국은 BC 625년에 갈대아인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왕권을 차지하였을 때 시작되었다. 20년 안에 그는 메대의 크야크아레스(Cyaxares)와 연맹하여 앗수르 군대들을 멸절시켰다. 또한 나보폴라살의 아들 느부갓네살 2세(BC 605-562) 때 바벨론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느부갓네살 2세는 정복자였을 뿐 아니라 건축가와 행정 전문가였다. 그는 여러 개의 왕궁, 지붕에 말둑(Marduk) 신을 위한 신전을 지은 거대한 지구라트, 공중 정원들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바빌론의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BC 555-539)는 아라비아 도시 테이마(Teima)에서 은퇴하였고, 그의 아들 벨사살이 섭정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바벨론은 BC 539년 고레스에 의해 정복되었고 그 후 페르시아 제국이 세워졌다. 고레스와 그 후계자들의 통치 아래 바벨론 도시는 엄청나게 부요한 상업과 지식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바벨론에는 부유한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구약을 연구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것이 바벨론 사람의 탈무드에 반영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성경 속의 바벨론:

①히스기야 왕과 바벨론 특사: 앗수르의 주력부대가 하루아침에 다 죽자, 살아남은 소수는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고대근동 전체에 퍼졌다. 성경은 앗수르의 군인들 18만5천명을 하나님의 사자가 치셨다고 기록했다. 폴 존슨은 헤로도토스를 인용하여 페스트(쥐가 옮긴 전염병)로 군인들이 다 죽었다고 기록했다. 앗수르의 군인들이 다 죽고, 남유다가 위기에서 벗어날 즈음, 히스기야는 안타깝게도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살 가망이 없으므로 유언하라고 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사38:1). 그러나 벽을 향해 통곡하며 기도했다.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사38:3).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히스기야가 통곡 기도한 이유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보다, 후사가 없었던 점을 더욱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유대고대사’). 이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사38:4~5).

 

바벨론 왕(므로닥발라단)의 특사는 친필서한과 선물을 가지고 직접 방문한다. “그 때에 발라단(Baladan, 바벨론 왕 부로닥발라단(Berodachbaladan)의 아버지(왕하 20:12; 사 39:1)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Merodach-Baladan)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사39:1).

 

B.C.2000년 직후부터 역사에 등장한 바벨론은 ‘뜨는 나라’였고, 1왕조의 6대왕 함무라비(B.C.1792~1750)왕의 ‘함무라비 법전‘은 친숙하다. 이후 힛타이트족에게 침략당해 약4세기동안 힛타이트의 다스림을 받고, 이후 애굽과 교류하며 앗수르와 패권을 다투는 규모의 나라로 성장했다. 앗수르가 대제국을 형성하는 시기에, 바벨론은 내분으로 앗수르왕 살만에셀3세의 침략을 불러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고, 이후 바벨론은 독립을 유지했지만 사실 앗수르의 ’보호‘를 받는 처지에 있었지만 호시탐탐 앗수르를 물리치고 근동의 패권야심을 키우며, 강대국으로의 면모를 갖춰나가고 있었다. 이즈음 히스기야는 바벨론 특사의 방문에 크게 감동해 자진해서 보물창고와 무기고, 국내의 비밀들을 다 보여주었다.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사39:2). 남유다의 초라한 실상을 보게 되었다. 바벨론 특사는 정치일정을 잘 마치고 남유다를 정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벨론은 메대와 스키타이를 끌어들여 앗수르를 물리치고 상아시아의 주인이 되었고, 이제 남유다와 애굽을 치기 위해 내려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②이사야 선지자와 바벨론: 바벨론 특사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39:3~8). 이사야는 아하스 왕(유다 제12대(BC 735-715)과 히스기야 왕(13대)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세계경영을 말하며 이제 남유다가 바벨론 제국에게 망하게 될 것을 예언했다.

 

③바벨론제국 정책과 1,2차 포로(B.C.605년, B.C.598년): 히스기야(BC 715-686)는 15년의 연장받은 생명을 다 살다 죽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12세에 왕이 되어 55년간 통치하면서,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23:26~27).

 

 

므낫세의 악행으로 바벨론에 끌려가게 했다가 회개하자 다시 돌아오게 했다.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33:11~13). 므낫세에 이어 아몬이 왕이 되고, 그뒤를 이어 요시야가 남유다왕이 된다. 그는 므깃도에서 애굽의 바로느고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남유다는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다.

 

 

므깃도 전투에서 승리한 애굽의 바로느고는 여호아하스 왕을 왕위에서 내려오게 하고, 요시야의 아들 18대 여호야김(요시야의 둘째아들,엘리아김을 애굽명으로 개명)을 왕으로 삼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끌고 가 죽였다. 애굽에서 세운 여호야김은 초기에는 애굽을 섬기며 조공을 바치다가 바벨론이 압박하자 할 수없이 바벨론을 섬기며 조공을 바쳤다. 3년만에 바벨론을 배신하고 다시 친애굽으로 돌아서자 바벨론 느부갓네살은 아람,모압,암몬 동맹군을 끌고 남유다를 치러왔다.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 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왕하24:1~4). 바벨론은 이때 남유다보다 먼저 애굽을 공격해서 애굽을 바벨론의 속국으로 만든다. 이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갈그미스 전투‘이다.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점령하였음이더라”(왕하24:7).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남왕국 유다는 앗수르 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다시 바벨론의 발흥으로 인해 느부갓네살 2세 때(BC 605년) 애굽을 점령한 바벨론이 남유다에 들러,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천재 청소년들(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인질로 끌어간 것이 ‘1차 바벨론포로’이다. 그후 18대 여호야김(요시야의 둘째아들)이 죽고 B.C.598년 여호야김의 아들 19대 여호야긴(18대 여호야김의 아들, 20대 시드기야의 조카 /왕하24:8=18세즉위로/대하36:9=8세즉위로)이 18세로 왕이 된지 3개월만에 에스겔을 포함한 1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가고, 여호야긴의 숙부 맛다디야(20대 시드기야, 여호야긴의 삼촌)를 21세 때 왕으로 세워 11년간 다스렸다.

 

예루살렘과 솔로몬의 성전이 BC 586년에 파괴됨. 시드기야 9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시드기야 11년까지 포위하므로 성중에 양식이 떨어지자 도망간 시드기야 아들들은 죽이고, 시드기야는 두 눈을 빼이고 놋사슬로 결박해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나라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이주하였다. 여러 개의 구약 선지서들이 이들 사건들과 밀접히 연관되고 있다. 유다왕 19대 여호야긴이 잡혀간 지 37년(바벨론왕 에윌므로닥 즉위한 해) 옥에서 나와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으며 자유의 몸이 되었다.

 

④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침(단1:3~4): 바벨론 제국의 인질교육은 이데올로기 정책 때문이었다. 바벨론식 민족교육을 시켜 그들을 정복지로 돌려보내, 바벨론 제국의 이등 민족화를 이끌 지도자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 정책은 나중에 변형된 형태를 띠긴 했으나, 로마제국, 대영제국도 채택한 모델이다. 1차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벨드사살),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아사랴(아벳느고)는 이름이 바뀌고 왕실의 음식과 옷을 제공받았다(단1:5~7). 다니엘이 레위기법대로 뜻을 정했다(단1:17).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한 다니엘(단2:1, 2:11~13)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는 성경을 배웠다(창40:8;단2:31~35.24:7). 하루 세 번 기도한(단6:10) 다니엘은 ‘예레미야’ 성경을 통해서 바벨론 제국이 70년이면 끝날 것을 알았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Xerxes,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BC 486-464)(에 1:1).

 

일반 역사에는 그리스어 음역을 따라 ‘크세르크세스1세’로 알려졌다.)의 아들 다리오(아하수에로(Xerxes,크세르크세스의 히브리 명칭)의 아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단9:1~2).

 

 

선지자, 최고행정가로 다니엘은 한사람이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3대제국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은 공식문건을 통해 하나님이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냈음을 기록해 놓았다.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더라”(단6:26~27).

 

⑤에스겔: 바벨론으로의 2차 포로는 B.C.598년 즉, 예루살렘이 완전 함락되기 12년 전에 일어났다. 여호야긴 왕을 바벨론으로 끌어가면서 당시 25세의 제사장 에스겔을 포함해 1만여명을 끌고 갔다. 에스겔은 그의 예언서 시작을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5년째부터 시작하고 있다(겔1:1~3). 에스겔은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떠나는 환상을 보았고(겔 10:18),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바벨론에게 복종하라고 권고하였다(겔 11:14-20). 1만여명의 포로 된 남유다 사람들에게 바벨론에서의 몇십년 생활해야 함을 알리고, 예루살렘이 완전 멸망 후 3차로 끌려온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명을 가진 에스겔은 장래의 소망을 알렸다.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렘29:11~14).

 

⑥70년: 여호야김4년(첫번째 바벨론 포로,BC 605년)에서 BC 538년(고레스 칙령으로 첫 번째 귀환할 때까지).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렘25:11,대하36:6,왕하24:1).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12년째 예루살렘의 완전 함락소식이 전해진다(겔33:21~22). 이 소식 후부터는 남유다 사람들이 에스겔의 말에 귀 기울인다. 총독 스룹바벨도 나타나고, 학개, 스가랴도 등장하고 페르시아의 왕비가 된 에스더가 민족을 구하고 학자 에스라와 총독 느헤미야도 페르시아에서 출현하게 된다.

 

⑦선지자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 하나냐: 나라와 민족의 현재와 장래를 위해 많이 울었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이 예루살렘을 비우고 바벨론으로 70년간 다녀오라는 것임을 알고, 빨리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했으나, 남유다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친 바벨론주의자, 매국노로 미워해 폭행하고 감금했다(렘18:20,20:2,37:15~16).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이 예레미야를 더 힘들게 했다(렘14:14~18).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4년째 거짓선지자 하나냐는 성전에서 제사장, 백성을 모아놓고 거짓예언을 한다(렘28:1~4). 당시는 1차와 2차로 포로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상태인데, 거짓선지자 하나냐는 2년 안에 바벨론은 망하고 포로와 성전기구들은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예레미야는 거짓예언자 하나냐가 그해에 죽을 것이라고 했다(렘28:16~17). 하나님은 70년간의 포로기간을 말씀하셨다(렘29:4~10).

 

⑧레위기 토지정책과 포로 70년의 비밀: ‘70년’이란 하나님께 레위기를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반드시 안식일과 희년을 지켜 행하라고 하셨다(레23:3,25:2~5,26:14).

 

⑨왕과 선지자의 비밀회동: 듣기 싫은 예언을 계속한다고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금한 남유다의 고관들은 서기관의 집 토굴에도 갇혔다(렘37:15~16,37:17). 급기야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왕에게 탄원했다(렘37:20~21). 다시 구덩이에 던져졌다. 왕궁 환관의 충언으로 구덩이에 밧줄을 내렸다(렘38:7~13). 시드기야는 자신의 속내를 밝혀 남유다 백성들이 항복하려는 자신을 조롱할 것을 걱정했다(렘38:24). 예레미야는 유다의 최후 네 명의 왕들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 바벨론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외쳤다(렘 42:10-12). 구약 선지자들은 바벨론에게 항복할 것을 권고함과 동시에 그들의 멸망도 함께 예언했다(사 13;14; 47; 48장; 렘 25장). 앗수르와 같이 역사적인 바빌론은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었던 것이다. 바빌론과 관련해서 다니엘서는 다니엘이 바빌론의 통치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던 내용을 다루었으며, 예레미야애가는 포로 생활 중에 유대인들이 경험한 실상을 기록.

 

⑩시드기야 왕과 그의 아들들의 비참한 최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시드기야는 18개월간 성안에서 버티다가 함락되자 분노한 바벨론은 도망간 시드기야의 두 아들은 살해되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혔다가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당시 32세였던 시드기야는 11년간 통치했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2차 포로로 잡혀갔던 여호야긴은 나중 모습이 보기 좋았다(렘52:31~34).

 

⑪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에스겔이 그린 성전조감도: 3차 포로(B.C.586년)

18개월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며 큰 고생 끝에 성을 함락한 바벨론 군인들은 분노가 폭발해 남김없이 부수고 불질렀다(렘52:12~14). 그리고 비천한 자들 소수는 포도농사를 위해 남겨두고, 모조리 잡아간 것이 ‘바벨론 3차 포로’이다(애2:11). 에레미야의 눈물(애3:19~23)과 소망. 예루살렘이 불타고 예레미야가 아파할 때, 바벨론에서는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희망을 주신다(겔37:1~6). 그 후 에스겔에게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의 조감도(겔40~44장)를 주신다. 동향한 문, 안뜰의 남문, 성소 내부, 성전 곁의 건물들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제단과 제단 봉헌에 관한 규례. 성전출입에 관한 규례를 주시며, 새 희망을 보인다. 새 성전의 소망은 에스겔이 사로잡혀간 지 25년이 되었을 때이다(겔40:4). 성전조감도 설명(겔40:32~34). 포로기간이 징계가 아닌 평안이라고 말씀하신다.

 

⑫바벨론에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 친 바벨론주의자로 취급받은 예레미야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애5:21~22) 힘을 내서 바벨론에 끌려간 백성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70년이 차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그 편지가 다행히 다니엘의 손에 들어갔다(단9:1~2). 그래서 다니엘은 회복될 예루살렘을 기대하며 평생 창을 열고 하루 세 번씩 무릎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단6:10).

 

⑬요시야(B.C.640-609) 시대의 하박국은 바벨론인들의 침범을 예언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합1:5-11).

 

⑭바벨론성 스케치: 헤도도토스의 책 ‘역사’에는 바벨론성이 광대한 평야 가운데 있는 대도시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각 변의 길이가 120스타디온(14마일*1.5km=22.4km)이며, 성 전체의 둘레를 합치면 56마일*1.6km=90.15km이다. 바벨론 성 둘레에는 100개의 성문이 있는데 모두 청동으로 되어있으며, 문주와 상인방도 청동이었다. 아름답게 정비된 도시로서 물이 가득차서 깊은 해자가 도시 주위를 돌고 있으며 아스팔트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성벽위 가장자리에는 연하여 두채씩 마주보게 지었고, 그 건물 사이로 4두 전차를 타고 지날 수 있을 만큼의 빈공간이 있었다. 바벨론의 도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도시중앙으로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 도시를 갈라놓았다. 후에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점령한 후, 세금을 걷었을 때의 기록에는 바벨론의 국력은 아시아의 1/3에 해당했다고 하니 그만큼 막강한 나라였다.

 

⑮바벨론 제국의 멸망(B.C.539년): 앗수르, 남유다, 애굽을 비롯해 고대근동을 손아귀에 넣은 바벨론 제국도 70년이 다되어 가면서 내리막길로 치닫는다. 바벨론 제국의 문을 연 느부갓네살은 43년 통치를 통해 군사적으로 무서운 힘과 엄청난 건축사업을 일으켰으나 그가 죽자 쇠퇴의 길을 걸었다. 느부갓네살2세(B.C.605~562)의 아들 아멜-마르둑(Amel-marduk, B.C.562~560)이 2년간 다스렸고, 아벨-마르둑을 살해한 마르둑의 매부 네리글리살(Neri-Glissar)과 네리글리살의 아들 라바시 마르둑(Labashi-marduk,B.C.556)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신하들에게 암살당한 후 느부갓네살의 집안이 아닌, 하란출신 귀족의 아들로 매우 유능한 통치자로 평가받는 나보니두스(Nabonidus,BC 555-539)가 왕권을 차지했다. 느부갓네살과 바벨론 백성은 ‘마르둑‘ 신을 섬겼으나. 나보니두스는 ’신(Sin)‘을 섬기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나보니두스의 아들 벨사살 때 1000명을 초대해 잔치를 열 때 사람의 손가락이 글씨를 쓰면서 그날 밤 벨사살이 죽고 바벨론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에게 멸망했다(단5:29~30).

 

 

 

<신 바빌로니아 제국>

바빌로니아(Babylonia)는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고대 왕국으로, 이전 시대의 수메르 지방과 아카드 지방을 아우르며,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 사이 메소포타미아구약성서기원전 23세기아카드

 

바빌로니아는 수메르인과

고대 바빌로니아

 

원전 20세기경, 우르 제3 왕조에 의한 수메르의 부흥 이후에, 유프라테스 강서쪽으로부터 온 셈어족아모리인이 메소포타미 이후 약 100년간은 메소포타미아지방은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고, 이신(Isin)이 가장 강력한 도시였으나, 아모리인의 도시인 바빌론고대 바빌로니아로 분류한다.

 

빌로니아인들은 시리아가나안등지의 여러 서부 도시들과 정기적인 무역을 하였고, 바빌로니아에도 무역을 위한 아모리 도시 바빌론은 여섯 번째 통치자였던 함무라비왕 때에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인들은 왕을 신 마르둑(Marduk)의 대행자로 믿었고, 바빌론 바빌로니아가 일어난 뒤로 대대적인 문예 부흥이 일어났다. 이 첫 번째 바빌론 왕조의 가장 큰 업적은 법전의 편찬이다. 엘람인을 추방하고 왕국이 정착한뒤 함무라비의 지시로 만들어진 이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 수사 바빌로니아의 잘 훈련된 군대는 이신, 엘람, 우루크등의 도시국가와 강력한 마리 지중해

 

카사이트 왕조

 

고대 바빌로니아의 14번째 왕은 샘수-다이타나(Samsu-Ditana)였다. 기원전 1595에, 히타이트왕 무르실리 1세(Mursili I)에 의해 약탈당한 이후에, 그의 치세는 카사이트 카사이트왕조는 바빌론

외세의 지배는 비슷한 시기 힉소스인이 이집트 아슈르의 고위 성직자들은 스스로를 아시리아

이 시기에 대부분의 신성한 왕권을 부여받은 솀족 왕들은 바빌로니아에서 사라지고, 카사이트 군주들에게는 신의 지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바빌론

 

신바빌로니아 제국

이 부분의 본문은 신바빌로니

아시리아 아시리아는 때로는 더 많은 특권을 부여하고, 때로는 군사적으로 제압하면서 지배력을 유지하였으나, 결국은 기원전 627, 아시리아의 마지막 통치자인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의 죽고 다음 해에 바빌로니아의 칼데아

 

기원전 612메디아(Medes)인과 함께, 니네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의 뒤를 이은 네부카드네자르 2기원전 585페니키아를 정복하는 등, 다시 한 번 바빌론 [1]그의 연대기는 기원전 567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Nabu-na'id)와, 키로스하란의 달의 신전 복원에 관련된 석판, 키루스의 선전포고 등이기원전 549년, 나보니두스 6년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안샨의 왕이라고 불리었던 엘람의 키루스는 그의 영주이자  의 왕이었던 메데스의 아스티아게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아스티아게스

3년 뒤 키루스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고, 메소포타미아 벨샤자르(Belshazzar또는 Belsharutsur)에게 군권을 맡겼다.

 

기원전 539 키루스 2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으로 도망쳤으나, 고브리야스(Gobryas)에 계속해서 쫓기어 시파라(Sippara)가 항복한 지 이틀 뒤에, "키루스의 병사들이 싸우지 않고 바빌론

키루스는 10월(Marchesvan) 3일까지 도착하지 않았고, 고브리야스(Gobryas)가 그를 대신하다가, 바빌론 캄비세스 2

키루스의 바빌로니아 공격은 의심할 여지 없이 내부의 분열과 유대인

키루스가 죽기 1년 전인 기원전 529, 그는 그의 아들 캄비세스 2

 

이후 다리우스 1(Darius Hystaspis)가 페르시아 왕권을 장악하고, 페르시아를 조로아스터의 대리인으로 다스리게 될 때까지, 바빌론

다리우스가 죽은 뒤, 바빌로니아는 니딘타-벨 왕 (네부카드네자르 3) 때에 잠시 동안 독립을 회복했다가(기원전 52110월 ~ 520

 

 

몇 년 뒤(기원전 514년추정) 바빌론의 아라카에-사길라는 계속해서 보수되면서 바빌로니아의 상징으로 유지되지만, 마침내 바빌로니아의 새 수도 셀레우키아

첫째로 벨사살 왕의 역사성

 

다니엘 5장에서 바벨론 왕 벨사살이 큰 잔치를 베푼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역사 가들은 벨사살 왕이 과연 역사적으로 실제 했던 인물인가에 대해 의심해 왔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여러 문헌에 의하면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였으며, 바벨론 왕의 역대 왕들 중에 벨사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다니엘서 5장에서 만 언급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이 역사적인 실제 인물이었으며 바벨론 제국 멸망 당시 그 가 바벨론을 통치한 왕이었다는 사실이 고고학적 증거들을 통해 분명히 증거되었습니다.

 

벨사살이 가공의 인물이 아닌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임을 확증된 것은 1854년 한 영국 영사 가 바벨론 왕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5-539)가 옛 바벨론의 갈대아 우르 지역의 수호신 인 ‘달의 신’에게 바치기 위해 우르에 세운 신전의 폐허 속에서 몇 개의 조그만 점토 기둥들을 발 굴함으로써 였습니다. 그 기둥들에는 가로 세로 10cm 정도의 정방형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글의 내용은 나보니두스와 그의 큰 아들의 건강과 장수를 신께 기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바벨론의 왕인 나 곧 나보니두스가 당신께 죄를 짓지 않도록 해 주소서. 그리고 나의 장남이며 사랑하는 아들인 ‘벨사살’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이 있게 하소서.’라 했습니다. 한편 1854년 이후에 벨사살에 대한 바벨론의 문헌들이 더 발견 되었는데, 그 때마다 벨사살의 왕자 또는 왕의 아들로만 언급되었고, ‘왕’으로서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비문에서 벨사살이 비록 법적으로 왕위를 계승 받지는 못했지만 그 부친 나보니 두스와 바벨론의 공동 섭정을 하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바벨론의 최고신인 ‘벨’ 또는 ‘말둑’이라 불리우는 신보다 다른 도시 즉 하란과 우르의 수호신인 ‘달의 신’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괴짜 나보니두스 왕은 BC 555년에 등극한 지 3년이 되던 때부터 실제 통치권을 자신의 아들에게 맡겨 버리고 바벨론을 떠나 아라비아의 테이마(Teima) 라는 오아시스 주변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그가 바사 왕 고레스 2세와의 전투에서 패한 후 실의에 빠져 그곳에서 은둔 생활을 했을 것으로 봅니다. 한편 이런 사실이 다니엘이 어떻게 바벨론 제국의 셋째 치리자가 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즉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정식 왕이었기 때문에 그의 지위가 첫째이고 벨사살 자신은 섭 정왕으로서 둘째 가는 자리에 있었고 따라서 다니엘에게 나라의 셋째 가는 자리를 줄 수 밖에 없 었던 것입니다. 한편 바벨론 제국의 메대-바사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인 BC 539년에 나 보니두스가 바벨론으로 다시 돌아왔었습니다. 그러나 아들 벨사살에게 실제 왕권을 내어 주지 않 았습니다. 다니엘서5장에서 벨사살이 메대바사 연합군에게 죽게 되고 나보니두스 왕은 메대바 사 연합군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볼 때에 다니엘서의 벨사살이 다니엘이 허구의 인물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 고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이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비록 바벨론 여러 문헌에 벨사살이 법적 인 왕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고고학 자료들은 그가 실질적인 통치자였음을 분명히 증거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기록 의도가 역사적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가 아닐지라도 반대로 역 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같은 성경 기록의 역사성은 성경 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한번 확 증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벨사살의 연회와 하나님 모독사건 (1-4)

 

이제까지 우리는 다니엘 1장에서 다니엘의 바벨론 왕실에서의 성장 배경, 제 2-4장은 느부갓 네살 왕 통치 당시의 주요 사건들과 왕의 꿈을 통한 간접적인 묵시들을, 그리고 본 제 5장은 느 부갓네살왕이 죽은지(BC 562년) 약 23년 후인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BC550-539년)의 통치 말기에 있었던 신비한 손가락이 나타나 왕궁 벽에 글씨를 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반 역사의 기록에 나타난 느부갓네살 이후의 바벨론 왕들의 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느부갓 네살(BC 604-562), 그이 아들 에윌므로닥 (또는 아벨말둑BC 562-560), 에윌므로닥은 살해 됩니다.

 

다음 왕으로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네르갈 사레셀이 왕이 됩니다. 네르갈 사레셀(또는 네 리 글리솔BC 560-556), 다음으로 네르갈 사레셀의 아들 라보로 소알후드(또는 라바시 말둑 BC556)는 왕이 된지 8개월 만에 암살되어 죽고 느부갓네살의 다른 사위인 나보니 두스(BC 556-539년)가 왕이 됩니다. 나보니 두스의 아들이 벨사살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벨사살의 외 할아버지입니다

「나보니두스와 벨사살」(Nabonidus and Belshazzar, R. P. 도허티, 1929년)이라는 책에서는 벨사살의 어머니는 니토크리스였고 니토크리스는 느부갓네살(2세)의 딸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합니다. 만일 사실이 그러하였다면 느부갓네살은 벨사살의 외할아버지였던 셈입니다.

 

고대 근동 국가에서 왕들이 잔치를 배설하고 귀족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 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이 베푼 연회는 정상적인 연회가 아니라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방탕한 것이 었습니다. 왜냐하면 벨사살이 연회를 열고 있을 당시는 바사와 고레스 2세가 바벨론 제국을 다 점령하고 수도인 바벨론 성을 2년 동안 포위하고 있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날 밤에 벨사 살 자신이 죽게 될 그런 급박한 상황에 잔치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벨사살은 자신의 생 명과 나라의 존폐가 경각에 달려 있는 위태로운 시기에 자신의 악함과 어리석음을 온 세상에 드 러내려고 한 듯이 술에 취하고 방탕하는 비 정상적인 대 연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귀인 일천명을 불러 모아 잔치를 합니다. 멸망해 가는 제국이었지만 여전히 이 정도의 연회를 열 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에 의하면 식민지로부터 들여온 각양의 좋 은 것들을 엄청나게 쌓아 두었기 때문에 바벨론 성이 포위되더라도 20년은 견딜 수 있었다고 합 니다. 당시 바벨론 제국은 이미 고레스에게 계속 패하여 수도인 바벨론 성까지 밀려 포위되어 있 었습니다. 패전이 거듭되면서 타지에서 바벨론 성으로 도피해 온 귀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벨론이 마지막까지도 그런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 니라 그 많은 사람들 중 왕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간언하는 자가 전혀 없었을 만큼 바벨론의 상류 층 전체가 패역하고 부패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한 나라가 멸망할 시기가 가까울 때에 자연 스럽게 나타나는 말기적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벨사살이 잔치를 할 때에 하나님의 전의 기명들로 술을 마시는 지극히 불경스러운 행동을 한 것 은 술에 취해 취기로 한 행동이 아니라 벨사살이 불경을 저지른 핵심 원인은 부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증거된 여호와가 세계 역사의 절대 주권자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자신의 권세가 절대적이며 고레스의 공격으로부터 바벨론을 얼마든지 수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과시하기 위 한 지극히 교만된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족들과 왕 후들과 후궁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더라. 4그들이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여기서 금은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이란 바벨론의 온갖 잡신 들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이 잡신들을 찬양하며 술에 취했다는 말을 통해 고성방가하며 음란한 행동을 자행하는 광란의 광경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벨사살과 일천의 귀인들이 이럴 때에 왜 하필이면 하나님 전의 기명들을 가져 오게 해서 술을 마시며 우상들을 찬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고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사탄 은 개인이나 국가를 망하게 하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려고 발광을 합니다.

 

셋째로 왕궁 벽에 나타난 신비한 손가락(5-16)

 

‘5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 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그 때에 무리가 술에 취해 성전 기명 모독, 음주, 향락 등 점차 광적인 향락 상태로 고조되어 가던 그들의 악행이 우상숭배로 절정에 이르렀던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궁극적 원인이 절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도전한 데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줍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 편의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 것을 보고 왕이 얼굴 빛이 변하고 번민하여 넓적다리가 녹는 듯 하고 무릎이 서로 부딪칩니다. 세상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촛대 맞는 편 흰 분벽 위에 있는 글을 촛불로 인해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때에 벨사살이 공포에 싸여 소리질러 말하기를 바벨론 박사들을 불러 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들이 왕 앞에 서자 왕이 말하기를. "저 글을 읽고 뜻을 풀어주는 사람은 자주색 도포를 입혀 주고 금목걸이를 걸어주며 이 나라에서 셋째 가는 높은 자리에 앉혀주리라." 제일 먼저 불러들인 사람 들은 바벨론 박사들이었습니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징계로 정신 이상으로 일정 기 간 동안 왕위에서 쫓겨났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건을 예언하였던 다니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벨사살이 어째서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믿을 만 한 다니엘을 부르지 않았으며 태후의 깨우침이 있은 후에야 다니엘의 존재를 기억하게 되었을까 요

 

벨사살은 유대 사람을 경멸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왕권이 바뀌면서 다니엘과 유대인들을 질투 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벨사살 왕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벨사살 정권 하에서는 다니엘이 실권에서 물러났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연회에 참석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사람을 경멸하였고 유대의 하나님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왕의 박사들이 다 들어 왔으나 역시 한 사람도 그 글을 알거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박 사들이 홀연히 나타난 손가락이 쓴 글자를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과 공포가 급증했습니다. 연회 에 초대된 귀인들도 혼비백산하여 놀라 동요하고 혼란에 빠져 그리하여 흥겨움으로 인해 소란 하고 떠들석 하던 분위기는 멈추어지고 연회장은 갑자기 불안감으로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의 박사들이 그 글을 해석하지 못하자 분위기는 완전히 동요와 혼란의 상태에 이르렀습 니다. 이 때에 태후가 소란한 연회장에 대해 듣고 연회장으로 들어 왔습니다.

 

이 태후는 본래는 연회장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벨사살왕의 왕후들과 빈궁들이 잔치에 참여했다고 했으니 벨사살 왕의 왕비는 아닙니다. 아마도 벨사살의 어머니 왕후일 가능성이 큽니 다. 어머니 태후는 아버지 나보니더스의 아내로서 바벨론 궁에 있지 않고 남편을 따라 테이마 (Teima)에 머물고 있다가 나보니더스가 이 때쯤에는 바벨론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비가 다니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다니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 아 그녀는 느부갓네살의 딸인 나보니더스의 아내요 벨사살의 어머니인 니토그리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후가 이 일로 번민하거나 얼굴이 파래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태후는 다니엘을 불러 글자 를 해석하게 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 람이라고 다니엘을 벨사살 왕에게 소개합니다.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 때에 있었던 자인데 다 니엘은 신들이 가지는 지혜를 가진 자요 느부갓네살 왕이 바벨론의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 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벨드사살이라 이름을 가진 이 다니엘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다니엘의 바벨론 식 이름인 벨드사살과 왕의 이름인 벨사살이 비슷하 고 뜻도 비슷합니다. 다니엘은 본래 히브리식의 이름이며, 벨드사살은 궁중 교육 시절에 환관 장으로부터 받은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벨드사살이란 뜻은 ‘벨 신이여 그의 생명을 지키소서.’ 이며 벨사살의 뜻은 ‘벨 신이여 왕을 보호하소서’입니다. 이렇게 해서 벨사살이 다니엘을 불렀 습니다. 그리고 묻기를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고 묻습니다. 다니엘을 향한 벨사살의 말이 참으로 밉살스럽습니다. 태후의 소개로 불러들인 다 니엘에게 질문하는 벨사살의 태도가 몹시 거만합니다. 지금 벨사살에게 중요한 것은 다니엘의 출신이 아니라 바벨론의 그 누구도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분벽에 쓰인 글자의 의미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다니엘의 출신을 거론함으로써 은연 중에 포로 출신의 노인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오만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편 이 대화에서 밝혀진 것은 벨사살이 이제야 다니엘과 첫 대면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2그분의 아들이신 임금님께서는 그것을 다 아시고도 겸손해지기는커녕 23오히려 하늘의 대 주재를 거역하시고..’ 22절에서 보여 주듯이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 시대에 행하였던 다니엘의 행적들을 다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벨사살은 이제야 다니엘과 첫 대면을 한다는 것은 그 가 다니엘을 얼마나 경원시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은인이요 느부갓 네살이 정신병으로 권좌에서 쫓겨 났을 때에 왕의 자리를 지키고 나라를 지킨 일등 공신을 이제 야 만난다는 것은 벨사살이 얼마나 무능하고 어리석은 인간인가를 보여 줍니다. 지혜자는 지혜자 를 찾아 가까이 해야합니다.

 

‘16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푼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려 주면 네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걸어 주어 너를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리라 하니’

 

넷째로 왕궁 벽에 쓰인 글자를 다니엘이 해석(17-29)

 

‘17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 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뢰리이다.’ 다니엘은 벨사살 왕이 제공하겠다 한 상을 마다한 이유로서 세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다니엘 은 본래 재물이나 권세에 얽매이지 않고 청렴 결백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다니엘 자신이 세상 의 재물이나 권세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말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입니다. 셋째로 바벨론은 하루 밤만 지나면 멸망할 것이므로 왕이 주는 상은 하루 밤 만에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왕에게 글의 내용을 알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18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 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에서 다니엘은 먼저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징계로 정신병에 걸려 폐위되었다가 하나님의 주 권과 위엄을 알게 된 후 다신 회복되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느부갓네살 시대의 융성을 허락하 신 분이 벨사살 왕이 그토록 경멸하는 유대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며 교만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왕을 폐위시켰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느부갓네살 왕의 행적에 대해 벨사살 왕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그것이 분벽의 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필연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처럼 그 보다 더 교만한 벨사살에 대한 심판도 필연적임을 교훈하기 위해서 입니다. 벨사살은 하늘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성전의 기명을 가지고 술을 마시고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신상들을 찬양하면서 벨사살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함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가락을 보내 심판을 선언하시고 있다고 했습니다.

 

‘25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 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에서 ‘메네’라는 문자적인 의미는 ‘그가 세어서 끝나게 했다.’고 다니 엘이 풀이 했듯이 하나님께서 기간을 세어서 바벨론 왕국을 멸망하도록 하였다는 의미인데 메네 메네를 두번 반복함으로써 반드시 속히 될 것을 보여 줍니다. 데겔은 문자적으로 ‘너는 저울질을 받았다’ 또는 ‘너는 너무 가볍다’라는 뜻입니다. 베레스는 히브리음으로 페레스 ()인데 이 단 어의 복수형은 ‘파르신()입니다.

 

이것을 한글 음역에서는 ‘바르신’으로 음역하였는데 그 앞에 ‘그리고’ 또는 ‘그러나’ 라는 뜻을 가 진 접속사 ‘우’가 결합되어 25절에서는 ‘우바르신’이라고 표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25절의 ‘우 바르신’과 28절의 ‘베레스’는 복수와 단수라는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 동일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복수와 단수 사이에 의미상 큰 차이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양자는 동일한 단어 로 취급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바르신’은 또한 ‘바사인’이란 뜻도 가지고 있고 ‘나누다, 조각을 내다’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사가 바벨론을 멸망시킨 사실과 오묘하게도 연결되고 있습니다.

 

‘29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에서 다니엘의 해석이 벨사살 왕 에게 아주 불리했지만 일천명의 귀족들 앞에서 한 약속이기에 자신의 제안대로 다니엘에게 상금 과 셋째 치리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벨사살은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합니다.

 

다섯째로 왕궁 벽에 쓰인 글자 예언의 성취(30, 31)

 

‘30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 였더라.’

 

여기서 우리는 신 바벨론제국의 멸망과 멸망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성경의 놀라운 예언을 알아보 겠습니다. 바벨론은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해 왔습니다. 최초 바벨론은 니므롯이 창시자 였으며, BC 18세기, BC16세기의 고대 바벨론은 함무라비왕 때 가장 왕성했습니다. 그 이후에 점점 약해져 앗 수르에 멸망을 당합니다. 바벨론은 멸망은 했지만 일부가 살아남아서BC 626년 나봇폴라살은 갈 대아인을 모아 신 바벨론을 건설합니다. 그 아들 느부갓네살 왕 시대에 와서 바벨론제국은 강대국 이 됩니다. 바벨론제국의 성은 시날평야의 유브라테스강을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바벨론성은 유 브라테스강이 한 가운데로 흘렀고 바벨론성에 도착한 유브라테스강은 세 갈래로 나누어져 흘렀습 니다. 한 줄기는 바벨론성 안으로 흐르고 두 줄기는 바벨론성 주위를 감싸고 돌아서 흐르게 하였습 니다. 이렇게 한 것은 누구도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성벽의 두께가 30m인데 이 30m는 10층 건물 높이 입니다. 성곽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집니다.

성벽의 높이는 약120m인데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고 성벽 둘레로는 유브라테스강이 흘렀습 니다. 성벽의 흙은 해자를 판 흙으로 벽돌을 구워 만들었고, 성벽의 벽돌은 콜타르를 사용했습니 다. 성벽 위에는 양쪽에 가옥들이 마주 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양편 가옥들 가운데 4두마차가 지나갔습니다. 정말 대단한 바벨론 성의 규모입니다. 바벨론 도성은 성안의 집들이 3-4층 건물들 이 밀집되도록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난공불락의 성이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 습니다. 그렇다면 난공불락의 바벨론성이 어떻게 해서 무너졌겠습니까

 

바벨론 성이 어떻게 쉽게 무너졌는가 하면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 성을 공격하려고 왔는 데 성벽의 높이도 문제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성주위로 돌아 흐르는 급한 물살이었습니다. 고레스 왕이 유브라데스 강물을 건너다가 자신의 마차를 끄는 말 중에 아주 아끼던 백마(神馬)가 물에 휩 쓸려 죽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고레스가 말하기를 '내가 이 강물로 하여금 '여자들이 무릎을 적시지 않고도 건널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맹세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군사들을 시켜서 강 양쪽에 180갈래 로 나누어 유브라데스강의 물줄기를 360갈래로 나누었습니다. 이런 고레스의 대단한 고집과 집 념으로 강물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그 동안 보이지 않던 성안으로 들어가는 유브라데스의 강줄기가 보인 것 입니다.

 

그곳으로 군사가 들어가면서 바벨론 성이 힘 없이 함락되었습니다. 벨사살왕은 적이 성안으로 들 어오는 줄도 모르고 주색잡기에 정신이 없다 보니 힘 한번 쓰지 못하고 그 화려했던 바벨론 제국은 한 순간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성경에 예언되었습니다. 고레스가 바벨론 성을 무 너뜨릴 것을 성경은 이미 고레스가 태어나기 전에 고레스란 이름을 지어주고 고레스의 앞길을 평 탄케 해주겠다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44장 26절~28절에,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 구시키리라 하며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유브 라데스 강물이 마르리라),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 하리라.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45장 1절~4절에,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 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이렇게 신 바벨론제국의 멸망과 멸망의 과정이 페르시아 고레스왕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렇게 할 일들을 예언한 성경은 확실한 예언입니다. 바벨론성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을 이미 성경은 그 방법을 기록했습니다. 유브라데스 강 물줄기를 막아서 마르게 하고 다른 곳으로 돌릴 것을 고레스가 태어나기 전에 예언했습니다.

 

바벨론제국이 멸망함으로써 느부갓네살에게 보이셨던 신상의 꿈을 통한 예언의 일부와 벨사살 과 그 신하들에게 나타난 손가락으로 쓴 글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바벨론 제국 은 완전히 멸망하고 이제 은으로 된 가슴과 팔, 곧 메대 바사 제국이 세계를 제패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바벨론을 정복하고 벨사살 왕을 죽인 왕이 바사의 고레스인 줄 알았는데 난데 없이 메 대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다고 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고레스와 다리오의 관계를 알아 보기 로 하겠습니다. 이 다리오는 역사학자들이 메대 나라의 다섯번째 왕인 카악사레스 2세로 봅니 다. 카악 사레스 2의 아버지인 아스티아게스 왕은 슬하에 두 남매 카악사레스와 딸 만데인을 두었는데 만데인을 바사국왕 캄비세스와 결혼시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고레스 2세입니다.

 

한편 부왕 캄비세스 시대는 바사국이 메대국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레스가 왕이 된 후 에 자신의 외 할아버지인 메대 왕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선언하고 그로수스, 앗시리아와 메대 나라의 상당부분까지 정복했습니다. 이때에 카악사레스 2세와 고레스가 연합 할 때는 메대와 바사가 동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메대가 바사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 었습니다. 그러나 고레스는 카악사레스 2세의 딸 과 결혼하여 양국 간에 결혼동맹을 맺고 자신 은 계속하여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자신의 외 삼촌이자 장인인 카악사레스 2세인 다리오를 존중하여 메대-바사 과도 제국의 왕으로 추대 하였습니다. 그것이 다니엘 5:31의 내용입니다. 그 후 고레스는 2년 후 모든 정복 전쟁을 결론 짓고 정식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 때가 BC 538년이요 그 해에 유다를 고토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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